열처녀 비유

 

1986. 3. 26. 수새벽

 

본문:마태복음 25장 1절∼13절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열 처녀 비유는 아주 유명한 비유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비유는 거의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있는데, 이 열 처녀 비유에는 슬기 있는 사람과 미련한 사람 이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슬기 있는 여인들은 기름을 예비했고 슬기 없는 여인들은 기름을 예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낮에 오든지 초저녁에 왔으면 다 영접할 수 있습니다. 거게는 신랑을 영접할 때에는 반드시 등불을 들고 영접을 하지 등불을 들지 않고는 영접 못 하는 것인데 이 슬기 있는 처녀들은 기름을 많이 준비했고, 그릇에 기름을 준비했고, 그저 미련한 처녀들은 바로 기름을 그릇에다가 준비하지 못하고 그저 등경에 기름만 넣어 가지고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신랑이 하마 올까 올까 해 가지고서 이렇게 기다렸는데 더디 오니까 그만 등에 있는 기름이 다 달아서 얼마 남지 안했습니다. 그랬는데 신랑이 온다고 맞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등불을 켜 들라고 하니까 등불이 켜지기는 켜졌지마는서도 기름이 적으니까 꺼져간다 이랬습니다. 등불이 꺼져간다. 꺼져가니까, 꺼져간다 하는 것을 보면 등불을 가지기는 가졌는데 그 등불이 기름이 없어서 켜졌다가 그만 꺼져간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슬기 없는 자들이 말하기를, 신랑이 오는 데에는 등불을 들어야 되는데 이 등불이 꺼져가니 이거 큰 문제가 났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좀 기름을 나눠 달라 이렇게 또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기름을 나눠 줄 수가 없다. 우리가 가진 이 기름은, 내가 가진 기름은 내나 쓰지 너거 나눠 줄라 하면 너거도 모자라고 나도 모자라고 둘이 다 기름이 모자랄까 하니까 나눠 줄 수가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기름이 적다는 말입니다. 둘이 나눠 주기에는 적고 자기 혼자만 쓰기에 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기름 파는 자에게 가 가지고 기름을 사라 이러니까 그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 사러 가느라고 급하게 가 가지고서 당황하게 갔습니다. 갔지마는 갔다가 와 보니까, 기름은 사 가지고 왔는지 안 사 가지고 왔는지 그 말은 여기 없습니다. 없으나 와 가지고 문을 열어 달라 이라니까 안에서 신랑이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를 못한다 하면서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를 못하느니라」 이랬습니다.

그러면, 이 슬기 있는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의 같은 점이 어떠하며 다른 점이 어떠한가? 같은 점을 우리가 거기서 또 한번 찾아 봅니다. 첫째로 처녀성이 같습니다. 다 처녀들입니다. 또 둘째로는 다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셋째로는 그들의 소망이 신랑에게 있습니다. 또 네째로는 그들이 다 등을 가졌습니다. 또 다섯째로는 그들이 다 등불을 켰습니다. 또 여섯째로는 그들이 다 밤중을 같이 만났습니다. 또 일곱째로는 신랑이 오니까 맞으라 하는 소리를 다 같이 들었습니다. 또 그들이 신랑을 맞이할라고 등불을 지금 켜서 들었습니다. 둘 다 등불을 켜서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는 기름을 예비해서 신랑 오는 그때에 불이 반짝반짝하게 밝았고, 그뭐 밤중이라 하니까 밤중에 어두움이 강하게 몰아쳐 오지마는서도 이들은 기름을 가졌기 때문에 그 어두움이 이 신랑 맞이하는 자들에게 어두움을 주지를 못하고 어두움을 다 극복하고 반짝반짝하는 그런 등불을 환하게 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련한 처녀들은 등불을 켜기는 켰지만서도 기름이 없으니까 등불이 꺼져가고 있다 이랬습니다. 꺼져가고 있다. 등불이 꺼져가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는 등불이 꺼져가고 있고 하나는 등불이 환하게 밝게 있고 거게서부터 이제 다릅니다. 그 전에는 꼭 같았는데 거게서부터 다릅니다. 등불이 밝은 자는 기름을 예비해 가지고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갔고 이 미련한 처녀는 등만 들고 갔지 기름을 딴 그릇에 예비하지를 못했습니다. 이러니까, 다른 것은 기름 예비하고 안 한 것이 달랐고 또 등불이 꺼져가고 등불이 환하게 밝게 되어 있고 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자꾸 달라집니다.

달라서, 이 미련한 처녀들도 신랑을 맞이해서 혼인 잔치에 들어가야 되겠다고 해서 문 열어 달라고 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갈라고 아주 이 욕망으로서 문 열어 달라고 야단치는 그것도 같습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도 신랑 맞이해 가지고 신랑 방에 들어갈라고 하는 것이고, 들어간 것이고, 이들도 들어갈라고 했습니다.

기름이 없어 들어가지 못했지 들어갈라고 하기는 했다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 슬기 있는 자들은 신랑의 혼인 잔치에 가서 그 즐거움을 같이 누렸지마는 이 미련한 처녀들은 그만 기름 사러 갔다 오는 동안에, 기름을 사 가지고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지마는. 기름이 필요 있다는 그런 걸 느꼈습니다.

느꼈기 때문에, 이때는 기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급하게 기름 준비할라고 애를 써서,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은 또 그들이 알았습니다. 문을 열어 달라 하니까 기름을 사 가지고 와서 불을 켜 가지고 문 열어 달라고 한 것인지 기름을 가지고 오지 못하고 문을 열어 달라고 한 것인지 그것은 자세히 모르나 신랑은 문을 열고 다 들어갔는데 밖에서 지금 합니다.

신랑을 맞이해 가지고 혼인 잔치에 들어갈 고 기회는 지나가 버렸습니다. 등불을 들고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그 기회는 그만 기름 없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와 가지고서 신랑을 맞이할라고 애타하면서 문 열어 달라고 자꾸자꾸 호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벌써, 여게 요런 말 있습니다. 10절에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이랬습니다. 벌써 문이 닫혔습니다. 문이 닫혔으니까 벌써 기회는 지나갔습니다.

신랑을 맞이해 가지고서 혼인 잔치에 들어갈 고 기회는 지나갔다 말이오.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이러니까 혼인 잔치에 들어갈라고 주님에게 열어 달라고 그렇게 호소를 했습니다.

하니까,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신랑을 맞이해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갔으면 되는데 문 열었을 때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문이 닫힌 뒤에 아무리 해도 그만 그 다음에 문을 열어 주지를 안했습니다. 이러니까, 요 비유를 하시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으라」 한 것은 깨어 있으면 될 수 있고 깨어 있지 안하면 안 되고, 깨어 있으면 되고 깨어 있지 안하면 안 되고, 예비하면 되고 예비 안 하면 안 되고 하는 것으로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이 비유를 우리에게 주셨는고 하니 주신 목적이, 이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어데 있는고 하니 깨어 있으면 된다. 자면 안 된다. 깨어 있어야 된다. 또 미리 예비하면 된다. 미리 예비하지 안하고 사건을 당하고 난 다음에 그때사 기름 준비할라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미리 준비해야 된다. 이것을 이 교훈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어 예비한 사람은 다 이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예비하지 아니한 그런 슬기 없는 자들은 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교훈의 목적이 어데 있느냐 하면은 깨어 있는 거 또 예비해야 된다는 거 이것이 이 교훈의 중점입니다.

깨어 있어야 되고 예비해야 된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안 된다, 기회 놓치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을 또 말합니다. ‘벌써 문은 닫힌지라’ `이미 문은 닫힌지라’ 닫히고 나니까 그 다음에 말도 합니다. 문 열어 달라고 말도 했고 문 열어 달라는 말을 신랑이 듣기도 들었고 또 열어 주지는 안 했고 열어 달라고도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이랬는데, 이 비유를 오늘까지 전통이 모든 세계 있는 기독교가 다 이것은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구원받는 성도들이요 미련한 처녀는 구원 얻지 못하는 처녀들이라 이렇게 오늘까지 전통이 돼 내려옵니다.

그러면, 미련한 처녀는 다 지옥 간 처녀들이요 슬기 있는 처녀들만 천국 간 처녀들이라 이래서 이 다섯 처녀는 다 멸망이요 다섯 처녀만 구원 얻었다 하는 것이 오늘까지 세계 교회들이 성경보고 깨닫고 그렇게 주장을 하고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 내려오는 이 비유인데 이 비유를 어떤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르지마는서도 어떤 사람들이 이것은 슬기 있는 다섯 처녀나 미련한 다섯 처녀나 다 구원은 얻는 사람들이다. 다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 구원에 영광이 없고 다섯 처녀는 구원에 영광이 있다. 그러니까 영광에 차이가 있고 구원에 차이는 없다. 그러니까 기본구원에 차이는 없고 건설구원에 차이는 있다 이렇게 해석을 깨달음을 가지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구원을 나눌라고 할 때에는 이것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나누지 안하면 이것을 똑똑히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필요 없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도를 복잡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필요 없는 말은 우리는 안 만들어 내야 됩니다. 암만 구원 얻는 데에 필요 없는 말, 그 말이 아니면 안 될 때 그말을 만들어 내야 되지 그말이 아니라도 될 수 있는데 제가 새 말을 만들어 가지고 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것이요 고 속에는 악이 들어서 하는 것이요 또 복잡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도를 어지럽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요 단어가 아니면 구원 도리를 밝히 증거할 수가 없어서 요 단어를, 요 단어를 내놓지 않으면 구원의 도리를 밝히 가르칠 수 없어서, 없어서는 안 될 단어를 만일 발견해서 만들어 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주님이 칭찬을 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기에, 구원도 두 가지로 나누지 안하면 우리가 성경 해석을 못 하겠고 우리 구원을 바로 구원 도리를 가르치지 못할 그런 곳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그것을 할 수 없어 발견해 가지고 이것은 아무래도 ‘요것은 기본구원이다’ 성경에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 또 모래 위에 세운 집이라, 이런 건설구원 이것은 건설구원, 기본구원 아니고.

이거는 너희들의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들에게 주신 구원이다 하는 것은 이건 기본구원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예택해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도록 이렇게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이 일을 작정을 해 가지고서 구원을 주셨다. 그러면 이 구원은 이것은 보니까 요동 없는 거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영원한 때 전부터 있는 구원이 있는데 이 구원은 사람들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이 있고, 이 구원은 보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가 아니고 현재에 그 사람의 행위를 따라서 구원 되는 이 구원이 있구나, 그러면 행위를 잘못 하면 구원이 없고 행위를 바로 했으면 구원이 있고 이 구원이라는 것이 사람의 행위에 상관없는 구원이 있고 사람의 행위에 근거돼서 행위대로 구원되는 구원이 있구나. 그러면 이 구원이 두 종류로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 때에 아무래도 이 구원이 두 종류가 있으니 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이것을 똑똑히 발표하는 이런 단어가 있어야 되겠다.

이래서,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안하고 영원한 때 전부터,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그저 은혜로 주신 구원이 있으니 이 구원은 기본구원이라 해야 되겠다. 또 자기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되는 구원은 이것은 자기가 있은 지 후에 된 구원이니까 이 구원은 건설구원이라 행위구원이라 해야 되겠다 하고 나서 보니까 성경에, 행한 대로 되는 행위구원이 많고 건설구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우리가, 성경에 이 계시하신 목적이 어데 있느냐 이 성구를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어데 있느냐? 그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거 다 신구약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말씀은 말씀인데, 구원에 대한 말씀은 말씀인데, 구원에 대한 말씀이라 그러면 뭐 틀림이 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대한 말씀이면 이 말씀은 기본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요것으로 또 분리해야 됩니다. 이것을 분리하지 안하면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을 자기는 그만 그것으로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택함 받았으면 다 하늘나라에 구원을 다 얻어 가지고서 그 구원은 꼭 같은 구원이라 이렇게 될 거라 그말이오.

이렇게 본 사람들은 천국은 꼭 같다. 천국의 구원에는 차이가 없다. 천국만 갔으면 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되지 천국에는 차이가 없다 이렇게 봅니다. 이렇게 보고 이래 말하니까 그런 부흥사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는, 그런 강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때에는 뭐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뛰고 즐거워합니다.

어짜든지 우리는 우리가 행함으로 말미암지 안하고 순전히 은혜로 된 구원인데 하나님이 택해 주셔서 구원 얻었고 택해 주지 못한 사람은,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 얻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택함 받아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구원 얻었으니까 참 기쁘고 즐겁다 이라니까 뭐 공짜배기로 얻으니까 그만 기쁘고 즐거워서 마구 춤을 춥니다.

저 거창 시찰회에 어떤 목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때 대인기였습니다.

대인기였는데, 여게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산기도 가고 없구만. ○○○ 집사님이 있으면 잘 아는데. 협천 사람이라 잘 아는데. 그래 모두 춤을 추고 그분이 부흥회만 인도하면 온 교인들이 기뻐 즐거워하고 다 춤을 추고 감사하고 그래 모두 기뻐서 교회도 잘 나오고 열심히 나옵니다.

그랬는데 또 어떤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또 그 사람이 부흥회를 열고 나면은 모든 사람들이 와 가지고서 그만 죽을 지경입니다. 그만 근심 걱정에 빠져 가지고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그만 울고 불고 야단이 나고 또 그 집회는 참석하면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참석하면 그만 어깨가 축 쳐져 가지고서 머리를 쿡 숙이고 그만 머리를 들지를 못하고 숙이고 고통을 당하고 또 울고 불고 야단이 난다. 그러니까 그 부흥회가 둘이 아주 정반대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거 참 문제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이 강사가 인도하는 것과 저 강사가 인도하는 것이 차이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교회에 목사들이 강사를 청하는데 이 강사를 청하는 교회도 있고 저 강사를 청하는 교회도 있고 이 둘이 있다 그거요. 둘이 있는데, 그때 저는 집사로 있는 때인데 예수 믿은 지 한 이 년 됐거나 그럴 때입니다. 그런 때인데 거게 대해서 고민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참 감사하고 하는 그런 교인들을 만들 수 있는 사경 인도를 부흥 인도를 할 수 있는가? 그게 부러웠습니다.

부러웠고, 그때에 그 교회에서 오는 사람들은 전부 뭐 옷도 좋은 옷 입고 뭐 기분이 좋아 가지고서 아주 세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거창 함양 협천 이 삼 군이 다 한 시찰 안에 들었었습니다. 이랬는데, 삼 군 교회가 모여 가지고서 또 사경회를 하면은 그만 그 사람들은 그때 대절해 가지고서 이렇게 오는데 전부 천사같이 보고 부러워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은 오면 그만 어깨를 벌리고 이렇게 다닙니다. 이런데 다른 교회서 오는 사람들은 다 모두 푹 서글어져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옵니다.

오는데, 그 사경회를 하고 나서 마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들은 더 어깨가 벌어집니다. 이런데 이 다른 사람들은 와 가지고서 또 푹 삶은 나물과 같이 푹 데쳐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가게 됩니다. 가게 되는데, 그것을 내가 살살 좀 뒤를 좀 따라가면서 살살 알아 봤습니다. 알아 보니까 그들의 공통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그뭐 하기는 하지마는서도 우리ㅡ그때는 그분도 조사였습니다.

목사가 안 되고 조사인데ㅡ우리 조사 같은 조사는 없다. 우리조사만 못 하다.

전부 그러니까 자기네들 조사가 제일이라는 그게 자부심에서 이 어깨가 벌어지고 또 ‘거기 가르치는 게 이것만 가르치지 못한다. 이만침 못 가르친다.’ 그 가르치는 것을 잘 가르치는 교역자를 모셨지 또 가르치고 배우고 보니까 기쁘고 즐겁지 여게는 보니까 그뭐 찡찡한 소리를 해 쌓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듣지도 못하겠지 이러니까 자기 잘난 재미에서 지금 기쁘게 즐겁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내게 의문이 들어왔습니다. 의문이 들어와서 ‘그러면 그분이 어떻게 교훈을 해서 그런가?’ 그것을 내가 그 전도사를 만나 가지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도사는 저 도시 대구에서 아주 큰 교회에 전도사로 있다가 온 사람입니다. 대구에 그때에 ○○교회라 하는 그 ○○교회가 대구에서는 지금도 ○○교회 ○○교회 그 두 교회가 제일 큽니다.

이런데, 그래 물어 봤어. 물어 보니까 그분이 다른 말은 하지를 안하고, ‘왜 그들이 그렇츰 기뻐합니까? 그거 참 그걸 좀 가르쳐 주십시요’ 이러니까, 기쁠 것 아니냐고 하늘나라는 우리가 뭐 어서 떠나서 하늘나라만 가면 그렇게 기쁘고 즐겁고 영광스럽고 이런 행복된 거 하늘나라에 가서 소망된 것을 전부 다 이렇게 말해 주는데 이런 소망이 있고 이렇게 큰 이런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으니까 기쁘고 즐거울 거 아닌가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때 ‘그러면 여게 구원에 대해서 자기 공력이 불타면은 다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고 했고 또 이렇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들어간다는 이 말씀과는 어찌 됩니까?’ 이라니까 그만 그거는 시지부지 말을 안 했습니다.

안했는데, 그 뒤가 어찌 됐느냐? 그 교회는 아주 망하지는 안했지마는서도 그 교회는 팍싹 내려앉아 가지고서 그 교회는 그만 절단나 버렸습니다. 그 교회가 아주 존재가 없습니다. 또 그 교역자가 어떻게 됐느냐 하면은 그때는 이거였는데 차차차차 이래 가지고서 있을 곳이 없어 가지고 배척당했는데 여기에 지금 여게 ○○교회에서 그때에 교회들이 갈라져 가지고 그분을 교역자로 모셔 가지고 교회가 여기 섰었는데 그 교회 선 교회 이름이 무슨 이름인가 그 이름. 지금 아는 사람 있습니까? 망각성이 있어 그런 데 관심 없으니까 몰라. 예. ○○교회. 예, 여기 ○○교회라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있다가 없어졌습니다. 없어지고, 그분이 지금은 어데 가서 목회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는 되기는 됐습니다.

이런데, 이렇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만 들어가면 꼭 동등이라 이렇게 깨닫는 데에서 그렇게 기뻐했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절대 동등이 아닙니다.

그때 제가 여게 부임한 지가 지금으로부터 한 삼십 삼 년인가 사 년인가 됐으니까 한 삼십 년 전입니다. 그때 여기 ○○교회에서 장로 장립식에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그 목사님이 ○○○ 목사님입니다. ○○○ 목사님이라 하면은 그 아주 뭐 ○○ 교파에서 성경을 제일 잘 아는 분입니다.

이랬는데, 그분이 설교하면서 말하기를, 요 옆에 교회에ㅡ내 말은 하지 안하고ㅡ어떤 전도사가 말하기를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도 수치가 있다 부끄러움이 있다, 구원에 벌거벗은 구원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한다고서 그렇게 웃으면서 그 아직까지 철이 없고 깨닫지 못해서 그런 말 한다 하면서 그렇게 말을 해서, 여게 서부교회 교인이 거기 참석하고 와 가지고서 그런 말을 합디다.

그런 말 하는데 그래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고 하나 비웃는 말로 가지고서 그렇게 말을 하더라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또 근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목사님들이 그렇게말하는데 이거 참 하늘나라에 구원은 들어가기만 들어가면 다 영광스럽고 기쁘고 즐겁고 다 이런데 거게도 뭐 수치가 있다 이런 말 했으니까 여게 뒤에 이단으로 또 몰리지 안하느냐? 왜? 나는 이단으로 많이 몰렸던 사람입니다.

제가 ○○신학교 오기 전에, 그때 ○○신학교는 한국에 제일 유명하고 유력하고 곧은 신학교라고 했는데 그 ○○신학교는 거창에 있은 학생들이 오고 하니까 연락이 그래 더러 되는데 제게 배운 것을 자꾸 여기 와서 말한다 말이요, 다르니까. 말하면 여게서 또 정죄하고 정죄하고 정죄해서 마구 그때 정죄를 받아서, 이단이라는 말 그때 안 했어요. 이건 해석이 틀렸다 했지. 이단이라는 이런 참혹한 말은 하지는 안했습니다. 이거 틀렸다 이러니까, 틀렸다니까 ○○신학교에서 틀렸다 하면은 이거는 박살이 나 버리는 건데 이게 자꾸 틀렸다고 하니까 이거 문제라 그말이오.

그래서, 그때에 ○○○목사님이 ○○신학교 교장인데, 저는 ○○신학교 입학을 하지 안했었습니다. 안 하고 처음에 입학은, 제일 처음에 첫학기 ○○신학교가 시작된 그 첫 개학할 때에 개학하는 첫 시간 제가 와서 참석을 하고 입학을 했었습니다. 입학을 했었었는데 와서 한 삼사 일 동안 들어 보니까, 내가 이거 들을 여가가 없다. 내가 지금 전해야 되지 이거 들어야 암만 들어 봐야 들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짓 하고 내가 여게 세월만 허송 세월만 하고 있을 수 없다. 그래 가지고 그때 그만 내가, 퇴학을 해 가지고서 간 사람이 둘 있었는데 내가 하나 퇴학해 가지고 갔고 하나는 ○○○ 조사님이라고 그분이 퇴학해 가지고 갔습니다.

○○교회에서 말하기를 ○○○ 조사님을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은 ○○교회에서 일 마귀 ○○○, 이 마귀 ○○○ 그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보다 그때 권위를 훨씬 높이 여겼던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하고 저하고 둘이 퇴학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 뒤에 ○ 교장, ○○○ 목사님이 거창에 와서 사경회를 와서 인도하는데 그때에 제가 들어가 가지고 내가 깨달은 것과 그 목사님이 깨달은 것이, 가르치는 것이 달라서 얘기를 했습니다. 얘기를 해 가지고서, 집회 중에는 얘기를 못 하고 집회 다 마치고 난 다음에 한 서너 시간 이야기했습니다. 서너 시간 둘이 같이 앉아 자꾸 이렇고 저렇고 말했습니다.

말하니까, 그 ○○○ 목사님은 겸손한 어른이고 또 넓게 아는 어른이니까 제가 말하는 데 대해서 그거는 틀렸고 이게 맞다 그런 소리는 하지 안했습니다. ‘녜, 그렇게도 뭐 깨달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저 모두 다 이렇게 모두 다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은 그것은.’ 그때 말하기를 그분은 겸손해요.

겸손해서, ‘형님이 이렇게 깨닫지, 형님이 이렇게 깨닫지 모두 일반은 이래 깨닫지 않습니다.’이렇게 말해요.

말하는데, 그래 가지고 ○○ 교파에서 자꾸 이거 뭐 그건 잘못 깨달았다고 하니까 이거 거창서는 그때 제가 뭐 은혜로서는 다른 사람이 모두 알기를 이걸로 알았습니다. 이러니까, 제가 말을 하면 뭐 전도사고 뭐이고 목사들이 그때전부 다 따르고 이럴 때인데. 그래 신강이 많이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한번은 뭐이 있었느냐 하면은 십자가상에 그 강도 두 강도가 달렸는데 한 강도는 순교자다 하는 것을 제가 말해 놨다 말이오. 한 강도는 순교자다 이래 놓으니까 그 강도가 순교자라 한다고 이거는 뭐 참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뭐 ○○ 교파에서 많이 뒤집어졌는데 이거는 꼼짝 없이 그만 몰리게 됐는데 그거 내가 그라고 나는 나 깨달은 대로 거기서 설교 한 게 자꾸 나간다 그말이오. 그랬는데, 그것은 그때 누가 나를 구원해 줬느냐 하면은 ○○○ 목사님이 구원해 줬다 말 내가 들었습니다.

그래 신강하니까, 교수실에 모여 가지고서 모두 신강하다가 ○○○ 목사님이 말하기를 ‘한편 강도가 그걸, 구원 얻은 자와 멸망받은 자를 상징해서 그렇게 나타낸 것인데 한편 강도는 구원 얻는 자를 다 상징해서 놓은 것이니까 순교자도 거기 들었지 안 든게 뭐 있느냐? 순교자도 거기 들었다 해야 되지 그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는 멸망받은 강도고 하나는 구원 얻은 강도이니까 그 두 강도가 있었으니까 그거는 구원 얻고 멸망받은 것을 상징한 것으로 이렇게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 왜 구원 얻은 걸 상징하면은 순교자가 어데 들었겠느나 그 안에 들었지.’ 이라니까 그만 그게 일소가 돼 버렸습니다. 일소가 돼서 그때 인정했는데, 저는 그때 그게 아닙니다, 또.

아니고, 제가 깨달은 것은 그 한편 강도는 자기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모든 인간이 자기 죄값으로 말미암아 죽기는 죽는다. 죽는데, 그 한편 강도는 벌써 창에 찔려 가지고, 찔렸지 못을 박혔지 그보다 더 이상 되는 고통이 없었는데 그 고통 가운데 요 만인간이 다 예수님을 정죄하고 그럴 때에, 만인간이 다 정죄하고 예수님을 긍정하는 사람 하나도 없고, 평안 무사한 데서도 다 예수님을 정죄하는데 이 사람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죽어 가니까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없고 어려움이 없는데 그런 지상의 고통에서 지상의 어려움에서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지금 숨이 끊어지는 그 시간까지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예수님을 구주라고 증거를 했고 이는 죄가 없다고 구주라고 증거했고, 하니까 주님이 있다가서 너와 나와 오늘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증거했으니까 이 사람이 순교자다.

순교자는 뭐 주를 위해서 일찍 죽는 게 순교자가 아니다, 이미 살 대로는 살고 죽는 사람인데 자기의 생명보다 주님을 더 앞세우고 죽는 그 시간이라도, 죽어도 생명은 생각지 안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거, 죽음에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그게 순교자다 이렇게 해석을 해 놨다 말이오. 해석을 해 놨으니까, 그 해석은 거게서 대지는 안했지마는서도, 순교자라 한다고서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은 면제를 됐었습니다. 그때 면했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때는 그랬지마는서도 여러분들이 자꾸 이래 배워 나가다가, 이거 깊이 깨닫지 못하면 헛일이라 말이오.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목사 쳐 놓고도 여게서 배운 것은, 백 목사는 무식꾼입니다. 무식하요.나는 국민학교 오학년밖에는 안 다녔습니다. 오학년밖에는 안 다녔어. 오학년밖에는 안 다녔는데 오학년에 까지 다녀도 그때 언제든지 급장이라서 뭐 선생 거석하면 저를 가리켜서 제가 대신 가르치기를 오학년까지는 성적이 좋았지마는서도 오학년밖에는 공부를 못 한 아주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말이오.

또 일본 가서 공부한다고 갔지마는서도 별로이 공부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모든 실물 그 교육은 받았습니다. 일본에 공장이라고서는 제가 종류 쳐 놓고서는 못 들어가 본 공장이 없었습니다. 그때 일본 말을 잘하고 이러니까 일본 사람인 줄 알고 뭐 보내서, 들어가서, 공장에 들어가면은 어떤 것은 열흘 어떤 것은 보름 어떤 것은 이십 일 어떤 것은 한 달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 공장이 뭐 어떻다 하는 그거 다 떡 알고 난 다음에는 그만 나와 버립니다. 나오고 또 딴 공장 다닙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래 시켰던 모양이라.

그래 놓으니까, 내가 무식하지마는서도 어떤 사람이라도 이 말하면 이거 무식하지마는서도 공부는 안 배웠는데 참 아이들이 욕할라면 만물 박사라 할 만침 그렇게 하나님이 알려 줘서 알게 됐다 말이오. 이러니까 내가 이 예배당 지을 때에, 내가 예배당을 지으면서 이라니까 모두 그 기사들이 이 기사도 와 가지고서 비웃지 또 이 도편수도 비웃지 내가 말하는 소리를 안 듣는다 그말이오.

안 들으니까 이거 아무래도 내가 말한 소리를 듣도록 인식을 시켜야 되겠는데 이거 문제다, 이거 본관 이거 지을 때. 그때 뭐 저런 거 지을 때는 벌써 유명했었소.

이랬는데, 그래 가지고 이걸 말하면서 자꾸 말하니까 시시하게 여기는데, 시시하게 여기는 걸 이걸 자꾸 말해 가지고 ‘이렇고 이렇지 않느냐? 이거 봐라. 둘 다 비교해 봐라.’ 자꾸 비교를 말해서, 설계사에게 역학을 말이지. 역학을 가르쳐, 힘이라 하는 역학을 자꾸 내가 말해서 이렇고 자꾸 이래 말하니까 나중에 그 사람이 차차차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라고 난 다음에는 그 뒤에는 내가 말하는 걸 반대 안 하고 ‘예, 이런 거 어짜면 되겠습니까? 그라면 그래 합시다.’ 이래 해 나왔다 말이오. 그라고 이 목수들도 말할 때 자꾸 안 들어서 안 들으니까 이거 애를 먹었어. 이래 가지고 자꾸 이라다가 인제 나중에 신강해서 ‘뭐 그래 해야 돼요?’ 그만 그 얼마 그 반쯤 다 지어갈 때는, 반이나 지었을 때는 그만 선생님이라. 그만 모시고 그만 언제든지 나한테 묻고 하지 묻지 안하고는 하지 안해요.

그거 나는 아무 그거 그렇게 배우지 안했어요. 배우지 안했으나 일본에 있는 공장이라 하는 건 다 다녔어. 다니면서, 공장에 가면은 이 부에 가서 보면은 이거 뭐 일하러 가는 거 아니라 보고서 이거 보고 저거 보고 이러면은 이 공장에 것은 다 봤다. 이제 이치를 다 깨닫고 다 봤다. 이라면 그만 나옵니다. 나올 때는 언제든지 돈도 못 받고 나오요. 미리 나오니까 뭐 그래 나오니까 돈을 줍니까? 못 받고 나오고 또 딴데 갑니다. 가면은 또 들어가요. 그래 뭐, 거게는 한국 사람이 들어간다면 뭐 명산 쓴 자손이라야 들어가지 못 들어 간다 하는데도 그런 데도 뭐 가면 당일 가면 그만 들어갑니다. 가면 그만 넣어 줘요. 그래 가지고서 거의 많이 다녔습니다.

이래는 배웠지마는서도 나는 무식한 사람이라. 이러니까 이 목사들도 내가말하는 건 시시하게 여깁니다. 시시하게 여겨서, 이거 뭐 무슨 철학자나 무슨 과학자나 무슨 도덕가나 무슨 이종교가나 유명한 그런 사람들의 말한 책을 보고는 가치 있게 여기지만 내가 말한 말은 가치 있게 여기지를 안해요. 그런 목사들 이 밑에 많습니다. 이러니까 가 가지고는 이 말씀은 듣기를 저 무식한 종에서 뭐 있겠느냐 이라니까 깔보니까 하나님이 알려 주지도 안 하니까 암만 봐야 진리는 모릅니다.

설교 시켜 놓으면 다 엉뚱한 설교 해요. 이라고 뭐 이 사람 말 저 사람 말 이래 들어 가지고서 그런 것은 잘 듣는다 그말이오.

오늘 아침 여게 있을란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내가 보니까 성경 공부라고서 해 놨는데 보니까 뭐 나중에 ‘뭣을 이것을 감사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거 뭐 조그마한 거 감사하는 사람은’ 또 큰 거 감사하고 큰 거 감사하고 나중에 큰 거 다 감사하고 자꾸 감사하면 그런 사람은 나중에 달을 만들어 주신 데 대해서 감사하고 해를 지어 주신 데 대해서 감사하고 이렇게 감사하는 사람은 하늘에 있는 독생자를 주신 은혜를 감사한다 말은 그럴 듯한데, 우리가 그 감사하는 건 그렇게 감사 감사해서 자꾸 감사하는 사람이 되니까 이런 감사도 차차 작은 감사가 큰 감사로 자라 가지고 큰 감사 하게 됐다 요렇게 듣기 쉽다 말이오. 큰 감사로 기독교는 그게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기가 자꾸 이래 밟아 올라가 가지고 깨닫고 깨닫고 밟아 올라가서 그런 게 아니라 저 위에서부터 내려 주면서 자꾸 강제로 이거 믿어라 믿어라 이래 가지고서 위에서 내려 주니까 안 받을라고 자꾸 우리는 안 받을라 하고 그 세력이 와 가지고 받도록 하고 이래 가지고서 되어진 것이 기독교지 우리가 하나 깨닫고 두 개 깨닫고 자꾸 깨달아 가지고 올라가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말이오.

위에서 내려왔지 밑에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요것도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공부를 해도, 어제도 말했지마는서도 배운 거와 다른 게 있으면은 여러분들이 말을 해라. 또 ○ 목사님도 조직 신학에서 ‘이거 깨달은 것은 목사님 가르치는 거와 이거 좀 다릅니다.’ 다르면 그럴 때는 다른 것을 가르칠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거 그냥 틀렸다 할 것이 아니고 그럴 때는 요 다르니까 어느 게 옳은지 요거 좀 한번, 한번 요거 한번 좀 생각해 보십시오 연구해 보십시요 그렇게 해 주기를 내가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배운 것이 다르면 ‘요거 다르다’ 요럴 때는 그것을 나한테 말해 주면 내가 틀렸으면 그걸 지금 고치면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지 안하고 심판받지 안할 터이니까 얼마나 나를 구원하는 것입니까? 그게 선배를 아끼는 것이라 그말이오.

칼빈주의 칼빈이 다 말해 놓은 거 아닙니다. 칼빈이 말했는데 칼빈이 틀린 것은 후배들이 다 고쳐서 이거는 고쳐 버렸고 또 옳은 것은 자꾸 주장을 하고 또 불충분한 건 또 충분하도록 보강을 해서 보충을 해서 다 구비하게 만들고 이랬지 그 칼빈이 다 말한 것 아닙니다. 칼빈이 말한 데는 그저 요런 종이 쪼가리도 있었고 이렇게 조그마한 종이 쪼가리 노트 쪼가리 이렇게 주 있던 것을 전부 주 종합을 해 가지고서 그랬고, 또 천주교와 서로 교리 신조 싸움이 나와 가지고서 한 달에 십 만 명이나 죽었는데 그럴 때에 그 깨달은 사람들이 말한, 옳게 깨달은 것을 말한 것을 전부 한테 종합해 가지고서 이것이 이렇다 하는 것을 그 여러 사람 깨달은 것을 전부 종합해 가지고서 편집한 사람 편집자가 칼빈입니다. 칼빈 혼자 깨달은 거 아니요.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자꾸, 이렇게 말하면, ‘백 목사님이 깨달은 거는 백 목사님이 아니라 총공회 교리와 신조라’ 이런 것이라 그말이오. 이런 것이니까 이 자꾸 깨달음이 바로 돼지지마는서도, 이거 다르면 다르다고 배척할 것이 아니고, 옳은 것도 있으니까. 배척할 게 아니라 틀린 거는 고치면 우리 총공회 교리와 신조가 틀리지 안하고 고쳐지게 될 것이고 모자라는 것은 보강을 하고 자꾸 이렇게 해야 될 거라 말이오.

그래서, 내가 여기 학생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런 거 있거들랑은 그냥 무조건 넘길 게 아니라 ‘요거는 다릅니다’ 하고서 고것을 말하기를 그 강사에게 ‘목사님 가르친 것은 이래 가르치고 이래 가르치고 이렇는데 서로 이게 일치되지 안하니까 이거는 어찌됩니까? 요래 놓으면 또 그 교수하고 나하고 의논해 가지고 서로 연구해서 바른 것을 또 그 규정을 지을 거라 말이오.

요렇게 뭐이든지 요거다 조거다 구별성이, 거룩지 않는 자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해요. 구별성이 없는 자는 못 갑니다. 이러니 요렇게 구별을 해 가지고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나 작으나 모든 걸 자꾸 구별해야 돼요.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요거와 조거와 구별하니까 요게 틀리고 요거는 맞았다 요렇게 자꾸 해 나가야 돼요.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요 교훈은 기본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이냐 요거부터 갈라 놔야 됩니다. 요걸 갈라 놓지 안하고 그냥 자꾸 깨달을라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일을 추지를 못해요. 이 교훈은 우리에게 이 도리를 주신 것은 기본구원에 관해서 주신 말씀이냐 건설구원에 관해서 주신 말씀이냐 하는 것을 구별을 하면은 구별이 나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성경을 읽을 때에 요 말씀은 그 범위를 어떻게 범위를 잡았느냐? 어째 보면 ‘행한 대로 구원하리라’ `행한 대로 되리라' 또 이렇게 말씀해 놨고 또 어떤 데는 또 보면 이거는 인간이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 인간이 되는, 인간의 자율을 다 죽여 버려라 또 이랬다 말이오. 자율을 죽여라, 주관을 다 죽여 버려라, 자기를 또 부인하라 이래 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이 뭣인지 혼돈되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도 요런 범위에서 말씀한 것도 없고 요런 범위에서 말씀한 것도 있고 요런 범위에서 말씀한 것도 있고 그 범위가 뭐 천층 만층입니다. 그 범위가 많기 때문에 ‘이거는 요 범위에서 말씀했구나’ 하는 그 범위를 알면 진리를 깨닫지마는서도 그 범위를 생각지 안하고 마구 하나로 이래 해 버리면 혼돈되고,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 학자들이 주석을 하되 난해절이라. 이거는 해석 못 한다.

성경에 난해절이 많습니다. 이거는 해석 못한다. 난해절이 많아요. 난해절이 어데 있어요? 난해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난해절이 하나도 없어.

시편에 기록하기를, 주여 나는 온전한 자요 나를 살펴보십시요. 내게 틀린 거 있는가 살펴보십시요. 나는 바르고 옳고 참되고 온전합니다. 네게 뭐 흠과 점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말이오. 그렇게 말했는데 이거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해석하기를 그렇게 해석합니다. 이것은 다 자기 양심적으로 사람으로서는 자기가 볼 때에 아무 흠점이 없다는 그것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거는 사람 쳐 놓고는 이렇다는 말이지, 사람 쳐 놓고는 나는 이렇게 흠 없는 사람이다 하면 그건 교만 아닌가? 그것도 교만이지.

그렇지 안해요? 사람 쳐 놓고는 나는 흠 없는 사람이다. ‘사람 쳐 놓고’ `사람으로서는' 전부 이렇게 해석해 놨습니다. 이렇게 해석해 놨어. 그게 그게 아니라.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갈라 내고 새사람과 옛사람을 이렇게 분리한 사람들은, 요럴 때는 중생된 영과 그 심신이 하나되었을 때에는, 하나되었을 때는 흠과 점과 주름잡힘이 아무것도 없다. 새사람일 때는 그는 완전자다. 완전자나 그자가 산 영과 심신이 하나되었을 때는 완전자인데 요거 망령되게 심신이 산 영을 배반해 버리고 옆에서 꾀우는 자기 아닌, 자기를 죽인 원수인 자기, 옛사람 자기 말이지요, 이거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요 자를 제 주인인 줄 알고 고거하고 심신이 합작만 돼 버리면 그만 당장 마귀 자식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요한1서에, 속지 마라 당장 마귀 자식 되고 당장 하나님의 자녀된다 그렇게 말을 해 놨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새사람과 옛사람 이것을 또 구별해야 된다 말이오. 그러면 새사람 됐으면 또, 새사람 됐으면 항상 새사람이냐? 새사람 된 자가 요리 되면은 옛사람이 돼 버린다. 또 옛사람이 됐으면 그라면 그만 영도 죽었느냐? 중생된 영도 범죄한다 그말은 사람이 범죄할 때는 옛사람 돼 버렸기 때문에 범죄하니까 막 통틀어서 영도 죽었다 영도 범죄했다 다 범죄했다 하니까, 이러니까 이 지금 요새 교계에서 말하기를 그게 지금 질색입니다. ‘그 백 목사는 뭐 때문에 쪼개노, 쪼개기를? 하나로 하지 왜 쪼개노, 쪼개기를? 왜 구원을 쪼개며 사람을 쪼개며 자꾸 이래 쪼개느냐?’ 쪼개지 안하면 이거 안 되는데, 그러기에 성경에 쪼개는 데 대한 말씀을 해 놨다 말이오. 쪼개는데 대한 말씀을 해 놓은 그것을 이거, 쪼개는 데다 쓰지 안하고 딴데 쓰면은 그 성구는 해석이 안 돼요. 이해가 안 돼요.

이러니까, 시편 기자가 나는 완전자라고 말하는 것은 쪼개서, 요 중생된 영과 고 심신이 하나가 되었을 때에는 요거는 참 사람이요 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흠과 점이 없다. 요것이 또 나뉠 때에는 그만 옛사람이 돼 버리기 때문에 그거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러면 죄인이 되고 말았지마는, 죄인이 되고 말았지마는 그 사람은, 죄인이 되고 말았지마는, 그러면 심신이 범죄할 때 죄인이 되고 말았는데 죄인 되고 말 때에는 그라면 어찌 됩니까? 그거는 중생된 영도 같이 죄를 지었습니까 중생된 영은 죄 짓지를 안했습니까? 이제 그건 갈라야 되겠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말하기를 창세기 6장에 ‘사람이 육체가 되었으니’ 그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안하고 육체라고 말했다 그말이오. 사람들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뜻대로 자기 좋아하는 대로 취해서 아내를 삼았기 때문에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 하는 그거는 육체된 그거는 사람 아닙니까? 어째 그러면 미인을 취해서 제 아내를 삼는 그거 사람 아닙니까? 그건 사람 아니요 사람이요? 왜 저 양성원 학생 너는 답을 못 해? 아름다운 여인을 자기 아내 삼은 제 뜻대로 하나님의 뜻이야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라도 아름다운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았으니까 이 사람은 육체가 됐다 했으니까 그 사람은 사람 아닙니까 사람입니까? 세상이 말하기를 그 사람을 사람이라 하요 짐승이라 하요? 똑똑한 사람입니다. 말도 하고 똑똑한 사람이오. 그런데, 거게는 그라면 영과 문제는 어찌 됩니까? 산 영과는 문제가 어찌 됩니까? 분리가 안 되면 안 된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했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뜻대로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므로 사람이 육체가 되었으니 이랬다 말이오.

거기는 육체라고 말했다 그말이오. 육체가 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육체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할 그때는 이제 그들이 영과 육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고게 됐다가서 또 욕심대로 하니까 그만 이거는 육체의 사람이라.

‘육체의 생각은’ `육체의 소욕은' 육체는, 육체의 사람은 다 죽는다. 육체의 소욕은, 육체의 생각은, 육체의 행위는, 그러면 육체의 행위는 어떤 게 육체의 행위입니까? 이러니까 성경을, 여러분들이 여게서 원리를 깨닫게 해 주는 이 배우는 것을 요걸 깨닫고 나면은 그만 성경은, 요게 대한 성경 저게 대한 성경 그만 환하게 그만 성경 배울 것이 없어. 뭐 때문에 배우요? 환하게 다 깨닫게 돼. 요것만 깨달으면 다 되는데 요걸 믿지 않고 항상 의심해서 ‘고것도 참고로는 삼을 수 있다.

고것도 무엇인가 묘한 말은 했다. 이러나 또 이거 읽으니까 그것도 아니다.’ 이렇게 긍정 부정, 긍정 부정, 전부 발트주의라. 이러기 때문에 점점 어두워지고 밝아지지를 못합니다.

이러니까, 이 설교로만 해 가지고는 이거, 이거 뭐 만날 그 소리, 무식한 백 목사가 말하는 이거 가지고야 예배에 나갔다가, 이런 박사가 하는 말을 해야 되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어야 되지 그거 보고 설교 하고 안 하는데 또 교인들은 뭐라 하느냐? 교인들은 처음에는 그걸 하면은 좋아서 하지마는서도 조금만 하면 나중에 가서는 그거 들을 게 없다 말이오. 그거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들을 게 있습니까?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데. 목자는 예수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딴거는 듣지를 않습니다.

이러니까, 양떼들은 말하기를 그래 말해요. 아이고 고만 다른 거 다 없애 버리고 어찌 됐든간에 그만, 어떤 교인들은 ‘원고를 그대로 떠듬떠듬이라도 읽어 주면 우리가 살겠는데’ 그 사람은 설교록을 안 나가게 해 못 사 그렇다 말이오. 못 사구로 하니까 이거 사면 탈났으니까 못 사구로 한다 말이오. 그 설교록을 읽어 본 사람은 ‘어이구, 그까짓 거 뭐 들으나 마나 뭐 설교록 보고서 하지.’ 이렇게 되겠는데 인제 그걸 못 들으니까 ‘어째 알송알송하니 그전에 들은 게 있는데 고 원고대로 읽어 주니까 됐습니다’ 그만 떠듬 떠듬 읽어도 원고대로 읽어 주면 좋다 싶어서 만족을 하는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엉뚱한 소리만 해 쌓아니까 사람 죽겠다고서 교인들 호소가 전부 그겁니다.

이렇지, 또 어떤 교회는 원고대로는 읽기는 읽는데, 세 번이라도 읽고 나서 나와 가지고 읽어 주면 좋겠는데 이거 만날 자빠져 잠만 자고 이래 가지고서 읽기를 옳게 못 읽어서 읽다가 또 막히니까 또 떠듬떠듬 또 새로 읽고 새로 갈아 읽고 또 고치고 새로 읽고 떠듬떠듬 이라니까 애가 터져서 죽겠다고서, 세 번만 읽고 나와도 안 그럴 건데 또 이래 가지고 지금 또 호소문이 자꾸 온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교인들은 서부교회에서 설교한 설교를 다 좋아하는데 교역자들은 싫어합니다. 이거는 그저 뭣이 나오는고 참고만 하고서, 하기는 딴 외에서 해요, 전부 외서, 그래 가지고 이 주석 저 주석 내 가지고 자꾸 이래 돌아다니다가서, 그럴 때는 자꾸 배척을 당하고 이래 다니다가 이제는 ‘이게 아니다’ 진리를 깨닫고 난 다음에는 배척을 당하지를 않는다 그거요. 여러분들이 듣고 깨달아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이거 또 하다 말았는데, 열 처녀가 다섯은 멸망이고 다섯은 구원 얻었다 하는 그 주장과 또 열 처녀는 다 기본구원 얻었으나 건설구원을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가 있다 이것과 요렇게 보는 데 대해서 그거 뭐 그래 보나 저래 보나 별게 없다 하지마는 이 비유가 모든 사람이 많이 알고 있는 것만침 이 비유가 세상에 둬도 다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런 많은 것 중에서 다 캇트해 버리고 다 차 내고 요 성경에 기록된 거라. 그것보다 나은 것이 성경에 기록됐다 말이오. 요거 무슨 말인지 알아 듣겠어요? 천하에 둬도 둘 곳이 없을 만한 그 많은 기록 가운데에 그 많은 기록을 다, 기록을, 요것보다 요게 낫다. 요거보다 요게 낫다. 이 기록이 온 세상에 둬도 다 둘 곳이 없을 만한 많은 것을 다 이것을 버리고 많은 것보다 요게 낫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 이 비유 아닙니까? 그거 이해가 돼요? 양성원 학생들 이해가 돼? 꽉 이해가 안 되면 헛일이야. 그까짓 거 암만 배워도 소용 있는가? 이해가 돼야 되지.

그러면, 요한복음 끝장에 다 기록할라 하면은 기록한 것을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다 그렇게 말씀 했는데, 그러면 둘 곳이 없는 그렇게 많은 것 가운데에서 이 열 처녀 비유도 기록이 된 것이니까 이 신구약 성경 외의 것이 이 세상에도 다 둘 곳이 없을 만침 많은 건데 그런 많은 것보다 여게 기록된 열 처녀 비유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록해 줬습니까 그만 못한 걸 기록해 줬습니까? 더 중요한 걸 기록했으니까 그 많은 거, 예수님이 하신 것을 말씀했는데 허투른 일 했습니까? 그 중에도 간추려서 간추려서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기록해 준 것이기 때문에 이게 중요하다 말이오.

중요한데, 여러분들이 그러면 그 성구를 뭐 그걸 다 구원 얻었다고 하던들 또 다섯은 구원 얻고 다섯은 멸망 받았다고 하던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무슨 중대한 일 있겠느냐? 요것을 시험해 가지고 양성원 학생들이 거게 대해서 이렇게 이래 해석하는 것과 저래 해석하는 것과, 이래 해석하는 것과 저래 해석하는 것이 그차이가 이 우주보다 크다. 그 차이가 굉장히 크다 하는 요것만 깨달아 답을 쓸 수 있으면 양성원 할 필요도 없어. 안 해도 목사되고도 남아. 뭐 일등 목사 돼.

고것만 알아도.

그냥, ‘이래 해석하나 저래 해석하나 뭐 같지’ 이렇게 할 게 아니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렇게 해석하면은 요게 어찌 되며 조렇게 해석하면 어찌 되는가 하는 그것을 그 깨달음의 이리 되고 저리 되는 데 따라서 그 차이가, 일이, 사건이 조그매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온 세상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 중대한 문제가 여게 있습니다.

그만침, 이래 깨닫는 거와 저래 깨닫는 것이 중대한 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이 진리를 모릅니다. 모르면, 제가 깨닫고 가르치는 거 저는 열 처녀가 다 구원은 얻었다. 기본구원은 다 얻었지마는서도 건설구원은 얻지를 못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열 처녀 비유는 건설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정력을 기울여야 되며 어떻게 힘을 써야 되며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어데까지 가야 되느냐? 그 실력을 나타내는 것이 언제냐, 주님을 만나는 시기는 언제냐, 만나는 시기는 언제냐, 준비는 어데까지의 실력을 갖추어야 되느냐, 그 시기를 놓치면 어찌 되느냐, 이것을 가르쳤다는 요걸 여러분들이 좀 깨달아야 됩니다.

「문은 닫힌지라」 「문은 닫힌지라」 요런 것도 ‘문은 닫힌지라’가 뭐인가? `문은 닫힌지라’ 닫혔으니까 암만 말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왜정 말년 때에 신사 참배 문제가 있고 나서 그 뒤에 해방되고 난 다음에 ‘신사 참배가 죄가 아니다’ 한 사람 기독자로서 하나도 없었습니다. 해방 후에 ‘신사 참배 하겠다’ 한 사람 하나도 없었어. 해방 후에 신사 참배 하겠다 한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신사 참배를 한 거 다 후회를 했습니다. 이러니까 모두 ‘우리가 후회한다’ 다 후회했습니다.

후회를 하니까 말하기를 후회했으니 그저 ‘우리가 잘못 됐습니다. 그 신사 참배한 거는 잘못 됐으니까 우리가 안 하겠습니다.’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니까 고걸 좀 뼈저리게 좀 느껴야 된다. 자꾸 이렇게 말하니까 아이고 우리가 후회하고 잘못된 줄 아니까 그만하면 다 됐지 그거 가지고 뭐 꼬장 꼬장 꼬집을 게 뭐 있느냐 하는 것이 그거 때문에 ○○ 교파하고 ○○ 측하고 이래 갈라졌습니다. 갈라진 것이 그래 갈라졌어.

그러면, 해방 후에 신사 참배 때문에 문제가 났었는데 그 뒤에 ‘신사 참배 한 것이 다 죄가 된다’ 후회한 사람은 어데 속한 사람입니까? 이미 때는 지나갔어.

8.15해방 전에 신사 참배 안 한다 아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지, 알겠어요? 가치 있는 것이지 팔월 십오일 해방 후에 신사 참배 안 한다 하는 거는 그거는 소용이 없는 거라. 그건 소용이 없는 거라. 그때는 울어야 되지, 내가 한 게 원통스러워 울어야 되고, 그러면 내가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다 하는 것은 요다음에 그런 일이 있을 때에 안 해야 돼.

여러분 여기 밤중이라 기록했는데 밤중은 뭐 때문에 뭐 초저녁으로나 말하지 하필 밤중에 왔다고서 밤중에 뭐 때문에 밤중을 밝혔어? 이 밤중은 뭘로 봅니까? 밤중은 뭘로 보요? 그 어두운 건 무슨 세력입니까? 어두운 건 뭐요? 어두움은 죄악의 세력 아니요? 죄악의 세력이지. 어두운 건 죄악의 세력이라면 그러면 초저녁은 죄악의 세력이 강할 때요 약할 때요? 밤중은 그라면 죄악의 세력이 어떤 때입니까? 최고로 강할 때.

최고로 강할 때에, 내가 무슨 사건이든지 만날 때에 고 악의 세력과 나와 대립해서 나는 진리를 지킬라 하고 진리를 지키지 못하게 할 때에 고때에 내게 대해서 고 사건으로서 최고로 진리를 지킬 수 없는 최고의 어려운 최고의 절정기는 죄악의 절정기요 또 의의 절정기이기 때문에 고때에 최고의 절정기, 최고의 절정이 밤중인데 절정기 고때에 뭣을 들어야 주님 맞이해요? 뭘 들어야 주님 맞이해요? 등불 들어야 맞이해요. 등불은 뭐이요? 진리 아니겠소? 최고로 어려울 때 고때 ‘예수를 믿겠다’ 최고로 어려울 때, 자기가 정직하다고 정직, 정직 지키다가서, 이래도 나중에 그만 돈이 뭉텅이가 많이 오든지 거짓말하면 너 죽인다든지 그 정직을 지킬 때에 돈 문제가 있든지 생명 문제가 있든지 직장 문제가 있든지 그 어려운, 어려운 절정인 그럴 때에 진리를 지키는 고거라야 주님을 맞이한다 말이오. 그렇지 않소? 고거라야. 주님을 맞이합니다. 주님을 그래야 맞이하는데 기름 준비하지 안한 사람은 주를 맞이하지 못했어.

기름준비는 뭐로 생각해요? 기름 준비는 뭘로 생각해, 모두? 이 학생 뭘로 배웠어, 그전에? 그래, 기름 준비는 다 성령이라고 다 통일돼 가지고 있어요 이거 뭐 얼추가 다 통일돼 있을 거라. 그러면,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 그때 이긴다 그말이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만 처음에는 이 빛이 있지마는 차차 어두움이 심해지니까 그만 슬그머니 가라앉아 가지고서 안 된다 그거요.

이거 환한데, 그래 어떤 백 사십여 교회가 모인 그 노회에서 이 문제가 나와 가지고서 누가 ‘설교록에 이렇게 말했다’ 백 목사 설교록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니까 거기서 모두 말하기를 그놈 때려 죽여 버려야 된다. 또 하나가 말하기를 ‘왜 때려 죽일라 하노?’ 하니까 이제까지 내려오는 전통을 깨니까 때려 죽여야 되지 않느냐, 전통을 깨니까.

이러니까, 그런 게 왜 그 사람들은 그걸 때려 죽일라 한다 합니다. 왜? 자기가 유명한 목사인데 유명한 또 그 강사인데 떡 온 교인들에 이렇게 떡 가르쳐 놨는데, 가르쳐 놓은 걸 정반대로 떡 말하니까 그 강사와 그 교수와 그 목사가 이제 요 진리에 대해서는 박살이 됩니까 안 됩니까? 고만 박살이 된다 말이오.

박살은 그 사람이 잘못 가르쳐 놓은 것이 박살이 되지. 박살이 되니까 진짜는 살지. 이러니까 그만 대립이 됐다 말이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옛날도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느냐? 예수님의 가르침과 저희들의 가르침이 교훈이 다르기 때문에 대립이 돼 가지고 죽였다 하는 것을 지난 총공회 때 그것을 얼마든지 말을 했다 그말이오. 이것을 느끼지를 못해.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뭐 도무지 양심을 가지고 믿지 안하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 목사님하고 그때 ○ 목사님 교회 가 가지고 집회를 하는데, 요한복음 5장에 있는 삼십 팔 년 된 환자에 대한 것을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하고 난 다음에 신강이 있었습니다. 질문이 있었어. 질문이 있고 이랬는데, 왜? 그때는 ○○○ 목사님이 따라다니는 그 교회고 그 목사님이니까 그 지정 교회라 말이오.

교회에 가 내가 설교를 했는데, 이제 이거 전부 해석을 그래 가지고 그래 다 가르치고 그래 배워 놨는데 엉뚱하게 이래 반대로 하니까 이거 큰 문제라 말이오.

이러니까 거기서 질문을 했습니다. 자꾸 ○○○ 목사님이 이 목사가 질문하지 뭐 자꾸 질문하는데 이리저리 자꾸 질문을 해서 질문하니까 자꾸 내가 하는 말이 교인들이 들을 때는 그게 맞고 맞고 맞고 이라니까 이 교인 그 다 뺏기고 이거 그만 절단이 나 버렸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제 집회에 교인들을 데리고 오지 않습니다.

삼각산에 집회가 있으면 대심방을 시작해요. 어짜든지 참석을 못 하도록 해요.

그래 내가 있다가서 너거는 참석하며 왜 교인들은 참석 못 하구로 하느냐? ‘가르치는 게 다르기 때문에 교인들이 미혹을 받으니까 그래 참석을 안 시킨다.’ 이렇게 말했어요. 시켜 가지고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갑론 을박 해 가지고 뭐 옳은 걸 찾고 틀린 거는 버려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요게 양심인데 삐뚤어져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 심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에 가서 틀리면 어찌 됩니까? 지금 틀린 걸 고쳐야지.

여러분들이 알고 배워야 돼. 똑똑히 배워야 돼. 이래도 되고,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한다. 그거 내가, 어떤 목사의 이름을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말 못 하겠는데 유명한 목사입니다. 박사입니다. 조직 신학에 참 전공가인데 그분이 조직 신학을 가르치는데 책을 만들어 놓은 걸 보니까 이 사람 이래 말하고 저 사람은 저래 말하고 많은 사람이, 대학자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래 말하고 저 사람은 저래 말하고 인용을 하기를 수없는 유명한 학자들의 그 학설을 인용을 했어요. 인용했는데, 인용해 놓고는 마지막에 결론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이래 믿는다’ 이걸 말하지 안 했어. 나는 이래 믿는다. 이것도 이라고 저것도 저라고 다 이라니까 어느 것이 좋은지를 몰라요.

그래서, 그걸 ○○○ 목사님이 비판하기를 이 신학자는 죽은 신학자다 이래 말했어. 죽은 신학자다. 왜 죽은 신학자라 하느냐? 다른 사람은 이래 말한다 이래 말한다 이래 말한다 말했으니까 그거만 말해 놓고 제가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은 없으니까 이거는 책보따리지 암만 말해도 이건 책보따리고 좀 더 크면 도서실이지 이건 사람은 아니다. 제가 믿는 것이 있어야 될 것 아니냐? ‘이런데 나는 이래 믿는다.’ 이게 있어야 되지 그거는 없으니까 이거는 소개하는 책이지 사람은 아니다. 이건 책보따리지 죽은 신학이지 산 신학은 아니다. 그 ○○○ 목사님 날카로웠습니다. 잘 봤다 그거요. 여러분들 좀 그렇게 좀 깨닫기를 원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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