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14:40
열 세 가지 신경
1986. 3. 2. 주일새벽
본문:시편 1편 1절∼4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편 1편에, 복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형통하고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같이 항상 잎사귀가 청청하고 또 악인은 그렇지 않고 바람에 나는 겨와같이 다 날아가 버린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여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면서 밤낮으로 묵상한다, 가만히 생각하는 거. 그 사람과, 하나님 말씀을 참 보배로 이렇게 귀하게 여겨서 이 말씀을 밤낮으로 이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 이 말씀을 밤낮으로 생각하는 사람 한 종류 있고, 또 언제든지 자기 의견으로 자기로서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게 좀 좋고 유익되게 하고 내 일을 잘하고 내 형편이 좋아질까 내가 복이 될까’ 자기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생각하는 사람 있고 또 하나는 자기로서 자기의 모든 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아무것도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자기로서 자기를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자기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
사람은 두 종류라 여게 말했습니다. 악인이 하나 있고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면서 생각하는 사람 하나 있고 두 종류 있는데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갈수록이 점점 생생해지고 모든 일이 다 형통해지고 좋은 성과를 맺는 그런 결과가 되고 또 한 종류는 항상 자기로서 자기를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해야 행복되게 할꼬?’ 그러면 자기 것을 씁니다. 자기 생각 쓰고 자기 마음 쓰고 자기 지혜 쓰고 자기 힘 쓰고 전부이 자기만 생각합니다.
밤낮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망하고, 밤낮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망하고, 요거 아십시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망하고. 밤낮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 하노?’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는 사람은 형통하고 잘 되고.
여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고것을 여게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왜 망하는가? 자기에게는 옳고 바르고 깨끗한 것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러니까 무지합니다. 자기는 아주 무지합니다. 자기는 무지한데 무지한 자기로만 항상 생각하니까 무지만 가지고 생각한다 말이요, 무지만 가지고. 무지만 가지고 생각하니까, 무지라 말은 지혜가 없다 등신이라 그말이오. 등신. 어리석다 그말이오. 인간은 무지한데 무지만 가지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망할 수밖에 없고, 또 자기로서 생각지 안하고 항상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생각하니까 하나님 말씀은 전지의 말씀이니까 전지한 생각만 자꾸 가지니까 그 생각이 전부 옳고 발라서 복될 수밖에 없다 그거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반사들에게 말합니다. 또 부장 선생님에게 말합니다. 부장 선생님이 첫째는 알아야 되겠고, 요걸 꼭 가져야 돼요. 가져야 되고, 부장 선생님 자체가 요걸 가져야 되고 또 반사들도 가져야 돼.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가르치는 것과 깨닫고 가르치는 것과 이 말씀을 입으로만 말하고 있지 가지지 안하고 깨닫지 안하고 가르치는 것과 또, 깨닫는 거보다 자기가 이렇게 믿고 가르치는 것과 믿지 안하고 가르치는 것과 또, 믿음으로 행하고 가르치는 것과 행하지 안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주 참 천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차이가 있고 믿는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 말은, 높고 낮은 층어리가 있다 말이오. 또 행하는 것도 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생각하는 것은 뭣 때문에 생각하느냐? 생각하는 것은 자꾸 생각하니까 더 알아집니다. 더 깨달아져. 알아진다 말은 깨달아진다 말이오.
생각하니까, 더 깨달아지고 또 더 깨달아지고. 또, 깨닫기만 하고 하면은 소용이 없어. 그것만 가지고는 정죄받아요. 그런데, 바로 깨달아지니까 바로 깨달아진 것은 뭐이냐 하면은 바로 깨달아졌나 안 깨달아졌나 하는 것은 깨달아진 것만치 믿게 됩니다. 깨달아진 것만치 믿게 돼요. 또 이사람이 참으로 믿나 안 믿으며 믿는다 하나? 믿는가 안 믿는가 하는 그 증거는 그 사람의 행동으로 안다 말이오.
알고,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아직 아무 소용없어. 알고, 깨달져야 돼요. 알고 깨달아지면 필연적으로 믿게 되고, 알고 믿게 되면 필연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기독자의 생활은 전부 다 필연적으로 되는 일이지 억지로 강제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자꾸 생각합니다. 생각하면 깨달아져요. 또 깨달아지는 것을 자꾸 이래 생각하면, 깨닫고 깨닫고 하면은 믿어지게 돼요. 자연히 믿어지게 됩니다. 또, 믿어지게 되면은 안 행하고는 못 견뎌요. 또, 행하고 싶어서 행하게 돼요. 이것이 기독자들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여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는 요 말씀을 다 간추려서 한 말로 말하면은 조심한다 그말입니다. 조심. 조심하고, 조심하고, 왜 조심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조심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징계와 축복을 주시기 때문에 조심해. 잘못 하면 징계받고 잘 하면 축복받고. 하나님이 딱 보고 계시기 때문에 조심 안 할 수 없어.
조심을 그냥 뭐 돈 때문에 조심하는 사람 있고 또 자기 명예 때문에 조심하는 사람 있고 또 조심을 해도 장가 조심이 있고 시집 조심 있고 다 있어. 장가 가기 위해서 잔뜩 잘 믿는 척 조심하지마는서도 나중에 결혼 딱 하고 나면은 그만 헛일이라. 또, 시집 가기 위해서 조심하는 사람 있어. 그러니까 시집가기 전에는 ‘그 사람이 사람이 제법 됐다’ 이랬는데 결혼 딱 하고 나면은 엉망이라.
아무짝도 못 쓰요.
그런 거는 다 소용없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모든 거 다 보신다는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 이것을 보고 조심한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딱 보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숨길래야 숨길 수 없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중심과 내 모든 것을 싹 다 보고 계시니 그분이 판단해 가지고서 내 행한 대로 갚아서 ‘너는 축복을 받아라 너는 징계를 받아라.’ 징계라 하는 것은, 징계와 저주와 다릅니다. 저주라는 것은 망하게 하는 것이고 징계라 하는 것은 고걸 고쳐서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징계는 사랑으로 징계하는 것이요 저주는 미움으로 저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조심하는 그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조심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조심만 또 하면 되는 게 아니고, 조심은 몇 가지 때문에 조심합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봐요. 녜. 세 가지 때문에 조심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환하게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이 심판이 있다 그말이오. 징계와 축복이 있어.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잘못될까 벌벌 떨면서 조심하면서 고 위에 또 하나 뭣 붙여야 되느냐 하면 조심하면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묵상한다 말은 묵자는 잠죽 묵(默)자요. 잠죽고 뭐 말하지 안하고 묵상, 잠죽 묵(默)자. 생각한다 말이오. 잠죽고 이렇게 가만히 자꾸 생각한다 말이오. 말씀을 자꾸 생각해요.
여호와의 율법이라 말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이라 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라 말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그 계약을 자꾸 생각한다.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이 몇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녜, 구약 신약 두 권. 둘 있어. 자꾸 이렇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이 율법은 참 옳고 바르고 참되다 진리다’ 이렇게 즐거워하면서 밤낮으로 생각해, 그저.
생각하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냇가에 심었다 말은 냇가에 심었다 말인데 냇가라 하면 요거 시내라 요거 말이 좀 요래 가지고 있지마는 요 시내라는 요 말이 요거 좀 번역이 요게 좀 이상하게 잘못 됐어요. 요거 뭐이냐 하면 내용은 관수, 관계수, 시골에 가서 물 댈라고 보(洑) 막은 거 본 사람 손 들어 보이소. 보(洑) 막은 거, 보(洑). 보(洑) 아는 사람. 보(洑) 아는 사람. 이 도시 사람들은 바보야 몰라.
보(洑)라 하는 것은 이래 물이 내려가는 것을 자기가 토지에다 대기 위해서 이렇게 가로막아 가지고서 물을 대는 것입니다. 물을 대는 거. 그걸 가리켜서 보(洑) 막는다 관수한다. 또, 물을 대자면 도랑이 있어요. 도랑이 있지 않습니까? 도랑이 있어요. 도랑을 이리 파 가지고 도랑이 있기 때문에 이 도랑에는 항상 밑에 물이 있습니다. 또 물이 있으면 또 위에는 물이 없습니다. 가물 때는 물이 있고, 비가 많이 올 때는 도랑에다 물을 댑니까 안 댑니까? 안 댑니다. 가물 때는 물이 있고 또 비가 많이 올 때는 물을 쪽 빼서 없고 이러니까 나무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그거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같이 때를 따라서 과실을 맺고’ 무엇에든지 닥치는 데마다 좋은 성공을 성과를 거둔다 말이오. 뭐 매사에 성과를 거둬. 닥치는 거마다 성과를 거두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도다’ 그러니까 청청하다.
날마다 어제보다 오늘 좋고 오늘보다 내일 좋고 내일보다 모레 좋고 자꾸 청청하게 자라간다 그거야. 그러니까 그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 이랬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안해. 항상 밤낮 ‘내가 어떻게 할꼬? 내가 어떻게 할꼬? 요래야 좋겠나 조래야 좋겠나? 이래야 되겠나 저래야 되겠나? 뭘해야 되겠나?’ 자기 의사를 사용하는 자가 악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요 자기 지혜 사용하는 사람이 악인이라. 자기 중심으로 사는 자인데 그 사람은 망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겨라는 거. 겨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사과 상점에 가 보면은 쌀을 까고 쌀껍데기 나온 거 있지 안해요? 그게 겨입니다. 쌀껍데기. 그거는 속에 가볍기 때문에 바람 불면 확 다 날아가 버려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다 날아가 버려.
오늘 학생들에게 이런 해석을 여러분들만 알고 여러분들이 알고 믿고 지금 가르치면 되는 것이지 학생들에 이런 거 설명할라 하면 나중에 가서 그만 보배는 다 가르치지 못할 거라 말이오. 믿는 사람이 조심하고, 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조심하고 하나님의 이 계약의 말씀만 자꾸 생각하면 그만 그 사람이 지혜자가 되어지고 또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조심하니까 진실한 사람 되어지고 말씀 생각하니까 지혜 있는 사람 되어지고 당신만 바라보니까 그 사람이 경건하고 옳은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해져요.
그래서 오늘은 반사 선생님들이, 부장 선생님이나 반사 선생님들이나 지난번에는 보니까 잘 못 가르쳐요. 여러분들이 요걸 깨닫고, 해석을 전혀 하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에 해석하는 것은 여러분들만 알고 있어야 되지 학생들에게 말해 줄라 하면 시간 다 가 버리고 안 돼. 오늘 주일은 학생들에게 해석을 전혀 하지 마십시오. 해석을 전혀 하지 말고 그저 이 열 세 가지를 읽어줘요. 짜다라 빨리빨리 읽을라고 하지 말고 또 두 번 읽지 말고 또 틀리게 읽지 말고 이 말씀을 권위 있게 무게 있게 조심해서 이 말씀을 읽으라 그말이오.
안 그런 걸 역부러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마는서도 사람이 자기가 평생 보지 안하던 거, 산에 기도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면 호랑이가 어흥거리면 그만 벌벌 떨리는 게 막 떨리지 안해요, 그만? 떨리지 안해요, 그 두려워서? 이거 모양으로 이렇게 떨면서 읽어야 좋는데 그렇게만 또 껍데기로 그래 하면 안 된다 그거요.
어떤 사람이 나한테 말하기를 기도하면서 우는데 으으으으응 이래 하기 때문에 이거 참말로 우나 싶어서 가만히 보니까 눈물도 하나도 안 나더라고. 그래, 너 그래 껍데기로 자꾸 울음도 안 나오는 거 우는 척 그래 하면 안 된다 이라는데 그래 내가 그때는 말을 안 했어. 말을 안 했지마는서도 그런 걸 냅둬야 됩니다.
냅둬야 돼요. 거짓거리로 우는 것이 참 우는 게 되고 거짓부리로 이래 기뻐하는 게 참 기쁨도 되고 거짓으로 사랑하는 것이 참 사랑도 됩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거는 미운 사람이오. 미운 사람인데 미운 사람이지마는서도 자꾸 내가 껍데기로 사랑하는 체 합니다. 미운 사람인데 사랑하는 체 해서 친절히도 자꾸 이래 사랑하는 체 하고 사랑하는 거같이 이래 껍데기로 사랑하는 거같이 이래 합니다.
이라면 자꾸 그래 하면은 나중에 서로 친밀하게 됩니까 원수가 됩니까? 예? 친밀하게 됩니다. 껍데기로 사랑하는 것이 알맹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껍데기는 사랑 안 해도 속에 알맹이로 사랑하면 또, 알맹이로 인해서 또 껍데기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껍데기에서 돼 들어가는 것도 있고 안에서 돼 나오는 것도 있기 때문에, 기도하면서도 그냥 웃으면서 ‘하나님 어짜고’ 이래 쌓는 거보다는 ‘하나님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으으으으응 잘못했습니다.’ 그거라도 하면 차차 돼 들어간다 그거요. 그거 모양으로 이제, 이거 참 떨면서, 권 이만 목사님이라고 저 호주 선교사인데 제가 선교사들 본 가운데는 그 경건의 덕은 그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호주의 선교사인데 진주 성경 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분인데 그분을 내가 처음에 가니까, 성경을 읽는데 옳게 읽지를 못해요. 저 사람이 무슨 우리 한국말을 몰라서 저런가 이랬는데 아니, 그 사람이 한국어 박사라. 자꾸 줄라 하는 걸 자기가 안 해 그렇지. 박사가, 실력 박사가 열 세 가지인가 돼요. 그런 사람인데 성경 읽을 때에 마구 보기에 답답할 만치 떨면서 읽어. 떨면서. 조심 있게 아주 고만, 읽는데 옆에 사람이 고만 긴장이 돼 가지고서 조심이 돼서 떨게 되고, 그때 내가 처음에 은혜받은 게 그거 받았어. 가니까, 처음에는 저분이 뭣을 잘 모르는갑다. 한국말을 모르니까 아마 저렇게 빨리 읽지를 못하고 더디게 읽으면서 떨면서 저래 읽는갑다 이랬는데 나중에 차차 몇 절 읽어 내려가는데 보니까 내가 긴장이 되어지는 것이 ‘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저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정성을 가지고 저렇게 대하는구나’ 하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래 가지고 그분에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그분은 이래 강의하다가 사람에게 뭐 잘못된다 이런 말 한 일 없어요.
조금만 먼눈 팔다 보면은 벌써 눈이 내게 와 있습니다. 딱 요래 보고, 보고서 강의를 하고 있어요. 고 사람만 보고 강의하고 있어요. 강의하고 하는데 그 사람이 깨달아서 눈을 퍼뜩 가 가지고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얼른 눈을 돌려 버립니다. 그러니까 잘못 들으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 시선이 돌아오도록 기다리면서 아주 이렇게 주목을 하고 정성을 들여 그러니까 고만 그분이 강의하는 데는 아무 거석 없어. 조용하게 온 학생들이 전부 긴장해 가지고서 이렇게 듣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럴 때만 그런가 이랬는데 한번 거창 내가 읍에 시장에 한번 갔어요. 시장에 한번 가니까 사람은 뭐 거창 그런 데는 시골 시장 거창 시장은 굉장합니다. 안 가본 사람은 몰라요. 사람이 어떻게 거석한지 꼭 몸뚱이가 다 대입니다. 대이면서 요래 가지고 요래 가요. 어떻게 뭐 꽉 찼는지. 비좁은지.
보니까 저 먼데 보니까 키가 크니까 권 이만 목사님이 그리 지나가요. 이러나 사람이 꽉 채여 가지고 있어 마구 이래 가지마는서도 거리가 멀어서 내가 소리를 쳤어. ‘권 이만 목사님’ 고함을 지르니까 돌아보지 안해. 그래 내가 가니까, 보니까 돌아보지는 안 하고 이래 가지고서 발걸음을 살몽살몽해서 발걸음을 살살 줄여 가지고서 그저, 그냥 가기는 가는데 평소에 가는 거 요량하면 한 오분지 일도 안 걸어간다 말이오. 안 걸어가며 그래 가요. 그래 가요. 그래 내가 그 뒤에 와서, 그 뒤에 바로 가 가지고서 ‘권 목사님’ 해도 안 돌아봐요. 안 돌아보고 이래 가지고 가더니마는서도 그 앞에 내가 가서 안면을 턱 대면서 ‘권 목사님’ 하니까 반가워서 손을 붙잡고 그렇게 악수해 반가워해.
그때 또 내가 또 놀랬어. 왜? 실수를 안 한다 그말이오. 조심하기 때문에 자기 말고도 권 목사님이 딴데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권 목사님이 또 권 목사님이 또 있는지 모른다 그말이오. 안 그렇습니까? 모르는데 자기를 부르는지 다른 이를 부르는지 모르는데 공연히 자기가 휘뜩 돌아보면은 참 속담에 뭐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안하고 있는데 김치국부터 마시고 기다리고 앉았다는 거 모양으로 이거 또 수치라 그말이오. 그분이, 부르니까 그라는 그것이 내게 지금 평생 그게 기억돼 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모든 일에 신중하고 경솔치 않더라. 그분이 읽을 때에 성경을 그렇게 신중히 읽어요.
이래서, 오늘은 부장도 그저 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읽을 때에 조심하면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면 믿음이 나온다. 자꾸 생각하면, 생각하면 고게서 깨달음이 나오고 깨달음이 나오면 벌써 믿음이 나와. 생각하면, 자꾸 생각하면 자기가 더 아는 거 아닙니까? 생각하면 더 알아지는 거 그걸 가리켜서 깨달음이라고 말해요. 생각하면 자꾸 더 알아지고 생각하면 깨달음이 나오고, 생각하고 깨닫게 되면 안 믿는고로 못 견디는 믿음이 나와요. 믿음이 생겨 나와요.
믿음이 나오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읽든지 또 듣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외우든지 하면서 이 말씀을 자꾸 생각하니까 깨달음이 나오고, 말씀을 생각하고 깨닫고 나니까 또 믿어야 되겠고 믿음이 나오고, 말씀을 생각하고 깨닫고 믿음 나오면 그 다음에는 행해야 되겠고 자꾸 요것이 되어집니다.
이리 되면, 이리 되면 그 사람이 고만 자꾸 변화가 됩니다. 그 사람이 그만 하나님처럼 변화가 되는 거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변화되는 거라. 하나님의 전지 전능대로 변화되지 하나님의 그 완전한 인격대로 자꾸 변화가 돼지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 속에서 나오는 생각이 뭐 되겠소? 이러니까 제 생각에 악의 생각이 나오지 안하고 마귀 생각이 나오지 안하고 하나님 생각만 자꾸 나오게 되지, 또 하나님만 자꾸 이래 믿게 되지 이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의 소원하고 뜻대로의 행동하니까 자연히 그 사람이 복받을 수밖에 없어.
요것을 그저 나는 지금 이렇게 말했지만 여러분들은 가서 요번은 가르칠 때에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면 깨달음이 나오고 깨달음이 나오면 믿음이 생겨 나오고 믿음이 생겨 나오면 행동이 생겨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조심해서, 말씀을 조심해서 자꾸 생각하라. 어데까지 생각할꼬? 깨달음이 나오기까지 생각해라.
그러면 깨달음이 나오면 언제까지 깨달음이 나올 건가? 깨달음이 나오면 고 깨달음으로 인해서 믿음이 나온다. 믿음이 나오기까지 자꾸 깨달아라. 그러면 믿음은 어느 정도 믿어야 되느냐? 믿음은 자꾸 믿으면 자연히 안 행하고는 못 견디는, 행하고 싶은 그 행동이 나온다.
행동이 나오도록 믿어라. 믿음이 나오도록 깨달아라. 깨달음이 나오도록 여호와의 말씀을 생각하라. 여호와의 말씀을 생각하라.
요거는 한두 번이나 하고 고라고 난 다음에는 더 말하지 말아요. 말하지 말고, 읽을 때에 ‘일,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자기가 읽으면서 ‘우리 아버지’ 자기가 입으로 읽을 때에 그 속으로 마음으로 믿어지는, 그러면 입으로는 읽고 마음으로는 벌써 믿음이 생겨. 그러면 그 믿음 생겼으면 뭐입니까? 깨달음 생긴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읽을 때에 내게 깨달음과 믿음이 생겨지면서 행하고 싶으고, 행하고 싶다 말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니까 행하는 건 뭐입니까? 거게 대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행하는 건 뭐입니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 것을 알고 자기가 산다 그말이오. 그러면 어데서든지 뭘 당해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데?’ 뭘 가난해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라.’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시고 만유의 주재가 우리 아버지인데 문제가 뭐이오? 우리 아버지는 그라면 자꾸 우리 아버지만 부르면 예수님은 다 떼내 버렸습니까? 어떻습니까? 우리는 누하고 합해서 우리입니까? 내가 됐는데 내가 우리가 된 것은 복수가 됐으니까 복수는 누하고 합해서 복수입니까? 주님하고 나하고 합해 가지고 복수라 그말이오. 주님하고 나하고 합해서 복수. ‘우리’ 할 때는 뭐 주님하고 나하고는 한 덩어리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 할 때도 고만 빨리 `우리 아버지' 해 버리면 안 돼. ‘우리’ 내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할 수 없는데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주님과 나와 하나돼 가지고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지가 됐다. 이걸 뭐 생각하면서 읽으면 이것도 너무 빨라.
‘영원’ 영원이면 천년 만년 전도 아니고 언제인지 시작이 없는 영원이라 영원.
영원. 이것도 혼자 뭐 ‘영원’ 자기 혼자 이렇게 생각할 때 `영원’‘자존.
자존.’ 뭣으로 인해서 우리 아버지가 생겨졌으면, 무엇으로 인해서 생겨졌으면 무엇으로 인한 그것이 고장나면 고장나지마는서도 이분은 영원 자존이라.
아무것으로 인해서 생기지도 안했고 스스로 계신 분이라. 어데 매인 데가 없고 피동될 데가 없고 어데 속한 데가 없고 주권이고 독권자라 말이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한 분만 되는 하나님. 자꾸 이래 자기가 속으로 이래 해 가지고 거석하면 ‘하나님’ 이분이 아버지가 됐는데 문제가 뭐이요? `하나님’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어떻게 예수님과 우리와 하나가 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닙니까? 창조주 아니요?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 보면은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지음받았고 그가 없이는 지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안했습니까? 그분을 생각하면서 ‘모든 걸 창조하신 그분과 나와 어떻게 하나돼? 그분이 나를 어떻게 이렇게 사랑하셔서, 그분이 십자가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고 하늘의 부요를 내놨기 때문에 그렇고 피조물 되셨기 때문에 그래. 이 사랑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기가 찬다 그말이오. 자꾸 생각하니까. 생각하니. 생각하니까 또 놀래고 놀래고 ‘어떻게 이래 됐을까?’ 이는 참 힘을 씀으로도 아니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함으로 됐어.
‘영원 자존’ `불변' 세상에 불변이 어데 있습니까? 다 변해지는데. 불변이 어데 있어? 돌이 불변입니까 금이 불변입니까? 금 그것도 다 변해집니다. 세월이 지내가면 다 없어지고 다 변해집니다. ‘영원 불변’ `불변' 이거 자꾸 `불변' ‘불변’ 할 게 아니라 `불변' 말일랑은 `불변' 한번 해 놓고 `불변'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이 한 마디만 해도 기가 찬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놀래지 안할 수 없고 자꾸 깨달음이 나오는 데 따라서 믿지 안할 수 없고 깨달음이 나오는 데 따라서 믿으니 자기는 그대로 살지 안할 수 없고 자꾸 그래 된다 말이오. ‘불변’ ‘사랑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고걸 했다가 고걸 뺐습니다. `의' 자를 뺀 것은 ‘사랑 하나님’ 이 사랑도 하나님이라 말이오.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오. 사랑 하나님.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진 사랑이 아니라 이 사랑 자체가 하나님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이 자체가 하나님이라. 사랑을 하나님의 자체인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사랑의 하나님’ 이래 하지 안하고 `사랑 하나님' ‘의’ 자를 뺀 겁니다. 하나라. 사랑 하나님 이 하나로 말했다 말이오. `사랑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요렇게 해서 요 열 세 가지를 읽어 주는데 고 읽으면서 따라하도록 할 때에 그때에 자기가 읽으면서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또 깨달으면서 또 자기가 믿으면서 또 고대로 하고 싶은 속에 불이 나온다 말이오. 속에 불이 나와. 이렇게, 그러니까 읽으면서 속에 불이 나온다 말이오.
불변 사랑만 해도 ‘불변 사랑’ 땅위에 있는 모든 사랑을 불변 사랑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거게서 깨닫고 깨닫고 보니까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뭐 세상이 좋아서 사랑 사랑 하는 것이 그것이 너무 불쌍하고 가련타 말이오. 뭐 이렇게, 그거 보니까 껍데기 참 발라 맞춰 놔도 분수가 있지 발랐는데 속에 알맹이를 들여다 보니까 다 썩었고 썩었고 송장이고 나중에, 우는 것도 뭐 잠깐 울지 뭐, 사랑 있다가 사랑이 버썩 깨지고 나니까 슬퍼지는데 슬픈 그것도 또 잠깐 변해 버려. 슬픔 그것도 없어져 버려. 뭐 이제 죽으니까 나는 못 살겠다고 이래 쌓는 것이 나중에 며칠 지나고 나면 그거 다 없어지고 그만 잊어 버린다 말이오.
이런데, 이 ‘불변’ `불변' `불변' 얼마나 귀한지 그래서 자꾸 이래 `불변' `불변’ 말을 이래 하면은 가벼워지기 때문에 하지 말고 ‘불변 사랑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요렇게 해서 읽고 따라 읽도록, 읽으면서 그 학생들이 뒤에 혼자 가서라도 읽을 때에, 읽으면서 읽는 것과 자기가 고게서 깨닫는 것과 또 고게서 믿어지는 요 믿음과 또 고게서 행하고 싶은 행할 능력과 요것이 병행하도록, 같이 행하도록 요렇게 읽어서 한 번 읽으면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면 세 번 시간대로 읽는데, 읽는 자가 부장이면 부장이 자기 속에 거게는 뭐이냐? 말로는 ‘영원 자존’ 이라면 말 한 번밖에 안 했는데 영원 자존을 ‘영원 자존’ 이라지 말고 `영원 자존’ 이랄 때에 자기가 앞에 인도하는 부장이, 그라면 입으로 읽는 거 하나 또 그다음에는, 읽으니까 아는 거 아닙니까 알지 않소? 아는 거 하나. 또 그다음에는 뭐입니까? 깨달음 하나. 또 그 다음에는 뭐입니까? 믿는 거 하나. 또 그 다음에는 뭐입니까? 소원하는 이 행함의 소원의 능력이 나온다 말이오.
요것이, 앞에 인도할 때에 요것이 부장이나 반사에게 어느 정도 하느냐 어느 정도 병행이냐? 요 병행을 말하면 사람 귀가 들을 때 보입니까? 안 보이지마는서도, 안 보이지마는 우리 기독교는 성신의 감동이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없는 것은 상대방에게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없는 거는 상대방에게는 줄 수 없어. 자기가 하나만 가졌으면 하나만 주게 되고 둘 가지면 둘 주게 되고 서이 가지면 서이 주게 되고 다섯 가지면 다섯을 줄 수가 있기 때문에 고렇게 가진 대로 상대방에게 줄 수가 있고 내가 주는 대로 상대방은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줄 때에 그것을 협조해 가지고서, 협조해 가지고 그 일에 협조해서 운동을 해서 그것을 상대방에게 갖다 전달해 주는 배달자는 누구입니까? 배달자는 누구겠습니까? 배달자 이름이 뭐이지요? 예? 성령. 배달자가 성령이라.
그러기 때문에 저 미국 있는데 그 사람하고 나하고 이렇게 서로 이렇게 적이 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여게서 하나님 앞에 자복을 하고 참 깨닫고 회개를 합니다.
내가 회개를 하면은 그 사람도 어쨌든간에 내가 잘못한 것을 용서하도록 해 달라고서 자꾸 그라며 회개를 하면은 편지도 하나도, 주소도 모르는데 동시에 그 사람에게 갑니다. 동시에 그 사람에게 영감이 가 가지고서 그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가 가지고 그 사람도 회개를 합니다. 마주 회개가 떨어집니다.
요렇게 전달하는 것을 성령이 전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니까 뭐 입으로 해서 그 사람에게 설득을 시킬라 하는 거는 외식자요. 그저 내 자체가 어떻게? 내 자체가 하나도 전하느냐 둘로 전하느냐 서이로 전하느냐 너이로 전하느냐 다섯으로 전하느냐 요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것을 여러분들이 준비하고.
내가 또 지난번에 내가 보니까 ‘영원 자존하신’ 또 `영원 자존하신' `영원 자존하신’ ‘영원 자존하신' 이거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가치 없게 가볍게 만든다 말이오. 가볍게. 가볍게 만들지 말고 자꾸, 말씀이 중량이, 자기의 믿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중량이 무거운 것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제가 언제 여기 지금 있다가 ○○○교회 가 가지고서 집사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라고 ○○○이 아는 사람 있습니까? 그 ○○○집사가 지금 거기 가지고 집사가 되고 잘 믿는데 그 교회서는 아주 머리입니다. 그 내외가 다.
이런데, 그분이 한번 나한테 와 가지고 말하기를, 그때 뭐 주일학교 부장이 가르쳤던가? 부장이 뭘 가르치는 걸 가져와 가지고서, 내가 조사인데 ‘조사님 이 가르치는 것이 도무지 이래 가지고서는 은혜가 안 되고 학생들에게 아무 은혜가 안 됩니다’ 그래 내가 ‘왜?' 이라니까 `그 말하는 게 어떻게 가벼운지 가벼워서 그 속에 뭣이 알맹이 보배가 들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 안하고 이거 아주 시장의 장돌뱅이들이 자꾸 약장사들이 주 지꺼리는 말같이 그렇게 속에ㅡ그때 무게란 말은 그 사람이 안 하고 그거 그런 표시라요. 그런 말로 해요ㅡ그거 그렇게 너무 가볍게 이래 놓으니까 도무지 듣기에 은혜가 되지 안합니다.’ 이래 말해서 내가 그 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랬어. 그래서 그때 내가 칭찬을 했어. 그거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볍고 무겁고 속에 알맹이 있고 없는 그걸 네가 볼 줄 아니까 네가 기특하다’ 이랬는데, 그렇게 말의 중량을 그 사람이 말하더라고.
말의 중량을 말해요.
요것을 생각하고 오늘 가르칠 때에 그렇게, 보니까 이래 말해 놓고 또 그 다음에 이래 말해 놓고, 보니까, 내가 가만히 들어 보니까 이걸 읽지도 안하고 이러니까 더듬어서 몰라서 그런 거라. 몰라서, 자꾸, 모르면 그다음걸 모르면 또, 또 두 번 말하고 모르면 또 두 번 말하고 자꾸 두 번 말하는게 얼핏 들으면 더 단단히 익히도록 위해 하는 거 같지마는서도 실상 그렇게 안 틀리게 또박또박 읽을 수 없으니까 그 다음에 읽은 거 또 읽고 또 그 다음에 또 읽으면서 그 다음 거 준비하고 자꾸 그래 하더라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순전히 엉터리라 그말이오.
듣는데 우리가 다 그거, 청감이라 하는 것도 자꾸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은 요 말씀을 읽어 줄 때에 여러분들 속에서 다섯 가지가 한목 역사해서 그 학생들에게 전달이 되도록 고렇게 노력을 해서 그 학생들이 지금 이거 신경인데, 신경이라 말은 믿을 신(信)자 성경 경(經)자 성경을 이래 믿는다 그말이오. 요 간단하지마는서도 신구약 성경에 있는 것을 간추려서 다 뽑아낸 것입니다.
요 열 세 가지를 여러분들이 단단히 믿는 여러분들의 신경으로 삼고 있으면은 이 마귀란 놈들이 이단을 가지고 아무리 와도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여호와의 증인을 요 신경을 아는 사람이 요 신경하고 대조를 하면은 그들은 다 틀렸다 말이오. 이 신경을 가지고서 네가 그라면 하나님께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요걸 가지고 물으면 그 사람들이 답하는 것이 별로이 없고 다 틀려 버릴 거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고렇게 해서 오늘은 마지막이니까 학생들이 요 신경을 읽을 때에 다섯 가지로 읽을 수 있고 이 신경대로 살지 안할 수 없고 이 신경으로 인해서 자꾸 읽는 가운데서 자기가 변화되고 이래 가지고 모든 생활이 자꾸 형통해지고 갈수록 청청해질수 있는 이런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성경을 다 읽지 못할지라도 요 열 세 가지에서 성경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내용을 간추려서 알고 요걸 믿으면은 전성경을 믿는 것이 되어지는 요 일이 숙달되도록 요 일이 조성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