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09:47
엘리사의 신앙걸음
1982. 3. 1. 총공회(월밤)
본문 : 열왕기하 2:5-11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선지자의 생도 오십 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 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작년 졸업식에 제가 설교를 맡아서 이 설교를 증거 했습니다. 이렇게 형식으로 된 일을 문서로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재차 주신 것은 역사적인 한 과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명령하시고 교훈 하신 우리가 받을 생명의 도인 것입니다.
모든 성경학자들이 엘리야는 예수님을 상징했고 엘리사는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한 것으로 그렇게 다 공통적인 해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와 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지나간 그 일로써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상징으로 주신 것이요 하나에 예표로 주신 것이니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른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이 무엇이며 우리가 여기에서 보고 배워 갖추어 가질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지만 간추려서 몇 가지만을 간단하게 생각해 보려 합니다.
첫째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를 때에 중간 중간에 수많은 선지 학교가 있었고 또 선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사를 끝까지 따라갈려 하는 엘리사에게 대해서 많은 만류를 했습니다. ‘당신의 주를 하늘로 올리워 가실 터인데 그분을 따라서 한정 없이 가다가는 대단히 위험하니 그만 가지 말라’고 한 그런 만류를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에 엘리야는 벧엘에서도 그 신앙 동지들이 너무 어렵고 외로운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주 엘리야는 벌써 하나님께서 하늘로 올리워 가실 터인데 따라가면 그 일에 낭패가 되지 않을 것이며 위험하지 않느냐 하고 만류했지만 ‘나도 안다 잠잠하라 내가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두고 맹세하고 엘리야의 확고한, 확고한 그 인격을 두고 내가 맹세한다 하는, 끝까지 내 주 엘리야를 따르는 이 일에 중단하지 않겠다’ 하면서, 그 모든 신앙 동지의 동창들을 다 버리고 홀로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이것을 이 계시를 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첫째로 요구하시는 요구입니다.
우리가 신앙걸음을 걸어갈 때에 신앙의 동지의 그 유혹,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그 신앙에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라는 안일의 한계를 정해 놓고 ‘한정 없이, 끝까지, 위험천만한’ 그런 지나치게 치우친 정상이 아닌 그런 신앙걸음을 걷지 말라고 하는,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그 일에 제한하고 제재하는 자기들의 형편과 사정을 인해서 엘리야를 따르는 그 걸음을 멈추는, 그 일을 하지 않기로 단정을 짓고, 자기야 어쩌든지 끝까지 엘리야를 따를 것을 각오하고 따랐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요구하셔서 이 계시를 첫째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졸업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해서도 이 말씀을 증거하게 하신 주님은 새롭게 다시 이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 걸음에 끝까지 주님을, 이 걸음에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이 한 가지만을 엘리야는 가졌고, 남은 모든 학생들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자기들의 형편과 사정을 생각했고 주님을 따르는 거 외에 자기네들에게 이런 저런 지혜나 타산이나 그런 마음들을 가졌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이 일 외에 자기들을 자기들의 형편을 생각하는 것이 있었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이 외에 자기들에게는 이런 저런 계산이나 타산이나 가지면 자기네들에게 엘리야를 따르는 그 생각 외에 딴 생각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를 따르는 그 외에 딴 생각이 있었고 엘리야를 따르는 자기 외에 자기를 생각하는 이거 하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자기 주님을 따르는 자기뿐이었지 주님을 따르는 그 외에 또 자기를 생각하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한 방편 외에 자기네들의 다른 방편이 엘리사에게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첫째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주님을 생각하는 것 그 외에는 생각이 없는 것, 자기에게 자기네들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것, 자기가 바라보면서 따르는 주님만 생각했지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없는 것, 주님을 따르는 고 방편뿐이지 다른 방편이 없는 것 요것을 첫째로 주님이 요구하십니다.
주님만 보이고 자기가 보이지 않는 그것이 엘리사였습니다. 자기야 가난하든지 죽든지 어렵든지 천해지든지 어찌됐든지 주님만을 바라봤지 자기를 생각하는 그것이 엘리사에게는 없었습니다.
또 주님을 따르는 것 그 한 방편만 자기에게 있었지 그 외에 다른 방편은 따라가되 ‘이렇게 따르자. 저렇게 따르자.’ 그 조정하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바라보는 주님 바라보는 그 외에 다른 것을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소. 주님을 따르는 그 방편 그 일 외에는 딴것이 없었어.
이것을 우리에게 첫째로 원하시고, 둘째는 그 두 분이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으로 요단강 물이 마르고 육지같이 되어져서 육지로 두 분이 건너갔다’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이것은 요단강을 죽음이라는 것을 모두 다 상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주님 앞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죽음에 거치지를 않았고 죽음이 없는 그런 생애에서 살았습니다. 죽음을 발아래 밟고 주님은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없는 신앙으로 주와 동행하는 요것을 둘째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널 위해서 저 살센 요단강을 어떻게 하는가 보자 하고 구경만 했지 따라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요단강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요단강이 육지 되어서 건너갔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죽음에 가로막혀서 주를 따라가던 이 걸음을 가지 못할 때에, 죽음이 가로막을 때에 이 죽음을 발아래 밟고 죽음을 꿰뚫는 그 죽음에서 생명을 내어놓고 죽을 각오하고 가는 것도 좋지만은 믿음으로 죽음을 호통치고 죽음을 멸시하고 죽음을 무시하고 죽음이 그 앞에 가로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발아래 밟는 이런 권능의 사람으로 주를 따르는 이것을 둘째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근 70년 우리나라에 선교한 그 끝에 하나님께서 요단강 같은 이 신사참배의 죽음이라는 그 죽음이 가로막았을 때에 대부분의 신자는 이 요단강 물에 다 막혀서 건너가지를 못하고 다 요단강 이편에서 굴복했습니다. 다 신앙의 정조를 팔고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약간의 신자들은 죽을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그런 성도들도 있었지만은 그 법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부르면 전 인류가 다 달려들어도 내 생명을 붙들 수 없고 주님이 부르지 않으실 때에 아무도 내 생명을 해할 수가 없다는, 오직 생명에 주님만이 주권하고 계시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그들이 말하는 것에 비웃고 오히려 웃으면서 이 죽음이라는 이 방어를 가지고 막을 때에 거게 제재를 하나도 밟지 않고 통과했습니다.
그런 신자들이 일본에는 없었습니다. 일본 전 교회에 그때에 이 요단강을 육지로 삼아서 건넌 그런 신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 엘리사와 같이 이것을 꿰뚫고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결국은 각 세력들까지도 정복하고 승리한 그런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8·15 해방 후에 일본에 있는 그 교세와 한국에 있는 교세는 이는 천지의 차가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복음이 승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그 교세들이 심히 쇠퇴하고 복음 전파가 안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교회를 찾아보려 하면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가도 잘 만날 수가 없답니다.
그러나 한국은 즐비한 것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교세가 흥망 되는 이것이 언제 뿌리를 박아 그리 됐느냐? 왜정말년에 거기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던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는 죽음에 막히지 않는 신자가, 죽음에게 막혀지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지기를 둘째로 여기에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일반적인 선지 생도의 대우로 인간적인 교훈을 했지 그이에게 진정한 인간을 탁월한 그런 교훈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요단강을 건너고 난 다음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나를 따라오는 일이 위험하고 나도 네가 나를 따라오는 게 위험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이렇게 따라왔는데 무엇 때문에 따라왔느냐? 나에게 요구가 뭐이냐? 하나님께서 나를 올리워 가실 터인데 가기 전에 나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면 내가 너에게 그 요구를 이루어 주리라 내가 이방인의 정권도 내가 전해 줄 수 있고, 이스라엘의 정권도 내가 정해 줄 수 있고, 정통의 유다에 대한 권세도 내가 너희에게 정하여 줄 수 있고, 모든 이적과 기사의 능력도 너에게 줄 수가 있으니 네가 무엇을 요구하겠느냐?' 할 때에 엘리사는 ‘그런 것이 다 좋지만은 보다 좋은, 당신에게 영감 된 그 영감이 나에게 갑절이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고 원했습니다. 그는 갑절을 말한 것은 엘리야보다 배나 영감 받아서 엘리야보다 위에 가는 그런 허영심이나 그런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는 엘리야보다 근본적으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영감이 더 충만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갑절이나 달라고 그렇게 구했습니다.
그때에 엘리야는 말하기를 ‘네가 이방 정권을 나에게 달라고 해도 그 어렵지 않고 이스라엘이 유다에 그 모든 권세를 달라고 해도 이적 기사를 행하는 그런 권능을 달라고 해도 그것은 어렵지 않은데 네가 제일 어려운 것을 나한테 구했다. 이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나를 하늘로 올리워 가는 이것을 네가 끝까지 봐야, 바라봐야 이 일이 이루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고 승천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에 엘리사가 엘리야를 보니 병거요 마병이였습니다. 그때에 엘리사가 ‘아! 이스라엘을 국방한 분이 이분이시로구나. 이 엘리야 한 분이 이스라엘의 국방을 했었구나' 하는 것을 엘리야가 보고, 그 회리바람이 불어서 참 눈을 뜰 수 없는 굉장한 그런 어려움 바람 속에서도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볼 때에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서 땅에 던지는 것을 보고 자기의 주가 떠났기 때문에 거게서 하도 기가 막혀서 옷을 찢고 그 겉옷을 주워 가지고 참 혼심없이 다시 요단강에 와 가지고 군담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병이요, 이스라엘의 병거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고 남아있는 우리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탄식을 하면서 허퍼서 요단강 물을 갖다가 이 두루마리로 이래 가르치니까 요단강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엘리사는 이 증거를 가지고 다시 건너갔던 요단강을 건너와 엘리야가 하지 못한 그 일을 엘리사가 완전히 끝을 마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계시를 주시는 것은 첫째는 동역자의 모든 미혹을 네가 배격하는, 주님만 보이고 주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 지식 하나만 있지 다른 것이 하나도 없어. 주님 바라보는 요거 하나, 주님 따르는 요 지식 하나, 요것 둘만 네가 가진 사람되어 이 외에 수많은 것을 가진 그런 모든 동역자, 신앙 동지자를 배격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되어져라 하는 요것을 주님이 첫째로 요구하시고, 모든 신앙의 동기들이 죽음이라는 이 사선을 밟고 육지같이 없는 것 같이, 이 사선이 없는 것 같이 이 죽음이 너희에게는 추호의 자격도 충격도 공포도 염려도 하나도 주지 못하는, 이것이 없는 육지같이 지난 거와 같이 이렇게 죽음에 가로막히지 말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음 없는 이 신앙걸음을 네가 걸어라, 죽음에게 막히지 않고 주를 따르는 이 걸음을 걸어라 하는 것이 둘째로 주님 요구하셔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고, 셋째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요구한 이 요구는 오늘 우리가 엘리야로 상징한 주님의 이 영감을 우리가 모든 땅에 있는 모든 것보다 이 영감 하나를 소원하는 이런 소원의 일꾼이 되어 달라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셋째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영감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영감은 간단하게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 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을 입고 피조물의 형상을 입어 죽기까지 복종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지셨던 영감입니다.
주님이 앞에서 자기의 형편이나 사정이나 주장이나 경외나 계획이나 주님 앞에서 자기의 것 어떤 것이든지 자기에게 대한 해든지 유익이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든지 싫어하는 것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주님 앞에서 자기 것 하나도 없는 자로 주님 앞에 자기 것 하나도 없는 자로 주님에게 복종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로 요 영감을 가지신 것이 주님의 영감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주장이나 사상이나 소원이나 자기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앞에 주님의 것은 하나도 가지지를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의 전부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그것으로만 되어 있었지 복종하는 거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요것을 가지신 것이 우리에게 엘리야로 보여 주시는 이 주님의 가지신 영감입니다.
당신이 말할 때에 이거는 내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이 내 입으로 나왔지 당신의 말은 한 마디도 안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이라 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우리 학생들도 셋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 앞에서 죽는 날까지 자기가 없는 자기를 하나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자기는 없는, 무한은 아니지마는 자기는 주님 앞에 복종하는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요.
주님에게 복종하는 것, 복종하는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것이 주님이 가지신 영감입니다.
또, 한 영감은 무엇인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자기 요거뿐이지 딴것 없는데, 아버지의 명령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 이 일에 다 소유와 몸과 생명 하나도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고 솔빡 다 던졌습니다.
다 바쳤습니다.
요것이 영감이십니다. 주님이 가지신 영감을 온 세상을 취하는 것보다 이 하나를 그런 건 물리치고 이 하나를 요구하는 이런 양성원 졸업생이 되기를, 또 이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셋째로 원하셔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소원을 했지마는 이 일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주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거게까지 회리바람 속에서 비로소 이 영감을 꼭 같이 받아 가지고 그 후계를 이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동지 신앙동역 요 두 가지 외에 있는 모든 동역자를 배격해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요단강 건너지 못합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 주님을 따르는 것, 주님을 따르는 그 지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주님을 따르는 지식, 주님을 바라보는 것, 요 두 가지만 가진 엘리사는 수많은 선배는 저절로 되어지게 됐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어떤 나로 어떤 것이 어떤 수단을 가진다 할지라도 요 두 가지 외에 하나든지 둘이든지 가졌으면 그 사람은 요단강을 권능으로 육지같이 건너지를 못합니다.
베드로가 배 위에서 물위로 걸어가는 물위로 걸어가는 그 순간 그때는 요 두 가지만 베드로가 가졌습니다. 베드로는 그때는 요 두 가지만 가졌습니다. 요 두 가지 가졌다가 하나가 더 들어올 때에 물에 빠졌습니다. 엘리사는 요 두 가지만 가졌습니다. 다른 성도들은 요 두 가지 외의 걸 가졌습니다.
그 신앙은 당장은 이어지는 것 아닙니다. 마치 태산을 올라가는 거와 같은 그 순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첫째가 우리의 신앙동지의 유혹을 벗어나야 됩니다. 신앙동지 유혹을 벗어나야 됩니다.
‘목회를 하지마는 너무 그 설교는 극단적이고 그는 너무 초현실적이기 때문에 합당치 않다. 이 설교자가 살을 붙여서 세상 반 천국 반 이렇게 아롱아롱하게, 이렇게 비빔밥을 만들어야 된다. 이래야 목회가 되고 이래야 교인들이 모이고 성공을 한다.’ 해서 지금 우리 진영에 교역자들도 이 비빔밥 목회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 두 가지 외에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요 두 가지 외에 가진 자는 절대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지 요단강 건널 성도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주님을 따르는 그 방편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로 인해 나는 요것뿐이다. 나로 인해 나는 주님을 지금 바라보고 주님 바라보는 것 주님 따라가는 것 요 두 가지 외에는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작년 졸업 때에도 제기 이 말씀을 증거를 했습니다. 증거 했으나 너무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이 말씀을 휘떡 디비트려서 주 파묻어 버려서 뒤에 다시 캐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첫째는 이것입니다. 양성원을 올해 졸업하는 사람이 다섯 사람인데 다섯 사람 너무 많습니다. 일당 천이 아니라 일당 만이요 일당 억입니다. 한 사람이 세계를 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계를 움직였습니다. 세계를 구출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아브라함은 누가 위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큰 자인 줄 몰랐습니다. 그의 자손이 하늘의 모래의 수와 하늘의 별의 수와 땅의 바닷가의 모래의 수와 같이 된다고 했지마는 하나의 그것을 예사롭게 보통 쓰는 문제로 알았지 그렇게 신청하지 않았지만은 그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서 역사에 수많은 기독자들이 나올 것을 하나님께서 예약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오늘에 졸업하는 사람이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오늘 이 말씀 주신 여기에서 교훈을 받아 모든 안일주의, 모든 세상주의, 모든 유물주의, 모든 육신주의, 모든 가족주의, 모든 현실주의, 이런 모든 유혹들을 다 배격하고 온갖 사욕 금욕주의 온갖 포복 온갖 소욕 다 버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 주님 한 분만 바라보고 시대도, 미군도, 정권도, 인물도, 세상에 어떤 것도 다 집어 던지고 주님 한 분만이 바라보는 이 분이 창조주요, 이분이 주권자요, 이분이 주재자요, 이분이 홀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구원을 당신이 정하신 분이요, 이분 위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이분이 이분을 위해서 모든 것 예정하시고 모든 것이 섭리해서 개미 한 마리 움직이는 개별섭리까지도 이를 위해서 움직이는 이분이 한 분이면 족하다. 이분 위해 바라볼 것이다.
이분만 바라보고 이분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이분 따라가는 것 이분이 따르는 것 이분 따르는 것 외에는 나에게는 사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욕망도 없고 포부도 없고 희망도 없고 소원도 없고 내 전부 이분을 따르는 것 내가 바라보는 거는 이분만 바라보는 것, 요 두 가지가 정리되어서 수립되고 정돈이 된 사람이면 그는 오늘 이 세계교회를 살릴 수 있습니다.
능력이 먼데 있지 않습니다. 능력이 취하기 어려운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와 같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세상이 무서워서 이 죽음에 방어선에 다 막혀서 아무리 소원하는 저편이지만은 가지를 못하고 죽음의 방어선에 다 막히고 겁이 나서 다 뒤에 도망을 치지마는 엘리사가 엘리야가 동행하여 요단강을 말리고 육지로 건너갔다고 말씀하신 대로 천하인간이 두려워하는 그 죽음을 질근질근 밟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무런 죽음 없이 웃음으로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평안함으로 고런 사람이 위험 천만하지 본인에게는 기쁨과 전능과 평안으로 이렇게 죽음을 밟고 초월하는 이 신앙걸음을 걷는 그 순서를 밟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 앞에서, 다니엘이 사자굴 앞에서, 사도 바울이 온갖 죽음 앞에서, 모든 사도들이 온갖 죽음 앞에서 손양원 목사님이 죽음이 기쁘고 즐거워서 이렇게 그분에게 이 세상이 두려워하는 죽음이 그들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평생 소원하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가까이 할 수 있고 만족히 섬길 수 있고 만족히 사랑할 수 있는 귀한 기회로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다 첫째 이 유혹의 동지자 유혹의 신앙 동역자 이것을 배격한 그 순서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야, 너무 그렇게 하면 가정도 돌봐야지 몸도 돌봐야지 이 사회에 모든 사회도 돌봐야지 교인들의 처지도 돌봐야지 이래 가지고 안일주의로 세상주의로 육신주의로 물질주의로 합리주의로 도덕주의로 인화주의로 다 이렇게 썩어지고 마는 이 세대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이 사이비한 썩어 가는 이 모든 타락한 이 동역에 붙들리지 말고 이것을 배격하고 붙들리지 말라 하는 이것을 당신이 원하십니다.
이러고 나면 그 앞에 가로막아 있는 것은 요단강입니다. 엘리사는 건널 힘이 없지마는 엘리야를 따라갔을 때에 엘리야가 두루마기를 뚤뚤 말아 가지고 이러니까 척 갈라졌습니다. 육지로 건넜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두루마기가 친 게 아니라 일생동안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옷도 그거 두루막도 상징이요 그를 땅위에서 빛으로 세상 빛으로 살게 한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죽음을 무난히 통과했소. "몸으로 산 제자를 드리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네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이렇게 사선을 넘고 난 다음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네 소원이 뭐고?' 물었습니다. 네 소원이 뭐고 물을 때에 '이방의 왕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런 것 구하지 아니하고 '당신의 영감의 갑절이나 달라'고 ‘영감’그것보다 더 귀하고 더 보배로운 것을 알아서 구했습니다.
오늘에 사람들이 성신의 충만함을 달라고 영감, 영감 하지마는 자기가 하는 말을 무슨 말 하고있는지? 모르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말하고 있소. 사선을 넘기 전에는 영감이 참된 종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선을 넘어야 압니다.
영감 받으면 뭐 하는데? 영감 받으면 자기가 완전히 죽어버리는 것인데, 자기 소원 하나도 못하지 자기 좋은 흥미대로 하나도 못하지 자기는 생명 없는 도구와 같이 연장같이 아버지의 뜻대로만 쓰여지지 완전히 아버지 앞에서는 주님은 계시지만은 자기로 움직이려는 것은 다 죽어 없어져 버렸소. 다 죽어 없소.
있다는 것은 찍해야 아버지께 복종하는 그것밖에 없어. 자기대로 살아가는 게 다 죽었어.
세상에서 주의 일을 해도 제가 한 것이라야 맛이 있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도 저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재미가 있고 어데든지 나! 나! 나! 이 내 것! 내 것이라야 힘이 나고 내 것이라야 아름답고 재미가 있는 이 원죄로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성령이 오면 이것은 완전히 다 죽어서 자기가 자기로 언행심사에 취미나 모든 면에 사는 것이 하나도 자기가 절단 나고 자기가 완전히 전멸되어지는 것이니까 누가 이 영감을 원하겠소? 자기가 완전히 자기 주장은 전멸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 외에 복종을 어데까지 죽기 전에 복종 그거 외에는 없어. 이것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크다고 인식이 되어지는 것은 사선을 넘기 전에는 모릅니다. 사선을 넘기 전에는 모르요.
그 6·25 동란도 거치지 않고 왜정말년 박해도 거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서서 예수 믿으면서 오만 타산 오만 계산 전부 다 대 가지고 예수 믿으면서,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방편 안 믿는 것을 상대해 가지고 수지계산을 맞추어서 슬기로 사는 것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에서 요거 다 맞추어 가지고 슬기로 사는 이 사람이 무슨 성령을 압니까? 역부로라도 환란이 와 가지고 죽음을 안 만나거든 고고태산에 가 가지고 밥을 굶어서도 죽음을 만나십시오. 죽음을 만나십시오. 죽음을 당하십시오. 죽음을 당하십시오. 네, 죽음을 초월하고 통과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내가 나로 사는 것이 멸망이요 내가 있으나 내대로 사는 것은 완전히 없어지고 있다는 것은 당신으로 인하여 당신으로 인하여 당신에게 피동 되는 것으로만 살아지는 이것이 가치 있고 보배로운 것을 알게 되지 죽음 이편에서는 모릅니다. 죽음을 통과해 죽음 넘어가 보면 보여져.
그러기 때문에 죽음의 고개를 넘어 보지 못한 사람과 넘어본 사람은 다릅니다.
배가 죽기까지 고파지는, 배가 고파서 모래로 입에다 퍼 넣을 수 있는 그런 경우에 가서 닥쳐 본 사람과 배가 부르면서 배가 고프면 그게 참 어렵다 하는데 어려울 것이다 하는 사람은 도무지 그것을 상상으로서는 모릅니다. 이것이 주님의 영감이오.
그 다음에 주님이 가지신 영감은 그것입니다. 있는 것 당신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아버지가 맡겨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있는 것 지체 않고 이것 다, 이걸 구원을 위해서 다 내놨습니다. 요 영감뿐이오. 마지막 잔으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이제 다 투자했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운명했습니다.
이 영감을 원하는 사람 이것을 원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이스라엘의 국방이 엘리야가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졌습니다. 엘리야가 회리바람으로 승천해 가는 이 마지막 그 폭풍 속에서 주님을 바라볼 때에 그 두루막이 떨어진 그 두루막으로서 비로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요구했던 그 영감이 그이에게 왔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졸업하는 이 졸업생들과 이미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있는 목사님들 전도사님들 장로님들 집사님들 권찰님들 주일학교 반사선생님들 평신도들 다 한꺼번에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첫째로 둘밖에는, 둘밖에는 가지지 않았어. 둘만 가진 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요단강을 육지로 건넜어. 죽음에서 막혀지지 않는 사람 참 재미있습니다.
6·25때에 이 죽음이라 하는 참 이 선이 이 금선이 방어선이 쑥 미니까 말할 것 없이 기독자들이 쏵 밀려서 전부 쏵 다 들어갔습니다. 쏵 밀려 이 죽음의 선을 턱 풀어나가니까 이 죽음이 들어서 전부 쏵 피해서 이 부산으로 대구로 쏵 다 나갔소. 그러나 그때에 죽음이 와서 착 배어서 발아래 밟고 죽음 없는 그 세계에서 하나님을 하루 세 번씩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이렇게 사는 그런 신자들은 많지를 못했습니다. 왜정말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두 가지 외에 가지면 죽음의 선에, 죽음의 근원에 홀치지 아니할 자 하나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 가지면 죽음을 발아래 밟고 죽음을 호령 치고 죽음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육지같이 능력으로 짓밟고 통과할 수 있는 이런 걸음은 못 걷습니다.
첫째, 둘을 가질 것. 둘째, 사선을 넘을 것. 셋째로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 자유 없는 내가 될까?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 나라는 이 주장은 완전히 죽어서 완전히 나 없는 내가 되며 주님에게만 복종하는 내가 될까? 어떻게 하면 내 모든 것을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전부를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양떼를 위해서 솔빡 다 바칠까? 이 소원 이것을 주님이 요구하시고 이것을 요구하시고, 이것을 요구하는 자에게 당신의 뜻을 다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권능은 여기에서 있습니다. 아무 데도 있지 않습니다. 광문다학의 지식에도 있는 것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생각도 움직이는 운동에 있는 것 아닙니다. 일년은 간판을 가지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배짱 좋고 담대하고 활동성 많은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 둘 외에 있는 모든 것은 제거해라. 요 둘만 가지라. 그러면 내 앞에 죽음이 올 때에 이 죽음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밟고 넘어서라. 물 안이 육지같이 넘어가리라. 왜 다니엘이 밟을 때에 왜 그 죽음이 지금 밟혀서 오늘의 영광이 되어졌느냐?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죽음을 발아래 밟고 넘어서라.
그리하여 최종으로 네가 소원할 것이 무엇이냐? 주님 앞에 완전히 자유를 박탈당해서 주님 앞에 완전히 자유를 빼앗겨 주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자기의 자유의 의식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주님 앞에는 없는 거와 같이 죽은 거와 같이 이 생명 없는 이런 기계와 같이 이것이 주님이 소원한 영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 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으로 사람의 형상까지 입어서 죽기까지 복종하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당신을 비우는 것, 피동으로 끝마치는 것, 일면의 영감은 아버지에게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이러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복종해서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투자, 다 투자하고 난 다음에 이제 내가 투자 다 했으니 다 이루었다. 요것이 엘리야의 영감입니다. 엘리야로 상징한 우리 주님의 영감입니다.
엘리야를 따르는 엘리사로 우리에게 계시해서 오늘밤에도 주시고 지난밤에도 졸업때 주신 이 말씀을 우리는 무심히 지나가는 걸로 생각지 말고 여기에서 이 세 가지 단계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이거 없이는 주의 뜻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세상에서 장사해서 밥 먹고사는 것이나 사기 협잡해서 밥 먹고사는 것이나 노름해서 밥 먹고사는 것이나 목회해서 밥 먹고사는 것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 없습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할 때에 주님이"이 악한 자야. 불의를 행하는 자, 나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가라." "이 거짓선지자를 조심해라. 이 거짓선지자들을 조심해라."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양을 노략하는 이리도 되기 쉽고 절도와 강도도 되기 쉽고 선한 목자도 되기 쉽고 한테 있습니다. 거기에서 고게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졸업하는 사람들이 수를 능가하는 데는 요 말씀을 주님이 직접 주신 요 사실을 깨닫고 이 세 가지 단계를 차곡차곡 걸어서 일단 이단 이것이 삼단에 나아가면 이제까지 주님이 이루시지 못한 일을 그를 통해서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