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6 15:37
양심의 힘
본문 : 창 4 : 1 - 7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7절에 있는 말씀, 사람은 죄를 이것을 이겨야 되지 죄를 이기지 못하면 자기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서 첫째로 하나님의 밝은 빛을 오지 못하게 합니다. 또 다음에는 하나님의 그 능력을 우리에게 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 같이 이렇게 보여지나 사람이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은혜를 받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자가 이루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소원도 하나님이 주셔서 이 소원이 생겨지고 또 구원에 대한 평가도 비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역사 하셔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먼저 열려져서 통해야 우리 구원이 시작도 되고 이루어지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혀 있으면 구원이라는 것은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고 또 소원도 있을 수 없고 또 이루어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는 삐뚤어진 것이 죄인데, 여기에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 자기의 주관에 와 가지고, 자기에게 와 가지고 죄가 역사 할 때에는 자기 양심과 대립이 됩니다.
자기 양심에 거치게 됩니다. 자기가 이성으로 비판해 가지고 이것은 삐뚤어진 일이다. 이거는 죄다. 이렇게 판정을 짓기 전에, 이 판정을 짓기 전에 자기 속에 양심에 확신이 없어지고 불쾌해집니다. 자기 양심에 아주 확신과 쾌활함이 없어집니다. 양심의 쾌활함이 없어지면 벌써 그때에 죄가 와 가지고 자기를 침노하고 억누르고 있는 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거 전에, 이렇게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떻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은 양심 작용인데 "네가 선을 행하면" 그 말은 네가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였으면 네 양심이 쾌해서 참 펄펄 뛸 터인데, 네 양심으로 말미암아 한량없는 그런 기쁨과 용기가 생겨질 터인데, 너희에게 기쁨과 용기가 생겨지지 아니하고 네 기쁨이 억눌려지고 네 용기가 억눌려지게 되는 그것은 네가 벌써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이 왜 이렇게 자기 양심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용기를 얻지 못했던가? 왜 기쁨을 잊어버렸고 용기를 잊어버리고 모든 의욕 모든 그 욕망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억눌려져서 사람에게 정기가 활동하지 못하고 쾌활한 그 쾌활히 역사하지 못하고 머리를 들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졌는가? 그것은, 그 위에 보면 아벨은 양과 그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농사짓는 농작물로 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랜 후에 그렇게 드렸다 이렇게 말했어. 그러면 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자기 형편과 사정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일, 자기 현실에 따라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현실에 따라서 슬슬 자기는 생각하게 됐고 자기는 원하게 됐고 자기는 움직이게 됐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 현실에 따라서 기쁜 일을 닥치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꾸 현실을 따라서 기뻐하게 됐고, 슬픈 일을 닥치니까 자기도 모르게 현실에 따라서 슬퍼하는 사람이 됐고, 또 자기의 현실에 무엇이 잘되어서 성공이 되면 자기가 또 그 현실에 성공이 되어서 우쭐한 사람이 되었고, 또 자기가 무엇이 잘못되어서 실패가 되었을 때는 자기가 그 실패로 인해서 조금 우울한 사람이 됐고 이렇게 자기 환경에 따라서 자기 희로애락이 생겨지는 이런 사람이 됐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 앞에 살기는 살지마는 하나님 섬긴다는 것이 자기 환경에 피동 되는 그 생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처음으로 다 받기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짐승의 가죽을 벗겨 가지고 입힌 것이 대속인데, 그때에 이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마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죄를 사하는 데에는 대속이 있어야 되지, 무엇이 대신 죽어서 대속이 있어야 되지 대속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해 줬기 때문에 그 뒤에 이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양을 잡고 그 기름과 양과 이래 이것으로 제물을 삼아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해라 명령하고 법령을 내린 일도 있고 내린 것을 기록한 것도 있고, 그것은 기록되지 아니하고 그 사람이 행동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그런 것으로 그 행동 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그것이 사후 선포한 것은 기록되지 않고 선포한 것을 사후에 행동함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또 그 행동을 노여워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선포하신 그 명령과 또 약속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그가 농사를 짓다 보니까 차차 농작물에 애착을 가졌고, 농사 짓다 보니까 농작물에 애착을 가졌고, 또 농작물을 귀중히 여겼고 이러니까 은연중 자기는 그만 농작물 그것의 비중에 마음이 기울어져서 하나님도 이것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어서 그 농작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이 하나님 섬긴 것은 순전히 자기 환경과 자기와 이렇게 서로 상대하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환경에 따라서 차차 차차 변해진 그것이 마지막에 농작물로 하나님 섬기는 결과를 맺게 됐습니다. 또 아벨은 양을 쳤는데 그리됐다 하는, 이러니까 이 가인도 자기 농사짓는 것 가지고 드렸고 아벨도 자기 농사짓는 것 가지고 드렸는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일 아벨이 하나님의 약속 없이 하나님의 명령 없이 이렇게 목축을 하니까 양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면 가인이 자기 현실에 속화되고 거기에 그 물들어서 감염되어 가지고 농작물로 제사 드리는 것이나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벨이 제사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 한 것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대속이 되어야 그 죄가 사함을 받고 또 짐승 중에도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이 제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라 하는 것을 보면 어쨌든지 아벨이 제사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정해 주신 규정이요 대속입니다.
짐승으로 제사 드리는 것이 계속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세례 요한이 증거 한 예수님으로서 비로소 그 피 제사가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아벨이 짐승으로 드린 것은 제가 목축업을 하니까 거기에 속해서 감염돼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약속,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명령 거기에 준해서 드렸던 것은 이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인이 이 죄로 말미암아 자기 양심이 눌려져서 양심이 주는 힘과 양심이 주는 그 쾌활, 용감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된 원인이 어디 있느냐? 그 원인이 하나님의 계약과 하나님의 명령에 준해 가지고 거기에 연결성을 가지고 가인이 움직이지를 못했고 자기 주위와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 일을 한 그것이 원인이 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가 어디서부터 우리를 와서 엿보고 있느냐? 죄가 삐뚤어진 것인데, 삐뚤어진 것, 말하자면 삐뚤어진 것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어서 바르고 옳은 것을 알려주시고 또 바르고 옳은 것을 원하게 하시고 또 바르고 옳은 것을 하게 하시는 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확고히 잡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빛을 주어서 모든 것을 정평 정가하고 바른 소욕을 가지도록 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또 능력을 줘 가지고 이 일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도록 우리에게 역사 하십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먼저 빛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다음에는 능력을 줘 가지고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를 하시는데 이 빛을 오지 못하게 하고 빛이 안 오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오지를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먼저 빛이 와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빛이 안 오면 깜깜 어두워서 모든 생각도 거꾸로요, 비판도 거꾸로요, 평가도 거꾸로요, 가치 없는 것은 가치 있게 여기고 또 가치 있는 거는 가치 없게 여기고, 필요한 것은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고 필요 없는 것은 필요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를 해하는 것은 자기 유익하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 유익하게 하는 것은 해가 되게 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렇게 모든 비판과 평가와 소원과 경영이 전부 어두워집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그 어두운 그것을 도와 가지고 어두운 일이 되어지도록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그에게 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벌써 그리 되면 그 양심이 주는 담력과 기쁨과 용기와 아주 이 용감스러운 것을 자기가 그만 잃게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이 그 사상을 위해서 죽임을 받으면서도 그들이 기쁘고 즐겁게 죽고 용감스럽게 죽고, 또 어떤 애국자가 자기 애국을 위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서 참 순국, 나라를 위해서 죽는 순국을 할 때에 다 담대히 용감스럽게 기쁘게 즐겁게 순국하는 것은 그것은 의지가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다. 공산주의 의지가 그렇게 용감스럽게 담대하게 그 일을 성공하게 하는 것 아니고 또 순국자의 의지가 그런 것 아닙니다. 그 속에 공산주의에 양심이 그리 하는 것이고 또 순국자의 양심이 그렇게 힘을 줘서 그런 것입니다.
그 양심은 살아나지 못한 죽은 양심이지마는 자기의 지식으로서는 '아, 내가 이렇게 공산주의 이 사상, 참 제일 옳고 바른 사상, 인류를 구원하는 제일 바른 옳은 사상, 인류를 위해서 내가 죽는 것이니까 이 죽음은 참 기쁜 일이요 가치있는 죽음이라. 이미 죽는 데는 이 죽음이 가치있는 죽음이다.' 자기 공산주의적인 양심, 공산주의자의 그 양심의 힘을 가지고 그들이 용감스럽게 죽는 것이고 순국자도 용감스럽게 죽는 것은 순국자의 그 양심의 힘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들은 삐뚤어진 죽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지식에 지배를 받는 것인데, 불교는 불교의 지식대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지식대로의 그 지식으로 가지고 이것이 옳다 하는 그 확정을 지은 그것이 사람에게 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산주의자도 그러하고 불교인들도 그들이 일생을 바쳐서 이렇게 살아도 피곤치 않고 기쁘고 즐거운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불경이라는 그 지식에 그가 녹아 가지고 그 지식대로의 양심 그 양심의 힘에서 그걸 하는 것입니다.
기독자들은 또 신앙양심입니다. 신앙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 법칙을 따라서, 하나님의 법칙으로 인해서 생겨지는 그 양심이 신앙 양심이오. 그것이 살아난 양심이오. 이런 인간의 이런 지식 저런 지식에게 감동받아 가지고 그 지식대로, 그 지식의 최종대로 그 지식이 말하는 옳고 바른 그대로 하려고 하는 그 중심 그것이 또 그들의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인의 양심이 따로 있고, 공산주의 양심이 따로 있고, 또 순국자의 양심이 따로 있고, 또 문화 건설자의 양심이 따로 있습니다. 어쨌든지 인간은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지식이 지배하는 것인데 그 지식이 최종 최고적으로 옳다 바르다 해서 인도하는 그것이 곧 양심의 인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종류의 그 지식대로의 종교마다 그 종교에 대한 지식이 있고, 철학마다 철학에 대한 지식이 있고, 사상마다 사상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인데 그것대로 용감스럽게 지겹지 않고 피곤치 않고 용감스럽게 그렇게 그 생애를 해 나가는 사람들의 힘은 무슨 힘이냐? 그 힘은 다 그들에게 양심의 힘인 것입니다.
양심의 힘이 아니면 그 생애를 용감스럽게 기쁘게 피곤치 않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불교인도 그 사람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인간을 능가한 그런 용감스러운 생애를 이루는 것은 그 불교인 그 사람이 불교인의 양심의 힘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오.
또 공산주의자도 그가 공산주의를 위해서 참 용감스럽게 자기의 심신과 생명을 바쳐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그가 공산주의의 그 사상을, 이 사상이 옳다 하는 정도가 아니요 이 사상대로의 양심이 되어서 공산주의의 그 양심이 생겨져 가지고 그 양심이 자기에게 힘을 줄 때에 생명도 아끼지 않고 담대히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자들도 신앙양심이 차차 생겨지고 양심이 자라 가지고 양심의 힘을 얻어 가지고라야 비로소 신앙생활이 참 기쁘고 즐겁고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아깝지 않고 단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이 벌써 죄에 눌리게 되면 그 사람은, 신앙의 양심이 이 죄에 눌리게 되면, 신앙의 양심의 힘을 얻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참 쾌활하게 못합니다.
기독자가 신앙생활을 아주 쾌활하게 피곤치 않게 마지막에 죽어도 죽는 것도 모르고 기쁘고 즐거움으로 자꾸 이렇게 피곤치 않게 단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은 이 양심이 머리를 들고 있고 양심이 그 사람을 도와서 양심의 힘을 가지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양심의 힘을 가지지 못하면 인간을 탁월한 그 신앙생활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양심의 힘을 잃었습니다. 양심의 힘을 잃어서 어쩐지 속에 용기가 발동하지를 않습니다. 이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왜 머리를 들지 못하느냐" 그러면 벌써 하나님 중심의 생애가 안되기 때문에 그는 양심에게 눌렸지, 양심에게 눌리고, 양심에게 끌렸고, 양심에게 맞아서, 양심에게 눌려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 양심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에게 눌리니까 네가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양심에게 눌려서 양심에게 지금 꺾어져 가지고 양심에 눌려 가지고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것 아니냐? 또 그 사람이 어떤 사상에든지 거기에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담대히 이렇게 그 사상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양심, 그 사상대로의 그 지식대로의 양심에 힘을 얻어 가지고 '이것은 참 옳고 바르고 참된 가치 있는 일이다. 생명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바칠 만하다.' 하는 그 양심의 돕는 힘을 가지고 그렇게 용감스럽게 하는 것인데 기독자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기독자가 속 양심에게 눌리면 그 사람은 제가 입으로 뭐라고 말하고 뭐라고 활동해도 그 속에 있는 참된 능력은 없습니다. 그만 피곤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이 양심에게 눌려 있느냐 양심의 돕는 힘을 힘입어 있느냐 그것입니다. 기독자들이 언제든지 용감스럽고, 쾌활하고, 명랑하고, 활발하고, 담대하고 하는 것은 뭐이냐? 양심에 돕는 힘, 양심이 도와주는 '옳다.' 양심이 도와주는 이 양심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오. 양심의 돕는 힘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양심이 그 사람을 누릅니다.
만일 양심이 그를 억누르기 때문에 그에게는 뭐인가 모르게 담대함이 없어지고 비겁해지고 불쾌해지고 용감이 나지 아니하고 피곤해지고 모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억지로 해지고 쾌활하게 해지지를 아니하는 것은 벌써 양심에 도움을 얻지 못하고 양심에게 도리어 내가 이렇지 않느냐 해석을 안 해도 그 모든 힘이 양심에게 눌려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가인이 왜 이렇게 양심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양심에게 눌려서 있었으며, 아벨은 그 형이 죽이는 데에도, 그는 죽임을 당할 줄도 알았고 가인이 벌써 하는 태도가 죽이려는 그런 해치는 일도 했지마는 아벨이 의에 대해서 조금도 그 주저하지 아니하고 의에 대한 용기가 죽는 데까지 용감스럽게 나갔기 때문에 가인과 이 의와 불의가 대립이 됐기 때문에 가인이 죽이지 공연히 죽인 것 아닙니다.
이렇게 아벨은 신앙생활에 이렇게 담대하고 기뻤고 평안했고 용감스럽고 가인은 이 신앙의 힘에 용기를 얻지 못하고 억눌려 있던 것은 왜 그러냐? 가인은 양심에 눌러졌고 아벨은 양심의 돕는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은 어떻게 해서 양심에 눌려졌고 아벨은 양심의 돕는 힘을 얻었더냐? 그것은 그 위에 제사 드린 그것이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어떻게 했기에 양심의 이 참 큰 힘이, 이 양심의 돕는 힘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이 양심에게 눌려서 힘을 잊어버리게 됐더냐?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명령, 자기 주위 환경이야 어떻게 됐든지 그 명령과 약속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접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접촉하는 데에는 그분의 명령 그분의 약속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우리가 접근할 수 있고 사귈 수 있지 그 외에 딴것으로서는 사귀지 못합니다.
아무리 부자가 자기 재산 다 해줘 봤자 그거 내가 만들어 놓은 내것이지, 네것이 어디 하나나 있느냐? 자기 몸을 다, 몸과 생명을 다 드려서 하나님에게 충성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네 몸을 내가 만든 것이고 네 생명을 내가 만든 것인데 네것이 뭐 있느냐? 소용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이 계명, 하나님이 우리와 약속하신 약속 이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 약속대로 약속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계명 지킨 것을 내게 힘있는 대로 내가 이 계명을 지키겠습니다.' 이럴 때에는 하나님이 상대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죄를 짓고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짓습니까? 하나님은 그 계약을 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명령대로, 당신의 명령대로 행하려고 힘을 다할 때에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보충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의 돕는 힘을 얻는 비결은 자기의 주위 환경이라는 그 현실, 농사짓는 가인이니까 밤낮으로 농사 그것만 접하지 않습니까? 농사 접하지 않소? 농사만 접하다 보니까 농사하는 사람이 돼 버렸고, 농사하는 사상이 돼 버리고, 농사에 피동되는 사람이 돼 버렸다 말이오.
밤낮 장사하는 사람은 그만 그 장사에 물이 들어 가지고 사상도 장사, 비판도 장사, 평가도 장사, 그만 이 장사에 물이 들어 가지고 장사로 인해서 움직이는 사람,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됐다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무슨 업을 하든지 공업을 하든지, 상업을 하든지, 농업을 하든지, 무슨 학업을 하든지, 무엇을 정치를 하든지 하면 거기에 감염되지 아니하고 그걸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약에 준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준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디서든 지킨다 그말이오.
아벨은 그렇게 했어. 목축을 했지마는 아벨이 목축할 때에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의 명령을 그 목축에서 지키고 하나님의 계약을 목축에서 이루고, 이러면 목축하는 것은 자기가 뭘 하느냐? 목축에서, 하나님과 계약하는 계약을 그 목축이라는 거기에서 계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목축하는 그 목축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이러니까 목축이, 목축에 따라서 움직여지는, 목축에 감염이 돼서 목축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계약의 사람이 이 목축에서 생활하는 것이니까 이 목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약의 사람이 자꾸 더 되어져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의 사람이 더 되어져서 목축도 하나님의 계약대로의 목축, 하나님의 명령대로의 목축이 돼 버렸다 말이오. 이것이 아벨의 생애요.
이러니까 아벨에게는 그가 참 예수님 다음으로 가치 있는 생애를 한, 예수님 다음으로 승리한 생애를 한, 존영한 승리 생활을 아벨이 했던 것입니다. 아벨이 예수님 다음으로 승리 생활했습니다. 아벨이 예수님 다음으로 영광 생활 승리 생활했습니다.
그것은 뭘로 증거를 하느냐? 히브리서에 보면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주님의 피가 말하고 있다" 이걸 보면 예수님의 대속의 피 다음에는 아벨의 피라. 짧게 살고 갔지마는 그는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는, 자연인으로서는 아벨이 최고의 성공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인이 아니오. 특별인입니다. 아버지 없이 낳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특수인이오. 일반 부정모혈로 된 사람으로서는 아벨이 제일 위대한 생활을 했고 제일 큰 승리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힘으로 했더냐? 아벨은 양심의 힘으로 했다 말이오, 양심의 힘으로 이러니까 사람들이 이 양심의 힘을 얻는다는 것, 자기 양심 '이거라' 양심이 이렇다 할 때에는 힘이 나고 그 모든 용감이 생기고 담대가 생기고 생명을 아끼지 않는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이 양심이 줄 때에 그 힘이 이런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고 자꾸 힘이 약해지는 것은 양심에 눌려 가지고 그렇다 그말이오. 양심에 눌리는 사람은 양심에 눌리는지 모르지마는 그 양심이 벌써 자기에게 힘을 주지 않으면 양심에게 눌리고, 양심이 그 사람을 돕는 힘을 주든지 양심이 그 사람의 힘을 꺾든지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양심에게 꺾어지는 것이, 양심에게 꺾어지는 것이 외부적인 축복이요 양심에게 돕는 힘을 얻는 것이 내부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양심에게 꺾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아주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양심에 눌리지 않고 양심에 꺾어지지 않고 그 사람은 양심을 벌써 파묻어서 죽여 버렸다 말이오. 양심이 벌써 화인을 맞아서 양심을 죽여 버렸어. 양심을 죽여 버리니까 양심의 작용이 없는 사람이고 양심이 화인 맞았다 이렇게 말했어.
양심이 벌써 화인 맞았다 말은 어떤 것으로 인해서 양심이 완전히 죽어 버렸다.
양심이, 그 사람은 돈의 화인을 맞아서 양심이 죽었다. 또 그 사람은 권세의 화인을 얻어 무엇인가 무엇으로 인해서 양심이 그것으로 인해서 완전히 죽어 버린 사람. 그 사람은 아무런 양심에 눌리지를 않습니다.
양심이 안 눌리니까 그 사람은 멸망할 그 불의의 길을 걸어가되 아무런 가책도 없이 용감스럽게 걸어갑니다. 그것은 희망이 없어 그것보다는 양심에 눌리는 사람이 좋고 희망이 있고, 양심에 눌리는 사람보다 양심에 돕는 힘을 얻는 사람이 이제 이 사람이 정상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의 돕는 힘을 얻는 그 원인이 무엇이며 방편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사는데 현실이 같은 현실에서 평생 살기도 합니다. 평생 농사짓는 사람은 그 안에 세포는 다르지마는 윤곽적으로 항상 같은 현실 아닙니까? 같은 현실에 살지마는 현실에 감염되지 않고, 현실에 피동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약과 명령에 피동되어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여기에서 현실살이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양심이 그로 인해서 자꾸 자라게 됩니다.
양심이 자라서 양심의 힘이 점점 강건해지고 양심의 돕는 힘을 얻기 때문에 되는 것이고,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받은 그 명령 생활, 하나님의 승천의 약속 생활, 명령과 약속 그것을 자기 현실에서 그것을 만드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자기가 지켜서 명령의 사람 약속의 사람 그 사람으로 자기를 만들기를 그 현실이라는 현실에서 만드는, 현실은 내가 명령의 사람으로 약속의 사람으로 이 사람으로 만드는 그 일을 현실에서 하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고 도리어 그 현실에게 감염돼서 현실적인 이런 사람이 돼 버리고 말면 그 사람은 양심에게 눌리고 양심의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자기 현실의 사람이 안 돼야 됩니다. 자기 현실에 감염되지 않아야 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이 안 돼야 됩니다. 장사의 사람이 안 되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의 사람이 안 돼야 되고, 정치의 사람은 정치의 사람이 안 돼야 되고, 농업의 사람은 농업의 사람이 안 돼야 되고, 공업의 사람은 공업의 사람이 안 돼야 되고, 자기 업이라고 하는 자기 현실과 환경이라는 그것은 내가 그것에 물들어 가지고 그것의 사람이 되지 않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약속을 거기에서 지키는 데에 이용합니다.
자기의 현실은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연습하는 곳이오. 그 현실에 하나님 계명 한번 지켜보니까 안 되니까 또 한번 새로 지켜보고 또 새로 지켜보고 자기 현실을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연습하는 데 이용해 먹고 그리해서 자꾸 연습하다가 그 현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 이제는 숙달이 돼서 성장이 됐고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그 현실에서 자꾸 성장이 됐고, 이러니까 자기는 현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명의 사람 약속의 사람이 되어지고 난 다음에는 자기 현실이라는 그것이 현실에 따라서 내가 변해지는게 아니라 내게 따라서 현실이 변해져서 현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의 현실 하나님의 약속대로의 현실이 돼 버립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농사짓는 데는 가니까 농사짓는 전부가 그만 계명화돼 가지고 있어. 농사짓는 것이 전부 계명화 되어 있다 이거요. 그 사람이 토지를 가는 것도 계명 지킴으로 가는 것, 보니까 주일날은 보니 갈지도 않고 안 했다 그말이오. 주일날은 또 안 했어. 그 농사가 전부 주일 지키는 농사가 돼 버렸어.
주일 지키는 농사가 돼 버렸어. 그 농사가 전부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농사가 돼 버렸어.
다른 데는 보니까, 6월 6일이라면 논고시라 하는 것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도시 사람이니까 몰라 그렇지. 논고시라고, 논고시 6월에 하지. 오래 돼 나서 6월 6일에 논고시 한다 하면 시골에서는 참 없는데 송편도 하고 온갖 떡을 만들어 가지고 제릇대기를 요막식하게 끊어서 요거 딱 세 개를 요래 묶어 가지고 발꿈치 요래 가지고 한뭉텅이 가지고 토지가 있는 대로 열다래 있으면 열다래 대로 이래 가지고 가 가지고 거기다 그걸 딱 꼽아서 발꿈치를 딱 세워 놓고 거기다 가지고 간 찰밥덩이나 송편이나 그거 딱 이렇게 놓아 놓고 그래 절을 하고 빕니다. 그것은 논에 논귀신에게 지금 섬기는, 그 농사 잘 되게 해 달라고 논귀신 섬기는 것이라. 논고시 한다. 논고시 하는 거라‥‥ 그런데 우리는 그때 처음에 '자, 오늘 논고시 떡 빼 먹으러 가자.' 이래 가 가지고 소 먹이러 가면 가 가지고 서로 달음질쳐 가봅니다. 가보면 어떤 집에는 참 찰밥덩이 이런 것 하나씩 놓아 왔소. 그 하나가 몇 개 거석하면 서로 많이 빼 가지고 가서 갈라 먹고 장난하는데, 예수 믿는 논은 그게 없다 이거요. 다른 논은 다 있는데 그거 없어. 왜 없습니까? 하나님의 계명화됐다 말이오. 하나님의 계명이 그러면 안된다 하기 때문에 그 논고시가 없어. 다른 논에는 다 논고시가 있는데. 이러니까 농사짓는 농사가 전부 하나님의 계명화됐다 말이오. 하나님의 약속화 돼 버렸어.
이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참 양심의 힘을 얻어야 되는데 양심의 힘을 얻으려고 하면 자기가 의지나 결심이나 뭐 충성이나 암만 해 봐야 소용없어. 제일 우리 신앙생활에 뿌럭지가 어디서 있었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약속 이것을 자기 현실에서 계명을 지켜보고 약속대로 해 보고 해서 이 계명 지키고 약속을 하나님이 이렇게 해라 나도 이렇게 해 주마 하는 약속 말이오. 내가 약속을 지켜야 하나님이 약속을 지켜 주시지. 계명과 약속을 지키는 그 일을 어디서 하느냐? 자기 현실이라는 거기에서 한번 또 해 보고 또 넘어지니까 또 새로 해 보고 해보고 자기 현실을 계명 지키고 약속 지켜서 계명 지키는 힘을 기르고 약속을 지키는 힘을 기르는 이것에 이용하는 현실을 만들어야 될 터인 데 가인은 그렇지를 못했다 말이오. 아벨은 그래 됐는데.
가인은 그만 현실에 밤이나 낮이나 항상 보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뿐이니까 그만 거기에 물이 들어 가지고 그 사람이 돼 버렸다 말이오. 현실에게 감염된 현실의 사람이 되었고 아벨은 현실에서 하나님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이 사람이 됨으로 현실을 하나님의 계명화 돼 버렸고, 그러면 현실이 아벨로 말미암아 변화 돼 버렸고 가인은 현실로 말미암아 변화되어서 현실에게 변화 받아 현실대로의 사람이 됐고, 아벨은 현실이 아벨에게 변화 받아서 하나님의 계명대로의 약속대로의 그 현실이 돼 버렸다 그 말이오. 이것이 이들의 신앙생활의 초점입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이거 없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힘을 얻고 여기서 능력 얻고 여기서 오만 것 다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자기 양심에 힘을 얻는 양심의 돕는 힘이 있는지 거기에 오히려 눌리는 힘이 있는지 그것을 판단하고, 해결 짓는 데에는 제사 드리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 현실에 감염되어 있느냐 현실에 하나님의 계명과 약속으로 정복을 하느냐 현실을 이용하느냐? 현실이 뭐라고 하든지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계명 지키고 하나님의 약속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내가 계명 약속 지키는 계명의 사람, 약속의 사람이 그 현실에서 되어져서 현실을 내가 이용하느냐 현실에게 이용을 당해 가지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지느냐 하는 여기에서 죽고 사는 성공과 실패는 판정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 생각도 자꾸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 우리 방편도 하나님이 주시는 방편, 우리의 소원도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 내가 전부 다 하나님에게 기울어져야 되지 하나님 외에 자기에게 기울어지는 것이 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소원대로 자기에게 기울어지는 것이 제일 큰 손해이고 그 다음에는 자기 밖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 기울어지는 것이 둘째 손해입니다.
10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모이겠습니다. 10분 기도하는 10분이 짧지만 이 권찰회 있기 때문에, 10분 기도하는 것은 이 시간에 주시는 말씀을 깨달아서 이치적으로 한번 생각하고 그 다음에 소원하는 사람이 되고 그 다음에는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이 시간 받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보자.' 해 가지고 깨달으려고 애를 써 가지고 깨달아지게 되면 예배시간은 짧아지게 되고 깨닫지 못하게 되면 예배시간은 참 길게 됩니다.
제가 봉산교회 집회할 때에 저녁에 일곱 시에 예배를 시작하는데 일곱 시 예배를 시작해 가지고 그 예배를 끝내니까 아침 여덟시라, 아침 여덟시.
계속해서 설교했고 또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잠도 하나도 졸지도 않고 오줌도 안 누고 어쨌든지 아침 여덟시까지 계속 했었습니다.
그게 뭐냐? 그때가 언제냐 하면 해방직후라 말이오. 왜정말년에 진리를 듣지 못하고 이래 있다가 해방이 되자, 해방이 되니까 사람들 정신이 바짝 차려지는 기회에 하나님 말씀을 들으니까 그때 증거하는 말씀은 지금 증거하는 말씀에 비교하면 아주 어린아이의 말씀이오. 어린 어린아이의 말씀이라. 그래도 이 말씀 들으려고 애를 쓰니까 하나님은 주시는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시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하나님 말씀을 계속 해 줘도 지겹지 않고 단 마음으로 모두 다 날은 샜지만 아무 정신없이 이래 가지고 예배를 끝내고 통성 기도하고 난 다음에 '지금 몇 시입니까?' 하니 그때 사 시계 보고 '아, 여덟시입니다. 날이 샙니다.' 추순덕! 거기 참석했지? 추순덕씨도 참석했고 서봉월씨도 참석했고 그때 참석한 사람 여기 더러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에 이 진리를 자기가 깨달으려고 미리부터 예비기도 할 때에,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예비기도 할 때에 이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 가지고 기도를 해서 어쨌든지 '오늘 아침에는, 오늘 이 시간에 이 예배시간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내가 깨닫도록 하겠다.
깨달을 뿐만 아니라 능력을 받도록 하겠다.'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깨닫도록 하려고 애를 쓰고, 깨닫는 사람은 능력 받도록 하려고 애를 쓰고, 이렇게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쓰고, 잠깐만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바른 기도를 하면 예배시간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지나가도 지겹지 않습니다. 기쁘고 즐겁고 지겹지 않고 그렇소.
그러나 그 통성으로 기도하는 한 5분 동안 그것을 바로 하지 못 하게 되면 자기는, 예배시간에 벌써 그 진리를 깨달으면 내게 있는 마귀가 나가고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오는데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니까 성령은 물리침을 받고 마귀가 들어오니까 자기를 진리 못 깨닫도록 하니까, 괴롭히니까 얼마나 괴롭겠소? 한없이 괴롭혀서 그는 참 피곤하고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비기도 할 때에 이때에 평안하게 즐겁게 수월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거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