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6 15:26
양심의 인도에서 영감의 인도로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올 그때에 여러 가지 재앙들을 애굽에 내려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출했습니다. 구출할 때에 해방되고 난 다음에 어려움 당한 것은 그 광야에서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불이 없어서 어려움 당한 것도 있고. 또 흥해 바다가 가로막아서 어려움 당한 것도 있고, 또 먹을 양식이 없어서 어려움 당한 것도 있었고 그런 어려움 당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또 가나안을 갈려고 할 때에 요단강이 가로막아서 아무런 배 한 척도 없이 갈려고 하니까 어려움 당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흥해 바다의 그 어려움도 하나님의 은혜로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또 마라에 물이 써서 죽게 되었을 때에 나무가지를 꺾어 던져서 단물로 변해서 그 어려움을 면했습니다. 또 물이 없어서 기갈해서 죽을 지경에 하나님께서 반석을 쳐서 반석에 서 물이 나와 가지고 어려움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가나안을 갈려고 할 때에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모든 어려움이 그들의 가는 길에 총총 놓여 있었습니다. 총총 놓여 있었으나 그 놓여 있는 어려움이 하나도 그 들을 끝까지 막아서 방해하지를 못했고 오히려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적하는 대적들이 다 그로 인해서 멸해졌고, 또 그 자신들은 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이 더 힘있게 됐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다 예수님을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한 것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표적입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건너간 것도 표적이요, 또 마라에서 나무가지 던져 단물된 것도 표적이요, 므리바에서 반석을 쳐서 물 나와서 먹게된 것도 표적이요, 만나 가루를 하늘에서 내려서 먹게 된 것이나 또 메추라기를 주어서 먹게 된 것이나 그런 모든 표적은 예수님을 상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한 것입니다. 이것을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가나안을 해 갔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 가지고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가는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나와 가지고 하늘나라 가는 그 상징이요 표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 이스라엘이 갈 때에 그 앞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어려움이 하나도 그들에게 최후까지 어려움 된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 어려움을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봤고 어려움을 인하여 저들의 모든 대적들이 다 정리되고 절단됐지 그 어려움이 끝내 이스라엘에게 손해 보인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 어려움을 통해서 다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애굽에서 나온 것처럼 그 세상에서 나온 우리들이 그들이 가나안에 가는 것처럼 우리는 하늘 나라 향하여 가는데 우리가 하늘나라 향하여 갈 때에 온갖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온갖 어려움들이 있는 것을 그 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때에 그 어려움을 어떻게 면할 것인가? 그 어려움은 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 "물은"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이랬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그 어려움 당한 것은 우리가 신앙 걸음을 걸어서 하늘나라 갈려고 할 때에 닥쳐지는 그 모든 어려움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어려움 당했을 때에 하나님의 이런 저런 모든 능력으로 그 어려움을 다 면하고 도리어 어려움이 없던 것보다도 크게 유익이 되는 그런 결과를 맺게 됐는데 그 어려움을, 이런 것을 통해서 저런 것을 통해서, 나무가지를 통해서, 홍해 바다가 또 작지로 가리켜서 갈라져서,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이렇게 모두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려움을 면하게 된 그 어려움 면하게 된 그것이 흥해 바다 물 갈라진 것, 예수님을 나타내는 그 표적이고, 또 마라에서 물이 써서 그 가지 던지니까 물이 단물된 그것도 예수님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표적이고 또 물 없어 반석 쳐서 물 나온 그것도 예수님의 표적이고 그 반석에서 무슨 물이 나올까 했지만 치니까 물 나왔습니다. 그게 다 예수님 가지고 뭐이 되겠느냐 이러나 예수님 한 분 가지고 다 되는 것입니다. 또 양식이 없을 때에 그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늘에서 양식 내려온 그것도 다 예수님의 표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 걸음을 걸을 때에 우리 앞에 있는 온갖 그 어려움을 닥칠 때에 이 어려움이 이거는 뭐 이렇게 저래도 할 수 없고 나는 절단난다 하는 그런 어려움들을 하나님께서 역부러 자꾸 닥치게 합니다. 처음에는 조그만 어려움 닥치다가 차차 차차 큰 어려움을 닥치게 합니다. 그 큰 어려움을 닥치는 그 모든 어려움은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를 믿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는 이것이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이것 하나 가지고 다 해결됩니다.
그 우리가 파산된 것, 재산이 파산된 것도 제가 달리 하면 하나님이 자꾸 안 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걸 안 되도록 하십니다. 뭐 파산했는데 그게 예수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도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면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그 모든 걸 해결해 줍니다. 자기가 무슨 면할 수 없는 사형수가 된 데도 거기서도 달리 뭐 암만 운동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신앙으로 잘못된 걸 회개하고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그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됩니다.
그때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던 ○○○장로라 하는, 내가 그때 여기 사택에서 권찰님들과 모두 다 식사를 같이 할 때입니다. 그때에 한창 ○대통령의 저해 당한 바로 그 즉시입니다. 그때입니다. 그때에 모두 앉아서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도 다 사형될 것이요 희망이 없다. 그럴 때 내가 말하기를 '○○○장로는 그는 장로기 때문에 이런 데서야 뭐 어떻게 그 사형을 면하겠느냐 싶지만 이분이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이분이 예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지금부터 예수님을 믿는 일을 시작해서 참 주의 공로를 입고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기로 작정하고 그 감옥 속에 있은 사람이 거기서라도 다시 주님을 믿는 신앙을 복구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를 구출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때 그 권사들 모두 다 한자리 있으면서 '○○○씨는 그가 사형 받는다고 하지 못한다. 왜? 큰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는 일반 죄수들과 같지 않다. 그는 암만 사형 받을 만한 그런 일을 닥쳤지만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면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보다 더 어떤 억만 배 큰일이라도 해결되는 것을 성경에 말했기 때문에 그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문제지 믿으면 해결된다.'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했었는데 그 뒤에 며칠 지나고 나니까 그는 무기 징역으로 그렇게 결정이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분이 아마 지금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모르지만 얼마 후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물은' 하는 것은 이거 홍해 바다 물을 말합니다. 홍해 바다 불을 말하는데 물에서 사람들이 물로 인해 죽을 터인데 물에서 원수가 멸해지고 물에서 저희들이 구원이 됐다 하는 그 물은 뭘 가리켜? 곧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하나 상징한 것이요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그 어려움을 닥쳐도 그때에 그 어려움에 예수님을 믿는, 그 신앙이면 그 어려움이 변해서 자기에게 더 유익이 없던 것보다 더 나은 유익이 되고 또 자기의 구원이 된다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인도를 어떻게 인도 따라 갔느냐 하면 낮으로는 구름기둥이 인도 할 때에 구름기둥을 따라서 갔고 밤에는 불기둥이 안도할 때에 불기둥을 따라서 갔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이 앞에 기둥같이 커다란 기둥같이 이래 쭉 선 그 기둥이 앞을 척 갈 때에 이스라엘 대중은 그 불기둥을 따라서 갔습니다. 또 낮에는 거기는 햇볕이 강한 곳인데 아주 그곳은 사람들이 새까맣게 흑인들입니다. 너무 햇빛이 쪼여서 흑인인 그 어려운 더운 데인데 거기에 낮에는 갈 때에 또 구름기둥이. 구름이 큰 구름이 그 앞에 떡 가리워져 가지고 햇볕을 가리워서 가면 구름기둥 가는 대로 따라서 그래 갔었습니다.
그래 간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래 간 것이 큰 낭파 될 때도 있었습니다. 큰 낭파될 때는 이스라엘이 모두 생각하기를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면 좋겠다고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했는데 이 구름기둥 불기둥 따라 갔다가서 이렇게 낭파 당했다 그렇게 모두 다 원망들을 하고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서 어려움 당한 그 어려움은 그 어려움이 아니면 자기네들이 구출 받을 수 없는 그 어려움이었고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원수는 망해지고 그 어려움을 인해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입었던 것입니다. 홍해 바다가 닥친 것도 구름기둥 불기둥 따라가다가 낭파 당했으니까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불평을 했고 원망을 했지만 흥해 바다가 아니면 애굽의 그 추격하는 그 세력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홍해 바다로 인해서 애굽의 그 추격하는 세력은 다 흥해 속에 몰살을 해 버려서 그런 것이 다 완전히 방어됐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은. 그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에 나아갔지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가 무슨 인도인가? 오늘은 그 영감 인도 진리 인도인데, 여기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우리가 세례 받는 것은 물로 세례를 받으니까 무슨 그 물로 가지고 몸의 뭐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는 그런 표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아니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그러면 이와같이 우리가 세례 받는 것은 이스라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가는 그것은 영감의 인도를 받아가야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서 보이는 것인데. 영감 인도는 무엇이 영감 인도인가? 영감 인도는 양심 인도라 그 말입니다. 영감 인도는 양심 인도라. 그러면 양심이 영감인가? 영감 받은 마음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양심이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데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데는 양심이 없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딿지 못합니다. 양심 없이는 하나님의 인도를 딿지 못합니다. 양심이 아니면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를 수가 없고 자기 현실에서 이래야 되느냐 저래야 되느냐 하는 그 하나님이 이래라 할 때 이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딿은 것이고 저래라 할 때 저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 지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딿은 데에는 착한 양심이 우리를 인도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착한 양심은 그것은 우리 인간 요소인가 하나님의 요소인가? 제가 스톱 박사라고 한국에 와 가지고 선교사로서 설교하는, 그 선교사 중에는 스톱 박사가 제일 제가 보기에는 제일 그 진리에 신앙에 서서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뒤에 얼마전에 척 스미스 목사라고 선교사 왔었는데 그분이 그 스톱 박사보다도 좀더 바른 길을 잡았읍디다. 그는 뭐 공부를 많이 해 그렇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바른 길을 잡았어. 그래서 제가 미국 선교사로서 제일 좋은 길을 잡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은 척 스미스 목사입니다. 그 다음에는 스톱 박사입니다. 그 스톱 박사는 그는 양심을 가리켜서 인적 요소라고 하지 안하고 양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운데 끼어 있는 하나님의 사자라, 하나님의 천사라 그렇게 해석을 가집디다. 그것은 좀 틀리기는 틀렸지만 양심의 중요성과 양심의 그 권위성을 그가 표시한 것은 바로 표시했습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비(非)를, 잘못을 하나님에게 가서 다 고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그 뜻을 우리들에게 와서 전달해 주는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사자라. 그 양심이 역사하는 것을 똑똑히 봤기 때문에 양심생활 했으니까 양심의 역사를 그가 알고 하는 말입니다.
양심은 천사나 뭐 신적 요소가 아니고 우리 인적 요소입니다. 인간에게 속한 인적 요소인데 인적요소 가운데에 제일 현철하고 밝은 것이 양심입니다. 중생된 영은 그것은 성령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그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 격이고, 우리의 심신에는 마음과 몸으로 되어 있는 이 심신 중에는 제일 명철한 자가 뭐이며 제알 현철한 자가 뭐이며 제일 옳고 바른 것을 바로 선택해서 판정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우리 속에 있는 빛이요 우리의 눈이라 이랬습니다. 양심은 그 인격의 눈이라 그렇게 마태복음 6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가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 만나지 양심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자기가 의지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자기의 그 자존심으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자기의 무슨 어떤 욕망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고 자기는 또 무슨 계획적인 방편적으로도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지만 그런 것은 다 헛되고 거짓부리입니다.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야 되지 양심 빼놓으면 신앙생활에는 마치 눈먼 소경과 같은 것입니다. 양심을 빼놓으면 하나님을 따라가는 그 빛이 등불이 없어졌습니다. 험한 길에 빛이 없으면 저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함정에 빠져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양심이 없으면 자기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양심이 귀중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 필요성을 알아야 됩니다.
양심도 불교자의 양심과 또 공산주의의 양심과 양심이 다릅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지식의 지배를 받아서 공산주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공산주의 지식적인 양심이고, 유교의 그 교훈을 받은 사람은 유교적인 양심이고, 불교의 교훈 받은 사람은 불교적인 양심이고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써서 그 알고 있는 지식대로 알고 있는 지식대로 고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참되게 고 지식대로 바로 해볼려고 바로 나아 갈려고 하는 고 마음이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우리에게 불교인으로 말하면 불교인 그 불경대로의 양심은 불경에 제일 어떻게 하면 불교대로 바로 갈 수 있느냐? 불교대로 제일 이상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고 마음을 고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불교인의 양심입니다. 또 공산주의의 양심은 공산주의의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공산주의로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공산주의냐? 진짜 공산주의의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의 양심이 그에게 지도해 주는 대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들이 다 삐뚤어졌기 때문에 그 양심이 다 삐뚤어져 다 죽은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죽은 양심이고 기독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그 지식과 자기가 받은 영감대로 지식대로 고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할려고 하면 어떻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영감대로 바로 할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고 하나님의 영감과 하나님의 지식 고걸 활용해 가지고 고대로의 바로 할려고 하기 때문에 기독자의 양심은 보배로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양심은 산 양심이요 모든 이방인의 양심은 다 그것은 죽은 양심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자들이 양심에 대해서, 성경에 말하기를 그 양심이 화인 맞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화인을 맞는 것은, 혹 그런 것을 못 본 사람들도 있는지 모르지만 무슨 보배로운 그런 가치 있는 것은 하 면 과거에는 화인을 찍었습니다. 화인을 찍어서 다시 그것을 변동하지 못하도록 그 물건에 대해서 화인을 꽉 찍어 버리면 그 쇠로 도장을 만들어 가지고 벌겋게 달궈 가지고 꾹 찍어버리면 그만 그것이 타면서 인이 꽉 박히는 것을 가리켜서 화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그 화인보다도 이제는 무슨 기계로 가지고 어떤 것 있으면 그 쇠면 쇠에 꽉 누르든지 이라면, 그 쇠가 글자면 글자가 딱 쓰여 가지고 인을 치는데 지금은 그게 내나 뭐 그 화인이 발달돼 그런 것입니다. 그게 다 열이 가해 가지고 그런 걸 하고 기계로 가지고 한 것인데. 그전에 저의 집에는 소를 먹였는데 소를 언제든지 소 품평회가 본다 하면 소를 몰고 갑니다. 가친이 소를 몰고 가면 갔다 와 보면 뿔에다가 그 화인을 꾹 찍어 가지고 이거는 일등이다 하는 그런 것을. 늘 소만 몰고 가면 화인을 맞아 가지고 오는 그런 것을 봤습니다.
그게 화인인 데, 양심이 화인 맞았다 하는 것은 양심은 있기는 있는데 화인 맞은 것은 뭐냐? 만일 화인 맞았으면 그 화인의 것이라 그 말입니다. 만일 일등의 화인을 맞았으면 이거는 일등 소라 하는 것이 돼졌습니다. 또 만일 어떤 물건을 두고 아무 것이라 하는 그 이름을 화인을 찍어 버렸으면 이 물건은 그 사람의 물건이라 그 말입니다.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거기 대해서 해석을 그걸 뭐 주석들을 해도 구구하게 하지만 그 해석을 바로 하지 못해 가지고 거기에 많은 고민들이 있는데.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말은 양심이 어떤 것의 것이 됐다 그 말입니다. 그 소에다가 화인 맞으면 그 화인 맞은 대로 이거는 일등 소라. 또 만일 김 뭣이라. 김 뭣이의 화인을 갖다 찍었다면 김 뭣이의 소라. 물건도 김 아무것이의 화인을 찍었으면 그 사람의 것이라. 그런데 양심 이, 양심이 그 주인이 생기게 됐다. 양심의 주인이 생기게 됐다. 양심의 주인이 생기게 됐다 그 말입니다.
양심은 주인이 없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주인이 없습니다. 요거 아주 좀 어려운 말인데. 양심은 주인이 없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이 벌써 주인이 생겼으면 그것의 양심이 됐기 때문에 그 양심은 그것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양심은 죽은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그 사람이 만일 자기 그 주관대로 자기 중심대로의 어떤 욕심이든지 자기 중심대로의 무슨 감정이든지 자기 중심대로의 무슨 그 정서든지 자기 중심대로의 무슨 복수든지 뭐든지 자기 중심대로의 무엇이든지 하나 생겨진 그것이 벌써 요동하지 못하도록 언제든지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모든 양심이 고 중심으로, 이 사람이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 중심 아니고 물질 중심으로 산다고 하면 물질 중심의 양심이 됐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양심은 물질 중심이 주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양심은 어떤 데든지 그 양심이 활동하기를 물질 중심으로 모든 비판하고 평가해서 판정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화인을 맞은 양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직장이라면 그 직장은 뭐 자기는 이것도 저것도 뭐 그만 직장 위주로, 직장 중심으로 해서 자기에게 무슨 주일을 지키는 것이 계명 지키는 것이 가정이든지 자기는 그 직장 위주로 직장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직장 중심이 그 사람의 양심의 주인이 됐기 때문에 그 사람은 무슨 일을 닥치든지 그 양심은 직장 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직장 중심의 양심이 됐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 돈의 양심이 돼도 안 되고 욕심의 양심이 돼도 안 되고 무슨 명예의 양심이 돼도 안 되고 권세의 양심이 돼도 안되고 자기는 가정의 양심이 돼도 안 되고 자기는 남한테 분한 일이 있어서 아주 분한 일이 있어서 복수할려고 지금 하는 복수가 자기에게 양심의 주인이 돼도 안되고 양심의 주인이 자기에게 있으면 그 사람은 화인 맞은 양심이기 때문에 그 양심은 옳고 바른 것을 바로 판단하지를 못하는 사람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째 우리가 양심을 가꾸어서 양심이 바로 자라야 되겠는데, 그 양심을 바로 가꾸는데 수의 할 것은 양심이 화인을 맞지 안해야 되는 것입니다.
양심 이 화인을 맞지 안해야 되지 양심이 화인 맞으면 그 양심 그것은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양심은 모든 것은 그대로 판단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이것 단단히 아십시오. 양심이 화인 맞는 것은 어떤 것이 양심 이 화인 맞는 것인가? 자기 중심이 되어 있는 자기 중심에, 하나님 중심 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에게 하나님 외에 무엇이든지 중심되어 있는 그것이 있으면 양심은 화인 맞은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 중심 외에 민족 중심이라. 민족 중심은 좋지 않습니까? 민족 중심이라, 국가 중심이라. 그 사람은 인류 중심이라, 문화 중심이라. 물질 중심이라, 가족 중심 이라, 자기는 무슨 직장 중심이라, 사업 중심이라.
무엇이든지 하나님 외에 그 사람이 무슨 중심을 가졌든지 중심 가진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의 양심은 화인 맞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다 죽은 양심이요 산 양심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 보면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 영감 중심이 아닌 그 외에 그 사람에게 무슨 중심이든지 그 사람은 그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그 사람의 중심 위주가 돼 가지고 있다 하는 그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벌써 화인이 맞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모든 비판이나 평가가 전부 그 중심대로의 비판입니다. 그것이 물질 중심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비판이나 평가를 하는 것이나 접촉하는 것이나 모든 사고 방식이 전체가 물질 중심의 방식이 되고 말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양심이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야 멸망받지 안하지만 그 사람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만일 양심이 자기를 옹호하는 양심이 됐으면 그게 화인 맞았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딴 중심이라 그 말은 내나 분석하면 자기 중심이라는 그 말입니다.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좀 그건 알게 하니까 이것 말하면 이것 모르고 그러면 그만 헛일입니다. 다 그것 엮어지고 있어야 되지. 이러기 때문에, 양심이 주관적인 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어떤 그 피조물이든지 피조물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일을 딱 생각할 때 그 일을 생각하면 그 일을 생각하면서 내편이 돼 가지고 나를 유리하게 생각한다면 그 양심은 죽은 양심입니다.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저 사람은 원수하고 나하고 둘이 관계된 그 일에 대해서도 그 일을 비판할 때 원수편도 되지도 안하고 내편도 안 하고 원수를 옹호하지도 못하고 나를 옹호하지도 안하고 원수를 위하지도 안하고 아무 편도 되지 안하고 냉정스럽게 아무 데도 연결돼서 끌리는 일이 없이 양심 제대로 올바른 판정을 가지는 그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마치 지남철이, 나침판 말이오 지남철이 남쪽을 가리키는 건데 남쪽을 꼭 바로 가리킵니다. 가리키는데 그 지남침을. 나침판 그걸 그 못 옆에다가 못 옆에다가 얼마 동안 놔 뒀다 보면 그만 그 지남침은 그것은 화인 맞은 것처럼 병이 들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정남을 가리키지 못하고 그것이 엉뚱하게 돼 버리고 맙니다. 만일 나침판이 남을 가리키고 있는데 여기 못이 가까이 있으면 이리 삐그러져가 이리 자꾸 이리 옵니다. 이리 오는 것은, 그것은 보면 이게 자꾸 흔들어 흔들고 가만히 서 있지 못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어디 딴 게 충격을 주면 그것은 정남을 가리키지 못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양심이라 하는 것이 무엇에든지 충격을 받으면, 양심이 정상적인 판정이나 비판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어디든지 매이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양심이 매이지 않도록 할려고 하면 자기에게 자기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이 마음에 감정이 이런 감정이나 저런 감정이나 어디든지 그 사람이 어떤 감정이라도 그 마음에 감정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의 양심은 벌써 이래 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가지를 못합니다. 그 자기가 무슨 욕심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그렇습니다. 완전히 우리는 자기의 마음을 비어서 진공과 같이 아무것도 없이 여기도 저기도 매이지 안하고 그저 영감과 진리를 생각하면서 옳게 하는 것이 어떤 게 옳게 하는 것인가, 냉정스럽게 자기의 앞길을 바로 비판할려고 해야 되지 자기편이 되면 그 양심은 죽었습니다. 누구의 편이 돼도 양심은 죽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주인이 없어야 된다. 양심은 매인 데가 없이 자유 해야 그 양심이 살아 있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가꾸어야 되는데, 제일 주의할 것이 뭐냐 하면 양심이 화인 맞는 일을 안 해야 됩니다. 양심의 주인이 없도록 하는 것을 첫째 우리가 주의해야 되고 양심의 주인이 없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주인이 없도록 그렇게 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양심을 죽이지를 안해야 됩니다. 양심을, 둘째로는 양심을 죽이지를 안해야 됩니다. 양심을 죽이는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을 죽이는 것인가? '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은 뜻인데 요게 옳기는 옳은데 하는 것을 옳은 대로하지 안하고 요거는 틀렸다, 요래 하는 것이 옳지 안하다. 요게 틀렸다. 틀린 줄 알고 하는 그것이 양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틀린 줄 알고 하는 것이 양심을 죽이는 것이오.
또, 셋째로는 자기가 틀린 줄 알고 하는 것이 양심을 죽이는 것이요, 옳은 줄 알고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하면 양심을 파묻는 것입니다. 양심을 매장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매장하는 것이오.
또 자기가 옳은 것을 옳게, 자기가 옳게 바르게 할려고 애를 쓰는 것이 자기가 '내가 어짜든지 나는 지금 한번 참 심판받을 것이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옳게 바르게 내가 하겠다 옳고 바르게 할려고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을 표준해 가지고 옳고 바르게 할려고 애를 쓰는 것, 옳게 바르게 할려고 애쓰는 마음, 옳게 바르게 할려고 애쓰는 마음 그것이 뭐냐? 넷째입니다.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다. 양심을 가꾸는 것. 그것이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다. 이제, 양심을 가꾸는 것은 마치 이런 식물에 북을 돋워 주는 것 모양으로, 북을 돋워 주는 것 그거는 키우는 거는 아닙니다. 잘 크도록 북을 돋우는 것, 가꾸는 것입니다. 가꾸는 것.
그러면 이제 몇째입니까? 요번에 다시 나오면 뭡니까? 몇째입니까? 다섯째는 양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양심을 기르는 것은 어떤 게 양심을 기르는 것이냐? 자기에게 옳다 판정된 그대로 손해가 가든지 어짜든지 요게 옳다 싶으면 그대로 해 버립니다. 해 버리면 양심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양심의 주인을 정하지 마라. 양심에 화인을 맞지 마라.
화인 맞은 거는 양심의 주인이 있으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그걸 제일 주의해야 되고, 그거는 왜 그러냐? 그거는 양심이 악용이 됩니다. 양심이 악용이 되기 때문에, 화인 맞은 사람은 그 사람은 말을 들어 보면 그게 분명히 틀렸는데 그게 자기가 옳은 줄 알고 자꾸 말하고 자꾸 말 해. 제가 말해 놓고 제가 뭘 말해 놓고 난 다음에 또 다른 사람이 그거 틀렸다 말하지 않으니까 제가 말해 놓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아무도 대항 없으니까 아, 이게 옳은 갑다. 제가 삐뚤어진 걸 제가 말해 놓고 그 다음에는 긍정하고 제가 말해 놓고 긍정하고 자꾸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마지막에 멸망을 받아야 그게 중단되고 만다 그 말이오.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 화인 맞은 것이 제일 불행스럽습니다. 제일 손해가 양심이 화인 맞는 것. 화인 맞는 것은 양심이 주인이 있다 그 말이오. 주인이 뭐냐? 그게 뭐이냐 하면 제가 양심 주인이 됐다 그 말이오. 제가 양심의 주인이 돼 그 양심이 자기를 위해서 자기 위주 자기 중심으로 양심이 활동하기 때문에 양심에 가책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그거는 벌써 희망이 없습니다. 참 하나님의 어떤 징계를 받아야 되지. 양심이 화인 맞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
그 다음에는 양심을 어찌 해야 됩니까? 양심을 죽이지 말아야 되는 것. 양심을 죽이지 마는 거는 뭐 어떤 것이 양심 죽이지 마는 것입니까? 이 거는 틀렸다 하면서 틀린 그것을 하는 것이 양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뭡니까? 양심을 어짜는 것? 양심을 매장하지 마는 것, 양심을 매장하지 마는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을 매장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옳은 줄 알고 하지 않는 것이 양심을 매장하는 것이라 말이오. 옳은 줄 알고 하지 않는 게 양심을 매장하는 것이라.
또, 네째가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다. 북 돋우는 것, 양심을 가꾸는 것, 양심을 가꾸는 것은 어떤 게 양심을 가꾸는 것입니까? 옳게 바르게 할려고 자꾸 애를 쓰고 뭐이 옳으냐? 어찌하면 이래야 옳으냐 저래야 옳으냐? 자꾸 옳고 바른 것을 찾아서 옳게 바르게 할려고 우리가 애쓰는 그것이 양심을 북돋워 주는 것이요 양심을 가꾸는 것이라 말이오.
양심을 기르는 것은 어떤 게 양심을 기르는 것입니까? 자기가 옳다 하면 보기에 요게 옳다 하면 옳다 하는 것을 할 때는 반드시 희생이 갑니다. 옳다 하는 대로 할려 하면 직장이 흔들리든지 뭐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든지 또 물질이 손해 가든지 자기 위신이나 명예가 뭐 어짜든지 자기 신상에 무슨 일이 있든지 꼭 양심대로 옳다 싶은 것을 할려고 할 때에 그런 지장이 없는 것도 있지만 지장 있는 일이 있습니다. 양심대로 할려 하고 자기에게 큰 해가 닥쳐오는 일이 있는데 해가 닥쳐와도 자기가 그때에 양심을 배척해 버리지 안하고 고대로 실행하는 것이 그것이 양심을 그만 기르는 것입니다. 양심을 기르는 것.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양심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지 도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에 대해서 다섯 가지 순서를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늘 그대로 힘을 써야만 신앙이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 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 중에 양심이 화인 맞는다는 것을 깨닫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양심 화인 맞는 것. 그 양심 화인 맞는 것은 해석이 구구한데 그 해석을 바로 하고 있는 그런 주석들이 많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모든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것이니까 양심이 화인 맞는다는 그것을 예사롭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러분들이 단단히 기억하고 똑똑히 못을 박아 놔야 되지 양심이 화인 맞는 것은 요거는 내가 요게 양심 화인 맞는 것이다 하는 것을 확고한 지식으로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