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21:13
양 99마리
1984. 3. 4. 주일오전
본문: 누가복음 15장 3절-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 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리라
이는 비유입니다. 비유는 어떠한 그 실상을 그와 비슷한 것을 인용해 가지고 알기쉽게 하려는 그런 방편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네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들으면 쉽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렇게 본문에 기록했습니다. 주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내가 너희들에게 한 말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권위성을 보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에누리하는 그런 죄를 우리가 회개해약 됩니다. 에누리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성경에 자주 말하기를 '믿는 대로 되리라'말씀했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를 해야 참 하나님이 어떠 분이신 것도 세상에게 보여 줄 수 있고, 하나님 믿는 자기도 천해지지 안하고 존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을 가지는 그 연결이라 그렇게들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성경에 발표해 놓은 그 모든 소망을 실상으로 이루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해 주실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믿지 안하고 지키지 안하니 내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해 줄 수 있겠느냐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이는 털끝 만치도 가감이나 거짓이 없는 이 말씀인 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대해야 합니다. 악령은 우리를 미혹시켜 가지고 믿지 못하게 하고 또 믿는다고 해도 에누리를 하도록 합니다. 어느 정도 믿고 어느 정도는 믿지 말아라 이렇게 우리를 미혹시켜 줍니다. 우리는 하나에서 끝까지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칼빈 선생을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 위대한 점이 다른 점도 있지마는 제일 위대한 점은 성경이 말씀한 그대로 행하고 그대로 또 중단하는 거 성경이 하라 하는 데까지 하고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는 요것 단정을 지운 그것이 제일 위대합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한 것입니다.
여기에 첫째로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은 아흔 아홉 마리를 여기에 '들에 두고' 했는데 들에 두고 했다 말은, 이 목축을 할 때는 이리 저리 다니면서 방목하기 때문에 들에서 방목을 합니다. 방목할 때에 장막을 치고 양떼를 장막 안에 가두어서 보호하기도 하고, 장막을 치지 않을 때에는 목자들이 주변에 둘러에워 가지고 그 양들은 맹수들이 해하지 못하게 그렇게 지키는 것이 그들의 목축하는 상례입니다. 잃어버리지 안한 그 약 아흔 아홉 마리는 그 다음에 7절 하반절에 해석하기를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의인 아흔 아홉을 양 아흔 아홉으로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한 것은 말세지 말입니다. 또 우리는 이 남북에 우리와 사상이 다른 무신론주의 유물주의를 우리 앞에다 두고 그들은 우리를 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지금 방어하는 이런 일로서 참 쉴 사이가 없이 고민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국제간의 어려움이요 이것은 육체적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신령한 면으로 어려운 것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 도덕면이라든지 지식면이라든지 지혜면이라든지 자기의 사업면으로 어려움이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외모만 보기 때문에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그 성공이 실패되는 그런 성공들이 많습니다. 비유에 농장을 많이 더 넓히고 또 장사의 길을 많이 열고 또 가정에 따뜻한 그런 정이 있었지마는서도 그들은 주인이 그들을 멸한다는 그 무서운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주인이 혼인 잔치에 청할 때에 청함을 받지 안하고 저희들은 거부하고 자기네들 좋아하는 대로 했습니다.
자기네들의 좋아하는 대로 그렇게 했으니까 성공같지마는 그거는 대실패입니다.
성공 같으나 대실패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이 세상적으로 성공같으나 그것이 절대자요 주권자이신 조물주에게 향하여 실패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공같은 실패가 믿고 실패같은 성공들이 많고, 평안같은 환난이 많고 환난같은 평안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하는 평안을 세상은 환난이라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환난은 세상이 평안이라고 말하는데, 인간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조물주이신 그 분의 평가대로 비판대로 판정대로 결국은 그대로 돌아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말하기를 자기에게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물론 약간의 대적들이 있었지마는서도 그런 대적 해 봐야 그까지 거야 뭐 몇 안 됩니다. 다윗이 나의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 불신자들은 전혀 보지 못하는 그 원수를 두고서 한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원수를 보는 눈이 있어야 되겠고 또 그런 원수의 해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세상 지식, 세상적으로 해나 알고 유익이나 알고 이해를 알고, 세상적으로 생사를 알고 그것을 기준해서 산다면은 그 사람은 완전히 실패하는 사람이요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되고 말겠습니다.
그런고로, 세상에는 육적으로 어려움도 있고. 또 이 심령적으로 어려움도 있고, 또 인격적으로 어려움도 있고. 또 도덕적으로 어려움도 있고, 사상적으로 어려움도 있습니다. 사상적으로 어렵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영감과 진리의 사상을 가졌는데 이 사상을 우리가 보수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얼마나 이 사상 보수가 어려운지 모릅니다. 지금 이북에서 이남을 노리고 있는 이런 것은 하나의 육체의 어려움이요, 또 그 어려움이 모든 사상의 어려움이요, 또 생사의 어려움이 다 겹쳐 가지고 있는 어려움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덮치면 이 신앙의 자유를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또 하나님을 섬기고 이 은혜 받는 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많은 방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북에는 뭐라고 말해도 이북에는 나타나 있는 참 신자가 없습니다. 참 신자는 거의 다 순교를 당했고 없습니다. 또 중공은 좀 낫지마는서도 소련서도 그것은 다 가장한 그런 거짓 기독교인이지 참 기독교인은 그들이 알면은 용납지를 안하고 있습니다.
이 개적인 어려움, 또 사회적인 어려움, 국제적인 어려움, 경제적인 어려움, 사업적인 어려움, 도덕적인 어려움, 내가 미국에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딸을 낳아놓고 크게 탄식을 하고 이거 큰일 났다 고서 '요새는 딸이 아들보다 낫다는데 왜 그렇게 걱정하느냐?' 이 딸을 어떻게 이걸 집안에 가두어 키우지도 못하고 이걸 어떻게 해서 이걸 깨끗하게 성결을 지켜서 깨끗하게 기를 수가 있겠느냐 그렇게 말을 합디다. 또, 어떤 학생이 공부하러 가게 되는데 '부디 그냥 보내지 말고 결혼을 시켜 가지고 보내도록 하십시오. 이곳에 와 가지고 총각으로서 그냥 깨끗이 지내는 총각이 전혀 없다고 할 만치 그만치 세상은 소돔 고모라성화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한테 전화하는 전화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 우리는 큰 환난을 만나고 있고 환난 중에 있고 또 환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닥친 환난, 앞으로 다가올 환난, 우리가 모르는 환난 아는 환난 그 뭐 환난의 종류도 헬 수 없을 만치 많습니다.
그러면 이 환난에 피난을 어떻게 할건가? 우리는 피난을 해야만 합니다.
제가 어제 아침인가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새 벽, 두시 되어서 자지도 안하고 깨어 있었는데 이상하게 내가 휘말려 가지고서 전쟁 속에 들어갔습니다.
전쟁 속에 들어갔는데 그 전쟁에서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국군 부대속으로 들어가야 우리가 피난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국군 속으로 갈라 하면 거리 멀고 이러니까 그렇게 당황하지 안하고 조금 태연스럽게 있는 가운데는 표시는, 발표는 안 하는데 내부를 보니까 원수에게 항복하고 공산주의에게 뭐 입으로 그렇게 말하고 그만 그들에게 항복하고 그들의 사상을 받아서 그들편이 된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두 생각 사이에 끼어 가지고 좀 당황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나간 6·25때에 저 호남 편으로 공산부대들이 내려갔는데 거기에는 교회들이 신앙을 지킨 교회가 없었습니다. 전부 다 신앙의 지조를 다 팔았습니다. 호남 신앙들이 아주 그때 어렸던 모양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이 와서 다 믿는 사람들을 조사해 가지고서 끌고 가고 너희들이 우리에게 항복하고 우리를 협조하고 우리와 같은 사상을 가지면 살려두고 그래 안하면 죽인다 이러니까 전부 믿는 사람들이 자수 다 하고 이북에서 내려온 공산주의적인 신앙생활 하겠다 하고서 다 굴복을 했는데, 제가 대구 어떤 여관에서 성경을 보고 앉았으니까 아주 훌륭한 신사가 좋은 옷을 입고 와 가지고서 절을 하면서 '아이구 목사님 되십니까?' 그렇게 말을 합디다. 제가 말하기를 '아니 저는 목사 아니고 전도사입니다.' 이라니까 어디에 있었느냐 해서 거창 있었다 이라니까 '거기는 어찌 되었어요?' 자기 지방의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 부근에서는 이리라는데 그곳의 사람인데 그들이 자수하라고 해서 다 자수를 했는데 자기는 '그렇지만 어째 예수 믿는 사람이 무신론자에게 자수를 할 수가 있는냐 우리 잘못한게 없는데.' 그래 가지고서 땅굴 속에서 피해 가지고서 몇 달 동안 지내 가지고 그 어려움을 피했다고. 그래 나와 보니까 자기 삼촌이 장로인데 그들에게 끌려가 죽었다 그 말을 듣고서 '그래 어째 죽었냐' 이라니까 전부 자수한 사람들이 사흘 만에 한번씩 자기 정치를 협조해서 민심을 조사해 가지고 보고하라 이래서 사흘 만에 한번씩 보고했는데 마지막 보고하러 들어가 가지고는 나오지 안해서 어쩐 일인가 해서 보니까 벌써 그 사람들은 후퇴해 버렸고 자수하고 매일 보고하고, 살겠다고 주를 팔고 보고 한 사람들은 학교 운동장에다가 구덩이를 파고서 묻었는데 뭐 일곱 층을 묻었다던가 그래 묻었는데 삼촌은 장로인데 그 송장 중에 제일 밑에 들어 있는 송장이 되어서, 옷만 보고 찾았는데 뭐 수백 송장을 자기가 사람과 함께 들추어 가지고 그 밑에서 찾아냈다고서.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기의 생명을 구하겠다고 하는 그 사람들도 성경 말씀 꼭 고대로 '생명을 구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와 내 도를 위해서 생명을 버린 자는 찾으리라' 말씀한 그대로 꼭 이루어졌습니다.
여수 반란 때에도 그 ○○○씨 동생이라고, 지금 목사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일곱 청년이 같이 가면서 반란군에게 붙들려 가지고서, 그러니까 옆예 있는 모든 적색있는 학생들이 '이놈들도 다 예수 믿는 놈이요 예배당 다니는 놈들이다' 이라니까 여섯 학생은 말하기를 '아, 봐라 너 내가 예배당에 다녀도 술먹고 담배 피우고 그렇게 하지 않더냐? 내가 거기 뭐 놀러 가고 무슨 아름다운 여자가 하나 있으면 그런데에 연애하러 갔지 내가 교회 어데 믿으러 갔는 줄 아느냐? 내가 너 보기에 담배 피우지 않더냐? 나는 예수 믿는 사람 아니다. 나는 지금 공산 사상을 받아들여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라니까 그 사람이 있다가 '너거는 가거라.' 하나 그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래 말할 때에 그래도 예수님을 팔 수 없어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요놈은 저 감방에 가둬라. 다 해방시켜 놓고 난 다음엔 잔치를 아주 재미있는 잔치를 하자' 하면서 잡아서 감방에 갖다 가두라 하고서, 다른 사람은 피해서 도망을 가는데 도망가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예수님을 팔고 도망가며 생각하니까 암만 급해서 팔았지마는서도 마음에 안 됐다 말이오. 한번 더 만나면 또 한 번 더 팔 것이고 두 번 만나면 두 번 팔 것이고, 세 번 만나면 세 번 팔 터이니까 안 팔기 위해서, 거기에 보니까 하수구 구덩이가 있는데 그리 이제 도망을 갈라고서 그리 들어 가니까 저 뒤에 오는 인민군들이 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하수구로 자꾸 이래들어 갈려고 지금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뒤에서 따발총으로 그만 다르르 놔 가지고서 싹 여섯 사람이 다 죽어 버렸어. 한 구덩이에 다 죽어 버렸고, 요 한 사람은 살아서 이제 이제는 사형은 받는 것이니까, 뭐 죽음이 왔으니 얼마나 기도를 열렬히 했겠습니까 '주여, 이제는 내 생명을 받으시옵소서.' 이제는 내가 주님 앞에 갈 수밖에 없으니까 내 생명을 받아달라고서 그렇게 기도하니까 문을 콱 차는데 어떻게 벼락치는 소리가 났든지 고만 이사람이 참 기절할 만침 놀랬어. 그래 문을 떡 열더니마는 '어짠 놈이냐?' 이제까지 기도했으니까 '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수고 했습니다. 우리는 국군입니다.' 표를 해주면서 '집에 가십시오.' 그래 그 경우를 묻고서, 그래 그 사람이 살았다고. 그래 가지고 ○○신학교 공부할 때에는 꼭 서부 교회 왔었습니다. 서부 교회 와 가지고 제 밑에서 일하다가 그 뒤에 목사 되고 난 다음에 몇 해 동안 연락이 있었는데 그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교파하고 저하고 이래 관계가 끊어지니까 소식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뭐 부대 안으로 들어가서 피난하자 또 그들에게 항복하고 피난하자 하는 이런 말이 다 소용없는 말이라 그말이오. 저는 거기에서 당한 하다가 생각하니까 '야 이게 아니다. 우리의 피난처가 있는데 이 피난처로 피난을 해야지, 성경 말씀 한 대로 피난해야지 달리 피난해서 되느냐' 하는 이것을 발견하고 나니까 참 평안합디다. 그래서. 그때에 제가 그 비몽사몽 간에 피난길을 찾고 난 다음에 내가 그때 생각하기를 '아, 시편 91편을 읽어보자' 시편 91편을 두 번, 두시에 일어나 가지고 성경을 읽고 그래 기도하고 있다가 새벽기도 나왔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우리의 피난처를 첫째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피난처.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여기 '들에 두었다' 하지마는 다른 데 보면 우리 안에 들지 안한 양이 있는데 다 우리 안으로 함께 이끌어 들여야 되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아흔 아홉 마리 양은 하나님의 그 전지전능 주권자 그분이 개미 한 마리의 수염도 움직이라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지 아니하시면 개미 한 마리가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주권적 개별 섭리를 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는데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걸 믿어야 됩니다.
너희들에게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들은 참새 여러 마리보다 귀중하다 내가 허락지 안하면 한 사람의 생명도 해할 자가 없다, 그렇게 마태복음 10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전지전능의 주권자이신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희생해 주신 자존자, 창조주, 주권자 주재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이 주님의 보호를 입으면 그분이 지어 놓으신 피조물들은 전부 위하지 해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분의 보호를 입는 이것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이분의 보호를 입는 이것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이상한 그런 환경을 제가 만난 그것을 뒤에 생각하기를 '아 이것을 알려 주어야 되겠다.' 그런 일이 당할런지 안 당할런지 모르나 앞으로 만일 6·25같은 그런 일이 있으면 당황해 가지고서 '이 국군들 속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그러면, 지금 그들이 국군은 자꾸 후퇴하고 있는데 국군 보다 먼저 가서 국군보다 앞서서 후퇴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말과 같은 말입니다. 앞으로 그런 형편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군들 속으로, 아군 속으로 들어가야 피난한다'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또 거기에서 좀 안심하고 담대하게 있는 것같은 그런 사람은 신앙의 사람도 있겠지마는 대부분은 '뭐 그들이 오면 뭐 우리 공산주의자 되면 되지.' 이렇게 회색의 사상을 가지고 그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써 기독자는 이 세뇌 작업이 안 된다는 걸 압니다. 기독자는 그 사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사상을 바꿔서 이렇게 세뇌 작업이 안 된다 하는 것을 벌써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련 혁명에서도 그래 되었고 월남에서도 그래 되고 캄보디아에서도 그래 됐고 모두 다 그들이 점령하는 데는 기독자는 싹 다 죽었습니다. 거기에서 특별히 신앙가들은 다 벌써 피할 길을 내서 피했고 나머지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비참하게 많이 죽었습니다. 이북에도 그랬고 소련에도 그랬고 중공에도 그래 됐었습니다.
중공이 제일 조금 하는 일이 조금 유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할 때에 우리 모든 신앙 동지인 이 유치반 학생들과 중간반 학생들 장년반 교인들에게 이것을 미리 말해줘놔야 되겠다 하는 것을 그날 새벽에 제가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날 새벽에 제가 생각하기를 '우리는 이 모든 내게 속한 사람과 내 자선을 위해서 할일이 뭐이냐? 할일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할일은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것밖에 없다, 하나님에게 구할 것밖에 없다 그게 하나 생각났고, 또 그 다음에 모든 사람들에게, 이 모든 딿는 모든 유치반 중간반 장년반들에게는 무엇을 내가 줘야 될까? 다른 것 아무 것도 줄 것 없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 인도대로 순종하는 이것을 하라고 이것밖에는 가르칠 것이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서 끝을 냈습니다.
오늘 이 말씀 봉독하는 것은 앞으로 아는 환난, 모르는 환난, 또 닥쳐 있는 환난 앞으로 닥쳐질 환난 환난 속에 빠져서 자기 일생이 전멸을 당하고 있지마는서도 돈이 있으니까 좋다 안심하는 그런 불쌍한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를 멸망시키는 그 멸망 가운데 빠져서 그것이 사는 것이라 성공이라고 행복이라고 누리고 있는 기독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합니다. 세상 지위나 권세는 하나님 앞에 세우지를 못합니다. 이 세상 모든 명예 영광 지식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지 못합니다. 노아 홍수 때에 그런 것들이 많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심판을 그런 것들이 구출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모든 것을 초월한 권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환난이나 모르는 환난이나, 육적 환난이나 영의 환난이나, 당한 것이나 앞으로 닥쳐올 것이나 이 피난처는 하나뿐인데 이 피난처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다하는 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피난처는 무엇이 피난처입니까? 우리의 피난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의인들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러면, 의인은, 의인은 목자의 보호 안에 있습니다. 의인은 목자의 보호 안에 있습니다. 의인이 어떤 것이 의인입니까?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는 것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지 않는 것이 의인입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지 않는 이것이 우리의 피난처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사죄를 대신해 주셨으니까 사죄를 벗지 안 하고 죄없는 자로 하나님과 연결된 의인으로 하나님을 모신 자로 이렇게 사는 이 외에는 피난처가 없습니다. 여기에 첫째로 피난처를 여기에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피난하기 위해서 뭐 옥상에다 헬리콥터 비행장을 그 만들어 놓고 비행기를 준비해 놓고 있는 사람들 또 어떤 사람들은 강대국에 가가지고서 시민권을 얻어 가지고 잠깐 다녀간다 하고서 우리나라에 와 가지고 일하면서 '내야 무슨 꽝 하면 다 시민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을 피난시킬 때에 같이 피난할 것이라' 그렇게 강대국 피난을 가지고서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자기는 '이런 돈 저런 돈만 있으면 그때도 할 수 있다.' 별별 방편을 취하지마는 그거 다 자멸하는 방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속여 자기 죽이는 방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지 못하게 했는데 피난해서 애굽으로 가면 '너희들이 가기 전에 내가 먼저 앞서 질러 가 가지고서 그곳에 모든 고난을 가지고 너거를 기다리고 있겠다' 기다리고 있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나 강대국이나 꼭 같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작정합시다. 우리의 온갖 아는 환난 모르는 환난, 우리를 아는 가해 모르는 가해, 온갖 것이 가득 있지마는 그거 뭐 다 알 필요 없습니다. 어떤 해든지 상관없고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뿐입니다. 우리 피난처는 뭐인가? 의인 되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것을 자기의 피난처로 알고 의인은 어떤게 의인인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는 것이 의인입니다.
사죄 공로를 입고도 죄를 자기가 먹고 마시면 예수님의 피를 속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걸 속해 주지 않는다고 똑똑히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의 화친의 이 대속, 예수님의 사죄의 공로, 예수님이 대행하신 그 대행하신 칭의의 공로. 대신으로 원수된 것을 화친시킨 대화친의 공로,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새생명의 세 가지 공로를 자기가 입고 벗지 않는 것이 이것이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이 피난처는 하나님의 전능 안에 피난하는 것입니다. 전지 안에 피난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당신의 생명을 다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이 사랑 안에 피난하는 것입니다. 영생 안에 피난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망이나 쇠하는 거나 낡아지는 거나 그런 것이 없는 퇴난을 가지는 이 피난이니까 이 피난을 명심하고 지금도 이 피난 속에 있어야 자기가 모르는 온갖 악령의 악령의 이 가해와 악성의 가해와 모든 악습의 가해, 이 죄와 사망의 가해를 자기가 받지 안하지, 이 의를 입지 안하면 받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도 준비하고, 무슨 지금이라고 6·25같은 그런 전쟁이 났다 하면 뭐 양식을 싸 가지고서 산으로 갈까 들로 갈까 어디로 갈까, 저도 그날 밤에 그 공굴 다리 밑에도 들어가 봤습니다. '다리 밑으로 가서 피해 볼까? 바위 속으로 가보까? 저기 보니까 저기는 숲이 꽉 차서 덤불이 있어서 덤불 속으로 가볼까?' 저도 그렇게 당황했습니다. 그때 꿈도 생시도 아닌데. 이라는데 그때 있는 사람은 전부 둘이라. 하나는 '국군 속으로 가야 된다,' 하나는 '그들에게 항복하면 된다.' 두 가지 사상을 가진 그 속에 나도 들었었는데 그때에 당황하다 생각하니까 언뜻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자에게는 화가 미치지 못한다고 하신 시편 91편 성경을 찾아 가지고 제가 두 번 읽었습니다.
이러니까, 왜 이 말을 하는고 하니, 오늘이라도 지금 6·25가 일어났다고 하면 뭐 어떻게 우리가 마음으로 당황하고서 그렇게 아주 경동하고 망동을 할런지 모릅니다. 그래 지금 작정해야 됩니다. 6·25같은 그런 어떤 일이 있어도, 그때 6·25는 저 삼팔선에서부터 내려왔지마는서도 지금은 그렇지 안하고 이 부산서도 쏜답니다. 원산 이후에 청진까지에 소련 함대가 와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남한을 뺑 돌려 싸도 남을 수 있는 그런 군력을 가졌답니다. 이러니까 그때 그게 우리 하나님이 다 섭리하셔 가지고 믿나 안 믿나, 안 믿는 자는 멸망하고 믿는 자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이러니까, 그때 꽝 할 때 우리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 말이오. '아 피난처는 하나뿐이라' 하는 요것을 기억하고, 피난처는 하나뿐인데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전지전능 대주재이신 하나님 안으로 피난하는 것 하나뿐이라. 노아 홍수 때에는 노아의 방주 속에만 피난이 됐지 다른 데는 피난이 안 됐습니다. 뭐 과학이 피난을 시켰습니까? 어떤 물질이 피난을 시켰습니까? 무슨 군력이나 강대국의 세력이 피난을 시켰습니까? 노아 방주 외에는 피난을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람 보기에는 방주, 배이지마는서도 실은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그 배가 성경에 말한 대로 척수를 재면 배가 그리 큰 배가 아닙니다. 큰 배가 아닌데, 그 배 속에 모든 만물이 종류대로 다 한 쌍씩 좋은 거는 두 쌍씩 들어갔으니까 그런 배 몇 십 배가 돼도 다 못 잽니다. 그거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이오. 하나님의 능력 보호 안에서 피난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이런 일이 와가지고 우리가 당황하게 될 때에 그 때에 당황하지 말고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뿐이라.' 피난처가 어데냐? 여호와 하나님이라.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인간이 그 신앙 지식이 어릴 때에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났고. 그 후에 예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 흑암 중에 운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그 하나님이 나중에 여호와로 '내가 여호와로라' 말씀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호와요 그 하나님이 도성 인신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여호와 안으로 피난한다 하는 것은 계약을 선포하신 하나님 안으로 피난한다 말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안으로 피난한다 그 말은 대속하신 사죄와 칭의로 화친으로 대속하신 그 화친 대속을 베푸신 하나님 안으로 피난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뿐이라는 이것을 꼭 명심해야 됩니다.
6·25 때도 보니까 그때 저는 6·25 점령하는 그 안에서 있었는데, 먼저 국군이 후퇴라고 맨뒤에 미군들이 후퇴합디다. 후퇴하는데, 그 후퇴에 앞서서 지금 피난 오겠다고 하는 목사님들 보니까 성경도 다 없습니다. 와 가지고 그때 인제 모두 급해 놓으니까 한테 이래 모두 다 한테다가 밥을 해 가지고서 각각 나눌 수도 없고 큰 그릇에 퍼 가지고서 이래 같이 대접을 하는데, 자기가 목사님이라고 소개를 하는데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성경은 어쨌습니까?' '아이구 그만 급해서 성경을 못 가지고 왔습니다.' 성경을 못 가지고 올 그만침 그러니까, 그 피난하니 아무리 목사님의 대우를 해줄라 해도 대우해 줄 수가 있습니까 어데? 이러니까 그때 급하고 이래 놓으니까 피난 온 사람들 참 지지리 고생했습니다.
피난 온 사람들 아주 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또 인제 피난군들이 맞이한 사람들도 고생했소.
내 어떤 사람에게 말을 들으니까 거기에는 아주 산골인데 피난민이 몰려 가지고서 그 동리에 그 식구들의 한 이십 배 삼십 배의 피난군 들어 왔다 해 집집마다. 혼자 살면 이삼십 명 둘이 살면 오륙십 명 이래 와 놓으니까 어떻게 뭐 할 수가 있습니까? 있는 것 다 털어 먹고 이래도 자기네들은 만족이 없고 박대같다 말이오. 있는 것 다 털어 먹고 이래 놓으니까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해방되고 난 다음에 그 이듬해 이제 참 우리가 피난 와서 많은 혜택을 입었으니까 고맙다고 뭐 선물 가지고 올 줄 알았는데 전부 가을 다 해 놓고 몽둥이 잘라 가지고 왔더랍니다. 몽둥이 잘라 와 가지고 이놈 우리가 피난 왔을 때에 우리 압제 주고 우리 천대 주었다고. 있는대로 다 털어 먹고 가고도. 그 얼마나 압제가 천했냐 그말이오.
그렇지마는 점령지 안에 있는 우리들은 평안했습니다. 아주 평안했습니다.
그들이 와 가지고서 말은 하루 사형시킨다 사형시킨다, 사형시킨다는 말을 매일 했지마는 우리는 언제든지 새벽에. 오전, 오후, 밤 이렇게 그저 하루 평균 세 번은 예배보면서 사경회 했습니다. 두 달 동안 사경회 했어. 농사도 못 짓지 바깥에 못 나가게 하니까. 공습 때문에 일도 할 것도 없고 이러니까 그저 두 달 동안 항상 낮이나 밤이나 사경회 했습니다. 부흥회했습니다. 두 달 동안 부흥회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들이 저놈들이 우리 망하라고 지금 하루 세 번씩 종을 치고서 저렇게 저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니까 저놈들부터 어쩌든지 사형을 다 시켜야 된다고, 사형을 시켜야 된다고 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허락지 안하니까 돼야지? 시킨다고 하지마는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으니까 그거 아무 고통스러운게 없어. 그러니까. 그때는 뭐 아주 수월하고 편합니다. 심방 갈 것도 없고, 왜? 전부 교회로 다 모여 가지고 있어요. 지방 사람도 다 모여 가지고 있어요. 제가 그때 시무할 때에 한 팔십 명 되는 교인인데 그 군내에서 모여 가지고서 사백 명 되는 교인이 모여 가지고 매일 집회했어요. 기쁘고 즐겁고, 그러니까 아주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고만 한번은 사경회 끝마치고, 끝마치고, 인제 오늘까지 다 마쳤는데 그날 아침 마칠 아침이라. '이젠 설교 여러분들에게 다 해서 피난하는 길을 다 가르쳐 줬으니까 더 가르쳐 줄게 없으니까 오늘 아침에는 설교할게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복음이나 한번 읽고 말지요.' 이래 떡 읽으니까 뭐이 철커덕 하더마는. 그전에는 말만 했는데 그날 아침에 처음으로 왔어. 인민군이, 문이 서이인데. 출입구가 서이인데 와 가지고서 세 문에 포위해 서면서 빨리 나오라고서. 우리는 예배드리는데, 하거나 말거나 나는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하니까. 그밑에 있는 집사를. 지금 ○○○ 목사님이라고 그 집사를 빨리 안 데리고 나오냐고서 막 총부리로 이래 하니까 고만 겁이 나서 인제 이리 들어옵니다. 들어오는 것 보고서 아마 나 소리하러 들어온다 싶어서 강단에서 고함을 질렀지. 어데라고 들어 오냐고 들어오기를. 안 물러가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할 수 없어서 그냥 물러갔어. 그래 그 사람들이 앉아요. 그래 예배 보고, 예배 다 보고 인제 주기도문으로 폐회하고 그래 나가니까 떡 가기를 사택으로 가자고 해요. 가자고. 내가 전도하고 사택으로 가니까 보더마는서도, 아주 집이 초가집인데 허무합니다. 이러니까, '착취는 안했구먼.' 그 사람들은 물질 중에 착취가 그게 그렇게 큰 모양이오. '착취는 안했구만.' 이라더마는 가자고 해. 또 저리 바깥으로 저 들로 데리고 나가. 나가서. 내가 가자고. 그래 나는 그래도 가자 하니까 하나도 거석없고 기쁘고 즐겁고, 가자고, 가면서 예수 믿는 일, 하라고 이러니까 '우리도 예수 믿습니다.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 이라더마는 전도하니까 전도하면 죽을 줄 알아도 어쩌든지 형제 들도 예수 믿으라. '아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이라더마는 예수 믿으라고 전하니까 '가십시오' '가십시오' 이래. 내가 있다가서 '와? 어데 갈라하다 이래?' '아, 가십시오. 순수한 예수를 믿으시오? 이래요. 그래 예배당에 오니까 뭐 곡성이 진동하고 다른 사람은 도망 다 가 버리고 믿음 좀 있는 사람은 거기서 울고 있고 이래.
이랬는데, 고 이튿날인가 떡 그래도, 집회를 마쳐도 가야지? 안 가요. 암만 인제다 인제 설교 다 했으니까 다 흩어져 가지고서 모두 거석하라 해도 안 가.
뚤뚤 뭉쳐 가지고서 이제 집회도 안 하니까 사백여 명이 시골에서 자꾸 그 예배당을 왔다갔다 하니까 말하기를 '아. 이거 안 됐습니다. 인민군은 뭐 그거 뭐 무서울게 없지마는.' 저거가 못 당해 봤다 말이오. '무서울게 없지마는 공습이 무서우니까 예배당에 지붕에다가 처취(church)라고 이래 붙입시다' 그래. 나는 점심 먹으며 그걸 생각지 안하고 '뭘로 쓸 건데?' '백목을 가지고서 이 베를 가지고 이래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러라고. 그래 가서, 뭐 얼마나 소원이든지, 공습은 겁이 났는지. 가서 퍼뜩 써 갖고 왔어. '써 놨습니다.' 그라는데 내 마음에 그만 뭐 능력이 확 나가는 것같애. '네가 하나님 의지하는게 아니고 미국 의지하는구나. 네가 친미파로구나. 네가 죽어도 친미파로 죽지 하나님 의지하는 성도로 죽지는 못한다.' 요게 자꾸 깨달아지니까 뭐 두려워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거 가서 끌어 내리라고 하고 끌어 내리고 난 다음에 그 뒤에 한 달 동안 지내면서 참 죽을 고생 당했습니다. 한 달 동안 지내면서도 강단을 한번도 안 비우고 이래 지키고 있을라 하니까 그전에는 평안하게 지켰는데, 두 달동안 지켰는데 한 달 동안은 이제 '이제는 뭐 생명 내놓고 죽자'하면 평안하고 '죽자' 는게 또 멀리 갑니까? '죽자' 하면 평안하고 그라면 또 한두 시간 있으면 또 살고 싶고 또 살라 하면 죽을 지경이고, 살라 하면 죽을 지경이고 죽자 하면 평안하고 살라 하면 죽을 지경이고, 이래 가지고 하루 열 번도 더 겹치는 그런 일을 하고서 지내다가, 마지막 후퇴할 때는 그때는. 그 날 밤에는 그 사람들이 뭐 자꾸 잡으러 오지 안하고 이래서 사택에 앉아서 찬송을 이래 부르고 하니까, 찬송을 부르다 보니까, 여럿이 모여 부르다 보니까 고만 날이 샜어. 인민군, 후퇴를 우리는 몰랐어요. '오늘 저녁에 인민군들이 왜 이거 꼼짝도 안 하고 있나' 이라며 찬송했는데 아침에 보니까 후퇴해가요. 후퇴해가는데 내려올 때는 그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 '어데서 왔소?' 이라니까 평양서 왔다 하는데 걸어왔다 하는데 뭐 발이 생생하이 하나도 저는 사람 없어. 올라갈 때는 다 절어요. 발병이 나서. '와 내려올 때는 그렇게 발병이 안 났는데 올라갈 때는 이렇게 발병이 났습니까?' '아 갈 때는 발병이 안 났는데 여기 와야 찍해 한 사십 리밖에 안 걸었는데 전부 발이 터지고 다 발병이 났다.'고. 여호와가 그들을 생생하이 기운있게 하니까 발병도 안 나고 또 여호와가 딱 후퇴를 시켜서 치니까 그들이 다 발병이 났다 그 말이오.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앞으로도 그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여호와로 피난처 삼고 주님으로 피난처 삼아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가 의인인데 의인으로 있으면 아무도 해할 자 없습니다. 천인 만인이 네곁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너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 때에 저거 있는 면에는 교회가 넷 교회입니다. 넷 교회인데 교인들 전부 낱낱이 다 잡아다가서 전부 다 항복해서, 예수를 안 믿겠다고 다 항복을 다해서 각서 다 쓰고 도장 다 찍고, 그때 전도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은 신가파 함락 때에 끌고 가 가지고서 강제로 제주(祭酒)를 먹이게 했습니다. 이래도, 저 있는 그 ○○교회는 하나도 잡혀 가지도 안하고 끌려 가도 신사 참배 하나도 안 했습니다. 신사 참배 하나도 안 하고 돌아다니며 신사 참배 반대 운동 해도 아무도 안 오고 그러니까 무서운 줄을 몰랐어요. 제일 거창서 악질이라 하는 사이또라 하는, 제당이라는 부장이 하나 있었는데, 이 고제는 이런 놈이 하나 있으니까 네가 가서 처리해야 된다고서 그 사람이 올라왔어요. 올라와 가지고서 내가 ○○교회 있으니까 와 가지고 '내일은 신가파 함락한 축하를 해야 되는데 그때 꼭 참석하십시오.' 이래서 내가 있다가 내가 그때 봐서 하겠다고 내가 모르겠다고서. '꼭 하십시요' 참석하면 그때 나 욕을 보일라고 지금 딱 붙들어 가지고 강제로 어째 제주도 먹이고 이래하려고 지금 딱 했는데 나 그 이튿날 가야지? 안 갔지. 안 가고. 그라고 나는 고만 산으로 기도하러 가 버렸지.
아주 평안하게 지냈습니다.
지금 내가 여기 와 가지고서 그때같이 기도하지 안해. 8·15 해방도 제가 덕유산 그 큰산인데 상봉에 가 가지고서 기도하다가, 거기서 금식기도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랬는데, 그때같이 지금 기도를 안하니까!! 앞으로는 환난이 오면은 내가 지금 환난을 그때 아주 평안하게 지낸 거와 같은 그런 평안을 지낼 수가 있겠나 그런 생각이 나서 지난번에도 기도하자고 해 가지고서 한 일 년 동안 기도를 시작해 계속하다가서 제가 몸에 병 나 가지고 그만 중단했지 이번에도 기도회를 기록해 가지고서 지금 회록에 기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사천 칠백 얼마인데 지금 우리가 다 기도 하면, 기록해 하면 몇만 명이 될 건데 지금 기록도 안 하고 기도를 안합니다. 안 한 사람은 절단납니다.
그때 왜정 말년에도 신사 참배 문제가 나고 난 다음에, 그때 진주노회입니다.
진주노회에서 의논하고 난 다음에 '아, 이러니까 이제는 교회를 가서 살펴야 되겠다'하면서 교회 단속하겠다고 간 사람들은 다 패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가야 되겠다 하고 기도하러 간 사람들은 그 승리했습니다. 내가 한 상동 목사님 주 남선 목사님 그래 물으니까 그때 그라고 난 다음에 '안 됐다 기도해야 되겠다.' 모두 산으로 갔대요. 산으로 간 사람은 다 신사 참배를 이겼는데 이겨도.
감옥에 가도 이겼는데 그때 기도하러 가지 안하고. '유향의 작은 산에서 만나자' 이랬는데, 환난 때는 몰약산에서 만나고 유향의 작은 산에서 사랑하는 자를 만나자고 아가서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유향의 작은 산은 무슨 산입니까? 기도 산입니다. 몰약산은 무슨 몰약산인가? 몰약산은 방부의 산입니다. 방부의 산.
죄짓지 않는 산. 기도하는 산 거기에가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고로 어쩌든지 우리가 이번 이 하나님이 회개를 재촉하고, 또 기도 회에서 이래 기도를 하라고 이렇게 독촉을 하고 해도 기도 안 하면 참 마음이 강퍅하고 완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도, 그날 성찬을 먹게 되는데 성찬을 먹을라 하니까 내가 갑자기 병이 나 가지고 못 먹게 되고, 내나 그랬는데도 그날 나와서 설교는 했고, 지금 연기해서 11일 주일날 성찬을 우리가 베풀기로 그래 한 것은, 자꾸 연기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안하고. 죄를 먹고 마시지 안하고. 주님의 피를 범하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안하고 하나님이 이 특수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자꾸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회개합시다!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 안으로 피난하려고 하면 의인이 되야 돼.
의인이 될려면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세 가지 공로를 벗지 안해야 돼요.
사죄 줬으니까 다시는 죄를 입지 아니해야 돼. 죄를 없애 주신 고대로 죄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과 화친을 가진 자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 피난하는 것입니다. 요것만을 피난으로 생각하고, 무슨 6·25 났다 하거들랑 어데로 갈까 뭐 굴로 갈까 산으로 갈까 시골로 갈까 어데로 도망칠까 그런 망령된 생각 가지지 말고 그저 뭐입니까? 하나님 안에 밖에는 피난처가 없습니다.
거기에 둘째로 생각하는 것을 보면 양이 목자를 떠나서 저 딴 데로 간 것은 그것은 탕자가 먼 나라로 간 거와 마찬가지로 그는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떠나서 딴 데로 간 것은 하나기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으로 기어 들어간 것입니다. 세상으로 기어 들어간 것. 세상으로 기어 들어갔는데 목자가 그 양을 찾아서 양 사방 돌아다니다가 양을 만났습니다. 양을 만나 가지고 양을 어깨에 메고 우리로 돌아왔습니다. 목자를 피해서 목자를 버리고 달아난 것은 범죄에 빠지는 것이고, 목자를 만나 가지고서 우리로 돌아오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는 어찌 되었습니까? 목자에게로 돌아올 때는 목자가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시다.
그래서, 요게 피난하는 요 방편을 말합니다. 피난하는 방편. 피난하는 피난 곳은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피난하는 방편은 딴 거 없습니다. 회개뿐입니다. 회개.
이렇게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때에는, 제가 혼자 목자를 떠나서 나올 때는 덤불 밑에 지나가니까 뭐 그털에 가시가 찢기니까 이게 걸려 가지고 죽을 지경하다가 근근히 나왔고, 또 개울을 만날 때는 못 건너서 거기서 참 죽을 고생을 하다가서 근근히 건넜고,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는 그때는 빠져들어가다가 죽다가 살아나고 이러니까 이 양이 놀래서 지금 목자 잃고 난 다음에 곤고하게 갔다가고 목자가 만나가지고서 반가와 아듬고 어깨에 메고 갑니다. 가니까, 어깨에 메고 가니까 그 덤불을 보고 이 양이 막 뻐득뻐득 놀랍니다. 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 내가 저런 덤불에서 찍혀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덤불 보고 놀랍니다. 목자는 '놀라지 마라 네가 나를 떠나서 너 혼자 달아날 때는 이 가시덤불에 상했지마는서도 내가 너를 아듬고 있기 때문에 가시덤불 그런게 문제가 없다 내가 가시덤불을 잘 피해서 너를 보호할 수 있다.' 가시덤불 보고 놀란 것은 목자에게서 다른 데로 피해서 달아났을 때에 가시덤불이 해했고 또 개울이 해했고 구렁텅이가 해했고 이리가 해했고, 이리보고는 막 죽는다고 뻐득거립니다. 뻐득거리니까 목자가 톡톡 두드리면서 '양아 양아 내 양아 놀래지 마라 내가 있는데 이리 그까지 것 뭐야?' 고함을 막 지르며 막대기로 '쾅' 거리니까 이리가 도망쳐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으로 타락해 내려갈 때에 온갖 세상의 박해가 있지마는서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데는 그 박해와 같은 과거의 어려움 같은 그런 어떤 어려움이 와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절대 상해가 없습니다. 요것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는 땅 위에 어떤 역경이나 어떤 환경이 있어도 해하지 못합니다. 절대 해하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를 여기에 만나서 공산주의가 독침을 가지고 이래 달라들어도 내가 거기에서 하나님으로 피난처 삼고,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공로를 입고 고게서 회개, 그 피난하는 방편은 회개뿐이라. 고게서 공산주의 독침 가지고 찌를라 하는데 독침 그까짓 거 생각지 안하고 '보자. 주님에게 걸리는게 뭐이냐? 주여, 뭐 내가 거리낀게 뭐 있습니까?' 하나 찾으면 '주여, 요거 내가 잘못했습니다. 사해 주십시오.' 회개 하고 거기에서 독침 앞에서 자꾸 묻는 말은 하지 안하고 자꾸 회개만 합니다. 회개할 때에 독침은 절대로 찌르지 못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생명이 다 돼서 죽을 시간이 됐으면 독침에 죽으면, 이제 죽을 시간이 돼서 죽으면은 그거는 자연의 죽음으로 저주받은 죽음이요 인생의 범죄로 말미암은 죽음인데 그 독침 앞에서, 죽을 때가 됐지만 독침에게 찔려 죽으면 순교입니다.
죽음도 폐물 이용이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고럴 때에 '아! 내가 이 회개가 피난이니 회개가 피난이니 내가 이때 회개해야 되겠다.' 독침으로 자꾸 재촉하는데 '주여, 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 회개합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보호를 의지합니다! 주여! 명하시옵소서. 내가 뭐 죽는 것 사는 것 상관없이 주님에게 순종하겠습니다.' 자꾸 주님 보고서 주님과 자기와의 잘못된 것만 자꾸 회개합니다. 독침이 무슨 상관있소? 그까짓 공산주의가 무슨 상관이 있소? 우리에게 털끝만치도 해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피난의 방편은 회개뿐입니다. 요것을 급할 때도 명심하고 놓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지금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그날 밤에 본 것도 이 설교도 이거 그저, 평상시도 이래야 되지마는서도 그것인지 앞으로 무엇이 올런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다급한 일이 와도 개적으로 오든지 사회적으로 오든지 국제적으로 오든지 어떤 일이 와도 어려움이 오거들랑 어려움을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려움을 제가 요런 꾀 저런 꾀 가지고 피할라 하면 어려움 속에 파묻혀 저는 죽습니다. 멸망받습니다.
어려움이 오거든 피난처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회개로만 가지 딴 걸로는 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피난하는 방편은 회개뿐이다. 이러니까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분에 대해 무식했던 거 '아 주여.
내가, 주님은 자존자이신데 내가 믿지 안했습니다. 자존자를 믿습니다. 전능자를 믿습니다. 전지자를 믿습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창조주로 믿습니다. 주님이 주재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권자이심을 믿습니다. 조그만한 터럭 하나라도 당신의 주권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독침이 온 것도 당신이 섭리해서 독침이 왔습니다. 당신이 나를 독침으로 찌르라고 해야 찌르지. 당신이 찌르면 독침에 죽어도 당신의 독침에 죽기 때문에 사랑의 당신이 나를 존귀케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줄 내가 압니다!' 이렇게 당신을 알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당신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당신에게 순종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사건에서 모든 사물에서 순종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요렇게 회개하는 것만이 우리의 피난에 하나만 되어 있는 유일한 피난 방편이다, 피난의 길이다, 요것을 우리가 명심합시다.
고게 셋째로 가르치는 것은 평강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이렇게 하니 그 목자가 기뻤습니다. 목자가 기뻤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게 뭐인가? 하나님을 뭘로 기쁘시게 할 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회개를 하나님이 제일 기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양을 찾아 양이 목자에게로 돌아오니까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뭐 이런 거 저런 거 하는 것도 있지마는 모든 것보다 주님 앞에 거리끼는 걸 내가 회개하는 것 주님에 대해서 무식한 거, 주님을 내가 몰랐던 거, 주님을 바라지 못했던 거 의지하지 못했던 거, 당신의 법도를 지키지 못했던 거, 이런 것을 회개하는 것이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늘의 천군 천사가 제일 기뻐하는 일이요 만물들이 기뻐하는 일이요, 자기 속에 기쁨이 넘치는 일이요 회개로 기쁜 이 기쁨을 맛본 사람은 뭐 돈이나 이 세상 이런 뭐 행락이나 이런 무슨 기악이나 오락이나 그런 기쁨은 텁텁해서 못 먹습니다. 텁텁해서 텁텁해서 자기는 암만 거석해도 텁텁해서 감상이 안 돼. 그런 거는 감상이 안 돼. 그런 거는 너무 회상적이라서, 왜? 아 감상을 해서 기쁠라고 해 봐도 그 뒤가 전부 사망인데. 그 뒤가 사망인데. 금방 귀를 즐겁게 했지마는서도 그 뒤가 사망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회개는 무한한 기쁨이 나옵니다.
그런고로, 평강과 기쁨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회개요 우리의 피난의 방법도 회개요, 우리의 피난처도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분에게 들어가는 것 외 딴것 없습니다. 이런고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거와 같다.' 이리 가운데 보내면 잡아 먹히라고 보냅니까? '이리 가운데 보내는 거와 같다.' 그러기 때문에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랴,' 네가 마귀의 하는 일 다 알고, 마귀의 지식 다 알고 하나님의 지식 다 알아서, 마귀 지식은 네가 거기에 마귀 지식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 마귀 지식을 알고,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대로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이래서. 이리 가운데 너를 보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양이 이리 속에 가니까 이리가 빽 둘러섰으니까 양이 할게 뭐 있습니까? 양이 '메에' 울면서 목자에게로 달음질 칠 것 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 환경을 어렵게 만드는 것, 공산주의 오게 하는 것, 이 모든 인민군 오게 하는 것, 우리의 경제에 어렵게 하는 것 모든 어려움을 우리에게 닥치게 하는 것은 만유의 주재시요 주권자요 만왕의 왕이신 창조주이신 그분의 품속으로 안기라 그말이오! 왜 이걸 우리가 못 합니까? 양을 이리 가운데에 두는 것은 이리 보고 놀래서 목자에게 달음질 쳐서 목자 품에 안기라 그말입니다! 우리가 요걸 믿어야 됩니다! 믿지 많으면 능력이 안 옵니다! 믿을 때에 우리에게 평강이 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피난처 피난 방법. 어데서나 빼앗지 못하는 평강과 기쁨 이 세 가지 지금은 다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는 줄 압니다. 이 시간에 단정 짓고 확정을 짓고, 요렇게 믿지 못하게 하는 그 원수를 죽입시다. 우리 속에도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원수도 죽이고 우리 밖에도 믿지 못하게 하는 온 세상이 달라듭니다. 다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서 요 세 가지 방법을 우리가 취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