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16:27
안식일과 주일
1986. 10. 19. 주일오후
본문:요한복음 20장 19절∼23절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안식일이 주일로 변개된 것은 선지자 다윗을 통해서 일찍 예언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차 안식일은 일차 창조의 것들을 복되게 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때에 생명 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치 아니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에 다 들어가지를 못하고 들어간 사람들만 들어갔습니다. 구약에서 영원한 안식을 받은 사람들도 있고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기본구원인 영 구원은 택자들은 다 받지마는 여게는 그 행위를 두고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구원 곧 성화구원, 건설구원, 이 심신의 육의 구원은 영 구원은 받아도 육 구원은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신의 기능이 자기 세상 생활인 현실이라는 자기의 세상을 통해서 그 심신의 기능이 영생으로 구원을 얻기도 하고 또 둘째 사망 영원한 사망을 받게도 합니다.
이래서 고린도전서 3장 10절 이하에는 쭉 읽어 보면 사람이 건설구원 이루는 그 건설구원에 대해서 집 짓는 비유를 가지고 가르쳤었는데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사람과 같이 자기 심신의 건설, 자기 행위 건설, 자기 심신의 기능 건설 곧 기능의 구속, 이것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건설해 놓은 공로를 시험하실 때에 불로 시험해서 불에 타는 사람도 있고 타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타지 않는 사람은 상이 있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게 되고 그 공로가 불탄 사람은 구원을 얻었으나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거와 같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영의 구원은 했지마는 심신의 기능 구원은 없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서 아무런 실력도 영광도 존귀도 대우도 환영도 없이 그저 영생만 하지 아무런 가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성경에는 우리의 구원을 둘로 말을 했습니다. 하나는 영의 구원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하시는 것이고 또 이 심신의 기능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지마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본구원을 잘 활용해서 기본구원을 벗지 안하고 기본구원을 입고 사는 그 행동으로 현실 현실에서 사죄 칭의 화친의 이 공로를 입고 살 때에 그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은 다 영생이 되어지고, 그 현실에서 세상이 방해하는 그 방해를 이기지 못해서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벗고 살았을 때에 그때에 예수님의 대속으로 법적으로 살아난 것이나마 다시 범죄로 죽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 2장 10절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 또 네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심신 기능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지마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 되어지기 때문에 행위구원이라 건설구원이라 성화구원이라 그렇게 성경에 표시를 한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이 안식일을 처음에 주신 것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멸망받은 사람들이 많고 또 순종함으로 구원 얻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멸망받았다 하는 것은 마음과 몸, 심신의 기능이 멸망받은 것을 말하고 영의 멸망받은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의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도 심신의 기능은 멸망을 받아서 “구원을 얻었으나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거와 같다” 그렇게 성경에서 계시해 주셨습니다.
두번째 우리에게 안식에 들어가는 안식일을 주신 것은 주님의 날이라 그렇게 성경에 표시를 했습니다. 주의 날이라, 또 안식 후 첫날이라, 안식은 제칠일이 안식일인데 지금 모두 세상으로 말한다고 하면은 토요일이 안식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교인들은 토요일날 지킵니다. 안식 후 첫날이 곧 뭐이냐 하면은 세상으로 말하면 일요일이요 우리로 말하면 주일인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두번째 안식일을 줬는데 우리들이 안식에 들어가는 날, 다시는 사망과, 곡하는 것과, 병드는 것과, 아픈 것과, 모든 굶주리는 것과, 슬픈 것과, 우는 것, 이런 모든 인간의 불행이 다 없어지는 평안한 세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진리와 의와 평강만 있는 하늘나라, 영계 것과 물질계 이 우주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그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축복을 주는 날이 이 주일날인데 처음에는 안식일이라 했는데 우리에게는 안식일이라고 그렇게 이름하지 안하고 주일이라 그렇게 이름을 했습니다.그러기에, 오전에 찬송하는 것 보니까 ‘즐겁게 안식할 날’ 하니까 안식교 사람들은 말하기를 ‘안식일은 우리 안식교에서 지키는 것인데 장로교나 이런 데에서 안식일 말하는 것은 그것은 틀렸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안식일이라 하는 말은, 모든 사망과 죄악과 미혹과 침노하는 그런 것들이 없는 평안한 생명 세계에 들어가는 준비하는 날을 가리켜서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도 안식일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으나 안식일보다도 주의 날이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실상을 잘 알도록 표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의 날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계시 1장에 사도 요한이가 밧모 섬에 갇혔을 때에 그때는 “주의 날을 당하여” 이랬습니다. 그러면 그때 주의 날을 당할 때에 사도 요한이가 무슨 일을 만났는고 하니 성령의 감동함을 받아 가지고 비로소 자기가, 주님의 승천하신 이후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모든 교회 그것을 계시 2장으로 3장까지에 일곱 교회를 말씀해 놨는데 그 일곱 교회, 다시 말하면 신약 교회에 대한 그 모든 내용과 진상과 거게 대한 모든 위험성과 준비성에 대해서 충분하고 충만하고 온전한 교회 지식을 이 주일날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됐습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교회라는 것은 얼마나 깨끗하며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 땅위에는 다 지저분한 것들만 있는데 교회만이 정금 등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금 등대. 교회는 이 깜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 교회요 정금은 영원성을 가리켜서, 표시할라 해야 정금밖에는 표시할 게 없기 때문에 정금 등대로 말했는데 교회만 영원하고 교회만이 어두운 것이 하나도 없고 어두운 것을 소멸하는 교회라 하는, 교회의 성결성, 교회의 권위성, 교회의 영원성을 주일날 사도 요한이가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또 주일날 사도 요한이가 깨달은 것은 예수님이 인자라는 것을 평소에 사도니까 잘 알지마는 그 주일날 다시 새로 깨달아졌습니다.
“인자라” 인자라 말은 대주재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인간 중에 제일 천한 인간 된 것은 당신의 모든 부요를 다 우리 대속을 위해서 내어놔서 가난해지신 것은 우리로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사람 되시고 죄인 돼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이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아주 기초가 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마는 그가 밧모 섬에 가기 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을 밧모 섬에 가 가지고 깨달았느냐?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주일을 맞이하였을 때에 주일날 깨달았습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 그가, 예수님은 얼마나 성결하신 분이라 “머리와 털이 희어서 눈과 같더라” 그러면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게는 털끝만한 것도 불의가 없더라.
또 “그 얼굴이 해와같이 힘있게 비취더라” 예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행하신 일과 자기가 예수님에게 대해서 믿은 그 행동을 살펴보니까 낯이 부시고 부끄러워서 견디지를 못해서 사도 요한이가 죽은 자와같이 그 앞에 꺼꾸러졌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위로하시면서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다. 이제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사망과 음부의 모든 권세를 내가 다 잡았다. 내가 다 이겼다.”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다시금 말하기를 교회, 일곱 촛대와 일곱 별에 대한 오묘를 가르치면서 이것을 네가 기록하라 그렇게 해서 요한계시록을 그때에 사도 요한이가 영감받아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이러면, 이 주일날은 이렇게 귀중하고 중요한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들은 이 은혜를 받는 날이 주일날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일을 귀중히 여겨서 과거 6 5 때에 배추달 주일학교 반사 선생도 그가 주일을 안 범할라고 마지막까지 총에 맞아서 순교했습니다. 또 박기천 전도사도 주일 지킬라고, 주일 범하지 안할라고 하다가 그들에게, 놓아 줄라고 해도 주일을 범하면 놓아 줄라 하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고 순교를 당한 것이 그것이 이 주일날입니다. 고신이 처음에 발족할 때에는 ○○○목사님이 주일날 구호 물자를 싣고 오다가 토요일날 도달하지 못해서 주일날 새벽에 도달했기 때문에 주일날 물건 운반했다 해서 ○○○목사님이 고신 총회에서 정죄를 받아 가지고 석 달인가 여섯 달인가 근신을 했습니다.
또 지금도 우리 ○○교회에서 거게 ○○교회에 있던 어떤 집사가 사택을 짓는 데에 그 건재를 주일날 싣고 들어왔다 해 가지고서 그것을 쫓아내고, 그럴 때에 거게 있는 교역자 ○목사님이 거게 대해서 잘못된 것을 말하고 그를 치리하지 안하고 그대로 용납했다고 해 가지고서 ○목사 지금 반대 운동이 일어나 가지고서 며칠 전에도 전화가 왔습니다. 아마 그분이 이동을 해야 될 것입니다.
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서 실수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 이 주일이 이렇기 때문에 이 주일을 잘 지킬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도, 그때는 안식일을 예수님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예수님께서 영생에 속한 이 새로운 구원에 관한 일들은 다 안식일날 하지 안하고 주일날 했습니다. 그때는 주일이 시작되지 안했지마는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세례받으신 것도 주일날이요, 또 변화산에 올라간 것도 주일날이요, 또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도 주일날이요, 또 성령 강림도 주일날이요, 예수님이 처음 부활하신 날도 주일날입니다.
이래서, 신약 교회에 관한 모든 큰 행사들을 할 때에는 다 예수님도 안식 후 첫날, 그라면, 안식 지난 그 이튿날 이런 모든 행사들을 했습니다. 또 일찌거니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말씀하실 때에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해라 하는 그 말씀으로서 안식일은 일곱째 되는 날이 안식일인데 주일날은 여덟째 되는 날이 주일날입니다. 이래서 그때부터 팔 일 행사를 할례로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다 생명에 관한 것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다 여섯수, 마귀수는 안 하고 그 일곱수도 하지 안하고 승리한 팔수를 가지고서 모든 것을 할라고서 사람들이, 그거는 뭐 성경은 아니기 때문에 관계 없는 것이지마는 그렇게 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주일날은 예수님이 죽으심만 가지고서 주일날을 우리에게 설정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의 이 대속의 공로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이 대속의 공로, 예수님의 대속은 사죄 칭의 화친이 우리 대속이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또 피조물이 되어 피조물로 부활하셔 가지고 영원히 창조주가 창조주로 자유하지 못하고 우리 때문에 피조물 행사를 해야 되는 이 큰 희생, 예수님이 도성인신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까지에 우리를 사랑함으로 구원의 희생을 하신 것과 또 이 공로를 베푸시고 이 공로를 우리에게 완전히 입혀서 우리 것을 만들어 이 공로로 사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이 속량의 공로는 꼭 같은 중량을 가지고 우리에게 꼭 같은 사랑과 꼭 같은 효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공심판이라면 하나님께서 지성 지공의 전지의 입법, 하나님이 전지하신 분이 입법해 놓은 입법, 하나도 거게 법이 없는 것이 없어. 모든 존재에게 대해서 영원한 법을 제정했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요 그 법 이름을 가리켜서 자유의 법이라. 모든 존재들이 다 어느 존재 없이 각각 다 자유하고 다 생명으로 사는 행복된 이 법인 것입니다. 이 법은 전지자만이 입법할 수가 있지 전지자가 아니면 이런 법을 입법을 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 전지자의 입법 이 법을 어떤 것이든지 이 법을 어긴 자는 다 그는 심판받아 멸망을 받게 되는데 이 법을, 다른 모든 피조물 중에 그런 것들은 어기지 안하고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는 대로 하지마는 이 법을 어긴 자가 둘이 있습니다. 이 어긴 자 둘 있는 것은 하나는 하늘에서 천사가, 이 법을 어겨서 쫓겨 나온 타락한 천사 곧 지금으로 말하면 사탄이라 마귀라 배암이라 용이라 붉은 용이라 그렇게 이름을 하는 마귀요 또 마귀에게 유혹받아 가지고 타락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인간 속에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옛사람, 자기를 죽인, 자기 아닌 옛사람, 옛사람은 악령과 악성 악습, 악령은 자기를 위주로 한 영을 가리켜서 악령이라 하고, 악성은 인생이 자기를 위주로 중심으로 하는 그 타락성을 가리켜서 악성이라고 하고, 악습은 악령과 악성으로 말미암아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한 행동 한 행동을 해서 모은 것을 가리켜서 악습이라,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습성이라 버릇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서 사람은 멸망하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구출하시기 위해서 이 세 가지 대속을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셨습니다. 이 죽으심으로 하신 것은 하나는 택한 자들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라 말은 삐뚤어진 거라 말입니다, 삐뚤어진 거. 어떤 사람이든지 전인류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 아닙니다.
전인류를 위해서 대속했다는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감리교에서도 그리 믿고 성결교에서도 그리 믿고 하는데 장로교에서는 그렇게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대속은 제한 대속이지 전체 대속이 아니니 택자들만 대속한 것인데 대형이라 말은, 대신 형벌받았다 말은 하나님의 공심판, 하나님의 공심판에 정죄가 되는 삐뚤어진 거, 그 모든 것은 삐뚤어진 것은 고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삐뚤어진 것의 댓가는 사망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삐뚤어진 것은 하나님도 그 형을 받아야 되지 형을 받기 전에는 삐뚤어진 것은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형을 받아 가지고서 삐뚤어진 이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형을 받았으니까 삐뚤어진 것의 값의 댓가의 사형을 받았으니까 삐뚤어진 게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이나 대신하지 어떻게 여러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대신을 못 하는데 예수님은 인성만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무한한 그 신성이 같이 이 형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의 수가 많아도 이거는 유한한 것이요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무한하신 신인양성일위가 대형을 했기 때문에 택자의 전부를 대형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죄 주신 것은 이것은 어느 뭐 국법에서 인정받는 사죄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인정받는 사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의 그 입법으로서 아무리 정죄할라 해도 정죄할 것이 없고 정죄된 거는 완전히 대형으로 사죄된 이 사죄의 공로입니다. 이 사죄의 공로를 가진 자는 어데서든지 정죄함을 받지를 아니합니다. 정죄함을 받지 안하고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도 의롭다 통과가 됐기 때문에 사죄로 통과한 지 후에 우리가 중생이라는 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대형으로 사죄를 주셨으니, 이 삐뚤어진 거는 영원히 전혀 없는, 삐뚤어진 게 하나도 없는 완전입니다. 삐뚤어진 게 하나도 없는 완전입니다. 삐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완전, 이것을 우리가 참 너무 껍데기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피와 살은 참된 음료요 참된 양식이라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다 영생을 하고 마지막에 다시 산다” 그 말씀 한 것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예수님의 사죄의 공로가 어떻다는 것을 자기가 연구하고 깨달아서 깨달아서, 좀 더 깨닫고 좀 더 깨닫고 좀 더 깨달아서 사죄가 얼마나 권위 있으며, 이 사죄가 얼마나 권위 있는 죄 없음이라 하는 것을 점점 알아서 연구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사망이 없습니다.
또 칭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예수님이 다 대신 행하심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신 것입니다. 이 의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죄 없다 의롭다 인정을 받는 그 칭의입니다.
이 칭의를 우리에게 주셨고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도 서로 하나님과 상호 내주해서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과 우리와 신인양성일위는 안 되지마는 신인양성일행이 되는 이 화친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공로를 베푸신 것으로서 주일을 반을 건설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주일을 반을 건설했어. 좀 알아들어 봐요. 들을라고 애를 써. 그라면 성령 올 수 있어. ‘주여, 나에게 이 도리를 깨닫게 해 주옵소서.’ 하고서 자꾸 깨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마귀란 놈이 달라들지 안해요.
오늘도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저거가 직장 생활 하고 할 때는 내일은 직장 가니, 직장 생활 하러 가니까 이제 함부래, 직장 생활 하러 가니 옷도 빤들빤들 입고 가야 되고 또 정신도 차려야 되고 이제 다 가다듬어 가지고 준비를 해 가지고 가야 된다 출근하다가 토요일날 턱 돌아오면 ‘이제 내일은 쉰다’ 쉰다는 그 마귀 말을 듣지 마십시오. 이 안식은 이게 아니라. 영원한, 영원히 완전 세계에 들어간다는 말이지 일 안 하는 것이 그게 안식이 아니라. 그날은 세상에서 제가 일생 동안 한 일보다도 더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이 주일날입니다.
이런데, 주일날은 노는 날이니까 그만 그날부터는 턱 펴 놓고 밤에 테레비도 뭐 열두시까지는 보도록 하고 또 밤에 오만 장난 다 할 대로 하고 눈이 뻐끔하이 이래 가지고 다 죽어 가지고 쪽 빠져 가지고 주일날 와 가지고는 꾸벅꾸벅 조는 거. 여러분들! 그게 원수인 줄 아십시오! 원수! 원수인 줄 알아요! 뭣 때문에 토요일날 그래 가지고서 와서 주일날 예배 볼 때는 꾸벅꾸벅 막 졸아서 반송장이 돼 가지고 옵니까! 이래도 몰라요, 이거!! 이렇게 주님이 죽으심으로 세 가지 대속을 베푸신 이 공로를 가지고 이 주일 반을 만들었고 또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성령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어 다시 우리에게 주일을 반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살아나심은 우리에게, 중생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사는 자로 사는 생활 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련된 구속을 입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일날은 에수님이, 하나님이 사람 되어 모든 거 다 내놓아 희생하여 죽으심으로 만든 날이 주일의 반날이요, 또 하나님이 영원히 사람 되어, 영원히 사람 되어, 자, 사람이 대통령이 조그만한 시장 위치에서 시장 껍데기만 입고 시장 귄위만 가지고 있어도 안 할라고 야단 치는데 대통령에게 거지 같은, 대통령이 거지의 꺼풀을 입고 거지의 위치에서 거지의 대우받고 거지의 권세를 쓰고 이렇게 있는 것도 사람들이 안 할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 피조물의 이 형상을 입고 부활했다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것이 얼마나 우리 위해서 큰 희생한 이것을 우리가 감사하기는 감사하지마는 사실 마음 가운데에 우리는 그 안타까운 속에 못박히는 그런 일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부활 주일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워하지마는 부활 주일에 대해서 우리는 참으로 영원히 영원히 이 일에 대해서 울지 않으면 안 된다, 얼마나 주님이 우리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로 하여금 이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가 입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다시 부활된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울어 감사해야 될란지 측량 못 한다는 것을 벌써 제가 서부교회 온 이후에 그 설교를 했지마는 그 무슨 소리인지 사람들이 못 알아들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간 또 따르릉 그랬으니까 이제 이거 내가 사십 분 설교했어. 사십 분 설교했는데 이제 조그매만 하고 마치겠어요. 지금 마쳐야 되는데 요것만 말하고자 합니다.
‘주일날은 주님이 나에게 완전히 죄를 대형하셔서 죄를 없이 만드셨다’ 요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 대신 행해서 나는 하나님의 모든 법을 완전히 이행한 자다, 내가 안 했지만 주님이 대신 행했기 때문에 나는 한 자다.
나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완전한 화친을 가진 자이다.’ 하는 요것을 알게 하는 것이 주일날 은혜입니다. 알겠습니까? 요것을 요 사실을 알고 깨닫게 하는 것이 주일날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알고 깨닫게 하는 은혜. 그라고 난 다음에는 요 사실을 믿도록 하는 것이 주일날 우리가 받는 은혜입니다. 믿도록 하는 거.
요 사실을 믿도록 하는 것이 주일날 받는 은혜요, 그 다음에는 요 사실을 내가 알고 믿고 요대로 살라고, 나는 털끝만치도 삐뚤어진 것이 없이 사는 이 삶을 할라고, 이 삶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주셨기 때문에 삐뚤어진 게 하나도 영원히 없는 이 공로를 대신해 입혀 줬기 때문에 나는 삐뚤어진 게 없는 사람이라.
삐뚤어진 게 없는 사람이 삐뚤어진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라고 이렇게 우리가 애를 쓸 때, 살라고 애를 쓸 때에, 그러면 이 사실을 알고 깨닫고 믿고 ‘나는 사죄받았기 때문에 삐뚤어진 거 없는 죄 없는 내이니 죄 없는 사람으로 나는 살란다, 죄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나는 죄 없는 사람이 살아야 된다.’ 죄 없는 사람이 살고 앞으로도 죄 없는 사람이 살고 하나님의 모든 법을 완전히 이행한 사람이 살고 앞으로도 이행할 사람이 살고 하나님과 화친된 사람이 사는 요 생활을 내가 깨닫고 믿고 할라고 애를 써서, 할라고 애를 써서 내게 있는 것만 다 하면, 요거 제일 요게 요지입니다. 요거 몰라요, 요거 다. 요거 다 모르고 믿기 때문에 헛일이야.
알고, 믿고, 요대로 살라고 애를 쓰는데, 애를 쓰는데 자기의 힘과 목숨과 모든 소유를 다 바치면 사람이 죄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의 소유와 몸과 생명 그런 것을 뭐 바칠 뿐 아니라 그런 거 억억만이 있어 바친다 할지라도 죄 없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삐뚤어진 거 없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인간이 생명 내놓는다고 생명 내놔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이 전지의 법을 이행한다는 것이 사람이 제 심신을 다 기울여 전심 전력 생명 기울이면 하나님의 이 전지의 입법을 다 이행할 수가 있는 줄 압니까? 이행 못 하요. 전지의 율법의 억억억억억? 만의 일도 제 생명과 몸을 다 바쳐도 이행 못 하는 것입니다. 요걸 알아야 돼요.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 모두 껍데기 예수 믿어.
못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완전자와 이렇게 결합된 이 결합을 이것을 피조물이 생명 내놓는다고 결합이 될 줄 압니까? 이 세상에 정권자도 자기 생명 내놓는다고 그 정권자하고 한 덩어리가 될 줄 압니까? 땅에 지저분한 티끌 같고 만물의 때와 같은 정권자하고도 자기하고 한 덩어리가 될라고 생명 내놓으면 그 사람하고 하나가 될 줄 압니까? 안 돼요. 하물며 하나님하고 어떻게 인간이 하나 될 수 있습니까? 이거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 불가능한 것인데 누가 이 일을 하게 하느냐? 하나님이신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이 예수님이 세 가지 대속을 입었으니 대속 입은 자가 살 수 있는 이 일을 되게 하는 이 은총을 받는 것이 주일날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가 하게 하는가? 성령과 진리가 하게 합니다.
성령과 진리가 하게 하는데, 예수님이 대속하신 공로가 있고 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영감과 진리, 이 전능의 영감과 진리가 와서 있고,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 이 셋의 힘으로 말미암아 나만 할라고 애를 써서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하여서 할라고 애를 쓰면 가능하게 됩니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만 다하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 다한다고 나 다하는 거 그거 가지고서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생애를 할 수가 있느냐 하면은 천하 인간 다 뚜드려 뭉쳐도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생애를 하루도 못 합니다. 알겠습니까? 하루도 못 해요. 이 마귀를 이기지 못해, 사망을 이지지 못해. 하루도 못 해요.
못 하는데 우리는 이 공로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써의 영감과 진리의 은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만 힘쓰면 될 수 있는 이 일인데, 주일날 무슨 일을 하나님이 주시느냐?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의 대속과 예수님이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의 구속과 이 두 구속을 알아 깨닫는 은혜와, 알아 깨닫는 은혜와 또 둘째로는 믿어지는 은혜, 믿고 믿어지는 믿음의 은혜. 셋째로는 이를 원하고 자기가 실행할 수 있는 그 은혜를 받는 것이 주일날인 것입니다. 실행할 수 있는 은혜를 받는 것이 주일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주일에는 자기가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의 완전 생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도 자유, 모든 피조물은 다 거게 얽매였는데 이 모든 피조물을 통치할 수 있고, 모든 천상 천하의 모든 것을 다 통치하고 모든 것에게 은혜를 능히 베풀 수 있고 완전자, 완전자, 하나님하고 서로 내주해서 하나님인지 사람인지 모를 만치 이렇게 상호 내주하는, 하나님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은 머리되고 몸이 되는 이 완전자, 만물에게 충만케 하는 이 충만을 가능할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완전자, 완전자 되는 이 깨달음을, 믿음을, 소원을, 요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 주일날의 일입니다. 능력을 받는 것이 주일날이오.
그 사람이 사죄 칭의 화친 이 세 가지 공로를 입고 벗지 않기 위해서, 이 공로를 뺏을라 하니까 ‘이 공로를 네가 내놓지 안하면 네 생명을 죽일란다’ 할 때에 이제 그 죽음에서 ‘네가 이 공로만 내놓으면 너를 살려 준다’ 죽음에서 살려 주는 그 생명과 이 공로를 벗는 것과 둘을 끼워서 줄 때에 ‘나는 그 구원은 받지 않겠다.’ ‘그러면 네가 이 공로를 네가 가지면은 네가 죽어야 되는데 어짤래? 죽음하고 이 공로하고 같이 받을래?’ ‘내가 죽음하고 공로하고 같이 올 때에는 나는 죽음 때문에 공로를 버리지 않는다. 죽음하고 공로하고 같이 오면 나는 그 공로를 내가 영접하기 위해서 나는 죽겠다. 나는, 그 공로를 이제 내놓으면 너를 죽음에서 구출해 준다, 죽음에서 구출해 주는, 죽음에서 살려 주는, 구명, 살려주는 그 살려 줌과 이 공로를 벗는 것과 둘을 끼워서 줄 때에는 나는 안 살고 나는 이 공로 나는 벗지 않는다.’ 하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순교를 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주일날은 이 은혜를 받는 것이 주일날 받는 것이지 주일을 뭐 평생 지켜도 뭐 직장에서 ‘내가 이거 주일 지킬라 하면 장관 떨어질 건데. 주일 지킬라 하면 시장 떨어질 건데. 주일 지킬라 하면 동장 떨어질 건데. 주일 지킬라 하면 학교에서 면직당할 터인데. 주일 지킬라 하면 시험 못 칠 터인데. 주일 지킬라 하면 교편 생활에서 면제당할 것인데. 주일 지킬라 하다가는 오늘 이 사업에 교제하는, 사업에 모든 제휴하는 이 모든 관계 맺는 것이 끊어지겠는데.’ 이제, 그런 거 때문에 주일 못 지키는 자는 그는 예수를 믿으나 아직 사망을 벗어나지 못한 자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 것으로 완전히 입어서 세상을 이기고 하늘과 땅의 것이 통일될때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더불어 함께 통치하고 하나님의 한 영광에 같이 누리고 한 기쁨에 같이 누리고 한 역사를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오.
주일이 뭐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주일날, 주일날은 뭐하는 것입니까? 똑똑히 또 한번 말해. 주일날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의 세 가지 대속, 세 가지 대속,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의 구속의 두 가지 능력, 이것을 알고, 또 거게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아는 게 깨달음 아니라.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하겠다’ 하는, 자기의 단독 행위할 그것을 깨달은 것이 깨달음이라. 깨달음.
또 깨닫고 난 다음에는 요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 이제 모든 욕망보다 이 욕망이 커. 모든 욕망보다 이 욕망이 커. 모든 욕망보다 이 욕망이 커. 이 욕망에 모든 욕망이 다 집중해서 이 욕망이 중심 욕망이 돼 가지고 이대로 살라고 할 때에, 이대로 살라고 할 때에 이대로 살므로서 몸 내놔야 살 수 있을 때에는 몸 내놓고, 또 목숨 내놔야 살 때에는 목숨 내놓고, 모든 소유 내놔야 살 때에는 소유 내놓고, 고문과 고형을 받아야 살 때에는 고문과 고형을 받아도 주님의 사활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이 구원을 놓지 안할 수 있는 그 능력을 주일날 받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안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이겁니다! 이게 예수 믿는 것이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뭐라 한다 해도 그는 꿈쩍도 안 해. 다니엘도 다 이런 사람들이요 이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뭐 공산주의가 와 봤자 이런 사람들은 복되게만 해 줬고 영광스럽게만 해 줬고 존귀하게만 해 줬고 그 구원만 영광스럽게 성취해 줬지 그들이 털끝만치도 해는 끼칠 수가 없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승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