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1 20:47
아브라함의 신앙
본문 : 창 13: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이 롯으로 더불어 서로 시비가 있을 때에 아브람이 취한 길과 롯이 취한 길은 정반대입니다. 아브람이 취한 길은 하나님이냐 자기냐 둘을 두고 지금 결정지워야 될 그 현실에서,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를 좋게 할라면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 좋게 하는 일이 안 되고.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 좋게 하는 일 하면 자기는 생각지 안해야 되고 자기 좋게 하는 일은 하지 안해야 되고, 이래서 이 길이냐 저 길이냐 하는 양 갈래 길에 있을 때에 아브람은 자기야 어찌 됐든지 하나님 좋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길을 택했고, 롯은 그 현실에서 그저 하나님은 섭섭해 하지만 아무래도 하나님 보다 자기를 생각해야 될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 좋게 자기중심으로 판정을 지웠습니다. 그것이 롯과 아브람의 택한 길이 다릅니다.
또 거기서 아브람도 롯도 자기 가족들에 대한 그 물욕이나 모든 탐욕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롯이 결정하는 대로 그 뒤는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책임이 다 아브람과 롯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누가 들어서 어떻게 한다 해도. 롯도 자기가 결사적으로 그래 결정을 했으면 그대로 따라 갔지 가족들이 별수는 없습니다. 이랬는데 거기서 아브람이 택한 길은 가족들의 의사와 모든 종언자들의 의사는 다 하나가 되어 가지고 좋은 곳을 택하자 이렇게 했지만 아브람은 가족들의 모든 사람들의 의사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은 거기서 양보하고 가는 것이 옳지. 거기서 시비해 가지고 나중에 가서 무슨 일이 날는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무슨 시비가 무슨 분쟁이 날는지 모르는 그런데에 자기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양보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거기서 신강을 해서라도 기어코 해 보겠다는 그것은 뭐이냐?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래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브람이 택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사보다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히 해서 하나님의 의사를 딿기로 결정을 했고, 롯은 하나님의 의사야 자기가 모를 리가 없지요. 우리도 다 그럴 때에 우리 속에는 양심이 있고 이성 판단이 있기 때문에 압니다. 그때 롯은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하니까 가족들의 그 안면을 버릴 수도 없고 원수와 대립이 될 수도 없고 이라니까 그것도 참 난처하기는 난처하지요.
하나님의 종들이 보면 가족들의 의사에 따라서 대개는 끌리지. 그 가족들 의사와 하나님의 의사를 둘을 놓고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시하고 가족들의 의사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지를 못합니다. 가족들의 의사를 따르면 가족들이 그만 일시 단합이 되고 아주 단결이 되지만 하나님의 의사를 취하면 참 처음에는 단결될 리가 없고 모두 다 대립적이요 신강이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모든 사람의 의사보다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시해서 그 길을 택했고 롯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 신강할 때에 보니 소돔 들과 소돔 성은 다 유명한 도시요, 또 문화도시요 아주 그 지방은 비옥하고 수원이 좋기 때문에 참 여호와 동산같이 그렇게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아주 풀도 없고 물도 없는 적지입니다. 그럴 때에 온 가족들은 '자 이 소돔 들을 반 가르든지 해야 되지 이 적지만 취하고 좋은 땅은 다 내 주고 이라면 어떻게 하려고 이래 하느냐?' 이 가족들이 말했고, 롯의 가족들도 말했지만 아브람은 이 보이는 모든 조건들과 형편들과 그 소유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더 크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면 없는 가운데서 있게도 할 수가 있고, 또 작은 것을 크게도 할 수가 있고, 적은 것을 많게 할 수도 있고, 아주 낮은 것을 높게도 할 수가 있으니 하나님의 축복이 보이는 이 모든 것보다 낫다 요것을 판정해서 그저 보이는 것에 손해볼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안하려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 길을 택했고, 롯은 아무리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지만 그거는 믿어지지 안하고 현재에 손에 쥐어 가지고 있는 소돔들이니까, 보이는 이것을 더 하나님의 축복보다도 존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롯은 보이는 그 모든 좋은 구비한 것들을 취했고 아브람은 그게 손해가도 하나님이 축복할 수 있는 그 길을 택한 것이 아브람의 길입니다. 이러니까 아브람의 길과 롯의 길이 달랐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롯이 떠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세 가지 일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무슨 일을 해주셨는고 하니 '네 자손이 바다의 모래 수와 같으리라 바다의 모래 수를 헤아릴 수 있으면 네 자손도 셀 수 있지만 그것을 셀 수 없다면 네 자손도 셀 수 없으리라.' 이렇게 많은 자손을 축복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갚아 주신 것인가? 아브람이 하나님을 모시고 자기를 버렸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취했습니다. 이러니까, 주를 위해서 자기를 버린 자에게 자기를 많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기를 많이 주는 자기 자손 자기 자손을 많이 줘서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은 수를 가졌습니다.
그러면,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은 그 수가 혈육의 자손입니까? 혈육의 자손이 아닙니다. 혈육의 자손도 자손이지만 성경이 해석하기를 혈육의 자손이 아니 고 아브람과 사상이 같고 목적이 같고, 사상이 같고, 목적이 같고, 동기가 같고, 생활 방편이 같고, 모든 인질과 인성이 같은 아브람과 같은 그런 자손을 이렇게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은 많은 수를 주시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그라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가리켜서 아브람의 자손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역사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래도 잘 됐든지 못 됐든지 아브람과 같은 사상을, 아브람과 같은 목적을, 아브람과 같은 그 인질을, 인성을, 생활 방편을 가져서 아브람 모양과 같은, 모양이 꼭 되지는 안해도, 다 비슷해도 한 그 믿음의 자손을 수를 셀라 하면 그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기를 자기를 하나님 때문에 자기를 버린 자에게 이렇게 수많은 자기를 주었습니다. 이거야 뭐 백 배만 되겠습니까? 억억억억만 배도 더 됩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안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보이는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더 원하는 자에게 그 보이는 좋은 소돔 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그저 축복만 바라고 축복받기 위해서 발간 자산을 취한 그 아브람에게 내가 이 가나안 땅을 종과, 종은 이 길이를 말하고. 횡은 이 넓이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줘서 영원히 누리게 하겠다 이랬는데 영원히 누릴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두고 말씀 한 것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해석 이 돼서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가나안에서는 우거했지 자기 땅으로 차지하지를 못했습니다. 못 했는데 아브라함이 떠 날 때에 아브라함에게 영감이 와 가지고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변동될 가나안을 주지 안하시고 영원히 변동되지 아니할 견고함이 있는 나라를 나에게 주실라고 하셨다.' 이래서,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으로 약속 하신 것은 그 무궁 세계의 하늘나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통일된 이 그리스도의 나라, 하늘나라, 이 하늘나라를 아브라함에게 소유시켜 준 그것을 해석을 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자기 소유를 손해 본 그에게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너희 것이니라.' 하는 이 축복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와서 아브라함뿐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그 믿음의 자손들은 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자기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권세가 허락돼 가지고 있고, 자기만 노력하면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뭐 노력은 다른 노력 아니라 자기가 예수님의 것만 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의 모든 것은 다 너희 것 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 이렇게 손해 본. 자기 소유 손해 본 자에게 하나님은 결단코 내몰라라 하지 안 하시고 그에게 뭐 이것은 몇 만 배가 아니라 억억억억만 배, 뭐 얼마가 되는지 그거는 참 헬 수 없습니다. 헬 수 없는 그 축복을 주셨습니다.
또 자기가 가족들의 의사가 있고, 자기 의사도 있고 가족들의 의사도 있고 하나님의 의사가 있는데, 자기들의 가족들의 그 의사보다도 하나님 의사를 존중시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가족들의 의사를 다 부인하고 하나님의 사를 따라간 사람에게 무엇을 줘야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모든 것을 시비곡직을 바로 판단하고 의사를 바로 판단해서, 모든 시비곡직을 바로 판단하고 의사를 바로 판단해서 모은 시비곡직을 바로 판단하는, 인간들의 모든 의사와 하나님의 의사와 그 지저분한 의사가 천도만도 한테 뚤뚤 뭉쳐 가지고 이 의사가 옳으니 저 의사가 옳으니 하는 그것을 신강하는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사를 택했습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이제 모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위를 줬습니다. 판단할 수 있는 지위를 준 것은 아브라함에게 뭘 줬는고 하니 아브라함에게 이제 하나님 섬기는, 하나님 섬기는 제단 생활을 줬습니다.
이 제단은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위치입니다. 제단 생활 하는 이것은 제사장인데, 제사장은 하나님 다음 위치가 제사장입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장은 백성들이 시비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 시비는 제사장이 판가름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죄인지 의인지 똑똑히 모르고 할 때에는 제사장에게 가 가지고 재사장의 판결대로 그렇게 받았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병들었다 나아도 나았다고 결단고 인정하지 안했는데 제사장이 보고 '이는 병 나았기 때문에 이제는 다 완치자요 전염병자가 아니다.' 이렇게 제사장 이 증명을 할 때에 비로소 인정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제사장 생활이라 하는 것은 모든 존재들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판결, 심판권을 가진 것이 이것이 제사장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모든 의사보다도 하나님 의사를 존중시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 제단 생활 주신 것은 곧 제사장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제사장 직책을 해서 거기서부터 단을 쌓고 하나님 섬기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한 자에게는 자기와 같은 그 자손들을 많이 줘 가지고 그것을 약속에 신실하게 갚아 주셨고, 또 모든 사람의 의사보다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시하는 그자에게 이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시비곡직을 판정해서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통치의 지위를 주었고, 또 보이는 모든 소유보다 하나님 축복을 크게 여기는 그자에게 이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통일될 무궁세계 그 세계를 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하늘나라의 이 소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것을 인해서 우리들도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과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와 모든 전체를 다 자기 것을 삼을 수 있는 지극히 큰 소유를 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주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주를 위해서 손해본 것, 주를 위해서 낮아진 것, 주를 위해서 천해진 것, 주를 위해서 가난해진 것, 주를 위해서 빼앗겨진 것, 주를 위해서 진 것, 주를 위해서 참은 것. 주를 위해서 욕을 본 것, 주를 위해서 천대 받은 것 절대로 손해 안 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신실히 갚으십니다.
측량 못 하게 갚으십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만을 생각해서 자기 의사대로, 자기주장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견해대로 해서 보이는 것을 택하고 자기나 인간 의사를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인간들을 주장하는 그자에게 대해서 갚음이 표시로 된 것은 영원한 유황불 구렁텅이입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공심판은 면해서 하늘나라에 가 있지만 하늘나라 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대로 산 사람은 아무것도 없어. 그러기 때문에, 욕심쟁이들이 하늘나라 가 가지고, 택한 자들도 욕심쟁이, 자기만 아는 자, 자기만 아는 자, 자기 욕심쟁이, 자기 위주자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서는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대해서 '너는 이 도에서 받을 것이, 분깃이 하나도 없다' 이랬습니다. '하나도 없다.' 그런데 '너는 은과 함께 망하리라' 돈을 위주로 하고 네가 세상 위주로 하는 사람은 세상과 함께 망합니다. 돈을 위주로 하는 사람은 돈과 함께 망합니다. 지위와 권세를 위주로 하는 사람은 지위와 권세하고 함께 망합니다. 자기 위주로 하는 자는 자기와 함께 망합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바로 깨닫고 우리가 오늘이라는 이때에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바짝 힘을 써야 돼 바짝 힘을 안 쓰면 안 돼.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기도록에 등록한 사람은 5854명입니다. 어제는 573명이 교회서 기도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자기 처소, 산에 이런데서 기도했습니다. 권사님들은 네 분 다 나와서 기도했고, 목사님들도 다섯 분들이 다 나와서 기도했고, 장로님들은 많이 줄었습니다. 다섯 분은 나오시고 다섯 분은 못 나왔습니다. 어쨌든지 신앙의 자유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 뭐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 하고. 성경 보고 싶으면 성경 보고, 또 전도하고 싶으면 전도하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이렇게, 이거 자유로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이렇게, 보니까 이 기도하는 데도 자유가 권사님들이 제일 자유가 있고, 그 다음에는 목사님들이 자유가 있고 그 다음에는 장로님들이 자유가 제일 적습니다. 평신도도 그래요.
그런고로, '너희들 부르신 것은 종된 데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서 불렀다' 했소.
자유라 말은 뭐인고 하니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인데 뭐 제 맘대로 뭐이요? 우리가 뭘로서, 우리 마음이 뭡니까? 우리 마음은 영감과 진리가 우리 마음입니다. 영감과 진리로 살아났기 때문에 영감이 제 마음이요, 진리가 제 마음인 것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중생된 새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진리대로 할 수 있고 얼마든지 영감대로 할 수 있고 뭐 영감과 진리대로 양보할 것도 영감과 진리대로 얼마든지 자유로 할 수 있는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불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자유는 양심 자유요, 신앙 자유요, 교회 자유요, 영감 자유요, 진리 자유입니다.
지금 다섯시입니다. 꼭 다섯시입니다. 다섯시이니까, 이제 모두 산으로, 들로, 집으로. 예배당으로, 이 구석 저 구석으로 흩어져 가지고 바짝. 나도 현실에서 아브라함같이 요렇게 살 수 있는 아브라함같이 하나님이냐 내냐 할 때에 아예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또 인간의 의사냐 하나님의 뜻이냐, 인간의 수많은 의사를 다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탁 찾아서 따라갈 것이고 또 보이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귀중히 여겨서 하나님의 축복을 뺏기지 안하고 놓지 않는 요 길을 택하여 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우리는 기도하고, 얼마나 힘써야 이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