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1 20:35
아브라함과 롯
1983년 5월 22일, 주일오전,
본문: 창세기 13장 8절∼13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이 말씀을 요사이 늘 계속해서 증거하다시피 증거를 했습니다. 또 오늘 이 시간에도 이 말씀을 아무래도 증거해야 되겠다 해서 또 증거를 합니다.
물론 지식이 중요하지마는 지식으로 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식은 실상을 이루기 위한 지식인데 지식만 가져 있으면 필연적으로 교만한 사람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모든 사람을 상대해서 자기가 논평할 때에 그 지식대로 논평하니 모든 사람이 다 정죄받고 허무합니다. 그러나 지식을 가지고 제가 그대로 살려고 하면 자기의 전부는 다 미달이요, 부족이요, 연약이요, 악한 자요, 더러운 자요 그렇게 죄인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몇 번 들어 자기가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은 앉으면 남의 논평해 수 있는 참 저주받은 불행스러운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에 이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살지 못한 그것이 자기에게는 그게 뉘우쳐 부족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채우려 하는 그런 복있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런고로 다 잘 아는 말씀이겠습니다. 대구 가서도 늘 이 말씀을 했고 여게서도 얼마든지 했고 이랬기 때문에 잘 아는 말씀인데 자기가 기어코라도 실행을 해야 될 것입니다.
실행을 하되 하나님을 자기처럼 그렇게 자기를 표본으로 삼아 가지고 하나님을 지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신 분이시면서 또 이상 더 없는 지극히 작은 자이십니다. 그러기에 크기도 제일 크시고 작기도 하나님보다 더 작으신 이가 없습니다.
뭐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새 과학에서 무엇에 뭐 몇억만분지 일이 되는 그런 작은 것이 있다고 발표가 됐는지 모르지마는 그것보다 측량할 수 없는 작은 분이십니다. 그러시면서 지극히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측량 못 할 지극히 크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그분 안에 있고, 또 사람이 지극히 작다고 하는 그것 속에도 주님은 그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자존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필요한 정도로서는 신구약 성경 이 문서에 계시해 주셨고 또 문서로 기록할 수 없는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없는 것은 영감으로 또 내재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하면 그래도 성경을 가지고 성경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가 그대로 배워서 아는 것이 옳은 지식이요 거게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신의 감동이 알려 주신 대로 이제 알면 인간이 필요 있는 대로의 지식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알 것은 하나님은 이 시간에 제한이 없습니다. 그저 지금이나, 천 년 후나, 억만 년 후나, 뭐 사람의 표시로서 억억만 년이라고 하면 억억만 년 후나 변함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하나님도 그러하시고 우리도 존재, 우리가 생겨진 때는 있지마는, 생겨진 때는 있지마는 우리가 아주 없어지는 때는 없습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다른 만물은 그의 물적 요소나 무슨 그런 것은 없어지지 않지마는 그것이 자꾸 창조돼 나오는 변형돼 나오는 그것은 뭐 수천 번 수백 번이라도 변형됩니다. 석가모니가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게 제일 복있다' 하는 그것은 만물의 원소 비밀과 그것이 많은 변성으로 그렇게 개조되는 그 면을 하나 발견해 가지고서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시간에 무한하고 또 공간에 한정이 없습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나 무궁세계나 다 하나입니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시간은 지나갔지마는 어제 일을 오늘 생각할 수 있고, 또 오늘 하는 일을 어제 예산할 수 있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이라는 이 울타리 안에서만 역사하시고 세상이라는 울타리 밖에는 상관 없음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는 세상이라는 울타리와 영원 무궁세 계라는 그 경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당신이 역사하시고 또 무궁세계에서도 역사 하십니다. 지금도 이 시간으로 말하면 지금도 역사하시고 무궁세계에도 역사를 하십니다. 그래 공간에 제한이 없습니다. 종류에도 제한이 없습니다. 이 종류에서도 역사하시고 저 종류에서도 역사하시고.
그러기에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요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 비슷하게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받았다 그말은 하나님은 영원히 가도 되는 거는 아니지마는 피조물로서는 하나님 아니면서 하나님과 비슷한 자라 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모형적, 하나님은 원형이라면 우리는 그 모형되는 모형적 우리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발표를 하셨습니다.
미래적으로는 우리도 무한한 자요, 또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영원 자존자로서 무한한 자십니다.
그러기에 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서 교훈하신 것이나, 약속하신 것이나, 또 정해 주신 모든 규범들이 토막 토막 한계는 있지마는 실은 전체는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향해서 당신이 소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한 토막 이 세상만을 표준해 가지고 그렇게 우리에게 교훈하심이 아니고 이 세상과 무궁 영원을 다 포함한 이 교훈이요 약속이기 때문에 비유컨대 이 세상만이라면 가장 불행스러운 하나님의 지도 하나님의 인도가 세상이란 한 토막만 본다면 불행이지마는 영원 무궁을 한테 합해서 계산을 댈 때는 가장 행복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지도입니다.
아브라함도 여게 비슷한 신앙 걸음을 걸었고, 또 예수님도 이 세상이라는 한 토막뿐이라면 가장 불쌍하고 실패한 자이지마는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명령하시고, 또 인도하시고, 요구하시고, 모두 다 섭리하셔 가지고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섭리 착수하신 일이 한 토막 세상뿐이라면 참 그는 그 이상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하고 저주받은 일이 없지마는 영원 무궁을 한테다가 끼워서 계산을 할 때에는 예수님보다 더 성공한 분이 없고 승리한 분이 없고 행복된 분이 없는 길을 걸은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향할 때에 자기 표준으로 좁고 짧고 얕은 그런 자기대로의 모든 사고나 비판이나 평가를 이렇게 하면 그것이 타락한 자기라는 그 원죄와 본죄, 자기라는 그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죄수입니다. 그것이 자기 감옥입니다 믿음은 "너희들을 옥에서 해방시켜" "자기 죄에서 해방시켜" 그거는 자기 죄에서 해방시켰다 말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주관, 자율, 자기 경험, 뭐 선입적이나 할 게 아니라 모든 것, 한 말로 말하면 그것이 다 인간의 생각인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전적 부패한 인간의 생각인데 거게 갇혀 가지고 있는 자를 그게 내나 죄인데 그 죄에 갇혀 있는 자를 해방시켜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의 이 계약을 말씀 교훈의 말씀을 대할 때에 첫째로 자기를 부인해서 자기 주관이라는 그 감옥 속에 안 갇혀야 됩니다.
자기 마음에 아무리 '이렇다' 해도 그거는 제가 그 감옥에 갇혀서 색경을 썼고 제가 지금 갇혀서 죄악의 종이 돼 가지고서 그런 판단과 평가가 있는 것이지 실은 그런 게 아니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인정하는 사람이 비록 피조물이지마는 창조주의 그 형상을 다시 도로 찾는 것이요 또 극히 유한한 자이면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접붙여 가지고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무한한 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약한 이 계약을 우리 생각대로 '요것은 아무래도 일 년이면 끝이 안 나겠나 성과가 드러나지 않겠나? 십 년이면 성과가 드러나지 않겠나?' 그런 감옥을 벗어나야 됩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위에 참 권위 있는 지도자나 교육가가 볼 때에, 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해야 되겠는데 자기 주장 그것을, 자기 꾀를 쓰는 그것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패되니, 생각할 때에 '네가 요것을 한 달 동안을 요거 계속해라.' 요럴 때에 그 사람이 '한 달 동안, 요 한 달 기한이니까 한 달 동안 열심히 하자.' 이래도 그것이 한 달에 만일 하루가 늦으면 '어째 될까?' 열흘이 늦으면 '어찌 될까? 그래도 혹 잊어버린게 아닌가? 좀 참아보자.' 그러다가 한 달이 더 지나가면 '이거 안 됐는데. 이제 다시 한 달만 더 참아보자.' 이러면 그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쓸라 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을 아니까 '한 달 다시 더 참아보자' 하는데 '한 달 더 참아보자.' 한 달 더 참아 가지고 거석하면 그것 저 소원대로 들어 주면 그게 내나 자기 속에 자기를 주장하는 자기 그놈이 들어서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뽑아버리기를 지금 노력하고 있는고로 한 달로 계산했으면 그 위에 있는 사람은 그걸 뽑아야 되니까 '요게 한 달이 지나면 이제 뭐이 튀어나올 거다.' 알고 역부러 한 달을 지납니다. 자꾸 그래 나갑니다.
이제 그래 가지고 '아이고, 나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보다 능하신 분이니까 내가 이미 배우러 왔고, 또 지도를 받으러 왔고, 고침을 받으러 왔고 이랬으니까, 내가 여기 이 병원에 퇴원을 하든지 그러면 이 학교에서 나가든지 이미 들어왔으면 여기서는 그저 몇 해든지 여기 주최측에서 정한 그대로 나는 여게서 뭐 지도대로 치료하는 대로 가르치는 대로 받아야 되겠다' 이렇게 딱 단정을 지우면 그만 그 이튿날부터 다시 착수해 줍니다.
'이제는 너를 가르칠 수 있고 네가 배울 수 있고 네가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시작한다. 그러나 네가 요것을 버리지 안하고 있을 때에는 너를 착수도 못 하고, 치료도 못 하고, 교훈도 하지 못한다.' 사람들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아브라함과 롯의 이 교훈을 받을 때에 자기 본위로 '이러면 내가 한 그래도 한 중년기나 돼서 그저 한 서른 한 댓 살 이래 먹으면 중년기 되면 설마 끝장 날 것 아니가?' 이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버려야 됩니다. 그걸 버리기 전에는 하나님을 향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네가 중년기까지는 네가 요렇게 아브라함 롯의 교훈을 받고서 요대로 지켜 나가는 그것이 중년기까지 그래 지키는 것은 그 지키게 되는 왕은, 너를 지도하는 왕은 네고, '그러니까 중년기까지는 한번 지켜보자' 이러니까 지켜도 나에게 순종함으로써 너와 나와 대립될 때 너를 부인하고 내게 순종함으로 네가지키는 게 아니고 순종함으로 지키되 '중년기까지 지켜보자' 하는 그놈이 네기 때문에 실은 그놈이 최고의 조종자요 지도자요 네 왕이기 때문에 만일 중년기 가 가지고서 아무것도 없으면 네가 훼딱 뒤벼져 가지고서 반대될 터이니 지금은 네가 가만히 잠복하고서 나를 지금 네 꾀로 가지고서 하나 꾀워먹고 나를 하나 이용할라 하는 그것이지 네가 나를, 너 부인하고 나 믿는 거는 아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중년기까지 말했으니까 부득이 그것 죽이기 위해서 어북 그 노년기까지 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안 되면 늙어 죽을 때까지 가다가서 그만 죽으면 그뿐이요, 그만.
그러나 이 사람이 신앙 생활 시작하기는 시작했지마는 '그러면 네가 이렇게 믿다가 믿으면 어짤라고? 만일 일 년 믿어 안 되면 어짤래?' '뭐 안 돼도 믿어야지요.' "십 년 믿어도 안 되면" '뭐 그거야 금생뿐이 아니고 영원 무궁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한 건 나 속이지 안하고 나에게 유익된 길이요 또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대속해서 샀기 때문에 내야 그게 되든지 안 되든지 당신의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내 생애요 당신의 것으로 당신의 종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생애요 내 법칙이기 때문에 그뭐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그것은 내게 대해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건 당신이 이루어 주시든지 안 이루어 주시든지 당신의 기뻐하시는 대로 이루는 게 좋으면 당신이 이루어 주실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좋으면 당신이 이루시지 않을 것이고 나는 다만 당신에게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의 것으로 사는 것과 당신에게 복종하는 이것이 내 일입니다.'
'구속받았기 때문에 당신의 것으로 사는 것과 당신에게 복종하는 이것으로써 나 할 일 다 했지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 뭐 댓가가 온다. 보응이 온다. 뭣이 어찌 온다 하는 그런 것은 그것은 당신이 할 일이고 당신이 또 보응한다 할지라도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내 조부라운 지금, 내일도 모르는 조부라운 생각에서 요라면 좋다 조라면 좋다 하는 그것이 내 다리에 내가 걸려 가지고 자빠지는 것이고 내 지식에 내가 걸려 가지고 자빠지는 것이지 나는 그렇게 좁게 불완전한 그런 지식을 이용하지 안하고 그저 당신에게 맡겨놓고 이렇게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탁 하니까 그 사람은 그 이튿날부터 하나님의 나이 그에게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같이 해 모든 것 할 수 있어.
모든 것 다 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이 없지마는 '왜 저 사람은 얼마 안 가 그렇습니까?' '그거는 저를 부인하고 나를 신종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그저 일 년이 안 되고 뭐 몇 달이 안 됐다 할지라도 그대로 신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 신종해 가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요동치 안할 사람이다. 그 사람은 끝없는 신앙을 시작했고 끝없는 복종을 시작했기 때문에 끝없는 복종 끝없는 신앙이라면 내 모든 걸 다 줄 수 있다.' 다 줘도 그 사람에게 보일 때 언제까지 어느 도수까지는 되지마는 만일 이상 더 부강하게 되면 안 되겠다 하면 그때까지는 주고 그 이상 부강이 될 때는 딱 중단을 시켜 또 안 할 거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이 신앙은 무한하신 그분을 향하여 그분의 어떠하심을 인정하는 내 자체가 되는 여기에서 모든 일은 이루어지고 또 교훈하는 모든 생애는 내 자체가 당신에게 대해서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이 일이 커서 이 일 하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지 뭐 전도하고 심방하고 하는 것도 이 일이 커서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고 변화가 돼 나가는 우리 자체 변화, 또 대인 변화, 대사물 변화, 또 하나님 대하는 변화 이것이 당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지 인간이 수고해서 전도해 가지고 노력하는 인간의 그 노력을 당신이 그립고 그것이 모자라서 채우기 위해서 하시는 것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은 당신이 뭐 십 분 만이면 천하 있는 사람 예수 다 믿고 '예, 죽어도 믿겠습니다.' 십 분만이면 항복 다 하고 다 믿을라 할 것인데 그뭐 어려울 게 뭐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의 이 크신 본 뜻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믿는 믿음이 나를 부인하고 그를 끝까지 믿는 이 끝없는 믿음을 가져야 돼.
끝없는 믿음을 가질 때에 그분은 나를 인정하시고 끝없는 무한의 그 은총을 나에게 베풀 수 있고 나는 또 그 은혜를 받아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과 롯의 이 교훈을 받고 '이게 보자, 한 달만 요래 보자.' 하는 그 사람도 참 답답한 사람이오. '일 년만 그래 보자' 하는 사람도 답답한 사람이오. 이것이 생명의 법칙이요 옳은 법칙이기 때문에 그만 죽는 날까지 이래 믿어서 아무런 그 효력이나 끝이나 못 봐도 이게 옳은 법칙이요 옳은 길이기 때문에 그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어서 이래 나가는 이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야 무한하신 분이 그 사람에게 대해서 소신껏 일하실 수가 있고 또 그 사람도 그것 감당할 수가 있지, 자기 본위로 항상 한계를 정하고 이래 놓으니까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같지마는 속에 깊은 속에 최종 지도자와 최종 자기를 판정자는 자기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하나님을 꾀우는 것이고 달래는 것이지 그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은 아니라 그 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끝없는 그런 신앙을 가지도록 합시다.
자기가 이렇게 살면서 죽는 날까지 아무 효력을 자기는 못 봤다 해도 못 봐도 그대로 아브라함의 걸음의 신앙을 걸어간 사람과, 반평생을 걸어가고 반평생은 하나님의 이 축복을 받아 가지고서 누리고 간 사람과, 사람이 보통이라면 칠십이라 하는데 한 육십 년 동안 이 계명을 지키다가 십 년 동안 그 축복을 받아 가지고서 누리고 살다 간 사람과,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노력했는데 반평생을 축복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십 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죽는 날까지 거게 대한 보응을 하나도 받지 못했고, 이 세상뿐이라면 이것 도무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뿐이라면 불공평이라.
아무리 약해서, 아무리 약해서 지옥에 가 가지고 불에 타도 우리는 발언할 언권이 있습니다. 언권이 있다 말이오. '하나님이여, 어떻게 이렇게 하십니까?'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만든 것이니까, 너거가 만들어진 것이니 뭐 이래 사용하든지 저래 사용하든지 자유가 있지 않느냐?' '자유 있는 거는 좋습니다. 그러면 뭣 때문에 정죄를 합니까?' 얼마든지 시비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이의를 달 수가 있어.
이렇지마는 가 보니까 인생의 영원은 무궁이 있는데 무궁세계에 가 보니까 세상에서 반 받고 그 사람은 반 신앙 생활 했는데 그만 그 뒤에 하나님이 그 댓가를 주지 안하면 그 사람이 낙심하고 돌아갈 사람이니까 부득이 반은 기다리다가 반은 줘야 되겠고, 이 사람은 아무래도 십 년까지 마지막은 다해서는 안 기다릴 터이니까 십 년 전에 그 축복을 해 줘야 되겠고, 이 사람은 죽는 날까지 안 줘도 무궁을 바라기 때문에 그 사람은 뭐 죽는 날까지 그런 신앙 생활에 효과라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어도 요동치 안할 사람이라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얼마든지 무궁을 위해서 그 사람에게 유익되게 준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우리가, 그러기에 이 자연계시, 모든 만물계시는 자연계시인데 우리가 사람을 접촉해 봐도 선이 가는 사람 굵은 사람, 봇짱이 큰 사람 작은 사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것은 과적 가 봤자 사흘이오. 사흘 동안에 효력이 안 나면 그만 변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안하고 한 일 년 동안은 뭐 모르는 척하고 효력이 없어도 요동치 안하고 그대로 약속을 지키든지 교훈을 지키든지 해서 꾸준히 해 나갑니다. 이렇지마는 일 년 넘어가면 그게 값이 없으면 달라지요.
그러나 이거는 속에 몰라 그런 것 등신이라 그런 것은 말할 것 없지마는, 하루짜리, 하루짜리도 있고, 사흘짜리도 있고, 한 달짜리도 있고, 일 년짜리도 있고, 십 년짜리도 있고, 이십 년짜리도 있고, 평생짜리도 있고, 영원 무궁짜리도 있어, 가치 있는 가치가.
이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 표준으로 그래 하지 안하고 자기가 신앙 생활 하면서의 그 모든 욕망과 소망을 거게까지 자기의 그 사욕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분을 든든히 믿고 의지해서 자기의 이 현재의 세상만이 아니고 영원 무궁까지를 그분에게 딱 맡 겨놓고 가는 이 사람이 제일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효력 하나도 보지 못했어. 무궁세계까지를 아버지께 다 맡겨놓고 지금도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또 세상에 있는 때도 순종하신 것뿐이오. 그래야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신, 광대하신 그 계획과 포부가 다 달성돼질 수 있지 조부라운 제 생각 고대로 표준해서 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그 속에 들어가야 될 터이니까 하나님은 거게서 역사하실 수가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좀 믿음으로 자기를 키웁시다. 믿음으로 자기를 키우고 넓혀야 됩니다. 전말로 믿음의 사람은 그는 참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아니지마는 끝이 없습니다. 그저 그 각도가 여러 수백 각도이기 때문에 요래 보면 요런 사람인데 나중에 보면 또 그것도 아니오. 요래 보면 요런 사람.
이러니까 어데 제한 없는, 사람들이 보기를 이래 보고 저래 보지 끝없는 하나님을 향해서 소망하는 사람은 끝이 없는 무한의 큰 사람으로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끝없는 소망을 가지고 또 순종도 끝없는 순종을, 바라는 것도 믿는 것도 끝없는, 무한하신 분을 향하는 우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한하심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성도들이 가다가 실패하는 것은 그 무한한 분을 따라 나가다가 자기의 유한한 그 한계점에서 다 실패를 하고 또 거게서 반성해서 새로 회개하고 한 것이 그것이 성경에 역사 모든 기록입니다.
아브라함을 오늘 또 봉독하는 것은 그저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인데 롯은 대실패를 한 사람이고, 무슨 실패를 했느냐? 자기 자체 실패를 한 사람입니다. 자기 자체 실패. 롯은 자기 자체가 실패됐어. 그는 불쌍한 의인입니다. 아주 자기 자체가 완전히 실패했고, 그다음에는 사람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인간 실패를 해 버렸습니다. 그다음에는 완전히 금생과 내세에 소유 실패를 한 사람입니다. 자체 실패, 인간 실패, 소유 실패.
아브라함은 자체 성공, 인간 성공, 소유 성공. 이거는 금생으로 한 게 아니라 금생과 내세에 영원 무궁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말하기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이는 세상이 천국이요 천국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것들이 가루어져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 있고, 또 이상하게 이런 모든 색깔들이 돼 있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구별하지 못해 그렇지 이 세상은 무궁세계를 지금 무궁세계의 한 끄트머리가 보이고 있는 세상이고 무궁세계 지옥의 한 끄트머리가 보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 이것이 '세상과 천국은 다르다. 세상이 실패가 돼야 천국에 성공이다.' 그것 조금 좁은 생각이고 잘못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볼 때 실패지만예수님을 결코 그 당시에 정치가들이든지 종교가들이든지 도덕가들이든지 모든 그 민족이나 이방 민족으로서 그분을 실패자로 그렇게 정죄해 버린 사람 없습니다. 다 실패자라고 이렇게 말은 해도 그 속에 중심은 다 그분에게 다 가 있어. 그 중심의 평가는 다 거게 있었습니다.
그러고 우리가 세상에서 소유하는 이것이 무궁 소유가 될 수 있고 또 세상에서 사람 얻는 것이 무궁세계의 사람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네가 이제 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말씀한 대로 이 세상 사람 부자가 무궁세계의 사람 부자요 이 세상에 사람 가난이 무궁세계의 사람 가난입니다.
이거는 뭐 돈을 가지고서 많은 사람들을 후리고 권세 가지고 후려서 주 취한다는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그래서 속담에 말하기를 정승 말이 죽으니까 문상꾼이 조문꾼이 그렇게 많이 모여 들더니마는 정승이 딱 죽고 나니까 아무도 안 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취하는 방편이 있고, 또 모든 사람에게 다 정죄받아 가지고 멸시를 당하는데 껍데기는 다 죄인이라 죄인이라 이렇게 정죄를 하지마는 속 깊은 양심에서는 '그래도 그분이 옳다. 바른 길을 갔다. 참 그게 바른 길이다.
위대하다.' 이래서 양심은 점령하는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인간은 뭐라고 쌓아도 하나님이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에 선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선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아무리 악한 자라도 그자의 마지막에 최종이 죽을 때에 고백을 하라 하면 그 사람대로는 제일 옳은 것 좋은 것 바른 것 그걸 원하는 사람으로서 결론을 짓고 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권세에 다 못 견뎌서, 권세에 못 견뎌서 '아, 그뭐 어떤 인간이라.' 이래 정죄해도 속은, 속 그 양심과 그 인격은 점령할 수 있습니다. 겉어머리로는 아무리 욕을 해도 속으로는 '그분이 옳다.' 겉어머리는 세력에 못 견뎌서 '예, 옳습니다.' 해도 속으로 '너 어서 망해야 되겠다.' 하는 이것이 예를 들? 다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사람을 얻되 무궁세계에서까지 얻어지는, 인간을 참 얻어서 인간 부자가 되는 그 길을 아브라함은 걸었고 롯은 인간 실패를 해서 인간 가난이 돼서 마지막에는 자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소유도 롯은 자기 소유는 마지막에 하나도 없었고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가 많았습니다.
롯은 자기는 그렇게 비참한 자가 돼서 얼마나 권위가 없었든지 자기 마누라도 말 안 듣지, 딸도 말 안 듣지, 사위도 말 안 듣지 무시하는데, 아브라함은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보나 안 보나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을 신앙 조상으로 다 모시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세 가지, 자체 성공이나 실패, 또 인간 농사의 성공이나 실패, 자기 소유의 성공이나 실패, 이것이 아브라함과 롯이 이 두 사람이 우연히 이렇게 만나 가지고서 같이 출발해서 살다가 이런 분쟁이 나 가지고 이런 하나의 결과의 역사를 맺었다 그렇게 보면 안 됩니다.
영원 전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과 롯의 모든 형편이나 뒤에 망해지는 것이나 흥해지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을 영원 전 하나님이 예정하셔 가지고 이것으로써 신앙을 가지는 믿는 사람은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그 밑에 그래 표시해 놓은 것은 이 길이 아니면 이 길이요 이 길이 아니면 이 길이라는 그것을, 거게 보면 얼핏 보면 토지를 가르는 데에, 토지 가르는 데 이것 아니면 이것이고, 네가 이것 하면 내가 이것 하고 네가 이것 하면 내가 이것 하겠서.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이렇게 말해 놨는데 형식을 가지고 그와같이 했지마는 우리 개인 개인이 신앙 생활 하는 데에 만나지는 그 현실, 자기가 만나는 현실 말이요, 자기가 만나는 그 현실, 현실에서 좌 아니면 우다. 중은 없다. 좌 아니면 우, 우 아니면 좌다. 아브라함의 길이 아니면 롯의 길, 롯의 길이 아니면 아브라함의 길, 두 길 중에 하나이지 중은 없다. 네가 어디든지 네 현실께서 당장 오늘 지금 시장에 나가서 네가 현실을 만나도 그 현실이라면 요 세 가지 문제는 딱 당면해 가지고 있다. 요 세 가지는 천하에 있는 인간들이 수없이 만나는 그 현실, 셀 수 없는 수없는 그 현실마다 요 세 가지는 다 당면한다. 요 세 가지는 다 당면한다.
거게서 제가 좌하든지 우하든지 둘 중에 하나로 결정을 짓고야 그 현실은 지나가는 것이다. 단체도 그렇고, 개체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뭐 많은 단체도 현실에는 요 세 가지가 좌우를 결정하고, 또 작은 단체 가정도 이 세 가지가 결정을 하고, 자기 개인도 이 세 가지가 현실은 결정한다.
그러니까 내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이 세 가지를 생각지 못하고 현실을 만났으면 그 사람은 벌써 감옥에서 갇혀 가지고 있는 죄수입니다. 자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오.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옥에서 그 간수들 시키는 대로 써야 될 것 아니겠소? 제 나오고 싶다고 나오고 뭐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 모양으로 벌써 이 세 가지를 생각지 아니하고 현실을 만나서 '오늘은 급하다. 오늘은 바쁘다.
오늘은 수월하다. 야, 오늘은 영광이 있다. 오늘은 재미가 있다. 오늘 맛있는 것 왔다. 뭣 왔다. 오늘 반가운 사람 왔다. 오늘은 참 좀 한번 다리 쭉 뻗고 한번 좀 쉬어야 될세. 오늘 두려운 것 왔다. 오늘 보기 좋은 구경거리가 왔다.'
뭐이 왔든지 자기 앞에 현실을 당했을 때에 이 세 가지를 잊어버린 그사람은 아직까지 해방을 받지 못한 감옥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거는 감옥에 든 사람은 원죄와 본죄에 있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살았지만 그 심신은 벌써 사망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거게서 자기가 이 세 가지를 생각하는 데 하나는 그것입니다. 그 인격의 비중이요, 인격 비중. 하나님의 신격을 중하게 여기느냐 내 인격을 중하게 여기느냐? 하나님을 중하게 여기느냐 나를 중하게 여기느냐? 누구를 더 중하게 여기고 누구를 더 경하게 여기느냐? 요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현실에.
아무리 바쁜 매매 속에서도, 바쁜 그 모든 결재 속에서도, 아주 참 마음에 중요하다 싶은 중요한 모든 이해 속에서도, 아무리 재미있고 깨소금이 흐르는 재미있는 속에서도 이 세 가지는 거게 따라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지금 따라 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거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같이 계십니다. 하나님 거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자, 너를 네가 소중히 여겨서 너를 먼저 대우하고 더 보다 너를 대우하느냐? 다른 것 보다 보다. 뭐 누구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하니 해도 그것도 민족이 그것도 자기 위함입니다. 누구 뭐 남의 민족 위해서 합니까? 제 민족 위해 하지. 그것 내라는 주인이오. 민족주의자도 애국자도 가정주의자도 뭐 사회주의자도 모두 다 자기입니다. 자기가 그 주인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나 자기나 이 둘이 대두했을 때에 자기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꾸 '누구를 어짤꼬? 자, 나를 소중히 여겨서 나를 중하게 여겨서 나를 생각하고 나 좋게 나를 중하게 여기려면 내가 이 길을 걸어가야 되겠고 주님을 내가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 더 많이 대접을 한다면 이리 가야 되겠고,'
신강이 없이 사는 사람 중에는 물론 뭐 더듬을 것도 없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 하는 이 사람도 있습니다. 뭐 그런 것 거게서 내니 뭐 사람이니 뭐이니 그런 비교 비판할 것 없이 의례히, 몰라 그렇고 못 해 그렇지 주님을 존귀케 하려는 그 것으로 그만딱 일관되는 그런 사람도 있지마는, 또 처음에는 그게 어려운데, 자기가 거게서 그 입장을 딱 만나 가지고서 '내나 하나님이냐?' 요것을 생각지 못할 때는 벌써 실패자고, 그걸 생각하면 자, 자기 한번 생각해 보고 주님 안면 한번 바라보고 그럴 때에 주님은 그 마음이 심각하셔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면 주님은 얼굴이 벌개지십니다. 보자, 네가 어떻게 하노? 말은 안 하시고 계셔도, 왜? 그 시간이 당신이 멸시를 받는 그 시간이기 때문에, 당신이 멸시를 받나 이제 당신을 존중히 여기고 당신을 대우하고 자기를 비어 자기를 무시해서 그러기에 나는 당신에게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여 자기를 주님에게 맡기고 주님을 존대하는 이 길을 택하느냐 이 둘 중에 서로 신강이 있을 때에 주님의 안면과 내 안면, 내 안면이라는 것은 자기를 생각해 보는 자기 모든 자기의 욕심이나 비판이나 평가나 자기의 뭐 형편이나 사정 모든 그게 다 자기겠습니다.
자기 보고 주님 보고 이래 가지고서 이렇게 둘이 신강을 할 때에, 이래 하다가 그러다가 이성 비판적으로 '아무래도 이래서는 안 되지. 내가 주님에게 지음받았고 구속받았고 또 그분에게 다 있고 그분이 나보다 그시고 이러니까 그분을 존대하고 나는 거게 속하여 내야 어쩌 되든지, 내가 어찌 되든지 그분을 존대하는 그 길을 택해야지.'이라는 사람도 있겠고, 거게서, 그보다도 본능적으로 '의례히 당신을 존대해 나는 그분 위해서 있고, 그분 위해서 살아야 되고, 그분 위해서 죽어야 되고, 죽으나 사나 그분 위해서 있는 것이라.' 그만 이렇게 지체하지 안하고 썩 그라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맡길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람이오.
이래 신강하다가 그럴 때에 '그렇지마는' 하나님 자꾸 생각하고, 하나님 보고 하나님 안면 보니까 하나님의 안면이 벌거이 마음에 지금 모욕을 당할 것 같은, 하나님 안면을 보면 안 되니까 하나님 안면을 보지 안하고 그만, 하나님은 보지 안하고 뭐 자기만 자꾸 생각 자기만 자꾸 보고 보고 이래 가지고서 자기로 척 기울어지는 그게, 그게 하나님을 모욕 주는 것이요 하나님이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 멸시당하고 모욕당한 그것을 하나님이 아직까지 심판날까지 가실 대로는 그저 가만히 참고 계시면서 무궁의 보응이 있기 때문에, 무궁의 갚음이 있기 때문에 그뭐 그럴 것 없고, 이 세상에서 선악과 한 개 먹은 값을 인류 전체가 다 사망하는 제일 나쁜 형벌 받는데, 당신이 무궁의 보응이 있기 때문에 뭐 그럴 것 없고 가만히 계시기는 계시지마는 복수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이것을 주님이 대속했지마는, 그것이 대속을 했지마는 믿는 사람에게는 대속을 했기 때문에 믿는 그날부터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범죄함이 선악과 먹음이 이렇게 형벌이 크거든 '순종하는 것은 천 대까지 자고 범죄한 것은 삼사 대 간다' 했는데 삼사 대 가는 이것도 선악과 하나 먹으니까 그렇게 값이 큰데 순종하는 것은 상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무한한 상급을 막 깎아댑니다. 무한한 상급이 막 깎아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자기가 이래 신강하다가 '그래도 어떻게 나를 구 속하신 주님이시요 또 그분은 크신 분이시요 창조주시요 자존자시요 주권자시요, 모두 나는 그분의 것 가지고 사는데 그분을 내가 나하고 비교해서 나를 앞두고 그분을 우사할 수 있겠느냐? ' 이렇게 해서 그 분으로 기울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이 '네가 그래도 좀 깨닫고 아주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아니다.' 기특하게 보시고,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사람은 안심하고 이래 맡길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그 현실 당했을 때에 자기를 생각해서 자기를 소중히 대우하느냐 주님을 생각해서 주님을 이렇게 존귀히 대우하느냐 요것이 현실에서 꼭 현실마다 결정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요것을 쓰는 사람이 복있어. 뭐 설교를 천 번 만 번 해도 소용 없습니다. 외워도 소용 없어.
자기 현실에서 '이 자리는 지금 인격의 비중이다. 주님을 크게 여기느냐 나를 그게 여기느냐? 주님을 중히 여기느냐 나를 중히 여기느냐? 주님의 그 비위와 성미를 맞추느냐 내 비위와 성미를 맞추느냐? 주님의 소원을 맞추느냐 내 소원을 맞추느냐? 요것이 둘이 요것이 딱 비중이 딱 되는 현실이라.' 하는 요것을 자기가 그 현실에서 깨닫고 그 인격의 비중이라는 요것을 자기가 생각하는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깨어 있는 것이오.
그래 가지고 거게서 주님을 참 깨달아서 존귀히 이렇게 대우하고 자기는 주님에게 붙어서 그까짓 거야 참 뭐뭐 먼지 같은 것이요 그까짓 무슨 존재가 있습니까? 실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천한 것으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낮추어 갈수록 '아이고, 만 길 낮아졌다. 천 만 길 낮아졌다.' 아무리 낮아져도 낮아질수록 그것이 자기의 정체에 바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바로 보는 것이오.
인간이 거게서 뭣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만물 앞에서는 서로 시비하면 '내가 너보다 낫다' 이럴 수 있지, 이렇지마는 하나님 앞에서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 현실에서 자기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존귀히 대우하고 자기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어지는 그게 되면 그 현실에서 자기라는 사람은 성화를 받습니다. 벌써 그게 성화요. 그게 성화입니다.
성화는 자기 현실에서 자기나 하나님이나 누구나 이 비중이 비교될 때에 자기보다 하나님을 존귀히 대우하는 거게서만 성화가 되는 것이지 그외에 다른 데서는 성화가 안 됩니다. 거게서만 성화됩니다. 딴데서는 성화가 안 돼요.
자기가 무슨 어떤 지위에 무슨 사장으로 있는데 사장 위치에서라도 있으면 '오늘 이 시간에 내가 이 회사 생각하고, 내 소유 회사 생각하고 나 생각하고 또 그 자리에서 하나님 생각하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존귀히 대우해서 그분을 기쁘시게 그분 비위를 맞춰서 대우하느냐 나를 생각하느냐? 요 둘이 어느 것이냐?' 요래 할 때에 요것이 부패성으로 썩어져 나가 버리든지, 요게서 하나님을 크게 알아서 알대로 '저가 나를 안즉 내가 높이리라' 하는 그말이 그말이오. 알아서 이렇게 하나님을 존귀히 대우했으면 대우한 거게서 자기는 그만치 커졌소. 그만치 참돼졌소. 그만치 성화가 돼져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자기 개인 일이나 또 자기 직장 일이나 자기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자기 혼자 있을지라도 혼자 있어도 모든 사물을 대하기 때문에 이 세 가자는 따라 있습니다. '이 시간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 나 기쁘게 하려는 것이냐? 지금 인격 비중인데 누구를 높이 지금 대우하느냐? 하는 그것은 저 혼자 부엌에서 일을 해도, 저 혼자 집 안에서 가내공업을 해도, 저 혼자 책상에서 공부를 해도 다 따릅니다.
이러니까 요 사실을 자기 현실에서 쓰는 것이 그것이 깨어 있는 것이요 그래 가지고 거게서 아브라함의 걸음을 걷는 것이 그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럴 때에 롯은 그만 '뭐 하나님이야 그렇지마는 요단 들이 이렇츰 좋고 이러니까 아무래도 이 길 택해야 되겠다.' 하나님이야 섭섭해 하시든지 말든지 어쨌든지 그만 저 좋도록만그 길 택해 버렸어. 그것이 롯이 자체의 멸망입니다. 자체 멸망.
언제든지 현실에서 거게서 하나님이냐 자기냐 하는 이 둘을 비중을 찾지 못하면 그 사람은 지금 감옥에 갇힌 사람이오. 그 현실에서 으례히 주님을 존귀케 하지 하면서도-바울 같은 사람이 걸어간 것 보면 언제든지 거게서 신중히 택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평생 내가 싸우기를 적이 없는 허공으로 싸우는 게 아니고 내가 적을 발견해 가지고 싸우니 그 적이 뭐이냐?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결론을 그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과 자기와의 이것이 대립이 돼 있어 자기가 주님에게 붙으면 자기는 살고 영화로워지고 주님을 자기가 버리고 자기가 왕이 되면 멸망한다는 그것을 사도 바울은 평생 그것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투쟁해 나갔습니다.
이러니까 공부할 때도 그래야 되겠고, 그것을 그러면서 자기 무슨 이해 문제가 있든지, 무슨 인사 문제가 있든지, 무슨 사업 문제가 있든지, 무슨 일을 당했을지라도 제일 첫째가 하나님이냐 내냐 하는, 하나님과 나와 둘이 대결이오. 하나님이냐 내냐, 하나님이냐 내냐? 거게서 자기가 악화되면 악화되고 성화되면 성화됩니다.
벌써 현실에서 여게서 '하나님이나 내냐?'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래도 '이러면 하나님 생각하는 것이고 이러면 나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면 하나님을 존귀히 대우하는 것이요 이러면 나를 대우하는 것이다.' 요것 하나만 있어도 그 사람이 산 사람이오. 이것 하나만 있어도 실패 안 합니다.
이것 없이 마구 닥치는 대로 어떤 사람은 이것 보고 저것 보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선악과에 완전히 유혹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만 보고 어떤 사람은 직장이나 보고 어떤 사람은 권세나 보고 하는 그것은 그 사람이 곧 그 선악과에 끌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로는 거게 물론 자기가 한 데도 있지마는 자기 혼자도 그렇습니다. '자, 이 현실을 당해서 여게서 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내 뜻은 이런데, 또 내 가족 뜻은 이런데, 또 내 상관 부하 뜻은 이런데, 또 우리 나라의 뜻은 이런데, 사회 뜻은 이런데, 내 뜻은 이런데 하나님 뜻은 어떠냐?'
어떨 때는 하나님의 뜻과 이것이 일치될 때도 있기는 있습니다. 일 치될 때는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때요. 그때는 다만 그저 하나의 고요한 시간에 준비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느냐 인간 의사를-자기 의사도 인간 의사인대-인간 의사를 존중히 여기느냐? 의사의 비중, 어느 의사를 존중히 여기느냐 하는 이것이 그 현실에서는 반드시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의사를 찾고 인간 의사를 찾고 의사는 두 가지뿐인데 천인 만인이 말해도 인간이 말한 거는 한 말로 해서 인간 의사요, 하나님의 의사 하나 인류의 의사 하나 의사는 두 종류인데, 이 두 가지 의사가 서로 대두해서 있다는 요것을 생각하고 이 두 가지 의사가 대두해 있으니 두 가지 의사가 어느 것이냐? 이 두 가지 의사를 자기가 거게서 찾아 가지고서 어느 길을 걸어가야 되느냐 하는 이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이고, 이것 없이 그저 '오늘 시간 됐으니까 출근했다. 오늘 또 일 시작했다. 오늘 무슨 일 있으니까 또 어떻게 판단해야 되겠다.' 이렇게만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직까지 원죄에서 탈피 못 한 사람이오. 탈옥을 못 한 사람이오. 원죄와 본죄에서 탈옥을 못 한 사람입니다. 제가 암만 똑똑해도 저는 마침은 멸망이오. 구원 얻으나 불 가운데 얻은 것과 같습니다.
또 그 사람이 큰 일 못 합니다. 해 봤자 콩쪼가리만한 요 세상 범위 내에 요것만 표준해서 하지 인간의 무한을 향하는 그런, 대범이 아니라 대국이 아니라 전체를 이렇게 상대해서 비판하는 그런 어떻게 처사를 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요 두 가지 의사가 있다. 의사의 비중이다. 어느 의사를 존중히 여기느냐?' 그럴 때에 롯은 인간들의 의사를 존중히 여겼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보다 저를 높였고 그다음에는 가족들 의사 모든 종업자들 의사, 아마 그거는 그랬을 것이요. 자기 양심에도 혹 그랬을지도 몰라. '이래야 가족들이 좋아하지. 이래야 마누라가 좋아하지.' 어떤 사람은 '이래야 자녀들이 좋아하지.' 또 뭐 '친구들이 좋아하지, 상관들이 좋아하지, 수하가 좋아하지.' 이래서 인간 의사를 들으면 다 저희 친구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좋아하고 그 서로 대립이 안 될 때 그렇지만 하나님 의사하고 딱 대립을 시켜 놓거든. 하나님이, 현실을 만드신 이가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 의사와 인간의 의사와 둘이 딱 대립이 딱 되도록 그건 현실을 딱 만들어 놓고 '보자, 네가 누구의 의사를 네가 존귀히 여기느냐?'
요걸 딱 기다리고 계시는 그 주님의 안면을 보면서, 요 현실을 만드신 이가 주님이신데 요 현실에서는 꼭 주님의 의사는 요렇고 인간들의 의사하고 이 의사와 의사끼리 대두되는 요 현실을 당신이 만들어 놓고 지금 보고 있다는 그 눈초리를 자기가 바라보면서 좀 생각하는 이 사람이면 깨어 있는 사람이요, 깨어 있는 사람.
그러다가 롯은 인간 의사를 따르지 안하면 인간들에게 다 배척을 당하고 자기는 모든 게 실패하겠다 싶어서 인간 의사를 존중히 여겨서 그를 취했고 아브라함은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다 그 종업자들이 그럴 수 있지마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되지 인간 의사를 찾아 되겠느냐?' 우리가 그걸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사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그 시비해 가지고 하는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자기 갈 길이지 자기가 꼭 그 시비해 가지고 숙질간에 시비해 가지고 뭐 그러면 피도 흘리고 싸움도 나고 대전쟁도 날 것인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거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사를 따르려고 하니 자기 그렇게 부요한 사업은 완전히 실패돼 버립니다.
목축업이 무슨 자산에서 그 목축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 의사 인간 의사 할 때에 자기 직장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지위 떨어지는 것, 사업이 절단나는 것도 있고, 이제까지 모두 해 놓은 일이 다 전부 절단나는 일도 있고, 그 댓가가 파괴되는 댓가가 크면 하나님이 책임지는 책임도 또 그 댓가가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큰 걸 심은 사람은 큰 걸 거둡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그 큰 것을 하나님의 의사를 따르기 위해서 손해본 사람은 당신이 큰 것을 그에게 보상도 해 주시고 또 맡길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의사를 택했습니다.
이것이 인간 의사를, 인간을 좋게 기쁘게 인간을 얻기 위해서 인간의 의사를 따른 요것이 인간에 대해서 완전한 실패, 인간 의사를 존중히 여기지마는 하나님 의사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의사와 인간 의사 둘이 대립되면 뭐 자기 의사 양보하고 남의 의사 존중히 여기지마는 하나님의 의사와 인간 의사 이거는 비중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사를 따르면 인간 다 뺏기고 자기는 뭐 참 고독하고 가련한 사람이 될 줄 알아도 하나님 의사를 따라서 간 그 사람은 인간에 성공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도 보면 나사로도 죽어 천사가 그를 하늘나라로 올려가 가지고 아브라함의 품에 뒀다 했어, '아브라함의 품에 뒀다' 이랬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서 구원을 얻으리라' 그뒤에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은 금생 내세에 인간 성공을 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 지옥에 있는 홍포 입은 부자가 말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 사람 지옥 가 있었는데 무슨 아브라함의 자손이겠습니까? 이래도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아브라함을 벌써 자기의 조상으로 알고 이렇게 지옥에 가서 형벌을 받으면서도 아브라함을 바라봤다 그말이오.
아브라함은 천국에도 성공이요 지옥에 있는 사람도, 그뭐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아브라함 좋아하지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아브라함 저놈' 그렇게 욕하지 안했고 아브라함을 다 존대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이런 것을 성경에 그것 말했는데 그건 비유가 아니고 그건 지옥에 있는 실상 사실을 내다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형편의 그 사실과 천국 형편의 그 실정을 일막을 내다 보인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건 비유라고 하지 안했습니다.
고런고로 아브라함은, 자기 현실에 닥칠 때에 인간 의사를 따른 롯은 인간에 대해서 완전히 거지가 돼 버렸고 수많은 인간 의사와 하나님 의사가 대립이 될 때에 하나님 의사를 존중히 여겨서 나간, 사람은 인간의 부요자가 됐습니다.
실은 오늘에 다 그것, 또 안 할라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맡을라 해도 자격이 없어 안 되는 사람도 있고 다 그렇지마는 하나님은 오늘 정치가도 요 아브라함같이 그 현실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또 자기를 거게 소속을 시키고,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히 하고 인간 의사는 부득이 눈물을 흘리면서도라도 '내 의사와 둘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양보하고 대우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의사는 거기 불가침이라' 하는 것을 생각해서 요렇게 하나님의 의사를 따라서 요대로 하는 사람이면 사업 가든지 정치가든지 뭐 교육가든지 어떤 운동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은 실패 볼 수 없습니다.
그거는 과학적이오. 왜? 그분이 주재자요 주권자요 전지 전능자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그분이 주권적으로 섭리하고 계시는데 요래 나가는 믿음의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계약이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이 볼 때 '야, 저거는 죄라도 저래 잘 된다.' 시편 73편에 보면 그 죄악의 것이지마는 또 그것은 그러다가 멸망해서 무궁세계에 '그렇게 죽는 날까지 잘 지냈는데 심판 통과하고 난 다음에 영원히 비참한 자가 됐다.' 하는 그것도 우리가 봐야 될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그게 전부 만물 교재입니다. 만물 교재.
이러니까 이 말씀은 변하지 안하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자연으로 운행한 이거는 그것이 실물 교재요. 이러기 때문에 지금 지옥에 있는, 지옥에 있는 그 실물 교재가지금 이 세상에 나오고 있고 천국에 있는 그 실물 교재가 이 세상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현실에는 의사의 비중이 결정되는 그 현실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되겠고, 또 하나 남았는데 하나는 소유에 대해서 자, 이 소유의 비중인데 롯은 현재 조건이 좋고 또 현상태가 좋고, 또 그 종류가 좋고, 양이 좋고, 그 모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인간들이 다 인정할 수 있는 것, 보이는 것 이것으로써 축복의 중량을 삼았고, 축복의 중량을 삼았고,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그것도 귀중하기는 귀중하지마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중량이 더 크니 내가 롯하고 서로 시비해서 이것 취할라 하면 이거 혈투전이 벌어지고 이래야 될 터이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이게 아니면 안 되니까 이걸 내가 취해야 되겠느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부자가 안 돼도 하나님 바라보면서 당신이 그저 뭐 축복하시면 되게 하시면 되지, 또 안 되게 해도 족하고.'
이러니까 하나님을 그래도 욕을 돌리지 않기 위해서, 자녀들도 둘이 이래 싸우면 부모 낯이 참 기가 막히는 그걸 우리가 작게 경험 많이 경험 한 사람들 다 자녀 낳은 사람들 다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고 이것 아니면 못 산다 그럴 수가 있겠나? 내가 만일 이걸 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섭섭하시고 하나님의 낯에 불을 담아 붓는 것과 같은 이런 시비하는 이런 일을 내가 한다고 하면 나는 하나님의 축복보다도 보이는 물질 이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 자가 아니겠느냐? 이러니까 이게 안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노엽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해서 아브라함이,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하는 그말은 그 길이 말이요 중립이 없는 두 길이라 하는 그것을 여게다 우리에게 구원 도리로 계시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이 돼 가지고 있고 요 사실이 그래 돼 있다 그거요.
뭐 그리 안 하면 반반씩 가르면 좋지 않겠소? 그건 그게 아니라, 여게.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한다' 둘 중에 하나이니까 이 좌면 좌 우면 우 이 두 길 중에 한 길뿐이라. 한 이것을 지금 인생에게 우리의 구원 도리의 계시라는 것을 요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거게서 아브라함은 '뭐 아무래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그 길을 택해야 되지 하나님을 섭섭하게 참 하나님이 부끄러워 하시도록 이렇게 하는 일 할 수가 있겠느냐?' 해서 이랬으니까 아브라함은 그 소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거게 축복 여하에 소유가 결정되는 것이지 눈에 보인 조건 여하에 결정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조건 거기에 가치를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축복에 가치를 둬서, 소유 비중에는, 소유는 하나님의 축복이나 눈에 보이는 그 조건의 좋은 것이냐? 이 두 가지가 서로 그 중량이 '어느 것을 네가 중하게 여겼느냐?' 하는 여기에서 롯은 보이는 이 모든 것들과 조건들 모든 이것들을 중하게 여겼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중하게 여겨서 그 길을 걸어간 결과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금생 내세에 참 인류로서는 그 이상 사람 부자 소유 부자 아브라함 이상 부자가 없어. 이랬고, 롯은 금생과 내세에 그렇츰 거지가 된 실패가 없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현실에는 반드시 이 셋이 대두되는 현실이니까 신앙 지도하는 사람들도 요걸 명심해서 신앙 지도할 때에 그 사람이 현실에서 이 셋을 모르면 깨우쳐 줘야 되겠고 깨우쳐 줘 가지고서 이 셋에서 아브라함의 걸음을 걷지 안하고 롯의 걸음을 걸으면 예언을 해 줘야 됩니다.
'네가 이러면 아브라합의 걸음이고 이러면 롯의 걸음이니까 이리 되면 네가 어떤 결과의 실패가 오고 한다.' 하는 것을 말해 주면 하나님이 어서 일을 하십니다. 말해 주면 세월이 지나가기 전에 뻐뜩 일하셔 가지고 '아이구, 과연 그때 목사님이, 권찰님이, 장로님이, 집사님이 오셔 가지고서 그와 같이 말씀을 하시더니마는 과연 그대로 됐구나.' 하니까 빨리 돌아서니까 많은 세월을 허비하지 안하고 빨리 구원에 착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런 줄 알면서도 '그러면 이 사람이 섭섭해 그럴 터이니까 그 말을 못 한다.' 이래 가지고 하면 선지자 직책을 못 하는 젓입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위험직이오. 선지자 쳐놓고 죽임을 안 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전부, 상도 하늘나라 가면 선지자가 상이 제일 크고, 제일 상을 먼저 받고 또 위험직도 제일 위험직이오. 선지자는 다 바른 말 옳은 말하기 때문에 죽임을 다 당했다 말이오.
당해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유익한 것은 하나도 내가 숨긴 게 없다' 하는 것은 벌써 다 생명 내놨기 때문에 듣기 좋아하든지 듣기 싫어하든지 저희들에게 참 사랑을 가지고서 멸망할 길을 피하고 구원의 길을 다 말해 줬다 그거요.
이러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도 소유의 비중에 대해서 보이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보다도 귀중히 여겨서 판정해서 현실을 처리해 나가는 그런 죄가 있으면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게 회개지 그런 회개 아닌 것이 뭐 내가 거짓말 하나 한 것, 거짓말 한 그것도 큰 죄입니다. 또 남의 것 뭐 하나 훔쳤다. 그것도 큰 죄요.
그 작은 것이 걸려서, 바느질하는 사람이 자기 바느질 하면서 뭐 남는 쪼갱이 주으니까 이걸 이렇게 가지는 그것은 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이오. 그런데 이상하게 되는 것이 바느질 하면서 조금 끄트러기 남은 것 그놈 욕심 나면 그놈을 가지고서 '요것 뭣 만들면 된다' 뭘 만들 계획을 딱 목적을 딱 세워 놓으니까 옷을 변해져도 요것은 '요거는 조금만 들쳐 들이면 요게 나와서 요게 되겠는데 요것 안 하면 안 된다.' 그것 차차차 바늘 같은 죄악이 황소 같은 죄악으로 번져 나간다 그말이오. 그게 하나 걸려 가지고서 축복을 못 받고 마는 일이 많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으로 벌써 범죄하는 것, 우리 본능으로 범죄하는 것, 양심에 가책되는 그 범죄한 것, 그런 것을 세밀히 회개를 해야 됩니다.
해서 그저 대충, 아브라함이 걸어가는 길은 아주 강령적이면서, 강령적이면서 또 이는 참 껍데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면 이보다도 더 세밀한 그런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소유에 대해서 '하나님의 축복이냐 내 보이는 조건 이게 좋은 것이냐?' 자기가 보이는 거짓말해서 돈을 취하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팔아먹는 것인데 그 사람이 바로 롯의 걸음을 걷는 사람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소유에 대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네가 소유할래?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현상 세계의 뭐 어떤 것들 그것을 소유할래? 둘 중에 하나이지 중립은 없다.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이고 이러니까 어느 걸 소유할래?'
또 네가 의사 비중에 있어서 누구의 의사를 존중히 하겠느냐? 네가지금 걷는 것은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는 것이냐 네 의사를 존중히 하고 있느냐? 그리 안 하면 사람의 의사를 존중히 하고 있느냐? 이 의사 비중에서 자기가 둘 중에 하나를 취해야 되는 것이니까 여게서 의사 비중에서 하나님의 의사를 중하게 여기고 자기 의사를 뒤로 보내서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사람 부자가 됩니다.
소유 비중에서 하나님이 축복으로써 다 부자가 되고, 소유에 부자가 되고, 의사 비중에서 사람 부자 사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고, 자체의 그 인격 비중에서 자기가 비참한 벌거벗은 의인, 천국에 가도 벌거벗은 의인도 될 수 있고 참 영광스러운 의인도 될 수 있는 자체 성화가 거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참 재미있는 일이오. 우리가 오늘로서 살고 오늘 그만 주님 오시고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기막힌 일 아닙니까? 오늘 이 시간까지 실패의 걸음을 걸었다 할지라도 지금 또 그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는데 다시 걸으려고 시작하면 일 년 만에 돌아온다면 애가 터지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아셔서 즉시 즉시 그 현실을 주셔.
현실 주시니까 주시는 즉시 즉시에서 지난번에 못 한 것 지금부터 인격 비중에서 나보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높여서 존귀히 하는 이것 이 시간에 할 수 있고, 또 인간 의사보다도 하나님의 의사를 존 귀하는 요것 뭐 하루 동안에 다 할 수 있어요. 또 소유의 비판에 대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축복이나 보이는 모든 조건이나 이것들도 대번에 그래 가지고서 대번에 옮겨 설 수 있소.
옮겨 서고 난 다음에 담대히 말해 줘야지. 옮겨 서고 난 다음에 그 뒤에 파란이 많이 오겠지요.
파란이야 오든지 가든지 '생명과 명예와 친척과 재물을 원수가 취한들 내게 상관이 있느냐? 그게 다 주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다 주님에게 맡겨놨다.' 하는 이 신앙의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또 이 사람이라야 신앙 걸음을 걸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이 큰 광대하신 도의 이 구원을 맛도 볼 수가 있고 이루어 갈 수도 있고 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요 세 가지 비중 요것을 자기 현실에서 빨리 고쳐서 복있는 사람이 되도록 빨리 고칩시다.
고치면 되는 건데 이 말로만 듣고 말 것이 아니라 기어코라도 우리가 고쳐야 될 터인데 우리가 죽기 전에 들으니까 다행이지 만일 숨이 딸칵 끊어지면 암만 고치고 싶다 할지라도 그뭐 기회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아셔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자꾸 기회를 주십니다.
요 기회를 주신 요 기회를 잃지 아니하고 요게서 요 세 가지 비중을 이길라 하면 잠이 안 와요! 다 이래도 잠 오는 사람들 그런 비중 다 마구 삼켰다 말이요, 마구. 마구 죄를 삼켜 그래. 뭐 깨어 있지 안하는 자에게 뭐 있어, 있기를?
이것을 실지로 이래 가지고 '야, 이러면 이 큰 몇천만 원 문제가 있다. 이 사업 문제가 있다. 이런 큰 문제가 있는데 이러느냐 저러느냐?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있으면 가슴이 도근거리고 이래 하느냐 저래 하느냐? 이러면 하나님이요 이러면 다 멸망이라. 이것 좀 비중을 이 것을 지금 보고, 이것을 보고 이것을 어느 것이나 이랄라면은 무슨 잠이 오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참 말 신자가 되지 말고 빨리 회개해야 됩니다. 뭐 누가 암만 교만한 소리 해 봤자 상관 없소. 또 욕을 암만 해 봤자 상관 없소. 사람들이 이렇게 암만 높여 봤자 아무 상관 없어, 소용 없어.
왜? 모든 것을 정확히 판단하셔 가지고서 영원히 보응하실 분은 따로 계시는데 그분이 문제지 그분 외에 다른 것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인간의 입이나 귀나 뭐 눈이나 그런 것을 상대해서 우리가 살 자가 아니라 말이오. 그걸 지으시고 모든 걸 아시는 그분을 상대해서 우리는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에 내가 닥친 현실마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좌냐 우냐 하는 것이 결정되어지는 그현실이니까 이 세 가지는 어떤 급한 현실에도 딱 대두되어 있으니까 거게서 이 셋을 발견하고 자기가 판정을 해 가지고 걸어가면 실족하지 안할 것이고 또 이래 걸어가면 힘도 나고 가슴도 도근거리고 '하나님의 축복 없으면 안 되는데.'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된다 하는 요 사람이 돼 버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 줘도 내야 꿈쩍 없다. 하나님이 안 지켜 줘도 내야 꿈쩍 없다.' 왜? 가정 비행기 다 만들어 놓고 옥상에 헬리콥터인가 뭐인가 다 비행장 만들어 놓고 뭐 제가 저 미국에 다 시민권 다 해 놓고 여기 와 있는 사람이야 떡 나면, 하지만 시민권 떼놓은 거야 배 타고 가다가 비행기 타고 가다가 탁 태워버리면 어짤 건고? 어리석기가 짝이 없어. 하나님이 복수하시고 하나님이 처벌할라 할 때는 인간의 꾀가 소용이 없어.
노아 홍수 때 인간들이 별별 것 다 하지 안했소? 다른 사람은 밑에 물에 후덕후덕거리는데 저는 '나는 체육을 해서 훌훌 뛰어서 올라가니까 나 같은 사람은 문제 없다.' 마지막에 산만당까지 딱 잠겨버리니까 제까짓 게 암만 체육해도 뭐 기운이 좋으면 얼마나 좋으며 수영을 잘하면 얼마나 잘 할 건가, 다 빠져 죽었지. 소용 없어.
어리석은 것을 믿고 의지하지 말고 솔직하게 지금 우리가 회개해야 됩니다. 학생들도 회개해야 되고, 청년들도 회개해야 되고, 장년반도 회개해야 되고 교만한 마음 가지지 말고 빨리 회개해서 요대로 고쳐 나가야 하나님이 나를 돌봐줘야 되지 하나님이 나를 돌봐주지 않으면 세상에 만 가지 천 가지로 아무리 구비하게 준비해 놔도 아무 소용 없어. 그게 도리어 자기를 멸망케 하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자기가 오늘까지 걸어온 지나간 모든 현실을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한다는 그것도 있고, 그러나 그만 급하면 지금 당면한 현실, 현재에서 요 세가지를 여기서 결정 딱 짓고 나가서 나가서 그대로 처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