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1 17:22
씨뿌리는 비유
1981. 2. 18. 밤 (수)
본문:마태복음 13장 3절∼9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한 것입니다. 또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말씀이 자기 마음에 박히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자기 결심에, 자기 감정에 심겨지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을 때 마음에 박힐 만큼 깨달아지지 않는 것은 길가에 뿌린 연고라고 했습니다.
길바닥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다져진 땅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너무 거짓말이 많고, 속이는 말, 무책임한 말, 그럴듯하지만 아무런 실효가 없는 말, 책임 없는 말이 가득합니다.
이래서 '그 말은 재미가 있다, 없다.' 하는 것으로 끝이지 말을 실제와 관련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는 것이 다 상식이요 일반화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재미가 있든지 없든지 그걸로 끝인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과 약속을 해도 '으레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한다!' 뭐 정치가든지 학자의 말이라고 해도 인문계에 관한 말은 그렇게 듣습니다. 다만 과학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저렇게 하면 되나 안 되나, 실제 물리에 맞나 안 맞나?'하면서 좀 생각을 하고 듣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은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인용해 가지고 뭘 어떻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도 많은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은 성경 말씀의 신빙성 권위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사회에서 많은 침노를 받은 경험자들도 말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하는 정도로 듣지, 절대성 있게 심각성 있게 듣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런 버릇이 들어놓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그런 말과 같이 보통으로 듣기 때문에 '그 사람 설교 잘한다. 그 사람 얘기하는 게 재미가 있다, 없다.' 그렇게 말합니다.
또 실행 실상은 있든지 말든지 '그 사람 웅변 좋다. 그 사람은 말을 못한다. 그 책은 거짓말이지만 잘 썼다, 그 책은 못 썼다. 역작이다, 무능하다.’이렇게 말하고 지나칩니다.
그리고 나서는 아무렇게나 말한 것에 대해서도, 예를 들자면 소설가들은 먼저 발표한 소설을 뒤에 합리화시켜서 해석을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저작이 얼마나 권위 있고 신실하다는 것으로 합리화시키기 때문에 세상은 한 말로 말하면 거짓말만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중은 불경을 말하고, 또 미신가들은 저렇게 말하고, 공산주의들은 저렇게 말하고, 다 자기 주장이 옳다고 하는데 이것저것 전부 모순이니까 뭐 옳은 것은 하나도 없다.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묘한 말은 했다.' 이렇게 할만큼 세상은 거짓말이 가득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세상에 있는 모든 말은 속이고 속는 말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여기서도 길가에 뿌린 씨라고 한 것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거짓말에 다져진 것을 말합니다. 텔레비전을 보고, 연속극을 보고, 소설 잡지를 읽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마귀적인 사람으로 아주 거짓말화 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많이 읽고 듣다 보니까 거짓말화가 됩니다.
소설가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소설가보다 더 선견자가 없고 모든 것에 대해서 정견자가 없다고 하는데, 소설가 치고 후손이 안 망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실지 없는 무책임한 노름패들이 제 주관대로 제 생각대로 감정대로 쓴 것이기 때문에 일면은 맞아도 전체가 맞지 않으니까 다 파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학문을 많이 읽고 공부하면 유리하다고 알지만 그런 것을 읽을 때 '세상에는 이런 거짓말도 있다, 거짓말의 종류가 이러하다. 신구약 성경 말씀만 참되지 나머지는 다 거짓말의 종류라, 무책임한 말들이라. 인간들이 초지장 너머도 모르고 한 시간 너머 제 생명도 모르면서 아무 권리 없는 좁은 제 견해에서 생각나는 대로 마구 내놓은 것이 인간들의 말이라.' 이러니까 어떤 인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고 그 거짓말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 위해서 보는 사람이면 유익이 있지만, 말은 다 같고 책은 다 같은 줄 아는 사람은 책 한 권을 보면 그만큼 죽고 두 권 보면 그만큼 더 죽습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인간에 대한 말은 한 말도 참말이 없습니다.
아주 거짓말 아니면 반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길가 뿌린 씨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다니니까 길바닥이 자꾸 다져지는 것처럼 인간의 이런 말 저런 말을 많이 듣다보니까 자기의 심령과 인격이 그런 사람들의 사상과 주의에 다져져서 강퍅해지고 완고해져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깨달음이 없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으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사건을 만나면 성경 읽은 것이 다 달아납니다. 설교 말씀도 들어봐야 텔레비전 보는 것만큼도 재미가 없습니다. 소설가들의 소설 보는 것만큼도 재미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깨달음이 없습니다. 땅에, 흙에 박히지를 않았다 말이오. 그 심령에 박히지 않아요. 말씀을 깨달아서 '하, 이렇다!' 꼭 그 마음에, 그 사상에 박혀야 하는데, 그만 이런 사람 새에게 다 뺏겨버리고, 저 사건 새에게 다 뺏겨버리고, 어떤 물건 하나만 봐도 어디로 없어지는지 다 없어지는 이런 것을 비유해서 길가에 뿌린 씨라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첫째는 우리가 길가에 뿌린 씨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천지가 변해도 획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원본 성경, 하나님이 기록한 성경을 말하는 것이고, 그걸 사람들이 보고 베껴 쓰면서 약간 틀린 것도 있고 또 번역할 때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니까 잘못된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번역 성경이나 사본 성경을 획 하나도 천지보다 중량이 크다고 한 것이 아니라 원본 성경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도 대부분은 원본대로 됐기 때문에 이 말씀은 거의가 다 한 말씀의 그 획 하나가 천지보다 중량이 무겁습니다.
그러기에 성경 말씀이 소설 잡지책이나 무슨 이종교가들, 또 어떤 사상, 정치, 무슨 과학, 철학자들이 아무렇게나 말한 그런 말처럼 여겨지는 그것이 우리가 첫째 죽는 일이 됩니다. 이걸 우리들이 벗어나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세상에 있는 어떤 책하고도 같지를 않습니다. 천하에 있는 책을 뚤뚤 다 뭉쳐도 성경의 획 하나를 못 당합니다. 왜? 이 획 하나는 이 우주를 만든 권위 있는 진리지만 인간의 말 그까짓 것은 다 없어질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싹 불태워서 없애버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첫째 길가에 뿌린 씨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마음에 뼈아프게 박히고, 참 잊으려고 해도 잊지 못하고 또 아무리 이 말씀을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을 만큼 자기 속에 깊은 깨달음으로 깊이 심어지는 것이 있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제가 오늘밤 설교를 위해서 여러 시간 전부터 엎드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주시지를 않았습니다. 여기 나올 때도 설교할 말씀을 못 받았습니다. 다른 말씀을 많이 생각했지만 여기 나와서 예배 시간 한 3분전에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셔서 제가 확신을 가지고 섰습니다.
우리는 멸망하지 않으려면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할 때 자기 마음에 깨달아 박히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도 새들에게 다 먹혀버리고, 예배당에 10년 20년 다녀도 읽은 말씀이나 들은 말씀은 다 인간, 사건, 물건에게 다 뺏기고 맙니다.
이 세상에 거슬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당장 이 세상에 거슬리게 되는데, 세상은 지옥으로 내려가는 세상이요 이 말씀은 하늘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말씀이요 세상과 마찰되는 말씀이니 그 속에 깊이 깨달아 박혀지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 말씀대로 살수 있겠습니까? 못 삽니다.
둘째는 돌밭에 뿌린 씨입니다. 이 비유는 말씀을 듣고 참 마음 속 깊이 깨달아지고 느껴지고 '이대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강한 결심이 되는 그것을 돌밭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밑에 돌이 있고 위에 흙이 덮여있으니까 흙에 씨가 묻히면 움은 나서 자라는데 햇볕이 쬐면 돌 때문에 뿌리가 들어가지 못하고 지기를 못 먹으니까 자연히 말라죽을 것 아닙니까? 이와 같이 깨달아 가지고 아무리 그대로 살겠다고 해도 그 결심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고 결심되는 것이 자기 속에 있다면, 다시 말해서 제2로 느껴지고, 제2로 깨달아지고, 제2로 필요 있게 여겨지는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제1 되는 것이 있으니, 제일 강하게 느껴지고 깨달아지고 소원되는 그것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서로 마찰되면 결국 하나님 말씀대로 살던 것은 중단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엇이냐? 자기 속에 있는 사욕, 자기의 주관, 자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들을 때 하나님 말씀 깨달은 것보다 더 강한 자기 속에 어떤 욕심이 있든지, 어떤 사상이 있든지, 어떤 주장이 있든지, 어떤 성질이 있든지, 어떤 깨달음이 있으면 헛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니까 자기 속에 돈 욕심, 명예 욕심, 지위 욕심이 있는데, 여러 욕심 중에서 돈 욕심에 딱 걸렸습니다. 그러면 재물을 포기해야 이 말씀대로 살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둘이 씨름하다가 아무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안 되겠다 해서 돈 욕심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중단을 시켜버린다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은 물욕이라는 돌에 걸려서 하나님 말씀이 성공을 못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절단 나도, 산더미 같은 횡재가 닥쳐도 이 말씀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물질에 대한 물욕의 돌덩이는 없는 사람입니다.
잘 믿는 사람이오.
그런데 다니엘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생명을 내놔야 하고,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면 말씀을 내놔야 할 때는, 이제까지는 잘 믿었지만 생명 내놔야 하는 그 지경에서는 말씀대로 지켜 행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생명의 애착욕이라는 큰 반석에 딱 걸려서 그만 실패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살다가 마지막에 자기 속에 어느 욕심이나, 어느 사상이나, 어느 주장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중단이 되는 그것을 가리켜서 돌밭에 뿌린 씨로 비유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돌은 자기 속에 이 말씀보다 강하게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또 덤불 위에 뿌린 씨는 어떤 것이냐? 대개 덤불 밑의 땅은 흐분흐분하게 좋습니다. 낙엽이 쌓이고 하니까 흙이 좋습니다. 그 위에 씨가 떨어지면 위에 덤불을 다 베어냈지만 뿌리는 밑에 꽉 박혀있습니다.
거기다가 씨를 뿌리면 흙이 흐분흐분하니까 잘 자랍니다. 그래도 밑에서 덤불 순이 올라오면 더 빨리 자라서 꽉 덮어버리니까 땅은 좋아도 그늘 밑에서는 결실이 안됩니다.
이 비유는, 그 사람이 아주 의지도 굳고, 심지도 굳고, 인격자라서 뭘 한번 한다면 하고 하지 않는다면 안 하는 진실한 인물인데, 이런 사람이 성경 말씀을 보고 듣는 가운데 깨달아서 '이대로 살겠다!'는 강한 결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돈도 문제 될 것 없고 어떤 것도 문제될 것 없는 사람이요, 자기 목숨이 끊어져도 깨달은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 밖의 세상, 모든 사건들, 그러니까 '내 목숨이야 아끼지 않지만 내가 이렇게 하면 세상 문화가 절단 난다, 민족이 절단 난다, 국가가 절단 난다.' 그만 세상에 이런 사건 저런 사건, 이런 문제 저런 문제, 자기 밖에 있는 그 문제에 얽혀있습니다.
자기는 문제가 안 되는데 자기 밖에 얽힌 문제로 인해서 '나 하나야 희생하지마는 내 밖의 사회나 세상이나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하나님 말씀 때문에 희생시킬 수 있겠느냐?' 이렇게 잘 믿다가 도덕 문제나, 또 민족 문제나, 국가 문제나, 인류 문제나, 문화 문제 같은 것에 걸려서 그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것을 가리켜 덤불 위에 뿌린 씨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에 옥토에 뿌린 씨라고 한 것은 무엇이냐? 길바닥이 아니기 때문에 새가 와도 주워 먹지를 못했고, 밑에 돌이 없으니까 돌도 방해하지 못하고, 덤불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이게 옥토에 뿌린 씨입니다.
그러면, 옥토에 뿌린 씨는 새도,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도 이 말씀대로 살려는 결심과 생애를 방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이 말씀대로 살 때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욕심이나, 어떤 자기 형편 사정이 있더라도 이 말씀은 자기보다 크기 때문에 자기를 희생시켜서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희생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또 덤불 밑에 뿌린 씨도 다 벗어나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 때 국가 문제나, 사회 문제나, 인류 문제, 문화 문제로 온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하나님 말씀은 어기지 못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말씀의 중량을 비교하면 하나님 말씀이 크기 때문에 세상은 버릴지라도 하나님 말씀은 버리지 못한다! 이 말씀은 나와 비교하면 나보다 무한히 크기 때문에 내가 이 말씀을 위해서 희생할지라도 말씀은 버려서 희생시킬 수가 없다! 이 말씀은 인류의 모든 말이나 책이나 어떤 주장보다도 크기 때문에 그런 걸 부인하지 이 말씀은 부인할 수 없다! 하는 이것이라야 옥토에 뿌린 씨입니다.
길바닥이 아니니까 새가 방해하지 못합니다.
돌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자기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덤불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밖에 있는 세상 어떤 큰 문제도 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옥토에 뿌린 씨입니다.
옥토는 돌도 없고 덤불도 없으니까 씨가 지기를 다 빨아먹습니다. 그래 가지고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보다 큰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이요, 가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극복한 자기의 마음, 자기의 사상, 자기의 뜻, 자기의 힘, 자기의 모든 것을 이 말씀이 다 빨아먹어야 인간 성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이래서 하나님의 도에 복종하면 영생이 된다고 말씀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행할 때 어떤 것에게도 방해받지 않아야 옥토에 뿌린 씨가 되고, 이렇게 되면 씨 하나가 백도 되고, 육십도 되고, 삼십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이대로 살면 백 사람이 이와 같이 된다, 그러면 백 사람이 그렇게 살면 만 명이 될 것 아닙니까? 만 사람이 또 그대로 살아서 백 배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자기 한 사람의 구원으로 많은 사람의 구원이 되고, 또 자기가 한 진리를 지킴으로 수많은 진리를 지키게 됩니다. 이러므로 자기가 이 한 진리를 지킴으로 이 진리대로의 사람, 진리대로의 행위, 진리대로의 사상, 진리대로의 일이 되면 이것 하나로 말미암아 수많은 면이 점점 진리대로의 사람, 이대로의 행위, 이대로의 일들이 됩니다. 밀알이 하나 떨어져서 수많은 결실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해서 깨달아 가지고 일이 절단 나고 자기가 절단 나고 온 세상이 절단 나도 말씀대로 지켜야 하는데, 왜 이 말씀대로만 지켜야 합니까? 이 말씀대로 지키면 모든 것이 잘 됩니다. 모든 것이 잘 돼요. 그러면 장사하는 사람이 이 말씀대로 지키기만 하면 장사가 잘된다 말입니까? 장사하는 사람이 물건 팔고 사는 것만 생각해야지 성경 말씀만 생각하고 설교 말씀만 늘 생각하면 장사가 되겠습니까? 또 학생이 말씀만 생각해 가지고 어떻게 공부가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부모들은 아이가 교회 가서 말씀만 배우고 생각하면 공부 못한다고 해서 교회를 못 가게 합니다. 가족들은 하나님 말씀만 생각해서 장사가 될 턱이 없다고 해서 아예 교회 가는 걸 반대합니다.
그러나 실은 이 말씀을 옥토에 뿌린 씨의 비유처럼 생각하면 학생은 공부를 잘하게 되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에 성공하고,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에 성공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면에 성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회사에 사원이 일을 하는데, 일을 하면서 사장을 생각하면서 일합니다. '사장에게 잘 보여서 내 직급이 올라가고 월급이 올라가도록 해야지.' 일은 생각지 않고 그것만 생각하고 일합니다.
또 일하면서도 '어쨌든지 사원들이 나를 볼 때 사장이 나를 본 받으라고 할만큼 모본이 되어야 하겠다.' 일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원들에게 모본될 것만 생각하면서 일합니다.
또 그 사람은 일만 생각해야 할 것인데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검사원이 검사를 하면서 '이 물품이 제일 우등이다, 이 사람은 상급을 줘야 한다. 같은 시간에 제품을 이렇게 잘 만들었으니까 상급을 줘야되겠다.' 상급을 생각하면서 일합니다.
자, 사장을 생각하면서 그 사장 눈에 들어서 월급이 올라가고, 모든 사원들을 생각하면서 사원들의 모본이 되고, 또 뒤에 검사원이 합격만 시킬 것이 아니라 상급을 안 주고는 안 되도록 이 세 가지를 생각하고 일하면 일이 잘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이 세 가지를 생각하지 않고 물건만 생각해서 일을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사장에 대해서는 빵점이 될 것이고, 또 일만 생각하고 하면 사원들에게 대해서 덕 면에 빵점이 될 것이고, 일만 하면 검사를 생각하지 않고 제 주관대로 만들 것이니까 물건이 절단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에 이렇게 되면 좋겠다.' 아니오. 검사에 합격이 되도록 검사원이 보고 잘 됐다고 하는 그걸 기준 해야 합니다. 사장의 사업이 잘되는 것을 생각하고 사장이 만족하도록 그 면을 생각해야합니다. 사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일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는데도 물건이 잘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보다 하나님은 완전자시오. 완전자를 생각하면서,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양심과 진실과 모든 것을 보시는 그분에게 거리끼지 않고, 그분에게 만족이 되고, 그분이 기뻐하시고 즐거워서 '야, 참...!' 이렇게 감탄하도록, 또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되고 감화가 되도록,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지 않도록,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이요, 하나님의 검사인 심판에 합격되는 말씀이요, 모든 사람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만 사모하고 이 말씀대로만 하려고 애를 써서, 천하 인간이 다 반대해도 이 말씀대로, 자기와 배치돼도 자기를 꺾어 이 말씀대로, 온 세상과 대립돼도 세상을 부인하고 이 말씀대로, 이 말씀대로만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 눈에 드는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에게 만족된 사람이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감화를 주는 신덕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일도 그렇습니다. 행동도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에 걸리면 어떤 것도 다 포기하지 이 말씀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길가도 다 부인하고, 돌밭도 다 부인하고, 덤불도 다 부인하고, 자기의 인격도, 심신도, 정력도, 시간도, 사상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에 기울여서 이 도대로만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만 보고 사는 사람이요, 전 인류에게 신덕을 위해 사는 사람이요, 모든 존재에게 시은의 생활을 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심판에 만족을 이루는 그 생애를 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이 말씀만 사모하면 가정이 안 될 것이다.
말씀대로만 해 가지고 되겠느냐?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사회와 인류와 문화를 절단시키는 것이다.' 하는 것은 제 견해가 거꾸로 됐기 때문이지 말씀이 거꾸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에게 희생한 것은 살아난 것이요 이 말씀을 부인한 것은 다 죽은 것입니다. 이걸 확실히 파악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헛일이 됩니다.
세상에 어떤 것과 모순이 되더라도 말씀에 모순된 그게 죽은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만 행하면 죽은 것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모순된 것을 집어던지면 그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됩니다.
말씀은 참이시요,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는 말씀이요, 심판과 하나 되어 있는 말씀이요, 참 인류와 만물과 하나 되어 있는 자유의 율법이요 생명의 법칙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법칙대로 사는 것은 미워한 것 같으나 사랑한 게 되었고, 죽인 것 같으나 산 게 되었고, 죽는 것 같으나 살아난 게 되었고, 버린 것 같으나 다 취한 게 되었고, 실패 같으나 다 성공이 되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말씀은 먼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말씀이요,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말씀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에 참 칭찬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말씀이요, 이 말씀대로 한 사람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중보에서 영원 무궁토록 보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