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생각하고 소망을 굳게 잡자

 

1986. 11. 21. 밤 (금)

 

 본문:고린도전서 2장 1절∼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제가 오늘밤에 이 설교를 하게 된 동기를 잠깐 말하겠습니다.

오늘 새벽 설교 때에 내가 평소에 깊이 느끼고 회개함이 없었는고로 내게 배 있는 습성을 좇아서 오늘 아침에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편집실에다가, 아침에 설교하고 나서 기도하다가 작정을 하고 부탁을 하기를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을 설교록에 다시 기록지 말고 그 테이프는 나에게로 돌려 달라 해서 내가 돌려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나 할 일이 아닌 이 세상에 대한 말을 내가 한 것입니다. 뭐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또 세상에 있는 이런 국가 정세 저런 또 미래적으로 다가올 모든 세상의 일들 그런 것을 오늘 말씀 증거할 때에 증거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 이하에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기뻐 받고 고난당할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영광스러운 고난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고 했고 남의 일을 간섭함으로 고난받는 그런 고난은 받지 안하는 것이 좋다 하는 그 말씀을 제가 생각이 나서 이 모든 세상 이런 저런 시국이나 또 모든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나 할 일이 아니고 남의 일 간섭하는 것이라 하는 것을 제가 깨닫고 마음으로 작정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가 그런 데 관한 말을 하지 않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작정을 하고 그래 오늘 밤에 이 말씀을 증거를 하게 됐습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하나님의 증거는 곧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이것이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지 아니했다 그말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말, 수사학적으로 아주 말을 삣고 깎아서 수련해 가지고 참 아름답게 그렇게 되어 있는 그런 모든 세상 지식의 말, 세상의 이 모든 사람들이 연구해서 내놓은 그 모든 수사학적인 모든 그런 아름다운 말 그런 말을 가리켜서 말이라고 여게 말한 것입니다.

말에도 그 말을 아주 삣고 깎고 닦아서 말을 하면 발표도 잘 되고 또 알아듣는 이들도 잘 알아들어지고 쉽고 아주 좋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그런 아주 세련이 된 그런 좋은 말을 써서 하나님의 도를 증거하면 증거하는 말을 듣는 사람도 아름답고 또 잘 들어 깨달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말로 가지고 전할라고 하지를 아니했습니다. 일찍부터 말로, 그는 여게 “전할 때에 말과” 하는 이 말은 아주 세상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된 그런 아주 수사된 그런 말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아니했다 말은 말의 지혜도 참 수많은 지혜 있는 단어도 있고 술어도 있고, 또 모든 문장들도 있고, 또 거게는 온 세상에 다 역사들이 말 속에 들어 있고, 또 모든 예술들이 말 속에 들어 있고, 또 모든 과학들이 말 속에 들어 있는, 통틀어서 이 세상에 사람들은 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미개한 말보다도 많이 발달된 말, 또 아무 연습하지 안한 말보다도 많이 연습해 가지고서 연단 받고 세련된 그런 말, 또 그렇게 무식한 말보다 세상에 있는 이런 모든 요새 이십세기의 온갖 문화, 온갖 과학, 온갖 예술, 온갖 모든 공통되어 있는 아름다움의 그 모든 표현들 그런 것을 말해서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바울은 이렇게 작정했습니다.

저는 본야부터 무식하기 때문에 아예 말의 아름다운 말은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또 지혜로운 말은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그저 시골에서 서로 만나서 아이들 때에 만나 가지고 말하는 주먹 말, 시골에서 하던 주먹 말, 이 아주 노동자 말, 아주 미개한 말 그런 말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로 하고 그렇게 아예 뭐 수사학은 공부해 보지도 못했고 할 시간도 없고 또 그만한 머리도 없고, 또 이 세상에 아름답고 찬란한 이십세기의 문화를 발표하는 그런 아주 민첩하고 아름다운 그런 말도 써보지도 못했고 그런 말로 설교를 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아주 무식하기 때문에 못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사람에게 내대로는 말을 좀 잘 해 가지고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납득해 가지고 구원을 이루도록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면으로 은연중 힘을 썼습니다. 바울은 보면은 그런 면에 대해서는 전연히 관심을 가지지 안했던 것을 여게서 볼 수 있습니다.

5절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면 어떻게 하든지 말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그 역사가 있기만을 전심으로 노력했고 소망해서 그렇게 했지 말에 대해서는 관심을 별로이 가지지를 안하고 그렇게 했다 하는데 저는 그런 말을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거지 같은 가난뱅이지마는 지혜로운 말과 아름다운 말로 가지고서 이 설교를 할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여게다가 마음을 기울이고 힘쓴 일이 없지를 안했습니다.

비교적 유식한 사람에게다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그뭐 없으니까 거게 대해서 뭐 힘쓸래야 힘쓸 것도 없고 하니까 비교해서 많이 쓰지는 못했지마는 거지면서도 그대로 또 거게 힘을 그것을 사용해 가지고 할라고 그렇게 애를 썼던 것을 제가 회개를 합니다.

나는 어짜든지 내가 벙어리 말을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역사하시면 벙어리 말, 내가 무슨 고함을 질러서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역사하면 고함, 내가 조용히 말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역사하시면 조용히, 어쨌든지 하나님이 친히 오셔 가지고 능력으로 역사하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여게다가 주력을 해서 설교하지 못한 그런 것을 제가 또 회개를 합니다.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왜 이와같이 바울이 세상 아주 문채 좋은 그런 언변이나 지식이나 가지고서 하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서 역사하기를 힘썼던 것은 그가 단정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못박히신 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 증거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만을 증거하고,  사활의 대속을 증거할 때에 사활의 대속을 증거하는 그 증거함이 조그만치라도 삐뚤어짐이 없도록, 하나님이 보실 때에 사활의 증거가, 대속의 증거가 바로 돼서 바로 되는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전적 와 가지고 책임지고 역사하시도록 그렇게 할려고 하는 데다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왜 약했던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을 입은 자요, 사활의 대속에 팔린 자요, 사활의 대속을 기념하고 그 대속을 잘 보존해서 보존해야 되기 때문에 그 사활의 대속을 보존할려고 하니까 어떻게 약한지, 사활의 대속을 보존하고 그 대속을 버리지 안하고 벗지 안하고 대속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생활을 할라 하니까 어떻게 약한지, 자신이 “약하며 두려워하며” 두려워하면, 이렇게 큰 힘 들여서 말할 수 없는 이 대속을 주셨는데 가다가 보면은 이 대속을 만홀히 여기고 이 대속을 등한히 여기고 이 대속에 대해서 아주 속되게 모욕되게 한 그런 일이 자꾸만 계속되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심히 떨었노라” 이 바울이 뭐 다른 사람 위해서, 다른 사람의 구원 위해서 한다는 것보다도 예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자기가 이미 받았으니 대속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행위를 해야 합당한 자가 돼야 되겠고,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되겠고, 합당한 모든 행동으로 그대로, 말로도 전해질 뿐 아니라 자기 말과 자기의 모든 행동과 자기 자체가 대속 받은 자의 그대로 바로 증거하는 이 증거를 해야 될 터인데 이것이 안 됨으로 심히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노라.

이걸 바로 해야 다른 사람에게 이 천국문을 가로막지 안하고 큰 힘 들이고 큰 사랑 들여서 큰 희생해서 이 생명의 대속을 열어 주셨는데 자기가 그만 이 대속을 가로막고 덮고 가루어서 다른 사람에게 이 한없는 생명의 영광스러운 빛이 비추지 못하도록 그 빛을 가루어 덮은 그 일을 하지 안할라고 떨었고 그 일을 실수된 걸 인해서 두려워했고 이런 데에 심히 그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너무 약한 것을 자기가 느낀 것을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금 말하고 “내 말과 내 전도함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바울의 말은 뭐이며 전도는 뭐인가? 바울이 말한 것도 다 전도며, 그런데 “내 말과 전도함이” 그러면 바울이 말로 하는 것도 바울은 다른 말 하지 안했고 평생 다니는 것이 전도 말밖에는 안 했습니다. 그런데 “내 말과 전도함이” “내 말과 전도함이”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말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기 행동과 자기 자체가 바로 전도기 때문에 자기 말한 것이나 자기 행동한 것이나 자기 자신을 보여서 전도한 그것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무슨 이 세상에 아름다운 그런 세상 지혜, 세상 지혜의 그런, 지혜라 말은 세상 지혜를 말합니다.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성령이 나타나 가지고 자기가 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자기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이 대속을 가루지 안하고 사활의 대속을 그대로 투명체와 같이, 자기는 유리와 같이 투명체와 같이 그대로 솔빡 보여 주는 자가 되어져야 할 터인데 자기가 보여 주지 안하고 가리우는 그런 일이 되지 않고 바로 성령이 직접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서, 자기는 투명체가 아무것도 가리움 없이 안의 것이 환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데에 거리낌 없는 마치 투명물과 같이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그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가지고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말씀을 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이 세상에 온갖 아름다운 그런 모든 말들이 가득 차고 세상에 있는 모든 이 소년들, 청년들, 이 젊은 사람들, 모든 지식 계급에 있는 모든 유식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금 머리를 싸 짜매고 이렇게 참 전심 전력을 기울여 이것이 보배라고 아주 자기의 일생을 바쳐서 연구하면서도 아깝다 하지 안하고 으례히 바치는 것이 지당하고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분발하고 있는 그것을 바울은 그런 것을 다 무시해 버리고, 그런 것을 다 무시해 버리고, 요새도 모두 이 세상에서는 이제는 뭐 이런 총칼 가지고서 전쟁하는 거, 또 이런 돈 가지고 전쟁하는 거, 사람 가지고서 사람 인력 가지고 전쟁하는 거 그런 시대는 다 지나갔다. 이제는 모든 지혜의 발달인 이 모든 과학전 시대가 됐다.

이래서 이제는 참 컴퓨터 세상이 됐기 때문에 이제 이 모든 인간의 그 지능이 앞선 나라가 다 부강한 나라 되고 또 승리의 나라가 되지 지혜가 없이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이 모든 과학적인 구비한 지혜를 다 발달시키고 또 이것을 잘 가꾸어서 양성시켜야 된다 하는 것이 뭐 세계 통일입니다.

이런데,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모든 청소년들의 마음이 다 그리 기울어지고 ‘참 그거는 그럴 만하다’ 그 기묘하고 오묘한 그 모든 과학의 참 형형색색의 그 찬란함이 가득찼기 때문에 모든 청소년들의 마음은 그리 다 기울어집니다.

이래서,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어떤 구석에 갔다 온 사람은 ‘거게도 잘 믿는 사람 있더라’ 말하고, 또 일본도 열심히 믿는 사람 믿더라 말하지마는 그거는 한 구석을 보고 하는 것이지 전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나라도 다 문명한 나라고 또 일본 나라도 문명한 나라고 뭐 소련이나 그런 나라도 다 문명한 나라인데 다 문명한 나라들은 그 사람들은 사람의 이 과학적 지혜를 가지고 지금 가치로 실력으로 삼아서 거게 다 전력을 기울이니까 믿는 학생들도 전부 그리 다 기울어집니다.

기울어져서 아마 미국에는 뭐 칠십이 인 과학 노벨상 받은 사람들이 다 일개의 소송과 같이 모든 법원들에게 법적으로 해 가지고서 성경을 전적 믿는, 성경을 과학적으로 믿는, 그렇게 성경을 실상이라고 믿는 이런 것부터 없애야 이 모든 청소년들이 과학에다가 전부를 기울이지 성경을 참이라고 믿으면 벌써 엿새 동안 우주 창조했다 하면 이거는 우리 과학과 정반대이니까 안 된다 이래 가지고 그들은 송사를 하고, 송사하면 미국같은 나라에도 ‘그는 한 종교의 교리지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그건 실상이 아니다.’ 이라면 그 시비가 이겨서 그렇게 될 아마 무기명 투표를 하면 그 숫자가 많을란지 모릅니다. 이런 지금 세대가 점점 돼 가고 있습니다.

있는데, 우리는 대속을 입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으로 중생된 사람이니까 성령의 지혜를 받아 가지고 우리의 눈을 떠서 쉬지 않고 주위와 환경을 살펴서 모든 것을 잘 눈을 뜨고서 잘 보지 안하면 우리도 그런 그물 속에 홀켜서 들어가게 됩니다.

너무 이십세기의 온갖 과학들이 너무 찬란하기 때문에 다 그리 끌려 들어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에는 음행의 포도주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음행의 포도주라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세상하고 짝지어서 하나님 앞에 상속받을 거 다 뺏겨 버리고 이 세상 창기에게 다 자기의 성공과 존영을 다 뺏기고 만다 하는 그런 뜻으로 말 했습니다.

우리는 이 바울이 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히신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안하기로 했는가? 그는 눈이 밝아서 멀리 봤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노아는 그는 참 온 세상에서 뭐 인구가 지금만치 그렇게 숫자가 많지 못하다 할지라도 지금은 모두 흩어져 살고 있지마는 그때는 뭉쳐서 사는 때이기 때문에 아마 그 밀도는 지금보다도 더 소물게 돼 가지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그 바벨탑을 쌓을 때도 보면 천하 사람들이 다 한테 모여 가지고 살았고 이렇게 했으니까 얼마나 밀도해 가지고서 산 그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 천하에 인간들이 다 하지 안하는 일을 자기네들 여덟 식구만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방주 배를 모을라고 하니까 그 모든 생애가 얼마나 외로왔겠습니까? 얼마나 고독했겠소? 천하에 동지가 여덟 식구밖에, 여덟 사람밖에 없으니까 참 뭐 그보다 더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요새는 뭐 외로운 걸음을 걷는다 해도 그렇츰 고독할 수는 없습니다.

고독하지, 또 다른 사람들이 다 멸시 천대해서, 모든 사람이 노아 보고서 미치괭이 중에 하나로 보고서 그렇게 멸시 천대했지, 노아를 뭐 사람으로 여기지 안했을 것입니다. 멸시 천대받지 또 아무 그렇게 뭐 뿍뿍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배를 모아봤자 유익 들어오는 게 수입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이권이 하나도 안 생깁니다. 이익이 하나도 생기지 안하요. 생기지 안하는데, 외로와, 천대받아, 아무 수입 없어. 이런 그 생애를 노아가 한번도 피곤해 여기지도 안했고,  지루해 여기지도 안했고, 고독해 여기지도 안했고, 아무 수입 없으니까 낙망해 보지도 안했고 그는 그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그에게 충만했고, 또 하나는 안타까운 염려가 하나 충만하고 둘뿐입니다.

뭐이냐? 그때에 세상에서 요새와 같이 모든 과학, 보이는 모든 이 과학의 신기성, 신비성, 모든 세상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 모든 찬란성, 사람들이 각각 자기 소원대로 욕심을 모두 다 달성할라고 분투 노력하고 각각 모두 그 욕심이 달성됐을 때에 뭐 좋아서 기뻐하고 희희낙락하고 하는 자기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심한 근심과 걱정과 고통과 안타까움에 견디지 못하는, 자기 밖에 있는 수많은 영광스러운 사람들을 향해서는 마음에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가득찼고 자기가 걸어가는 자기 걸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이 넘쳤던 것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그 당시 그런 그 찬란한 모든 문화의 모든 구비한 행복의 사람들을 참 마치 불가운데 들어서 후득거리면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과 같이 그렇게 마음에 안타깝게 여기는 그 마음이 아픈 것과 자기는 모든 사람이 조롱하는 그 걸음이 한없는 행복스럽고 영광스러운 그 걸음으로 그렇게 피곤치 안했던 그것은 뭣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노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홍수로 온 세계가 멸한다는 이 홍수 심판으로 온 세계의 모든 생명이 다 하나도 남지 안하고 다 몰살돼 멸망을 할 것이고 자기 여덟 식구만이 남아 있을 이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듣지 안했고 자기는 또 욕 얻어먹지만 그것이 욕으로 들리지 안했고 그 사람들을 도리어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시키신 그 시키시는 대로의 그 결과인 홍수 심판의 그 결과를 보는 거게서 다 우러나온 것입니다.

홍수 심판을 본 거기에서 노아의 그 끈기 있는 인내도 계속도 피곤치 안한 것도 온갖 환경으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훼방과 천대와 박해도 그 박해되지 안하고 오히려 그들이 불쌍했고 자신은 기뻐하고 즐거워함이 많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 이십세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예수 믿는 도리는 천하게 여겨서 길바닥에다 버려 버리고, 내가 ○○○목사님의 그 아들이 여게 새벽기도 나올 때에 내가 자랑을 많이 했었는데, 아주 진리를 잘 깨닫고 참 나는 유망하게 봤었는데 요새는 지금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공부하면 뭐 아마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나 무슨 고시 공부를 하고 있지 않는가 싶은데 고시 공부 그런 것도 좋기는 좋고 어떤 과학을 뚫어낼라 하는지 모르나 또 과학도 연구하는 게 좋기는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은 멀리 보는 노아와 같은 그런 원시하는 그런 눈이 없으면 우리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불에 타서 녹아지고 드러나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돼야 되겠느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그날, 그날이 어찌 되느냐? 그날이 어찌 되느냐? 그날의 것을 소망하고, 그날을 생각하고, 그날에 어찌 되느냐? 내 마음이 항상 그날에 있으면은, 그날에 있으면 노아와 같은 그런 인내, 그런 끈기, 노아와 같이 피곤치 않는 그런 기쁨의 생애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고, 또 노아가 모든 세상에 화려하고 찬란하고 부강한 그것을 보고서 마음에 불가운데서 지금 호득거려 죽어가고 있는 그와같은 꼭 같이 그렇게 애연스럽고 불쌍하고 가련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될 터인데 오늘 우리 소망이 거게 있지 안하고 이 눈이 어두워서 마귀란 놈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말이오.

반드시 그 종말은 오는데, 우주의 종말이 안 오면 자기 개인의 종말이라 하는 것도 언제 올란지 오는데 여게 대한 우리의 시선이 악령이 돌이켜서 우리의 시선을 돌려서 우리가, 에덴동산에 많은 과실이 있는데 배암에게 미혹받아 가지고 하필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고 선악과에만 고 눈초리가 싹 기울어져 가지고서 자기 자멸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오늘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소망에 대해서는 보이지 안하고 이 모든 보이는 여게만 기울여지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신앙 생활이 피곤하고 신앙 생활하다가 엉뚱한 생활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나는 죽는다’ 만일 죽으면 제가 어짤 건가? 죽으면, 네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힌 거 그 외에 네가 한 것이 뭐 있겠느냐? 뭐 있겠느냐, 네가? 자, 네가 사법 행정 고시 통과를 했다. 한국의 제일 위대한 과학자가 됐다. 됐으면 네 생명이 딱 끊어지는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힌 그 외에 너에게 뭐 있겠느냐? 너 뭐이 필요하냐?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뭐이 되겠느냐? 우리가 이 보배로운 마음의 눈을 마귀에게 뺏겨 가지고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눈을 널리 뜨고 길게 떠서 아무리 세상에서 어떤 아름다운 교훈이 있고,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어떤 찬란한 영광스러운 게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나를 이 죄에서죄의 값은 사망인데이 죄에서 해방시키지 못하는 운동, 교훈, 지식, 배경, 능력,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나를, 인간은 마지막에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에 가서 부딪혀야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가 가지고 반드시 그 앞에 서야 되는 것이니까, 자신을 죄에서 자유시켜 죄의 해독을 받지 안할 수 있는, 죄 문제를 해결지워 줄 수 없는 지식이라면, 도덕이라면, 능력이라면, 부강이라면, 영광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우리는 ‘아, 나는 마지막에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는 서서 심판 지나고 난 다음에는 영원 무궁한 영원이 있고 심판 앞에까지 가기까지는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데, 심판 너머는 영원이 있는데, 그 심판에서 지금 영원이 결정되어지는 것인데 너희 사상이 좋으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내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한번 질문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하면, 나를 영원한 사망에서 자유하여 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도록 사망에서 해방시켜서 나를 사망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망에게 붙들리지 안할 수 있는 사망에 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악령의 그 쇠사슬에서 해방되어 자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지극한 이 율법, 하나님의 율법에 정죄받지 않게 하나님의 온갖 그 지성 지공의 율법에서 정죄받지 아니하도록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주재이신 이분으로 더불어 완전히 화친이 돼서 그분과의 하나도 거리낌이 없는 그분과의 화친되는 이 화친을 해 주지 못 하는 것이라면, 영원 무궁을 살아가는데 영원 무궁에 유일신, 자존자, 대주재,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모든 주권 능력의 그분에게 거리끼지 안하고 유일로 그분을 섬기는 일, 그분이 좋아하는 일, 그분이 등용하는 일, 그분이 다 옳다 옳다 인정하는 요 영감과 진리의 요 영생하는 요 길을 걸어가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런 것을 일단 다 이것을 거기에서 선을 그어서 그 이하의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그까짓 게 우리에게 오늘 가치성과 필요성이 오늘 끝날란지 내일 끝날란지 모릅니다. 내 생명이 끊어지는 날에는 그런 건 다 그런 가치와 그 능력은 다 끝나 버립니다. 주님이 구름타고 오셔도 다 끝나 버립니다.

이런데, 우리들은 아직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이 눈이 어두워 가지고, 우리 앞에 있는 이것을 좀 생각해야 될 터인데, 생각의 눈으로 봐야 될 터인데 마귀에게 미혹받아 가지고서 노아와 같이 우리의 소망, 우리가 믿는 소망, 우리의 소망을 보는 눈이 없고,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이 심판을 보는 눈이 없고, 영원히 완전하고 영원 불변의 이 튼튼한 것은 다 마귀에게 꼬여서 보지 못하고 이 시간 있다가 없어질 허무한 눈에 보이는 거 이것만을 향해서 있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들도 비참하고 우리 신앙 생활이 피곤하고 노아와 같이 기쁘지를 안하고 바울과 같이 기쁘지 안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이 피곤하고 기쁘지 안하고 또 염려 많고 마음이 눌리는 것은 뭐이냐? 우리의 이 유일한 소망 이 소망을 우리가 잊어버려 그렇습니다. 이 소망을 보지 못해 그런 것입니다. 이 소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해서 이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되어서 땅위에 뭐 이런 거 저런 거 어떤 것이 말한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기를 “그들은 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전부 속이고 속는 것이다.” 온 세계 요새 뭐 과학의 지식이 막 대가리처럼 내들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세상의 찬란한 이십세기의 문화가 막 대가리를 들고 야단을 지깁니다. 아무리 해도 사망선을 꿰뚫어 올라가지 못한다면, 마귀의 그 모든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죄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영원히 절대자를 향하여 유일한 동행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 다 없는 거나 같은 것이지 무슨 가치로 칠 것입니까?

그러기에, 내가 오늘 아침에 회개한 것은 아, 옳다 그르다, 옳아도, 옳아도 인간의 문제인, 옳아도 인간의 문제인 이 사망선 아래 있고, 틀려도 사망선 아래 있고, 죄악 아래 있고, 마귀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정죄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범죄 아래에 있고, 다 사망 아래 있으니 사망 아래 있는 그걸, 있는 것인데 이게 옳으니 그르니, 옳아도 그 아래에 있는 것, 틀려도 그 아래 있는 것, 틀리나 옳으나 그런 건 다 그 아래 있기 때문에 도매금으로 한 마디로 다 평가하고 결정해서 그 아래에 있으니 거게 대해서는 시비곡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거나 그거나 꼭 같은 것이요 마지막은 다 한 구덩이 갈 것이요 멸망이니까 나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힌 이것만을 내 자신이 알아야 되겠고, 이것으로라야 그 모든 죄악과 사망과 마귀와 하나님의 심판선 아래에 있는 그것을 하나라도 건져내지, 이거라야 하나라도 건져내지 이거 아니면 그대로니까 온 세계에 뭐 갑론을박으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아무리 시비해 봤자 이 모든 건 다 그 선 아래 있는 것이니까 옳으면 어찌 하며 그르면 어찌 하나? 그거 시비할 필요가 없어.

그거 옳은 걸 옳다고 해 봤자 마지막에 보면 내나 그것도 그거고 저것도 그거고 다 한가지니까 다만 내 자신도 거기에 유혹받지 말고 나 할 일은 그 속에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힌 이것만으로써 한 사람이라도 거게서 구출할 수 있지 그거 외에는 한 사람이라도 구출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이 우리 할 일이지 딴거는 할 일이 없다 하는 것을 바울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못박힌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내가 작정했다” 참 이것이 바울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인데, 성령의 사람은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인데 우리가 이 모든 비정상의 유혹에서 정상의 사람으로 빨리 돌아가서 우리는 눈을 넓게 뜨고, 뭐 이러니 저러니 아무리 시비해도, 자, 그것은 어데 있느냐? 내나 그것도 죄 안에 있는 거라. 내나 이 죄나 저 죄나 뭐 옳다 하는 것도 죄, 이거나 저거나 똑 같애. 이거나 저거나 똑 같으니까 그것을 가지고서 옳다 그르다 우리 시비할 여가가 없어. 해 봐야 그건데.

도매금으로, 해 봐야 그거니까 그거는 그대로 두고, 우리는 거기 간섭하지 말고 두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출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 사활의 대속만이 한 인간이라도 건져낼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이 우리 할 일이지 그 이상은 온 천하를 움직이고 한다 할지라도 다 그 선 아래에 있다, 선 아래에.

사망선 아래에 있다, 마귀선 아래에 있다, 죄선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심판 정죄 아래 있다, 꿰뚫고 올라가지 못한다. 꿰뚫어 올라가는 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박힌 그 외에는 꿰뚫고 올라가는 게 하나도 없다. 이 세상을 이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고로, 바울은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대형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해방시켜 자유를 주신 이 자유를 팔지 안할라고 하다 보니까, 팔지 안할라 하니 자신이 약한 것을 알았고, 자기가 또 두려운 걸 알았고 떤 사람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걸 대행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공심판에 ‘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자다’ 율법에 만족을 준 그 공로를 나에게 줬는데, 나는 율법의 만족을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공심판의 율법에 만족을 줄 수 있는 그것이 내것인데 이 대행으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과 화친의 하나님의 의를 내게 줬으니까 이 의를 줬으니, 이 의로 나를 샀으니 나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요, 담대히 가진 자요, 담대히 지성소 앞에 갈 수가 있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어. 이 가진 자요 나는 주님의 것 됐으니, 주님이 나에게 하나님 의에 완전 생명을 주셨으니 이것은 내것이요 나는 주님의 것이라. 주님이 해방의 자유를 나에게 줬으니 해방의 자유는 내것이요 자유하는 나는 주님의 것이라.

그러면 나는 주님의 것으로 자유해야 되겠고, 주님의 것으로 완전 생명으로 하나님의 의로 살아야 되겠고, 하나님의 영생으로 살아야 되겠고 요거 할라고 하니까 자기 약한 것도 보여졌고, 이거 할라고 하니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항상 그는 마음이나 사지를 펴고 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거 외에는 이 수평을 꿰뚫고 올라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소망을 우리가 잊어버려서 이런 것이니까 우리는 항상 “소망의 투구를 쓰자” 투구라 하는 건 머리 쓰는 것인데 온 몸뚱이 중에 머리가 제일 아닙니까? 머리 이게 제일 머리가 온 전신을 다 주장하는 것 아니요? 소망의 투구 쓰라 말은 우리의 전인격과 전생활과 전행복에, 전기쁨에, 담대에, 평강에, 용감에, 인내에 우리에게 모든 생명에 속한 거 모든 것의 제일 우두머리는, 제일 우두머리는, 머리, 제일 우두머리는 어데서 피난해야 되느냐? 우두머리는 소망에서 피난하는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잊어버린 가운데에서 우리는 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 노아가 만일 그 소망을 잃었다면은 노아같이 비참한 사람이 없고, 고독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피곤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슬픈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망을 그가, 거짓부리가 아닌, 이 소망을 굳게 잡고 보니까 온 세상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불쌍하고 가련해서 비참했고 그는 행복됐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노아가 생각이 잘못입니까? 노아 생각이 발랐습니다. 노아는 과연 행복됐고 그 모든 사람은 불쌍하고 가련했습니다. 홍수가 내려오니까 그 사람들이 다 홍수 속에 매장되고 말았지 않습니까? 매장될 그걸 몰라 그렇지 매장될 그때야 누가 그들을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하지 안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 같다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소망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러 가든지 일하러 가든지 항상 우리는 이 소망이 없으면 대가리가 끊어져 버린다 말이오. 소망이 없으면 모가지가 끊어져. 소망을 잊어버리면 모가지가 끊어져. 모가지가 끊어지면 모가지 끊은 짐승이 벌로 날뛰지 모가지 끊어진 짐승이 모든 무슨 감각이 있습니까 뭘 알겠습니까? 마구잡이로 벌로 뛰지.

이와같이 우리가 소망이 없으면 우리의 이 심신이라 하는 거 벌로 날뜁니다. 마치 모가지 끊어 놓은 이 짐승이 마구 벌로 뛰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소망을 잊어버려 놓으면 우리는 벌로 생각하고, 벌로 욕심내고, 벌로 슬퍼하고, 벌로 기뻐하고, 벌로 움직이고, 벌로 미워하고, 벌로 교만하고 다 미친 짓이오. 이 소망을 잊어버리면 우리의 언행심사는 전부 모가지 끊어진 짐승과 같이 이거는 참 죽음의 발악이지 아무것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제 광고합니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나옵시다. 새벽기도에 나와야 이 진리를 배우지, 오늘에 배우지 이 시기 지나가면 못 배웁니다. 오늘에 배워야지 시기 지나가면 못 배우요. 모르면 무슨 구원이 됩니까? 모르면 행하지 못하는데 행하지 안하는데 무슨 구원이 됩니까? 알아야 되지요. 새벽기도 다 나오도록 하십시오. 왜 새벽기도 자꾸 나오다가 못 나옵니까? 새벽기도 못 나오는 그 자신이 ‘내가 이렇큼 약한 자이니까 이 죽은 송장 같다’ 하는 걸 자기를 좀 때려요, 좀. 자기를 꺾을 줄 알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킬 줄 알아야 되지 새벽기도 작정하고 하루 새벽도 못 나오고도 뭐, 내일 새벽에는 다 나와요. 그라고 오 분 기도 후에 지난 주 오전 오후의 설교 재독이 있습니다. 또 철야기도 있습니다.

자, 내일 새벽기도 이제, 또 속고 속았는데 이제 속에 자기를 미워해요. ‘요놈을 단속해서 내가 내일은 새벽기도 안 나오면 요놈을 굶겨서 죽여도 죽일란다’ 요렇게 좀 자기하고 싸워야 되지 자꾸 그놈한테 지면 됩니까? 이 심신을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 그놈에게 내 심신을 뺏기면 안 됩니다. 내일 새벽기도 나오면 그 심신을 내가 차지하는 것이고 못 나왔다면은 못 나오는 거는 마귀 그놈이 못 나오게 하는 것이오. 못 나오면 마귀 그놈한테 다 심신을 뺏긴 것입니다.

내일 새벽에 새벽기도 나올 사람들 한번 강한 결심하고 손 한번 들어 봐요. 새로 한번 들어 봐요. 이래 들지 말고, 나오고 싶거든 손 들고 나오기 싫거든 들지 말고. 나오고 싶거든 ‘주여, 내가 내일 새벽에는 어떻게, 내가, 내가 뭐 잠이 와 죽어도 살을 찝어 비틀뜨려도 나가겠습니다.’ 나올 그 간절한 마음이 있는 분은 한번 다시 한번 손 한번 들어 봐요. 남반에는 좀 드는데 여반에는 이래 한다.

듣고 내일 새벽에 나와요.

이 배울 시기 없습니다. 배울 시기가 없어요. 얼마 지나가면 없어요. 백 목사도 지금 이제 좀 있으면, 한 두 달만, 한 달만 더 있으면 일흔여덟 살이라. 일흔여덟 살인데 인간 칠십 고래희라 하는데 그뭐 곧 갈 때 안 됐습니다. 여러분들 그래 장 배울 때가 아니라. 장 배우지 못합니다. 이래 배울 수 있는 기회에 놓치지 말고 새벽기도 꼭 나와서 배워서 어짜든지 예수 믿는 이치를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656 심신이 살아나는 법/ 요한복음 14장 21절/ 871224목새 선지자 2015.11.28
2655 심으는 도/ 고린도전서 15장 42절-44절/1976년 39공과 선지자 2015.11.28
2654 심으면 의의 열매가 맺어짐/ 고린도후서 9장 9절-10절/ 831227화새 선지자 2015.11.28
2653 심의기관-노소원/ 야고보서 3장 1절-12절/ 890207화새 선지자 2015.11.28
2652 심지가 견고한 자/ 이사야서 26장 1절-7절/ 840117화새 선지자 2015.11.28
2651 심지가 견고한 자/ 이사야 26장 2절-7절/ 810925금새 선지자 2015.11.28
2650 심지를 기르자/ 이사야 26장 3절/ 820128목새 선지자 2015.11.28
2649 심판/ 요한계시록 2장 11절-15절/ 880626주새 선지자 2015.11.28
2648 심판/ 창세기 6장 11절-12절/ 880619주전 선지자 2015.11.28
2647 심판/ 마태복음 25장 31절-34절/ 880612주새 선지자 2015.11.28
2646 심판/ 마태복음 25장 31절-34절/ 1988. 6. 6.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1.28
2645 심판/ 마태복음 25장 31절-34절/ 1988년 9 공과 선지자 2015.11.28
2644 심판/ 출애굽기 32장 9절-14절/ 880515주후 선지자 2015.11.28
2643 심판과 구원/ 히브리서 11장 5절-6절/ 791106화새 선지자 2015.11.28
2642 심판앞에 걸리지 안하도록/ 로마서 11장 36절/ 880219금새 선지자 2015.11.28
2641 심판없는 말 없다-집회 천막터/ 유다서 1장 11절-16절/ 870422수새 선지자 2015.11.28
2640 심판을 면하는 유일한 길/ 야고보서 2장 8절-13절/ 820312금새 선지자 2015.11.28
» 심판을 생각하고 소망을 굳게 잡자/ 고린도전서 2장 1절-5절/ 861121금야 선지자 2015.11.28
2638 심판을 준비하는 마음가짐/ 고린도전서 4장 3절-5절/ 830615수야 선지자 2015.11.28
2637 십계명/ 출애굽기 20장 13절/ 790909주전 선지자 201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