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8 11:47
심령 가난
본문 : 마태복음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어제 아침에 복에 대해서 약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3절 해석은 그 범위가 넓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해석을 합니다. 하는데 대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니 어떤 복이 있느냐 천국이 저희 것 되는 복이 있다, 이렇게 보고 해석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 어떻게 복이 있느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 된다 이렇게 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거의가 다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깨닫기를 그렇게 깨닫지를 안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모든 주석과 좀 다른 점이 있어서 그 점을 여러분들이 들을 때에 충분히 이해를 하고, 들을 때에 깨닫고 또 뒤에 기도로써 새김질을 해서 확고하게 잡지 안하면 내나 배워 놔도 또 그렇게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왜 심령이 가난해지느냐?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해진다 저는 그렇게 깨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심령이 가난해지느냐?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은 천국이 저희 것이 되기 전에는 심령이 가난해질 수가 없다.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해진다. 왜 천국이 제것이라고 심령이 가난해지는가? 천국은 첫째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여게도 하나님이 계시지만 천국에는 하나님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것이 다릅니다.
하늘나라는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을 더 똑똑히 알게 됩니다.
이래서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이 자기와 더 밀접해지고 같이 이렇게 가까워질 줄로 이렇게 알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자기와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갈수록 그 사람이 회개해 갈수록. 하나님과 자기와의 가까워지는 면이 있지만 멀어지는 면도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인식하는 것이나 또 믿는 것이나 또 그분을 높여 섬기는 것이나 그런 면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가까워지지만. 이 세상에 오든 죄악이 가리워져서, 심령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몰라서 하나님 앞에 거짓말도 하고 또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도 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일도 하고. 심지어 어두운 사람은 하나님을 욕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아주 업신여기고 이렇게 하지만. 하늘나라 차차 가고 세상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 점점되어져 갈수록 하나님과 자기와의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을 차차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자기는 말할 수 없는 아주 천하고 추접한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너무 이색지고 너무 모든 면이 다르고 모든 면이 달라서 하나님은 깨끗한데,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제가 깨끗한 줄로 알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해 보니까 자기가 더러워서 낯을 들지 못한 것을 가리켜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라면 사도들 중에도 아주 깨끗한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을 그를 형을 줄라고 기름 가마에다가 넣고 삶은 일이 있다고 합니다. 기름 가마에다가 넣고 삶았으나 그는 아무 상관치 안고 고통을 느끼지 안했고 그는 그대로 그것을 통과하고 지내 나왔다 하는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뭐 성경에 기록하지는 안 했고 그런 전설로.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주님은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에 주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자기를 붙들고 뜻대로 하는 그 일을 성사시켜 준다는 그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요새 우리가 믿음의 공부를 하고 있는데,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나 우리가 그 선물을 단번에 받을 만한 그런 자격이 없고 우리가 어둡고 둔하고 또 심히 둔탁해 있습니다. 아주 탁한 사람들이요 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 주시는 것을 그것을 단번에 받지 못하고 믿음을 서서히 받아서 그것이 우리에게 받아집니다. 왜? 그것은 믿음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치료가 되면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변화가 돼 가면서 믿음을 받아지는 것이지 자신이 변화되기 전에는 믿음을 받지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금 변화되면 믿음을 조금 받게 되고. 또 좀더 변화되면 믿음을 더 많이 받게 되고. 이렇게 차차차차 자신이 변화됨에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자기가 인정하게 되고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아주 거짓말만 하고 지내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인 줄 알고 시시하이 여기지만 거짓말하지 안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거짓말 아닌 참말을 할 때에 그 말을 참말로 들어서 그 말이 어느 정도 두렵다, 어느 정도 권위 있다 이것을 인정 하지만 아주 거짓말하는 자는 뭐 그런 말 들어봤자 이것도 다 거짓말이라 이렇게 인식이 돼 집니다. 그러면, 다 같은 말이지만 들을 때에 그 사람이 자신이 어떠함에 따라서 그 말에 대해서 신실성으로 느껴지는 것이오. 진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됨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서 그 믿음을 우리가 받아가지고 가지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만든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만든다 말은 제가 믿음을, 없는 믿음을 창작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힘을 쓰니까. 믿음을 가질라고 힘을 쓰니까 그 믿음이 차차차차 가져지게 되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제가 자신이 생각할 때에는 믿음을 만드니까 믿음이 만들어지고 믿음을 그만 집어 던지니까 집어 던지게 된다 그렇게 느껴질 만한 그런 방편을 통해 가지고 믿음이 자기에게 생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만들어야 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만들어야 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어린 사람들이 믿음이 뭐인지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만든다고 그래야 그 사람이 믿음을 만들라면 내가 믿음을 가질라고 애를 쓴다. 이렇게 애를 쓰니까 믿음이 생겨집니다. 사람들에게 알기 쉽도록 말하는 것이요, 들어서 자기가 이해를 하고 효력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은 만들어야 된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믿음은 받아야 된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옳은 말은 옳은 말이오.
믿음을 하나님께 받는데, 받을 때에 받는 우리의 준비가 자기가 믿음을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애를 쓰는 그것이 믿음 만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받는 그 정도밖에 안 된다, 믿음을 받는 방편밖에 안 된다 하는 그것이 바른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인데, 그 선물인 믿음을 자기가 받을 때는 자기가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노력하지 안하면 믿음이 자기가 받을 자격이 없게 된다. 왜? 그것은 자기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게 믿음이기 때문에 자기의 있는 심신의 힘을 다 기울일 때에 그 믿음을 받기 위해서 심신의 힘을 다 기울일 때에 기울이는 그것이 믿음을 인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 양이 된 것만치 믿음은 자기에게 와서 가지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 선물로 받는 것인데 차차차차 믿음은 또 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만들어야 믿음이 생겨지고, 인간 말입니다. 인간 제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말이오. 인간 생각으로 생각 할 때는 믿음을 제가 만들라고 애를 써야 믿음이 생겨지게 되고 또 믿음을 자꾸 사용을 하면 믿음을 자꾸 쓰면 그 믿음이 차차차차 자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이 다음 주일에도 또 공과로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뭐이 믿음인가? 믿음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을 자기가 확실히 믿고, 신실하신 분이요 절대 불변의 완전의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것도 다 신실한 말이요 진실한 말이요 완전의 말이기 때문에 말씀 한 마디도 천지가 변해져도 변하지 않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원 완전의 불변의 참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도 그러하다 한 것을 자기가 인정하고 그 말씀을 자기가 지켜서 행합니다. 그 말씀을 지켜 행하면서 내가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 행하는 이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영원성을 이루고 영원한 것을 이루고 완전한 것을 이루고 영생을 이루고 불멸을 이루고 불변을 이루기 때문에 그것은 유한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 보기에는 아주 쉬운 일이라도 그 쉬운 일 그것을 없어질 것으로서 만드는 것은 쉽지만 인간이 만들 수 있지만 아무리 쉬운 그 일이라도 그 일이 없어지지 안하고 다 영원의 것이 되고 영생의 것이 되고 완전의 것이 되어 진다는 그것은 사람이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한의 인간이, 변하는 인간 이, 제한돼 있는 인간이 그런 걸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고 작고 간에 다 하나님께서 만드셔야 되지 사람은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자기 가 알고 하나님은 이렇게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 이것을 내가 소원하면서 이 말씀대로 내가 행할라고 애를 쓰면. 애를 써 봤자 그것이 내 힘으로 되는 거는 아니고 애를 쓰는 그것이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실 수 있는, 주심을 받을 수 있는 내가 되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이 또 해 주실 때에 해 주시는 것을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니 이 말씀대로 내가 되고 싶고 하고 싶은데 이렇게 내가 할라고 달라 들면, 달라 들어서 하면 내 힘이 하는 데까지 다 하면 내 힘으로 하는 것은 망할 것은 하지만 망할 것 이상의 고차원의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상의 것을 주님이 이제 해 주신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믿을 때에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내가 그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면 하나님이 그 지극히 큰 능력과 사랑을 가지고 이 일을 완성해 주신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믿고 의심하지 안하면 하나님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일을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실패하느냐 하면 믿음을 가지지 못해서 실패하는데, 믿음은 단번에 되는 게 아니고 믿음을 가질라고 애를 써서, 애를 쓰면 조그만한 믿음이 되어지고, 조그만한 믿음이 되어진다 말은 아주 사소한 일, 사소한 일, 쉬운 것 그런 것을 믿음으로써 그 일을 성공하고 거기서 경험하고 체험해 가지고 조금 더 어려운 일을 해 가지고 성공하고 점점 더 일을 해서 성공해서 마지막에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데까지 자라가는 것이 우리 기독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 말씀은 나만 요대로 할라고 달라 들어서 힘을 쓰고 힘을 쓸 때에 하나님이 해 주신다 하는 것을 믿어서 이 세 가지가 합해지면 다 성공하는 것인데, 믿는 사람들이 이 세 가지가 합해지지 안해서 성공을 못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혈루증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어떻게 됐느냐? 혈루증 여인이 하나님 말씀이 없었으면 그 사람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설교를 하고 난 다음이니까 설교를 하고 난 다음이니까 설교의 말씀을 듣고 아, 이분은 지극히 크신 분이요 알지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이분의 꼭 안수를 받아야, 손으로 안수를 받아야 뭐 되고 이분이 말을 해야 될 게 아니라 능치 못하심이 없고 알지 못하심이 없고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시니까 내가 이 분을 내가 믿고 `그의 옷자락이라도' 하는 것은 옷자락뿐 아니라 내가 옷자락을 안 만지고 안 만지고 그분이 나를 지금 내 혈루증을 낫아 주리라 그래 믿었으면 또 그대로 됩니다.
그거는 뭐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가졌고, 또 자기가 나을라고 지금 애를 쓰고 마음으로나 나를 낫게 해 주시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애를 쓰고 또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실 것이라 이렇게 믿기 때문에 거게는 세 가지가 다 구비했습니다. 세 가지가 구비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안하고 자기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벌써 설교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생겨지고 생겨져 가지고 주님은 내 모든 것을 내가 말하지 안할지라도 나는 지금 혈루증 앓는 여인이니까 나를 낫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지 안해도 내가 마음을 가졌을 때에 그분은 아신다 또 내가 그분에게 대해서 안수를 안 받아도 그저 그 분이 내가 옷에만 접해도 그분이 아시기 때문에 안수 받은 것이나 옷에 접한 것이나 한가지다, 그래 가지고 그럴 때에 나은 것입니다.
옷에 접하지 안하고 그때는,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이렇게 다녔을 때에는 사도 바울의 손수건만 얹어도 병들이 나았습니다. 나은 그것은 그때에 있는 사람들이 아, 사도 바울이 권능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타나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믿는 대로 된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이 손수건만 내가 봐도, 얹고 내가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서 고쳐 주시리라 할 것을 믿는 믿음이 더 뚜렷하니까 그때 다 나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보고 믿는 자는 복이 적고 보지 안하고 믿는 자는 복이 많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의 말씀을 안 보고 그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은 듣든지 읽든지 봐야 되고. 또 자기가 노력하는 것은 뚜렷히 노력을 해야 되고,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시는 것은 무슨 역사하시는 그런 흔적이 꼭 있어야 되는 게 아니고 흔적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도 그분은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가 있다 하는 이것을 믿는 그 사람이 복이 있다 그랬어. 그 믿음이 더 장성한 믿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요새 믿음의 공부를 하고 있는데. 믿음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니 믿습니다. 우리가 사람도 그 사람이 말한다. 그 사람이 말하면 그 말은 틀림이 없다. 아 책임지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 이 말하면 틀림이 없는 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참되다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다 인정하게 됩니다. 챰되다 인정하고, 참되다 인정하고, 참되니 이 말씀대로 내가 됐으면 좋겠다 하고 됐으면 좋겠다 하니 내가 되도록 내가 구해야 되겠다. 구하는 것은 입으로 구 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또 실지로 그와 같이 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또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애를 내가 쓴다. 애를 쓰면 애를 암만 써도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가 애쓰는 거와 둘이 암만 있어도 그거 이루어지지 안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이루어지지 안하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애를 쓰니까 애를 쓰니 하나님이 애쓴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되는데 믿음을 가지고 하면 되는데 자기가 애는 쓰면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시겠느냐? 애를 써 일이 되겠느냐 하니까 의심을 하기 때문에 안 된다 말이오 너희들이 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고 의심치 안하고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이루어지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세 가지라는 그게 아주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간추려서 간추려서 그렇게 된 것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복 있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그렇게 간추려져서 그래 되어지는 것이 없다 말이오. 간추려 가지고 그래 가지고 증거하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주 수많은 성경을 요긴해서 단 그 세 마디로 간추려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받아 가지고 가지면 복 있는데, 그것도 못 받으면 참 너무도 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이래서, 천국은 하나님이 주로 계시는 곳입니다. 이래서, 하늘나라 가면 하나님과 자기와의 거리가 가까운 게 아니라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점점 바로 믿을수록 점점 멀어집니다. 멀어진다 말은 실상은 가까워지는데, 실상은 가까워지는데 자기 인식에는 점점 멀어집니다. 가까워진 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신실하심에 대해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신실해짐에 대해서는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점점 가까워지고 점점 똑똑해지고 점점 확실해지고 점점 분명해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약속하시고 해 주시는 일은 점점 분명해지고 점점 똑똑해지고 점점 확실해지고 점점 가까워지고 자기가 하나님께 대해 그 한 행동은 자기가 살펴볼 때에 자기가 점점 보여지니까 자기가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는 그것은 자기를 반견했을 때에 자기는 하나님과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는 이만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실 것이라 했는데 이제 자세히 살펴보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대해서 너무 거절했고 너무 거역했고 너무 패역했고 너무 버릇이 없었고 너무 몰상식했고 너무 하나님 앞에 무성의했고 너무 망령을 부렸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사도 중에서도 그렇게 위대한 사도 요한이지만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주일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제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가지고 요한복음도 기록했고 그와같이 사도 중에도 아주 신령한 면으로서는 누구보다도 장성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투쟁에 장성했고 사도 요한은 사랑으로서 그렇게 사랑으로 성화 된 면이 장성했습니다.
그래서, 사 복음 가운데는 요한복음이 그 신령한 면에 있어서 제일 깊고 제일 높고 제일 범위가 넓습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감시킨 것이 제일 넓고 높고 깊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전투해야 되느냐 하는 전투를 했고. 그 사도 요한은 모든 전투로서 국토를 점령 해 놓고 그 다음에는 안정된 정치에서 내부적으로 물샐틈 없이 모든 것을 정치해 나간.
내정으로 정치해 나가는 먼저 전투로 정복해 놓고 그 다음에는 정치로써 그 다음에 모든 것을 잘 다스려 맑아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으로 말하면 정치에 속한 사람이라 그렇게 볼 수 있는 그런 신앙이 높은 분입니다.
그래서, 그 과거에 인민군 때도 보면 전투 부대가 앞서서 전투를 해 가지고 대략 토벌할 걸 토벌해서 정벌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정치 부대가 뒤에 따라옵니다.
따라와서 정치 부대가 점령해 놓은 것을 잘 통치하는 이런 역사를 하는 것이 그들의 전투의 방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런 분이지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가 가지고 주일날 주일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데, 이제까지 영감 받은 그 영감을 받지 안하고 이제까지 받지 못한. 그 영감보다 더 높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높은 영감을 받았다 말은 자기 눈이 더 밝아지고,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진리 증거하다가 밧모 섬에 잡혀 귀향 가 가지고 거게 있으면서 자꾸 기도하고 믿음 생활 하니까 분주하게 일할 때보다도 더 심령이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졌다 그말이오.
온전해지니까. 사도 요한도 깨끗해 지니까 차차 하나님이 점점 더 보여진다 말이오. 하나님이 점점더 보여져요.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평소에는 이라다가, 요번에 팔복 산에 모두 권찰님들이 가셨는데 가 가지고 가기 전보다도 자신을 더 발견을 해서 흉한 것을 더 발견하고, 또 가서 하나님을 더 발견해서 하나님은 더 깨끗하신 분이요 너무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너무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너무. 하나님 앞에는 함부로 입을 벌릴 수 없는 분이시요 그분 앞에서는 우리가 거짓부리로 할 수 없는 분이시요. 하나님을 점점 과거에 발견치 못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왔으면 은혜를 받은 것이고 이제 과거보다도 더 버르장이 없는 그런 사람이 돼 가지고 왔으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된 것인 것입니다.
이래서,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처음에 그분이 말하기를 `그 머리털이 눈과 같다' 그렇게 말했어. 눈과 같다. 그 머리털이 희어서 눈과 같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을 보니까 주님의 하신 그 일을 따지고 따지고 자꾸 들여다보니까 이제 들어 갈수록 그분에게 속한 것은 털끝만한 것도 성결 아닌 것이 없었다. 그것을 표시하기를 그렇게 표시했습니다. 머리털이 희어서 눈과 같다 그말은 아주 주님에게 속한 것은 주님의 자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자기의 그 활동에 속한 것, 자기가 운동한 그 운동에 속한 것, 당신이 모든 관리에 속한 것. 당신의 하신 것은 지극히 작은 것도 전부 다 성결한 것뿐이다.
이래서 그분이 하늘나라에는 성결이 없는 것은, 성결이 아닌 것은 가지 못한다는 것을 평소보다도 똑똑히 느꼈습니다.
그러고 주님의 얼굴을 볼 때 그가 표시하기를 그렇게 했습니다.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과 같다.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 같다고 그렇게 표시한 것은 해가 이렇게 너무 광명이 강하니까 그 광명에 우리 눈이 부셔서, 그 광명을 볼 만한 그런 눈이 못 되기 때문에 광명을 볼 때, 우리 눈이 감겨지고 부셔서 뭐인지 보지를 못하는 것처럼 주님의 하신 그 일과 자기는, 이제까지 자기하는 일이 `내가 이만침 했으면 하나님이 날 기뻐하실 것이다. 이만했으면 내가 충성했다.
오히려 이라면 너무 내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너무 많이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이와 같이 이런 충성을 했는데도 알아주지 않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한 것은. 예를 들면 한 짚동 만침 했는데 하나님은 내게 대우하기는 주먹덩이만침만 대우하고 알아주지 않는가, 이래 됐었는데 정반대가 된다 그말이오. 반대가 돼서 `아, 나는 하나님께 한 것이 주먹덩이같이 했는데 그분이 내게 후대하는 것은 짚동같이가 아니라 이 집채 무더기같이. 산더미같이 나에게 후대를 해 주셨다 이러니까 자기 과거에 생각했던 거, 또 그분은 내게 하는 것이 이렇게 말할 수 없는 희생을 하셨고.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봉사하셨고, 참고 견디셨는데 나는 그분의 한 것을 내가 이래 보니까 내가 낯이 부끄러워서, 내가 낯이 부끄러워 양심에 가책이 돼서 그만 견디지를 못하는 자기 눈으로 볼 수 없어서. 볼 수 없는, 그분이 자기에게 행한 것과 자기가 그분에게 행한 것에 대해서 너무 가책되고 가책되고 자책이 돼 가지고 볼 수가 없어서 그 분을 모형하기를 그분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과 같다 하면서 그 자리에 꺼꾸러졌습니다. 꺼꾸러져서 죽은 자와 같이 돼 버렸습니다.
너무 그만 탄식이 되고 죽은 자와 같이 돼지는데, 그 사도 요한이 죽은 자와 같이 되어질 때에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을 가졌던가 하는 것을 주님이 그 다음에 위로하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위로하시기를 그렇게 위로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나는 산 자로 죽었고 죽은 자로 다시 살아났다.' 그 말씀은 내가 십자가 못 박히기 전에 네가 나한테 기대고, 내 몸에 기대고 내 몸에 드러눕기도 하고 그저 한, 참 친한 동무와 같이 이렇게 여겨서 네가 나에게 몸에 기대고 의지하고 그럴 때도 내나 나는 이런 하나님이시다.
이분이시다, 네가 그렇게 버르장이 없고 그렇게 막 놀고 이렇게 할 때도 그때도 내가 내나 네가 지금 발견 한 내나 그 주님이시다. 나는 그때 그래도, 그럴 때도 네가 그렇게 기대기도 하고 했지만 그때 너를 사랑했었는데 지금은 네가 그때 요량하면 많이 성화가 됐는데 내가 사랑하지 않겠느냐. 이러기 때문에. 네가 나를 처음으로 발견했지 나는 변한 게 아니다. 네가 눈이 어두워서 이제 발견 한 것이지 내가 변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때에 그럴 때도 네가 지금 본 때와 같다. 본 때와 같다. 아, 지금 네가 또 나를 보고 이렇다 하지만 이제 네가 성화가 점점돼 가면 나를 지금 보는 것보다도 또 더 똑똑히 볼 터이니까 더 똑똑히 보면 네가 더 기절을 할 것이다.
이러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를 해 주시고, 내가 그때도 내가 내나 지금과 같은 내요, 또 네 눈이 차차차차 변화가 돼 가지고 눈이 밝아지니까. 심령이 밝아지니까 참 이분이 어떤 분이라 하는 걸 알고 그렇게 네가 기절하나 기절해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때도 내가 너희에게 소망을 두고 너를 구원했는데 지금 이만치 성화가 됐는데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하는 말씀을 가지고 위로를 하시면서 안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은 천국이 제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 첫째는 하나님을 보니까, 하나님을 보니까 자기 마음에 했다는 것이 너무 그 심령이 그 양심에 자꾸 가난만 보여집니다. 심령에 가난, 심령에 가난만 보여져서 아, 자기는 어북 이만하면 그렇츰 공로가 대단히 큰 공로를 베풀었다 했는데 가 보니까 자기 공로가 아무 것도 아니라 그말이라. 공로가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니 내가 과거에 이렇게 했을 걸, 이렇게 할 걸.
후회가 된다. 이렇게 할 건 후회가 된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이 돼서 모든 것이 심판대서 불 탈 때에는 모든 사람이 다 후회가 될 것이 많을 것입니다.
후회가 되고,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했을 걸' 그때 후회가 많고, 그때에 부끄러움이 많고, 그때에 원통함이 많고. 그때에 겁이 나서 떨림이 하, 이 일도 이거 될 때에 이거 어찌 되겠느냐?' 자꾸 심판에 밝아지니까 자기 하는 모든 게 드러나 가지고 심판을 받을 모양이니까 쫄리기도 굉장히 쫄리고 그만 이거 원통하기도 굉장히 원통하고 후회도 굉장히 후회되고, 또 부러운 것도 한정 없이 부럽고 소원하는 것도 한정 없이 소원하게 되는 그것이 예수님이 구름 타고 재림하실 때에 그때에 사람의 마음이 많이 변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서면 더 많아진다 그말이오.
이런데, 이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말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때를 당하기 전에 지금 그 마음이 돼지고, 심판 앞에 설 때에 그때에 마음이 부끄럽고 후회되고 자기한 거는 나 행한 것 죄뿐이니' 전부 삐뚤어진 것뿐이지 옳다는 것이 없어. 이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욥과 같은 의인이 없다고 그렇게 인정을 했습니다. 그건 인간으로서는 의인이라 말입니다. `천하에 욥과 같은 그런 의인이 없다. 완전한 자가 없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욥이 그 고난 가운데에 자기를 점점 발견해서 깨닫고 보니까 그가 말하기를 `인간의 의는 때묻은 옷과 같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암만 잘했다고 해도 보니까 참 흉측하고 더러워서 볼 수 없다.' 이렇게 자기가 성화되면서 깨달아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그 심령의 모든 것이 허무하고 빈약성 가난성 돈에 가난성을 가진 사람은 암만 돈이 억대가 되니까 저렇츰 많은 돈을 뭐 할란고 돈에 가난성 가진 사람은 억대를 가져도 `아, 이까짓 거 이거가지고 아무 것도 안 됐다. 또 벌어야 되겠다. 벌어야 되겠다.' 그저 뭐 돈을 억을 벌어도 십억이 돼도 백억이 돼도 자꾸 그게 모자라서 자꾸 욕심이 나고 탐이 나고 자꾸 자기가 `이만하면 넉넉하다 가 그게 없기 때문에 자꾸 그것이 갈증이 있는 데까지는 그 일을 위해서 노력을 한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심령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이 갈증이 생겨져서 자기의 모든 있는 것은 다 그것이, 바로 봤기 때문에 바로 봤기 때문에 자기 있는 것은 아주 몇 닢푼치 안 되고 아무것도 아무 가치가 없고 너무 외식이고 너무 거짓되고 이제. 거짓되고, 하늘나라에 있는 하나님은 보니까 너무 참되고 참되고 완전하기 때문에 거게 대한 갈급과 갈증을 가리켜서 심령이 가난하다고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도 하늘나라가 자기 나라가 된 것 만치 그 심령은 가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자기가 깨달은 것만침 자기의 부족이 깨달아지게 되고 그분이 내게 행하신 그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그분이 나를 어떻게 어떤 대속을 해 주신 그 대속을 깨달은 것만침 자기는 충성하고도 참말로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주님은 이런 대속으로 이런 사랑으로 이런 고난으로 나 위해서 구속해 주셨는데 나는 주님 앞에 너무도 거짓부리고 너무 불충성하고 했다는 자꾸 자기의 무익한 종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고. 주님이 안 보이시면 자기의 행한 것은 너무 지나치게 행했다 하는 정도로 이렇게 정반대로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거게 대해서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새 지금 이 팔 복을 공부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좀 기도를 많이 하고 깨달아져야 되지, 이래서 이 팔 복을 공부하지 안하는 것은 너무 심령이 좀 아직까지 어두워져 가지고 있고. 너무도 다 세상적이요 다 악령 악성 악습 자기 중심 자기 위주적으로 돼 가지고 있고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를 안 될까 해서 했는데 이제는 아마도 이 말씀을 또 증거해야 되기 때문에 증거를 합니다.
제가 6.25때에 위천서 있으면서 한 달 동안을 집회를 했습니다. 한 달 동안을 집회를 했는데 그때에 거 기에 모인 사람이 조그만 한 예배당에 한 삼십 평 되는 데서 한 사백 명 모여 가지고 하루 세 번 씩 집회를 했어요. 공산주의는 벌써 점령해 가지고 지금 저는 제 2호로 사형 선고가 내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서 자꾸 집회를 계속해서 한 달 동안 했었습니다. 한 달 동안 집회를 하고 이제 마지막에는 증거할 거 다 증거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준비할 거는 다 이 말씀 가지고 다 넉넉히 준비한다 하고 그날 아침에는 인제 다 준비했기 때문에 마 지막으로 이 산상 보훈에 팔 복에 대해서 지금 증거를 할라고 그날 아침에 `이제는 다 증거했기 때문에 오늘로 그칩니다' 하고 마지막 마침에 팔 복을 증거할라고 마태복음 5장 1절 이하를 봉독하고 설교를 할라고 시작하니까 그 인민군이 왔었습니다. 뭣이 와 가지고 뭐 투당탕거리며 뭣 이가 철커덕 그러더니만 그랬는데 나는 그래도 뭐 설교만 이래 했는데, 그때 보니까 옆에 측문이 있고 저 앞에 문이 둘이 있는데 그래 세 군데 인민군이 인민군들이 와 가지고 총을 가지고 와서 못 나가구로 도피 못하구로 파수하면서 양쪽에서 총으로 마루를 뚜드리면서 이래 총을 턱 세우면서 그래 고함을 지른 그 소리였습니다.
그랬는데, 내가 그전에 말했지만, 그러니까, 그라면서 뭘 저쪽에서 말하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그 설교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만기 목사님이 그때 그 교회 남집사로서는 제일 수집사였습니다. 이만기 목사님이 거게 있으니까 가서, 암만 나오라 해도 내가 들은척 만척 하고 설교하니까 가서 나오라 하라고. 빨리 데리고 나오라고 독촉을 하니까 그만 이만기 집사님이 나를, 가서 나오라 하라고 이래 야단이니까 그래 저 들어옵디다. 들어오는데 내 눈치에 아마 나를 나오라 하라고 그 소식 전하러 오는 것 같아요. 오는 것 같아서 내가 저만침 올 때에 고합을 질렀습니다. 어디라고 들어오느냐 예배보다가 예배 안 보고 어디 들어 오느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그만 혼이 나 가지고 그래 도로 뒤로 물러갔습니다. 그라면서 고함을 질렀더니만 그 인민군들이 그만 다 거게 주저 앉습더다. 앉아 가지고 거기서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예배 보러 왔습니다.' 떡 그 놈은 대번에 그래 변화 돼 버려요. 변하는 말해요. `우리도 예배 보러 왔습니다.' 이러며 떡 앉더니만 또 앉아 설교를 내가 또 한참하고 나 가니까 빨리 나오라고.
또 이래 일어서더니만 또 조급해 가지고 뒤에 상관이 지금 명령이 있으니까, 상관의 명령이 있으니까 어기면 저거도 죽기 때문에. 명령이 있으니까 또 야단을 지기면서 빨리 나오라 합니다. 나오라 하기 때문에 말하지 안하고 앉아 예배 보라고 내가 고함을 지르니까 또 앉습디다.
그래 두 번 앉았습니다. 두 번 앉고, 나중에 설교 다 마치고 주기도문으로 폐회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그래 인제 내가 나갔습니다. 나가니까 가자고. 보니까 그때 뭐 인민군이 여섯 사람인가 그래 왔었습니다. 한 문에 둘씩 이래 가지고.
그래 와서 나를 앞서 가지고 그래. 어디로 가자니까 사택으로 가자고. 그래 사택으로 갔습니다. 사택이 뭐 거기서 얼마 안 먼데, 사택으로 가니까 사택에 가서 내가 있다가서 우리 집에 왔기 때문에 그 마루에, `여기 좀 올라 앉으십시오.
이러니까, 이라더니만 떡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사택 보니까 착취는 안 했구먼' 그래. 그때 사택이 아주 험했습니다. 뭐 초가집으로 돼 가지고 아주 험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말이 무슨 말하는 게 아니라 `착취는 안 했구먼' 그 말을 해요.
그래 착취는 안 했구먼 그때 내가 '착취 안 했다' 그말이 무슨 말인가 이랬는데 `착취는 안했구먼 이라 더니만. 그 다음에는 말을 존경하는 말을 해요. 올 때에는 `가자' 이랬는데 그 다음에는 `갑시다' 이래요. 그래 내가 가니까 나를 데리고 저리 장터 있는 데로 저리 나가요. 그 사람들 그거 내가 많이 봤기 때문에 그래 데리고 가 가지고 그만 총 놔. 저 산에 가서 구덩이 파라 하고 총 놔 죽입니다.
그래 가는데 나는 이래 앞에 갑니다. 가면서 예수 믿는 이야기를 설설 하며 이래 가니까 이 사람들이, 그런데 나는 그때에 하나님이 은혜 주셨어. 하나도 무섭지 안하고 그 사람에게도 형제인데 죄인 형제니까 복음을 전해야 된다 그 마음만 가지고 이래 하니까. 하도 그 사람들이 좀 태연하고 유유하니까 그런가 나중에 가더니만 뭐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가십시오. 수고했습니다.' 아. 이래 그러며 가라고 이래, 그래 한참 가다가 이제 되돌아 왔지.
오니까 예배당에 가니까 예배당에서는 뭐 사람들 다 도망을 다 튀었어. 뭐 창문으로 다 도망 다 튀어 가버렸고 남은 사람은 이제 조사 죽었다고 막 대성 통곡을 하고 우는데 그때 우는 사람이 거게 한 네 사람인가 몇 사람인가 있읍디다. 네 사람인가 몇 사람인가 있고 다른 사람 다 도망 다 가버렸고, 뭐 그때 ○○○장로님도 거게 주일학교 부장으로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지방에서 학생들로 자란 저거 동무 친구들이 많아. `오늘은 지금 이제는 마지막으로 오늘 사형시킬라고 하는 거니까 거게 가 있으면 네가 잡힐 터이니까 함부래 조심해라' 이러나 그 집회 때문에 가지 못하고 있다가서 뭐이 꽝 그러니까 이 사람은 미리 전달 받았기 때문에. 정보를 받았기 때문에 꽝 그러니까 그만 문으로 툭 튀어 달아났다 말이오, 그마. 창문이 이만치 높은데 그만 문을 열고 훅 뛰어서 그만 달아났습니다. 네가 함부래 꽝 그러거들랑은 그라거든 네가 그만 창문을 열고 도망을 쳐야 된다. 그러면 우리가 너 알기 때문에 냅둘테니 도망을 쳐라.' 그때 인민군하고 다 그때 위천면이 제일 공산주의화 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위천면이 위천면 중에서도 ○. 황산 ○씨들이 제일 사상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보도 연맹에 많이 죽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래 튀어 나가고, 이러나 이 소리를 네가 만일 정보를 알리면 네가 야단난다. 그래서 ○장로 가 그때 나한테 그런 소리를 안 해요. 그런 소리를 안한 게 좋아. 하나님이 못 하게 했던 모양이라. 했으면 그런 장면을 구경 못 하고 말았을지 모를 건데. 그래 가지고 그때에 참 하나님의 역사를 또 기적으로 봤습니다.
이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 이래서 심령 가난은 자꾸 심령에 갈증을 말합니다. 갈증인데. 그 갈증이 뭐이냐? 천국이 자기 것이 되어 있으면 갈증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보게 되면 갈증이 나오고, 하늘나라는 다 그런 것들만 다 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서 갈증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래서, 이 팔복을 그때, 한 달 동안 사경회 한 끝에 마지막으로 이 팔 복을 마지막 시간에 이거 가르칠 정도는 안 되고, 마지막 시간에 이 말씀을 한번 말이나 할라고 그때그 개봉을 하고 `오늘 아침으로 끝납니다. 오늘 새벽 이 집회는 오늘 아침으로 끝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말을 했습니다. 말하고, 예배 시작해 가지고 지금 오늘 아침에는 이제 준비할 것은 다 말했고 했으니까 이제는 팔복에 대해서 말씀을 봉독하고 간단하게 증거 하겠습니다. 요라고 나서 그날 그 일이 생겼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팔복은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고 심령이 밝아져야 깨닫지 밝아지지 안하면 깨닫지를 못라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 많이 하시고, 팔복에 대해서 그뿐 아니라 산상 보훈에 대해서 많이 읽어서. 읽으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자꾸 새로워지고 깨끗해지고 자꾸 심령이 밝아 질 것입니다. 밝아짐을 받아 가지고 이 팔복을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