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8 11:37
실행으로만 완전한 자가 된다
본문: 야고보서 1장 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도 더디하고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약 1:19) 사람이 자기 현실을 빨리 파악하도록 힘써라. 자기 현실이 이것이 이것이라. 조것은 조것이라.
자기가 바로 깨달아서 탁 붙들도록 요거는 이것이 조거는 조것이라 뭣 때문에 요렇다 그것을 빨리 파악을 하도록 내가 힘을 쓰고 연습을 해라. 그리하고 내가 이성으로 움직이지 감정으로 움직이지 말아라. 감정으로 움직이면 의는 이루지 못한다. 그러기에 감정으로 움직이지 말고 이성으로 움직이되 내가 경솔히 움직이지 말고 천천히 움직여라.
다시 이성으로 움직일 때는 제거하고 제거하고 해서 후회할 것이 없도록 그렇게 움직이라.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후회라는 것이 없는 것이 믿는 사람의 걸음이라. 후회 할 것이 없다는 말은 잘못된 거이 없다는 마이냐 아니다.
잘못됨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아무리 잘못됨이 많이 있어도 후회는 없다.
잘못됨이 있는데 후회는 없는가 잘못됨이 있는데 후회가 없는 것은 그때에 자기가 자기를 다 해 가지고 걸었으면 잘못된 것은 있지마는 그 때에 더 할 수는 없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 자기를 알게 되지 그것이 후회라는 것은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은 될 번 했는데 잘못된 그것이 후회지 자기로서는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그 자기를 다해서 연약이요 무지 무능이라. 그 때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세 살 먹는 아이가 세 살 먹는 아이가 그 자나간 때 한 일을 그것은 한 열살이나 먹는 아이라야 할 수 있는 그렇게 했더라면 좋은데 세 살 먹는 제가 했기 때문에 그 일이 열살 먹는 아이가 다해야 할 일을 그 일을 세 살 먹는 아이로 유약한 자로 했기 때문에 그게 잘못되었다 잘못됐지만 세 살 먹는 자로서는 그 시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세 살 먹는 아이에 노릇이다.
그러기에 잘못됨은 많을지라도 후회는 없는 것이 자기를 다 해서 사는 것인데 그러기에 언제나 현실을 빨리 파악하고 감정으로 움직이지 말고 이성으로 움직이되 심각하게 철두철미 움직여 내 움직임 뒤에 그렇게 할 것 그런 것이 없어야 된다. 그렇게 할 그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인데 잘못됐다 .
그러면 내가 그 때에 다 하지 아니했을 때에 그렇지 내가 있는 힘을 다해서 했다고 하면 잘못됨은 있지마는 나로서는 다 그때에 그 이상을 할 수 없다.
이것이 너희 걸음이라 그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렇게 신중한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바로 파악하고 자기 현실을 바로 파악하고 자기가 이 감정되는 것을 억제하고 꺽어서 이성이 주장을 하되 심각하게 천천히 이렇게 주장을 해서 후회 없는 그런 걸음을 걷게 되는 데에는 걷게 되는 데에는 요 후회 없다는 요 말을 잘못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잘 바로 생각해야 됩니다. 후회 없는 일, 잘못됨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과거가 잘못됨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로서는 그것은 필연이요 이기 내 생활이지 후회 할 것은 없다. 후회 할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안 한 것이지 자기가 할 수 없는 자기로서는 참 꽉차게 그 이상은 할 수 없는게 하는 그것은 후회할수 없는 것이 잘못됨은 있지만 후회할 것이 없다 말이요. 이렇게 되는 데에는 이렇게 내가 내 생활을 조심하는 생활을 후회 없는 생활을 하는 데에는 내가 그것을 아무리 내 현실을 잘 바로 파악을 하려고 내 현실을 아무리 잘 파악을 할려고 또 이성으로 천천히 움직여서 살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암만 힘써도 안된다. 그 원인이 있다. 그것을 할려고 하면 내기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정리하는 그 그걸 한 몫 다 정리 안되지만 내가 내가 내 현실에서 정리 할 수 있는 그 정리가 돼야 위에 그게 되지 그 정리가 되기 전에는 내 현실을 바로 파악 할 수도 없고 또 감정으로 움직이는 일을 아무리 피할래야 피할수도 없고, 이성으로 내가 천천히 심각하게 하는 그 생활 할라 해도 안된다. 그것보다 먼저 그것을 위한 근거는 내가 모든 더러운 것과 내 중심이라는 그것을 정리해야 된다. 그러면 내 중심이라는 그것을 정리한다고 사람이 한몫 다 되는 거 아닙니다. 자기로서의 정리할 수 있는 자기 정도로서 자기에 신앙에 정도로서 신앙에 그 년령으로서 뭐 키가 크다고 한몫 다 크는 것이 아니지만 세 살 먹으면 세 살 먹은 아이 만큼은 키가 커야 되고 다섯살 먹으면 다섯살 먹은 아이 만큼은 키가 커야 되고 키가 커야 된다고 세 살 다섯살 먹은 아이가 어데 그 스무남날 먹는 사람 만큼 키가 큰다는 말은 아니고 자기로서의 클 키가 다 컸으면 그 사람은 제 키로서는 정상적인 키다 하는 것처럼 내가 내기에 모든 더러운 것 영감 도리에 삐뚫어진 그것이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그것을 영감도리에 이래 된 것을 그것을 정리하는 이것이 모든 더러운 것을 버리는 것이요.
또 넘치는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것을 자기로서 뺄 수 있는 것을 그것을 뽑아 버리는 그 때에 내가 현실을 정확 파악하도 내 현실을 정확 파악 할 수도 있고, 신앙이 어릴 때는 파악하기 쉬운 현실을 줍니다. 그 현실도 다 같은 현실이 아니요 그 신앙이 어릴 때와 장성할 때와 아주 장성할 때와 다릅니다.
우리가 평신도 처음 믿는 사람이 파악할 현실과 또 파악할 현실과 또 장로가 파악할 현실과 또 목사가 파악할 현실과 또 그 사람이 점점 성자와 성녀가 되어져 가는 그 그런 참 아주 발단 제일 낮은 겉어머리의 시작 발단 움싹과 같은 그 발단로 그 살아야 될 그 정도와의 현실이 다르니 파악 할 것도 다르다.
그런데 그게 바로 되는 재물이나 사건이나 물건이나 뭐이든지 그 자기에게 속한 것이 영감 도리에 위배되어 있는 그것을 내가 정리를 내 정도로서의 정리 할 것을 정리하고 넘치는 악, 내 중심으로 사는 그것을 내가 정리할 것을 정리해야 그것이 되어진다.
그러면 내게 있는 그 내 중심과 내 위주와 또 네게 있는 영감 도리 위배 되는 그것만 정리하면 되는 구먼 그 놈을 정리해야 되겠구나 그것을 정리할려고 내가 암만 애를 써도 안된다. 그것을 정리할려고 애를 써도 안되고 그것을 하는 데에는 능히 너희의 영혼을 구원 할 바 너희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요기 있어야 그게 되어지지 요거 없으면 안된다. 요기 있어야 내기에 더러운 것이 내게 더러운 악이 정리된다. 하나도 안 통해 나 혼자만 말했지 여러분들이 통하지 않는다 그말이요. 그러니까 그 자꾸 껍데기로만 그래 하라고, 사람들은 그것에 뿌럭지가 무엇인데 뿌럭지를 캐야 되지지 뿌럭지를 캐지 안하면 그게 됩니까? 뿌럭지가 심어져야 되지. 이러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이것을 해라 이 나무를 잘 가꿔라 가꾸는데는 나무가 커야 가꾸지 아 크면 되는구나 아 크기 보다 나무가 살아야 크지 아마 살아야 돼. 사는 것 보다 내가 바로 심어야 그게 살지, 그것을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금 내가 현실을 바로 파악하고 이성으로 움직이는 내가 될려고 하면 내게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 그것을 내가 정리해라. 내가 정리할 그것을 정리해야 그게 정리 되어지지 그러면 그것을 정리할려고 하면 그것만 정리하면 되는가 그게 정리가 되어지나 그것을 정리가 되어지기 전에 그게 정리가 될려고 하면은 내 영혼을 구원 할바 내 마음에 심긴 도는 능히 구원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도를 내가 받되 온유함으로 받는 사람이 되어 지도록 이것을 노력해라 그말입니다.
어제 저녁 그까지 말하고 말았는데 마음에 심긴도라는 말은 이런 영감 도리를 말하는데 요 문서 계시에 이 도리와 문서 도리를 내가 기억 했을 때에 66권 이 도리를 기억 했을 때에 그 기억은 말뿐이 아니요 그 속에는 살아 계시는 성령의 역사가 내주해 있는 것입니다. 내주해 있어서 그래서 영감 도리라 이라는데 영감도리를 말 할 때 마음에 심긴 도라 또 마음에 뭘 심굽니까? 마음에 심긴도라 말은 마음에 기억하고 있는 도인데 기억하고 있는 도를 심긴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불택자 속에는 이 영감 도리를 그 사람이 들었으면 그 듣는 그 시간부터 그 사람을 자꾸 심판해 나가고 있습니다. 심판해 나가고 있고 또 택함을 입어 중생된 자 속에는 이 말씀이 들려 기억한 그때부터 이 말씀이 점점 생명 역사를 일으켜서 건설해 나가고 있다 그것을 발표하기 위해서 심긴 도라 그랬습니다.
심긴도, 기억한 도가 아니라 들었을 때 이 말씀은 속에서 배제해 가지고 역사한다. 역사하되 생명적으로 자꾸 건설 되 나간다 그것을 가르쳐서 심긴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심긴 도는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 할 수 있는 도다. 영혼이라 영혼은 영을 말함도 아니요 육을 말함도 아닙니다. 사람이라고 말하면 영육을 합해서 말할 때에 변명으로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이 영혼이라는 것은 영혼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는 그 심령, 그 심령이라는 말은 마음이라는 말도 아니요 별개의 말인데 그것이 그 영에게 속하여 사는 영에게 속하여 사는 영에게 속해야 사는 그 마음을 가르칠 때에 심령, 심령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말하자면 사람 하면은 그 영, 육, 전체를 뚤뚤 뭉쳐서 아주 넓은 범위적으로 말했고 또 심령이라고 말하면 그보다 더 신비로운 신비로운 그 자기라는 그 사람을 가르쳐서 말했는데 그 보다도 영혼이라고 말하면 더 신비한 그 자기를 가르쳐서 나간 것인데 그 영육이라는 말도 영육의 알맹이 입니다.
영육, 영육의 알맹이 사람의 알맹이를 가르쳐서 그 영혼이라 말했습니다. 영만 말하도 안하고 육만 말하도 안하고 사람의 알맹이 그 별개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자기라 그말이요. 내가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심령을 구원할바 너희 마음에 심긴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온유함은 뭐이냐? 그 안자 중점입니다.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는 유화함으로 받으라 너거로운 마음으로 받아라. 단 마음으로 받아라, 기쁜 마음으로 받으라 이것은 온유라 말은 그 열매를 말합니다. 온유라는 것을 열매를 말합니다.
내가 주의 도를 받을 때에 그 말은 받는 것은 벌서 심긴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했으니까 요 심기었다 말은 자기 마음에 벌써 들어와 있다 말입니다. 들어와 있는데 뭘 또 받습니까 받는 것은 요 도를 자기가 들어도 들었으면 다가 아니라 들어 가지고 실행을 해야 자기 것입니다.
실행해야 자기 것이 되는데 마음에 심긴도를 그 심긴도는 벌써 마음에 심기었으니까 지기에게 왔다 말이요. 왔는데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받는 것은 자기가 실천을 함으로 실행을 함으로 자기가 도가 되고 이 도는 성령, 진리 이 둘이 합해서 이 도인데 자기 성령이 되고 자기 진리가 되는 그것은 실행으로만 도기 때문에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는 그 말은 받으라 말은 그것을 실천해서 그 성령님과 그 위치가 내 것이 되라 내 것이 되도록 해라 그러면 성령님과 그 위치가 내 것이 되는 데에는 내가 이 성령님의 것이 되고 진리의 것이 되는 그것이 곧 내가 성령님과 진리의 것이 되면 성령님과 진리는 내 것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이것을 가르쳐서 받으라 말했는데 이래 받을 때에 온유함으로 받으라. 내가 이도를 실행으로 할 대에 실행을 할려고 할 때에 실행하려고 애를 써지만 실행이 되어 지지 안하고 실행하고 싶기는 하고 싶은데 두려워서 못하고 모든 것이 절단 나든지 겁이 나서 못하고 마음에 염려가 돼서 모하고 이런 것은 다 온유의 반대입니다.
온유라는 것은 기쁨으로 단 마음으로 즐거워서 소원해서 이것이 안들리어 지는데 요기 안들리지는 것은 껍데기 예수를 믿기 때문에 안들리 지는 것입니다. 껍데기 예수를 그래 가지고 껍데기가 그 말이요. 자기가 자기 아는 것 그것만 한 가지 하면 되는 줄 알지만 아니요. 그것만 가지고 일이 안돼요. 그게 연관성 있는 기 다 있기 때문에 연관성 있는 그것을 가지면 안돼. 이러니까 이런 것을 말하면 잠이 오고 안들리는 것은 기가 막혀서 그래. 기가 막혀서.
지난 금요일도 이 말씀을 증거했고 요사이 늘 계속해서 이 말씀을 증거하는데 이거 귀가 맥혀 이러기 때문에 안들린다 지난 주간 지난 금요일 날도 증거해야 듣는 사람이 적어 애래서 계속 여기서는 이 강단에서는 새벽마다 이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온유함으로 들으라" 내가 이 도를 들으라 실행하라는 말은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는 그 말을 그 마음에 심긴 것을 들어서 심기지고 읽어서 심기지고 받는 것을 자기가 실천으로 받으진다 말이요. 실천의 이 도가 제도 된다 말입니다. 이 도가 제도 된다는 말은 제가 이 도의 것이 되어진다는 그 말이요. 이 도가 내 도 되는 것은 내가 이 도의 것이 되어지면 이 도는 내가 된다.
이기 성령은 내 성령님이 도고 진리는 내 진리가 되는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이시오 진리는 이제 참 하나님 다음으로 큰 것인데 그것이 내 소유가 됩니까 어데 그것은 내가 당신의 것이 되는 그것을 인간의 말로 알아듣기 쉽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성령을 받으라 그말은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에게 내가 바치지는 자 되어지라 그말입니다.
"온유함으로 받으라" 온유라 말은 아주 부드럽게 걱정없이 기쁘게 단 마음으로 즐겁게 담대히 아주 흐뭇하게 그것을 가르쳐서 온유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실행을 실천을 하려고 할 때에 실천을 하려고 할 때에 내가 참 기쁨으로 실천이 되어지고 단 마음으로 실천이 되고 흐무 마음에 충만하게 흐뭇하게 만족하게 실천이 되어지는 내 마음 자세 내 자체라는 자세 이 심신 구원이기 때문에 영은 별문제 입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의 도,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할 때에 아브라함은 온유함을 받았습니다. 흐뭇하게 받아서 참 감사함으로 받아서 기쁨으로 받아서 이 축복이 어쩐 일입니까 이제 기쁘고 즐거움으로 받았다 이기요. 단마음으로 받았고 아주 그 유효하게 유하게 받았어, 왜 그리 됐느냐 그게 결과라 말이요.
왜 그런 아브라함이 됐느냐 아브라함이 받을 때, 왜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 됐느냐 그런 심령이 됐느냐 어떤 사람 같으면 백세에 난 아들을 잡아 불에 태울려 하니까 바짝 마를 것인데 막 근심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고 이제 죽을 지경인데 이 명령을 받아도 지키기는 지켜야 되고 이거 참 큰 일 났다 해서 그럴 것인데 아브라함은 기쁘고 즐거워서 왜 기쁘고 즐겁노 내 독자 백세 독자를 불에 태워 없애는데, 불에 태워 죽이면 이제 죽은 가운데 다시 살릴 것이고 하나님께 한 번 바치지면은 이삭이 똥덩어리가 금덩어리가 되는 것 보다도 크게 아주 보배롭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밤새도록 기뻐 못견딘다 말이요. 기뻐 못견디요.
그게 뭐요. 온유라 그말이요. 온유함으로 받으라 온유함으로 받을려고 하면 그 온유함으로 받아지느냐, 하나님 나 유익되게 할터이니까 이제 참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참 기쁜 소리다 즐거운 소리다 이 실행할 그 말씀을 실행할수 잇는 현실을 주니까 그 현실이 감사하고 기쁘고 그 실행하는 것이 그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여기려 해도 되집니까 그게 안되진다 그말이요. 졸면 안돼. 잠을 바짝 깨야 돼.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석자를 석자 베를 펴 놓고 땅에다 펴놓고 걸어가라 하면은 아 그게야 석자 베를 펴놓고 걸어가라 하는 그게야 얼마든지 안심하고 뭐 눈감고도 걸어 갈 수 있지 않습니까 어렇지만 그것을 몇 길 위에 이래 바다 위 바다 위 백기 위에 그게다가 그만한 그 쇠뭉텅이를 석자 펴놓았으면 그 흔들립니까 흔들리도 그래도 그 걸어 갈 때에는 밑에 땅에 걸어 갈 때와 다르다.
그 걸어갈때나 내나 석자나 그 석자나 같지마는 그는 어지러워서 떨려서 걸어가지를 못하겠다고 그게 뭐이냐 자기 심령 문제인데 심령문제 꼭 같기는 계산 상으로는 같은데 자기 마음이 그렇게 안되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거 전부 다 조는데 요거 아마 마귀란 놈이 요걸 알면 큰 일이 날 것 때문에 요놈이 모르도록 하는 모양입니다. 자꾸 땅에 붙은 베 석자나 몇 십개 몇 백배 위에 쇠로 강하게 해 놓은 석자 뭐 밑에 땅에서 대어 올랐다 합시다 이것이나 튼튼하기는 같이 튼튼한데 왜 못 걸어가는 그것은 심령 문제라 말이요. 마음에 아무래도 석자는 석자인데 그 다른데 충격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안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어지러워 못 걸어 가겠다 말이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제 하나님이 이 명령을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또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또 하나님이 이 말씀하신 것은 내 힘을 다 기울이며 다 행하도록 해 주시고 이것을 아무리 논리로 제가 한다고 해 가지고도 마음이 온유해 지지 않는다 온유해 지지 않는다.
온유해 지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하나님에게 대해서 그 어느정도 알고 있으며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으며 어느정도 연결이 되어 있나 하는 그것이 말로 되어 있는 것 지식으로 되어 있는 것 실질적으로 되어 있는 것 다르다 다르다. 내가 내 현실에서 내가 받은 도를 지킬려고 하는 그것이 실지로 발표된다. 내가 말로는 하나님이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총 뿌리를 드리 대는데 아 이것도 내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주님이 이렇게 나에게 지금 작용하는 것이니 이것은 사랑하시는 주님이 내가 주를 얼마나 사랑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는가 시험하시는 것으로 구원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다르다 그말이요.
이러니까 내가 이 심긴도를 실행할려고 할 때에 온유가 나오느냐 실행할려고 할 때 그 유하게 되느냐 평안하게 되느냐 기쁘게 되지고 단 마음이 되어지고 소원함이 되어지느냐 그게 지금 열매라 말이요. 온유라, 내가 말했는데 온유는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에 내가 그 열매가 없거든 나무가 없는 줄 알아라 나무를 모르거든 열매를 보아 알아라.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을 나무라면 온유라는 것은 그 열매이니까 내가 하나님이 현실을 자꾸 바꿔 줍니다. 좀 어려운 말들이요. 자기 현실을 하나님이 자꾸 바꿔 준다 말이요. 바궈 주는데 1 학년은 1 학년으로서 도를 지킬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 주고 2학년은 2 학년으로 또 아주 대학생은 대학생으로 예를 들면은 신앙에 이 정도 차이에 따라서 현실을 만들어 준다 그 말이오.
그러면 내가 깨달은 대로의 내 현실을 실천할려고 할 대에 그 온유라는 결과가 있느냐 온유라는 그런 것이 있느냐 온유라는 것이 있으면 너로서의 그 온유가 맺아 질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것이 바로 자라가지고 있기 때문에 되어진 것이고, 온유라는 결과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 됐기 때문에 이거 무슨 말이요. 이해가 됩니까 그걸 찾아서 고쳐라 그것을 찾아서 고치고 온유함이 없다면 그걸 찾아서 고쳐야 되지지 그걸 고치지 안하고 내가 아무리 온유함으로 이제 기쁨으로 받아야지 담대함으로 받아야지, 아무리 해도 땅에 석자 놓은 베쪼가리와 그 수십길 위에 다 같은 가폭 넓은 길이지마는 그 갈 때는 떨리지고 하는 것처럼, 내가 마음으로는 암만 그렇게 온유하게 할려고 해 쌓아도 온유에 지지 아니한다. 온유에 지지 안한다. 온유에 지지 안한다.
아브라함이 아, 하나님 나 속이는 하나님이 아니니까 백세에 아들 어떻게 하라 해도, 또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 넣어 집어 넣는다 해도 불속에다 집어 넣는다 해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입으로는 아무리 말을 하지마는 내게 그 온유해지는 온유해지는 그것이 있느냐 온유해 지느냐 온유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그 원인인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이니까 내 현실 실행할수록 할 때에 온유라는 그 결과가 내게 없거든 내가 온유한자가 되어지지 안하거든 내가 온유한 심령이 되어지지 안하거든 그렇거든 내가 그 뿌럭지인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를 과거에 내가 맺아야 할 그 하나님의 관계를 맺지 안해서 그 공해 가지고 있다.
거짓과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바로 맺어지지 아니했다 이러니까 더듬어서 내가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맺어 지지 안한 것 있으니 내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연구를 하고 또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에 잘못된 그것을 지금 내가 발견해 가지고 그때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을 따라 한 것이고 이래 했는데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믿음으로 살지 안한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과거를 들추라 내가 그 때 과거에 실행을 했으면 벌써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바로 맺아져 가지고 너는 이런 무거운 짐을 지어도 아브라함이 독자로 번제를 드리는 이런 무거운 짐을 지어도 아주 거뿟 거뿟하게 이리지고 가고 사자 구덩이 집어 넣는 것도 거뿟거뿟 지고 가고 불미속에 넣는 일도 아주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는 내가 되어졌는데 실력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졌는데 그것이 너희에게 없으면 이 도를 받아서 온유함으로 실천을 해서 아주 낙관적으로 실행 할 수 없는 기쁨으로 실행 할 수 없는 단 마음으로 실행할 수 없는 참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제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그 기분에서 실천해지고 하는 이것이 온유로 받는다 온유로 실행하는 것인데, 이 온유로 실행할 수 있는 이 온유가 없거든 이것은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과거에 맺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고, 주셨고, 주셔서 과거에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맺아지는 그 믿음 지키는 그 일을 했더라면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과거에 맺아 질 수 있는 그걸 하나님이 기회 기회에 주셨을 때에 맺을 것을 맺아져 있으면 현재에 내가 실천하는 이것도 온유함으로 갈 수 있는데 벌써 과거가 과거가 공허해 가지고 과거가 공허 해 가지고 그런 것이니까 내가 이것을 아무리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실천할라고 해도 안된다. 안되니까 과거를 내가 반성해라 과거를 반성해서 과거에 하나님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되고 진리는 내 것이고 나는 진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내가 많이 놓쳐서 배반해 버린 그것이 있으니까 이제 그것이 지나간 과거니까 실질적으로는 효력이 없지만 그걸 반성하고 반성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분이시며 너는 하나님께 어떻게 했으며 그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가 어떻게 됐으며 하나님과 하나 됐더라면 그 정 반대의 답안이 나왔을 테이니까 어떻게 되었으리라는 그것을 내가 반성해서 찾아 봐라, 찾아 보면 지나간 과거지만 이제 하나님과 너와의 잘못된 그것을 반성해서 하나님과 바로 되고 싶은 욕심이 나고 소원이 나오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확실한 지식이 들어가고 하나님에게 확고한 이것이 자나가서 과거에 나마 이제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이렇게 내가 배반해서 이런 관계를 가지게 되지 못한 이것을 알게 되면 내가 그렇게 해 가지고서 속은 것을 알게 되면 내가 과거에 벌로 날뛰다가 콱쳐 박혀서 코를 깬 그것을 지나가 잊어버리면 모르는데 이제 과거에 내가 코 깬 것을 내가 반성해서 그래서 코 깼다 이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렇게 그 천방지축으로 날뛴 그런 일을 하지 안할 수 있는 조심이 생기지는 것처럼 그게서 지나간 과거에 나마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맺아지는 이것이 현실에서 강하게 맺아질 수 있는 힘이 그게서 나왔다 그게서 나온다 .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맺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이렇게 강한 관계를 맺어야 될 이 소원과 욕심이 강해짐 따라서 이제 온유가 서서히 생겨진다 이것이 강해지면 강해지면은 내가 강해짐으로서 온유에 대한 욕심이 강하게 생기지게 되고 온유에 욕심이 강해짐으로서 어쨌든지 온유를 그 현실에서 통과 하게 된다.
온유에 욕심이 강하니까 속속들이 이게 온유는 되지 못하지만 온유로 이 심긴도를 받을 수 있는.
그러면 이것은 평가적이요 또 요것이 이성적이라 본능적으로는 아니라 이성적이라 온유는 본능적을 말한 것이라. 이것이 비판적이요, 평가적이요 이상적이요 본능적은 아니라 평가적으로 이제 이 도는 꼭해야 되겠다.
또 비판적으로 꼭해야 되겠다 요 이성적으로 이것은 해야 되겠다 이렇지만 본능적으로는 떨립니다. 본능까지는 되지 안합니다. 이러나 요 힘을 가지고 고때에 이 도를 내가 받게 된다. 이 도를 실천하게 된다. 그 실천을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이 네가 본능적으로 되 버린다.
그러면 도를 받아 가지고 자기 현실에서 실행할려고 할 때에 그 자기가 지식적으로 지식적으로 실행을 해야 되겠는데 하는 그게 제일 약한 것입니다.
제일 약한 것이요 그것은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해서는 지나간데 대해서는 지나갈 때 그렇게 할 걸, 과거에는 그게 과거에는 쓰여 집니다. 이래해서 앞으로 이렇게 하지 이렇지만 현실을 당할 대에는 지식이라 하는 것은 힘이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요 구별 못하면 헛일이요. 요 현실 지식적으로 자기가 도를 받아 가지고 있으면 현실에서는 소용없고 그 지식은 항상 그 지식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과거에만 쓰이고 미래에만 쓰이고 과거 후회하는 사람, 앞으로 결심하는 사람, 후회 결심 이거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후회 결심 아무 소용 없소. 후회는 암만해도 소용 없고 가룟 유다는 후회를제일 많이 했습니다. 그 또 결심도 소용 없소, 후회 결심이 소용이 없고 그것이 현실에 그게 이용 되져야 되지지 실천 현실에 되져야 되지는 것이지 과거만으로도 죽은 것이요 미래만으로도 죽은 것이요 그것이 그거 과거 미래 현실에 결합이 되져 가지고 현실 과거보고 그 현실에 스여지고 미래에 그 현실에 그 이루어져야 된다 그말이요.
이런데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안돼 버려지요. 그러기에 지식으로 도가 자기에게 심어져 있는 지식으로 심어져 있는 이것을 이것을 요 지식을 가지고 비판을 해 봅니다. 비판을 어떻게 합니까 비판은 과거를 비판합니다. 과거를 비판하고 미래를 비판합니다. 비판하고 또 가치를 따져서 평가하고 요라면 요기서 이성이 우리 마음에 이성이라는 요소가 강하게 서둘려 재낍니다.
이성이 강하게 서둘러 이성이 강하게 서둘러면 그 때는 뭐 어북 강하게 날 뛰는 욕심이라는 놈도 그게서 꺽어 집니다. 우리 마음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대개는 욕심 그 놈이 지금 왕이 되져 가지고 그놈이 주장을 해 가지고 막 심신을 다 끌고 가기 때문에 죽이고 죽는다 말이요. 요때는 이성적인 사람이 됩니다.
요 이성이 주장을 해 가지고 요리되니까 아무래도 썰면서도 가야 됩니다.
떨면서도 실천을 해야 되고 걱정을 하면서도 실천을 해야되고 막 발발 떨면서 지금 눈물을 흘리면서 실천을 해야 되고 그것은 왜 그러냐 그것은 비판해 봤기 때문에 지식을 가지고 지식이 비판해 봤기 때문에 평가 해봤기 때문에 또 이러다 보니까 이성이 지금 강하게 주장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까 양심이 주장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인제 이성이 주장하니까 양심을 영접안하고 이러니까 마음에 대부분을 현철한 자들은 지금 막 등장이 되어 지금 주장을 한다 말이요.
그러니까 밑에 더러운 그 마음들은 와가지고서 날뛰지만 다 꺽어지고 이래가지고 실천하게 된다. 실천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의 과거를 반성하는 데에서 많은 수입을 가지게 된다. 아 과거에 내 이래 보니까 그 때에 잘못됐다 이래 내가 그 때에 생각대로 그래 했는데 하고 보니까 지금 생각하니까 아주 잘못됐다 이래 가지고서 자기 욕심이 그래서 꺽어지고 과거를 반성하는데에서 자기 주장이 꺽어지고 어떤 옆에 사람이 시키는대로 했더만 그 사람이 시킨 것이 들려졌다 이 모든 자기를 해친 것이 그게서 발견이 되어가지고 이것을 제거 하게 된다 말이요.
이러니까 그게서 비판이 나오지 평가가 나오지 또 비례를 두고서 비판하고 평가하지 또 하나님을 자기가자꾸 생각하고 이러니까 그게서 평가하고 비판하고 생각이 나오지 그러면 이성이 이제 주장이 되지지 이성이 주장이 되지니까 양심이 와 가지고서 또 도와서 주지. 이러니까 그 현실에 실천하게 된다 실천하게 된다.
그러면 이 실천은 온유함으로 실천하는 것입니까 온유함으로 실천입니까 소원 성취가 되는 소원입니까 억지 실천이요. 소원 성취의 실천이요. 이러면 무슨 실천입니까 억지 실천이요 억지 실천 부득이의 실천이요. 억지 실천에 억지 실천인데 온유함으로 받는 것은 억지 실천입니까 기쁨으로 본능 실천입니까 본능 실천이요 이 본능 실천 되는 것이 우리의 정상이라 그 말이요.
본능 실천되는 것이 정상인데 본능 실천은 과거에 하나님과 진리와의 자기와의 관계가 맺아 질 그 순서가 그 순서대로 맺아졌으니 언제든지 우리 걸음은 본능적으로 걸어가는 걸음이라 본능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 드리라 하는 것 같이 다니엘이 그 말을 듣고서 자기 방에 가 가지고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창을 향해 가지고 기도 할 때에 감사함으로 기도 했소. 감사함으로 기도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미속에 집어 넣을려고 하실 때에 그 마음이 굉장히 기쁘고 즐겁고 평안했어 뭐 말하니까 구원해도 좋고구원 안해도 좋고 구원 하실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셨는데 좋게 해 주시는 것이니까 구원해도 상관 없고 아무리 이 우상에는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온유함으로 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된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이라 그 말이요.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러기 때문에 정상인데 그렇게 안되거든 지금 내가 발발 떨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그 내가 되도록 모든 것을 그 기초로 공작해라 그것은 뭐냐 내 과거 미래에 대해서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와 어찌 됐으며 진리하고 너와의 관계가 어찌 되니까 어떤 관계의 결과가 났던가 하는 것을 그것을 내가 생각해 보면 미래를 두고도 몰랐고 현재를 두고도 내가 실수를 했지만 지나가고 난 다음에 그건 내가 마귀가 반성을 못하게 해 가지고 그렇지 지나간 과거는 반성하면 내가 정평 정가가 나온다 이러니까 아이쿠 그놈에게 속았다 속았다 그것은 참 손해라. 그것은 안됐다 이것이 벌써 정상적으로 정평 정가가 될만침 뚜렸하게 확실히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내가 찾아서 가지면 온유함으로 실천은 안되지만 본능적으로 실천을 아니지만 이성 비판적으로 내가 억지라도 실천하게 된다.
발발 떨면서도 실천하게 된다. 내가 참 고통스러운 실천을 하게 된다. 그것을 내가 그시 그시에 온유로 실천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내가 고통하고 실천하나 이것이 십자가의 내 죽는 것인데 이제 내가 이런 고통으로 실천하는 그것을 내가 했으면 이전에 것은 다 이것은 그 다 건설이 되졌고, 이 단계에 너는 본능의 사람이 되졌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요면은 본능적으로 온유함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을 가르쳐 말씀 한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받으라. 온함으로 받는 데에는 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행치 아니하면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논평을 합니다. 이것은 지금 실천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해야 구원이 되지지 실행하지 아니하고 이 도를 내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으로만 내가 가지고 있으면 이 도는 내기에 어떤 역할을 미래에 대해서만 역할을 하고 남에게 대해서만 역할 하지 이러니까 지신을 속이지 말라.
내 심신이 들어서 심신을 속이지 말라. 심신이 들어서 심신을 해하지 말아라. 왜 요걸 알고만 있고 실천을 안하니까 요 도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쓰여지느냐 과거에 대해서 실큰 그 도를 쓰기를 과거에 쓰가지고 아이구 내가 과거에 이런 이런 일을 잘못했다. 후회하면서 눈물 흘리면 자기 할 일 다 한줄 압니다. 네 이 도를 지식으로 안받고 자기가 현실에 실천하는 요기 지금 열쇠를 장만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안하면 요 도는 자기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고 하니 과거에 대한 작용만 합니다.
이러니까 아 과거에 내가 이리이리 했는데 참 그것 잘못됐다 후회한다 기것 후회하는 것 후회하는 그 일 합니다. 또 그것은 미래에 가져 가 가지고서 내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 미래에 대해서 결심하는 그 이제 작용합니다. 그 위에 하는 것은 뭐 작용합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다른 사람을 심판을 하는 작용합니다. 그게서 무엇이 빠졌소, 그 현실이 빠졌습니다. 현실에 실천하는 그것 빼버리면 이것은 전부 과거 후회하는 것으로서 이뤄봤고 자기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 도로 가지고 과거에 내가 이래이래 살았지 하는 그것을 후회 실컷 찾아서 후회를 하면 나는 할 일 다했다 아주 성자의 길을 걸은 것처럼 성녀의 길을 걸은 것처럼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후회는 앞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후회는 소용 없소, 후회는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다. 그것을 현재라는 구멍으로 빼내야 효력이 있지 현재라는 구멍으로 빼내지 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 이런 것인데 이제 과거에 그걸 마귀라는 놈이 자꾸 이 도를 받아 가지고 쓸라 하니까 과거에 써먹으라 합니다. 과거에 쓰니까 아이쿠 후회가 된다. 그 후회를 하는 것으로서 내가 이만큼 후회를 하니 너는 참 의인이다. 너는 성자다 마귀란 놈이 이렇게 그 넘어가가 있다 말이요.
또 남은 도를 가지고 살려고 애를 쓰면 미래에 대해서는 내가 이렇게 살아라 아이쿠 내가 이렇게 결심을 하면은 제가 어북 할 일은 다 한 줄을 압니다. 그것 자기 구원 하고는 아무 소용이 없소 그러고 난 다음에 남은 것은 뭐이냐 하면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판단하는데 그것이요.
이러니까 그게 현실이라는 자기 실천이라는 그게 그게서만 현실이라는 그 공간 그 시간, 그 행사, 그게서만 구원이 되어지는데 그것 하지 못하고 뻥벙 외식으로 벙벙 자라간다 말이요. 요기 외식하는 신자입니다. 요 겉어머리 벙법 잡아 돌리게 돼서 이 도가 결국은 내가 너 죽이게 하는 그것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요렇게 자신을 속인다 누가 속여 마음이 마음을 속이고 몸이 몸을 속여서 말하자면 육이 육을 속여서 육의 성화가 다 절단 나게 된다.
이러니까 그것을 도를 듣기만 하고 실천이라는 그것 떼 버리면 요 세 가지 밖에는 안되기 때문에 내가 요 도를 마음은 너 죽인다 이러기 때문에 이 실천이라는 요거 없으면 이것은 세 군데만 쓰여 지기 때문에 그 어리석게 과거를 다 후회하고 이러니까 자기는 의인이 됐습니다. 미래를 결심했으니 의인이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해 이 도를 논평하니까 의인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결과적으로 자기를 어떠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교만한 사람 되고 말았습니다. 교만한 사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그 심신이 그 심신을 죽였습니다. 심신이 심신을 죽였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라 그러면 자기를 속이지 말아라. 그게 이제 자기가 나옵니다. 자기가 나오는데 와 그러면 자기가 자기를 속일까 자신이 자신을 속여 자신이 자신을 멸망을 시킬까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멸망 안 시킬려고 암만 애써도 안된다. 그것을 알려면 자기를 발견해야 된다. 자기를 발견해야 된다. 거울을 봐야 자기의 용모를 아는 것처럼 아는 것처럼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봐야 안다. 들여다 보는 자는 온전한 율법으로만 자기를 알수 있는데 온전한 율법으로 자기를 아는 것은 도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는, 도를 듣고 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천하는 자니 도를 실천할 때에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실천할 때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다 이 영 자기가 둘이 있다 둘이 있는데 한 놈은 속이는 놈이고 하나는 자기를 바로 살리는 것이다. 자기를 바로 구원하는 자기가 있고 이 심신을 구원하는 자기가 있고 이 심신을 속여서 멸망 시키는 자기가 있다.
그것은 자기 아닌 자기요 또 자기를 구원하는 이것은 참 자기이다. 이런데 이 자기를 이 자기를 알게 되면 자기는 알게 되면은 이놈에게 속아서 도를 외식자로 받지 안하게 된다.
외식자로 받아서 과거에만 써먹고 미래에만 써먹고, 남에게만 써먹고, 이만하면 구원 됐다고 이제 교만한 사람이 되어지고 자기가 요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 뭐이냐 자무식이라 그렇다. 자 무식이라 그렇다. 자꾸 뿌럭지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무식이라 그렇다 자무식이라 그러니까 자무식에서 자유식이 되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유식한 사람이 돼야 된다.
자기에게 유식한 사람이 될려면 어떻게 되는가 속이는 자기가 있고, 자기를 살리는 자기가 있으니까 살리는 자는 영접해야 되고 속이는 자는 이것은 이제 그 원수를 삼아서 배반하게 해야 되는데 속이는 자인지 살리는 자인지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자기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속이는 친구를 속이는 친구를 알라면 속이는 친구를 알라면 속이는 친구에게 들어 붙어 있어야 압니까? 속이는 친구를 배반해야 압니까? 이 목사님 대답좀 해 보십시오. 자기를 속이는 그 친구 그 친구를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친구라는 그 친구로 알라면 속이는 친구에게 지금 그 계속 소고 이 그가 붙어 가지고 속고 있어야 그 친구를 속이는 친구인줄 압니까? 속고 있는 그게서 쑥 떨어져 나와야 인제 속이는 친구인줄 압니까? 떨어져 나와야지 아 이것 아들 많이 있소, 깡패 동무, 깡패 동무에게 그 계속 속고 있을 때에는 뭐이냐 그 친구가 제일 입니다. 하 좋은 친구가 아주 좋습니다. 이제 그게서 속이는 데에서 속지 안하고 속이는 데에서 배반하고 뚝 떨어져 나오고 난 다음에야 속이는 친구를 알게 됩니다. 현실에서 실천하라 하는 그 실천만 시키는 대로 실천만 하면 그것이 이제까지 속이는 그 자기 아닌 자기의 원수인 심신이 움직이셨는데 주님이 시키시는 것은 그 자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말고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현실에서 한 번 움직이게 되면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자기 아닌 자기를 배반하는 것이요 그놈을 떨어져 나오는 것이라.
그게 떨어져 나오는 것이라.
그러면 떨어져 나오고 나면은 그 놈을 하라, 또 그러면 그때 시키는 대로 한 그것이 뭐냐 참 자기를 바로 지도하는 그 사람을 아는 데에는 그 이 말을 들어봐야 압니까 들어보지 안하고 멀리 떨어져야 압니까? 자기를 바로 지도하는 그 지도자는 떨어져 봐야 압니까? 이제 지도를 받아봐야 압니까? 지도를 받아 봐야 압니다. 이 새사람은 붙어봐야 압니다. 옛사람은 떨어져 봐야 압니다. 이러기에 현실에서 주의 말씀대로 실천한 이것은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는 떨어지게 하는 역사요 참 자기와는 붙게 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인간이 실천으로서만 자기 속에 두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실천 외에 아는 길이 없다 요걸 내가 알아야 내가 온유함으로 받을 수가 있고 내가 자신을 속이지 안하는 이 놈이 나 속이는 놈이다. 심신 너를 속이는 내가 있고 심신 너를 살리는 내가 있는데 내가 모르기 때문에 심신 내가 아무리 안속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항상 그놈에게 끌려가서 속게 된다 그러게 되는 데에는 요 실천으로만 그것 알게 된다. 그것을 말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요렇게 자유케하는 온전한 율법이라. 요 실천한 이것이 해방 받을 자에게서 해방을 받고 소원대로 살수 있는 소원 성취가 되게 하는 것이요.
현실 실천 요기서 되져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요법을 온전한 율법이다. 온전한 유럽이라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은 그 하나님이 너를 시키는 그 위치 법이라 말은 위치를 말하는데 그 위치가 자체가 완전하다. 자체가 완전하다. 그 위치가 영원무궁토록 정죄 받지 안할 위치다. 완전한 위치다 둘이 없는 유일한 진리다. 위치다. 자체가 완전하다.
그러기에 완전하다 배경이 완전하다. 배경이 뭐인데 배경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그 배경이 완전하다. 배경이 뭐인데 배경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그 배경이다.
배경이 완전하다.
또 왜 완전한 율법이냐? 그것이 적용 될 때에 적용이 될 때에 효력이 완전하다.
그 효력이 완전하다. 그러면 그리되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너와 모든 사물과의 완전한 결합을 가져서 하나님은 너희에게 기쁨이 되어지고 하나님은 너는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어지고 만물들에게는 소원이 되어지고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되고 모든 만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존재가 되어지는 요런 효과가 좋다 결과가 좋다 이러기 때문에 이 온전한 율법이다.
이러기에 이 사람이 현실에 실천한 그 일에 복을 받는다. 복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 받는다는 말이요. 진리 받는 다는 말이요. 만물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만물과의 관계가 올바른 관계가 맺아 진다. 하는 것을 위에서부터 쭉 계속 해서 이제 그 근거는 그것이다. 그것에 근거는 그것이다.
그서에 근거는 그것이다. 이래서 위에서 이것만 원하고 해 가지고 안된다. 그 뿌럭지이기 때문에 뿌럭지에게 가서 내가 그 노력을 해라 또 그것을 그 뿌럭지에 있다. 그 뿌럭지 그 뿌럭지 그런 것이 그 뿌럭지에 와 가지고 노력을 해야 이것이 건설이 되어진다. 하는 것을 말씀 한 것입니다.
이러기에 하나 건물을 지을려고 하면 번들번들 색칠해 놓지 하나도 색칠하고 해야겠다. 그게 아니고 그라는 데에는 그 건물이 되지고 건물이 되어질려고 하는 데에는 또 터가 있어야 되고 터가 있어지면 재료가 있어야 되고 이렇게 근거가 있지 안으냐 그렇게 근거적으로 체계적으로 내가 모든 신앙 생활을 해야 되지지, 그런데 내가 신앙 생활을 정상은 어떤 현실이 너에게 부딪혔다 할지라도 내 현실은 내가 본능적으로 기쁘고 즐거움으로 사람이 불에 들어가는 것은 힘이 들고 불에 들어가는 것은 참 힘이 들고 불에서 나오는 것은 본능이고 불에 안드가는 것은 힘이 들고 부레 들어가는 것은 아주 죽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이것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되어지는 것이 이기 바로 정상적으로 되어지는 것인데 이렇게 되어지지, 온유함으로 되어지는 이것인데 이것이 정상인데 이렇게 안 된 것은 과거에 내가 걸을 걸음을 걷지 안해서 한 자욱씩 걸어갔더라면 지금 또 자욱만 뛰 놓으면 될터인데 과거에 내가 걸을 걸음을 걷지 안해서 한 자욱씩 걸어 갔더라면 지금 또 자욱만 뛰 놓으면 될터인데 과거에 내가 실천하지 아니함으로써 여러 수십 발을 걷지 안했기 때문에 지금 날라 나올까 그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거리 먼 것이 되어 졌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지나간 과거지만 그것을 반성하고 반성하고 그래 가지고서 이제 너희에게 있는 지식이 비판이 되어지고 그 비판이 평가가 되어지고 그 평가가 이제 이성이 내 마음에 주장이 되어지면 내가 행할 때에 온유함으로는 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내가 행할 때에 온유함으로는 하지 못하고 말하지만 본능적으로는 하지 못하게 되어지지만 내가 울면서 떨면서라도 안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져서 내가 현실을 실천하게 되면 이제까지 걷지 못한 그 단계는 뛰어 올라 와 가지고서 이제부터는 내가 온유함으로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진다 하는 것을 가르쳐서 말씀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를 이것을 기루기 위해서 저 아주 낮은데서부터 쉬운 것을 자주 줍니다. 쉬운 순서를 줘 가지고서 쉬운 순서로 차차차차 커 가지고 어려운 순서에 도달하도록 이것을 몇 번이나 제 연습 제 연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데 충성하는 것이 지극히 큰데도 충성한다는 그 말은 지극히 작은 것이 현실을 닥칠 때 이것을 놓치지 안하면 지극히 큰 것도 내나 지극히 작은 것이나 꼭 같은 힘으로 할 수 있다. 왜 내가 자라가기 때문에 자라간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점점 맺아져 가기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에 신앙 생활은 이제 명상에서 나옵니다. 눈 감고 또 무슨 일을 하면서도 항상 생명은 주님과 관계를 자기고서 되지는 거이지 덩풍덜풍 날뛰는 사람은 껍데기 신앙생활은 알찬 신앙생활은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 항상 기도하라 하는 항상 기도한다는 말이 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요. 동행이라 말은 항상 기도해라. 동행이라는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과 합작된 이것이 늘 계속해서 그 이 역사가 계속해 있어야 신앙 생활이 되지는 것이지 그만 보이는 것만 가지고서 날뛰는 사람들은 안돼.
그러기 때문에 외나 신앙 사람들은 신앙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하는 일이 하나님이 같이 하는 것 같지도 안하고 안하는, 같지도 안하고 하나님이 꼭 복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뭐 덜컥 그런 일이 없소. 그렇게 할 수가 없이 그런데 그 일이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돼지고 하나님께서 복을, 아 복 왔다. 이기 아닙니다.
오는 줄 모르게 가는 줄 모르게 오는 봄, 가는 줄 모르게 가는 봄, 오는 줄 모르게 오는 여름, 가는 줄 모르게 가는 여름 이렇게 하나님이 그 하시는 것은 모든 면으로 전면으로 이래 되 놓으니까 그것이 외부에 그렇게 그 경봉하도록 되지지 안한다 말이요.
항상 기도하고 믿는 사람은 항상 그 하나님과 동행이라 항상 기도하고 그렇게 돼 하나가 되 그러니까 늘 한편으로 하나님이 그러니까 마음이 눌리진다 말이요.
바울이 그것을 가르쳐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다 마음이 눌리진다.
사람은 참 일리 일리 신앙 걸음은 일리 일리요 일리 일리 그 껍데기가 기쁠 때는 속이 근심이고 속이 기쁠 때는 껍데기가 근심이고 이 근심 그 기쁨이 둘이 합작되 나갈 때 이기 똑 떨어져 기쁨이 기쁨만 있을 때는 없다 그말이요. 건설로 기뻐질 때는 하나님과 새로운 공백이니까 거기서는 항상 그 또 근심이 된다 그 말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이 돌아갑시다.
그러기에 깨어 있어야 돼. 깨어 있지 안하면 안돼요. 신앙 생활은 깨어 있지 안하면 안됩니다. 넉넉넉넉나간 사람은 보니까 이제 어떤 사람이 나한테 묻기를 대학생 선교회라는 그것이 뭐이 나쁩니까 이래 묻는데 그 나쁘다는 걸 어떻게 말하겠소. 말해야 세상이 다 모르는 것인데 세상이 다 부인하는 것인데 그것을 나쁘다고 지적하면 시비당할 것이고 시비를 당하면 똑 떨어져 나갈텐데 어떻게 말하겠소. 그래 나는 대학생 그 선교회 그것을 우리 서부교회 있는 학생 동참 시키기를 싫어합니다. 동참을 못하게 합니다. 왜 뭐이 틀렸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내가 그게 가서 내가 새로워 지거들랑 그리 가거라.
그게 가서 네가 새로워 지지 안하고 네 옛사람 새사람을 구별해 가지고 새사람이 새로워지지 안하고 옛사람 땅에 속한 사람이 새로워 지면은 그것이 좋지 못한 것인 줄 알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새로워 지거들랑 내가 좋고 좋은 줄 알고 따라 가라. 그것으로 보나 내가 구별할 까 그것을 어떻게 내가 지적해 말 할 수 없다.
한 것처럼 어떻게 하나님의 도는 이렇다. 그러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됩니다.
깨지 안하면 안돼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