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적인 사람이 되자

 

1981. 5. 22. 새벽 (금)

 

본문:창세기 9장 1절∼7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노아가 홍수 심판을 겪은 후 처음 행사가 번제였습니다.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인류에 대한 마음과 모든 동물이나 곤충에 대한 마음이  달라졌고 심지어 식물과 땅에 대해서도 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땅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시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자비 베푸실 것을  선포하셨고, 생명 있는 것을 멸절시키는 잔인한 일을 하지 아니하시고 긍휼을  베푸실 것을 말씀하셨고, 식물에 대해서도 심고 가꾸는 일이 계속되리라고  하셨고, 춘하추동 사시와 주야가 계속되도록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노아에게는 땅의 모든 것을 기업으로 주시고 모든 것들이 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지배를 받도록 너희 손에 붙여주겠다 하시고 이런 것들을 다 너희  소용대로 쓰도록 주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노아는 천하 인류가 전멸 당하는 가운데 혼자 구원  얻었으니까 별별 인품의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일류 학교에 입학  시험을 치러서 합격되면 아주 우쭐해지고 또 수석 입학이라도 하면 더  우쭐해집니다.

하물며 전 인류가 전멸한 가운데 노아 여덟 식구만 남았으니까 우쭐해지기도  쉽겠고, 또 공포에 떨리기도 쉽겠고, 또 고독에 파묻히기도 쉽겠고, 별별 공상이  얼마든지 침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귀는 홍수에 죽지 않았으니까 천하에 마귀가 노아 한 사람, 노아 여덟  식구에게 마구 집중했을 것이니까 수없는 종류의 유혹이 노아에게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노아가 수많은 유혹에 빠져서 우쭐해지든지, 어떤 망상을 하든지,  허영을 가지든지, 허욕을 가지든지, 가족을 생각하든지 이런 일을 먼저 했더라면  하나님은 근심하고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이상 없는 충만한 축복을  아낌없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방주에 나온 후 첫 행위가 번제를 드린 일입니다. 방주를 모을  때나 홍수 가운데 방주 안에서 그의 관심 전부는 하나님에게 기울어졌던 것처럼  홍수 후에도 하나님에게 대한 관심과 성의와 열심과 행동이 변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이 만족하셨고 노아의 번제로 인해서 하나님이 크게 감동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할 것을 말씀하실 때에 조카 롯의 악한  것을 기억하고 섭섭해서 속으로 ‘롯이 자기 좋은 대로 좋은 곳을 택해서 가더니  잘됐다. 그렇게 괘씸한 짓을 하더니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 이런 복수의  마음을 가졌더라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전적으로 낙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행하는 것을 너에게 숨기겠느냐? 소돔 고모라  성이 이렇게 망할 것이라!’ 할 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 앞에 여섯 번이나 기도했는데 이런 심정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과 기대와 축복이 조금도 요동치 않고  계속이 됐던 것입니다.

물론 롯으로서는 망하는 일이지만 아브라함에게 그 소식을 듣도록 한 것은  구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로서 아브라함은 저주를 마련할 수도 있고  축복을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는 자는 버리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버리는 자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으로, 당신의 기업으로, 당신의 소망으로, 당신의 기쁨으로 삼는 의인에  대해서는 쉴 사이 없이 단속하시고 시험하시고 그 속에 심지를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친근해지면 방종하기 쉽습니다. 결혼의 첫사랑이라고 말하는데  처음 결혼해서 서로 조심하고 어떻게든지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기쁘게 할 때는  그것이 미가 되는데, 얼마 살고 나서 이혼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좀  친근해지니까 방심하고 조심성 없고 상대방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거기에서 오점과 약점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 사이에 용모의 아름다움은 잠깐이지만 사람은 다른 동물이 가지지 못한  아주 세밀하고 쉬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 있는데 이 작용이 붙들면 상대방은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사람도 용모보다는 마음에, 말에, 정신에, 그 행위에 쉬지 않는 교제의  활동성이 마지막에는 그 사람을 점령하는데 하물며 이렇게 세밀하고 다정다감한  인간성을 만드신 하나님이겠습니까?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상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피까지 흘리시고  모든 걸 희생하셨고 영원 전에 우리를 소망으로 두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한  간섭이나 교제나 우리를 알아보려고 시험하는 것을 쉬지 않습니다. 또 우리를  아끼시고 우리에게 대해서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려는 역사도 쉬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계를 거쳐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가진 사람은 다른 것은  볼 시간도 없고, 생각할 시간도 없고, 또 움직일 시간도 없습니다. 또 이분의  은혜를 받으려니까 다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를 못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밀접한 관계를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이래서 노아가 번제를 드린 것은 외부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 자기 전부를  기울인 표시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아가서에 보면 ‘네 목의 구슬 꿰미와 네 눈초리에 내 마음이 다 쏠렸다!’  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나를 생각함으로 네 속에서 나오는 생각이나 욕심이나  감정이나 섭섭하고 분한 것을 꺾어서 네 목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다  제거했고, 또 네 몸 밖에도 남자의 아름다움이나 여자의 아름다움이나 권세나  명예나 지위 영광, 존귀 온갖 것들이 네 눈으로 귀로 들어오는데 그런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다 방어했다. 네 안팎에서 나오는 걸 억제해서 깨끗함을  지키는 거기에 내 마음이 다 빼앗겼다’ 하는 말입니다.

또 ‘네 눈으로 한번 바라봄으로 내 마음을 다 뺏었다.’ 한 것은 ‘네가 모든  것보다 나를 크게 알고, 나의 사랑과 너를 위해서 희생한 희생을 알고, 또  두려움을 알아서 어떤 것보다도 나를 바라보는 그 눈초리에 내 마음을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감정적인 하나님이요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부처와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잘못하면 눈에  보이는 껍데기 섬김의 행동은 있어도 속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격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또 마음으로 정성으로 하면 된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행동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집니다. 지금 새벽 예배 마치면 다 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그것도 마음이 가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격과 마음을 따라서  행동은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결심해도 회개가 잘 안되니까 ‘이제는 내가 이런 일이  있으면 밥을 한끼 굶겠다!’ 해서 그 방편을 써보니까 효력이 조금 납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밥을 두끼를 굶겠다!’ 하고 해보니까 효력은 나는데 그래도  해결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 돈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내 눈도 들었고, 정성도 총명도  마음도 들었고, 피도 기름도 내 전부를 들여서 만든 것인데 이번에도 회개한  것이 변동되면 주님은 피 흘려 나를 구속하셨는데 내가 피는 흘리지 못하더라도  내 피의 대가로 만든 재물을 얼마라도 속죄전으로 돌리겠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낭패가 되지만 하루동안이라도 업을 중단하는 방편을  통해서라도 자기를 하나님과 가까이 만들어서 하나님이 섭섭히 여기시는 것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해도 실감이 없으니까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있을  때에는 입술로만 할 게 아니라 감사 헌금을 표시로 드리겠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 간구할 때는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간구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으로 인해서 유익을 봤으면 그 일에 대한 상당한 대우가 있어야 ‘참 그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로구나!’ 할 것이고, 또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면 벌써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대접하려고 해도 그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므로  ‘이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로구나. 희망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감사도 입술로, 잘못된 것도 입술로, 또 구하는 것도  입술로만 표시하는 그것은 아무런 실감이 없습니다. 내 인격이나 내 정신이나 내  자체가 함께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는 실상은 없고 껍데기뿐입니다.

그래서 이 면에 대해서 애를 쓰는 가운데 재건교회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  복 받아야 된다!’ 하는 것이 그분들의 표어입니다. 그런데 복 받는 것이  세상적이고 육적이지 신령한 세계는 좀 어둡게 발견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위주로 해서 복을 받으려고 밥상에 앉으면 젓가락으로  먼저 십일조를 떼어놓습니다. 빈 그릇을 옆에 놓고 십일조로 이것 저것 전부  떼는데 그것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뒤에 버리더라도 그렇게 합니다. 식당에  가서도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좀 광신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그분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아주 밀접하게  가졌습니다. 왜정 말년에 하나님과 가까운 실지의 효력,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런 실감의 효력의 믿음을 재건교회 교인들이 제일 많이 가졌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감옥에 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분들을 따라간 사람들이  없습니다. 한상동목사님 주남선목사님 같은 분들도 못 따라갔습니다. 그분들은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었습니다.

동방요배는 죄인데 제가 어느 교회에 예배 보러 가니까 그 교회 교역자가 예배  시작 전에 교인들을 세워 놓고 ‘지금 시국이 이렇고 이런데, 일본 천황은 산  사람이고 우상이 아니니까 그쪽을 향해서 먼저 절하고 예배드리겠으니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고 동방요배를 하기 때문에 내 생각에 ‘신이  아니니까 먼 곳에서 절하는 걸 알지 못하는데, 성경에는 마주 보고 절하는 것만  허락했지 그건 성경이 아니라!’ 해서 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예배당에서 자리에 앉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동방요배를  안 했습니다. 재건교회도 동방요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랑이가 많았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고신에서도 밝히지 않았는데 동방요배는 죄입니다. 그때에  재건교회 교인들만 이겼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죄 되지 않는 한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이 실감이 되고 믿어지도록 해야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싸우다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로 도망가서 품안에 안기면 부모의  보호가 인식되니까 힘센 친구에게 ‘때려봐라, 때려봐라!’ 하고 조롱합니다.

왜? 어머니 품안에 안겼기 때문에 그렇다 말입니다.

그 아이가 어려도 그런 인식을 하는데 우리도 전능의 하나님의 보호가 인식이  되고 믿어져야 하지만 실지로는 안 된다 말입니다. 안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믿는 일을 말과 마음으로만 했지 실질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주일학교 반사를 하면 사람이 변화가 됩니다. 또 믿는 사람이 연보를  하면 변화가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전도 안 하고 연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권찰님들은 통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 신앙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가 되면 절단납니다. 뿌리 없는 화초와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잘하면 보통의 시험은 통과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속에 성경 진리의  깨달음이 생명이 되고, 인격이 되고, 그의 지식의 주체가 된 사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최고는 속에 든 진리가 주장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자기 심신이  실감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이 귀합니다. 이런데 우리는 진리는  배웠지만 말과 마음뿐이지 중간이 없습니다. 중간에 이 실감되는 역사가 없어요.

이래서 어제 아침에 증거한 것처럼 구약시대 사람들은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없었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외식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마음, 뜻, 성품, 인격을  기울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신약교회는 또 무엇이냐 하면 껍데기 종교 의식은 고조하고  강조해서 말과 마음은 되어 있는데 중간에 실감을 가지는 실지의 행위가  없습니다. 마귀라는 놈이 여기에 빠지게 했습니다. 구약은 알맹이를 빼서  죽였고, 신약에는 이 알맹이와 껍데기에 속에 실행을 빼서 죽이고 있습니다. 이  역사를 마귀가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무슨 짓을 하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편을 성경에 위반되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어서라도 실감있게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해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서부교회 왔을 때 여(女) 권찰님들에게 시간표를 만들어 줘서 그대로  생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중단되고 말았는데  시간표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편이 됩니다.

자기가 너무 무절제하니까 몇시부터는 어떤 일을 하고, 또 몇시에는 어떤 일을  하겠다고 생각해서 넉넉히 감당할 시간을 잡아 가지고 작정해도 그날 밤에  시간표대로 된 것은 동그라미를 치고, 안 된 것은 세모로, 못한 것은 그어버리고  이렇게 해보면 자기가 정한 시간표와 생활이 일치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단속해보면 자기는 하루도 일관되지 못한 사람, 한 시간도 살지  못한 사람,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줄에다가 매어서라도 자기를 조절하고 방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을 오래 동안  연습해서 가지도록 해봅시다.

어쨌든지 스스로 단속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실감으로 느껴서 하나님이 섭섭히 여기는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당신을 대적하는 일은 사람이 주먹을 내미는 것처럼 하나님의 두려우심이  느껴져서 그 일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시는 것이 실지로  믿어지고 느껴져서 든든해지는 실감과 실효가 생기는 이런 산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디서든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자꾸 생각해서 실질적으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오히려 물질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물질로는 도와줘도 ‘내가 너를 돕겠다!’는 말을 못하는 것은 말이  돈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입니다. 또 말보다도 자기 마음이 더 무거우니까  마음으로 작정한 것은 말로 약속하는 것보다 더 변동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한 말은 계약서로 쓴 것보다 더 강하게 되는 실질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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