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1988. 10. 14. 새벽(금)

 

본문: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성경을 속담에 수박 겉 핥는 거와 같다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수박 뭐 겉을 암만 핥아봐야 그 맛이 나옵니까? 수박을 쪼개서 속에 있는 그 물을 맛봐야 맛이 나오지.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이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 가지고는 점점 사람이 못쓰는 사람이 돼집니다. 왜? 세상에는 말들이 많은데, 말들이 많다 말은 책들이 많다는 말과 같습니다. 말을 기록한 책들이 많은데 그 말들을 그저 이렇게 음이나 듣고 그렇게 자기 감정으로 감상이나 하는 이런 정도로 모든 인간 말을 생각하는 것은 거게 대해서 권태나 그 부정을 가질 수 없고 만족하지마는 그 사람이 실지로 그 말대로 살라고 하면 살아보면 다 틀리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다 부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세상 이 지식에 속고 사는 사람들은 그 속는 것이 발각되기까지는 항상 거게서 허덕거리면서 그저 소망을 가지고 인정을 하고 그렇게 속아 갑니다. 그러나 진실된 사람은 그대로 자기가 실행하여 살라고 애를 써 보면은 그 속에 알맹이가 없는 허무한 거짓부리라 하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다 마지막에 세상은 다 속는 세상이요 속이는 세상이요 허무하고 거짓된 세상이라 이렇게 생각하고서 모든 세상에는 이 무책임한 모든 꾀우는 궤휼의 말들이라, 모든 궤휼의 말들이라, 다 기만의 말들이라 이렇게 결론을 지우기 때문에 세상은 다 허무하고 거짓되다 이렇게만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껍데기로 줄줄 사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속는 중에 있기 때문에 거게서 만족을 하고 있으나 속는 것이 끝장이 난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 다 허무하다는 그 결론을 내리고서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세상에서는 이거 모두 다 거짓말들이지 한 말도 책임진 말이 없다. 불교도 그렇고 유교도 그렇고 다른 이종교들도 그렇고 모든 사상가들도 다 그것을 참 진실되게 살아본 사람들은 다 이것은 다 거짓말이요 허무다 이렇게 다 결론을 지우도록 그렇게 거짓말이요 다 속이는 말이요 속아서 하는 말이요 속아 가지고서 가르치는 말이오.

누구한테 속았어? 누구한테 속았습니까? 누구한테 속았소? 마귀 그놈에게 속아 가지고 전부 다 인간들은 다 속힌 인간들이라 그말이오. 석가모니도 속혔고 공자도 속혔고 소크라테스도 속혔고 전부 그놈한테 다 속혀 가지고 지금 사는 생활이라.

이러기 때문에 좀 양심가들은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이게 다 허무하다, 그중에 제일 좀 정직하다고 보는 것은 유교 도덕주의가 제일 정직하다고 보는데 도덕주의도 가다가서 나중에 가서 그 결론에 가 가지고서 이는 참 허무하기 때문에 그저 사람이 이렇게 추측 추론하는 것뿐이지 여기 정확한 거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것이 도덕가의 양심입니다.

그러나, 이 석가모니라든지 다른 이종교들은 자기네들이 처음에 말할 때는 이것은 모른다, 이것은 미래에 영원에 대해서는 뭐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을 했으나 그 뒤 사람들이 이거 거짓말쟁이들이 나서 가지고 자꾸 그것을 보강을 해 가지고서, 이거 나는 그럴 것 같은데 모르겠다 하는 것을 그다음 사람은 그렇다 이래 가지고서, 양심가는 추측 추론으로 하고서 확정을 짓지 못한 그런 것을 뒤에 비양심가들이 그것을 확정 이렇게 지워 가지고서 확인 확정을 지워 가지고서 그래 모두 다 기록해서 나가기 때문에 세상 모든 종교는 전부 진화적입니다. 진화.

진화라 말은 나아갈 진자 변화할 화자인데 앞으로 자꾸 전진해 나가고 변화해 나가서 그것이 하나가 둘되고 둘이 셋되고 자꾸 이렇게 점점 사람들이 생각하고 연구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진화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계시의 도인데 하나님이 하나 계시해 줘 가지고 그거 알게 되면은 그다음에 둘을 계시해서 알려 주고 그 다음에 셋 알려 주고 이래서 점점 하나님의, 하나님이 완전을 가지고 계시는 그 완전을 하나씩 둘씩 알려 줌으로써 하나씩 둘씩 받아 가지고서 아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그 무한이며 완전이 있는데 그 완전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 하나 주시고 그거 감당하면 그다음에 둘 주시고 셋 주시고 이러니까 무한히 있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고 열어 주신다 이렇고 세상에서는 하나 가지고서 하나에서 또 자꾸 생각하니까 둘이 되고 생각해서 또 서이 되고 이래 해서 자꾸 하나에서 둘 둘에서 서이 자꾸 이렇게 많아지고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뭐이냐? 사람의 생각을 자꾸 마귀 그놈이 생각을 줘서 자꾸 자기 주관으로 생각하고 생각해 가지고서 점점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마귀가 거짓부리를 줘서 자꾸 이것이 많아지고 더 충족해지고 하나님께서는 참을 당신이 주셔서 온전해지고 이렇게 참돼지고 거룩해지고 이렇게 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독교가 아는 방편은 뭘로써 아는 방편이냐? 기독교가 아는 방편은 하나 알고 그다음에 하나 아는 그대로 실행을 할 때에 거게서 실행을 통해서 또 둘을 알게 되고 둘을 알고 나서 그다음에 둘을 실행하면은 그 실행을 통해서 알게 되고 하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실행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기독교요, 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실행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자기 감정으로써 생각해 봐서 알게 되고 또 거게 대해서 자꾸 이렇게 연구해서 알게 되고 하는 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자기가 예를 들어서 비유컨데 여기 음식이 있으니까 이거 먹으면은 네가 쓰다 이라는데 그럴 때에 쓰다 하는 것을 그것을 먹어보니까 쓴 것을 아는 것이 기독교요, 또 이종교들은 여게 쓰다 하는데 그것을 먹어보면은, 먹어보면은 쓰다 하더니마는 쓰지 안하고 달다 이렇게 해서 먹어보면 그게 자꾸 달라지지마는서도 먹어보지 안하고 그것을 자꾸 생각만 해 보고 지식으로써 자꾸 생각만 해 보고 자기가 또 감상해 보고 자꾸 이라니까 그게 자꾸 더 보태지고 많아지고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실행으로만 알아지지 실행 외에 딴길로는 알아지는 길이 없고 이종교는 실행보다도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자꾸 이렇게 눈감고 명상함으로 알아지는 그것이 이종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종교는 자꾸, 예를 들면 하나 철학이든지 이런 모든 뭐 이종교 그뭐 불교든지 그런 것은 자꾸 세상을 떠나서 감상으로 들어갑니다. 자기가 자꾸 이래 생각으로 들어가고 이래 들어가기 때문에 그거는 차차 차차 은둔주의로 들어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은 산중에 짓고 자꾸 산골로 들어가는 것이오. 그러나 기독교는 산골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이 시장판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시장판으로 자꾸 가는 것입니다. 시장판으로 가서 봄으로써 자기가 시장에서 살아보고 행해봄으로써 알아지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종교나 철학이나 그런 것은 다 염세주의에서 자꾸 나옵니다.

세상을 떠나는 데서 자꾸 나오게 되고 기독교는 세상살이를 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왜? 그것은 기독교는 실행에서 알아지게 되고 모든 이종교나 다른 철학이나 그런 것은 자기 생각에서 자꾸 생각함으로 나오게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지식은 자기가 자꾸 생각하는 데서 나와서 자기에게서 자꾸 돋아서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자기에서 돋아 자라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 주시면 하나 받아서 많아지고 둘 주시면 둘 받아 많아지고 자꾸 받아서 가짐으로써 점점 많아지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요 또 이 세상 모든 지식은 자기의 주관의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내 말에 거하면'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말입니다.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변화를 받고, 말씀으로 사는 가운데에서 변화를 받고, ‘참 내 제자가 되고’ 네가 변화를 받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배우게 되고, ‘진리를 알지니’ 그라고 난 다음에 아는 진리, 그러면 진리를 알고 실행 후에 또 진리를 알아. 그러면 자기가 진리를 듣고 순종을 해 보니까 그게 참 진리라 하는 게 더 알게 되고 더 확실히 믿어지게 되고 확실히 인정이 된다 말이오.

‘그러면 그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다시는 그 진리대로 살지 그 진리를 밖에 그거 하나밖에는 잡지로 증거되는 게 없는데 문서 증거는 그거 하나뿐이었는데 포기를 해 버렸어. 포기해서 너무 내가 안타까와서 그것을 단독 우리 서부교회서 돈을 대 가지고서 파수군 잡지를 계속했었습니다. 계속했어. 계속을 이래 했는데, 그분이라.

그분하고 둘이 가 가지고 ○○○목사님을 만났어. 만나 가지고서 내가 깨달아진 것을 말하면서 이렇고 이라니까 이라면 안 됩니다. 이라면 탈선되고 이라면 그렇고 자꾸 이걸 말하니까 그 사람이 있다가서 그냥 그만 대통 옳다 바르다 나가면 좋지마는서도 이리이리 까다롭게 요라면 요래 삐뚤어지고 조라면 조래 삐뚤어지고 요러니까 요래 가야 된다 하니까 그 사람이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 그래서 내가 그 자리에서 했어. ‘나는 ○○○목사님하고는 내가 같이 가지를 못하겠습니다. 왜 그러냐? ○○○목사님 하나 데리고 갈라 하면 내가 진리를 많이 양보하고 막 꾸불뜨리고 이래 참 도매금으로 막 이래 나가야 되기 때문에 내가 그래 가지고 내가 나가지를 못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내가 선포를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나는 같이 가지 못할 터이니까 나는 내대로 갈 터이니까 혹 긍정이 되면 따라오고 그리 아니면 마십시오.’ 그래 가지고 그 자리에서 말하기를, 사람 하나라도 데리고 갈라 하면은 거게 종이 얼마나 되고 얼마나 진리를 양보해야 될란지 몰라요. 그래서 그만 하나님 한 분에게만 따라가고, 그분만 따라가면은 뒤에 다른 사람들이 옳으면 따라올 것이고 말 것이고 이렇지 그 사람 하나 데리고 갈라 하면 뭐 얼마나 진리를 양보하고 타협을 해야 돼. 서로 흥정을 해야 된다 말이오.

이러기에 흥정 안 할라 하면은 안 돼.

그러기 때문에 과거에 개혁할 때는 타협주의가 바로 이것이 범죄라 이랬는데 요새는 타협 없으면 비진리요 타협 안 하면 이단입니다. 타협을 해야지. 자꾸 타협을 해서 흥정을 해서 흥정하는 것이 늘어 가지고서 성경 번역이라면 이거 중요한 것인데 성경 번역도 흥정이 됐어. 성경 번역은 무슨 흥정이 됐어? 어떤 흥정이 됐어? 성경 번역은 어떤 흥정이 됐어? 성경 번역은 어떤 흥정이 됐어? 저 목사님 한번 내가 물어 볼까? 뭐 많이 조는 것 같은데. 이거 모르면, 이거 모르면 갈래길에 다 갈래길로 빠져서 다 헛일되고 말아요. 어데까지 갔더란대도 그만 탈선되면 그만 아니요? 타협은 무엇이 이제 성경 타협이 됐느냐 하면은 번역을 하는 데는 개혁교 번역과 구교 천주교 번역과 둘이 서로 이걸 타협을 하자 해서 그걸 반대한 사람이 없고 ‘뭐 천주교나 개혁교나 다 예수교는 예수교지’ 하고서 성경 번역을 타협을 해 가지고서 이제는 공동번역이라 하는 것이 천주교하고 개혁교하고, 개혁을 천주교와 개혁교는 생명을 내놓고 지금 한 그것이 그때 여러 수십만 명이 옳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면서 개혁을 해도 개혁을 못 하고 있다가서 마지막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종자가 없을 때에 루터가 하나 들어 가지고서 생명 내놓고 깨닫고 개혁했다 말이오. 루터가 개혁한 것은 믿음을 가지고 개혁했기 때문에 그들이 반대하는 어떤 세력이 있어도 요동치 안하고 담대히 나가 가지고서 비로소 개혁은 루터가 했습니다.

루터가 했고 칼빈은 개혁자가 아니라. 루터가 개혁을 했고 칼빈은 정리자라.

그다음에 모든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다가 죽임을 받았는데 죽임 받으면서 종이쪼가리 이래 하나 두고 가고 여게 저게 찢어져 있는 그런 것을 주 집합해 가지고서 편집자가 칼빈입니다. 편집자, 자기가 깨달은 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깨달음을 주 모아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서 기독교 강요라는 그걸 세 권을 내고 이렇게 그게 처음 책인데 그래 가지고서 편집인이라.

이래서, 모두가 다 타협이라. 요새는 타협을 안 하면 이거는 다 이단입니다. 이래서 성경에는 말하기를 화평함과, 또?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랬는데,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랬는데 이제 화평뿐이지 거룩을 말하면 그만 그거는 정죄로 이단으로 몹니다.

양성원 학생들, 그런 것을 들어야 돼요. 겨우 물에서 구원 얻은 사람이 노아의 여덟 식구라 했는데 그 구원을, 그 구원을 기본구원,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구원으로 봐야 되느냐 행위구원으로 봐야 되느냐 그게 문제라. 행위구원으로 보면 그거 가지고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니다 이래 돼지고 그것이 기본구원으로 보면은 지옥 가고 천국 가는 거라.

그러기 때문에, 행위구원이냐 기본구원이냐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거는 말하지 안할 수 없어. 말하면 욕 얻어먹을 줄 알지마는서도 기본구원 건설구원 하는 이것을 말을 한다 말이오. 그러면 기본구원 건설구원을 뭐 이단이라고 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요. 얼마나 했지마는서도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뭐 온 세계 신학자들이 다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그렇게 그것을 구별해서 쪼갠다 하는 것을 욕을 해도 그분들은 요 문제에 대해서는 영원히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찬양을 해야 될 것이오. 왜? 그거는 그분들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더 받아 가지고서 하나님이 나를 더 썼기 때문에.

그런고로, 그러면 그것이 물에서 구원얻은 사람이 겨우 여덟 식구뿐이라 하는 그 구원이 기본구원, 기본구원 천국 가는 구원인지 지옥 가는 구원 그 구원인지? 천국 가기는 가는데 그 영광의 구원, 영광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가기는 가지마는서도 영광 없는 사람이 있고 영광 있는 사람이 있고 있으니까 영광에 대한 구원을 말한 것인지, 행위구원, 건설구원, 영광구원을 말하는 것인지 기본구원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을 구별하지 안하면은 헛일이라 그말이오.

그래 그것을 학자들은 그것을 전부 영원한 멸망 구원이라 이래. 영원히 멸망이라.

그거는 지옥 가고 그거는 완전히 멸망했다. 완전히 멸망하고 그거는 천국은 못 가는, 그때 노아 여덟 식구 외에는 다 지옥 갔고 나머지기 사람들은 다 멸망을 받는다.

그라면 또 그때 성경 아는 사람이 말하기를 거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노아의 여덟 식구입니까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사람들이 있습니까? 저 ○○○교회 ○조사님, 하나님의 아들들 하는 것은 노아의 여덟 식구를 말한 것인가 다른 사람을 말한 것인가? 다른 사람을 말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지옥 간 사람이라 이렇게 제가 결정을 지워야 된다 그말이오.

결정을 지워야 되는데, 또 성경에 디모데서에나 에베소서에 보면은 이 구원은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을 작정하시고서 구원을 주신 것인데 이거는 행위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다 이랬다 말이오. 행위로 말미암아 되는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해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 행함으로 말미암지 안하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렇게 말을 했다 말이오. 또 우리를 벌써 영원 전 택한 데에서 구원이 작정됐다 이렇게 말했다 말이오.

그러고 또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재림할 때에도 노아 때와 같다. 노아 때에 홍수에 전부 다 멸망받고 노아의 여덟 식구밖에는 구원을 못 얻었는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온 세계가 불로 가지고 다 타서 소멸되고서 다 녹아지고 절단날 터인데 그때와 같이, 그때와 같게 된다.

그러면, 불타지 안할 사람, 불타지 안할 사람, 그때에 구원 준비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기 때문에 그 거룩의 온전 경건의 온전이라야 이제 될 터이니까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의인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라셨기 때문에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할 때 불탈 때에도 그때 온전한 사람들만 구원얻지, 거룩과 경건이 온전한 사람들만 구원얻지 그것이 온전치 안한 사람들은 다 멸망을 받는다.

그라면, 여게 자, 불탈 때에 거룩과 경건에, 자기 마음에, 자기 마음으로서 거룩과 경건에 자기는 온전해졌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없을 거라.

바울은 내 마음에 자책할 걸 찾지 못한다 했으니까 자기 마음으로 온전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마는서도 그는 떨어서 내가 이렇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알지 못하심이 없고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심판하실 거기 때문에 그분의 앞에 가면은 내가 모르는 것이 막 툭툭 튀어 나올 모양이니까 지금 내가 떨면서 내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말했어.

또 말하기를, 성경에 말하기를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로 짓는 사람도 있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 가지고서 집을 짓는데 나중에 시험할 때는 불로 시험을 하는데 불로 시험을 하니까 그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고 불타지 안하면 상을 받는다 이랬는데, 공력이라 하는 것은 건설 공력이라 말이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것은 불타 버리니까 해받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것은 불타지 안하니까 상을 받는다 이랬는데, 그라고 난 다음에 끄트머리 뭐라 했느냐? 해를 보리니 저는 구원을 얻으나, 뭐라 했소? 불가운데서 구원얻은 자와 같다. 그 불가운데 구원 얻었으니까 그 공력이 불탔어요 안 탔어요? 공력이 다 불타 버렸어. 공력이 불타 버렸어. 이러니까 다 공력이 불타 버린 자는 구원을 얻지마는서도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 불 가운데, 불이 탔는데 불에서 구원 얻어서 나왔으니까 뭐 가지고 나와요 못 나와요? 발가벗고 나와요.

불이 났는데 언제 뭐 가지고 나와, 나오기를? 자기가 벗고 있으면 벗고 있는 대로 나왔고 빤스 하나 입었으면 빤스 하나 입고 나왔고 또 내의 하나 입었으면 내의 하나 입고 나왔고 그거 뭐 또 외의까지 겉어머리 옷까지 입고 대님 매고 이래 잤으면 그대로 나오고 이렇지 뭐 딴게 뭐 있겠소? 그러니까 공력이 다 불타도 구원을 얻는다 했으니 이 문제는 어찌 되겠는가? 그러면 홍수 때 그와 같이 홍수에 공력은 다 없고 공력은 다 행위는 다 헛일했지마는서도 구원 얻는 구원은 무슨 구원인가? 이거는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께서 행함으로가 아니고 은혜로 하나님이 주신 그 구원이 그 구원이라. 그 구원을 구별해서 기본구원을 구별해야지 기본구원을 구별하지 안하기 때문에 그런 혼돈이 나온다 그말이오. 인제 문제가 자꾸 커집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은 다 지옥 갔다’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안해. `노아 때에 홍수에 멸망받은 것은 육체는 멸망을 받았지마는서도 그 사람들도 택한 자면 자기 행위는 다 지옥갔지마는서도 자기 영은 하늘나라 갔다. 택하고 안 택한 데에서 멸망과 구원이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해.

그러면 그들은 행위 그러면, 그러기에 열 처녀에서도 다 멸망을 받았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인도해 내 오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사람들도 광야에서 멸망받은 거는 영원히 지옥 멸망이다. ‘그거는 그들이 행위의 혜택을 입지 못했으니까 권위 있게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 모양으로 그렇게 담대하고 기쁘고 즐거움으로 그런 혜택을 입지는 못하고 누리지는 못했지마는서도 그들이 택했다면은 그 영은 하늘나라 갔다’ 하는 것이 내가 깨달은 주장이라 그거야.

이러니까 이게 시비가 많은데, 저거가 지면, 저거가 지면 말하지 안합니다. 저거가 지면은 희미하게 말하지 안하고 그만 지나가 버립니다. 그만 말하지 안해 버려요.

내가 만일 져 보지, 틀렸으면 그것 가지고 ‘봐라, 요게 요게 요렇다. 요거다 요거다.’ 막 들고 나서 가지고 굉장할 건데, 그만해도 이 등신들이 알 수가 있을 터인데 도무지 암만해도 말을 해도 가르쳐도 바른 것을 배울라고 하지를 안해.

이거 말하다 보니까 자꾸 이래 나오는데 찬송하리로다 하는 것을 이 찬송은 이것도 깨닫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찬송하리로다 하는 것은 찬송해야 된다 하는 말이요 찬송을 하라는 말이요, 찬송 안 한다고 책망하는 말이요, 찬송을 하라고 권면하는 말이요, 무슨 말입니까? 필연적으로 찬송이 되어진다는 그것을 뜻해서 「찬송하리로다」 네가 이 구원을 알고 보면은 저절로 막 찬송이 입에서 안 터져 나올래야 안 터져 나올 수가 없게 된다.

찬송이라 말한 것은 그 하신, 내게 대해서 하시는 일이 감탄되는 일이요 참 기가 막히는 일이요 거게 그만 설복을 당하고 감탄이 되고서 거게 그만 끌리고 그만 그 생각에 가뜩 물이 배서 파묻혔다 그말이오. 파묻혀서 하는 소리를 찬송하는 것이라, 찬송하는 것.

그거 뭐이냐 하면 그거를 우리 구원을 어떻게 해 보면 그렇게 필연적으로 찬송하는 자가 돼져요? 어떻게 해 보면? 우리 구원을 어떻게 해 보면? 저게 저 ○선생 한번 말해 봐. 우리 구원을 어떻게 하면은 찬송함이 되지? 한번 대답해 봐. 어떻게 하면은 저절로 찬송이 터져 나오는가, 필연적으로? 뭐 죽인다 해도 찬송해. ‘네 이놈, 그 구원을 찬송하면 죽여 버린다.’ 이러면 죽었으면 죽었지 찬송 안 할 수 없어.

‘죽어도 나는 찬송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죽어도 찬송해. 그 찬송은 어떤 찬송인지 죽어도 튀어나와. 이 찬송하리로다 이런 찬송, 죽어도 튀어 나온다 말이오.

그러면 어떻게 연구하면 그 찬송이 그렇게 돼? 몰라? 뻐뜩 들어. 내 눈에 잘 안 보인다. 손가락으로 들어 서이로 말하니까 대답은 옳게 들기는,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이제 알아도 자꾸 되풀이 해.

첫째는 이 구원의 사랑의 고난, 사랑과 고난을 알아봐야 돼. 사랑을 알라면 어떻게 알아봐요? 사랑을 알라면 어떻게 알아봐요? 고난으로 사랑을 알아요, 알겠습니까? 나를 사랑해서 이리이리 고난한 것 보니까 고난 받은 것 보니까 참 나를 사랑하셨다 하는 걸 알았다 말이요, 그러면 그 사랑은 고난으로 알아요. 또 고난은 뭘로 알아요? 사랑으로 알아요. 귀가 열리면 쭉 알아버려.

이래서, 그 구원의 사랑과 고난을 알면 그 구원이 얼마나 큰 힘 들인 구원이며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한 구원이니 그 사랑을 알 때에 이 구원에 대해서 의심이 날 염려가 없고 염려될 것이 없고 또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이 어떤 희생 어떤 고난 어떤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서 이 구원 주신 것을 자기가 깨달아 보면은 참 기가 막히고 자기 전신이 녹아질 만치 이렇게 이 구원이 확실히 믿어지는 확신이 거게서 나와.

또 그라고 난 다음에, 또 자기가 누려 봐야 돼. 내가 참말로 구원을 내가 가지고 있나 없나 자기가 스스로 시험해. 네가 믿음에 있나 없나 스스로 시험해 보라 하는 그 성구가 어데 있어?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있어요. 스스로 시험해서 내가 참 하나님의 전능을 믿나 안 믿나?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믿나 안 믿나?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모든 것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했는데 참말로 이래 하나님 아버지 아들인 것으로 믿느냐? 아침거리만 없어도 그만 야단이야. 먹을 것만 없어도 야단이라. 먹을 것만 없으면 야단하는 거지야. 이래서 말하기를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

믿나 안 믿나 자기가 자기를 시험해 본다 말이오. 시험해 봐서, 시험해 봐서 그라면 시험해 보면 믿는가 안 믿는가 그것이 나타나고 또 그보다 더 시험해 보는 것은 뭐이요? 어떻게 해? 어떻게 하면 그 구원을 자기가 받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해 보면 알아요? 누려보면 알아요.

누린다 말은, 누려본다 말은 그 구원에 대해서 혜택을 본다 말입니까 시험해 본다 말입니까? 혜택의, 결과인 혜택을 지금 자기가 혜택을 본다 말이오. 혜택을 지금 맛을 봐. 혜택을 보면 아이구 아이구 이렇게 참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돼.

그다음에는 어떻게 알아야 돼? 그다음에는 어떻게 알아야 돼? 양성원 학생들 좀 대답해 봐요. 그다음에 어떻게 알아야 돼. 이 안경쟁이, 여기 ○○교회. 기념해 보면 알아. 기념하는 것. 주님이 나를 죄없이 살라 하는데 죄없이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어떻게 해 가지고 이 사죄를 주셨는데 성경에 말하기를 당신이 죽음으로써 사죄를 줬다 했어. 내가 죄없이 살라고 이렇게 해 보면은 나중에 가서, 처음에는 쉽지요. 죄 안 짓고 살기 쉽지마는서도 어렵고 어렵고 나중에는 마지막에 생명을 안 내놓으면은 죄없이 살 수가 없어. 생명 안 내놓으면 죄 없이 살 수가 없어. 생명 안 내놓으면 죄없이 살 수가 없을 때에 이때에 주님은 생명 내놔서 나를 내 죄를 없애 주셨구나 하는 그때에 비로소 주님의 그 사죄를 내가 체험해 보고 내가, 나도 주님이 이렇게 죽음으로 나에게 사죄 주셨으니까 나도 죽어도 내가 이 사죄를 죽음으로 사죄를 보수할 때에 비로소 그것이 주님의 사죄를 내가 내 몸소 기념하는 것, 그때 주님이 이렇게 이렇게 나를 사죄를 주셨기 때문에 이 사죄 주신 것을 내가 지금 나도 그것을 그때 사죄 주신 그때의 그 주님의 형편을 나도 지금 오늘에 해 본다 하는 그것이 기념이라 그말이오. 기념으로 알아보는 것.

이것이 얼마나 껍데기 껍데기 속 저 깊이 들었으니까 말해야 ‘그거 무슨 말인가?’ 뭐 그걸 구원에 대해서 사랑과 그 고난을 알아봐야 된다. 또 그다음에는 누려봐야 된다, 그다음에는 기념해 봐야 된다 이 말이 그 근방에 천리 만리 거리 머니까, 자꾸 따라와서 하는 사람은 좀 알지만 그리 안 하면 모른다 그말이오.

양성원 학생들, 자, 이렇게 하는 것이 짐작이 돼요, 알아져요? 이렇게 세 가지로 연구하면 확실하다 하는 것이 깨달아졌어요? 깨달아진 사람 손 들어 봐요. 오른손 들어. 깨달아진 사람들, 깨달아졌으면 안 놔요. 요것만 안 놓으면 양성원에 공부할 필요도 없고, 공부할 필요도 없고, 신학을 공부할 필요도 없고 요거면, 제일 아는 방법이 요거라. 이리 되면 사람들이 목사 안 줘도 좋아. 목사 안 줘도.

목사도 하나님이 목사 주시니까 뭐 얼마든지 대 목회자가 되어지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이요? 자꾸 그래서 은혜가 있어서 사람들이 들이 모아들지, 교회가 커지지 은혜가 되면 몇천 명 몇만 명 자꾸 이렇게 모이지, 한국에 제일 은혜가, 세계에 제일 은혜가 있지 이리 돼지면 그 사람 목사 주나 안 주나 그 목사라는 이름을 목사라고 이러지마는서도 그 사람은 목사라고 안 하고 그라면 예수 믿는 선생님이라 이럴 거라.

그러니까, 하나라도 듣고 그대로 실행을 해야 되는데 실행 안 하기 때문에 안 먹어 보니까 맛을 몰라. 먹어 봐야 맛을 알 건데. 자꾸 읽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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