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7 14:24
신앙인물들의 성공과 실패의원인
본문 : 창4:2-7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얼핏 보면 형 가인도 자기가 농사를 하니까 농작물 가지고 하나님 섬겼고 또 아벨은 목축을 하니까 양을 잡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앞뒤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가 범죄 했을 때에 무화과 잎사귀로 자기 몸을 가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말씀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고, 또 그 후를 보면 하나님께서 계속 짐승의 피를 가지고 대속하는 그 규례를 세워서 나왔습니다.
또 신약교회에 와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를 보면 아벨이 자기가 목축업을 택한 그것부터가 벌써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것을 자기 업으로 삼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자손들, 다 믿음의 자손들을 보면 모두 다 목축업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보면 목축업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가인도 자기가 농사짓는 농작물을 가지고 하나님 섬겼고, 또 아벨도 자기가 목축하는 목축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다. 다 같이 자기들이 하는 업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다 이렇게 보면 미혹입니다. 그것은 잘못 깨달은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아벨이 그렇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그렇게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힌 그때부터 인간이 자기로서는 자기를 보호할 수가 없고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만 보호할 수가 있다. 보호를 입을 수가 있다 하는 그 표적으로 가죽옷을 지어서 그때 입혔던 것입니다. 그게 처음이고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아닙니다. 여기서 아벨이 자기가 업을 택할 때도 하나님과 가까운 업 하나님을 섬기기에 가깝고 또 거기에 관련된 그런 업을 택하려고 애를 쓴 것을 여기서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증거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매일 마다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인데 곧 우리의 생활이 제사입니다.
또 우리 생활이 예배입니다. 우리 생활이 예배요, 우리 생활이 제사요, 옛날로 말하면 우리 생활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그 제사가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때 제사 드릴 때에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 다 짐승으로 드렸고 그 외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는 그 제사에 연해서 드리지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가 없이 곡식으로만 드리는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잘못 드림으로 하나는 버림을 당했고, 제사를 잘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어졌다. 환영을 받았다 하는 이것은 오늘 우리가 생활하는 이 생활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하게도 되고 하나님 앞에 이 환영을 받게도 됩니다.
그러면 그때 그들이 제사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열납도 되고 하나님 앞에 버림도 된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은 우리 생활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자기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하는 자기가 되기도 합니다.
(저 ○○○선생은 뒤에 왔는데 어떻게 그 앞에 와 앉습니까? 거기 비었습니까? 비었는데 뭐 때문에 빈자리를 놓아두고서 ○○○집사님, 앞에 나와 앉아요. 왜 비었는데 모두 뒤로 앉느냐 그 말이요. 아는 사람들이 자꾸 그래 앉으니까 모르는 사람들이 그래 앉을 밖에는. 내가 처음에 와서 이래 보는 것은 처음에 와서 보고 난 다음에는 설교하면서 뒤에 오는 사람 하나, 하나 전부 내가 다 봅니다. 누구는 늦어도 온다. 저 사람은 항상 저래 늦게 온다. 아무개는 오늘 아침에 안 왔다. 그것을 제가 챙기려고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오시는 그때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을 공경했고, 또 구주를 바라봤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도 바라봤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배는 잘못된 예배가 됐고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4장에 기록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일이 있기는 있지만 예배드리는 이 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어떤 것이 제사인가 우리 생활이 제사가 됩니다.
또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배는 어떤 것이 예배인가 우리의 생활이 예배가 됩니다. 그러면 지금은 우리 생활하는 이 생활이, 행동하는 행동이 예배요 예배가 있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사 드렸던 제사입니다.
그러기에 차차 그 제사가 예배가 되고 예배가 오늘 생활이 이렇게 되어서 지금은 생활을 중점으로 이렇게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 앞에 주일 오전 오후 또 삼일 오일 예배를 보는 이 예배는 우리의 생활 중에 제일 머리가 되는 우두머리 생활로 이렇게 우리가 삼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어떻게 모시며 어떻게 따를 것인가? 우리 생활로 따라야 되고 우리 생활로 모셔야 됩니다. 아무리 예배드릴 때에는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척해도 그 사람이 생활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그 사람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령으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성신의 감동으로 예배가 돼야 되고 또 진정이라는 것은 자기의 전 인격을 다 기울여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인격을 다 기울여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그 인격을 다 드렸어야 되지 자기 딴에는 인격을 다 드렸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령님이 보실 때에는 인격의 십분지 일도 안 드리고 찌그러기 드려 놓고 다 드린 양으로 그래가지고는 안된다 이거요.
이러니까 그 인격을 다 드려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요,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이 이 제사를 잘못 드려 가지고 버림을 당하고 환영을 받은 그것은 오는 우리가 생활하는 행동과 생활인데, 행동이 생활이요. 생활이 행동이니, 이 행동을 할 때에 행동을 바로 해 가지고 환영받고 잘못해 가지고 버림을 당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어떻게 드렸기 때문에 그리되었는가? 가인은 자기가 사업하는 사업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기가 어떤 사업을 하든지 어떤 생활을 하든지 자기의 환경과 주위에 피동 되는 것은 내나 가인이 자꾸 아침에도 농사짓고 저녁에도 농사짓고 자기 전에 자꾸 농사짓고 이러니 그 농사짓는 그 농사에 피동이 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다 이거요.
농사에 피동이 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벨은 자기가 목축업을 할 때부터, 아예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해 가지고 했는데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해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약속을 근거해가지고 하나님을 섬겼고 약속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겼고 가인은 자기 환경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김으로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냐? 둘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담 하와에 관한 일이 우리에게 첫째로 중요하고, 또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일이 우리에게는 둘째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활할 때에 우리가 행동할 때에 아주 조심하고 깨어서 여기에 대해서 힘쓰지 않으면 그만 자기 주위와 환경, 그 주위 환경이 자기의 뭐 되지요? 예. 자기 현실입니다. 주위 환경 사정 그것이 합해서 한 말로 말하면 자기 현실 아니겠소? 현실을 따라서 살기 쉽다 그 말이요. 현실을 따라서 행동하면 그것이 곧 가인의 자손입니다. 현실을 만났을 때에 현실을 따라서 행동하지 아니하고 현실에 뭘 따라서 행동해요? 네.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계약은 우리에게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구약이라 말은 처음에 약속한 약속이라 말이요 신약이라 말은 새로 약속한 약속이라 말입니다.
'약(約)'이란, 구약 신약하는 그 '약(約)'자는 약속 약자요. 언약 약자. 그러면 현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이 약속을 따라서 생활할 수도 있고 현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져 버리고 그 현실을 따라서 생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현실을 따라서 생활하면 가인의 자손으로서 망하게 되는 것이고 현실을 만났을 때에 현실을 따라서 행동하지 아니하고 그 현실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그 현실에서 살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현실을 지배하고 현실이 뭐라고 하든지 현실대로 따라 하지 아니하고 그 현실이 뭐라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에게 암만 대립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하고 또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에 그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하든지 말든지 그 현실대로 하고 이것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 난 법인가? 아담 하와도 그러합니다. 아담 하와가 왜 그렇게 하와가 죽었고 또 아담이 죽었는가? 하와 아담 그 내외는 다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것은 그들이 자기 현실을 따라서 움직였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움직이지를 안했습니다. 그 공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망했어. 아담도 망했고 하와도 망했고 가인도 망했고 비로소 아벨이 처음으로 성공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만난 그 현실 자기는 농사짓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현실을 따라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했고, 자기는 사업을 해도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 가지고 사업을 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차차 가까워졌다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뭐 하나님만 섬기면 되지 할 게 아니라 자꾸 하나님 섬기기에 편리한 그런 조건을 취하고 그런 사업을 취하고, 이 사업을 해도 뭐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되지, 그렇지만 사업하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어렵겠는데, 이 직장은 돈은 많은데 내가 이 직장에 취직하면 아마도 하나님의 그 계약을 지키기가 힘이 들겠다. 이 직장은 돈은 적지만 하나님의 계약 지키기에는 좀 쉽고 편리하겠다.
그러면 이 아벨은 어떤 그 직장을 취했습니까? 아벨은 어떤 직장을 취했지요? 예. 하나님 섬기기에 편리하고 가깝고 쉬운 그 직업을 택한 것이 아벨이라 그 말이요. 알아듣겠습니까? 아벨이 오다가다 보니까 목축한 것 아니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한 것은 그렇게 다 기록은 안했지만 벌써 연관성을 보든지 그 다음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다른 것의 생명으로 또 짐승의 피로 이래 가지고서 속죄함을 받고 구원 얻는다는 것을 벌써 하나님이 많이 말씀하신 것이 표시가 된다 이거요.
그 뒤를 보면 또 노아는 어찌 됐습니까? 노아가 방주 만들 때에는 그때 온 천하 사람이 전부 자기 좋은 대로 자기 보기 좋은 대로 자기 소원대로 자기 욕심대로 천하 사람이 다 그러했기 때문에 다 망했지. 천하 사람이 다 그랬는데 온 천하 사람이 다 그런 그런 환경 주위 현실을 만났는데 노아는 그 현실을 따라서 했습니까? 현실에서 하나님을 따라 움직였습니까? 어떻게 움직였지요? 저 뒤에, 어떻게 움직였습니까? 뒤에 사람들은 내게 들리지 않지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말하라 그 말이요. 말하는 데서 되어지는 거라. 뭐 내가 여기서 말해 봤자 안 들리는데, 안 들리는 게 하니라 요 설명한 것 다 말하니까 안 들려도 자기는 대답을 하라 말이요. 대답을 했다가 그 대답이 틀렸으면 옆에 사람한테 부끄럽고 또 안됐습니다. 부끄러우니까 딱 기억해가지고서 고치지, 속에 박히지 남한테 위사를 당하거나 말거나 그 까짓게 무슨 문제요 죽기 전에 고치는 게 문제지 그렇지 않아요? 이러니까 뒤에 사람들도 대답을 하라 그 말이요. 노아는 온 천하 사람들이 다 자기 좋은대로 자기 욕심대로 이렇게 하는 그 세상을 만났는데 그 시대를 만났는데 그 현실을 만났는데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현실을 따라갔소? 하나님 약속을 따라갔소? 저 뒤에도 말해요. 그렇지.
내가 이번에 보니까 우리 진영은 전부 교만으로 병들어요. 병도 교만으로 들고 살림 망하는 것도 교만으로 망하고 직장 떨어지는 것도 교만으로 떨어져. 전부 여러분들 교만으로 다 망하요. 나부터도 교만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요. 내가 교만하니 여러분들 교만해. 우리가 다 교만으로 망해요. 되지 못하게 조를 빼고 이러니 보기 싫다 그 말이요. 아무리 좀 행동이 좋아도 '음, 음' 이래가지고 있는 자는 보기 싫소. 실수가 많아도 '아 잘못했습니다.' '이래 할까요 저래 할까요' 굽신 굽신 하는 그 사람을 다 좋아한다 그 말이요. 아 내가 여기서 말 대답 잘못했다가 그게 틀렸으면 옆에 사람 아무 것이 말 그것 틀렸더라 하는 이런 말 들을라, 그러면 그래 들어야지 그 수치를 봐야 그 놈이 죽지, 그놈 죽어야 될 놈 아니요? 옛 사람 아니요? 아 강단에서 저렇게 하는데 내가 따라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러면 이거 아이구 점잖지 않게 위대치 않게, 그 위대한 점잖은 그 놈은 지옥 갈 놈이다 그 놈은 죽어야 될 놈이다 그 옛 사람 그 놈이요.
삭개오가 세리장이라면 부산으로 말하면 부산 시장이요. 바로 그때 세리 장이면 부산 시장이라 그 말이요. 백성들 다 세력 잡은 제일 권세 있는 사람이요.
이랬지만 예수님을 만나려고 할 때에 다른 사람은 다 그 뒤에 줄줄 따라가는데 세리 장이 막 뚫고 들어가려고 하면 '야 그 세리 장 그 사람은 뚫고 들어가고 야단이더라' 이럴 건데 뚫고 들어가면 글렀다 막 뛰어 나가서 뽕나무에 기어 올라가가지고 보려고 하기 때문에 '삭개오야 내려오라' 했다 그 말이요. 주님 찾는데 위신과 지위와 그까짓 게 무슨 소용이 있소? 다 벗어놓고 달려들었다 이거요.
지금 대답 안한 그 사람은 속에 교만이 들었다 이거요. 그까짓 거 더러워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것 교만 그것 때문에 제 수치고 가치가 떨어집니다.
지금도 그것이 내게 양식이 됩니다. 거창읍에서 사경회를 하는데 그때에 나는 다른 식구들 다 보내느라고 가지 않고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까 그 말이 들려. 강사가 설교를 하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는 그 설교를 하고서 여기 예배당 앞에 거지 하나가 내가 들어오다가 보니까 볼볼 떨고 앉았더라 하면서 설교를 딱 그치고 나니까. 그때 얼굴이 벌겋고 험하게 생긴, 그 당시 권사요 지금은 전도사 이제 노방 전도하는 사람인데 그 분이 쫓아가서 얼른 자기의 그 두루마기를 벗어 가지고 입혀 주고 왔다고서.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어이구 저거 그 설교 듣고 그만 쫓아가서 다른 사람보다 제일 앞에 뛰어가 두루마기 입혀 주고 온다고 웃을 거지만 그 사람은 그게 아니라 자기 듣는 대로 벌써 설교 들을 때에 해야 되겠다.는 그걸 번개 같이 움직여 그 교인들 중에 제일 먼저 움직였어. 제일 먼저 움직였기 때문에 그 사람 순교했다 그 말이요. 순교했어. 뭐 구제를 해도 뒤에 하지 지금 눈에 보이는데 남 앞에 뛰어가 가지고 구제하는 척하며 이렇게 두루마기를 벗어 입혀주다니 유치하다, 유치가 안 보인다 그 말이요. 욕을 하거나 조롱을 하거나 하나님 상대하는 사람은 그렇게 삽니다.
뭘 물으면 나 같은 사람이 대답해. 저런 아이들이나 대답하지 또 설교하기를 어린아이들 놓고, 국민학교 일 학년들 놓고 가르치는 것 모양으로 우리 앉은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나, 내가 하는 게 하니라 하나님이 가르치니까 하나님이 무시하지 어쩔 거라. 뭐인데 또 알고나 있으면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자, 직장에 취직을 하려고 하는데 한 군데는 돈도 많고 참 그 직장에 취직했다 하면 장가가는 것은 문제없고 막 처녀들이 서로 청혼을 하고 할 만큼 이렇게 좋은 직장인데 거기서 신앙 지키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 직장이요.
또 한 직장은 거기에 취직하면 일도 되고 돈도 좀 적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직장을 천하게 보기 때문에 장가가려 하면 시집올 처녀가 없고 하는 그런 직장이 있소 그런 직장이 있는데 아벨은 처음 말한 직장을 택했소? 뒤에 말한 직장을 택했소? 아벨의 걸음을 따라가려고 하면 어떤 직장을 택해야 됩니까? 돈 많고 명예 있는 그런 직장을 택해 가는 것이 가인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보십시오. 네, 또 놓고. 아벨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보십시오. 이래 놓으니. 묻기를 아벨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드십시오 했으면 잘 들건 데 가인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드십시오 하니까 조금 들고 마니 여러분들이 아는 확신이 없다 그 말이요. 그러면 좋은 직장을 택해서 가는 그 사람이 아벨의 길입니까? 손들어 보십시오. 가인의 길입니까? 손들어 보십시오. 몰라서 안 드는 사람들도 있네. 가인의 길입니다.
여기서부터 아벨은 뭐 때문에 목축업을 시작했는지 이러니까 모든 사람이 자기 취직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사업부터 이렇게 한다 그 말이요. 하나님 섬기기야 좋든지 말든지 그때 뭐 꼭 지키면 되지 하고서 명예 높고 장가 잘 가고 시집 잘 가고 돈벌이 좋고 번들번들한 그 업을 택할 자가 오늘에 백의 구십구입니다.
백의 구십구요. 백의 구십구니 그거는 가인의 자손으로 망할 길을 가는 자라 그 말이요. 제가 욕심대로 택했는데 나중에 이거요.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온 천하는 다 자기 좋은 대로 자기 보기 좋은 대로 자기 욕심대로 전체가 다 그렇게 갔는데 그런 현실이요 그런 시대인데 이러니까 홍수로 다 망했지. 망친 걸 봐서 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도매금으로 말할 수밖에 더 있겠소. 그랬는데 노아는 어떻게 해가지고 구원 얻었습니까? 그런 시대 그런 주위 환경 그런 현실을 만나서 그 현실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그는 현실 따라서 살았소? 하나님의 약속 따라서 살았소? 하나님의 약속대로 산 것 확실하지. 저 뒤에도 말해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 아는 게 돼. 하나님의 약속 따라 살았소? 현실 따라 살았소? 입 있구먼. 하나님의 약속 따라 살았다고 그래요. 그래야 자꾸 자라가는 거라. 교만 빼버리고. 하나님의 약속 따라 사는 것이지. 그 노아의 여덟 식구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 따라 산 사람은 살리고 약속 따라 살지 안한 사람은 전부 다 멸망하도록 하니까 멸망 받고 말지 그것이 오늘 우리 생활입니다. 우리가 아벨의 자손 노아의 자손 이렇게 되려면 자기 현실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아야지요.
어제 아침에, 그저께 아침에 배웠는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뭘로 인도하셔요? 뭘로 인도하셔요? ○○○선생. 예. 현실로 인도한다. 저 뒤에 ○○○선생. 현실로 인도한다. 네. 그건 잘 알았습니다. 현실로 인도하면 현실에 이런 현실 당하면 이렇게 하고 저런 현실 당하면 저렇게 하고, 현실로 인도하면 현실에 순종해야 되지 않겠소, 어떻습니까? 현실대로 움직여야 될 것 아니겠소? 현실에 피동 돼야 되지 않겠소? 현실에게 순종해야 되지 않겠소? 현실로 하나님이 인도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하나님이 현실로 인도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현실 가지고서 인도하시니까 그러면 그 현실에게 피동이 돼야 됩니까, 안 돼야 됩니까? 현실 가지고 인도하시는데 현실에게 피동 안 되어야 돼요? 그러면 어째야 되요, ○○씨? 현실로 인도는 하시는데 하나님이 이 현실을 턱 주시면 그 현실 상대해 가지고서 하나님 약속대로 현실에 행합니다. 현실로 인도하시는데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는 그 현실에 대해서 행동합니다. 요것이 잘못하면 착각되기 쉽습니다.
노아가 그 뒤에, 성공하고 난 다음에 자기도 망하고 자손도 망하고 이렇게 망친 것은 노아가 어디에 피동 되어 가지고 망했습니까? 무슨 현실에? 농사 피동 됐지. 농사로 지어 놓은 포도주에 취해 버렸지. 포도주의 사람이 돼 버렸지.
아무리 포도주를 많이 만든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지켰으면 그렇지 않지.
사람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고 성공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많은 경험으로 마지막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쨌든지 성공은 약속에 피동될 때에 성공이 되고, 현실에 피동 되면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환경 현실에 피동 된 것이 자기 주관으로 사는 것입니까? 객관인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사는 것입니까? 현실에 피동 되는 것이 주관 생활입니까, 객관 생활입니까? 그것이 내나 객관 생활 같지만 주관 생활입니다. 제 생각으로 사는 것이라 그 말이요.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요것을 못을 박아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어떤 현실을 만나든지 현실 따라서 움직이면 망합니다.
아브라함은 현실 따라서 움직인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현실 따라 움직인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못 든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은 잘 믿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 손 못 들거든. 그것 다 덩더꿍이 신앙이라 아무 구별이 없는 신앙이라. 아브라함이 현실 따라서 움직인 일이 있었습니다. 있었어. 있어 가지고 어디로 갔습니까? 애굽은 지금으로 말하면 뭐입니까? 세상이지. 아브라함같은 사람도 자기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현실을 따라 움직여 가지고 세상으로 가 가지고 그런 곤욕과 자기 자손에게 사백 년 동안 종 노릇하는 그런 원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상의 한 걸음 한 걸음의 생활이 자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이 미치는지 모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