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7 14:18
신앙의 표시
1988. 09. 03. 토새.
본문: 요 8:31-34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안 믿을 때에나 또 지금도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이 모든 언행심사를 하는 것, 또 희로애락을 하는 것 이것은 다 영이 하는 행동 아닙니다.
영은 완전히 죽어서 없는 거와같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 믿을 때에나 또 지금도 안 믿는 사람들의 언행심사 하는 것, 아무리 명철한 사람이든지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지 대학자가 되는 사람이라든지 또 종교 창설자 석가모니 같은 그런 사람이라든지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 영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 중생된 사람이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언행심사를 하는 것, 모든 것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또 느끼는 것이나 그런 모든 것은 다 영이 하는 일은 아니고 순전히 육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똑똑히 구별을 해야 되는데 과거에는 이런 것을 똑똑히 분별하지 못해 가지고 사람들이 혼돈돼서 구원 이루는 데에 바로 전력을 기울이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힘을 바로 기울이지를 못했는데 차차 차차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서 알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그들의 명철, 그들의 지혜, 그들의 총명, 그들의 철학, 그들의 과학, 그들의 모든 욕망, 용기, 소욕 그 전부 하는 행동이 영은 없는 거와같이, 영이 없지는 안하고 있기는 있는데 영은 죽었기 때문에,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아주 없는 거와 같습니다. 영은 완전히 기능적으로는 죽어서 없는 거와같이 순전히 이 심신만이 언행심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이 중생이 됐으면 안 믿을 때와 다른 것은 안 믿을 때는 기능적으로 완전히 죽은 영과 한테 뭉쳐 있기 때문에 영의 작용은 하나도 없다가 중생된 후는 이제는 죽은 영과 그 육이 하나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산 영과 하나돼 가지고 있습니다. 산 영과 하나가 돼 가지고 있어도 뭉텅이는 한 뭉텅이지마는서도 산 영과 행동할 때에 같이 행동하는 때도 있고 같이 행동하지 안하고 순전히 그 육덩이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육덩이만 행동할 때에는 안 믿는 사람의 행동과 꼭 같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에 육신의 생각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또 육체의 소욕은 또 사망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같이 꼭 같은 육만으로 살 때도 있는 요것을 알아야 되지 예수 믿은 사람이면 다 그 사람이 예수 믿는 그 영생이 되는 행동인 줄로 그렇게 알면 안 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제 보편적으로 믿는다고 말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 또 교회 다니면서 잘 다니지 안해도 너는 예수 믿나 하면은 그저 예수 믿는다고 자타가 생각하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나오든지 뭐 두 달에 한 번 나오든지, 그 미국 같은 나라는 그저 일 년에 성탄 때 한번 나온답니다. 그래도 저도 믿는 사람인 줄 알고 또 연보도 내고 늘 그렇게 한다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믿는 사람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그러면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안하면 안 믿는 사람이나 그 구원에는 꼭 같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언행심사와 꼭 같습니다. 비로소, 예수를 안 믿으면 구원이 없는 것처럼 예수 믿어도 '내 말에 거하지 안하면' 주님의 말씀에 거하지 안하면 또 그 사람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이 있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살아야, '내 말에 거하면' 거한다 말은 살 거(居)자입니다. 거한다 말은 살 거(居)자인데 '거하면' 하는 말은 살면, 말씀대로 살면 그말이오. 말씀대로 살면, 그러면 말씀대로 살지 안하는 사람은 내나 안 믿는 사람이 구원이 없는 것처럼 믿는 사람 가운데에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건설구원은 없는 사람이오. 전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또, '내 말에 거하면' 말씀대로 삽니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또 말씀대로 자기가 산다 해도 사느냐 안 사느냐 하는 그 증거가 뭐이냐 하면 말씀대로 사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안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안 되면 소용없어. 말씀대로 그 사람이 산다고 아무리해도 말씀대로 사는 효력은 자신이 예수님을 닮아가야 됩니다. 제자는 뭐 석가모니 제자가 아니고 공자 제자가 아니라 '참 내 제자가 되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닮은, 변화된 사람을 가리켜서 내 제자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 말씀대로 사는 그 효과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서 변화받는 것이 있어야 되지 변화받는 것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말씀대로 산다 할지라도 변화받지 않는 그거는 아주 가짜요 그거는 아주 거짓 부리입니다. 자기가 참되게 말씀대로 살면 변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말씀대로 산다 할지라도 변화가 없으면 그거는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해도 말씀대로 안 살면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있어야 믿는 사람이 참 믿는 사람이고, 또 말씀대로 산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사는 그 사람이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또 예수님을 따라서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변화가 있어야 되고, 또, 변화가 자기가 있는 그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무슨 변화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볼 때에는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이 변화가 되고 뭣이 변화가 있습니다. 말도 좀 변화가 되고 뭐 주일을 안 지키던 사람이 주일을 잘 지키고 또 뭐 어떻게 변화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변화된 그 변화에, 변화는 진짜인지, 가짜가 있을 수 있다 그말이오. 변화된 그 변화의 가치는 어데 있느냐 하면은 진리를 아는 그것이 변화의 가치입니다. 변화의 가치는 진리를 아는 것이 변화의 가치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뭐 사람 보기에 변화를 하고 뭐 어떻게 생활 개량이 되고 어떻게 됐다 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외식으로 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거는 외식으로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 외식은 구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 참 됐나 안 됐나? 우리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그걸 모른다 그거요.
껍데기로 아주 뭐 변화된 것같이 날뛰어도 그 변화가 하나도 진짜로는 안 된 사람이 있다 그거요. 사람이 아주 별별 게 있어. 예수 믿는다고 아주 그 사람이 열심히 이렇게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까 뭐 장가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시집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또 집사 될라고 집사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장로될라고 장로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또 그래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 가지고 도둑질 해 먹을라고, 돈 빌려서 이렇게 도둑질 해 먹을라고 이렇게 아주 사기 협잡의 믿는 사람도 있고, 또 그 사람이 자기가 믿어 사치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아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운동하기 위해서 그래 믿는 사람도 있다 그거요.
자기가 지금은 그런 게 좀 덜하지마는서도 아주 초대 교회에는 그때 일본 나라에 탄압돼 가지고 있을 그럴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계를 좀 주름잡아서 자기가 정치 야욕을 가지고서 자기가 정권을 얻기 위해 가지고서 예수 믿는 사람들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때문에 그런 건 외식이 있을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자기가 아무리 주님의 제자가 됐다 할지라도 우리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모릅니다.
외식이 하도 많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아주 열심히 믿었는데 그 사람이 이제 그만 그때 교회에서 집사 투표할 때에 집사가 안 됐더래요. 그거는 내가 누구한테 들은 말입니다. 어떤 설교자가 그 말합디다. 집사가 안 되니까 그 이튿날 아침부터 그만 새벽기도 안 나와. 내치 새벽기도 잘 나오던 사람이 새벽기도 안 나와버려. 안 나와서 나중에 가서 아무리 권면해도 나 안 믿는다고서 그 안 믿는 사람. 그런 사람 많이 있습니다.
신앙에는 참이 있고 외식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곧 변화를 받았다 할지라도 참 변화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 표가 어데 있습니까? 진리를 아는 것이 그 표라 그말이오. 진리를 아는 것. 진리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진리인데 이 진리가, 한 진리, 성경 말씀의 한 진리 그라면 한 성구, 한 성구가 큽니까 이 우주가 큽니까? OOO조사님? 한 성구가 이 우주의 전체와 비교하면 비교를 못 할 만치 진리는 큽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어떤 사람은 그렇게 크게 여겨서 자기는 생명이 어찌 된다 할지라도 진리는 변동할 수 없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진리 그거야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뭐 내놨다가 들였다가 또 팔았다가 가졌다가 이렇게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천하게 여깁니다. 그 사람은 제가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이 참 변화가 됐나 안 됐나? 예수님의 제자가 됐나 안 됐나 하는 그 증거는 그 사람의 진리 알고 모르는 그것이 증거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참 자기가 안다고 입술로는 많이 말합니다. 말하는데 진리 알고 모르는 그 증거는 어데 나타나고 있습니까? 여게 어데 나타나고 있어, 여게? 진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거는 뭘 보아서 알지? 자유. 그래, 대답은 옳게 했어. 자유. 자유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그 사람이 믿나 안 믿나 하는 그 표시는 뭘로 나타납니까?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예수를 외식으로 믿는지 참 믿는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는 것은 무엇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까? '내 말에 거하면' 아니요? '내 말에 거 하면' 그것 아니요?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믿는다 하면 신자인데 외식 신자인지 참 신자인지 뭣으로써 무슨 표시를 보고 압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믿는다 해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안하면 안 믿는 사람이라. 요거 똑똑히 알아요. 외식 신자인지 참 신자인지 그것은 어데 무엇으로 표시가 되느냐?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안 사는 것으로써 표시된다. 살고 안 사는 것으로써 표시된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그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진짜로 사는지 가짜로 외식으로 사는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는 것은 무엇으로 표시가 됩니까? 예수님의 제자 되는 것.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으로써 표시가 된다 말이오. 변화되는 걸로 표시가 돼. 요거 자꾸 내나 그거니까 좀 요래 꺼꾸로 요래 좀 알아야 돼요. 변화되는 것으로 표시가 돼.
그러면 그 사람이 변화가 많이 됐습니다. '저 사람 예수 믿고 변화가 많이 됐다' 또 변화가 많이 된 그거는 참 진짜로 변화가 됐는지 외식으로 변화한 체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거야. 모르겠는데 외식으로 변화하는 행동을 하는지, 뭐 사람은 이거 기묘한 것입니다. 기묘한 것이라.
이러니까, 연애 결혼 하는 인간들이 다 망하고 맙니다. 거의 다 대개 망합니다.
그 사람은 외식적으로 뭐 꾀우기를 얼마든지 잘 꾀울 수 있는 이거 참 아주 배암의 제자가 돼 놔서 사람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말하기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게 충성하는 체 하고 열심 있는 체 하고 뭐 진실한 체 하고 이렇게 뭐 '그 사람이 아주 백팔십도 변화됐다' 변화됐는지 안 됐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말이오. 진짜로 변화가 됐는지 거짓 걸로 사람의 눈을 속이고 입을 가루고 막고 하는 그건지 모르겠다 그말이오.
그러면, 변화가 참 진짜로 변화 됐는지 안 됐는지 하는 그 변화가 되고 안 된 그 표시는 뭘로 나타납니까? 뭘로 나타나요? 녜 변화됐나 안 됐나 하는 그것은 그 표시는 그 사람이 참 보니까, 진리와 하나님과 피는 하나입니다. 피와 성령과-성령은 하나님이오-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그 사람이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 진리에 대해서 이제 아는 것이 다르다 그말이오.
아는 것이 달라서 참 진리를 아는 사람이 돼서, 예수님의 피를 안다 말은 예수님의 피를 참 자기가 실감을 느끼고 대우를 하고 또 영감을 받았다고 이래 가지고서 영감 받은 행동도 하고 또 진리의 행동도 하고 그러니까 피와 성령과 진리를 아는 사람, 안다 말은 뭐이라 했지요? 대우하는 것, 인정하는 것, 또 거게 대해서 하나는? 책임지는 것. 이런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대해서 책임을 져 책임을 지고 또 영감에 대해 책임지고 진리에 대해 책임지고 영감과 진리와 대속을 대우를 해.
이런데, 그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진리를 대우하는데 또 거게도 또 가짜가 있을 수 있다 말이오. 진리 알면 그만 다 진짜인 줄 알아도, 아니야. 거게도 또 가짜가 있을 수 있어. 예수님의 피를 노래 부르고 또 영감을 노래 부르고 진리를 노래 부르고 이렇게 또 그 사람이 아주 진리에 대해서는 참 확고하고 진리를 아주 대우하고 진리를 책임지고 인정하고 이렇게 진리를 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안다, 또 영감을 안다, 진리를 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는 이 참 신앙으로서 아주 최고의 신앙으로 볼 수가 있는데 그것도 가짜가 있다 말이오. 이것은 제가 저한테 속지 말라 말이요 남에게 속지 말라 말이오.
그래 그 가짜가 있는데 그 가짜인지 진짜인지 그거는 뭘로 표시됩니까? 자유하는 것으로 표시가 된다 그말이요, 자유하는 것으로. 자유하는 것은 뭐이 자유하는 것입니까?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자유하는 것이라. 죄를 짓지 않는 것.
이러니까, 죄야 뭐 죄야 이제 외식으로 죄 안 지을 수 있습니다. 외식으로 죄 안 지을 수 있지마는서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가짜를 나타내고 진짜를 나타내기 위해 한 것이기 때문에 외식으로 죄 안 짓는 자는 외식으로 죄를 안 짓고 진짜로 죄 안 짓는 자가 아니라는 가짜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택자도 가짜라는 것을 알립니다. 가짜라는 거 나타내요.
하나님이 '너는 지금 죄를 안 짓고 그렇게 살고 있지마는서도 네가 스스로 속고 있다. 너는 참으로 자유하는 자는 아니다. 자유하는 자는 아니다.' 하나님이 자유하는 자가 아닌데도 제가 자유하는 줄 알고 스스로 안심하고 있는 그자를 자유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리기 위해서 당신이 시험 문제를 냅니다. 시험 문제를 내서 그 사람이 죄를 짓지 안할 수 없도록 그렇게 딱, 인간으로서는 죄를 짓지 안할 수 없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환경과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으로서는 죄를 짓지 안할 수 없도록 자기 현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그라니까 사람들이 다 그만 거게 닥치니까 다 죄를 범합니다.
이거는 가짜 금인지 진짜 금인지 알라면은 어째야 됩니까? 가짜 금인지 진짜 금인지 알라면은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습니까? 가짜 금인지 진짜 금인지 하는 것을 알라면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습니까? OOO씨 제부 대답해 봐. 뭐? 금을 진짜 금인지 가짜 금인지 알라면 어떻게 해요? 그런 거는 좀 크게 해. 대답은 백점으로 했는데 좀 크게 해야 돼. 불에 구워 보면 안다 말이오. 불에 구워 보면.
금만 남을 수 있는 도수 높은 불로 구워 버리면은 다 타 버립니다. 금만 남지.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를 믿음을 연단한다 그말은 가짜인가 진짜인가, 가짜를 줘도 스스로 속아서 진짜인 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도 그거 진짜인 줄 알고 있는데 그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는 것을 하나 님께서 알리기 위해서 뜨거운 불을 나타낸다 말이오. 그게 시험이라, 믿음 시험이라. 뜨거운 불로 구워요. 자기가 인간으로서는 범죄하지 안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을 딱 만든다 말이오. 그라면 인본주의의 그 신앙 인간만으로써 믿음을 지키고 있는 그 인본주의의 신앙은 그때에 그 범죄를 합니까? 안 합니까? 왜정말년 때 신사참배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불로 연단하니까 속에 진짜 아닌 인본주의로 된 것은 그 믿음을 신사참배라는 그 불로 구으니까 전부이 다 타 버렸어. 다 타 버리고 남은 사람 얼마 남지 안했어.
그 후에도 여러 번 몇 번 시험이 있었어요. 주일날 갑자기 '내일은 지금 선거하는데 아무 날 선거 안 하면은 다 그 날 큰일난다' 모두 그때는 모두 위협이 있고 그랬었습니다. 이러니까 아예 다 그날 선거 할 요량하고서 다 그렇게 작정하고, 그 날은 선거할라고 그렇게 작정하고 있었는데 그 선거가 날자가 당일 변동됐습니까?, 그거 내가 오래 돼서 잊어버렸는데 어찌 됐지? O장로 알 것 같은데? 어찌 됐어? 예배 보는 것, 예배 보는 거 그래 됐어요. 예배 보는 것. 예배 보는 일이 그리 돼서 모두 다 이제는 예배는 정식 시간은 몇 시인데 그때는 예배를 못 보니까 아예 그때는 통행금지로서 못 보니까 그 안에 보라 이래 가지고 그때는, 지금 말하면 모두 우습지마는 그때는 공산주의에, 반공에 대해서 염려했게고 또 뭐 통행금지 가다가 거석하면 그만 잡혔습니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몇 시가 통행금지지? 제일 이를 때가 언제? 여덟시요 아홉시요? 제일 통행금지 빠를 때가 언제지? 몇 시지? 하 이거 다 이렇게 잊어버려. 그때 여덟시요 아홉시요? 아홉시는 내가 똑똑히 아는데 아홉시보다 일찍은 여덟시 될 때가 있었던가? 일곱시 된 때 있었어요? 세상 것도 좀 알아야 돼. 그거 다 기억하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모두 다 그만 미리 다 써 붙이기를, 광고도 하고. 내일 예배는 밤 예배는 몇시에 밤 예배입니다. 그래 예배당 모두 다 써내서 광고를 붙여 놨어요.
광고를 붙여 가지고서 그 시간에 예배를 봤는데 거석한 사람들은 광고 안 붙이고 시간 변동 못 합니다. 하고서 그때 정식으로서 예배드릴 그 예배 시간에 예배 본 교회가 제가 알기는 부산서 몇 교회가 있었는지, 부산에 몇 교회가 있었습니다. 몇 교회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많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많아 봤자 열 교회 이내지 넘지는 안했습니다. 서울에도 그랬고. 그런 것도 다 지나가니까 슬그머니 그래도 그거 다 시험이라 그말이오.
믿음을 불로 연단하는 금보다 더 의로워, 그러면 금을 불로 연단하면은 얼마나 잡 것은 타 버립니까? 의롭다 말은 믿음의 연단은 하나님이 연단해서 잡 것은 싹 태워 버리고 진짜만 남긴 것이 금을 불로 연단해 가지고 진짜 남는 것보다도 더 확실히 진짜만 남도록 그렇게 만든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제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죄 안 짓는다고 이거 아주 자유하는 줄 알지마는서도 스스로 속기 쉬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현실에서 믿음을 연단시킬 때에 그때에 없어지지 안하고 가지는 그런 믿음이 있고 그때 확 타 버리는 믿음이 있다 그거야.
그라면, 자유케 하는 데는 사람의 의지, 자유하는 데에는 인간의 의지, 결심, 각오, 또 그 사람의 그 담력, 그 사람의 그 절제, 의지, 담력, 열심 각오, 결심 이것을 가지고서 자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OOO목사? 그러면 어짜면 해, 그래? 아는 척하고 그라니까 '자유 못 합니다.' 좀 겸손해. '자유 못 합니다.!' 이래야 그 속에 뭐이 역사하는 거라. '자유 못 합니다.!' 그러면 어째 자유해? '진리가 자유케 해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 제것이 되고 안 된 거 환하게 표가 난다 그말이오. 제것 만들어. 안 만들면 소용없어. 그까짓 거 뭐 인간 의지 각오가 아무 소용없어.
내가 해방 직후에 대구에서 우리 남한에 있는 모든 장로교 총회를 모았는데 그때는 신사참배 하고 안 하고 전부가 다 한뭉텅이가 돼 가지고 장로교는 하나뿐이었는데 총회를 모인 데 보니까 거게서 승리한 사람들은 모두 모가지는 새 모가지 같은 것, 또 모두 못난 것, 영 패전한 사람들은 잘났어. 내가 조금 뭘 상설을 본 거는 아니고 내가 경험한 데 경험했는데 모두 얼굴이 앞으로 보니까 위에는 이래 쩍 벌어지고 턱 있는 데는 쪽 좁아지고 이 사람은 용감상이라.
용감스러운 상이라. 영웅들은 다 얼굴이 그래 생겼어. 또 이거 띤띤한 돼지 모양으로 부자되는 그 사람은 또 옆으로 보면 알아. 옆으로 보면 위에는 솔고 밑에는 척 넓다 말이요, 넓어. 그거 부자되고 돼지 모양으로 미련하고 뭐 대패침으로 찔러도 꿈쩍도 안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모두 잘난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어. 전부이 다 패전한 것들이라. 그래 내가 그때 가니까 뭐 이제 지나가고 나니까 어떻게 배짱 부리는 소리, 억지 소리하던지. 그런데 모두 다 못나고 그런 겁쟁이고 조그만한 그런 사람들은 다 신사참배를 다 이겼어.
이러니까, 환난 때에 승리하는 사람은 의지가 강하고 담대하고 굳세고 아픈 것도 잘 참고 그런 사람이 승리를 합니까? 자기는 아픈 것도 못 참고 간도 작고 오두 어려운 것도 다 견디지도 못하고 이러니까 자기는 참 말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사람이니까 '이거 나는 지금 뭐 이거 시험을 이길 수는 없다. 하나님이 안 이겨 주시면 안 된다.' 하는 그 사람이 다 이기지 저를 믿는 그 잘난 인간들은 하나도 못 이겼어. 알겠습니까? 이제, 그 마지막에 참 예수 믿는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는 것은 뭘로 나타납니까? 뭘로 나타납니까? 자유로 나타나, 자유로. 여게서나 저게서나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자유로 나타나.
이러기 때문에, 이제 사람이 자기가 죄짓는 그런 것을 보고 난 다음에라야 야, 그때는 죄를 지을 때는 나중에 깨닫고 보면은 그때 자유 못 한 거라, 자유하는 것은, 자유하는 것은 이 죄는 범하지 안해도 저 죄 범하면 그거 자유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 모든 죄를 범하지 안하는 것이라야 자유하는 것입니까 이제 어떤 죄 하나를 범하지 안하면 자유하는 것입니까? 모든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자유하는 것이라. 자기에게 모든 닥치는 죄를 범하지 안할 수 있는 요것이 신앙 생활씨 구원되는 것이오. 어쩌든지 죄를 범하지 안한 그 자유한 것만이 하늘 나라 가고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꾸 가짜가 있어. 믿는 것에 가짜인가 진짜인가 그것은 뮐로 보아서 알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걸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것은 뮐 보고 알 수 있습니까? OOO씨? 제자가 되고 안 된 걸 가지고서 진짜인가 가짜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 됐으면 다 됐습니까? 아니야. 그것도 가짜가 있어.
예수님의 제자된 그 제자가 참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는 그것은 뭘로 가지고 표시가 됩니까? 뭘로 표현이 됩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는 몇이 합해서 진리입니까? 몇이라.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은 하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말할 때는 피를 먼저 말합니다. 왜? 피가 아니면 성령과 진리는 나와 상관이 없어. 그래서 그 사람이 이를 아는지 안 아는지, 안다 말은 이 진리에 대해서 참 제가 이 진리는 자기는 생명을 버려서도 자기가 진리를 보수하고 고수해야 되는 진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진리가 어떠한 위력을 가진 그 권위를 가진 것을 그 사람이 인정하나 안 하나? 그거는 또 그것도 외식이 있다 말이오. 그거 외식이 있기 때문에 이것도 외식인지 진짜인지 그 진가는 뭘로 압니까? 자유하는 것으로 알 수 있어, 자유하는 것으로. 자유하는 것에 거게는 이제 진짜 가짜가 있어요.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고것은 자꾸 시련을 하기 때문에 가짜는 가짜로 나타납니다. 가짜로 나타나. 자기가 자유하지 못한 것이 백 가지 중에 하나 있든지 천 가지 중에 하나 있든지 자유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으면 자기가 '나는 자유하지 못하는 자다. 이 자유가 아니고 가짜다.' 이래서 어짜든지 이런 환경 저런 환경 어떤 환경이 어떻게 변화돼도 죄의 종이 되지 안해야 자유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의 목표는 자유가 목표입니다. 이러니까 몇 가지 자유입니까 어데서든지 언제든지 무엇에 대해서든지 자유하는 것입니까 한 가지 두 가지 자유하면 자유하는 것입니까? 모든 것에 자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이런 구원이오. 그래야 우주와 영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 뭐 그런 가짜 외식 그것 가지고서 우주와 영계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면 자유 하리라. 그 다음에 보면은 인자가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그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책임지고 진리가 그 사람을 책임져야 비로소, 그 사람이 진리가 책임지니까 전지 전능을 가진 사람이고 예수님이 책임지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사활이 완전히 그의 것이 됐기 때문에 행위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라 그거요. 기본구원은 우리 힘 안 써도 다 돼 가지고 있어요.
기본구원은 택한 자는 다 얻지마는서도 이제 건설구원은 안 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제 가짜를 어서 가짜인 줄 알고 어서 고쳐야 되지 사람의 눈만 속이고 귀만 속이고 이렇게 마음만 속여서 자기에게 이거 뭐 설득 당하고 하니까 다 진짜인 줄 알아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