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영감생활


선지자선교회 1985년 6월 14일 오일밤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 시간 자유로이 예배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지금도  신앙의 자유를 가질려고 한없는 결사의 투쟁을 하고 있는 지역도 많이 있음을  저들이 압니다. 우리에게 잠시 고요한 시기를 주사 후회 없는 준비를 이루어  씩씩하고 담대하고 평안히 우리 앞에 달릴 길을 달릴 수 있게 하시려고 모든  면을 구비하여 연습시키시고 연단 시키시고 연성 시키시는 주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주님의 대속의 공로의 능력과 이로 인한 성신의  감화와 진리가 저들에게 함께 하셔서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같이 깨닫고  소원하고 능력 받아 믿음에 충성함으로 주님의 형상과 영광의 찬미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령으로 일체 틈 못 타게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라도 이  능력으로 변화를 시켜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인데 곧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일입니다. 세례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요 의식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표요 한 가지의  의식입니다. 그런고로, 세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역사인데 곧 구원하는 역사는  어떤 것인고 하니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할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로 우리에게 주시는 이 구원을 우리가  받아서 이루어 가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선한 양심을 가지지 안하면 이  구원에는 상관이 없고 또 선한 양심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일을 하지 안하면 우리 구원은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인고 하니 사람의 마음에 속한 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중생하기 전에는 그 사람에게 제일 옳고 바른 것이 양심입니다. 영은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기능적으로는 작용을 전혀 하지 못하는 영이 됐기 때문에  순전히 그 사람에게는 양심이라 하는 것이 그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할려고  노력하는 제일 앞잡이로 인도하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중생된 사람은 영이  중생됐기 때문에 영이 그 사람에게 제일 밝은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는.

중생된 영은 예수님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그  영육으로 된 사람에게 제일 주격이요 또 제일 빛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되지 못한 사람은 그 양심이 그 사람에게 제일 빛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된 영 외에는 제일 현명한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그 마음이 지도를 하고 있고 그 마음은 양심이  지도를 하고 있고. 또 마음의 전부와 몸의 전부는 증생된 영이 지도를 하고 있고,  중생된 영은 성령님과 진리가 지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된 영이 그 중생된  사람의 마음을 아무리 지도할라고 해도 그 마음을 지도하지를 못합니다. 중생된  영은 그 사람의 양심을 지도하고 양심이 이제는 그 마음을 지도하고 그 마음이  몸을 지도하고 이래 가지고 사람들의 올바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중생된 영을 지도하고 중생된 영은 양심을 지도하고, 양심은 그 모든 마음의 각양  각종 요소를 다 지도하고, 마음은 또 그 몸을 지도하고, 또 몸은 자기의 현실인  그 모든 사물들을 지도하고 해서 이렇게 바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물을 지도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일이나 그런 것을  마음이 그것을 아무런 상관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기 종이 하나 있는데 이 마음  가지고는 이 종을 울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종을 울리고 싶어도 울리지  못합니다. 꼭 몸을 통해서 이거 울릴 수 있습니다. 또 일도. 어떤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을 아무리 그 마음으로는 이리 이리 하면 된다 싶어서 아무리 그 일을 잘  하는 그런 방편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은 그 일을 직접으로 못 합니다. 그  몸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마음은 몸을 통해 가지고 사물에 대한 일을  하지 몸을 빼 놓으면 안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또 중생된 영은, 중생된 영은  마음을 아무리 지도할라고 해도 지도를 못 합니다. 중생된 영은 양심을 지도하고  양심을 통해서 그 마음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도관이 한 십리나 이십리나 삼십리를 연결을 해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 한 개가 빠져서 떨어져 있으면 수도도 그 수도관으로 물이  올 수 없고 또 전기도 그 사이에 한 자만 끊어져도 그 전기는 거기에 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고게 꼭 연결이 돼 있어야 전력도 올 수가 있고 또 수도관이  연결돼 있어야 수돗물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몸이 아무리 무엇을 할라고 해도 몸은 물질을 통해서 몸이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질을 통하지 안하면 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하나의 무용지물입니다. 그 몸은 아무리 고급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물질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마음은 몸을 통해서 또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을 통하지 않고는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 마음이  아무리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몸이 말을 듣지 안하면 그  마음이 가진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세계에 제일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온 세계에 제일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몸이  그 마음에 이용당하지 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입이 없으니, 입이 말을 듣지 안하니 말로 할 수도 없고, 또 손이 말을  듣지 안하니 글로 써서도 발표를 할 수가 없고 아무리 마음에는 천하에 제일  되는 지혜를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심부름 할 몸이 없으면 그 마음이 가진  것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몸을 통해서 역활을  합니다. 이와 같이 또 중생된 영은. 중생된 영은 무엇을 통해서 마음에 역사할 수  있느냐? 중생된 영은 직접 마음에게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중생된 영은 그 양심을  봉해서 그 마음을 설복시킬 수가 있고 이해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과 마음 사이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또  양심과 또 영감 사이에는 중생된 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유컨댄 요  물질이 있다. 물질이 있으면 그 다음에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양심이 있고 또  중생된 영이 있고 또 고 위에 성령이 계시고 고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이렇게  일곱 단위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사람들의 영에게 와 가지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영감을 통해 가지고 일을 하게  됩니다. 또 영감은 중생된 영을 통해 가지고 우리 마음에 와 가지고 역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직접 와서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중생된 영을 통해서 역사를 하지 중생된 영이 만일 없다고 하면 우리 마음에는  와서 역사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 육에 와 가지고 역사를 하지 못합니다. 또  중생된 영은 우리 마음에게 와 가지고 역사할라 해도 양심을 통해서 역사하지  양심을 통하지 안하면 역사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또 양심은 우리의 몸에 와서  역사할라고 해도 몸에 와서 역사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통해 가지고. 각종의  마음을 통해 가지고 그 몸에 역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 사이  어디든지 끊어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뭐 오층도 짓고 십층도 짓고 백층도 지을 수 있습니다.

백층도 지을 수가 있으나, 일층에, 일층 위에 이층 이층 위에 삼 층 이렇게  올라가면 강도만 잡아서 간다고 하면 백층도 올라갈 수 있고 뭐 논리적으로  말하면 천층이라도 올라갈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한 층이라도 거기에  뛰어서 한 층이라도 그것이 없으면 그 위에는 올라가지 못 합니다. 돌을 포개는  것같이 층어리 층어리 포개면 얼마든지 올라갈 수가 있으나 고 가운데 어느 한  층이라도 뽑아 없애 버리면 그 위에 거는 내려 와야 되고 무너져야 되지  올라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 층이라도 천층이라도 지을 수  있을지라도 일층이 없이 이층을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대 없습니다. 일층  없이 이층을 짓는다면 그거는 이 층이 아니고 그것은 또 일층입니다. 내나 위에서  당글어 매 가지고 했다고 하면 밑에 일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그대로 또 새로 일층이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돌을 돌 위에 놓을 때에  밀에 돌 놓고 위의 돌 놓으면 놓여지고 또 고 위에 돌 놓으면 포개면 포개지고  이래 포개지지만 돌 한 개라도 빼고 밑의 돌 없이 위의 돌을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있다고 하면 밑의 돌 위에 놓은 게  아니고 공중에 당글어 맸기 때문에 밑의 돌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모든 살고 있는 사물, 일이나 물 건 모든  사람, 내 현실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또 모든 사건들이나 그런 것은 내 몸이  있어야 그걸 접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직접 접하지 못합니다. 내 몸을 통해서  그것들과 서로 접촉을 하고 상관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중생된 영이. 중생된 영이 우리 마음에 직접 어떻게 연결을 가질라고 해도 가지지  못합니다. 반드시, 양심도 마음의 요소는 요소이지만 마음의 제일 발단되는 빛이  되어 있고 제일 선구자요 눈과 귀가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양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양심을 통해서 그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고 마음에 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없으면 그 중생된 영은 그 사람이 자기의 육체에게는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신 성령님도 중생된 영이  아니면 그 사람의 양심에나 마음에나 몸에 직접 역사하지를 못 합니다. 중생된  영을 통해서 역사하게 됩니다. 그것이 순서요 그것이 체계적이요 조직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증거해 준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순서가 있는데 그 순서에 한토막이라도 없으면  연결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마음이 암만 있어도 몸이 안 들으면 마음의 기능적 활동은  전혀 못 합니다. 몸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또 중생된 영이 아무리  안타까워도 양심이 없으면 중생된 영은 그 마음에게 역사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고 마음이, 마음이 이 모든 사물에 대해서 활동을 할라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중간에 다리를 놔 줘야 되고 몸이 중간에 심부름을 해 줘야 되고 몸이 중간에서  중간 역할을 해야만 그 마음의 모든 기능이 사물에게 가서 역사할 수가 있지  몸이 없으면 역사를 못 하는 거와 꼭 같이 요거는 여러분들이 잘 알 수 있겠지요.

 요와 같이 그 사람의 중생된 영이 아무리 그 마음에게 역사해서 중생된 영이  마음을 잘 다스릴라고 아무리 해도 마음외 제일 선구자로 되어 있는 양심에  있는데 그 양심을 통하지 않고는 중생된 영이 그 마음에게 아무 연결도 못 하고  연락도 못 하고 아무런 상관을 가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와 가지고 어떻게 역사할라고 애를 써도 그것은 심판적인  주권의 능력으로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에 위반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또 성령님은 중생된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를 합니다. 중생된 영이 없으면 하나님은 중생하지 안한  사람에게 와 가지고 역사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님은 영을 통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이 죽어 있는 고로 성령이 와서 우리를 살릴라 할 때에  먼저 영을 살려야 되기 때문에 영을 살려 가지고 영으로 더불어 연결을 해  가지고 우리의 심신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주권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영을 중간에, 중생된 영의  다리를 놓지 않고라도 우리에게 와 가지고 우리 심신에 와 가지고 얼마든지 역사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못 합니다. 그거는 불법이기 때문에 못  합니다. 그거 월권이기 때문에 못 합니다. 그거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못  합니다.

 이 말을 왜 자꾸 이와 같이 하는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목적이 어디 있는고  하니 모두 연결되는 그 순서가 있어서 모두 아래 위를 다 연결을 해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한 동가리라도 없으면 안 된다 그  말이오. 한 토막이라도. 한 토막이라도 없으면 안 된다, 비유컨대 수도관을 만일  백리를 수도관을 묻었는데 이제 그 수도물이 백리 밖에서 물이 흘러서 갑니다.

그래도 고 가운데 수도관 한 동가리라도 쏙 빼 버렸으면 그 물은 안 나갑니다. 못  나가는 것입니다. 한 동가리만 빼도 못 나갑니다. 한 동가리는 냅두고 요만치만  시도 안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동가리가 잇겨야 되지 동가리가 끊어져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지금 말하고 있는고 하니 우리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또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함께 일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성령님과 우리 영은 언제든지 동거 동행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는 우리가 성령님과 직접 연결하는 것같이 그렇게도 말해 놨고 중생된  영으로 연결하는 것같이도 말해 놨고 이랬으나 실은 똑똑히 밝히기를 성령님이  중생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와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해 준다  그렇게 똑똑이 명문을 해 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중생된 영과 성령님은 우리  마음과 몸으로 되어 있는 이 육체의 구원. 이 건설구원, 성화 구원, 하늘의 영광  구원 이 구원을 이 룰려고 중생된 영도 탄식을 하면서 애를 쓴다고 로마서 8장에  말씀했습니다. '또 성령님도 탄식을 하시면서 애를 쓴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과 중생된 영이 우리 마음과 몸을 거룩한 마음과 몸으로  변화시켜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영생하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데 그 가운데에  한 동가리가 끊어져 가지고 헛일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오십 년이고  육십 년이고 칠십 년이고. 오래 믿는 사람은 팔십 년도 믿고 백 년도 안  믿겠습니까? 지금도 나면서 모태에서부터 예수 믿는 사람은 백살 먹어 죽으면  백년 예수 믿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백 년 예수 믿어도 중생된 영과 그 마음과  연결이 안 돼 가지고 중생된 영에게 와 있는 영감과 진리의 그 능력의 은혜가 그  마음에 건너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마음과 몸은 항상 첫째 아담에게 속한  옛사람대로 살고, 옛사람대로 살면서 예수 믿는다고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고 예배당에만 왔다 갔다 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의식적으로 학습도 세례도 또 성찬도 집사도 뭐 권찰도 장로도 이렇게 한다  하지만 고 사이에 중생된 영과 그 사람의 마음과 고 사이 고게 한 동가리가  벌어져 가지고, 한 동가리가 빠져 가지고 모든 일이 다 헛일하고 만 그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일생 동안 집을 짓기는 지었는데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짓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지 안했기 때문에 나중에 가보니까  다 헛일이라. 공적이 다 불타 버리고 헛일이라. 이러니까 구원 얻으나 다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거와 같이 됐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그것은 인간 생각대로 다 예수 믿는 것이지 하나님으로 인한 그  믿음 생활이 안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무리 내 마음에. 내 마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내  마음에 지금 내가 오늘 저녁에는 아무 형제 집에 가 봐야 되겠다, 부모 집에 가  봐야 되겠다, 무슨 어디를 가 봐야 되겠다 아무리 그렇게 마음으로는 가고 싶어  막 불이 타도 몸이 말을 듣지 안하면 못 갑니다. '그라면 타고 가지' 하지만  아무리 가고 싶지만 내 혀가 말을 듣지 안하면 가고 싶은 발표를 하지를 못  합니다. '말을 못 하면 글로 쓰지' 하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안하기 때문에 글로 써  가지고도 발표를 못 합니다. 그러면, 마음 저 혼자 가지고는 아무것도 못 탑니다.

마음은 반드시 그 몸을 통하여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생된 영은 그 사람에게 있는 양심을 통해서만 그 사람의  마음에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없으면 중생된 영이나 성령은 그 사람의  마음에 건너오지 절대 못 합니다. 요걸 꼭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하나님 아닙니까? 성령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변화시킬라면 얼마든지 시킬 수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안 됩니다. 영을 통하지 안하고는 안 되기 때문에 성령님이 그 사람의  심신을 구원하는 데는 영부터 중생을 시켜 놔야 됩니다. 영부터 중생시키지  안하면 안 됩니다. 영부터 중생시켜 놓고 중생시킨 그 영을 통해서, 중생된 영을  통해서 그 사람의 양심에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그 마음에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마음을 통해서 그 몸에 역사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몸을 통해서 모든 그 사람의 사물이라는 현실에 가 가지고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한 동가리라도 끊어지면 안 된.다 그걸 지금 강조하느라고 자꾸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공사는 아주 전기 공사를 했는데 수억을, 수억만 원을 들여서 전기  공사를 했습니다. 수억만 원을 들여서 발전소에서 전기를 뽑아 가지고 지금 저 큰  도시에든지, 어떤 도시에나 어떤 데 전기를 전력을 보내 가지고 일할라고 전력을  보내기를 수백리를 지금 전력을 끌고 갔습니다. 끌고 갔는데 거기에 선이 다 잘  돼 가지고 있지만 고 가운데에 연결시키는 스위치를 할라고 연결시켰다가 뗐다가  할라고 해 놓은 그 무슨 연결선 스위치 그게 있는데 고게 딱 재껴 떨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기는 안 갑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고게 연결이 돼야  갑니다. 연결이 돼야 되지 고게 연결이 안 되면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수백리를  배선을 해 가지고 잘 공사해 놨다 할지라도 고게 그저 쪼그매도 끊어지면  헛일입니다. 만일 요만치 끊어지면, 요만치 끊어지면, 요만치 끊어지면. 큰 많은  전력이라면 요만치 끊어졌으면 요게 가 가지고 뭐 불이 켜지고 약간의 전력은  여기 그 힘으로써 선을 통하지 않고도 건너갈 수가 있기 때문에 약간은  건너갑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전력은 건너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공사는 다  헛일입니다. 고걸 이어야 됩니다. 고걸 잇지 안하면 이렇게 애 써 놨는데  헛일이라 그 말이오.

 수도를 지금 저 낙동강에서 물을 끌어 올라고 지금 해 놨는데 거기에 관을 묻어  가지고, 뭐 얼마나 큰 관을 묻었는지 묻어 가지고 이렇게 오는데 그 공사를 뭐  얼마나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 가운데 한 동가리만 딱 끊어졌으면 그 물은  안 옵니다. 이제까지 공사해 놓은 거 헛일입니다. 그걸 이어야 되지 그거 안  이으면 헛일이라.

 수십년 예수 믿어도 어딘간가 연결이 끊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모든  우리 믿는 사람들의 구원이 어느 동가리가 고장이 나 가지고 끊어져 있는가?  어느 동가리가 끊어져 있는가? 그러면, 마음을 쓰지 않는가? 마음은 자기 구원을  이룰라고 애를 씁니다. 몸도 자기 구원을 이룰라고 애를 씁니다. 쓰는데. 사람들이  하나 끊어 놓은 토막이 있으니까 토막이 있으니 그 토막이 뭐인가? 그 토막이 곧  신앙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끊어져  가지고 있으니까 수십 년 예수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그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보고 그대로 살지만 양심이 역사 하지  안했으면 그 사는 것이 그것이 다 거짓되어서. 거짓되어서 성령님과는 연결을 못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는 연결을 못 합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이것은 그 본인의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  본인의 지식의 지배를 받아서 그 지식을 따라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대로  제일 이상적인, 제일 완전한. 정확무오하다고 생각하는. 제일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참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지식을 있는 대로 다 자기가 많이 가졌든지 적게  가졌든지 가진 지식을 다 활용해 가지고 고 지식대로 제일 좋고 옳고 바른  그것을 택해서 주장을 하고 그대로 할라고 하는 그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의 양심은 꼭 같습니다. 같은데, 타락하고  난 다음에 타락하고 난 다음에 양심의 종류가 많아졌습니다. 타락하고 난 다음에  사람의 지식은 수없이 그 종류가 많게 됐습니다. 옳은 지식은 하나이지만 옳은  지식 외에 틀린 지식은 백도 천도 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지식이 바르지 안하면 그 양심은 바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삐뚤어지면 양심은 삐뚤어졌습니다. 또 그 지식이 하나 밖에 모르면 그 양심은  하나밖에 모릅니다. 그 사람의 지식이 백 가지를 안다면 그 양심은 백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백 가지 가운데 옳은 것은 하나만 알고 나머지  구십 구는 다 틀린 걸 알면 그 사람의 양심은 옳은 것은 하나밖에 모르고 다  틀린 것만 아는 양심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종류가 심히 많게 되었습니다.

많게 됐는데 그 많은 양심 가운데에는 산 양심이 있고 죽은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양심은 죽은 지식으로 활동하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 되고 산 지식으로  활동하는 양심은 산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지식이 무엇이며 산  지식이 무엇인가? 산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만 살았지 하나님의 지식 하나  외에는 전부 다 죽은 지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자기  지식을 삼은 그 사람의 양심은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도 가지고  있고 사람의 지식도 가지고, 사람의 지식도 그 사람이 긍정을 하고 하나님의  지식도 긍정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양심은 죽은 면도 있고 산 면도  있고 이렇게 섞여 있는 양심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 양심은 하나님의 지식만을 자기 지식으로 삼는 그 양심이 산 양심입니다.

 그러면 기독자가 기독자라고 다 산 양심을 가졌느냐? 산 양심 가진 것 아닙니다.

기독자 중에 하나님의 지식인 이 말씀만 참되다 인정하고 그 말씀 외에 다른  지식은 다 부인하고 말씀만이 참되다 인정하기 때문에, 요 말씀만 참되다  인정하여 요 말씀을 가지고 요 말씀대로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찾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지식이라고 인정하고 요 지식만을 참된  지식으로 믿는 사람 고 사람만이가 산 양심을 가진 사람이요 그 외에 거는 다  잡탱이 양심 다 죽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그 사람의 지식의 인도를 받아 가지고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찾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불교인은 불경을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불경이  말하는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찾는 것이 불교인의 양심이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지식이 옳고 바르다고 하는  거 그것을 찾아 가지고 가지는 것이 공산주의의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양심이 많기 때문에 양심생활이라고 해 가지고 인정하느냐? 인정 못  합니다. 양심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양심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양심도 다  거짓 양심이 많기 때문에 참 고 산 양 하나님의 지식대로만 인도를 받아 가는 고  양심만 산 양심으로 우리는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모든 지식의 종류가 백 가지 있으면 양심은 백 가지 종류가 있고  천 가지 지식이 있으면 양심은 천 가지 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하나뿐이기 때문에 산 양심은 하나뿐이라는 그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모든 죽은 지식, 죽은 지식에 속한 죽은 양심은 버려 두고  이제는 산 양심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합시다. 산 양심은 하나님의 지식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의 인도를 따라서 행해 가는 그것이 신앙 양심 생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서 고대로 행해 나가고 살아가는 고  행동을 신앙 양심 생활이라. 신앙 양심 행위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행위는 어떤 게 신앙 양심 행위인가? 신앙 양심행위는 하나님의 이 신구약  성경 진리 지식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고 지식대로 옳고 바르게 할라고  애쓰는 고 마음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신앙 양심 생활이라. 양심 행동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 신앙 양심 행위는 그것이 신적 요소인가 인적 요소인가  하는 거기에 대해서 구별을 해야 되겠습니다. 신앙 양심 생활은 신적 요소가  아니고 인적 요소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어서 진리 말씀도  받았고, 또 성령으로 중생도 됐고 진리로 중생도 됐고, 또 영감도 우리에게 다  허락이 됐지만 그 은혜를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요  말씀대로 살아 보자 하는 고 마음이 무슨 마음이냐 하면 믿는 자의 양심, 신앙  양심, 믿는 자의 양심입니다. 고래 가지고 고대로 행하는 것이 뭐이냐? 신앙 양심  행위요 양심생활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행위요 양심생활이면, 신앙 양심 생활이요 신앙 양심행위라고  하면 그 행위와 생활은 그것은 그 능력이 어떠합니까? 그 능력이 옳고 바르지만  그 능력은 인적 요소이기 때문에 사람만치만 힘이 있지 그 이상은 없습니다.

사람만치만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양심 행위가, 신앙 양심 행위가  평생 신앙 양심 행위로써 끝을 마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 양심 행위.

 그러면 신앙 양심 행위는 어떤 것인고 하니 신구약 성경을 자기가 참되 다 옳다  인정을 하고 이제는 내가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 나는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 말씀대로 살아서 말씀에 삐뚤어지면 안 하고, 말씀에.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거라도 말씀대로 행하고 하는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대로 행하고 하는 고 사람은 신앙 양심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 양심  생활을 일생 동안 해도, 내가 신구약 성경을 보고 이 성경 말씀대로 내가 옳게  바르게 내 가 사니까 내 구원은 잘 이루어졌을 것이다 생각하지만 안 됩니다.

자기는 성경 말씀보고 요 말씀대로 내가 말씀이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마라는  것은 안 하고요 말씀대로 내가 살겠다 이렇게만 생각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고  이제는 말씀대로 살았으니까 다 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인적  요소로만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성이나 불변성이나 완전성이나  영생성이나 이런 것은 갖추지를 못썼습니다. 그거는 안 됩니다.

 이제 그 신앙 양심 생활이 뭐 때문에 내가 신앙 양심 생활하느냐? 내가 성경  말씀을 보고 그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써서 말씀대로 이렇게 옳게 바르게 살라고  애를 쓰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이유는 신앙 영감 생활 할라고 영감 생활하기  위해서 신앙 양심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영감 생활하기 위해서 신앙 양심 생활  합니다. 그러면, 신앙, 그 사람 신앙 양심 생활하면서 그것으로써 종착이라고  생각지 안하고 그것으로 가지고 종착이라고 생각지 안하고. 신앙 양심  생활뿐이라면 암만 성경 말씀대로 살기는 살았다 할지라도 인간이 산 것이기  때문에 인간 요소로만 행한 것이지 인간 요소 외에 아무런 객관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나 유한한 제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만치밖에는 안 됐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신앙 양심 생활하는 것이 뭐 때문에 하느냐? 신앙 양심 생활  하는 그것이 성령님이 보고 '아, 너는 이제는 바르다 옳다' 인정하시고, 성령이  옳다 인정하시는.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보면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인정이란 말을 성경에 많이 해 놨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인정했을 때에 성령의  인을 친다 그랬습니다. 인을 친다. 그 생활은 주님이 책임집니다. 고러면 신앙  양심 행위가 신앙 영감 행위가 됩니다. 신앙 영감 행위가 되면 그게 뭐이냐? 신앙  영감 행위가 되면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 행위라. 온전한 믿음 행위라 이랬어.

온전한 믿음 행위라, 그러면, 그 믿음은 무슨 힘이 있느냐? 그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 믿음은 이제, 자기가 신앙 양심 생활로 신앙 영감 생활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신앙 양심 생활에서 신앙 영감 생활이 되어 하나님이 옳다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기를 소망하면서 노력하는 거기에서  자기가 그것을 맞았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을 치시고 성령이 같이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지식대로 성경 말씀대로 사니까 이만 하면 됐다,  성경 말씀을 법전으로 삼습니다. 성경 말씀을 법전으로 삼아서 법전을 지킵니다.

성경 말씀을 자기의 생활의 법칙으로 삼아 가지고 이제 그 법칙대로 삽니다. 성경  말씀을 자기가 계명으로 삼아 가지고 그 계명을 지킵니다. 지키나, 지켰으면  '이거면 다 됐다. 이것이면 다 됐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 됐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 됐다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신앙 양심 생활은, 자기가 자기 양심대로  생각할 때에 '요게 옳고 바르고 참되다. 바르다. 됐다' 그러면 인정하는 자가  자기입니다. 인정하는 자가 자기이기 때문에 그거는 잡탱이입니다. 인정을 했지만  나중에 보면 다 삐뚤어진 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  양심에 자책할 것을 찾지 못하나 이 때문에 내 가 고민한다 나를 판단하실 이  그분은 알지 못하심이 없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신데 그분이 인정해야 되지 그  분이 인정하지 안하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의 인정을 바라서 그 분이  인정할 때에 비로소 안심을 합니다. 그분 인정할 때에 그것이 뭐이냐? 성령님이  인정하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너를 생명책에서 네 이름을 흐리지 않겠다.

또 네 이름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시인하겠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고 있다 착한 양심생활이면 다가 아니라, 착한 양심이 최고의  심판자, 최고의 심판자, 최고의 주권자가 아니라 인간의 착한 양심은 최고의  심판자 주권자 그분이 인정하도록 할라고 애를 이래 쓰는데 애를 쓸때 그게 바로  되면 인정을 딱 하면 이제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동행을 합니다. 그럴 때에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양심 생활이 성공을 하면 신앙 영감 생활이 되어 신앙 영감  생활이 그것이 비로소 온전한 믿음 생활이 되어지고 그것이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능력을 가진 신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육체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희들이 고대하던 메시야가 왔습니다. 메시야가  왔는데, 안식일을 지키기를 얼마나 잘 지켰냐? 그날은 닭 모이도 안 줍니다. 모이  주면 한 내끼라도 떨어져 가지고 움이 나면 씨 뿌린 게 된다고 해서 모이를 안  진. 그렇게 엄격하고 안식일날은 불도 안 때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율법적으로만 그걸 지켰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그것을 목표하지 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도무지 받아 보지 못했다 그 말이오.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삼십 팔 년된 병자를 안식일 날 고쳐 가지고 일어서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니까 그 사람들이 시비를 해 가지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죽일라 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말이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았느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해 가지고 예수님을 정죄해서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저거 양심대로는 아주 지켜서 신앙 양심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신의 감화를 받는 그것을 표준하지 안해 가지고,  성신의 감화를 표준하지 안했기 때문에 저들은 성신의 감화를 보지 못했다  말이오.

 나다나엘 같은 사람이나 또 시므온이나 안나 같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말씀대로 살면서 영감을 표준해 가지고. 영감이 안 오면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라.

영감 오기까지만 죽자살자 달라들지. 이러니까 나다나엘은 기도하면서 영감을  받아야 이제 안심이 되지 영감 받지 안하니까,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고 영감이 와서 '아, 네 기도가 됐다' 인정해 줘야 되지 그 영감이  안 오면 자기가 암만 성경 말씀대로 해 봤자 불쾌해서 못 견딘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는 신앙 양심 생활의 목표가 어디 있느냐? 영감 생활에 도달해서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 생활.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과 연 결되어서, 전지와  연결되니까 전지가 내것 됐고 전능이 내 것 됐고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된 건데  내 의견이 하나님의 의견이라.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이루지 안하고는 못 견딥니다. 다 이루게 됩니다. 당신의 뜻이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된 요게 믿음이기 때문에 요 믿음을 찾아 나아가는 그  과정은 신앙 양심 생활에서 다 됐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양심에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하나 이러기 때문에 내가 지금 걱정하고 탄식하는 것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전부를 아시는 그분의 뜻에 딱 맞았으면 영감이 올 건데 영감이 안  오니까 이거는 안 됐다 말이. 영감이 와서 성신의 감화가 오면 됐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도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성경 말씀대로 찾아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찾아서 이 모든 것을 기도해도 자기  마음대로 성경대로 구하기도 하고 감사도 하고 오만 거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기도는 언제든지 성경 말씀. 말씀대로 기도하는 그것이 표준이요 그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대로 기도를 주욱했습니다. 했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율법으로 지켜서, 율법 아래 있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의 새생명에는 나아가지 못한 사람이라.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아무리 기도해도, 뭐 아무리 기도를 해도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됐다' 그분이 와 가지고 내 기도를 인정을 하시고 찬성을 하시고  '됐다' 그분이 인정하는 그 성신의 감화가 없이는 이거는 기도 헛기도라. 그러면,  기도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밤새도록 기도해도 감화가, 감화가 와서 성신의  감화가 '됐다' 성신의 감화가 인정하고 동행 동참하기 전에는 헛기도 했어.

그러니까 만날 번민 고민이라. 비로소 그라다가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됐다'  할 때에 됐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설교 준비를 해도 자기가 아무리 성경 맞춰 가지고 뭐 놓고 떼고  해 가지고 얼마든지 맞취 놨고 또 자기가 뭐 큰 소리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강하게도 외칠 수도 있고 있지만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됐다 하면 그분이  인정하는 그분이 인정하는 것이 없으면 이거는 항상 근심이요 걱정이요 고통이요  이거는 미결이기 때문에 안심할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또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내가 너를 시인하겠다 네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뭐입니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율법을 지켜서 신앙 양심 생활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전지 전능의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하나님이 연결되어 하나님이 건설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이요 영원이요 불변의  것인 그것을 가리켜서 금과 은과 보석으로 불타지 안할 것들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영감을 맞이하는 중매쟁이라, 또  성경 말씀은 울타리와 같다, 밖에 탈선돼 나가지 안하고 울타리가 있으니까  울타리 안에 있지만, 울타리 있지마는 울타리 안에는 한가운데 중앙이라 하는  한가운데 중앙이 있으니까, 뭐 이렇게 울타리 있으면 여게 있는 것도 울타리 안에  저게 있는 것도 울타리 안에 있지만 중앙의 한가운데. 중추. 요 한가운데는 가  가지고, 한가운데는 자기가 서지를 못했다 그럴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밤에 지금 말하는 것은 뭣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  신앙생활이 신앙 양심 생활이 없으면 구원은 헛일입니다. 신앙 양심 생활 이 우리  인간 편에 있어서는 제일 보배입니다. 신앙 양심 생활이 우리 인간 편에 있어서는  제일 보배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은 어떤 건데? 신앙 양심 생활은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요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고 하면서 옳게 바르게  할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모르자만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가 아는대로 여기  무슨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지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외식도  아니고 이중도 아니고 참 자기 마음으로서는 제일 요래 하면 옳겠다 하는 아무런  가책 없는, 자기 마음으로서는 제일 옳다고 인정되는 그것을 하는 거. 우리가  진리를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이중 삼중 십중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마음이 볼 때에 이거는 참 잡것이 섞이지 안하고 참으로 자기가  진실되이 하나님 말씀대로 할라고 이렇게 애를 쓰는, 섞임이 없이 말씀대로 바로  할라고 하는 거, 요건 내대로는 요거 바로 됐다, 참 뭐 내가 외식으로 하지  안하고 무슨 다른 목적으로 표준으로. 하나님 말씀 지키는 사람은 목적이나  동기나 그린 것이 얼마든지 가짜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남에게, 다른 사람에게, 봐라! 남으로 하여금 '봐라' 해서 남  보이기 위해서, 무슨 또 욕망을 위해서 뭐 명예를 위해서 뭐 별별 동기와 목적  가지고 성경 말씀대로 얼마든지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건 자기 양심이  그것을 다 정죄 할 것입니다. 내가 참 내 마음에 진실된 마음으로 말씀대로  살라하는 게 아니라 이거 때문에 살고, 저거 때문에 살고, 이 욕망 저 욕망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이런 외식 저런 외식이 나한테 있지 않는가? 그것은 양심이  정죄를 해서 다 그것을 정죄할 테니까 양심의 정죄를 받아서 양심대로 정비  정돈을 한 그 생활이 신앙 양심 생활인데. 그것도, 고 신앙 양심 생활도 이것으로  다이다 하는 고 사람은 뭐냐?  신앙 양심 생활을 뭣 때문에 하느냐? 신앙 양심 생활하는데 성령님이 와 가지고  옳다 인정을 해 주시고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해 주셔야 되겠는데 양심 생활에서  성신이 와 가지고 감동을 해서 '됐다' 인정해 주시기 전에는 내가 안심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나에게 인정해 주시는 그것을 목표로 두고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고것이 잡탱이가 다 제해 나가고 제해  나가서 아무리 자기 마음에는 바울이 말한 것같이 이제는 고칠 게 없고 틀린 게  없는데, 양심에 틀린 것은 하나 도 없는데 그래도 안심이 안 됩니다. 양심에는  없는데 그래도 안심이 안.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데 성신의 감화가 왔을 때에  우리에게 와서 우리에게 안심을 주고, '됐다' 안심을 줄 때에 그때에 비로소  평안해진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 인적 요소는 신앙 양심 생활이 제일 보배입니다. 그러나 신앙  양심 생활이 목표가 영감 생활이 아니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양심 생활이  아니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거는 교만이요 그거는 다 인적 요소이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신앙 양심 생활하는  것이 뭐이냐? 양심생활 해 놓고도 지금 벌벌 떨고 있습니다. 양심생활 해 놓고,  양심생활 해 놓고 자책할 것이 없어도 고칠 거 없고, 고칠 거 있으면 고칠 수  있는데 고칠 것도 성령이 와 가지고 인정하는 인친 표도 주지 안하지, 인도 치지  안하지 성령님의 감화도 주지 안 하지 성령님이 인정도 안하지 이러니까 사람  죽을 일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암만 이래도 고민하다가 비로소 자꾸 찾고 찾고  이랄 때에 그것이 성령이 볼 때에 '됐다' 싶을 때는. 성령은 애터지게 이래 있다가  고걸 찾아서 됐을 때에 '됐다' 해서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고  사건에는 전지 전능이 그것을 책임지고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밤에는 신앙 양심 생활이 우리 인적 요소에는 제일 보배다,  둘째로는 신앙 양심 생활은 인적 요소인데 신앙 양심 생활과 신앙 영감 생활을  구별해야 된다. 신앙 양심 생활은 인적 요소뿐이기 때문에 다 유한한 인간의  공작이고, 신앙 양심 생활이 신앙 영감 생활이 됐을 때에 그는 능치 못함이 없는  행위이다 그러면, 신앙 양심 생활은 신앙 영감 생활을 목표로 하고 찾아가서 신앙  영감 생활에 도달될 때라야 비로소 아멘 하고 안심을 해야 된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또 내일 아침에도 계속하겠습니다. 이런데 새벽 기도에 안 나오고 이런 사람들은  예수 믿어야 뭐인지 모릅니다. '뭐 나는 안 믿어도 나는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나는 박사이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유식하기 때문에 나는 됐다' 하지만 그 유식  다 압니다. 그 유식이 깜깜해서 뱀의 지식이기 때문에 사람을 어둡게만 만들지  절대로 그 지식이 양심을 소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지식이 하나님의 성령을  끌어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 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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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2 신앙은 전진이다-겸손/ 베드로전서 5장 5절-11절/ 800928주후 선지자 2015.11.27
2731 신앙은 힘써야/ 베드로후서 1장 1절-9절/ 871120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27
2730 신앙의 3계단/ 창시기 3장 6절/ 880828주후 선지자 2015.11.27
2729 신앙의 걸음/ 히브리서10장 32절-39절/ 1974. 7. 28. 제30공과 선지자 2015.11.27
2728 신앙의 기초작업/ 누가복음 21장 33절-36절/ 881203토새 선지자 2015.11.27
2727 신앙의 두 길/ 창세기 13장 5절-15절/ 840805주후 선지자 2015.11.27
2726 신앙의 두길/ 창세기 13장 1절-16절/ 890210목새 선지자 2015.11.27
2725 신앙의 목표/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31028금새 선지자 2015.11.27
2724 신앙의 보배로운 요소 다섯가지/ 누가복음 5장 8절-11절/ 860630월새 선지자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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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8 신앙의 잠을 깨라/ 마태복음 24장 42절-51절/ 840623토새 선지자 2015.11.27
2717 신앙의 표시/ 요한복음 8장 31절-34절/ 880903토새 선지자 201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