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5 17:05
신앙양심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0절∼22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을 때에 인간이 하지 아니한 여러 가지 표적들이 있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것이라든지 또 흥해 바다를 아무 기구 없이 건넌 것이라든지 또 홍해 바닷물이 양편으로 산더미 같이 쌓이고 바다 가운데는 육지같이 되어서 건넌 것이라든지 또 마라에서 쓴 물이 나는데 나무 가지를 꺾어 던져서 단물이 되어 구원된 것이라든지 또 므리바에서 물이 없을 때에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마신 것이라든지 또 사십 년 동안 농사짓지 안하고 만나 가루로 먹은 것이라든지 이런 모든 그 표적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시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표적은, 그 표적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모두 표적들이 사람으로 한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서는 되리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종류와 같은 그 외의 것들도 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와 가지고 하늘나라에 가는 그 노정 중에 인간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모든 일들은 인간의 이치에는 맞지 안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다 해결이 되어지고 형통해질 것인 것을 가르친 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셨고. 예언하신 것을 친히 역사를 통해서 그 정하신 장소. 때에 다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구약 때에 예언하신 그 예언이 예수님까지 거의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그 말은 일차 창조의 것들이 변해서 이차 창조의 새하늘과 새땅 이 세계가 되기 전에 예언해 놓은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해 놨는데 구약의 것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또 그 후에 사도들을 통해 가지고 우리에게 이차적으로 예언해 놓은 예언이 있으니 곧 이 예언이 신약 성경에 있는 모든 발표된 말씀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한 말씀은 이것은 우리들에게 신약 교회에게 예언해 준 말씀입니다.
구약 교회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해 주신 그 예언을 다 믿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들이 헛된 일을 하고 실패를 했습니다.
기본 구원은 얻었다 할지라도 다 부러운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은 그런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거튼거튼 든 데도 아브라함이 다른 것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려 주신 예언을 믿고 그대로 하므로 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또 칭찬함을 받았습니다. 그 자손들도 다 그러합니다. 유명한 사람 요셉이가 걸은 걸음도 다 믿음으로 걸은 걸음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고, 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든지 다니엘이라든지 그런 분들도 다 믿음으로 걸은 걸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뭐 믿음으로 걸은 사람들을 예를 든다고 하면, 히브리 11장에 보면 다 거기에 명명을 열거해서 종류대로만 갖추어 놨는데 그들은 다른 아무런 것도 힘으로 삼지 아니했고 하나님이 약속으로 선포해 놓으신 이 약속을 참되다 믿는 그 믿음 하나 가지고 다 초자연의 그 역사와 구원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오늘 신약 교회도 그러합니다. 구약에 있는 예언도 우리에게는 해당되어 있고 신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예언과 예약들. 미리 약속한 이 예약들도 다 우리에게 해당되어 있는데 이는 순전히 객관의 역사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참되다 인정하고 그대로 될 것을 내가 인정하고 그대로 복종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외에 딴 길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라는 구원은 없어질 것들이 아니요 다 영원한 것이요. 완전성의 것이요, 다 영생의 것들이요, 또 영원히 불변의 것들이니 이런 것들은 인적 요소로는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적 요소로 불변의 것을 하며 영원한 것을 하며 완전한 것을 하며 영생의 것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거는 순전히 객관의 능력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그것이 우리에게 건너 오는 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이 되는 그 연결,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그 신실하심의 역사가 우리에게 건너오는 데에는 무엇으로 건너 올 건가? 거기에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아무런 건너오게 할 만한 그런 요소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있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잘해 주실 것이라. 또 신실히 해 주실 것이라. 그의 한번 선포해 놓으신 약속의 그 예약은 천지는 없어져도 변하지 않는다. 그분을 믿는 것, 그분의 약속을 믿는 것, 그 믿는 것 외에는 우리의 초자연의 초인간의 것을 끌어올 만한 그런 요소는 믿는 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약 때도 이 예약의 모든 예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다 그대로 되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 뭐 노아는 다른 힘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그저 부족하지만 행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라니까 그것을 120년을 두고 배를 모은 그것이 아무리 육지에 배를 모아놨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언해 놓으시고 예언을 지키는 자의 그 자의 모든 행동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맞추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예언대로 한 것은 그 예언대로 한 것이 구원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맞추시고 고 예언대로 하지 안한 것은 온 천하가 달라 들어 가지고 어떤 찬란하고 능한 일을 해 놔도 하나님이 고 일이 헛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를 헛것으로 만드셨다 하는 그 말씀은 인간들이 오늘까지에는 딱 들어맞는 이치에 맞도록 딱 해놨지만 고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고 이치에 하나도 맞지 안하도록 빽 틀어 가지고 달리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의 선포해 놓으신 예약을 따라서 할 때에 당신은 주권 개별 섭리의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것도 주권적으로 그 모든 개별 섭리하시는 그 분이 우리에게 약속을 선포해 놓으시고 약속대로 행하는 우리 일이 맞아 들어가도록 그렇게 섭리를 하십니다. 만일 공중에 집이 달려라 하면 그런 일이야 안 될 일이지만 공중에 집이 달려라 했기 때문에 집이 달릴 것을 믿으라 했기 때문에 나는 공중에 집이 달릴 것을 믿는다 했으면 하나님이 주권 능력을 가지고 공중에 집이 달리도록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것은 믿는 무슨 힘이 있어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믿을 때에 우리 믿는데 고게 딱 들어맞추어서 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예약하신 말씀을 무시하고 하는 것은 천하가 해도 하나님께서 고게 들어맞지 안하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위에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다 헛것으로 여기신다 그렇게 고린도전서 1장 이하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전에도, 그 표적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여러분들이 다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믿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그 표적으로 나음을, 받은 자는 평생 잊어버리지 말고'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고 어떻게 들은 것 지키라 만일 생각지 못하고 잊어 버렸으면 회개하라. 들은 것을 지키지 못했으면 회개하라. 그러기에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안 됐으면 회개하라. 이것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뭐 기쁜 소식이라고 나한테 전화가 좀 전에 왔었는데, ○○교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가 왔는데 기쁜 소식은 거기에 주일 학생이 나왔는데, 주일 학생이 그 코 속에 혹이 나 가지고 그렇게 아팠는데 그만 주일에 와서 예배보고 난 다음에 혹이 완전히 없어서 완전히 나았습니다. 하는 것을 그것을 써내었는데, 바빠서 그만 그것을 읽지 못하고 장년반 예배 전에 읽어보니까 하나님이 모든 걸 치료해 주신다는 그 말씀을 듣고 나서 그 안 코 속에 그 혹이 하나 있어서 그 고통이었는데 그만 싹 나았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장년반은 사십 칠 명이 모였고. 또 주일학교는 이백 열 명이 모였더라고. 하나님이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것을 위하고 있습니다. 저도 기도 할 때에 우리 진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것입니다.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는 나는 모르나 당신이 보시는 대로 정말로 당신을 믿고 의지하고 당신만 바라보고 당신에게 맡겨 놓고 당신에게만 순종하는 그런 자의 하나님인 것을 당신이 목회자들의 목회하는 것으로 보여 줘야 모든 목회자들이 아, 인간이 지식 많아도 소용없고, 수단 좋아도 소용없고, 활동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고, 정치성이 있어도 소용없고, 뭐 잘나도 소용없고, 용모 좋아도 소용없고, 그저 당신만으로서 전부를 삼는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모든 하나님들의 종들이 아,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니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이 하자 해 가지고 당신만으로 전부를 삼는 그런 사람들이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마지막에 모든 우리 진영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결론입니다. 또, 그 외에는 모든 세계 있는 교회, 한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교인들에게도 그것을 기도의 결론으로 짓습니다. 우리 교회에 모든 사람들이 잘 보든지 못 보든지 그래도 보는 대로의 저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고 있다 그게 미련하고 어리석고 둔하고 이렇다 할지라도 당신을 전부를 삼아서 진실되이 신앙을 가지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셔야 모든 사람들이 보고 믿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서 잘 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발 사이 때와 같이 그렇게 천해지면 당신을 인간이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보이는 증거는 그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것을 기도하고 그보다 더 중심으로 기도하는 것은 당신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 회개를 시켜 주셔야 되지 당신이 안 주는데 인간들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하는 것을 내적 기도로 그렇게 합니다.
또, 좀 전에 뭐 목사님이 기뻐할까 싶어서 그래 보고 해 드립니다. 하는데 우리 교회에 오늘 주일 학교 시찰하러 오신 교회 중에 어떤 그 교인 한 분이 오늘 병 나았다는 그 광고를 듣고 난 다음에 무슨 병이 나았다 하는데 나았다고 기뻐 즐거워하면서 '그만 병이 나았습니다' 이라는데 그 병이 무슨 병인지 내가 퍼뜩 들어 잘못 들었습니다. ○○○선생 일어서 말해 봐. 어? 그 허리가 아파서 자기는 늘 고생을 하는데 그만 병 나았다는 광고 들으니까 그만 허리가 암만 뭐 안 아프고 이라더니만 나중에 또 기도할 때 그래 하고 보니까 완전히 나았다고 그라면서 기뻐하더라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믿으면 되는데 우리가 믿지 안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변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전에도 양심에 대해서 말씀을 했는데, 양심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 양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정결한 마음은 양심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양심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우리는 동물이 아니고 인격 존재입니다. 인격 존재인데, 양심은 인격의 눈이라 그렇게 성경에 많이 말씀했습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은 것처럼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전부가 어둡고 네게 있는 빛이 밝으면 모든 것이 밝아진다 하는 거기에 빛을 말하는 것은 양심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파묻는 사람, 양심을 죽이는 사람은, 눈을 빼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눈을 뽑은 것은 그것은 뭐 손해가 있지만 많지 못해도 그의 인격의 눈을 뽑아 놓으면 그의 일생동안에 사고 활동 생각하고 연구하고 활동하는 전체는 다 어두워져서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듣는 다고 말했는데 그 귀는 우리 육체의 귀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 귀를 말하는 것은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인격의 귀가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발은 양심이 있는 가는 양심을 쓰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양심을 쓰면 하나님의 움직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양심은 하나님의 하시는 그 모든 형태를 볼 수가 있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고 그렇게 여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전에도 말했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서 활동을 하는데 활동하는 것은 그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가? 활동의 목적은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어릴 때는 물질을 얻기 위해서, 그 다음에 장성해지면 모든 옳은 행위를 얻기 위해서, 더 장성해지면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사람들이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활동하는 방편은 여러 방편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활동을 하고, 또 인간의 원죄와 본죄대로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죄와 본죄로 활동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활동한 것만치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달콤하게 여겨서 죄를 범하지만 죄와는 자기와는 필연적으로서로 갈라서는 것이 그것이 인생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도 죄와는 갈라서서 죄는 원치 안하고 하나되기를 싫어합니다. 또 과학적으로 해서 한다 할지라도 과학적으로 하면 물질과는 물질과 물질의 수입은 됩니다. 과학적으로 하면 물질하고 물질하고 화합은 잘 되지만 물질과 인간과의 그 화합은 물인 화합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도 다 헛됩니다.
그 중에는 제일 유력한 것이 뭐이냐 하면 양심으로 더불어 활동하는 것입니다.
양심으로 더불어 활동하는 것은 양심은 천하에 있는 사람의 양심은 다 하나인데.
양심은 고 하나인데. 한 개라 말이 아니고 그 양심은 꼭 같은 것인데 이것이 세상 지식을 따라서 이런 양심으로 저런 양심으로 다 변질되었습니다. 변질됐으나 그 양심이 동경하고 원하는 거는 다 같습니다. 마치 그것이 다리가 있으니까 자국을 떼놔서 걸어가는 것처럼 그러나 향방이 틀리면 동으로 향해 가는 것 서로 향해가는 것 가는 그 향방은 다르지만 그의 걸어가는 그 걸어가는 걷는 방식은 꼭 같은 거와 마찬가지로 양심이, 지식이 다름에 따라서 향방은 다르지만 그 양심의 생활 방편은 다 같습니다. 불교 양심도 그 자기가 불경이라는 그 지식을 아는 그 지식대로는 불경대로 제일 온전하고 바르고 참된 것을 찾아가겠다 하는 것이 불교인의 양심이요, 그러나 옳고 바른 참된 것을 찾아 갈려고 하지만 그는 불교적으로 참된 것을 찾아 갈려고 하기 때문에 불교의 그 불경의 지식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삐뚤어져 있기 때문에 그는 결과적으로는 삐뚤어진 것을 향해 가지만 옳고 바른 참된 것을 찾을려고 하는 것은 다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무슨 이종교 어떤 종교에 그 경전이라도 그 경전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은 사람은 그 경전적인 양심을 가졌기 때문에 경전적으로 이상이고 온전한 그 절정을 향하여 찾아갈려 하는 것은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향방이 틀립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다 변질되어 가지고 향방은 틀리나 양심은 다 동질 동성의 성질을 가지고 옳은 것을 향하여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불교인이라면 자기가 불교인으로서 과학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도, 또 자기가 무슨 정치나 수단이나 노동이나 무슨 가지고 활동하는 것보다도 불교인을 점령하는 데에는 불교인적인 양심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제일 낫습니다. 그러면, 불교인의 양심으로 그 사람이 활동하면 불교인의 양심은 향방이 같고 양심의 본질과 본성이 같기 때문에 그 천 명이 모였을지라도 그 천명의, 불교인의 천 명의 양심은 같습니다. 양심이 같기 때문에 불교인이 양심으로 활동하면 불교인하고는 다 동류가 되는 것입니다. 동류라 말은 같을 동(同)자 종류 류(類)자, 그러면 불교인은 다 같은 근본이 같은 종류가 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와 마지막에는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단체라도 그 단체에서 인간을 점령하면 인간의 모든 소유인 사물은 점령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점령하면 그 사람의 소유는 점령이 필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지식, 어떤 양심을 가졌든지 그 사람이 세상의 과학으로나 정치로나 그 능력으로나 수단으로나 압력으로나 유혹으로나 기만으로서나 어떤 그 활동하는 것보다도 그 종류 안에서는 그 종류대로의 양심과 동행하는 것이 제일 능률이 높고 수입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불교인이 불교인의 양심대로 행하게 되면 처음에는 껍데기는 이런 것 저런 것 관계 때문에 서로 맞지 않는 것 같고 대립도 하는 것 같고 외식 별별 수단이 있지만, 그 사람의 그 불교인이라면 불교인의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그 불교인의 제일 절정이 되어 있는 그 주격되는 자는 어떤 자냐 하면 주격되는 자는 그 사람의 양심이요 양심의 주격되는 자는 사탄이가 되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깊은 사상과 주의 본질과 본성과 꼭 같은 본질과 본성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자기의 본질과 본성이 맞으니까 결국은 사람이 같은 종류돼 버리고 말아요. 같은 동류가 돼고 동행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 동류와 동행이 되니까 그 사람의 것은 다 취해지고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인이든지 유교인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활동할 때에 자기의 몸으로 활동하는 것, 기술로 활동하는 것, 과학이라는 법칙으로 활동하는 것, 정치로 활동하는 것, 능력으로 활동하는 것 어떤 걸로 활동하는 것보다도 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제일 수익이 크고 점령율이 많다 하는 것을 우리가 이것은, 일반 그 심리학자들도 계산을 하면 압니다. 요새는 뭐 콤퓨터가 있다 하는데 컴퓨터 계산으로 하면 그런게 다 나오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들은 어떤 것으로 활동하는 것이 수익이 많은가? 우리 기독자들도 양심을 가지고 신앙 양심을 가지고 활동하면 모든 기독자와는 동류가 돼 버립니다. 지금은 서로 원수가 되고 대립이 된 것 갈지만 마지막에는 동류가 돼 버리고 맙니다. 왜? 그의 본질과 본성이 같기 때문에 동류가 되고 맙니다.
그의 모든 사상이 같기 때문에 동류가 돼 버리고 맙니다. 소원이 같기 때문에 동류가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으로 신앙 양심으로 활동하면 신앙 양심을 가진 사람은 천 명이나 만 명이나 결국은 다 동류가 되고 맙니다.
동류가 되고 결국은 같이 의논하고 안 하고 할 것 없이 결국은 다 동행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가지지 못하고 양심을 죽여 놓은 사람은, 기독자가 양심을 죽였다고 하면 기독자로서 사람을 얻는 일은 다 전멸입니다. 사람 얻는 일은 전멸이요. 또 인인 협조라는 것은 다 전멸입니다. 모든 사람과 나와의 동류가 되고 친교를 가지는 그런 일은 다 헛일입니다. 기독교 적인 사회 활동은 완전히 다 진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도 그렇습니다.
불교인도 양심을 버리고 그 사람이 처세한 사람은 그 어떤 그 단체든지 사상이든지 거기에서 사회 활동은 완전히 영이 돼 버리고 맙니다. 사회에서는 하나도 얻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자들이 양심을 길러 놓지 안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지, 또 양심을 길러 놓지 안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없지, 하나님도 보지 못하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종적도 못 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그런 것이 양심의 눈이 있는 사람은 '아, 하나님께서 저렇게 하신다 저렇게 하신다.
저라면 아마 저렇게 할란갑다. 가보니까 그리 되었다. 과거에 그렇더만 이리 되었다. 이 모든 것을 다 맞춰 가지고 딱딱 볼 수 있지만 양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것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보지를 못합니다. 또 양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지를 못합니다. 양심이 하나님을 찾는 빛이요. 또 자체에게서는 선구자가 됩니다. 제일 앞에서 인도하는 선구자가 되는데 양심이 없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지 못합니다. 양심과 자기 언행심사의 행동이 같이 할 때에 기독자는 뭐 얻든지 못 얻든지 할 것 없이 그만 기독자의 양심은 다 하나입니다. 기독 자의 양심은 다 동질이요 동성이요,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가 이 사람과 저 사랑과 양심이 다 하나 돼 놓으면 마지막에는 다, 싸우고 있어도 마지막에는 하나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모든 기독교인으로 더불어 같이 사귀고. 같은 동류 같은 친구가 되고, 동류가 되고 또 동행을 하려고 하면은 기독자의 양심으로 사는 것, 양심과 동행하는 것 양심으로 내가 모든 행동을 하면 그 기독자의 양심 가진 자 하고는 벌써 합해져 가지고 있습니다. 동류 동행이 되게 됩니다. 그거는 시간에 따라서 다르고 장소에 따라서 다릅니다. 다른 것은 껍데기 그게 있으니까 거기에 제재를 받고 방해를 받아 가지고 속으로는 저 사람하고 뜻이 맞으면서도 공연히 뜻 맞지 안한 이 사람하고 뜻이 맞은 척하고 뜻 맞은 사람을 공연히 뜻이 안 맞은 척 이렇게 외식을 해 그렇지 벌써 속으로는 합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으로 사는 사람 그 사람은 모든 그 신앙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다 동류가 돼서 마지막에는 같이, 동서남북에 동양에서 행하고 서양에서 행했다 할지라도 나중에 가서 보니까 동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양심이 동류되고 동행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이 가로막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들을 초월해 가지고 동류가 되고 동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으로 하는 사람이 능률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설교하는 사람도 설교하는 사람도 자기가 구변으로 하고 언변으로 하고 뭐 자기가 수단으로 하고 지식으로 하고 수사학으로 하고 어떤 논리학으로 하고 어떤 방편으로 하는 것보다, 그건 다 인적 요소인데. 인적 요소의 어떤 요소로 하는 것보다도 인적 요소 중에는 양심으로 하는 것이 제일 수익이 많습니다. 만일 설교하는 사람이 양심으로 설교하면 거기에 신앙 양심을 많이 가졌든지 적게 가졌든지 다 기독자라면 신앙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 양심을 가진 사람은 많이 합해졌거나 적게 합해졌거나 조만간에 다 합해서 동류되고 동행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설교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주 몰라서. 외식하는 사람이요 참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에 암만 해 봤자 결국 사람은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배척 당하고 마지막에는 자기는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어서 다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보다 나은 것은 그보다 나은 것은 자기가 행동할 때에 행동할 때에 양심과 행동하는 그것은 인간 수평선 이하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수평선 이하에 있는 것으로서 제일 머리되는 거하고 동행했기 때문에 수익이 많고 그 위에는 인간 그 선을 초월한 다른 고차원에서 신적 요소에서, 우리가 인적 요소가 신적 요소를 우러러 보면서 손을 잡고 일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예수님의 피공로로 인해 가지고 진리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로 설교하고 진리로 증거하고 진리로 계획하고 진리로 행동하고 진리와 동거 동행합니다.
진리로 동거 동행하면 그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는 둘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억만명이 믿어도 진리는 하나입니다. 아무리 뭐. 역사에 믿은 사람들이 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로 동행하는 사람은, 진리로 사는 사람, 진리를 소망 받고 동행하는 사람은 결국은 다 하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우리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억억만 명이라도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룬다 하는 그런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자기와 동행하면 언제든지 다 깨달음이 같이 됩니다. 깨달음 이 진리와 동행하게 되면 깨달음이 같이 되고 동각 동지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로 우리가 모든 활동을 하게 되면 그 진리를 반대하는 사람과는 자기는 깨달음이 그저 상충되고 뜻이 상충되지만, 진리를 자기가 반대하지 않고, 진리 그 진리를 환영하는 사람이라면 천 명이든지 만 명이든지 진리 환영하는 사람과는 자기가 동각자가 됩니다.
동각자, 같이 깨닫는 자가 되고, 또 동지자가 됩니다. 뜻이 같은 자가 됩니다.
뜻이면 벌써 그것은 실행을 책임지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인간의 의지라. 뜻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으로 사는 사람이 인적으로서는 지혜 있는 사람이고 우리 기독자로 불교자는 불교자대로 불교자의 양심으로 살면 불교인을 점령합니다.
불교의 모든 것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불교인의 양심대로 살면 기독자와는 정대립이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만 충돌이 되고 맙니다. 기독자는, 기독자의 신앙 양심으로 살면 인적요소로서는 제일 수입이 크고, 결과가 제일. 그 능률이 많이 오르고, 많은 사람을, 많은 사물을 얻게 됩니다.
그 보담도 더 큰 것은 위로 향하여서 진리로 자기가 동행하면 진리로 동행하고 진리로 같이 증거하고 진리로 말하고 진리로 행동하고 진리와 동거 동행하게 되면 그 진리로 동거 동행하는 모든 사람은 천 명이나 만 명이나 억만 명이나 역사에 있는 사람이나 그 모든 사람들과 다 동각자가 됩니다. 같은 깨달음을 가진 자가 되고 같은 그 의지를 가진 사람이 됩니다. 같은 심지를 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기독교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큰 것은 우리가 성령의 감화를 가지고 행동을 하면 영감으로 행동하면 영감으로 행동하면 그 영감 가진 모든 사람과 하나님과 동감자가 됩니다. 하나님과 동감자가 됩니다. 하나님과 모든 성도들과 동감자가 됩니다.
동감자가 되고 나면, 동감자가 되면 뭐인가? 그거는 이런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안하고 벌써 초월해 가지고 그 형이상학으로 모든 이 시공을 다 초월한 그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같은 느낌 동감자가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은 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벌써 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으로 사는 것은 그 동류자가 되고, 동류 동행자가 되고, 양심으로 하는 사람은 동류 동행자가 되고, 진리로 하는 자는 동각 동지자가 되고, 영감으로 하는 자는 동감 동체자가 됩니다. 동체.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 창조주요 피조물은 다르지만 한 몸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머리요 우리는 몸이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것이 물질 이치가 아니라 그렇지 물질의 과학보다도 인간의 그 인경의 이치라 하는 것은 신성의 이치 신성의 모형인 인성의 이치, 신성 인성의 이치는 과학이라는 그런 걸로 수를 놓을 수 없는 만치 세밀하고 고상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으로 우리가 모든 활동을 하면 그 영감 받은 사람과는 동감이 되고 동감된 사람은 그 시공을 다 초월했기 때문에 동체자가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다 양심에서 시발됩니다. 양심이 자라서 양심은 어떤 게 양심인가? 양심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식인 성경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자기를 나름대로 이 지식을 이용해 가지고, 이 지식을 이용해 가지고 요 지식이 자기 지식대로는 제일 이상의 점.
제일 바르고 옳고 깨끗한 점, 고 양심이라 하는 거는 본질과 본성이 그것이기 때문에 고게서 자기 아는 지식대로는 제일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찾아서 헤매고 있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이 지식을 힘입어서 이 지식보다 더 이상의 것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힘입어 가지고 이 지식보다 더 온전하고 참된 걸 찾습니다. 그러면 이 지식보다 더 온전하고 참된 게 뭐입니까? 네, 영감입니다. 이 지식보다 더 옳고 참되고 완전한 것을 찾는 그것이 뭐이냐? 양심이 찾는 것이 영감입니다. 이 지식을 가지고 양심이 영감을 찾아갑니다. 양심 이 영감을 찾아서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과 동행해 가지고 영감을 찾아가고, 이제는 양심이 하나님의 지식과 영감과 셋이 동행해 가지고. 셋이 동행해 가지고 찾는 것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 완전자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마지막에 이제 완전히 도달해서 종착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양심이 없이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아무리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알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참을 찾는 데에 노력하는 요소는 우리에게는 욕심도 그 노력하는 거 아니요. 우리에게는 욕심도 있고 감정도 있고 성품도 있고 정서도, 있고 그 인적요소라 하는 것이 수많은 요소가 있지만 우리의 모든 요소 가운데에 양심이라는 그 요소, 양심이라는 요소 이것이 옳고 바른 참된 것을 자꾸 찾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성경을 암만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양심을 죽여 버렸으면 그 사람의 지식은 그것은 교만만 만들어 내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게 양심이 살아 있으면 고 양심 그것이 요 지식을 가지고 자꾸 찾고 있기를 마치 그 여우 새끼는. 여우는 어디든지 같이 가도 코를 썰룩 씰룩 하면서 자꾸 썩은 것과 찾습니다. 썩은 게 어디 있는가 싶어서 썩은 걸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산 고기는 보면 그 혹 여름으로 물이 마를 때 보면 그 물이 쩔쩔 나면 고게서 생명이 있는 그 고기는 자꾸 생수를 찾아서 갑니다. 생수를 찾아서 가는 그것이 본질이요 본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람이 말하기를, 아, 오륜대 그 고기를 오륜대 고기를 그저 몇 시간만 하면 여러 통을 잡을 수가 있는데 그 잡지 못한다.
그 잡을 수 있는 데. 사람에게 '어째 잡노?' 이라니까 이렇게 강이 내려가는데 강을 꽉 그물로 막아 버리고 저 위에서 생수를 대 놓으면 고 생수 따라서 자꾸 오는데 올라가다 보니까 막히고 막히고 자꾸 올라가 가지고 조 다음에는 요만한 그릇만 내놓으면 그 그릇 안에 소복히 든다 그 말이오. 그게 통발이라 하는데.
시골에서는 그라고 고기 그 뭐 개울에 있는 고기 쏙 다 잡아 버립니다. 그거 모양으로 우리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꾸 옳고 바르고 참되고 깨끗한 것 그 완전한 것을 자꾸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양심입니다. 고 인적 요소 고 양심이라는 요소가 없으면 그 사람은 송장입니다. 완전히 썩었어. 불쌍하고 참 죽는 게 낫지 그 사람에게는 갈수록 자꾸 가슴 치고 자살 할 만한 그런 어려움이 그에게 부딪히고야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 요걸 길러놔야 하나님의 지식을 가졌으면 요 지식을 가지고 나벼 가지고 가장 올바른 것을 찾고, 가니까, 그 성경 지식을 가지고 찾고 보니까 성경 지식보다 더 깨끗한 게 뭐인가? 영감입니다. 자기 영감을 찾게 됩니다. 또 이제는 영감을 받아 가지고 더 온전한 것을 찾을라 하니까 완전자이신 하나님 밖에는 찾을 게 없습니다. 그 완전자 하나님을 찾아 가지고 하나님에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양심을 우리가 보배인 줄 알고 양심 기르기를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김현봉 목사님은 그의 표어가 '양심생활 한다' 양심이 그 분의 표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양심의 귀중성을 알고 양심을 가꾸어서 기른다는 데에 주력을 했기 때문에 그분이 그 당시에 인간적으로서는 첨단을 걸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제일 앞길을 걸어서 그 목사님이 계실 때는 서울에 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앞에 다 머리를 숙였고, 다 그때에 교회가 한 천 명 모았습니다. 천 명 모았는데 서울에 제일 많이 모은 교회가 삼백 명 이백 명 더 안 모였습니다. 천 명 모인 교회는 그 교회 하나뿐이었었고 서울에 제일 큰 교회 삼 배나 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그분은 양심을 기르는 일을 벌써 착안해 가지고 눈을 떠서 양심을 길러야 된다 하는 고기에 눈을 떴습니다.
양심을 길러야 된다는 거기에 착안을 해 가지고 고 면으로 힘을 썼기 때문에 그 분의 그 모든 신앙생활이 가장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양심을 길러야 되는데, 양심을 기르는 데에 여섯 가지를 말을 하고 있는데, 첫째는 양심에 화인을 안 맞아야 합니다. 양심에 화인을. 화인이라 하는 것은 쇠도장을 가지고 불에 꾸어 가지고 꾹 찍어 버리면 이제 도장의 것이 돼 버리고 맙니다. 도장의 것이 돼 버리고 말아. 하냐의 그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 그 예화인데 양심이 화인 맞았다. 어떤 사람을 양심에 화인 맞았다고 했느냐 하면 모든 이종교 중에 제일 으뜸 이 되는. 이종교 중에 제일 으뜸되는 이종교가 어떤 이종교인가? 이종교 중에 제일 으뜸되는 이종교는 금욕 생활하는 것이 이종교 중에는 으뜸 종교라. 그래서 불교가 신임을 받고 한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불교에서는 그 금욕 생활 모든 독신으로 살아서 모든 정욕을 다 금하고 또 식욕을 금해서 고기를 먹지 안하고 이렇게 금욕 생활하는 그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보고 다 거기에 뭐이 있는가 보다 이랬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다 했기 때문에 그저 하나의 종교라고만 생각하지 그 사람들이 그렇게 동경할 만한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종교 중에는 이종교 중에는 금욕주의가 제일 존대를 받고 있고. 또 이종교가 아니라도 모든 철학 중에도 철학 중에도 금욕주의가 제일 존대를 받고 있고. 모든 이 정치 사상에서도 금욕주의가 제일 존대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에서도 그 사람이 보자 어떠냐? 아. 그분이 보니까 검소하고 그 월권 남용하지 안하고 금욕하고 있다. 저 하고 싶은 대로하지 안하고 과연 그 민족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국가가 하고 싶은 대로한다 그 금욕 생활을 할 때에 그를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디모데전서 4장에, 금욕 생활하는 그것이 인간으로서 기독교 외에는 최 으뜸이지만 그들은 양심이 화인 맞았다 이랬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데 이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산 양심인데,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지 안 하고 이 사람은 이 사상을 찾아가고, 저 사람은 저 사상을 찾아가고, 저 사람은 저 욕심을 찾아가고, 저 사람은 저 주의를 찾아가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 화인을 맞아서 벌써 양심이 완전자이신 온전자이신 하나님을 자유롭게 찾아가는 그런 자유 있는 양심이 아니고 다 여게 붙들려 매이고 저게 붙들려 매였고 모두 한 가지에게 모두 붙들려 매었기 때문에 화인 맞은 양심이라 그렇게 디모데전서 4장에 말씀을 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첫째로 주의 할 것은 내 양심이 아무 것에게도 제재 받지 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어쩌든지 무슨 일이 났을 때에 그 일을 양심에게 맡긴다면 양심에게 그렇게 말해야 될 것입니다. 양심에게 '아 이 사건에 대해서 물질의 이해도 돌아보지 말아라. 물질의 이해도 상관하지 말아라. 또 내게 어찌 되느냐 다른 이에게 어찌 되느냐 그것도 상관하지 말아라. 내 가정에 어찌 되느냐 그것도 상관하지 말아라. 다만 이라면 내 목숨에 이래 되느냐 저래 되느냐 그것도 상관하지 말아라. 다만 네가 이 사선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 옳고 바르고 참되냐? 하는 그것을 찾아 달라.' 하고 양심을 아무 데도 붙들어 매지 안하고 양심을 자유케 해 가지고 자유로 활동해서 양심의 본질 본성대로 참을 찾도록 그리 하는 것이 양심을 화인을 찍지 않는 것입니다. 그 양심은 어디든지 그 구속당한 것이 없고 자유하여 있는 것이, 자유하고 있는 마음 그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어디든지 매인 데가 있고 속한 네가 있고 양심이 하후하박으로 사정을 둔다면 그 양심은 벌써 그것의 양심이 되었기 때문에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있는 것이니까 화인 맞은 양심이 되지 안하도록, 양심에게 화인을 찍지 안하도록 언제든지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사람들은 자기는 연약하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과소 평가하고, 적게 과소 평가하고. 또,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계산을 할 때에 더 거기에서는 좀 박하게 깎아서 그렇게 계산하지 안 하면 자기로 치우칠 터이니까 도리어 자기를 희생시켜서 무엇을 계산할려고 하는데, 그것도 실은 그것이 온전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유하는 양심을 가진 사람은 참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첫째는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안하도록 노력을 하고 둘째로서는 양심을 죽이지 아니하도록 애를 써야 되겠습니다. 양심을 죽이지 안하는 것. 양심을 죽이는 게 어떤 게 죽이는 것인가? 양심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데 양심을 꺾어 행하는 것, 그러면 자기 양심에서는 벌써 그라면 안 된다 이라는데 양심을 생각하면 못하니까 그만 생각하지 안하고 술을 한 잔 먹든지 그렇지 안하면 자기가 '어 어 어' 그만 양심 생각하지 말고 그만 그리 해 버리자 그만. 이렇게 자기가 둥둥해 가지고 양심이 나타나지도 못 하게 양심을 그만 꺾어서 행하는 그것이 양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양심을 죽이는 그 일은 자기가 눈을 뽑는 일이요, 귀를 빼는 일이요, 자기에게 있는 빛을 없애기 때문에 그에게는 흑암 뿐이니까 마귀의 것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양심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은 양심을 꺾어서 행하는 것이 양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에, 양심을 그 보다는 좀 못해도 양심을 매장하지 말아야 됩니다.
양심을 그만 파묻지 말아야 됩니다. 양심을 매장하는 것은 어떤 것인고 하니, 양심이 마음에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양심에 자꾸 가책을, 양심에 가 책이 오니까 그 양심에 가책이 오니까 상이 찡그려지고. 양심에 가책이 오니까 어떻게든지 얼굴에 빛이 안 나오고 양심에 가책이 오니까 마음에 깨꾸름하이 불안을 가집니다. 불안을 가지는 데 그때에 고 양심이 호소하는 그 호소를 그만 무시해 버립니다. 양심의 호소를 무시하는 것이 그것이 양심을 파묻어 버리는 거라. 파묻어 버리면 그 숨 못 쉬면 죽지 않습니까? 양심을 매장시키는 것이, 양심의 호소를 무시하는 것이 매장시키는 것이니까 양심의 매장을 하지 안하도록 우리는 주의를 해야 되겠습니다.
또, 이제는 적극성으로 양심을 북돋우기를 힘써야 됩니다. 양심을 북돋우는 것은 어떤 게 양심을 북돋우는 것인가? 자기는 무슨 일 할때 '아, 내가 생각해 보자.
어짜면 옳게 하는가? 어짜면 바르게 하는 것인가? 이래야 바르냐 저래야 바르냐? 자기가 양심대로 할려고 애를 써는 그것이 양심을 북을 돋우는 것입니다. 양심을 북돋우는 것 그거 가지고 큰 자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양심이 자랄 수 있도록 자꾸 북 돋우는 것 북을 돋우면. 식물에 북을 돋우면 이제 북을 돋우고 나면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자꾸 양심대로 할라고 애를 쓰는 것이 양심을 북돋우는 것입니다. 양심이 세력을 얻도록 자꾸 양심을 등용을 합니다.
양심을 등용해 가지고 양심을 등용해서 양심대로, 우리 양심 한 번 생각해 보자.' 양심에 어떤고 양심을 자꾸 많이 말해 가지고 양심대로 하는 사람은 양심을 북돋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양심을 기르는 일을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양심을 키우는 일은 어떤게 양심 키우는 일인가? 자기 마음에 양심에 이렇다 하는 것이 결정이 되면 자꾸 양심대로 할라고 찾는 것은 양심을 북돋우는 것이요. 양심에 이렇다 하는 것을 양심이 판정 내렸으면, 그 다음에 판정 내렸을 때에 우리에게 불리하든지 유리하든지 손해 가든지 어짜든지 양심에 판정된 것이면 그대로 그만 단행해 버립니다. 그대로 단행하면 그만 양심이 세력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자꾸 우리의 마음 가운데 수많은 요소가 있는데. 심리 가운데에 양심에게 권리를 자꾸 줍니다. 양심에게 권리를 줘 가지고 양심에 뭐 이 욕심이 양심을 거슬리면 욕심을 벼락을 칩니다. 욕심이 양심을 거슬리면 욕심 그놈을 꺾어 버리고, 무슨 정욕이 양심을 꺼리끼면 그 정욕을 꺾어 버리고. 무슨 세상의 윤리나 도덕이나 그것이 양심을 거리끼면 윤리 도덕을 무시해 버리고 어짜든지 그래서 양심이 옳다 판정되면 그대로 단행하는 것이 그것이 양심을 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이 장성해 지는데, 양심이 장성해지면 어디까지의 장성한 양심을 가져야 되겠는가? 우리의 양심이 장성해지면 장성해지는 것만치 그 양심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권하게 됩니다. 그 양심이 그 사람의 양심이 그 사람의 소유를 그 양심 제 마음대로 합니다. 그 양심대로, 그 양심이 그 소유를, 암만 논이라도 집어 던지라 하면 집어 던지고, 버리라면 버리고 그러기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 어떤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참 믿고 난 다음에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뭐 좀 얻어 가지고 산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자꾸 이와같이 뭘 무리하게 자꾸 이렇게 욕을 해 쌓았고 이래 쌓으니까 그걸 동리 사람들이 욕을 하지만 아마 이라면 하나님에게 영광 이 되지 안하겠고 하나님에게 욕이 되겠다 하니까 그만 그 사람이 그 토지를 그 사람에게 그만 그냥 뺏기고 말았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양심은 그 사람의 소유에 대해서 주권자입니다. 암만 욕심이, 아무리 지식이. 그 사람의 율법 지식이, 그 사람의 명철이 '이거는 안 된다' 안 된다 해도 양심이 '아 안 된다. 줘 버리라.' 하니까 그만 그거 줘 버려서 그 양심이 그의 소유를 주권하는 그 실력 일는 양심이 되어지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 양심이 그 사람의 몸을 주권합니다. 그 사람의 몸이 암만 괴로와도 그 양심이 오늘 자지 말라 하면 암만 잠이 와서 불평을 해도 가서 괴로우니까 가 가지고 그 엎어져서 뻐드러져 잘지라도 그 양심에 끌려서 할 수 없이 집에 누워 자지 못하고 산으로 간다든지, 또 요 이불 펴 놓고 자지 못하고 이제 양심에 끌려서 할 수 없어서 그냥 엎드려 가지고 잤으면 잤지 그 양심이 그 몸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몸을 주권합니다. 몸을 주권하고, 그 장성한 양심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주장합니다. 그 마음이 그만 그 사람 마음 뭐 욕심이라는 것. 감정이라는 것, 남의 뭐 명예라는 것, 지위라는 것 권세라는것, 아무것도 없고, 그 양심이 그만 그 사람의 마음을 주권해 가지고 그만 그러니까 그 사람 마음은 그 사람 양심에게는 꼼짝을 못하는 사람.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의 생명도 그 사람이 주권합니다. 그리 되면 이제 그 사람의 양심은 장성한 양심이라. 곧 그 사람의 양심은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자가 됩니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자요, 내게 대해서 내 모든 소유와 몸과 마음 모든 전부를 다 양심이 주권하고 양심에게 맡길 수 있고 양심은 맡아 가지고 일할 때에 그 모든 것은 다 삶이 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짜든지 양심을 길러서 양심이 내게 자유하도록,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은 자꾸 양심이 그래도 자라서 양심의 가책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그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양심이 머뭇머뭇해 가지고 양심을 가꾸다가 죽이다가, 가꾸다가 죽이다가 이라니까.
이것은 안 믿을 때는 장사를 하면 잘 되는데, 거짓말하고 속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하니까 돈벌이가 잘 되었는데,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그만 속이고 그래 하는 것을 하기는 한다고 해도 주적주적 하 이 할라 하니 속에 가책이 되고 하니까 마음에 기쁨도 없고 그 양심을 속여 가지고 뭣을 돈을 벌어 봐도 기쁘지도 안하고 쾌하지도 안하고, 과거에는 양심을 속여 가지고 이와 같이 돈벌이를 하고 나니까 기뻐서 즐거워서 저 사람보고 모든 사람이 '아, 저 사람 윤기가 있고 그 사람 활기있는 거 보니까 아마 뭐 잘 되는가보다.' 이렇지만 이 사람은 양심을 속여서 뭐 해 봐도 고통이라 그 말이오. 고통이니까 이제 그런 사람은 참 고생입니다. 이거는 양심을 죽이지도 못하지. 양심을 살리지도 못하지.
양심을 살려서 살면 당장에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날 수 있는 이런 하나님의 축복이 오는 건데 양심대로 살지도 못하지, 양심을 가지고 짓밟을려 하니 짓밟히지도 안하지 이러니까 공연히 가책 가운데에 양 사이 끼여 가지고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확신 있는 생활을 하지 안하고.
확실히 확정된 생활을 안하기 때문에 항상 고통이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길러서 어짜든지 양심과 동행하는 것이 그것이 수입이 크고, 그 보담도 진리와 동행하는 것이 수입이 더 크고, 영감과 동행하는 것이 최고의 수입을 가져오기 때문에. 진리와 동행, 영감과 동행이 양심과 동행하기 전에는 안 됩니다. 양심과 동행하는 것이 성장해 가지고 그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양심을 죽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런 소망이 없고 희망은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고요히 생각하고 또 혼자 가다가 안되면 오늘 밤에 재독이 있을 터이니까 재독할 때에 듣고 또 재독할 때에 들어. 안 되면 설교록을 보고서 또 익히고, 자꾸, 기도하러 가면 딴 것 아니라 기도하러 가면 요 말씀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새김질하면서 말씀을 자기가 지식으로 알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대로 행하고 이렇게 해서 가속도로 자꾸 우리가 길러 나가야 되지, 지금은 대단히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 같습니다. 뭐 아마 여기뿐 아니라 다른 교파도 그럴 것입니다. 진리로 사는 교회는 뭐 표적이 굉장히 나타날 것입니다. 이게 아마 지금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징조 같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뭐 우리만 아니고 다른 데도 다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