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양심


선지자선교회 1985년 6월 9일 주일오전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마태복음 산상 보훈에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또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으면 무릇 하나님에게  구하는 바를 다 얻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게도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것은 그 의식을 행할 때에는 물속에 잠겼다 나오는  그런 침례식도 있고 물을 뿌려서 세례 받는 그런 식도 있습니다. 그것은 물을  뿌리는 것은 양의 피를 뿌려서 속죄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들이 속량함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그 표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고, 또 침례로 세례 주는 것은 세례 받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또 예수님과 함께 다시 새사람 되어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표를 가리켜서 하신 것입니다.

 여기는 '세례라'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으로 물로 세례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세례 받는 중심은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식을 베푸는 것이 세례 받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이제는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점점 가까이 나아가는 그 시작이 되었다는 것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례 받은 행위가 어떤게 세례 받은 행위인고 하니  착한 양심을 써서 하나님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는 그것이 세례 받은 자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양심에 대해서 간단하게만 증거를 하겠습니다. 양심에 대한 정의가 동일하지를  안합니다. 그저 양심은 마음 가운데 착한 마음이 양심이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양심은 사람에게 속한 사람 요소가 아니고 하나님의 요소도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되어 있는 것이  양심이라 그렇게도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은 그 사람에게 잘못된  것을 하나님에게 고소하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대한 뜻을 전달해 주는 것이  양심이라 그렇게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인적 요소가  아닌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있는 요소입니다. 영에게 속한 요소도 아니고 마음의  각 요소 중에 하나가 양심인 것입니다.

 양심은 여러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말은 양심은 어 떤  것이 양심인고 하니 그 사람의 가진 지식의 지배를 받아 가지고 그 사람의  지식대로 제일 이상이고 완전한 것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인의 양심이 있고 유교인의 양심이 있고 모든 수많은  종교마다 그 종교인의 양심이 각각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지식의  종류가 백 가지가 있으면 인간의 양심은 백 가지가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그 지식의 여하함에 따라서 그대로 그 지식의 그 이상을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양심은 어떤 것이 신앙 양심 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로 대속함을 입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경 지식을 힘입어서 영감과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신앙 양심은 산 양심이요  신앙 양심 외에 수많은 양심은 다 죽은 양심으로 성경이 그렇게 판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후부터 우리에게는 신앙 양심이 움돋기  시작했습니다. 신앙 양심이 움돋기 시작했다 말은 과거에는 하나님의 이 말씀  진리를 알지 못할 때에는 세상 이런 저런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대로 가장 좋고  옳고 바르고 복된 것 참된 길을 찾아 갈려고 했던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땅에  속한 양심을 가졌고 악령에게 속한 양심을 가지고 세상 지식에게 속한  양심으로서 우리는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만이 정확하고 무오하니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서 살아야 되겠다 하는 것을 우리가 작정하고 가다가는  하나님의 지식과 세상 지식이 서로 대립이 될 때에는 이제까지 내가 따랐던 그  세상 지식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서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성경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이 지식을 힘입어서 이 지식이 가르치는 그대로의  올바른 길을 걸어 성령의 그 감화를 만날라고 영감을 찾아가는 것이 신앙  양심이요, 영감을 만나 가지고 영감의 도움을 입어서 하나님을 만날라고 찾아가는  것이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된 사람의 양심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서 영감을 찾고 이제는 진리와 영감을 힘입어서 하나님을 찾아  만날려고 노력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 양심이 첫째로 주의할 것은 양심이 화인을 맞지 안하도록 우리가  애를 써야 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는다 말은 양심이 어떤 것에 소속한 것이  되었다 하는 말입니다. 인을 치는 것은 그 인 주인의 것이라 말입니다. 만일  문서에 인이 찍혔으면 그 문서는 인 친 자가 책임진다는 것이요, 또 어떤 물건에  불에다가 구워 가지고 화인을 찍으면 그 물건은 화인 그의 물건이라 말이요.

짐승에게도 화인을 찍으면 짐승은 그 인의 주인의 것이라는 그 뜻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 맞았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모든 이종교 모든 이종교,  이종교 중에도 금욕 생활을 주장하는 그런 종교가 이종교 중에는 제일 권위 있는  종교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금하는 금욕 생활하는, 식욕이나 명예욕이나 공명욕  권세욕 또 물욕 온갖 정욕 뭐 식욕 그저 이런 모든 욕심을 절제해서 금욕  생활하는 그런 종교가 이종교로서는 제일 권위있는 진실한 종교라 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호평을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모든 금욕 생활을 하고 주장하는 그런 종교는 이종교 중에는 최고의 종교이지만  그런 모든 종교가들은 다 양심이 화인 맞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주인 없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어디든지 매여  있지 않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자유 해서 그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  양심이면 그 양심이 무슨 그 사물을 대했을 때에 자기에게 있는 자기 양심이  자기를 옹호하고 자기는 조금이라도 뭐하는 자기에게 속한 양심이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그 양심은 자기라는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자기 양심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에게 그 양심이 매여서 벌써 돈의 화인을 맞은  양심은 돈의 양심이기 때문에 그 양심은 정평 정가를 하지 못하고 돈에게 속해  가지고 돈 위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돈의 화인을 맞은 양심입니다. 만일 그  양심이 어떤 죽음의 경우를 당해 가지고 죽기를 두려워하는 그런 양심이  되었다고 하면 그 양심은 벌써 죽음의 화인을 맞았기 때문에 그 양심은 쓸모  없는 양심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이것의 것도 안 되고 저것의  것도 안 되고 아무 데도 소속하지 안하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나  남이나 원수나 모든 사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평 정가를 할 수 있는  그 자유권을 가 진 양심이 그것이 신앙 양심이요 산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양심생활이라면 다 되는 줄로 이렇게 알지만 세상에 사람마다  양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들이 다 화인 맞았기 때문에 쓸모  없는 양심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의 화인 맞지 안하도록  하는 일을 제일 우리가 주의를 해야 되겠습니다. 양심을 자꾸 그것을 길들여  가지고 자기 편을 들어서 그 양심이 자기를 옹호하도록, 또 자기에게 사정을  두도록, 다른 사람 같으면 악의 열 점으로, 평가할 것을 자기이기 때문에 악의 한  사 점이나 오 점으로 평가한다면 그 양심은 벌써 자기가 들어서 양심에 화인을  꺾었기 때문에 그 양심은 둔탁해서 하나의 정확지 못한 그런 양심이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안하도록 화인 맞지 안하는 자유하는 양심이  되도록 우리가 첫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양심을 죽이지 안해야 됩니다. 양심을 죽이지 안해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하는 말인고 하니 양심이 '이거는 틀렸다 양심이 틀렸다  하는데. 틀렸다 하는 것을 양심을 밀어 닥쳐 버리고 그것을 그대로 행동하면  그때에 고 양심은 죽어 버리고 맙니다. 양심이 틀렸다고 하는 것을 판정지은 것을  그것을 양심을 꺾어서 그대로 행하면 양심은 그 때에 죽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양심을 매장하지 안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양심을 매장하는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을 매장하는 것인고 하니 양심이 아니라 아니라 아니라  이렇게 양심이 우리 속에서 우리에게 호소해 주는데 양심이 호소해 주는 그것을  무시해 버립니다. 양심이 호소하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양심을 매장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는 양심을 북돋워서 가꾸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자기 양심을  자기가 가꾸지 안하면 자기는 소경이 되고 맙니다. 사리 판단이나 가치 평가나  모든 인간론이나 신론이나 사회론이나 국론이나 어떤 데 대한 그 논평도 그만  그는 소경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북돋우는 것은 어떤 것이  북돋우는 것인고 하니 양심대로 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양심을 북돋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물질 이해가 어찌 되느냐, 내 또 소유가 어찌 되느냐, 내 처세가  어찌 되느냐, 내 사업이 어찌 되느냐, 내 직장이 어찌 되느냐, 나와의 친밀한 모든  사람과의 그 관계가 어찌 되느냐 하는 그런 것은 양심을 그것은 다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양심을 북돋우는 것은 내가 물질이 어찌 되었든지. 사업이 어찌  되었든지, 직장이 어찌 되었든지. 내가 서로 가족끼리 어찌 되었든지. 친구끼리  어찌 되었든지 어 짜든지 내가 양심의 인도를 따라야 되겠다 하고 양심의 인도를  따를라고 양심대로 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양심을 북돋워서 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양심을 기르는 사람이 돼야 되겠습니다. 양심을 기르는 것, 양심을  북돋워 가지고 양심을 기르는 것, 양심을 키우는 것은 어떤 것이 양심을 키우는  것인고 하니 양심에 무엇이든지 명령이 내릴 때에 양심의 인도가 자기에게  나타났을 때에는 그 인도를 이해 불구하고 단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이  이렇다 저렇다 이렇게 인도할 때에는 그저 자기에게 유익하든지 해롭든지 간에  양심의 인도대로 단행을 하는 것입니다. 단행하는 그것이 양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강건하고 장성하게 되면 장성한 양심은 어떤 양심이 장성한  양심이며 강건한 양심은 어떤 양심이 강건한 양심인가 자기의 소유를 자유 자재  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지는 양심이 장성한 양심입니다. 자기의 소유물, 자기  소유물을, 무슨 돈이든지 물질이든지 회사든지 무엇이든지 자기의 소유를 자기  욕심이 주장하지 안하고 자기 가족이 주장하지를 못하고 다만 자기 양심이 그  소유를 주권했을 때에 그 양심은 매우 강장한 양심입니다. 강하고 장성한  양심입니다.

 그 다음으로 장성한 양심은 자기의 몸을 주권하는 양심입니다. 자기 몸이 아무리  곤란스러워도 아무리 불리스러워도 자기 몸이 감옥에 갇혀도 자기 몸이 어떤  곤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그래도 그 양심이 주권해서 그 몸이 주권하지  못하고 양심이 주권하는 그 양심이 강건하고 장성한 양심인 것입니다.

 최고로는 그 양심이 자기의 마음을 주권하는 그 양심이 강하고 장성한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아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갈라고 할 때에  모든 그 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이 목을 안고 울면서 가지 말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제일 어려운 문제가 '나는 마음에 양심에게  매인 바 되어서 양심이 나를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니 내가 그 양심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다' 해 가지고 '나는 마음에 매인바 되어서 예루살렘에 가서 죽어도  가지 안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주권하는 그 양심이  장성한 양심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 남은 것은 생명을 주권하는 양심이면 그 양심은 장성한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대 시대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물론 다 생의  애착심은 다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애착심은 있지만 물론 죽고 난 다음에  하늘나라의 구원도 영광도 있으니까 그것도 좋지만 다 그래도 남아 있으면서 좀  구원 이루는 일을 하고 갈려고 하는 것이 다 사람들의 생의 애착심인 것입니다.

생의 애착심까지 양심이 주권하고 있으면 그 양심은 장성한 양심입니다. 이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사나 자기의 모든 움직임이나 그런 모든 것이 다 양심에게  매여 가지고 자유 하지 못 한다고 말했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장성한  양심을 만들도록 우리가 애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는 말씀하시기를 양심이 마치 비유컨대 몸의 눈과 같다  했습니다. 몸의 눈과 같아서 눈이 나쁘면 온 몸이 다 어둡고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아서, 지금은 많은 이웃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리 저렇게 다 도움을 받지만 만일  단독이 있을 때에 눈이 어둡다면 그 사람은 별로 가지를 못할 것이고 함정에  빠져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이 몸의 등불인 거와 같이. 눈이 몸의  등불인 거와 같이 양심은 그 사람의 전 인격과 생애의 등불이라 눈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래서, 양심이 어두운 사람은 그의 인격이 다 어두워지고 그의 전 언행심사가  다 어두워지기 때문에 이 양심이라는 것은 전 인격의 눈이기 때문에 이 양심은  보배로운 것인고 양심을 우리는 화인 맞지 안해야 되겠고, 양심을 죽이지 안해야  되고, 양심을 매장하지 안해야 되고, 양심을 북돋워야 되겠고, 양심을 길러야  되겠고, 양심을 장성한 양심을 만들어서 내 소유에 대해서도 양심이 주권하고, 내  몸에 대해서도 양심이 주권하고, 내 마음에 대해서도 양이 주권하고. 내 생명에  대해서도 양심이 주권 할 때에 그 양심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함께 하는 양심이  되어져서 그의 모든 구원 이 바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동을 할 때에, 자기가 말을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할 때에  우리는 양심으로 우리가 행동할 때 있고, 진리로 행동할 때 있고, 영감으로  행동할 때 있고 그 행동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바로 한다고 하면 이  서너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양심으로 행동할 때에는 거기에 동참한  모든 사람과 동각 동무가 됩니다.

 내가 양심으로 행동할 때에 양심으로 말할 때에는 거기에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나와 깨달음이 하나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은 안 하고 있어도 당장 서로  친구가 됩니다. 친구가 되어서 동무가 됩니다. 동무가 되고 그 양심으로 하지 안  할 때에는 그때에는 암만 그 사람이 그때에 그저 예예 하고 설복을 당한 그런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뒤에 반동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양심으로 행동하면 깨달음이 같고 다 친구가 된다 하는 그 말은 양심은  서로 사이가 벌어져 있지를 안하고 다 동류입니다. 양심은 동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같은 종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양심은 죽은 양심 산 양심만  다르고 어린 양심 장성한 양심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양심은 꼭 그 종류가 같은  종류인 것입니다. 동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으로 행동할 때에는 내 양심이나 저 사람 양심이나 다  양심이 동류요 같이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양심으로 할 때에는 그 사람도 벌써  내가 깨달은 것이나 그 사람의 깨달은 것이나 같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나와 그와 당장에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접촉하는 사람을  자기와 한 사람 만들라고 애를 쓰는 데에는 양심으로 활동하는 것이 대단히  유리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또 사람이 그보다 나은 것은 자기가 진리로 만일 증거하면. 뭐 진리와 함께  동행하고 진리와 함께 말하고 진리와 함께 서로 사귀고 해서 자기가 진리와  동행을 하면 어떤 사람이 되는고 하니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깨달음이  같아집니다. 자기의 각성이 같이 됩니다. 내가 진리로 행할 때에는 원수라도  원수에게라도 내가 진리로 행할 때에는 그 원수와 나와 깨달음이 같은 동각이  됩니다. 동각자가 됩니다. 같은 동각자가 되기 때문에 동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로 행하는 사람은 원수한테라도 진리로 행하면 그 눈에 닥칠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 사람과 나와는 동행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수단이나 방법  이런 거 가지고 하는 그런 것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유리하고 양심과  동행하는 것보다 진리와 동행하는 것은 더 그러합니다. 진리와 동행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얻어서 그 사람이 나와 동각자가 되고 동행자가 됩니다. 결국  동행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내가 영감으로 할 때에는. 영감으로 할 때에는 벌써 그 사람과 나와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내가 영감으로 할 때에는 그 사람과 나와 동감자가  돼 버립니다. 그 사람과 나와 그만 감정이 같습니다. 동감자가 됩니다. 동감자가  되고 난 다음에는 뒤에 어찌 되는고? 동체자가 됩니다. 한 몸이 돼 버리고  맙니다. 영감으로 이렇게 행할 때에는 그 사람과 나와 딴 사람이 아니고 그만  동감 동체자가 됩니다. 같은 몸의 자가 됩니다. 동각 동행자가 되고. 또 자기가  양심으로 거석하면 벌써 그는 동류자가 돼 버립니다. 같은 자기의 친구가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류 동행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양심을  이걸 그만 죽여 버리면 자기는 외로와집니다. 모든 양심 죽인 사람도 양심 죽인  사람도 양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동류가 돼 버립니다. 동류자가 됩니다. 또  양심으로 행하는 자에게는 동행자가 돼 버리고 맙니다. 뭐 겉으머리로는 욕을  해도 동행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데 그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에게 충격받아 가지고 아주 그  지방에 믿는 사람 하나를 핍박을 많이 하고 욕도 많이 하고 대적을 많이 했는데  그 사람에게 뜻밖에 어려운 지경에 당해 가지고 참 이상한 어려운 지경에 당해  가지고 그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 당했는데 그 어려움이  당하니까 그 사람이 다짜고짜로 자기가 평소에 핍박하고 욕하던 그 사람을  찾아왔더라고. 그 사람을 찾아와서, 찾아왔기 때문에 반가이 맞이하면서 '아,  자네가 어떻게 찾아왔는가' 이라니까 내가 이렇고 이런 어려움이 있는데 아무한테  가 가지고 내가 이걸 누설할 수 없고 의논할 수 없고 또 나를 동정할 이가 없고  없는데 내가 평소에는 내가 참 죽을 죄를 지어서 그렇게 욕을 했지만 내  중심에는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기에게 밖에는 찾아올 데가 없고 의논할  데가 없고 동정할 이가 없다 해서 찾아왔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입을 다 점령 못 합니다. 사람의 입을 점령 못  합니다. 그 사람의 입으로 나를 인정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의 입을 점령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 참 어려운데, 이것 아주 어려워. 사람의  입을 점령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입을 점령하지 못 합니다. 또 그 사람의  행동도 내가 점령하기 어렵습니다. 또 그 사람의 마음도 내가 점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의 양심만은 점령 해 놔야 됩니다. 양심은 점령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아무리 원수라도 그 사람의 양심은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을 점령해 놓으면 조만간에 언젠간가 그 사람은 나와 동행자가  되고 말고 나와 동조자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길러서 장성한 양심 내가 수족으로 일하는 것보다  또 내가 무슨 권세로 일하는 것보다, 내가 재물을 가지고 일하는 것보다, 내게  있는 온갖 지식 가지고 일하는 것보다 양심으로 일하는 것이 제일 능률이 크고  결과가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자기 인적 요소에서 기를 것 중에는  양심이 재일 가치 있는 것이요 실력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  그런 사람들이 비록 죽은 양심이지만 그들이 담대히 그 사상에서 죽는 순상자, 그  사상에서 죽는 순상을 기쁨으로 한 것은 그들의 다 양심의 힘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길러서 모든 것보다 양심으로 일하는 것이 제일  효력이 크고, 또 양심으로 일하는 것보다, 이는 우주 만물을 창조할 때에 실지로  시공 능력은 뭐인가? 진리가 시공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에게 시공하라고  명령하신 분이요 실지로 그 시공은 진리가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전능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진리와 자기와 동행해서 진리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그것이 인간을 벌써 탁월한 능력 있는 활동이요 그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진리와 동행하는 것보다도 영감과 동행하는 것은 이거는 막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어서 하나님과 동행의 하나님과 꼭 같은 동일의 승리와 성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 일곱 가지 그것을 기억합시다. 양심은 기독자의 양심만  아니라 많은 양심이 있는데, 기독자의 양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피공로를  인해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이  지식으로서 영감을 찾아가고, 그러면, 이 지식과 함께 하는 마음, 그 다음에는  영감과 동행하는 마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것이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둘째로 기억할 것은 양심이 화인 맞지를 말아야 됩니다. 사람은  양심을 자기 양심을 만들려고 합니다. 양심도 자기편을 들어 달라고 합니다.

양심도 자기 편을 들어 달라고 하고 양심도 자기의 욕심편을 들어 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우매 무지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거는 바로 자기 눈을 뽑아서,  육신의 눈보다도 자기 인격의 눈을 뽑아 가지고 돈을 살라 하는 사람이요 인격의  눈을 뽑아 가지고 세상일을 성공하려고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양심을 화인 맞으면 안 돼. 양심이 주인이 생기면 안 됩니다. 양심이 어디든지  소속하면 안 됩니다. 양심을 붙들어 매 놓으면 헛일입니다. 양심이 화인 맞지  않도록 주의하라 말은 양심을 아무 것에게도 붙들어 매지 말고 자기가 뭘 생각할  때에, 그 양심으로 뭘 생각할라고 할 때에 물질을 뭣을 근거해 가지고 하면 벌써  물질의 끈을 가지고 자기 양심을 붙들어 매었기 때문에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어도 양심을 자유 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자유  시켜서 양심 자유, 양심을 자유시키는 것이 우리가 모든 생의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을 화인 맞지 않도록 할 것, 또 양심을 매장하지 말 것  또 양심을 북돋울 것, 양심을 길러서 양심을 장성한 양심으로 만들 것. 그리하면  양심과 자기가 일할 때는 능률이 무엇보다도 큽니다. 진리와 영감은 시적 요소요  신적 요소요 인간 주관에서는, 인간 주관, 인간 주관. 인간 자체에서는 양심하고  일라는 것이 제일 능률이 많이 오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을 점령하는 것은 양심과 동행하면 양심 가진 자는 다 점령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떤 것으로서 점령을 해 놨다 할지라도  그 양심으로 하지 안했으면 양심 가진 사람들은 다 적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정권자들이나 모든 부강자들이 그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에는 자기를 다 존경하지만. 정승이, 정승 말이 죽었을 때에는 조상군이 많이  모아 들었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니까 조문군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사람 이 양심을 가지고 일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 모든 권세에  눌려서 일시 굴복을 당했지만 그 속에 인간이 주관하는 것은 양심이기 때문에  양심에 배치되니까 다 그 사람을 배반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도 양심이 제일 주권을 가지고 있는데 양심이  그거 평소에는 꺾어져서 자유 못 하지만 그 사람의 최종은 양심이 주권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죽을 때에는, 사람이 죽을 때에는, 사 갈이 죽을 때에는 자기  양심이 호소하는 그대로의 양심이 틀렸다는 그것을 후회하고 양심이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을 원통히 여기고 만일 죽을 때에 너를 지금 하루를 살려 주면  어떻게 할래? 만일 묻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그 사람의 양심이 저에게  말하는 것 그것 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최종은 인간은 양심을  향하여 가고 마는 것입니다. 양심 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살아서 철통같이 사귀어 놔도 양심에 삐뚤어진 것은  마지막에는 배반을 당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을 길러서  양심과 동행하는 그 사람이 제일 이간으로서는 능률이 크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제 진리와 동행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와  동행하는 것이 더 승리가, 수익이 크고 진리와 동행하는 것보다도 영감과  동행하면 벌써 하나님은 머리요 자기는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체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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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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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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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3 신앙생활의 목적,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 요한일서 3장 1절-8절/ 830415토새 선지자 2015.11.25
2752 신앙생활의 중요요소 네 가지/ 에베소서 4장 10절 16절/ 861202화벽 선지자 2015.11.25
2751 신앙생활의 표시판/ 갈라디아서 5장 22절-24절/ 861004토새 선지자 2015.11.25
2750 신앙성장 과정의 열세가지 순서/ 요한계시록 1장 8절-20절/ 890602금야 선지자 2015.11.25
2749 신앙양심/ 출애굽기 20장 4절-6절/ 850628금새 선지자 2015.11.25
2748 신앙양심/ 요한일서 2장 24절-29절/ 860726토새 선지자 201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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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9 신앙양심생활에서 영감생활로/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20목새 선지자 2015.11.27
2738 신앙양심생활에서 영감생활로/ 베드로전서 3장 21절/ 850623주새 선지자 2015.11.27
2737 신앙양심으로 단속/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1016주전 선지자 201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