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5 17:01
신앙양심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산상보훈에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 말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자기가 다 받게 된다 하는 말씀인 데 거기도 마음이 청결한, 청결한 마음은 양심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청결한 마음은 양심을 가리켜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어떤게 양심인가? 그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그 지식을 활용해 가지고 자기가 가진 온갖 지식을 다 활용해 가지고 지식이 말하는 제일 옳고 바른 참된 그것을 주장하고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이종교도 그 이종교 그대로의 제일 옳고 바른 그것을 찾아가는 그 마음은 다 양심들입니다. 그러기에 뭐 불교인이나 유교인이나 또 무슨 어떤 사상이나 주의나 하는 그 전부의 다 거기서 옳고 바른 것을 찾아가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이 없으면 자기가 가진 모든 지식을 활용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의 이상적인 그 절정의 것을 자기가 다 활용하고 도달하는 것은 그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이라는 것은 꼭 같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지식이 다르면 양심이 달라집니다. 그러기에 지식이 삐뚤어진 사람은 양심이 삐뚤어졌고 지식이 바른 사람은 양심이 바르고. 또 지식이 좁고 편벽된 사람은 양심도 좁고 편벽됩니다.
그런데 모든 지식은 다 거짓된 지식이요 다 죽은 지식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다 죽은 지식이요, 다만 산 지식 옳고 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신구약 성경 지식뿐입니다. 그런고로 수많은 양심이 있다 할지라도 산 양심은 산 지식에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만 자기의 지식으로 삼아 가지고 행동하고 사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의 양심이 바른 양심이요 산 양심이지, 하나님의 지식과 세상 지식과 섞어 가지고 거기서 종합을 해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이 동으로 가라 하고 사람의 지식이 서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가는 것 반, 서로 가는 것 반 반반씩 선택해 가지고 가기 때문에 그 양심은 다 죽은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산 양심은 하나님의 지식만 따라서 가는 것이 산 양심이기 때문에 기독자에게만 산 양심은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라고 해서 다 산 양심을 가지느냐? 기독자라도 하나님의 지식을 진실되이 자기가 가지고 요 말씀대로 바로 할려고 애를 쓰는 고 사람만이가 산 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난밤에도 말한 거와 같이 그 사람이 아무리 수도 시설을 먼 데서부터 애써서 아주 거리 긴 거리에 수도 시설을 해놨다 할지라도 그 수도의 관 한 군데만 끊어져 있으면 그 물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끊긴 데가 없어야 그 수원지에 있는 물이 자기에게 오지 수도관이 끊겨 있으면 그 수원지에 있는 물은 끊겨 있는 그것 때문에 자기 집에는 오지 못하는 거와 같이 아무리 기독자가 신앙생활 해 가지고 할 라고 온갖 면으로 노력을 해서 아주 힘을 썼다 할지라도 고 한 동가리 끊어지면 안 되는 그 동가리가 뭐인가? 그것이 곧 신앙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기 시설하는 사람도 뭐 전기를 아무리 그 배선을 참 튼튼히 하고 잘했다 할지라도 한 군데라도 끊어져 있으면 그만 그 전력이라는 것은 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자들이 온갖 신앙생활에 힘을 쓰고 또 다 방면으로 다 힘을 쓰고 애를 쓰는데 어디서 고장이 나 가지고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또 천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된다, 또 세상을 이기게 된다,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자기가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뭐 참 사람이 상상도 못 할 그 큰 소망을 우리에게 해 놨습니다. 해 놨는데 이 소망의 큰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거짓 약속을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안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 아니고, 노력도 하고 온갖 면으로 힘을 쓰고 또 하나님의 계약은 틀림없이 요대로 이루어지는 계약이지만 일반 모든 우리 기독자들이 사고가 생긴 것은 어디서 사고가 생겼는고 하니 사고가 생긴 것은 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고 양심이 고게 절단났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양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인간편에 있는 인간 요소가 있고 또 하나님 편에 있는 하나님의 요소가 있는데 인간편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이 제일 중요하냐 하면 그 신앙 양심 행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 양심 행위가 없이 양심을 쓰지 안하면 그만 모든 신앙생활은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신앙 양심을 가리켜서 눈이라. 마태복음 6장에는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고 네 눈이 잘못되어 있으면 온 몸이 어두운 것같이 네게 있는 빛 이 어두우면 그 어두운 것이 얼마나 어둡겠느냐'하는 그 빛은 양심을 가리켜 말합니다. 네가 양심생활을 하지 안하면 네 전생활과 인격 건설이 그것이 얼마나 잘못 되겠느냐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일곱 교회에 '성령이 여러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그 귀가 무엇을 가리켜서 귀라고 말했는가? 그 귀를 말하는 것이 양심을 가리켜서 그 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육신의 귀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귀 있는 자라고 말하는 것은 양심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고, 또 양심을 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가 있고 이렇지만 양심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은 눈이 어두운 사람이기 때문에 보지 못 하고. 또 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렇게 연결되고 접선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그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완전히 다 갖추어서 다 구비해 가지고 무엇이든지 우리가 양심만 쓰면 다 취할 수가 있는데 양심을 쓰지 않기 때문에 취해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례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을 많이 해 놨는데 세례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 세례라, 또 세례는 모든 예수님의 대속을 다 입는 것이 세례라 이렇게 말씀했는데, 여기는 세례는 어떤 게 세례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세례다. 그 말은 양심으로라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자기가 다 받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또 양심이라야 옛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새사람을 살려 기를 수도 있지 양심 빼놓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구원에 있어서 양심을 빼놓으면 귀가 어두운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를 못한다. 구원에 대해서는 양심 빼놓으면 보지를 못한다. 또 하나님에게 상대해서 양심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에게 찾아가지 못한다.
이러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이 구원 관계에 있어서는 어디서 고장이 났느냐? 사람들이 무슨 그 사람이 신앙 의지의 고장난 그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또 신앙의 그 감각하는. 자기가 느끼고 깨닫는 그 감각에 고장난 것도 아니고, 또 성령의 소욕을 자기가 가지지 안해서 좋은 욕심을 가지지 안 해서 안되는 그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의 그 고장은 양심에 고장났다. 양심에 고장났다. 양심에 고장났다 말을 그 말을 달리 말하면 이미 신구약 성경의 지식을 아는 사람은 그 지식을 아는 사람은 다 아주 세밀한 것은 모르지만 그래도 예수님 믿어서 구원 이루는 것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아주 말세지 말에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은 옛날 초대의 속사도 교부, 아주 참 사도들의 직계 제자. 직계 제자 그 사람들보다 지금 일반 신자들이 훨씬 신앙 지식에 대해서는 성경 지식에 대해서는 구비하고 광대하게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식한 사람도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도 또 구원을 못지 않게 잘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은 그거는 뭐이냐? 성경 지식을 바로 쓰는 사람이라야 성경 지식을 바로 쓰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 구원을 바로 이루어 간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아주 좁고 적다 할지라도 고 사람이 아는 대로의 그 성경 지식을 바로 쓰게 되면 바로 쓰는 성경 지식을 한 가지 알고 한 가지 그것을 바로 쓰게 되면 바로 쓰는 그것은 모든 성경 지식을 알고 쓰지 않는 것보다 낫다. 성경 지식을 자기가 많이 가지지 못하고 적게 가졌다 할지라도 적게 가진 고 지식을 자기가 바로 써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고 가르쳤기 때문에 요대로 해야 된다 하는 그것을 가지고 고대로 하게 되면 그것이 고 다음에 하나님의 지식을 자꾸 연결적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백 가지를 알아도 행치 않는 것은 소용없고. 한 가지라도 알고 행하는 것은 성공을 한다. 왜? 한 가지라도 알고 행하면 그 다음에 한 가지를 행함을 인해 가지고 두 가지를 알게 되고, 두 가지를 알고 행하게 되면 세 가지를 알게 되고, 세 가지를 알고 행하면 네 가지를 행하게 되고 그것은 얼마든지 그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깨달아 알고 행하고 하는 요 둘만 가지면 신앙 행위는 신앙의 구원은 이를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 지식을 아는 것을 포기하고. '성경 지식 뭐 알면 무슨 필요하노? 성경 지식 몰라도 되지.' 하고 성경 지식 아는 것을 포기해서 성경 지식을 알아 가는 것이 없고, 또 지켜 행해 가는 것이 없고 그렇게 하면 그 구원은 아무도 이루지를 못합니다. 또 성경 지식을 자기가 알라고 해도 많이 알지 못하고 아주 조금밖에는 모릅니다. 조금 밖에 몰라도 성경 지식을 알라고 애를 쓰고 또 아는 대로 고대로 행할려고 애를 쓰고 요 둘만 가지면 어디까지든지 장성해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지식을 자기가 알라고 애를 쓰고 성경 지식을 알려고 하는 그것이 뭐인가?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받을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것이 제일 믿음의 초보입니다. 믿음의 초보고 고 둘째의 믿음의 걸음을 걷는 둘째 자욱을 떼놓는 것은 그거 뭐냐?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행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둘째 자욱을 떼놓는 것입니다. 첫째 자욱 떼놓고, 또 두번째 자욱 떼놓고, 또 첫째 자욱 떼놓고, 둘째 자욱 떼놓고. 오른 발 왼 발. 사람들이 제일 처음에 대개는 왼발을 먼저 세놓고 그 다음에 오른발 떼놓고 왼발 떼놓고 자꾸 이 두 발만 떼놓으면 어디까지든지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성경 지식을 알려고 하는 그것이 처음에 왼발 떼놓는 것, 고 다음에는 알고 난 다음에 고대로 행할려고 애를 쓰는 것이 오른발 떼놓는 것. 그러면 왼발 오른발 요 둘만 하면 뭐 아무리 높은 산에도 올라갈 수가 있고 아무리 먼 길이라도 갈 수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런데 사람이 그 오른발 떼놓는 이 오른발 안 떼놓고 또 왼발 안 떼고 이 둘만 안 떼놓으면 그 사람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이것만 떼어 놓으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첫째 자욱이 되는 하나님의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요, 땅위에 있는 모든 지식은 거짓된 지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을 알아서 하나님의 지식대로 내가 행하겠다 요런 생각과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을 알려고 애를 쓰면 알려고 해서 그 하나님의 지식을 단 하나라도 알았습니다. 하나라도 알았으면 그 사람은 첫째 자욱을 떼놨습니다. 고라고 난 다음에, 알았는데 고 다음에 둘째 자욱을 떼놔야 될 터인데 둘째 자욱을 떼놓는 건 뭐이냐? 아는 대로 아는 말씀대로 그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실행하면 둘째 자욱을 떼놨습니다.
고라고 난 다음에 또 고라고 나면 둘째 자욱을 떼놨으면 또 세째 자욱을 또 떼놓을 수 있습니다. 왼발 떼놓고 그 다음에 오른발 떼놓고. 또 그 다음에 또 내나 사용했던 왼발 또 떼놓 고 오른발도 자꾸 두 발로 걸어만 가면 어디까지든지 걸어갈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을 알려고 애를 쓰고 고대로 실행을 할려고 애를 써 실행을 하고, 알고 실행하면 고 다음에 또 알고 실행하게 되고 알고 실행하고 알고 실행하는 것으로써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고 실행하고 알고 실행하고 하는 데에 고 아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가 하나씩 알아 나가는 것이니까 그거는 뭐 쉽고 그거는 아무든지 다 바로 하고 있고, 그런데 고 다음에 둘째 문제 때문에 끊어져 가지고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대로 실행하는 그게 뭐인가 아는 대로 실행하는 고게 양심입니다.
아는 대로 실행하는 고게 딴게 아니고 양심입니다. 그 양심이라 하면 별스러운 딴것 생각하지만 아는 대로 실행 할라 하는 고게 양심입니다.
그러면, 아는 대로 실행할라 하는데 고 실행을 하면서, 실행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고 실행을 하는 데에 아는 대로 실행을 하는 데에 실행하는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실행하는 그것이 양심생활이 되는 사람도 있고. 또 실행하는 그것이 양심생활이 되지 안하고 욕심 생활이 되는 사람 도 있고 또 아는 대로 실행하는 그것이 무슨 다른 사람을 꾀우기 위해 가지고 유혹시키는 그런 그 실행 생활도 있고, 다른 무슨 딴것을 목적 가지고 실행하는 생활도 있습니다. 그러면 실행 생활의 동기와 목적이 있는 데 실행한다는 그 방편은 같지만 동기가 뭐 수가 많습니다. 이런 동기로 실행하고 저런 동기로 실행하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실행하고 저런 목적을 가지고 실행하고 실행하는 동기와 목적은 얼마든지 종류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실행하면서 성령이 와 가지고 네 실행하는 것은 바로 됐다 그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그 실행에 나아가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 실행이라, 양심생활이라, 양심 활동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 행동은 어떤 게 양심 행동인가?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어짜든지 옳게 바르게 할려고 그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할려고 애를 써서 자기대로는 성경 지식을 다 활용해 가지고 바로 할라 고 하는 고 마음 그것이 그만 양심입니다. 고것이 신앙 양심이요.
신앙 양심인데, 그 신앙 양심이 화인을 맞으면 안 돼 버립니다. 신앙 양심이 화인 맞으면 안 됩니다. 화인 맞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쇠를 가지고 도장을 만들어 가지고 그 쇠도장을 만들어 꾹 찍어버리면 그만 도장의, 도장 그 도장의 것이 돼 버리고 맙니다. 도장의 것. 도장을 찍으면 은 무엇이든지 아무리 서류가 많이 있어도 서류 많은 데에 거기 도장을 꾹 찍었으면 도장 찍은 그 사람이 서류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화인 맞는다 그말은 양심의 주인이 생겼다 그 말이오. 양심의 주인이 생겼다. 양심은 어디든지 매여 있으면 안됩니다. 양심이 어떤 것의 종이 되든지 종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까 양심이 무엇의 종이 됐든지 종이 되면 안 됩니다. 양심은 꼭 매인 데가 없이 자유해야 됩니다.
양심은 매인 데가 없이 자유하고, 자유하는 그 마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고 하니 그 양심은 자기가 가진 그 지식을 활용해 가지고 지식을 지식을 전부 이 활용해 가지고 그 지식대로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찾을려고 애를 쓰는 그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만일 밧줄에 매여 가지고 있으면 돈 밧줄에 매였든지 명예 밧줄에 매였든지 자기 감정 밧줄에 매였든지 가정 밧줄에 매였든지 자기 욕심 밧줄에 매였든지 인정 밧줄에 매였든지 사랑 밧줄에 매였든지 뭐 어떤 그 마음에 분한, 분한 그런 밧줄에 매였든지 어디든지 그 양심이 매여 있으면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기 때문에 양심은 그것의 양심이 됐다. 그것의 양심이 됐기 때문에 그만 그때에는 그 양심이 바른 일을 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자유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양심이 아무 데도 매이지 안하도록. 그말은 화인 맞지 않은 양심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무슨 그 사건이나 물건이나 사람이나 상대했을 때에 그 때에 네게 있는 모든 그 양심을 붙들어 매는 그런 것을 다 없애 버리고 네 욕심도 아리고 네 사정도 버리고 네 감정도 버리고 네 처지와 형편도 버리고 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옳고 바르고 참되게 할려는 고 자유하는 마음을 가지는 그것이 화인 맞지 않은 산 양심인 것입니다.
산 양심만 가지고 고대로 행하면 되는 것인데, 우리 사람들은 다 보면 양심이 화인을 맞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옳게 바르게 할라고 하지만 고 사람의 양심은 어덴가 붙들려 매인 데가 있다 말이오. 붙들려 매인 데가 있으니까 항상 거기 준해 가지고 무슨 비판을 하기 때문에, 그러면 이 사람의 양심이 다르고 저 사람의 양심이 다르고, 기독자의 양심, 기독자의 양심도 그 양심이 각각 다른데 이 사람의 양심과 저 사람의 양심이 다른 것은 이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의 순전히 성경 말씀에 속해서 성경 말씀대로만 할라고 하는 그 신앙 양심이 아니고 그 사람은 그 유교의 그 지식도 가지고 세상 지식도 가지고 또 자기 감정의 지식도 가지고 형편 사정의 지식도 가지고 이런 모든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이 종합해 가지고 모든 그 취사 선택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양심은 여러 군데 인을 맞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붙들려 매였으니까 자유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이 화인 맞으면 안 됩니다.
양심을 또 죽여서는 안 됩니다. 양심을 죽인다는 거는 뭐이 죽이는 건고 하니 자기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요게 아무래도 옳고 바른 것이다. 하는 고 옳고 바르다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꺾어 행해 버리면 옳고 바른 것을 알고 그것을 꺾어 행하는 그것이 양심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양심을 죽이면 그 사람은 다 마귀 생활되고 육체의 정욕의 모든 생활되지 그 구원에는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양심을 죽이지를 말아야 되고, 또 양심을 매장하지 말아야 됩니다. 양심을 매장하는 것은 자꾸 자기가 옳은 줄 알고 이 옳기는 옳은데 옳기는 옳지만 이대로 하면 안 되니까 옳기는 옳은 줄 알면서 그만 그 양심이 옳은 걸 자꾸 가르쳐 주는데 아이구 이래 자꾸 생각해 나가다 보면 양심이 꼭 이렇다 똑똑히 지적해 줄 터이니까 만일 지적을 받고 난 다음에 안 하는 날이면 도리어 가책이 더 되니까 그만 양심을 쓰면 생각할 수 있는데 생각하지 안하고 중단해 버리고 만 사람 있어. 중단하고 만 사람. 그것이 양심을 매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될고?' 생각하면 알 수가 있는데 알 수가 있는데 생각해 보면 고 참된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나을 수 있으니까 그만 생각하다 그만 중단해 버립니다. 아, 이거 자꾸 생각하면 나중에 확실히 양심이 이렇다 하는 것을 뚜렷히 알게 될 터인데 뚜렷이 알고 난 다음에 어기는 것보다도 차라리 그만 안 찾는 게 낫다 싶어서 중간에 양심이 인도하는 인도를 따라 갈라고 하다가 그 빛이 보여지니까 가면 뭐 결국 답안에는 이렇게 해야 된다는 고게 나을 터이니까 그만, 양심을 따라 가다가 중단해 버리는 그것이 뭐냐 하면 양심을 매장시키는 것입니다. 양심을 매장시키는 것이오, 그러니 양심이 화인 맞지 안해야 되고, 양심을 죽이지 안 해야 되고. 또 양심을 매장시키지 안해야 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매장 시키지 안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건가? 양심을 이제는 가꾸어야 됩니다. 양심에 북을 돋워 양심을 자꾸 가꾸고. 양심이라 하는 이것은 우리에게 인적 요소인데 이것은 가꾸어서 기르면 자꾸 커지고 그만 뭉켜 버리면 그만 꺾어져 버리고 죽어지는 것입니다. 양심은 무슨 힘이 있느냐? 양심은 강제의 힘도 없고 양심은 옳고 바른 것을 판단하는 거기에만 아주 능력을 가지고 고 장기만 가진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양심을 북돋워라. 양심을 북돋우는 것은 뭐냐 하면 양심을 자꾸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양심을 등장시키는 것. 자. 무슨 일이라도 닥치면 '보자. 어떻게 하면 여기서 옳고 바르게 하느냐? 옳고 바르게 하느냐? 어떻게 하면 내 물질에 유익하겠느냐? 어떻게 하면 내게 유익하겠느냐?' 자기에게 유익되고 해 되느냐 그것을 생각하는 그것은 벌써 양심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에게야 유익하든지 해롭든지 자기가 꺾어지든지 자기가 일어서든지 그거 내버려두고 옳게 바르게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게 옳게 바로 하는 것이냐?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하는 것이냐? 옳고 바르게 곧게 할려고만 하는 그것이 양심을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양심을 등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을 등용하면 자꾸 양심을 등용하면 양심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게 됩니다. 이 정권자들이 어떤 사람을 등용하면 그 사람이 자꾸 일어서지 않습니까 이와 마차가지로 양심을 등용하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하면 옳고 바르게 하는가 하는 그것을 자꾸 애를 써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양심을 북돋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을 북돋우고, 양심을 기르는 것은 어떤 게 양심을 기는 것인가? 양심을 기르는 것은 자기가, 양심이 요래 하는 게 옳다, 조래 하게 옳다 옳다고 판정했을 때에 그때에 판정한 그것을 그것을 고대로 고만 단행해 버리는 것이 그것이 행했으면 양심은 그때 가서 그만큼 장성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옳다 바르다 하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난 다음에 고것을 꺾어서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양심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양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양심을 죽이는 것. 또 자기가 옳고 바른 그것을 자기가 어떻게 하면 옳게 하느냐, 어떻게 하면 바르게 하느냐? 옳고 바르게 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또 양심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네, 양심을 북돋우는 것입니다.
양심을 북 돋우는 것. 또 자기가 요라면 요게 옳다, 그르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 확실히 확정짓고 난 다음에는 어떤 무슨 관계가 있고 어떤 결과의 어려움이 있고 있다 할지라도 고대로 단행해 버리는. 고대로 그만 행하는 것, 옳고 바르다고 판정될 때에 고걸 고대로 실행하는, 고대로 단행하는 고게 뭐입니까? 양심을 기르는 것입니다. 고게 양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을 키워서 양심이 장성한 양심이 되면 어떤 것이 장성한 양심인가? 장성한 양심은 그 양심이 장성하니까 마음의 모든, 마음에는 뭐 요소가 한정 없습니다. 요소의 마음에는 그 정이라는 마음도 있고, 그 감이라는 마음도 있고 욕심이라는 마음도 있고, 뜻이라는 마음도 있고, 또 사랑이라는 마음도 있고 마음 가운데는 뭐 오만 게 다 있는데 그 장성한 양심 어떤 양심인가? 장성한 양심은 자기의 마음을 그만 주권합니다. 자기 마음을 주권하는 것이 장성한 양심이요. 또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 양심이 주권하는 것이 장성한 양심이요, 또 자기의 모든 행동을 이 마음이 주권하는 것이 장성한 양심이요, 자기의 몸을 이 양심이 주권하는 것이 장성한 양심이요, 자기의 죽고 사는 것을 양심이 주권하고 있어.
그러면 그게 장성한 양심입니다.
이렇게 양심을 우리가 길러야 되는. 양심 기르는 이 양심은 그것은 인적 요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기르지만 우리가 기르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길러야 됩니다. 이래서 장성한 양심이 되도록 자꾸 양심을 길러 줘야 되지 양심을 기르지 안하고 양심 이것을 그만 자꾸 매장을 시키고, 양심을 한 번 매장시키고 두 번 매장시키면 양심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다음에 양심을 죽여 버리면 양심이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 양심이 살아났습니다. 그런고로 양심을 우리가 가꾸어서 장성된 양심을 만들어야 됩니다. 아주 장성한 그 양심을 만드는 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나 또 행동이나 몸이나 뭐 생명이나 그 모든 것을 양심이 다 주장을 하도록 그렇게 하였으면 그 사람의 양심은 장성한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심을 이걸 기를 필요가 뭐 있는가? 양심이 우리 이 육체에는 양심이 제일 그 실력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제일 실력 있는데 아무리 자기 의지가 실력 있고 욕심이 실력 있고 감정이 실력 있고 또 감각이 실력 있고 지식이 실력 있고 뭐 있다 하더라 해도 이 양심이 제일 실력 있는 것인데 양심으로 행하는 것이 육체의 행동으로서는 제일 능률이 큽니다. 그 다음에는 중생된 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제일 능률이, 그보다 크고, 그 보다 큰 것은 이제는 중생된 영으로 활동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진리와 영감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행위에서 영감 행위로 나아가고, 영감 행위에서 이제는 중생된 영과 성령의 그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기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제가 증거할려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신앙 양심 행위를 버리면 구원은 다 절단이다.
그러면, 신앙 양심 행위는 인적 요소요 신적 요소가 아니다. 그러면 신앙 양심 행위는 어떤 것이 신앙 양심 행위인가? 자기가 이런 거 저런 거 아무 데도 매이지 안하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할려 하는 요 깨끗한 요 마음이 신앙 양심이기 때문에 요거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믿는 사람이 뭐 주일도 잘 지킬 수 있고, 또 순교도 할 수 있습니다.
순교를 해도 신앙 양심 생활이라고는 꼭 볼 수가 없습니다. 순교를 해도 신앙 양심 생활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교를 해도 신앙 양심 생활이라야 되고, 또 아무리 자기가 봉사를 해도 신앙 양심 생활이라야 되고, 어떻게 주일을 지키고 전도를 아무리 하고 기도를 아무리 해도 신앙 양심 생활이라야 되지 양심을 빼놓고는 하나님과 접선이 안 된다 하는 이것을 가지고, 꼭 양심은 뭐 별 게 양심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면 옳게 바르게 할까? 진실되게 바르게 할까? 고 외식 없이 바르게 할려 하는 고 마음가지면 그것이 신앙 양심 생활입니다.
그래 믿는 사람이 어짜든지 고 양심 생활하는 그것이 없으면 다 헛일입니다.
양심생활은 제가 압니다. 양심은 속에 있기 때문에 아. 아무리 그리 해도 양심은 틀렸다고 이렇게 정죄를 해 주기 때문에 양심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옳고 바르게 말해 주는 것이지 다른 이는 말해 줄 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자꾸 기르고 살리고 이렇게 장성하게 해 야 되지 양심을 가꾸지 안하는 사람은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공과를 그것을 잘. 공과지를 못 받은 분들은 다른 교회서 온 분들이라도 공과지를 달라 하면 공과지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공과지를 주니까 공과지를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공과지를 어디서 나눠주고 있소? 주일학교 서기부. 바로 저 밑에, 맨밑에 가면 주일학교 서기부가 있는데 거기 가서 공과지를 어제 못 받은 사람들은 다른 교회서 온 분이라도 달라 하면 됩니다.
주면 고 공과지를 가지고 자꾸 새겨서 읽게 되면 알게 됩니다. 지금은 공과지를 아는데 공과지에서 거기에서 좀 깨닫기 쉽도록 다른 면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까 공과지를 가지고 가 보면 그 양심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양심이라는데 대해 양심에 대해서 지식을 바로 가져야 되고. 또 양심을 실질적으로 이것을 자꾸 죽이던 일, 매장시키던 일을, 또 화인 맞게 하는 일을 다 버려야 되겠고, 또 양심을 잘 가꾸어서 북돋워 가지고 장성한 양심으로 만들어 이제는 양심이 써게 대해서는 양심이 제일 그 육체의 심신에서는 주인이 되어져, 양심이 주인이 되면 그 다음에는 중생된 영이 주인입니다. 중생된 영이 주인이 되고, 중생된 양심은 중생된 영에게 속하게 되고, 또 그 양심은 모든 것을 다 주권하게 되면 그 사람은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을 빼놓고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양심을 빼놓고는 자기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