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5 16:56
신앙성장과정 열세가지 순서
1989. 6. 2. 금야.
본문: 요한계시복 1장 8절∼20절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횐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묵상 기도) 이 시간을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도 주님의 피공로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성령님의 감동으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사 참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드릴 수 있는 신령한 은혜를 입는 저희들되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함께 해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오늘 봉독한 이 말씀에서 우리 기독자들이 어떻게 자라가는가 하는 자라가는 순서와 그 모든 형태들을 잠깐 증거하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는 참 사도들 중에도 깊은 신앙을 가졌고 또 주님과 밀접한 그런 영교도 가졌고 제일 끝까지 살아 있으면서 복음을 전한 아주 권위 있는 그런 탁월한 사도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면이 구비하고 장성한 그런 신앙이지마는 또 앞으로 얼마든지 자라가야 할 그런 미완성의 모든 부분이 있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고 또 미완성의 부분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신앙은 자라고 구원은 점점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자기가 어데까지 신앙이 위대하게 자랐다 할지라도 자기가 세상에 살아 있으면 아직까지 고칠 것이 있고 또 자라갈 것이 있고 미래에 자기가 힘써야 될 그런 남은 구원 이룸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가 모든 사도들은 다 대개는 모두 복음 전하다가 순교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남아서 끝까지 이 복을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일반 교회들이 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거와 같은 그런 일반적인 신앙을 가졌으면 사도 요한이가 그렇게 독특한 그런 어려움을 당할리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는 밧모 섬이라 하는 그 섬에 귀양을 갔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는 섬인데 아주 그 섬으로 그만 배로 실어다가 던져 버리고 나니까 뭐 그 다음에야 자연히 거기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아주 귀양을 밧모 섬으로 갔습니다.
갔는데 거기 말씀하시기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형제요 하는 그말은 사도 요한이나 그때에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자들이나 우리나 꼭 같은 자격을 가졌고, 꼭 같은 입장을 가졌고, 또 꼭 같은 은혜를 입은 꼭 같은 동등된 자들이다 하는 것을 나타내서 '너희 형제요'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도 요한과 같은 그런 육적 그 가치도 같고 영적 가치도 같고 또 주님의 은혜를 입은 것도 꼭 같고 또 주님에게 대한 의무와 책임도 꼭 같은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은 말하기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이제 '형제요' 하는 것은 해석을 했습니다.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교는 뭐이 예수교인가? 예수교는 환난 받는 것이 예수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꼭 같은 환난을 받습니다. 또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그러면 예수님의 나라를 다 우리가 얻을라고 하면, 예수님의 나라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환난을 받게 되고 또 참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나라를 제가 소망하지 안한다면 뭐 환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나라를 소망을 두고 예수님의 나라의 생활을 하든지 예수님의 무궁한 나라에 갈 그런 준비를 하든지 어짜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 천국 백성의 생활을 하면 필연적으로 환난은 받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환난 없이 예수를 믿을라고 하는 그것은 참 아주 모순된 말입니다.
불에 들어가는 사람이 타지 안하고 데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정반대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생활 할라 하면은 세상 나라에게 박해를 받는 것이 필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그만 하늘나라만 내놓으면 뭐 그 박해받을 필요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물질에 손해볼 것도 없고 남한테 질 것도 없고 또 제 오기대로 기분대로 못 할 것도 없고 이런데 예수님의 나라 때문에 꼭 환난과 참는 거 이 두 가지를 받아야 됩니다. 환난을 안 받을라 하면은 예수님의 나라를 내놔야 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를 제 나라로 삼고 제가 천국 백성으로 살라고 하면 반드시 환난을 받게 됩니다. 환난을 안 받을라면 천국 백성의 생활을 내놓으면 그만 환난 없습니다.
또 환난을 받을 때에 천국 나라 생활을 하려고 하면 천국 법도를 지켜서 살라고 하면 환난을 당하는데 그 환난당할 때에 그만 환난당할 때라도 안 참고 그까짓 거 내 맘대로 해 버리면 그만 이제까지 제가 노력한 하늘나라가 절단났지 그만 환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거 부애나도 참아야 되고, 손해가도 참아야 되고, 억울해도 참아야 되고, 참 뭐 여러 가지 해를 받아도 참아야 되고, 이거 참는 일 안 하면은 이 나라가 절단나기 때문에 참는 일을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환난을 만나게 되고 환난 만날 때에 하늘나라를, 이제까지 하늘나라 법도로 살다가 환난 만났을 때 그만 환난 그것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참지 안해 버리면 그만 하늘나라가 절단나 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어려움이 오면 그만 참지를 못해서 이루어 놓은 하늘나라를 절단내는 그런 것이 대부분의 신자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아예 으례히 이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귀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니까 환난은 필연적으로 당하는 것인 것을 알아야 하고 또 환난 당할 때에 자기가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이 나라가 이루어지지 참고 견더지 못하는 사람은 그만 헛일입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감옥 생활 하던 사람들도 참다가 참다가 마지막 넉 달 동안을 참지 못해 가지고 항복하고 나온 사람 그 사람 그 받은 은혜 다 쏟아 버리고 헛일했습니다.
그래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너거와 나와 꼭 같은 동등 입장이요, 동등 의무와 책임을 가진 자요, 동등 생활을 하는 자이기 때문에 동등 환난을 만나니 나와 같이 동등 참음을 가져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헛일이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그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가지고 귀양살이로 가서 밧모 섬에, 사람도 없는 밧모섬에 귀양살이를 갔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믿을라고 하면 가족에게도 외로움을 당하고 또 교회도 외로움을 당하고 세상에서도 외로움을 당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면은 필연적으로 고독의 처지를 당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독을 당하지 아니하려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모든 사람들이 친화되도록 이렇게 하려고 하면은 예수님의 이 복음과 이 생활을 내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믿을라고 하면 이 사도 요한이가 밧모 섬에 귀양 간 고독을 당한 거와 같이 이렇게 고독하게 된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고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뭐 이상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교회에서도 제일 외로운 사람이 누구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일, 하나님 말씀을 제일 잘 지키는 사람이 제일 외롭고, 둘째로 잘 지키는 사람이 둘째로 외롭고, 셋째로 잘 지키는 사람은 셋째로 외롭고, 하나도 안 지키는 사람은 외로움이 하나도 없고, 조그매 지키는 사람은 조그매 외롭고 이것은 필연한 일인 것입니다.
환난도 고독도 필연한 일인데 예수 믿을라고 하면은 이런 게 으례히 닥치는데 여기에 중요한 것은 참아야 성공합니다. 참지 못하면 성공 못 합니다. 뭐 아무리 자기 성질이 급해도 참아야 되고, 오기가 강해도 참아야 되고, 번연히 똑똑해도 참아야 되고, 말 잘해도 참아야 되고, 힘이 있어도 참아야 되고, 참아야 되지 참지 안하면 그만 이 구원은 다 깨져 버리고 맙니다.
O조사님이라고 여기 OO교회 있었는데 그 신앙생활 때문에 그만 가정에 여러 가지 그만 풍파가 일어났습니다. 풍파가 일어났는데 이제 한번은 그 사람이 기도 가운데 보니까 이 계란이 지금 있는데 그만 어떻게 닭이 그만 가서 그만 야단을 치고 이렇게 못 견뎌서 날뛰고 이라니까 계란이 떨어졌는데, 땅에 떨어졌는데 보니까 전부 알이 그 부화가 돼 가지고 거의 다 돼 가는데 그만 떨어져서 다 죽어 버리더라고.
그걸 보고 자기는 '내가 이 신앙 지킬라 하니까 고독이 오고 환난이 오고 이런 모든 분쟁이 나는데 내가 여기에서 참지 못하면 이거 다 헛일된다. 참아야 이제 성공이 있겠다' 그걸 생각하면서 그 사람은 꼭 참아 가지고 믿음에 성공을 했습니다. 이래서 사도 요한이가 하나님 말씀을 요렇게 지키니까 외로와졌고 밧모 섬에 갇혀졌습니다. 갇혀졌는데 갇혀 가지고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 말씀대로 이와 같이 지켜 살라고 할 때에 세상에게, 또 속화된 교회에게, 자기 신앙만 못한 모든 신앙들에게 배척을 당해 가지고 밧모 섬이라는 그 섬에 귀양살이를 가게 됐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도 요한은 교회적으로 불쌍한 사람이 됐고 또 세상에서도 불쌍한 사람이 됐고 세상과 교회에서 배척을 당해 가지고 밧모섬에 갔었습니다.
갔는데 사도 요한이가 성경 기록한 사도 중에 사도요 또 참 은혜가 충만한 그런 아주 독특한 그런 사도입니다. 사도지마는 이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주일을 지킬 때에 그때에 받는 그런 성신의 감동을 받지를 못하고 그런 성신의 감동은 처음 받았습니다.
이 사도 요한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뭐 핍박을 받든지 외롭든지 대적을 당하든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도만 자기는 그대로 지켜서 살라고 함으로써 배척을 당해 가지고 밧모섬이라는 그 섬에 아주 외롭게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참 세상 인연은 다 끊어지게 되니까 세상적으로는 불쌍한 사람이 됐지마는 그는 하나님과는 이제까지 가지지 못하던 그런 밀접한 연결을 가졌습니다. 요것이 그 신앙가들의 자라가는 순서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신앙생활 함으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환난을 우리가 받아야 하고 환난 받았을 때에 참고 견디고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배척당해서 외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외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외로움을 당하면 그것이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는 실패같이 보이지마는 그 외로움을 당한, 세상에서는 외로와지고 자기는 참 배척을 당했지마는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는 가까와지고 하나님에게는 영접함을 받았습니다. 요것이 신앙의 사람들의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신앙생활 하면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데에서 환난 만나게 되고 환난 만났을 때에 그때에 자기가 환난 만났을 때에 참고 견디지 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당장에 환난 그까짓 거 벗을 수 있습니다. 왜 남한테 억울한 소리를 듣고 있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남한테 멸시받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참지만 안 하면 당장 벗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 벗어 놓지 안하고 그대로 말씀대로 사니까 참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마지막에는 배척해 가지고 저 밧모 섬에 그만 실어다가 집어던져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세상에서 아주 버림을 당해 버렸고 아주 배척을 당했습니다.
당하니까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하던, 물론 평소에도 성신의 감화에 충만한 사람이오. 사도니까 성신의 감화에 충만한 사람 아닙니까? 충만한 사람이지마는 이제까지 만나 보지 못하는 성신의 충만함을 밧모 섬에 가 가지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환난 받았을 때에 참고 견뎌야 되고 참고 견디면 나중에는 세상에서 아주 버림을 당하고 쫓겨남을 당하고 그렇게 고독하게 되는 그런 가련한 신세가 되는 것같이 보이지마는 이 세상과 교회에서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는 더욱 친밀해지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접함을 받는 그 사도 요한이가 됐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요것도 좀 잘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성신의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횐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다' 이래서, 사도 요한이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킴으로 환난을 만났고 환난을 만났을 때에 제 좋아하는 대로 하지 안하고 그 환난에서 참고 견뎠고,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했고, 이호가 환난을 만났고 또 삼호에 참고 견뎠고 이러니까 사호에 배척을 당해서 밧모 섬이라는 섬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귀양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오호에는 뭣이 나타났어? 오호에는 거기에서 주일을 지킬라고 주일 예배를 혼자 보는데 전에 보지 못하던 성령의 감동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인제 그라면 몇째지요? 주일날 성신의 충만한 감동을 받은 것이 몇째입니까? 다섯째.
성신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섯째 큰 음성이 나는데 자기 앞에서 소리가 나지 안하고 자기 뒤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여기에 계시록에 표현하기를 자기 앞에서 소리가 들려오지 안하고 자기 저 뒤에서 뒤꼭대기 있는 뒤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고 자기와 화합이 돼 가지고, 자기와 하나 되고 자기와 뜻이 맞는, 자기 앞에서 말하면 자기와 내나 같은 그 동등이요 사상인데 자기의 정반대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기의 정 반대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도 요한이가 모든 것은 다 자기가 보고 있는 일이요 자기와 뜻이 같고 생각이 같고 다 같은데 여기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사도 요한의 정반대인 음성인 들려왔습니다. 자기 뒤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면, 정반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제까지 듣지 못한 소리요 이제까지 자기의, 자기 앞에서가 아니고 자기 뒤에서라 그말은 자기와 정반대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이오. 이제까지 자기의 의사와 맞지 안하고 자기 생각과도 같지 안하고 자기와 아주 다른 그런 음성이 들려온 것을 표현해서 뒤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면 자기 뒤에서 큰 음성이 들려왔다는 요게 몇째입니까? 여섯째요? 들려왔는데, 그때에 이제 사도 요한이가 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알아 볼라고, 뒤에서 들리거나 말거나 자기는 뭐 그 소리를 그만 귀넘어 듣고 던지지 안하고 자기 뒤에서 오는 음성을 알아 볼라고 돌이켰습니다. 몸을 돌이켰어.
여기에 보니까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봤습니다. 이제 자기 뒤에서 나는, 음성이 자기 뒤에서 난다 요 상징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자기 뒤에서 음성이 난다. 음성이 나는데 '그 음성 소리를 알아 볼라고 몸을 돌이킬 때에' 그거 몇째입니까? 어? '몸을 돌이킬 때 일곱째입니다.
'몸을 돌이킬 때에' 그때에 일곱 금촛대를 봤습니다. 그러떤 일곱 금촛대를 봤다 일곱 금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제 사도 요한이가 성신의 충만한 사람으로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교회 창설자요. 사도요. 이랬는데 자기가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자기 뒤에서 음성이 나는 음성을 알아 볼라고 몸을 돌이킬 때에 그때에 눈이 떨어져서 일곱 촛대를 봤습니다. '금촛대를 보았는데' 그러면 금촛대를 봤습니다. 금촛대는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금촛대라고 말합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발은 빛난 주석 같고 또 털은 횐 양털 같고 또 얼굴을 해가 힘있게 비취는 햇빛 같고' 이런 인자를 봤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여기 말한 것입니다. 봤습니다.
그러니까 몸을 돌이킬 때에 눈이 밝아져서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일곱 촛대를 봤고 그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을 봤습니다. 그러면 이 사도 요한이가 몸을 돌이킬 때가 그 몇째입니까? 몇째 순서? 어? 일곱째 순서로 몸을 돌이켰는데 몸을 돌이키고 나니까 환하게 눈이 열려져서 과거에 보지 못하던 금촛대를 봤고 과거에 보지 못하던 인자를 봤습니다. 인자를 봤습니다. 인자라 말은 예수님을 봤다 말입니다.
이러니까 과거에는 과거에 사도 요한이가 이 교회라 하는 것이 어떤 것이며 교회라 하는 것이 참으로 금촛대다. 금촛대라 하는 것은 세상은 깜깜 어두운데 그 촛대만은 환하게 밝은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사도 요한이가 교회라는 것이 이 세상에 어떠한 라이라 하는, 교회가 참으로 이 세상에 빛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새로 깨닫고 보게 됐습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 하는 것을 또 자기가 처음으로 보게 됐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사도요 또 예수님과 제일 친근해서 예수님에게 항상 의지하고 그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사랑하시는 제자라' 이랬습니다.
사도 요한은 특별히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 이렇게 말한 제자인데 이 제자가 일곱째로 몸을 돌이킬 때에 그때에 눈이 열렸습니다. 돌이킬 때 눈이 열렸습니다. 눈이 열려서 뭘 봤는고 하니 일곱 촛대와 그 사이에 다니시는 인자를 봤습니다. 그러면 눈이 열린 것은 몇째입니까? 예? 눈이 열린 건 여덟째입니다. 요거 이거 여러분들에게 순서만 말해 주니까 뭐 집에 가서 자꾸 새기고.
눈이 열렸습니다. 눈이 열렸는데 이제 눈이 열려 가지고 뭐이 보였느냐 하면은 교회와 주님이 보였습니다. 교회와 주님이 보인 것이 몇 째입니까? 아홉째입니다.
교회와 주님을 보고 나니까 자기는 거기에서 예수님 발 아래 그만 엎드려져 가지고 죽은 자와 같이 됐습니다. 완전히 죽은 자와 같이 돼 버렸어. 죽은 자와 같이 된 것이 몇째입니까? 죽은 자와 같이 된 것이 열째입니다. 죽은 자와 같이 된 것이 열째입니다.
열째니까 이제 주님이 열한째로 사도 요한에게 손을 들어 안수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걸 보면은 사도 요한이가 돌이켜서 눈이 열려 가지고 예수님을 보고 난 다음에는 그만 얼마나 두려웠든지 뭐 기절해져 버렸습니다.
기절해서 죽은 자같이 됐습니다. 죽은 자와 같이 되니까 예수님께서 그 위에 손을 얹어서 안수했습니다. 그러면 안수한 것은 몇째입니까? 열한째로 안수를 했습니다.
안수를 하면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전에도 내나 내가 있었는데 네가 내 품에 기대고 또 나를 네 친한 친구처럼 이렇게 여기고 만만하게 이렇게 해서 그때는 네가 나를 뭐 얼마나 만만하게 알고 또 친밀하게 이래 지내지 안했느냐? 내나 그때 있는 예수나 지금 나 예수나 꼭 같은 것이 내가 변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로를 하시고 '나는 그때 죽었으나 다시 살아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다 이라면서 사도 요한에게 안수하시고 위로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신것이 몇 번째입니까? 열두번째 위로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사도 요한에게 이 일곱 촛대의 비밀과 일곱 별의 비밀을 사도 요한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 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 이것을 네가 기록하라 그러면 이것을 사도 요한에게 맡겨 가지고 이 일곱 교회와 일곱 촛대, 그라면 교회와 하나님의 종들을 사도 요한에게 위임시켜서 이것을 네가 기록하라 했습니다. 위임을 시켜 가지고 기록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가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대해서 사도 요한에게 기록하라고 위임을 맡겼습니다. 그라면 사도 요한이가 몇번째 이 일곱 교회와 일곱 촛대를 맡았습니까? 열세번째에 맡았습니다. 요 순서를 여러분들이 요렇게 알아서 기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환난당합니다. 환난 당하는 거 그거 각오 해야 되고 또 그럴 때에 그만 참지 안 하면 헛일이야. 참아야 이것이 잘 부화가 됩니다.
환난 만나고 환난 만날 때 참고 그라면 그 다음에 외로와지고 밧모 섬에 귀양 가고, 외로와지면, 세상에게 버림당해서 외로와지면 누구하고 친근해집니까? 하나님하고 친근해집니다. 친근해지고 난 다음에 사도 요한이가, 외로와지고 외로와지니까 세상에는 외로와졌는데 하나님과는 친근해지고 하나님과 친근해지니까 사도 요한이가 만난 것이 뭘 만났습니까? 성령의 감동을 만났습니다.
또 감동 만나서 감동 만나니까 성령의 감동이 사도 요한에게 무슨 리를 들렸습니까? 뒤에서 나는 큰 음성 소리를 들었습니다. 뒤에서 나는 것. 뒤에서 나는 것을 음성 소리를 들었습니다. 듣고 그 음성을 알아 볼라고 몸을 아주 돌이킬 때에, 돌이키니까 그 다음에 무슨 순서입니까? 눈이 밝아졌습니다.
밝아지고 나니까 뭐이 보입니까? 일곱 촛대가 보였습니다. 이 해석은 뭐 여러분들에게 다 지금 뭐 말할 수 없으니까. 일곱 촛대가 보였습니다.
사도 요한이가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서 알지마는 이 순서를 거치고 난 다음에 교회를 본 교회 강도가 다릅니다. 비로소 사도 요한이가 이 교회라 하는 것은 참 이 피조물 중에 이 우주에는 교회가 이게 제일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이라 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고 느끼기를 느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했는데, 예수님을 발견했는데 어떤 예수님으로 발견했습니까? 그 앞에 기절해서, 기절해서 죽지 안할 수 없는 기절해 죽은, 두려워서 기절해 죽어지는 그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그 주님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 다시 사도 요한이가 안수를 받았습니다. 위로의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 받고 난 다음에 알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에 대해서 책임지는 위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 순서인바 그 순서가 전부 몇 가지입니까? (13가지) 이것은 그저 여러분에 그저 알리고 내가 오늘 저녁에 증거할라 하는 것은 꼭 하나입니다. 요것을 잘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 신앙이 자라가는 그 순서를 말했습니다. 환난도 말했고, 거기서 또 참아야 된다는 것도 말했고, 거기에서 또 배척당해서 외로와진다는 것도 말했고, 외로와지면은 하나님과 천국과는 가까와진다고 또 말했고, 그러면 외로와지는 그 순서를 통과하고 난 다음에 성신의 감화의 충만함 받는 것을 말했고, 성신의 감화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에 자기 뒤에서 나는 음성과 같은, 자기 뒤에서 나는 큰 음성 소리를 알아볼라고 돌이킬 때 그때 눈이 환하게 밝아져서 모든 역사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 오늘 저녁에 이 말씀을 보고 증거할라 하는 건 지금 말하는 요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자기 앞에서 나오는, 자기 앞에서 나오는 음성과 같은, 자기가 자기 사상과 같고, 자기 지식과 같고, 자기가 알고 있고 하는 그런 문제가 있고, 그러면 자기가 이렇게 해야 될터인데 내가 이렇게 해야 될 터인데 못 한다 이렇게 해야 될 터인데 못 한다.' 하는 그런 문제가 있고 자기와 정반대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와 정반대가 되고 대립이 되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생각과 아주 반대되고 자기 뜻과 반대되고, 자기 소원과 반대되고, 자기의 견해와 반대되고, 자기의 사상과 반대되는 것 자기와 정반대되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발견이 됩니다. 자기와 정반대되는 것.
그러면 신앙생활 해 가는 데에 자기와 정반대되는 그런 것이 있는데 자기와 정반대되는 그런 것이 있을 때에 그때에 자기와 정반대되는 그것을, 사도 요한이는 이제까지 모르는 일이요 자기 뒤에서 나는 큰 음성 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자기와 상대해서 자기와 동등의, 자기와 동등의 그 말과 주장이 아니고 자기와는 정반대되는 그런 말이요 생각이요 또 주장입니다.
그럴 때에 이 사도 요한이가 거기에서 알아볼라고 몸을 돌이킬 때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에게 내가 지금 증거하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 그 현재까지 하는 신앙생활과 신앙 사상과 비슷하게, 자기가 그렇게 하지 못해도 그래도 생각도 같고 깨달음도 같고 소헌도 같고 자기와 모든 지식으로나 또 생활로나 그렇게 같고 그저 자기가 못 하니까 마음에 동경하고 소원하고 이래 같은 것이 있고, 같은 것이 있고 자기와 정반대되는 것이 있습니다. 반대되는 거는 자기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반대됩니다. 자기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데도 자기 현재에 자기와 아주 거리가 멀어서 정반대되고 또 신앙 지도자들이 말하는 데에도 자기 현재에 처지와 정반대되고 하는 그런 것이,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납니다.
지도하는 사람도 대개 지도하는 것이 그저 그 사람에게서 조금 다른 것, 조금 앞선 것 요런 그 지도를 할 때에는 자기가 달게 수락을 하고 또 그대로 행하려고 그만 좀 애도 써 보고 그래 받지마는 원청 거리 먼, 거리 먼 지도와 거리 먼 그런 교훈을 하면은 사람들이 이해를 잘 하지 안하고 반대를 하고 반동을 하고 아주 귀넘어 듣든지 반대하든지 그렇습니다.
이래서 자기 현재의 신앙생활과 그저 비슷해서 참 비슷한 그런 신앙생활, 그러면 자기 신앙생활과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은 그런 비슷한 그런 신앙생활은 사람들이 다 잘 듣고 또 좋아하지마는 자기의 신앙과 정반대되는 그런 때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또 그대로 행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은 다 아예 상관 없이 그만 멀리 해 버리고 마는 것이 일반 교회들입니다.
그래서 내 뒤에서 나는 큰 음성이 들려서 그 소리를 알아볼라고 돌이킬 때에 눈이 밝아졌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가 이제까지 사도 노 릇을 했지마는 밧모 섬에 가기 전에 사도와 밧모 섬에 가고 난 다음의 사도와는 다릅니다.
이제까지 밧모 섬에 가기 전에는 그가 보던 교회 '교회는 이렇게 성결하고 교회는 이래야 된다' 교회의 성결성과 교회의 가치성과 교회의 그 존귀성 이 존귀성을 사도 요한이가 밧모 섬에 가기 전에 본 그 교회의 가치관과 존귀성과 성결성, 가기 전 교회관, 가기 전 교회관과, 또 가기 전 예수관, 가기 전에 자기의 구주인 예수님을 보는 예수 관과가 아주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얼마나 달라졌느냐? 그만 예수님을 보고 그 앞에 그만 기절하기까지 현저히 아주 달라졌습니다.
이렇게, 그러면 사도 요한이 그 신앙이 어데서 벌컥 벌컥 그래 자라서 그만 가속도록 이렇게 아주 폭발적으로 이렇게 자랐느냐? 폭발적으로 사도 요한이가 신앙이 아주 폭발적으로 아주 가속도로 이 폭력적(爆力的)으로 이렇게 사도 요한이가 자라난 그 순위는 뭐인고 하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되 환난이 이르기까지 사는 데, 살면서 참고 견디는 이런 것에서 사도 요한이가 자라는 모든 기초가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그라다 보니까 외로움을 당했습니다. 외로움을 당하는 그것이 또 사도 요한의 신앙이 이렇게 가속도로 자라는 그런 순서가 됐습니다.
그라다가 밧모 섬에 가 가지고 자랍 것은 사도 요한이 자기 앞에서 소리가 나면 하지마는, 뒤에라고, 뒤라고 요래 한 건 자기는 상관 없는 소리라 그 말이오.
자기와, 자기 뒤에서는 상관 없는 소리고 자기가 상대하는 앞에 소리가 아니고 뒤에 소리라 말은 자기는 반대되어 있는 그런 음성이라 그런 것을 요 상징하기 위해서 뒤에서 나는 음성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뒤에서 나는 음성 이 음성을 들을 때에 자기가 거기에서 그 음성을 알아볼라고 몸을 돌이킬 때에 그때에 눈이 환하게 떨어져서 아주 교회관도 달라졌고 예수님관도 달라져서 자기는 완전히, 예수님 앞에서 당당히 자기같은 충성된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만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 죽은 자와 같이 기절하는 그런 사도 요한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뒤에서 나는 그 음성을 듣는 거기에서 사도 요한이도 변해져서 눈이 열려 가지고 변한 교회를 봤고 변한 예수님을 봤고 그라니까 자기도 변해져 버리고, 변해지고 나니까 이제 주님이 이 일곱 교회와 일곱 사자에 대한 모든 사건들을 사도 요한에게 맡겨서 네가 이것을 책에다 기록해라 하는 그 위임을 맡게 됐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뭐 이거 좀 간단한 시간에 이래 할라 하니까 안 되는데 요것만 기억하십시오. 사도 요한이 신앙으로 자라가는 데는 이런 순서, 몇 가지 순서지요? 열세 가지 순서인데 이 열세 가지 순서를 우리는 다 싫어합니다.
이 열세 가지 순서를 싫어하는데 이 열세 가지 순서가 차차 차차 이래 자라서 마치 집을 지을라면 기초를 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뭐 기둥을 세워야 되고, 그 다음에는 봇짱을 걸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또 일층 스라브를 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이층에 올라가고 하는 것처럼 이 신앙은 꼭 단계적이고 건설적으로 돼지는데 그것이 사도 요한이 요 밧모 섬에 가는 요 순서에서 잘 그 순서를 우리에게 기록해 가지고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이 자라가는 순서는 요런 순서로 자라가니까 요 순서를 이상한 일 당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요 순서를 싫어할 게 아니라 요 순서가 오기까지 우리는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해서 사는 데에는 어떻게까지 살아야 됩니까? 환난이 닥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로 살아서,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사는데 그 살 때에 바로 살았느냐 안 살았느냐 하는 그 표시판은 뭐입니까? 예? 환난이라, 환난.
환난인데, 그러면 환난에, 환난에서 또 자기가 그 환난의 순서를 잘 통과해서 승리한 표시판은 뭐입니까? 참는 거라. 참았으면 승리됐고 안 참았으면 승리 안 됐어.
그 참고 나니까, 참고 그 생활 계속 하니까 또 무슨 순서가 닥쳤습니까? 밧모 섬에 귀양 갔어. 밧모 섬에 가서 밧모 섬에 귀양 가고 나니까, 귀양 가고 나니까 그에게 이전에 밧모 섬에 귀양 가기 전에 오지 안했던 것이 왔는데 그거 뭐입니까? 성령의 감동입니다. 오지 안했던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이 왔는데 성령의 감동이 오니까 자기와 상대가 되는 말입니까 상대가 안 되는 자기와 정반대되는 뒤꼭지에서 소리가 났습니까? 뒤에서 소리가 났어. 요것을 요 상징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요래 기록했습니다.
그럴 때 뒤에서 소리 나는 요 소리를 자기가 등한히 들을 게 아니라 요 소리를 자기가 아주 신중히 듣고 요 사실을 알아볼라고 돌이키는 요것이 모든 구원 승리하는 그 승리에 요것이 초점입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에게 오늘 저녁에 증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신의 감동으로든지 다른 사람에게 교훈을 듣든지 성경으로 깨닫든지 자기와 거리 먼 것. 자기와 정반대되고 거리 먼 것 그것을 잡고 알아볼라고, 그대로 하나 될라고, 알아볼라고 돌이킬 때 일이 났습니다. 자기와 거리 먼, 거리 먼 단제, 거리 먼 말씀, 거리 먼 행위, 자기와 거리 먼 행위 거기에를 거머쥐고 그대로 하려고 돌이칼 때에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앉은뱅이가 앉아 걸어가듯이 항상 거기에서 장 맞춰서 보짝보짝 그래 가지 자기와 정반대된 그런 것은 아예 행하려고 생각지도 안하고 그런 사람 되는 사람은 항상 굼벵이 모양으로 기어가지 날아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이 날아가는 것은 자기와 거리 멀어서 이거는 뭐 자기와 얼토당토 안하고, 얼토당토 안한 거리 먼 그 진리라면 하나님의 진리라면 얼토당토 안 하고 자기와 거리 먼 것이라도 거머쥐고 그대로 단행을 하려고 할 때에 그때에 우리는 쑥 커지고 큰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거 뭐 내가 잘 표현을 했는지 여러분들이 각자가 기도하는 대로 깨달아질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저녁에 그라면 열세 가지 신앙에는 순서를 말했는데 이 순서를 우리는 다 전부 피하려고 하는 순서입니다. 전부 피하려고 하는 순서. 이거는 밧모 섬에 귀양을 가야 될 터인데 말씀대로 행하면 자연히 다른 사람이 밧모 섬에 저 실어다 내버릴 터인데 이제 귀양 안 갈라고 말씀을 양보하니까 안 되고, 환난 안 받을라고 말씀 양보 하니까 안 되고, 또환난 받으면 뭐 툴툴 털어서 그만, 참고 견디지 안하고 툭 털어 내버리니까 안 되고, 외로움 안 당하려고 하고 이러니까 우리 신앙 걸음이 안 됩니다.
우리 신앙이 사도 요한이가 자꾸 하나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를 인해서 주먹덩이만한 나쁜 것이 됐으면은 그 다음에는 그 집채 무더기만한 좋은 게 나왔고, 또 집채 무더기만한 나쁜 게 왔는데 그것을 또 당하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뭐 우주와 같은 큰 축복이 자꾸 이렇게 오는 것은, 꼭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환난을 통해서 오고, 망하는 걸 통해서 흥하는 것이 오고, 또 천한 걸 통해서 존귀한 게 오는 것이지 그렇게 맞보기로 그렇게 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고 어짜든지 '내 뒤에서 오는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는 요 말씀만 여러분들이 단단히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기와 정반대되는 거, 자기 생각과 반대되고, 자기 소원과 반대되고, 자기 형편과 반대되고, 자기 처지와 반대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옳기는 옳은 것입니다. 옳기는 옳은 것인데 자기와 정반대되면은 사람들은 그것을 안 하려고 합니다. 옳은 것이면 자기와 정반대되는데 그때에 거머쥐고 뛰어야 이제 날아가는 아주 폭발되는 그런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반사 선생님들이 기억할 것, 또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지 말 것, 또 부장 선생님들이 자기에게 속한 자녀를 기르는 방법을 기억할 것, 또 남녀 구역장님들께서는 보고서를 다 내고 가시기 바랍니다. 녜. 십 분 기도 후에는 재독이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