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지자선교회 1985년 5월 11일 토새 

 

 본문 : 누가복음 1장 36절∼38절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는  노인이 됐고 수태하지 못한 대제사장의 아내인데 그가 잉태돼서 여섯 달이 됐다  하는 것을 마리아에게 말할 때에 마리아는 의심이 물러가고 믿음이  생겨졌습니다. 네가 남편 없이 아들을 낳으리라 하니까 인간 이제까지의 법칙  이제까지 세상에 나타난 모든 이 법칙, 자연법, 일반법 이 법칙으로서는 이런  일이 없는데 어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는 세상의 인간 이치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치를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치가 어디 있습니까 할 때에 인간  이치를 초월한 하나님의 이치가 있으니, 예를 들면 나이 늙었으면 평생에 한  번도 수태해 보지 못한 나이 많은 노인이 수태를 해서 육 개월이 됐으니 이것도  너희들 인간 이치에 없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다 이런 것인데.

 "대저"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대저라는 말을 잘못하면 '대개'라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대저" 라는  말은 '무릇'하는 말입니다. '무릇'하는 말은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보다'하는 말입니다. '보다.' 엘리사벳은 나이 늙어서 수태하지 못한  노인이지만 잉태돼서 벌써 여섯 달이 됐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보다  이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대저" 라는  말은 '대개'라고 해 버리면 하나님 말씀은 이루어지기는 이루어지지만 대개  이루어지지 다 이루어지는 거는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기 쉬웠는데 요 "대저"라는  말은 '대개'라는 말과 정반대입니다. "대저"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로 말하면  '무릇'하는 말이고 또 '보다' 하는 말입니다. '보다.'  그러기에, 엘리사벳이 아이 밴 그것도 인간 이치를 초월한 것이요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런 것들보다 더 하나도 빠짐이 없이 획 하나도  변동 없이 고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천사가 증거할 때에 마리아는 믿음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이루어지게 합소서' 할 때에 예수님이 그  몸 안에 오셔서 잉태됐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이 우리의 구원의 그 예약 성취인데 하나님이  창세기 3장 15절에 예약해 놓은 그 예약으로 예언 예약 예언해 놓은 예언,  예언을 해 놓은 예약이 성취된 것이 이것이 예수님의 그 잉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잉태도 이것도 인간의 모든 지식과 방편들이 다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 모든 자연 이런 것을 초월되어 그  범위 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거 위에 있는 하나님 한 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역사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난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그 예약이요 전부 다 계약입니다. 예약인데 예약하신 그대로, 창세기  3장 15절로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육천 년이 다 돼 가는 육 천년, 근 육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예약해 놓은 그 예약이 사천 년 후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 이루어진 그 하나님 역사에 속해서 우리는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은 어떤 것보다도 정확해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계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은 획 하나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타락한 우리 사이에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찾아 오실 때에  뭐로 찾아오셨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가깝게 접촉할 수 있도록 접한  하나님의 접촉이 뮈이냐? 말씀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라고 하나님을  접해라고 할 때에 양편에서 이렇게 가까워지고 가까워지고 차차 가까워져 가지고  요렇계 가까워지는 요 가까워지는 끄트머리가 뭐이냐? 가까워지는 끝이 뮈이냐?  요 가까워지는 끝인 요 말단 요 말단이 요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우리에게 접했고 그 말씀 안에는 엉감이 말씀을 가지고 접했고 영감  안에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이 영감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까이 요렇게 접했고  고 다음에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했으니 제일 가깝게 접한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갈라고 우리의 그 영이 또  활동하는데 또 성령이 우리를 붙들고 자꾸 우리를 감화시켜서 이래 가지고 자꾸  하나님께 가까이 접하게 만들 때에 뭐이냐? 우리는 제일 먼저 잡는 것이  뭐입니까? 제일 먼저,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의 접선돼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뭣을 붙드는 것입니까? 제일, 제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끄트머리인 나의 그  머리와 내가 바라는, 내가 원하고 있는 이 나의 노력의 머리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촉할라고 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선할라고 하는 이 접선과의  제일 가까운 것이 뭐이냐?  비유컨대 그 비유가 잘 안 되지만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지금 물에 빠져 가지고  있는데 그 물에 빠져 가지고 있는 것을 그 사람은 멀리 있으니까 그 사람을 건질  수 없으니 이제 어떤 그 밧줄이나 작지를 이렇게 이렇게 건내 던지니까 저  사람은 그 작지를 잡았습니다. 작지를 잡고 이제 작지를 잡고 차차 차차 끌려  나와 가지고 그 사람이 육지에 나와서 구원이 됩니다. 그러면 그물에 빠진  사람과 여기 구출할라 하는 사람과의 둘의 사이에 제일 건질라 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그 사람을 구원할라고 제일 물에 빠진 사람에게 가깝게 접선된 게  뭐입니까? 가깝게 접선된 것이 그것이 작지겠습니다. 작지를 내미니까 작지  가까이 접선됐고. 이사람은 그 자기에게 닥친 작지를 붙들고 작지를 붙들고 자꾸  이래 작지를 따라서 가까워지니까 작지 다음에는 작지를 다 거머쥐어서 이래  가지고 가까워지고 나니까 작지가 지나가니까 그 구원할라 하는 사람의 손이  대일 것이고, 손이 대이고 난 다음에 자꾸 이래 접하니까 그 사람의 몸에 대일  것이고 그 사람이 서서 있는 그 육지, 그 든든한 육지에 자기가 발을 붙이고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러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요 그 분은 살아  계시고 완전하신 분인데 우리는 모두가 허무하고 어두워지고 완전히 죽어 있는  나인데 죽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할라고 이렇게 내민 작지가 뭐이냐? 내민  작지가. 비유컨데 내민 작지가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얼 잡겠느냐? 하나님은 거리가 멀어서 잡을 수가 없는데 제일  우리가 잡을 수 있게 된 이 가까운 잡은 것이 뭐이냐 하면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  이 말씀을 잡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잡아서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내가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다 인정을 하고. 인정을 하니까 이 말씀을 붙드는  것이겠습니다. 인정을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고대로 자기가 순종을 해서  행합니다. 행하니까 자꾸, 자꾸 이래 행해서 문서로 되어 있는 이 말씀을 자기가  인정하고 행하고 요래 들어가니까 고 안에 그 사람의 손을 잡는 거와  마찬가지로, 구출할라 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거와 마찬가지로 요 말씀을  인정하고 행해 들어가니까 고 마음이 차차 깨끗해지고 맑아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모든 사리 판단이나 그런 것이 차차차 바로 되어져서 그 사람이 바로  되어집니다. 생각이 바로 되어지고 지식이 바로 되어지고 모든 것이 바로  되어지니까 점점 사람이 지식이 깨끗해지고 정신이 깨끗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지고. 깨끗해졌다 말은 병이 안 들었다 말이오 차차 그는 모든 잘못된  것이 고쳐진다 말입니다. 이라고 나니까 차차 차차 그 사람의 마음이 깨끗해져서  양심적인 사람이 자꾸 됩니다. 양심적인 사람이 자꾸 되고. 양심적인 사람이  자꾸 되고 나서고 다음에 애를 쓰니까 성신의 감화를 받은 감화된 사람이 되고,  감화된 사람으로서 자꾸 나가고 들어가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와 연결이 됩니다. 연결이 돼서 이래 가지고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돼서 거기에서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생명이요 모든 피조물은 어떤  피조물이든지 하나님의 그 법칙과 하나님의 법칙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그  능력과 접선이 될 때에 살아납니다. 아무리 제가 움직여도 하나님의 법칙에  연결이 안 되면 죽는데, 하나님의 그 진리에 연결되면 힘이 있고. 진리에  연결되고 하나님의 그 능력에 연결이 돼서 하나님이 인정하고 도우면 됩니다.

하나님이 도우면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된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치에 연결되기를 먼저 되고 하나님의 능력 밖의 이치요 이  이치 밖에 우리에게 문서로 기록한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이러기 때문에  말씀과 접선되므로 진리에 접선되고 문서 이 말씀을 읽는 데에서 우리가 말씀을  접촉함으로 말씀에 있는 진리와 접선이 되고, 이 참된 이치와 접선이 될 때에  영감과 접선이 되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라고 우리가  표시할 수 있는 성경 안에는 성신의 감화가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자꾸 말씀을 보고 읽고 요대로 실행을 하면 자기 양심이  살아납니다. 양심이 살아나고 양심이 살아나면 그 양심을 성령은 붙들 수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거리 멀어서 붙들 수 없는데 우리 양심이 살아나면  살아나는 고 양심에, 살아난 제일 거기에서 깨끗하게 양심된 고것을 겨우 성령이  붙들고 요렇게 접선 이래서, 그러면 차차 차차 그 성령과 접선이 되면 마음이 더  깨끗해져서 양심이 이래 자꾸 깨끗해지고. 그러면 그 사람이 이 타락한 마귀에  속한 이 마음이 차차 하나님의 빛을 받아서 고 마음대로 변화가 되어지고 요래서  진리와 일치된 마음이 되고 일치된 행동이 되고, 영감과 일치된 마음이 되고  영감과 일치된 행동이 되고, 요것이 자꾸 돼지면 이제 하나님과 접선돼서 연결된  모든 마음의 몸의 움직임이 되고 그리 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하나님이 나를 움직여서 나는 순전히 하나님에게만 피동되어서 살게  되는 고것을 가리켜서 참사람이요 새 사람이요,  바울이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살고 나는 그이에게 붙들려 살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마치 이런  등이 있는데 그 등 안에 불이 없으면 그 등이 새까맣지만 그믐날 밤에 등이 암만  있어도 검지만 그 안에 불이 켜지면 그 등이 환해 불덩어리가 됩니다. 환하게  불덩어리가 되나 불은 속에 있지만 등이 불덩어리가 아니고 불만 빼 버리면 등  암만 수십 개 있어도 깜깜합니다. 안에 그 불빛이 등을 통해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마치 그등과 같이 돼져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 가지고 우리를 통해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니까  전능한 그 능력이 나오고, 영생이 이래 나오고, 이래서 그 하나님이 내주하셔  가지고 우리 안에 역사하는 그 역사가 나오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보는 것이나  또 견해하는 것이나 또 소욕하는 것이나 경영하는 것어나 움직임이 전부  사람만의 움직임이 아니고 내주하신 영감이 움직이고, 영감 배경에는 하나님이  움직이셔서 이래서 하나님으로서 움직임이 되어지는 그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제일 접선하는 데에  나와 가깝게 하는 거는 내 이성, 내 이성을 가지고, 이성이라 말은 보면 들을 수  있고 또 판단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이성이라 말합니다.

이치를. 이치를 아는 고 성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고것을 가리켜서 이성이라  이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고 이성이 둔한 사람은 들어도 무슨 이치인지  모르는 사람 있고. 또 이성이 좀 장성하고 깨끗한 사람은 다 같이 들어도  깨달음이 훨씬 달라서 달리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우리 편에 있는 것은  이성이요, 이성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이 되어 있는 것은 양심이요. 그러면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하나 속에  알맹이는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읽고 듣고 생각하니까 그 생각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멀리 바라보면서 접선하니까 그  다음에 멀어지니까 이제 내게 있는 그 이성 머리로 돼 있는, 이성의 머리는  이성보다 명철하고 이성보다 정확하고 이성보다 깨끗한 고 양심이 이제 하나님  말씀을 접하게 될 때에 그때에 성신의 감화가 접선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 이렇게 연결을 가지는 데에는 제일 초보가  뭐이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편 1편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런 자는 그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기를 따라서 어떤 시기에서든지 좋은 결과를 맺게 되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안하고 청청한 것같이 그이에게 있는 참사람의 생기는 참으로 그에게  성경적이고 영감적인 그런 깨끗한 생애는 변동이 없이 뭐 아무리 죽음이 와도 그  양심이 청청하고 아무리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이렇게 맡긴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어두워지지 안하고 양심은 청청하고 고 영감으로서 살아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고. 또  성경을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들은 그 말씀을 자꾸 잊어버리지  말고 말씀을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얽으며 생각하고. 들으며  생각하고, 또 이 말씀을 자기가 연구하면서 생각하면서 자꾸 생각하고 이 말씀과  나와 접선이 끊어지지 안하면 나는 차차 맑아지고 깨끗해지기 때문에 나를  어떻게 한 모든 죄악과 악령은 자꾸 물러가게 욉니다. 물러가서 나는 자꾸  깨끗하게 됩니다.

 이래서, 성경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제일 이것이 접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할 때에 먼저 초보에서는 이성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접하고, 이성 가지고 성경 말씀을 접하면 거기에서 차차 차차 양심과 가까워져서  양심이 이제 성경 말씀을 읽고 접할 수 있고, 양심이 성경 말씀을 읽고 접할  때에는 이 성경 말씀 안에 있는 성신의 감화와 내 양심이 이렇게 접선이 되고,  이라면 이제는 성신의 감화에 내 이성이 접해 내 모든 욕심이 접해, 내 욕심이  성령의 감화에 내 욕심이 접하면 이 욕심이 깨끗해져서 변화돼 버립니다. 이  욕심이 돈 욕심 가진 자, 자기 중심 욕심을 가진 자가 이제 대주재를 근거한  욕심이 되어지고 육신의 욕심이 성령의 욕심이 됩니다. 성령의 욕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요대로 되기를 원하고 요대로 되는 것을 찬성하고 요런  욕심을 가지지만 육체의 소욕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을 떠나서 마귀적이요  인간적인 하나님과 배반되고 대립되는 그런 것만 자꾸 소원하고 욕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만일 술 먹는 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자꾸 술 먹는  욕심이라 하는 거는 몸의 욕심인데 이 욕심이 돼지는데 자꾸 성경읽고 이러니까  '내가 이 술 먹고 이라면 결과가 아주 실수가 많고 안 되니까 안 됐다.' 좀  밝아지니까 비판해서 '내가 이 술먹는 이 짓 하다가는 나중에 실수하고 그 집도  다 가정도 패가 되고 내 몸도 망신이 되겠고 인격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겠다'  이라니까 차차차 그 술을 끊게 됩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면  자꾸 그 마음이 깨끗해지고 비판이 다 너른 비판을 가지고 광대한 비판을 가지게  되고 골고루의 비판을 가지게 되고 원만하고 그 참된 비판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차차 그런 것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과거에는 무슨 욕심이든지 뭐 지위욕이나 명예욕이나 이런 것 가지고  이것만 하면 됐다 싶으지만 말씀을 자꾸 접하니까 내 마음이 밝아지니까. 그러면  권세를 얻으면 오늘 권세 얻지만 내일은 너에게 사형이 온다. 오늘은 지위를  네가 가졌지만 그로 말미암아 지위는 떠나가고 네가 지위로 인해서 사람은  교만해지고 고만 거만스러운 사람이 돼 놔서 아주 네가 지위에 있는 그런 생활을  일 년에 다르고 십 년에 다르고 달라진다. 그러나 네가 성경 말씀을 자꾸 읽으면  그 지위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 지위 생활을 일 년 함으로서 그 사람이  더욱이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십 년 생활함으로서 더 절제 있는 사람이 돼서 그  다음에는 어떤 높은 지위에 가도 그 사람이 그 지위 때문에 지위에게 붙들려서  충동돼지지 안하고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에 붙들려 충동되니까 그 사람은 그  지위가 아무리 높든지 낮든지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도 요동하거나  주관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디 있어도 실수하지 안하는 그런  사람으로 점점 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우리가 읽든지 듣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슨 어떤 직책을 주부가 밥을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어떤  자기 직장에서도 사무를 보든지 그래 안 하면 어떤 기술의 일을 하든지 일을  하는 그 일을 하나 그 속에 마음은 성경 말씀을 생각해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경 말씀을 바라보는 이성을 가지고 합니다. 이성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 하다가도 고만 성경 말씀에 위반된 일이 딱 부딪히면 그 이성이  있다가 '아, 내가 이 일은 못하겠습니다.' 자꾸 이렇게 일을 하라 하니까 해라  해라 이라니까 그 어려우니까 일을 합니다 일을 하다가서 이제 토요일날 열 두  시가 딱 닥쳤습니다. 닥치니까 그 이 서이 있다가서 '아, 이제 미안하지만 이  일은 더 못하겠습니다.' '왜?' 지금 열 두시 딱 지나면 이제 주일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못 합니다.' '아, 못하면 이 일을 낭파당하는데 이거 뒀다가  어찌되겠느냐?' '그 일 낭파되는 것보다도 내가 주일을 범하면 내 일이 더  낭파되기 때문에 더 못 합니다.' '그러면 너는 늘 믿고 일을 못하겠으니까 너는  면직을 시키고 할 수 없이 이 중한 직을. 한 달에 몇 백만 원 받는 이런 아주  기술직의 중한 취직이지만' 그 뭐 암만 그게 그래도 나는 주일을 범할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 말씀 어기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그 이성이 강해 가지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나 돈이 있고 억압이 있고 탄압이 있으니까  이라다가 이성만으로 할 때에는 거기서도 이라면 이성은 삐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직장이 떨어지면 그 모든 생활하는  여파의 모든 여건이라는 문제도 문제가 아니겠느냐?' 이라는데, 그때에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양심이 있다가서 '그것이 다냐? 아무리 그래도 이거는 하나님  법에 삐뚤어진 건데 네가 돈이냐 하나님의 진리냐 영감이냐 하는 이것을 네가  놓고 논평할 때에 하나님과 진리를 버리면 영감을 버린 것이요 하나님 버린  것인데 하나님 버리고 그거 취하는 것이니까 너는 거기에 속한 자이니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고 이것을 어려워도 이걸 버리고 하나님 취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냐'하는 것을 양심이 자꾸 말할 때에 양심이  강건한 사람은 그런 것을 판단해 가지고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요 사실을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니 우리의 이성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점점 수술을 받아서 우리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이성이 돼야 되겠고 그러면 거기에서 말씀대로의 불교인의  양심이 있고 공산주의의 양심이 있고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를 주장하다가서  공산주의를 이제 민주주의에서 잡으니까 아 내가 여기 붙들려 가면 반드시  공산주의에 반대되는 말을 하게 될 것이고 민주주의에 머리를 숙여야 될  터이니까 차라리 이것보다는 내가 이 혀가 없어지는 게 거기에서 내가 모두 이  공산주의의 공작해 놓은 이 모든 것을 폭로하지 안하고 이래 가지고 공산주의가  실수하지 안하도록 이래 해야 되겠는데는 내가 혀를 두고는 급해 놓으면 말 안  할 수 없을 터이니까 혀를 끊어야 된다 해 가지고, 제가 위천 있을 때에 그  공비를 잡으니까 그 공비가 이제는 꼼짝 못하고 잡히게 되니까 그 바위에 와  가지고 자기 턱을 요라기 때문에, 요래 해 쌓기 때문에 뭐 하는고 싶어 나중에  보니까 혀가 딱 끊겨 버렸어. 요래 가지고 탁탁 이래서 그만 혀가 끊으니까 아  다시 말을 못 해. 말을 못하게, 그거는 뭐이냐 하면 공산주의적인 양심입니다.

공산주의적인 양심인데, 이제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  물질이 제일이라. 그 유물주의 이것은 순전히 이거는 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거는 죄이기 때문에 이제는 성경 말씀을 보고 나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하든지  이거는 타파해서 이 사상은 인간 속에서 뽑아 버려야 되겠다 했는데 그 성경  말씀이 아니니까 이 공산주의적인 양심으로서 자기 혀를 끊는 사람이 있다  말이오. 그러니 불교적인 양심, 유교적인 양심, 공산주의적인 양심, 또 이런  모든 미신적인 양심, 또 이 과거에 모두 다 가정의 모두 그 전통의 습관 그런  모든 윤리적인 양심 그런 양심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  모래 위에 세운 것입니다. 모래입니다. 그것을 근거해 가지고 암만 제 생활을  깨끗하게 해 봤자 다 멸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진리의 말씀 그 안에는 진리 말씀대로 자기가 세워 나가면 그  다음에는 영감대로 세워 나가고, 그 다음에는 영감대로 세워 나가게 되면  하나님과 밀접한 하나가 돼 가지고 하나님이 동하면 제가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되기 때문에 그거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에게 이용을 당했지  다시 그 피조물들에게 침해라 하는 것 하나도 받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반석  위에 세운 집이라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발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발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치료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성장이 시작되고,  이라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달을라고 애를 쓰고 이 말씀을 자꾸 생각해서  말씀대로 내가 살라고 요거 하는 요게서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안 된 것입니다. 바빠도 성경을 읽지 책을 보고 읽지  못해도 제가 외워서라도 성경 말씀을 기억해 두고 다 본문대로 기억 못하면 한  마디라도 듣고 고 말 한 마디라도 고 말을 자꾸 생각하면서 거기에 준해서 살게  되면 우리 속에 이성이 살아나고 양심이 살아나고 인격이 살아나 가지고 점점  온전해 가는 것이고 이걸 떠나 버리면 그 사람은 그만 방탕해서 이 무서운  우리를 꼬우는 욕심, 돈 욕심 고놈도 나를 꼬우는 권세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가리켜서 성경에는 미혹의 욕심이라 그래. 미혹의 욕심이라 말은 나를 꼬우는  욕심이라. 어떤 사람은 어떤 그 명예에 꼬여서 또 돈에 꼬여서 어떤 식물에  꼬여서 뮈 가족이 제일이라 해서 가족에 제일이라는 그 유혹에 꼬여서 어떤 자는  남자에게 꼬여서 여자에게 꼬여서 어떤 자는 친구에게 꼬여서 이거 뭐 모두 다  하나님 말씀을 떠나도 해야 되겠다는 그것은 다 미혹시키는 욕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들었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읽고 듣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장  명상하면서 그 말씀과 나와 접선을 끊지 안하고 이런 일 저런 일을 해야 되지  말씀과 접선을 끊으면 모두가 다 헛일되고 마는 것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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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756 신앙생활은 사람노릇 잘하는 것/ 히브리서 10장 24절-25절/ 870116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25
2755 신앙생활은 전투준비/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850405금야 선지자 2015.11.25
»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누가복음 1장 36절-38절/ 850511토새 선지자 2015.11.25
2753 신앙생활의 목적,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 요한일서 3장 1절-8절/ 830415토새 선지자 2015.11.25
2752 신앙생활의 중요요소 네 가지/ 에베소서 4장 10절 16절/ 861202화벽 선지자 2015.11.25
2751 신앙생활의 표시판/ 갈라디아서 5장 22절-24절/ 861004토새 선지자 2015.11.25
2750 신앙성장 과정의 열세가지 순서/ 요한계시록 1장 8절-20절/ 890602금야 선지자 2015.11.25
2749 신앙양심/ 출애굽기 20장 4절-6절/ 850628금새 선지자 2015.11.25
2748 신앙양심/ 요한일서 2장 24절-29절/ 860726토새 선지자 2015.11.25
2747 신앙양심/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15토새 선지자 2015.11.25
2746 신앙양심/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1985. 6. 9.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1.25
2745 신앙양심/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09주전 선지자 2015.11.25
2744 신앙양심/ 베드로전서 3장 20절-22절/ 850609주후 선지자 2015.11.25
2743 신앙양심/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12수야 선지자 2015.11.25
2742 신앙양심/ 베드로전서 3장 17절-22절/ 870702목새 선지자 2015.11.25
2741 신앙양심생활/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13목새 선지자 2015.11.25
2740 신앙양심생활-믿음 생활/ 야고보서 1장 2절-4절/ 850610월새 선지자 2015.11.27
2739 신앙양심생활에서 영감생활로/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20목새 선지자 2015.11.27
2738 신앙양심생활에서 영감생활로/ 베드로전서 3장 21절/ 850623주새 선지자 2015.11.27
2737 신앙양심으로 단속/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81016주전 선지자 201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