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3요소-실행,성경,기도

 

1983. 5. 4. 수후집회

 

본문 : 시편 1장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동안 공부하는 데에서 아브라함과 롯의 두 신앙 노선을 배웠고, 또 씨 뿌리는  비유를 배웠습니다. 이 말씀들은 어떤 한 행위를 가리킨 그 단일적인 그런  도리가 아니고 모든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전체에게 소용되는, 활용되는 도리이기  때문에 좀 복잡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잡한 것을 낱낱이 녹음한 사람은 그것을  뒤에 간추려보면 알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런지 모릅니다. 세계에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주의 또 물질이 제일이라는 유물주의 이 두 주장을 들고 나선 그 국가들이  있고, 또 인간 다수의 주장을 하는 국가들이 있어 이 세상은 둘로서 지금 거의  나누어져 있고, 기독자들은 그 사이에 여기 저기 끼여서, 무신론주의도 아니요  유물주의도 아니요, 인간의 다수주의도 아니요 하나님 한 분만을 따라가는  신앙주의로 사는 기독교가 그 틈바구니 속에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근본 창조하실 때에도 그런 것을 다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지으신 것들입니다. 오늘까지 보존도 운영도 그렇게 그 목적을 두고 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어떨 때에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직접적으로  협조하는 그런 역할을 하도록 할 때도 있고, 또 어떨 때에는 역리이면서 일치가  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정화시키는 경성시키는 그런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개인 모인 것이 가정이요, 가정 모인 것이 사회요, 사회 모인 것들 이 국가요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면 벌써  우리나라의 반은 무신론주의와 유물주의가 점령을 해서 우 리 나라의 교회  반쪽은 벌써 무신론주의 유물주의에게 삼키워져 버렸습니다. 반쪽인 이남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삼키워진 것을 살펴보면 큰 무신론주의가 새끼 무신론주의를 삼 킨 것이고  큰 유물주의가 새끼 유물주의를 삼킨 것이니까 순리대로 된 것이지 역리는  아닙니다.

 세계에 인간들은 그 다수 주장하고 좇고 있는 민주주의나 또 공산주의나  물질주의나 다 그것은 기독교가 자라는 밭이지 기독교의 사상은 아닌 것입니다.

혹 생각하기를 민주주의는 기독교 사상이라. 기독교는 민주주의에 속한 것이라  그렇게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지마는 그것은 잘못 깨달음입니다.

 과거에 이북에 대해서 그마게 된 것처럼 또 이남에 대해서도 이북과 같이  유물주의에게 삼키워진다, 무신론주의에게 삼키워진다 하는 그런 협박과 위협이  우리 남한 교회에는 많이 휩쓸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독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안심하고 담대히 있는 사람들 있는데  그 사람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디다가 뿌리 박아 가지고 그렇게 있느냐 하면 참  비참한, 미군이 주둔해 있으니까 거기다가 등을 대고 있습니다. 그거는 등을 댈  만한 것이 못됩니다.

 또 '우리나라가 점점 부강해지니까' 하는 거기다가 등을 대고 있습니다. 그것도  등을 댈 만한 일은 못 됩니다.

 왜?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적인, 징계적인 그 일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떻게 미국이 제재를 하며 또 우리나라에서 제재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데다가 등을 대고 의지해 가지고 역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무신론을 지금  주장을 하고 유물주의를 주장하는 이것으로서 점점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는  점점 세상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세월이 많이 지나갔으니까 성경에 소개 하는  하나님을 잘 알고 말도 잘 하지만 실지로 하나님을 살아 계시는, 지, 정, 의,  이목구비와 같이 이런 것을 가지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는 이분에 대해서는 실상 상대하는 일이 많이 회박하고, 또 자기가 하는 그  욕심의 행위에 분명히 이분의 그 발표한 의사에 거치지마는 의사 발표한 자기  행위에 거친 이분의 그 안면을 봄을 인해서 자기의 소행이 제재를 받고, 또  자기가 하기 싫은 그 일에 대해서 이분의 안면과 그 시선을 보아서 이분 때문에  그 행동이 제재도 되고 조절도 되고 가감도 되고, 또 자기와 자기의 그 모든  소행이 욕심이나 그런 것이 나를 보고 있는 이 하나님이 어떤 이목구비를 가진  한 일개인, 권위있는 일개인, 그 일개인 만큼도 자기와 같이 계시지마는  제재받는 일이나, 또 힘입는 일이나, 의지해서 얻는 평강의 일이나 그런 것은  못합니다.

 그리고 그저 성경이 소개해 주는 이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으로 대우하여  이분의 눈에 자기가 바슬리고 거슬리고, 이분의 그 좌우의 이 한 날선 검을,  나오는 그의 말씀이 겁이 나고, 또 그의 선포한 약속의 위로가 자기에게 든든한  위로와 평강을 주는, 실지로 주님이 우 리와 같이 계시는 이 산 주님으로, 모든  지, 정, 의를 만드신 이 주님으로 상대해서, 이분을 모시고, 이분을 알고,  이분을 대우하고, 이 분을 상관하는 이 일은 아예 까마득하게 그만 다 허물어져  버렸고 다 덮어 가리워져서, 입술로만 하나님 말하지 실상은 이 하나님이 자기  옆에 있는 든든한 한 사람만큼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를 못하고 또 자기 옆에  어떤 그 조그마한 권세를 가진 그 사람만큼도 자기 생활에 제재가 되어지지 않는  이런 헌실로 자꾸 저락해 가고 있는 것이 오늘 말세의 교회들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이 탄식이 됩니다.

 이래서 첫날도 이분 찾는 것을 말한 것이, 아브라함과 롯에 대해서 증거한 것이  이분을 찾게 하려는 그 말씀입니다. 또 씨 뿌리는 비유도 이분을 찾는 말씀이요  또 사람들이 이렇게 지금 이북에서 위협을 하고 참 심히 위기인데 6.25 때에  물론 참 안 믿는 형제들도 참사된 일이 많았습니다. 많은 우리 민족들의 생명이  너무 원통하게 끊어졌 고 우리 때문에 세계에 있는 각국의 청년들의 생명을 많이  잃은 것도 아깝습니다. 거기다가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생명을 잃은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교회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일반 사회서도 또 국가에서도 다시  한 번 더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모두 다 제대로는 만전을 기해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도록 하려고 힘대로는 여러 방편으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는 심히 위험하기 때문에 또 그리 되면 우리가 참 비참하게  되기 때문에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남한에 있는 교회도, 제가 접촉하는 교회만 그런지는 모르지마는  교회의 양떼를 맡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들이나 또 교인들이  같이 움직여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제가 느끼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하나님 좋게 하는 것보다도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비위에 맞게, 그들의 소원과 그들의 욕심에 맞는 이런 것을 자꾸  주장을 하니까 철 없는 교인들도 좋아하지, 또 교인들이 좋아서 환영을 하니까  또 목회자도 이제 보람이 있고 또 재미가 있지, 또  말씀하시기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안다.

한말로 말하면 물질이라는 이 세상은 너희에게 있어야 될 것인 줄 너희 천부께서  아신다. 이러니까 세상을 마련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네가 하늘나라를 마련하는,  하늘나라의 그 준비를 네가 하는 그 생활을 하면 세상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장 적절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씀했지마는 오늘은 점점 하늘의 복음은 자꾸  그쳐지고 땅의 복음으로 점점 저화돼가고 있습니다.

이래서, 교인들도 이 세상 복을 말하면 귀가 버쩍 버쩍 열리고 뜨이고 잘 알아  들려지고 또 동감하니까 좋고, 이 세상을 하늘나라 준비를 위해서 순전히  이용하는 이 세상이라는 정상적인 주장을 이렇게 할 때에는 사람들이 듣기를  거북하게 여기고 또 구미에 맞지 않게 여기고 또 귀넘어 듣기 때문에 잠이나  오고 또 짜증이나 오고 그렇게 되어가는 지금 세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번 집회에서는 첫째는 하나님 찾아야 되고, 둘째로는  하늘나라를 자기의 영주처인 것을 알고 그 나라의 준비를 하는, 이사 준비를  하는 우리가 꼭 되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이 시편 l편의 말씀은, 왜 이 말씀을 택했는고 하니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저 시장에 가면 팔팔하게, 뭐 시간이 지나가도 똑똑하게 그렇게  까랑까랑하게 팔팔하지마는 교회 오면 그만 시들시 들합니다. 또 처음에 믿을  때에는 좀 신앙이 좀 생생한것 같지마는 얼마동안 신앙 생활을 해서 뭐 전도사,  장로, 목사 되면 그만 시들어서 마치 그저 물마른 채소 모양으로 그렇게  시들시들해 가지고 힘을 얻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교회에서 세상을 말하면 힘이 나오고 천국을 말하면 힘이 줄어지니  어떻게 천국을 이루는 그 모든 애로와 굴곡을 극복하고 이 천국 건설을 이루어  나가겠느냐 하는 그점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성경에는 말하기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 좇아서 과실 맺는다' 그 말은, 시절을 좇아서 과실 맺는다 그  말은 감옥이 와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고, 가난이 와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고, 또  병이 들어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고, 또 부자가 되어도 구원의 성과가 이루고,  장사가 잘 되어도 못 되어도 모두 거기에서 다 이룰 구원을 이루어서 천국이  건설되어 나가고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이 점점 되어져 가는데 왜 이렇게 성경과  달리 우리 기독자들은 이렇게 시들시들하게 힘이 없는가, 청청하지 못한가?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그것을 아무래도 세번째 시간에는 치료를 해야 되겠다  해서 이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 생활하는 것도 비유컨데 '계란이 있고 닭이 있고 병아리가 있고  이러면 어디서부터 시작됐느냐?' 물으면 '자, 병아리에서 시작됐다' '그러면  병아리는 어디서 나왔노?' 또 '닭에서 시작됐다' '그러면 닭은 어디서 나왔노?'  뱅뱅 돌아가니까 시작이 어디인 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순환으로 돌아가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그런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크게 말하면 신앙 행위가 하나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성경 생활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묵상하는 기도 생할이 있고 이 세 가지가  뱅뱅 돌아갑니다. 세 가지가 뱅뱅 돌아가는데, 어떤 사람은 행위에서 지금  중단을 당하고, 행위에서 중단을 당해서 힘을 잃고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성경 읽는 데에서 중단을 당해서 힘을 잃고 있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기도에서 중단을 당해서 힘을 잃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각자들이 다 다르니까 자기는 어디서 지금 자기의 힘있는  신앙 생활이 힘있게 나가지 묫하고 신앙 생활이 힘없이 중단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본인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러기에 첫째 행위에서 중단이 되어서 그만 행위를, 행위를 하지 안해서  행위를 하면 행위에서 지나갈 것인데 행위를 실행을 하지 아니함으로서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이 힘이 떨어지고 중단된 사람은 이 실행에서 시작을 해야 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실행은 죽자껏 열심히 하는데 그 사람이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을 상고하지 아니하는 고로 그 사람의 신앙의 힘이 떨어지고 중단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성경도 열심히 보고 행동도 실행도 열심히  하지마는 그 사람이 묵상하는 그 기도하는, 묵상하는 기도가 없어서 거기에다  중단을 당해 가지고 힘을 잃고 신앙 생활이 중단된 사람도 있고 이 세 가지  어디엔가 우리가 멈추고 있는 곳이 있다 하는 것을 각자가 발견을 해야 될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이 멈추어 있고 자기의 신앙의 힘이 떨어지게 된 그 자리를, 어디서  잃어버린 고걸 찾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제가 일어서야 되지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아니하고 엉뚱한 자리에 가 가지고 암만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은 대개 보면 부패성이라 하는 그 부패성은 자기 위주 자기  주장, 자기 중심 자율 그런 것이 다 인간의 부패성의 그 원죄인 것입니다. 그런  게 있기 때문에 마귀는 고걸 잘 알아서 원죄를 이용해 가지고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힘을 빼어서 신앙을 중단시키는 그런 일을 합니다.

 아주 마귀는 능숙합니다. 그 능숙한 마귀를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은 능숙한  마귀를 능히 능가하고 능히 이기고 그 마귀를 잘 이용해서 필요있는 종으로 잡아  부릴 수 있는, 그렇게 할 능력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둬 둡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이 악령이 제 마음대로 주장을 했지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는 악령이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는 왕노릇을 못 합니다. 선택 받아서 중생된 자들에게는 왕노릇을 못  합니다. 또 중생된 자들의 세상은 악령이 임금이 아닙니다. 저의 세상이  아닙니다. 중생된 자의 세상이요 중생된 자의 세상의 왕은 주님이 세상 왕이지  마귀는 왕권을 빼앗겼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대속하신 이후부터는 택한 자 중생된 자에게 한해서는 세상을  빼앗겼고, 택한 자들에게 대해서는 악령은 예수님의 부리는 신으로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있지 제가 왕권을 가지고 독단적으로 그렇게는 못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사탄이 전 인류에게 전 세상에게 왕노릇했지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일 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사탄을 이겨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에게 대한 것은 완전히 예수님이 복구해서 회복했기 때문에  사탄은 거기에서 빼앗기고 예수님에게 점령을 당해서, 지금도 불택자, 미중생자  그런 자들은 아직도 마귀가 왕노릇하고 그런 자들의 세상은 아직도 마귀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 세상은 껍데기 세상이요, 주님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 죄에서 구출했고, 불의에서 구출했고, 하나님과 대립된  데에서 구출해 놓은 이 세상은, 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새로와지고 참 청청한 새롭게 된 세계인데, 이 세계를 악령이 저거 세상으로  보자기를 떡 두터 씌워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점령해 놓은 이 새하늘과  새땅의 이 세계를 보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우리를 위협을 합니다.

 그럴 때에, 이번에 씨 뿌린 비유에서 그걸 많이 말씀했는데, 그럴 때에 이  보자기만 휘뜩 벗어 버리면 이제 새하늘과 새땅의 새세계가 발견이 됩니다.

그러면 마귀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우리의 수종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천국 복음을, 우리에게 말씀을 말하는 것은 그런 모든 껍데기를 벗고  마치 구름 속에 싸여 있던 달이 이제 구름이 벗겨지면 참 아주 명랑하고 상쾌한  그 달이 웃는 얼굴같이 나오고, 또 구름이 벗겨지면 햇빛이 광명하게 쬐어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새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한  것인데, 이 복음대로 살려고 하면 그것들이 지금 저거가 이제는 보자기가 다  철거 되어가야 되겠고 빼앗기게 되기 때문에 그들이 발동을 하는 것이지 속에는  요동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사는데, 여기 시편 l편에 말씀하신 것은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같이 항상 청청하고, 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 쫓아서 과실을  맺는 것처럼 감옥에 가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고 또 사형장에 가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고 욕을 티배기로 받아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고, 또 세상 뭐 비참하고  가련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환경과 주위 그런 모든 자기의 가정이 돼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고 사회가 되어도 구원 성과를 이루고, 공산주의의 그  정권하에 가도 구원의 성과를 이루어 아무데서나 구원 성과는 조금도 지체없고  손색없이 이루어가는 그것을 가리켜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서  과실을 맺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전해진 이 복음은 근본 하나님께서 우주와 영계,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실 때에도 우리의 구원 곧 하나님의 유일하신 목적을  위해서 이런 것을 지어서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 창조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인 우리 구원 곧 교회를 위해서 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지금 현재 활용도  하나님의 사람, 개인이나 단체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신앙으로 사는  자에게는 온 세상 무슨 뭐 무슨 주의, 군주정치든지 공화정치든지 민주정치든지  제국정치든지 할것 없이 무엇이든지 그 모든 것, 크고 작은 것은 다 이 복음으로  사는 신앙의 사람들에게 이용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고, 심지어 무생물  만물까지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유인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뚝뚝 신앙으로 자유 생활하는 그것을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그러면 거기 속한 것이 다 살아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만물도 탄식하면서  그러하고 또 모든 세상에 사상들도 다 그런 것인데 우리가 힘을 잃어 버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우리는 언제나 청청할 수 있는 신앙이다. 어디서든지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신앙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힘을 잃어 버린 것은 이 세 가지가  뺑뺑 돌아가는데 어디 지금 중단이 되어 있는 가 중단이 되어 가지고 있다. 어디  중단이 됐는고 중단이 되어 있다. 그러면 자기가 중단되어 있는 그것을 찾는  것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중단되어 있는 그것은 자기와 먼 것을 찾으면 대개는 맞습니다. 실행 안  하는 사람은 실행을 찾으면 거기에서 중단되어 있고,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 상고를 시작하면 중단되어 있기를 거기에서 중단돼 가지고  있고, 또 묵상 명상 기도 이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서 중단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가 열심을 기울이고 자기가 힘써 하고 있는, 제  것만 좋다 하는 그 원죄에게 속해 가지고 미혹받지 말고 일단 그것을 내놓고  제가 좀 하지 않는 거기에 가 가지고 더듬어 찾아 보면 자기 힘이 거기에서 지금  새어 가지고, 거기에서 공기가 새서 이 힘있는 폭탄이 폭탄으로 터지지 못하고  피이 하면서 이제 자빠져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거기에서 그 구멍을 떼우면  됩니다.

 고것 이제 다섯 가지 이 시간에 배웠습니다. 믿는 사람은, 좀 우리 여기에,  아따 그 무슨 산인고? 무척산. 또 전도관 거기에 있는 사람 들 여기 좀  초청해서, 초대해다가, 왜? 뭐든지 장점 우리가 받아야지 돼요. 거기 사람들은  하면 모두 다 사람들이 말이지요, 찬송하는데 어깨가 우쭐 우쭐하이 이래 하는데  그것좀 해 가지고 그래 깨 가지고 좀 이 말씀을 받으면 좋을 것인데, 또 그것도  보면 그렇게 하면 기운이 나 가지고 막 이래 가지고 뚝닥 뚝닥 이래 쌓다가  말씀만 시작하면 그만 팍 쪼그라드니 이거 어떻게 해야 좋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졸면 안 돼요. 졸면 모릅니다. 네.

 그러면, 처음에 성경이 기록한 대로 "악한 자의 꾀를 좇지 말며 죄 인의 길에  서지 말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하는 이 성구를 보고 자기가  이제는 악한 자의 그 꾀를 좇지 아니해야 되겠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해야  되겠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해야 되겠다 아무리 애써 봐야  헛일입니다. 그거 애쓰는 사람 헛일이오.

 '아 내가 죄인의 길에 안 서겠다' 막 눈을 부릅뜨고 '내가 죄인의 길에 안  서겠다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죄인의 길이 제  눈에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제 눈에는 보이지도 않아요. 또 악인의 꾀를 내가  좇지 않으련다 해도 악인의 꾀가 자기 눈에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되는데 오만한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는  겸손하지, 자기는 열심있 고 충성 있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요  말씀대로 자기가 실행을 하려고 하면 이제 악인이 발견이 됩니다. 요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자기는 생각지 아니한 악인의 꾀가 발견이 됩니다. 악인의 꾀,  성경 말씀대로 자기가 살려고 하면 눈에 안 보이던 그 악인이 보이 고 악인의  꾀가 보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아, 이 사람이 내게 대해서는  악인이로구나. 아, 이 사람이 보니까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제 중심이로구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 말씀대로 살려고 실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사람이 자기 중심의 사람인지 뭐인지 몰랐는데, 내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자기 중심의 인간이라 하는 것을 환하게 발견이 됩니다. 또  그자가 주장하는 것은 전부 하나님은 뒤로 두고 롯의 걸음 걸으려고 자기 중심의  걸음을 걸으려고 이렇게 주장을 하고 꾀우고 있다 하는 것이 발견이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악인의 꾀를 좇지 안하려고 애를 쓰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을 하려고 애를 쓰니까 악인의 꾀 저것이 자꾸 날 그리 가자고  하는데 그리 안 가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이 돼  버리고 맙니다.

 이러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 그 말은, 이 말씀은 네가 실행 생활을 하면  네 눈에 악인의 꾀가 보일 것이고,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참 신앙 생활을 하면  악인의 꾀를 배격하는 것이 자연히 되어진 다 하는 말씀이요,  또 이 실행 생활을 하려고 하면 죄인이 보여집니다. 말씀대로 내가 살려고  하니까 사이비하게 하나님 말씀에 삐뚤어지게 666,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하나님 말씀 같은데 666이라, 비슷한 데 그게 인본주의요 유물주의요  세상주의요 자아주의요, 요렇게 해 가지고, 죄인은 어떤 게 죄인인고 하니 성경  말씀에 명중되지 아니한 그것이 죄인입니다.

 죄인은 어떤게 죄인인고 하니 죄인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하신,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명령 지켜야 이제 복을 받지 이 66권 도리를 암만 지켜야 복 받는  것 아니오. 오늘날 너희에게 말한 그 말씀을 지켜야 됩니다.

 그 말씀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하기 때문에, 네가 사람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물을 것이 아니라 네 속에 기름  부음이, 네 속에 성령님이 들어서 이 시간 네가 지킬 것을 너에게 알려주는데,  고 알려 주는 자기 궤도, 자기 노선, 자기 의무, 책임, 자기 길 고것이 자기  진리요. 성경에 많은 진리가 있지만 자기 진리 아닙니다. 자기 진리는 자기  현실에 자기가 지켜 행해야 될 고것이 자기 진리요. 고 자기 진리 고것이 의의  길을 가는 것인데, 그게 주님에게 피동되어 가는 것인데 고것 외의 것은 다  죄인의 길이라.

 이러니까 자기가 고 길을 찾아 가지고 가려고 하니까 요리 삐뚤어지고 이  사람이 와 가지고 조금 삐뚤어지게 만들고, 이래 가지고 뭐 그 수가 헬 수 없을  만큼 사이비한, 믿음의 길이 되지 못한 삐뚤어진 길, 자기의 길이 아닌 삐뚤어진  그 길을 걷게 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웃들이 많다.

 그러니까 그럴 때에 네가, 그 많은 사람이 말하고 네 스승이 말하고 네 친밀한  사람이 말해도 너에게 네가 신앙 지식을 가진 그 지식을 가지고, 네 요 입장의  현실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할 때에 너에게 알려 주는 영감의 네 길이  있으니까, 네 진리가 있으니까, 이 시간 지켜야 될 네 진리가 있으니까 고  진리를 양보하지 말아라. 거 기에서 삐뚤어지게 하는 고것이 죄입니다.

삐뚤어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이오. 거기에서 고대로 하지 말라고  삐뚤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롯도 그래 가지고 실패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진리를 가지고 자기 현실에서 '나는 요렇게 살아야 되 겠다' 하는  고것을 찾는 사람에게는 성신의 감화가 '너는 요래야 된다' 하는 고것을 자기가  깨달아서 알아지게 되는데, 고대로 살려고 하면 고대로 사는 고것을 조금만  틀어지게 조금 요래 팩 틀었다가 안 되면 조리 또 틀어지게 요 사람이 와 가지고  조금 요래 틀게 '너 그러면 너무 과격하다 요래 해라' 또 저 사람이 '요래 해라'  뭐 마귀라는 놈이 저거 군대를 시켜 가지고 이래 가지고 요리 조리 해서 자기  길을 걷지 못하도록 그렇게 삐뚤어진 길을 가르칠 때에 고때 고 길을 네가  따라서 가지 말아라. 그러면 거기에서 네가 힘 얻는다, 거기에서 힘을 찾는다.

 또 너는 하나님 중심으로, 자존자 조물주의 중심으로 이렇게 가려고 하는데  이제 자기 중심의 사람이 자기 위주의 사람이 그렇게 와 가지고 하니까 그 안면  괄시 못 해서, 다리오왕이 다니엘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게 악인의 꾀를, 악인의  꾀, 꾀라 말은 고것은, 꾀는 쓰면 참 좋습니다. 꾀는 쓰면 쉽소. 꾀.

 자기 생활하는데 고때에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면 십자가의 도라. 미련한 것  같은데 거기에서 살짝만 요래 틀면 요게 지혜롭고 수월하 고 성과가 많이 있지  않느냐 하는, 반드시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 중심 이 피조물 중심인 그자가  너한테 말할 때에는 수월한 길을 말하고, 거기에서 조금 빽 틀어져 가지고 아주  좋게 쉽게 성공하는 데 네가 미련한 길을 걸어갈 것이 뭐 있느냐' 하는 그 꾀를  가지고 네게 유혹할 때에 고 꾀를 네가 좇지 말아라. 또 죄인의 길에 네가 옮겨  서지 말고 네길을 네가 고대로 지켜 가라.

 그리하면, 요 둘을 네가 조심해서 손해보지 아니하고 걸어가면 나중에 보면  원수가 네게 있어서 네 자체가 게을하고 교만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면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도 있고, 또 그저 너무 지나치게 했다 할 만도 하고, 또  자기가 이만하면 됐다 해서 마음에 그 의에 대해서 갈급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만족히 이루지 못한, 이루지 못했으니까 갈급이 아니라 이루지  못했으니까 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야 될 터인데 이제 마땅히 할 일을 했다  하고,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했다 싶을 만큼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그게 네  속에 있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아, 주여 나는 오만한 자입니다.' 네가 요렇게 살려고 할 때에는 네가 오만한  자라 하는 것을 네가 알 것이고, 오만이 네 속에 계속해서, 그놈이 들어서 늘  넘어뜨리고 늘 이래서 그저 의의 갈급이 있도록 하지 아니하고 죽도록 행하고 난  다음에도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것을 겨우 했다. 이렇게 할 것이어늘 네가  앉아 먹으려고 이렇게 주제넘게 날뛰느냐' 하는 말씀과 같이 자기에게 오만한  자가 자기에게 있다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자기 밖에 악인의 모든 꾀가 와 가지고 자기에게 부딪히고 있고, 죄인들이  요렇게 조렇게 삐뚤어지게 하려고, 고걸 명중해서 꼭 백 프로 백 점이 되도록  걸어가지 못하게 요렇게 하려고 사이비한 것들이 와서 있는, 네 밖의 대적이  있는 것을 네가 발견할 것이고, 네 자체 안에 오만한 것 교만한 것, 만족하는 것  이렇게 자기를 그만 과대평 가해서 자기는 다 된 줄로 아는 그런 오만한 그  오만성을 악령이 일으켜 가지고 네 가는 걸음을 방해하는 것인 것을 네가 알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을 하려고 애를 써서 실행을 하면 차차 차차  실행이 점점 저 범위 넓은 데에서 자꾸 들어와 가지고 차차 차 하나님의 뜻인 네  진리, 네 길 거기로 가깝게 요리 와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명중해서 고 길로  가는 요것이 너로 말하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길이요, 고 길이 말하면  양쪽에 사자가 있는 그 사자 틈바구니 속에 요만침 자기 하나 빠져 나갈 만한 고  기독자의 길이 있는 고 길을 뚫고 나가는 것인데 고 길을 네가 들어서게 된다.

고 길을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악인이 온 것을 네가 발견해서 그걸 배격 하게 될  것이고, 또 수많은 죄인이 너에게 오는 것을 발견해서 참 내 적이 천천이요  만만이라고, 원수가 집안 식구라 하는 것을 네가 이해 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네 안에 오만케 하는, 네 속에 있는 그 부패성 이것을 악령이  충동시켜 가지고 너를 오만케 하는 그런 일을 마지막으로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네 실행에서는 이 세 가지만 싸워서 네가 이기면 너는 승리 한다. 이 세  가지만 싸워서 이기면 너는 거기에서 잃어버렸던 힘을 찾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서 잃어버렸던 힘을 찾게 되면 그러면 언제든지 그 일만 하면  되느냐? 안 됩니다. 그 일만 하면 처음에는 힘이 있지마는 가다가는 힘이  없습니다. 사람이 활동을 하면 처음에야 활동하지마는 나중에 좀 있으면 기운이  없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러니까 이제 양식을 먹어야 되겠다 그거요. 기운이 없으니까, 또 일을 안  해서 이제 참 병신같이 낙오자가 됐던 이것은 활동을 하면 거기에서 힘을 또  얻었는데 거기서 힘얻은 그 힘만 가지고 자꾸 그 일만 하고 보니까 또 힘이  없어진다 말이오.

 힘이 없어지는 그 이유는 마치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주님 말씀 듣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 바다 건너편으로 가려고 배를 타고 가니까  처음에는 참 그저 뭐 술술술 그거 배가 잘 항해가 됐는데, 가다 보니까 바람도  일고 배는 나가지 않고, 또 이러니까 저 거들은 자꾸 애를 써서 가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그만 전심전력으로 노젖고 저거들이 배를 운행하는 거기다 기울어져  버리고 주님도 주의 말씀도 잊어 버리니까 그 다음에는 조금도 전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실행 생활에서만, 실행 생활에서만 자꾸 전심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거기에서 하다가 보면, 실행하다 보면, 옆에 닥치는 것도  악인이요 닥치는 것도 죄인이요 닥치는 것도 자기 속에 오만한 자요, 자꾸 인간  접촉만 이래 자꾸 해서 그 일만 하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는 어떤 사람 되느냐  하면 그만 독선주의자 되고 자기는 교만한 자 되고 자기는 부족함이 없다는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은 그만 그런 사람이 되어서 힘이 떨어져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럴 때에 자기는 또 한 가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읽어야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 왜 힘이 나오느냐?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소개해 주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 소개하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이 관계가  성글어진 것을, 자꾸 이것을 제거 해서 관계가 차차 차차 잘못된 것이 다 수정이  돼 가지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맺어지도록 그렇게 그 일이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돼요.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지고 또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그 법규와 자기가 연결이 되어서 자기 생활이  한번 더 새롭게 심사되고 또 감찰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으로 주신 그것, 또 소망을 이 말씀이 보여 주니까 이 소망으로 인해서 또  기뻐지고, 또 이 말씀이 우리에게 거울같이 되어서 내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다고 했지마는 내가 나를 보지 못하지마는 이 성경 말씀을 보면 아 네가 요  일은 요렇게 했으면 좋을 건데 조금 삐뚤어졌다, 조금 굽어졌다, 조금 어찌됐다,  이리 해서 자기의 생활을 환하게 그 성경 말씀이 감찰해서 보여 줍니다.

 마치 요새 보니까, 시합하는 데에서도 보니까 주먹으로 서로 뚜드리고 뭐  이기고 하는 사람들 보니까, 쿵 넘어졌는데 나는 보고 저거 어째 넘어졌는고  못봤는데 나중에 보니까 새로 넘어진 것을 어디 촬영을 해가지고 그러는지  넘어진 것이 그리 쿵 안 넘어지고 이래 가지고 넘어진 그 모든 것을 형상을 해서  그렇게 테레비에 보이데요.

 이와 마찬가지로 네 과거에 그 행위를 성경 말씀이 그렇게 낱낱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 내가 그때는 나는 몰랐는데 이렇게 됐구나. 저렇게 됐구나'  자기의 과거와 현재 그 모든 것을 자기에게 바로 보여주고, 또 앞으로도 네가  이리 이리 해야 된다는 것을 그 모든 상식적으로 예비적으로 다 그렇게 보여주고  이제 하나님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나에게 새로운 힘이 소생이 되어지고,  또 하나님의 이 법칙과 나에게 연결이 되어서 법칙으로서 내게 있는 모든 다른  것이 시정이 되어서 그만 잘못된 것은 '주여 잘못되었습니다. 이거 사해  주옵소서.' 잘못된 게 있으면 그게 들어서 고삐 이 그게 날 들어 잡아 붙들어 맨  밧줄이 되는데, 성경말씀을 봄으로써 그 밧줄을 다 끊어 버려서 내 거리낀 것을  다 끊어 버리고 이 법규로 가지고 나를 생생하게 새롭게 하니까 내가 또 힘이  나지지.

 또 이 말씀이 주님이 우리에게 위로로서 '너는 이렇게 하면 이리 된다. 저리  하면 저리 된다' 하는 그 소망을 우리에게 주니까 그 소망을 보니 또 살아나겠다  그 말이오. 이 성경 말씀에서, 소망으로 인해서 힘을 얻고, 법규로 인해서 힘을  얻고, 하나님 당신으로 인해서 힘을 얻고, 또 모든 잘못된 것을 수정하는 그  치료와 같은 것을 가지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자기의 과거에 신앙 생활하는 것이 그것이 너무했다 싶어서  오만이 나오지 아니하고, '아 이제는 다시는 이래야 되겠다.' 또 성경 보기  전에는 '내가 너무 지나치게 했어. 자꾸 그래 예수 믿기 때문에 아들도 안  믿으려 하고, 그래 믿기 때문에 딸도 안 믿으려 하고, 그래 믿기 때문에  교인들도 싫어하고 너무 지나치게 믿었다고 잘 믿었다고, 너무 지나치게 잘  믿었어.' 이랬는데 아 성경을 보니까 아니라 말이오. 아직까지 미달 미달,  미달이 얼마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니까 또 새로운 힘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또 하나님의 법규로 자기를 다 수정을 해서 굽은 것을 다  고쳐 버리니까, 이거 기계도 잘못된 걸 그런 걸 손을 봐 가지고 딱 정리하고  정비를 딱 정비해 놓으면 힘이 있어서 뭐 차도 와르르 가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자기의 과거를 정비를 정돈을 하고 또 미래에 대해서 지금  정비를 하고 이러니까 자기에게 힘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거요.

 또 이 말씀이 이제 이러면 이렇다는 그 소망을 주니까 이 소망을 인해서, 그  소망이 자기의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했는데, 지난 밤에는 어떻게 해서  잘못됐으니까 이제 다시 잡아야 되겠다 하는 그 소망으로 인해서 힘 얻는 것,  또 자기 정돈 정비 이로 인해서 힘 얻는 것. 또 모든 위험성 탈선성 그런 것을  다 위험을 방비해서 힘 얻는 것. 직접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하나님에게서 주시는  힘을 얻는 것. 그리고 나니까 이 말씀이 하나의 법칙이요 하나의 제도요 하나의  교훈이요 하나의 예언이요, 그것만 된 줄 알았는데, 아 그거 아니고 이 말씀은  그 말씀 안에 전능의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말씀 안에서 전지  전능의 하나님이 그 말씀 안에서, 나는 말씀 받았는데 그 말씀을 받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그 안에서 역사를 해 가지고 나로 하여금 내 마음을 밝게도  하고 또 내 마음에 힘도 주고 지혜도 주고 이래 가지고 그 말씀 자체가 또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그래서, 자기가 실행을 하는 데에서 이 세 가지를 방비하는 전투를 해가면서 그  실행 생활을 하면서 그것만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나중에 인간화 돼 버리고  맙니다. 인간화 돼 버리고 말아요. 인간화돼 버리고 말고 교만해서 아무짝도  쓰지 못하는 게 돼 버리고 말고, 하나님은 다 손뗐는데 저 혼자 지금 날뛰니까,  과거에 하나님이 같이 할 때에 하던 그 행동 그것이 지나가는 속력을 인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얼마 안 가서 뭐 그까짓 거 힘 다 없어 가지고 하나의  배후밖에 안 되고 만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부흥사들이 자기가 말씀을 전하는 여기서 실행의 노력을 하고  고것만 힘을 쓰다 보면 벌써 힘이 빠지고 없어졌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부흥사들이 과거에 한창 은혜 있을 때에 하던 것, 그때 뛰니까 은혜 있다  하더라. 그때 주먹으로 책상을 때리니까 은혜 있다 하더라. 그때 고함을  지르니까 은혜 있다 하더라. 이제 그때 노름을 재연습해서 하면 그것은 하나의  배우가 연극하는 것과 꼭 같은 그런 것으로서 성령의 역사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 가지를 싸워야 됩니다. 세 가지를 싸우면 거기에서, 잃어버린 힘은  거기에서 얻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상고해서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고, 성경이 소개하는 분을 내가 영접하고, 또 성경이  나에게 주는 소망을 가지고, 또 성경 이 나에게 주는 그 전법을 가지고, 성경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모든 대적들이 천태만상으로 그 전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대적들이 하나 둘 다 알고 보니까 이 싸움이 능하게 된다 말이오. 아 조놈은  저기 들었구나. 조놈은 조 속에 들었구나. 이제 그것을 미리 예상하게 되 다  보니까 자기의 신앙 걸음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 묵상은 무엇이 묵상인 고 하니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게서 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말씀에서 소개받은 이 모든 것을  실제로 자기가 접촉해 보는 것이 그것이 묵상입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이  하나님을 자기가 직접으로 접촉합니다. 직접으로 하나님을 자기가 대면해 보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는 것, 하나님을 자기가 사모해 보고, 또 연구해 보고,  또 그분이 접촉하는 고런 방편을 통해서 접촉도 해보고, 교제도 해 보고, 말도  건네 보고, 또 서로 한 번 친절도 베풀어 보고, 또 한 번 간청도 해 보고 또  모든 사정을 이렇고 이렇습니다. 하면서 의논도 해 보고 이러니까 이제  하나님과의, 성경에 소개한 그 하나님을 실지로 자기가 상대해서 신인 교제를  가지게 되는 고것이 뭐이냐? 묵상이요 기도입니다.

 이제 그리고 난 다음에는 성경이 가르쳐 준대로 이 성경에 가르쳐 준대로 내가  모든 것을 실지를 대해 봅시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인간을 대해서, 인간을  대해서 성경이 소개해 주는 대로 사람을 대해 봅니다. 생각해 보면서 과연  성경이 사람은 이렇고 이렇고 이렇 다고,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다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해서 성경을 자기가 눈 감고, 눈 감고  묵상으로 성경이 말하는 그 사람이라면 그 인류를 접촉을 해 보고, 또 성경이  말한 이 세상에 악령도 접해보고, 또 세상에 많은 사건들도 전해보고, 성경이 한  문서를 가지고, 성경이 말씀을 가지고 나에게 가르친 그것을 실상으로 내가  가지고 낱낱이 가 가지고 접견하는, 실지로 접견하는 이 일을 하는 것이 그것이  묵상입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하니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어떻게 내가 해야 될 것 어떻게  받아야 될 것 그분에게 기쁘게 하는 데에는 어떻게 순종해야 될 것 그분과의  관계가 그만 능숙하게 됩니다. 또 인류와의 관계도 네가 사람에게 대해서 요  면을 조심해라, 요 면을 주의해라, 이런 사람에게 네가 미혹을 받지 말아라,  이런 사람의 협박에 눌리지 말아라, 이런 사람에게 유혹받지 말아라.

 뭐 여러 가지를 사람에게 대해서 이 성경이 소개해 주는데 그 소개를 받아  가지고 자기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니까 '과연 그저 선생님 말이 옳습니다.

참 주의 말씀은 옳습니다.' 사람을 자기가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마는 명상을 해  가지고 사람을 죽 지내 보면, 사귀어 온 사람을 다 보고 현재에 관련 가진  사람을 만나 보고 다 이렇게 해 보니까 전부 성경이 가르친 것은 옳았는데,  그렇게 했으면 그 사람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을 건데 그만 성경 말씀이 시킨  대로 안 하고 내 속에 있는 내 주관대로, 내 자율대로, 내 감정대로, 내 욕심  대로 이리 해서 전부 낭파 다 만들어 놨다 말이오. 낭파를 다 만들어 놨어요. 뭐  절단을, 다 만들어 놨어요.

 이러니까 혼자 그러다가 또 너무 원통해서 울기도 하고 '주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자복도 하고 '그때는 그랬으면 되는 건데, 아, 주님 그때 날 좀  붙들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만 어찌 그리 됐습니까?' '내가 붙들어 주지  않기는 뭘 안 해? 그때 내가 이렇게 이렇게 너에게 알려 주고 감동시켜 너에게  깨닫게 해 주지 않더냐? 내가 그렇게 알려 주지, 내가 주먹으로 알려 주면 너  대번 죽을 것이고 내 가 감동으로 알려 주지 뭐 다른 걸로 어떻게 알려 줄 수가  있나?' 인제 주님하고도 이래서 사귀어 보고, 또 사람에게 대해서도 이런 인물  저런 인물 그 모든 것을 접해 보고, 만물에게 대해서 접해 보고,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의 맺어지는 그 결과는 때를 따라 시절 따라 열매 맺는 것,  그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래 열매를 맺는다는 걸 그걸 봐 가면 그것은 우리가 앞에 있는 세  가지 생활, 실행 생활, 또 성경을 읽는 생활, 성경에게 소개받고 가르침 받은  그것을 실질적으로 실험을 해 봐요. 실험을 한 다 그말이오. 실험. 묵상은  실험입니다. 묵상은 실험이고, 이제 묵상하고 난 다음에, 실험을 해 봤기  때문에, 내 실험을 했으니까 그 다음에는 현장에 나가 가지고 큰 공사도 척척  맡아 가지고 그대로 해 나갈 수가 있다 그거요.

 이 세 가지를 자기가 힘써 바로 하면 맺어지는 열매는 두 가지.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 그 결과, 또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청청한 그 결과. 다시  말하면 그 행사가 형통한 것을 이 두 가지로 말했는데 그 결과가 맺어지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 결과를 맺으려고 애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결과를 맺으려고  애쓰다 보면 가짜 돼 버립니다. 그 결과를 맺으려고만 애를 쓰지 말고, 이제 이  세 가지 나무만 숭상을 하면, 나무만 숭상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습니다. 열매는  저절로 맺소.

 인제 숭상하면서 '열매가 맺나 안 맺나 보자. 열매가 맺나 안 맺나 보자'  열매가 안 맺으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실행이 잘못 됐든지 성경 연구가  잘못 됐든지 자기의 묵상에 속한 일이 잘못 됐든지 무엇인가 셋 중에 잘못됐기  때문에 이게 열매를 안 맺으니까 열매 맺는 그거는 보면 돼요. 그 열매가 잘  맺으면 '이제 됐다. 이러니까 이대로만 하자.' 열매가 안 맺으면 뭐인가  잘못됐다는 증거입니다.

 목장하는 사람이 소가 젖이 안 나오면 젖 안 나오는 것은 소에게 무슨 사고  있다는 그 증거로 알고 젖이 안 나오면 '소에 무슨 병 낫는가?' 이거 모양으로  그런 열매가 맺지 않으면, 자기가 현실을 닥쳤는데 그 현실을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가지 않습니까? 그 현실이 지나 가고 보니까 아, 그 현실에서는 내가 성과를  거두었나? 천국 수입을 봤나? 과연 주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을 이루었나?  이루었다 하면 됐습니다. 그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면 내게 뭐인가 고장이  났으니까 그 병을 찾아 가지고 이제 심사를 해서 치료를 해야 되겠다 그거요.

 자기가 그렇게 열매맺는 것을 봐서 알 수가 있고, 또 자기가 어쩐지 청청하지  아니하고 힘이 좀 시들어져요. 그 신앙의 힘이, 기도의 힘이든지 성경 보는  힘이든지 실행하는 힘이든지 이 세 가지 힘이 자기에게 좀 빈약해지면 이거  고장났구나! 그게 뭐이냐 하면 잎사귀 가 마르지 아니하고 청청한 것과 같이  그렇게 청청하지 아니한 것이니까 어딘가 또 고장이 났다 그거요.

 고장이 났으면 또 더듬어 봐요. 또 더듬어 보는데 세 가지를 더듬어 봐요. 세  가지를 더듬어 보면 그 원수 안에 있는 원수 밖에 있는 원수 이 셋 원수를 내가  용납을 했다든지, 그 독약을 먹이는데 내가 그 독약을 마셨다든지, 그에게  유혹을 받았든지 받은 이유가 있으니까 있으면 고것만 치료해 버리면 대번 돼  버려요. 고것만 치료하면 되고,   또 그런 일은 없는데, 아, 그런 일은 없으면 보자 내가 성경 읽는 데 대해서  살펴 보면 성경이 과연 나에게 대해서 하나님 소개, 하나님 법칙 소개, 또  나에게 주신 약속한 소망 소개, 또 내 과거에 생활을 환하게 보여 주는 거울  역사를, 거울로 보여 주는 거울 소개, 이제 이런 것 중에 무엇인가 빠진 게 있다  그말이오. 무엇인가 빠진 게 있어서 거기에서 그만 내가 힘을 잃어 버렸습니다.

잃어 버렸으니까 빠진 그것만 도로 찾아 가지고 '아! 나는 과거에 왜 그런가,'  설교를 하다가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않으니까 이거는 왜 이런가? 이렇게 해서  자기가, 어디서 헛김이 나와 가지고 설교에 은혜가 되지 않는가? 교인들이 이제,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아니하고 그렇게 되는가? 하는 그 고장난 고것만 찾아  가지고 고것만 딱 수리해서, 바람 나가는 것 거기만 떼워서, 딱 떼워 버리면  안에 있는 그 화약이 폭발해서 이제 힘있는 폭탄이 될 수가 있다 말이오.

 그러나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나 가지고 김이 새면 그만 그 폭탄은 헛일이  됩니다. '피이' 하면 그만 헛일이 돼요. 그만 김이 안 나가야 확 터지고 힘이  나오지.

 그렇게 성경에서 살피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좀 심령이 피곤하든지  게을해서 하나님이 소개한 이 말씀을 가지고 그 실험을 하지 않았소. 이 말씀  가지고 직접 하나님 교제를 안 해 봤다든지, 이 말씀 가지고 과거 사람 접촉한  그 사람을 이 말씀 가지고 재검토를 하지 아니해 봤다든지, 또 자기가 이제  접촉하는 현재의 사람에게 대해서 지금 이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 말씀 가르치는 것을 등한히 하고 거기 대해서 대비가 없다든지, 또 자기가  무슨 사물에 대해서 조그만한 것, 조그만한데 걸려 가지고 이제 큰 것이 절 단이  납니다.

 대구에 있던, 그때 OOO목사님이 집회를 할 때에 그때 그말 하는 걸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과밭의 사과나무를 끊어 내버리는 것은 뭐이 끊어 내  버립니까? 거두입니까 커다란 톱, 거두입니까 소스락 벌거지입니까?' 이러는데  모두 '거두입니다.' 이랬는데 '아니오. 소스락 벌거지요' 하는 그 말을 내가  그때 명심하고 들었습니다. 소스락 벌거지 이 조그만한 사소한 그 거리낌,  사소한 거리낌 그것이 들어서 그만 신앙 전체를 넘어지게 만든다 그거요.

 이제 죄도 한덩어리요 의도 한덩어리입니다. 한 죄를 범하면 고 죄가 꼬리를  물고 죄에 쭉 연결돼 가지고 고 한 죄에 접선이 되어서 범죄하게 되면 그 죄로  인해서 수많은 죄가 뒤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아주 참  바늘끝 같은 죄가 뒤에 가서 태산 같은 그런 죄로 이렇게 자꾸 연장돼 나가는  것이고, 의도 그렇습니다. 의도 지극히 작은 의, 고것을 행했는데 거기에서 그  의를 버리지만 않 으면 그 의가 차차차차 크고 크고 해서 지극히 큰 의에  도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지극히 큰 데에도 불  의한다 또 지극히 작은데 충성하는 자는 지극히 큰 데에도 충성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 묵상, 고 실험에서 자기가 힘을 잃었는가 그것을 찾아 보고, 그러면  이 실행에 세 가지. 또 말씀을 보는 데에는 그 소개 받는 것 법규, 또 소망,  우리에게 이렇다 저렇다 모두 다 알려 주는 것, 또 자기가 새김질하는 묵상하는  것, 기도하는 것. 모든 말씀이 말씀한 대로 실지로 실험적으로 자기가 지금  하나씩 가 가지고 실지로 한 번 대조를 해 보는 것, 여기에서 잘못됨이 없이  그것이 자기에게서 이루어져 나가면 잘됐는가 못됐는가 하는 그것을 표시하는 그  표시는 뭘로 나오느냐 하면 시절을 좋아 과실을 맺는 걸로 나오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고 청청한 그것으로서 나타난다 말이오. 그걸 보면 알아요.

 그런고로 그것은 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그것을 봐서 심사를 하라 그거요.

그러면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그 행사가 형통하다 하는 그  형통은 무엇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고 하니 그러면 자기 갈 길을 자기가 잘  가게 된다. 자기 진리를 자기가 잘 지키게 된다. 자기가 갈 자기 궤도를 잘  달리게 된다. 자기 구원을 잘 이루게 된다.

 이러니까 하나님에게 대한 것도 형통, 또 진리에 대함도 형통 사람에 대함도  형통, 모든 사물에 대함도 형통, 형통이라 하는 것은 아무 막히지 아니하고 바로  되는 것을 형통이라고 한 것인데, 이것이 자기가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나 사람에 대해서나 모든 사물에 대해서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걸음을 걸어가려 할 때에 하나에게도 제재를 받거나 하나에게도 강제를 당하거나  하나에게도 거절을 당하거나 하나에게도 거기에서 막힘을 받아서 그 일을  성공하지 못한 것이 없이 다 성공된다 하는 걸 말합니다.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한다' 그 말은 자기 길 걸어가는 그게 형통하다 그  말이지, 도둑질하는 일이 형통하다 그 말 아니오. 잘못하면 노름하는 사람이  그리 하면 노름이 형통이 될 줄 알고, 그 모든 불의하는 그 불의가 형통해질  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자기 길이 형통 하다 그 말이오. 그 말은 성령이  자기를 인도하는 자기 진리, 자기만 이 자기가 깨달을 수 있는, 누구든지 자기  진리는 자기만이 깨닫고, 성경은 가르침을 배우지마는 자기에게 대한 것은,  자기가 이 시간 지 켜야 될 그 도수나 정도나 종류나 그것은 성령이 자기에게  가르쳐 주는 고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고, 성령이 가르쳐 준 고기에서만 자기는  할 수가 있지 다른 것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고 길을 못 찾는 것 없이 딱  딱 찾고, 찾은 그 걸음을 하나도 삐뚤어지저나 지체됨이 없이 착착 다 갈 수  있다는 것이니 결론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바의 크 상을 다  받는다 그말이오.

 바울이 말하기를 빌립보에, '이제 주께서 손에 들고 계시는, 내게 줄려고 손에  들고 계시는 그 상을 받기까지 나는 달음질하겠다' 이랬습니다. 받기까지  달음질하겠다, 자기로서의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정 해 주신 자기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서 달음질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완성이 이루어지는 걸  가리켜서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인은 어떤 게 악인인고 하니, 예수 믿는  사람이든지 안 믿는 사람이든지 악인이 어떤 게 악인입니까? 악인이 어떤 게  악인이지요? 자기 중심, 자기 위주자 그자는 악인입니다. 자기 중심자, 자기  위주자는 악인인데 악인이 되면 누가 와요? 악인이 되면 누가 옵니까? 악령  옵니다. 악령이 오면 그 사람의 모든 마음과 그 몸의 행위가 바로 됩니까?  꺼꾸로 됩니까? 전부 꺼꾸로 돼요. 이러니까 대개 보면 잘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잘난 사람들이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말이오.

자기 중심 그것은 자기 자멸되는 것이오. 자기 중심은 망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자기 중심이지 하나님 외에는 자기 중심할 자가 하나도  없어요.

 이러니까 하나님 당신 중심하는데 나는 거기에 소속해서 그분의 중심을 따라서  내가 움직이고 가야 되어지는 것인데 이게 자존자처럼 하기 때문에 망한다  그거요. 잘난 사람이 대개 보면 실패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체로 말하면 문벌 좋은 사람이 많지 아니하고 학벌 좋은  사람이 많지 아니하고 잘난 사람이 많지 아니하고 이제 아주 훌륭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많지 아니합니다. 그 사람 모두 잘났거든. 왜, 그 사람이 왜  실패했습니까? 잘난 사람이 실패하기를 왜 실패했지요? 저 뒤에 잘난 사람 왜  실패했습니까? 잘난 목사들, 잘난 장로들, 잘난 전도사들, 잘난 권사들, 잘난  전도부인들, 잘난 집사들 모두 잘난 사람은 예수 안에서는 절단이오. 그 잘난 그  사람이 자기 중심을 버리고 잘난 그 모든 선천 후천의 훌륭한 그 실력을  하나님에게 딱 붙어서 중심만, 유일 중심인데, 중심은 하나 뿐인데 유일 중심인  하나님의 중심에게 선천 후천의 실력 이 딱 붙기만 붙어 놓으면 그게  굉장합니다. 이런데 사람은 자기를 양보하기 싫거든. 이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성공했지 자기 비우지 아니하면 성공 못 합니다.

 그런고로,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왜 겨와  같습니까? 왜 겨와 같지요? 왜 겨와 같습니까? 매인 데가 없어. 매인 데가 없어.

뿌리 박은 데가 없어, 심기워진 데가 없어. 소속이 없어. 어제 소속이 없다 하는  말을 암만 해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그렇게 여러분들이 느끼는 일을 내가 못  봐요. 소속이 무섭습니다. 소속이 무섭소. 자기가 소속한 그것이 깨지면 자기는  깨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속할 그 소속 주체는 세상에는 천도 만도 넘소. 모두  내게 속해라, 내게 속해라, 내가 힘있다 막 자랑을 하고 이렇게 떠들고 광고를  하고 야단을 지깁니다. 이러니까 '아따 힘 있는가보다' 해 가지고 소속을 했는데  그게 그만 툭 넘어지거든. 그러면 죽어 넘어지지. 정권도 몇 해 지나면 그만  넘어져 버리지. 아 그게 그만 이리 저리 그만 정신 환장돼 가지고 넘어지지.

이러니까 이제 자기가 소속한 그것이 비참해지면 소속한 자기도 비참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속을 단단히 알아야 되는데 악인은 어디 소속해 있습니까?  악인은 어디 소속했지요? 악인은 자기에게 소속했는데 자기에게 소속하니까 이제  마귀의 것이라고 와 가지고 마귀가 와서 덥친다 그거요.

 이러니까,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게 소속이  없으니까, 그게 하나님에게 딱 들어붙어 놓으면 그게 떨어지겠소 날아가겠소?  하나님께 딱 연결이 됐으면 하나님이 흔들려야 흔들리지 그게 흔들릴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날아가야 날아가지 날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날아갑니까?  그러기 때문에 가만히 눈감고 '보자. 소속이라. 누구를 찾아봅니다. 그 사람의  소속은 천하에 다 찾아 봐도 예수 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소속한 그 사람보다  더 든든한 사람 없습니다.

 이러니까 소속이 바로 되고 소속이 튼튼한, 내가 소속한 그 뿌럭지가 튼튼해서  영원 불변이라, 그분이 지존자라, 그분이 자존자라, 모든 것의 원인자라,  주재자라, 창조자라. 이분이 내가 속한 원 뿌럭지 가 됐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분의 중심으로 이렇게 움직이지 아니한 그 자들은 다 악인이요  자기 중심인데, 자기 중심으로 한, 한 행동, 한 말, 한 일, 자기 중심,  이분에게, 이분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이분에게 속해서 움직인 것은 먼지만한  것도 영생이오. 하나도 해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고 자기 중심으로  되어서 한 그것은 우리 믿는 신자라도 말 한마디도 그냥 안 지나갑니다. 다  심판해요.

 이러기 때문에 유다서에 보면 '경건치 아니한 행동과 경건치 아니 한 말을  낱낱이 심판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경건치 않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법칙대로 하나님을 위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중심, 하나님의 법칙대로, 그분을 위하는 것이 이제 경건인데,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경건이 아니고, 아무리 선하고 성경 말씀대로 해서 뭐 세계 성자가  되어도 그자가 하나님 중심 아니라면 그것 도적놈이오. 알겠습니까? 세상에는  그런 자 많다 그말이오. 우리가 그런 자 되기가 쉬워요.

 이러니까,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것은 날아갈 수 밖에 더  있습니까? 매인 데가 있어야지요? 붙들린 데가 있어야지? 소속이 있어야지요?  어디 붙들어 주는 자가 있어야지? 아무 붙들어 주는 자가 없으니까 그는, 자기  중심자는 그는 조만간에 다 망하고 그의 행위도 다 멸망으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여기에서 악인이 되지 말아야 됩니다. 악인이 되지 말아야  되고, 악인에게 미혹받지 말아야 돼요. 그만 그 사람이 자기 중심으로 말하면  대답할 것도 없어요. 그저 말하면 '예예' 위에 사람은 '예예' 밑에 사람은  '응응응' 하되 그 자기 중심에게는 아예,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이제  이러면 거기에서 힘을 얻는다 그거요.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게 자기 중심으로 했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통과할 게 뭐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 통과할 것이  있겠소?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자기 중심자가  하나님 중심자에게 와 가지고, 하나님보다 크면 하지마는 자기 중심자가 하나님  중심자에게 와 가지고 어떻게 참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인은 하나님 중심자들이 의인이고 하나님께 피동된 자들만 의인인데,  하나님께 피동되는 자들만 있는 그 속에 자기가 능동자가 되어 지니까 그 하늘에  있는 모든 의인들하고 마찰이 됩니까 하나가 됩니까? 몇만 마찰 됩니까? 녜?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의인인데, 불의는 자율의 능동자 그자가 불의인데,  이제 의인은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그것이 의인인데,  의인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자들만 모인 것이 의인만 모인 것인데 의인의  회중인데, 의인의 회중에 자기 중심자가 들어가면 그 회중에 자기와 대립되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며 자기와 화합된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화합된 사람이  몇이나 있지요? 하나도 없어? 하나도 없어? 그래.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가니까 제 중심으로 움직인 자는 하나도 거기에 동류가 없어요.

저는 제 중심으로 한다고 힘 없는 것이 이리 가는데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사람도  이리 가니까 서로 마찰이 되니 그것이 그 자리에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대저 의인의 길은" 하나님에게 피동될으로 살려고 하는 그 의인은  완전은 못 되지마는 사람이 자기 중심을 버리고 자기가 하나님에게 소속해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여 살려고 애를 쓰면 성령과 진리의  도우심이 있고, 또 누구 도움이 있습니까? 누구의 도움이 있소? 성령과 진리의  도움이 있고 또 누구의 도움이 있다 했지요? 피, 피. 피의 도움이 있습니다.

피.'성령과 물과 피니라." 이 셋이 증거한다고 안했습니까? 이 셋은 하나인데,  피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을 따라서만 살려고  애를 쓰면 대개는 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보면 이것은 절대가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피동된 의의 길을 걸으려고 해도 인간에게는 흠점이  있고 실수도 있고, 있어도 그것이, 욥은 말하기를, 때묻은 옷과 같이 그렇게 다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하지마는 대개는 합격된다 그 말이오. 대개는 합격된다.

대개는 합격된다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자기중심의 그 길은 다 끝이 망하고 만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데에는 몇 가지를 지금 해야 돼요? 세 가지. 세  가지. 그러면 자기는 지금 어디서 중단되어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계속하면 무엇이 나타납니까? 열매가 나타납니다.

무슨 열매가 나타나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그 말은 공산주의가 와도 승리, 6 25가 지나가도  항상 6 25 자랑, 6 25가 지나가도 6 25 때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자랑, 또  6 25가 지나가고 나니까 6 25만 말하면 푹 숙어지고, 또 왜정 말년을 말하니까  또 왜정 말년을 말하면 이렇고 이렇고 또 다 자랑.

 이제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다" 말은 시대나 사회나 국가나 사소한 일이나  큰일이나 경제 일이나 모든 도덕 일이나 어떤 일이든지 모든 일에서 전부 구원의  성과를 다 거둔다. 어디든지 다 옥토라. 어디든지 옥토.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같이 청청하다" 그이의 신앙 행위는 언제든지 청청하다.

왜 그런가? 시냇가에 심어 놨거든요. 시냇가에 심어 놓으니까 가뭄이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우니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은 시냇가에 심어 놨으니까 밑에  수원이 좋고 옥토가 되어 있기 때문에 햇빛을 쬐어도 관계없고 장마가 와도  관계없어요. 이것은 시냇가이기 때문에 암만 비약도 그 무슨 받칠 여가가  없어요. 쪽쪽 빠져 나가니까, 배수가 잘되니까 문제가 없다 이거요. 그러면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과 진리에게 뿌리박았기 때문에 그것은 변동될 수가 없어.

변동될 수가 없어 청청해요. 어떻게 뿌리박았는가? 요 세 가지 함으로써  하나님과 진리에게 뿌리박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는 하나님의 힘으로 살고, 진리의 힘으로 살고, 모든  피조물은 자기에게 참 일거리로 삼고, 그 모든 것은 다 자기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로 이렇게 삼아 가지고 사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진리 외에 다른 것을 힘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힘은 둘 뿐이오.

하나님과 진리만이 우리의 힘입니다. 나머지기는, 하나님과 진리만이 우리  힘인데 이 힘이 뻗쳐 나가려고 하면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요. 그게 힘이 아니라  그 말이오.

 여기 스피커에 이래 가지고 마이크에 이러니까 저기 소리 나오지마는 그건 내가  아니오. 그거는 내 소리가 퍼져 나가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돈이나 뭐 지식이나 뭐이나 하는 그런 것은 내 힘이  아니고 진리와 영감의 힘을 받은 이 힘이 그런 걸 통해서 멀리 널리 퍼져 나가는  데에 이용을 당하는 데에 편리하다 그거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생각하면서, 아직까지 시간 많이 있으니까 좀 기도를 힘써 많이 합시다. 이  자리를 떠나면 잘 기도를 못 하는 것 같은데 함부레 여기 종 칠 때까지 한 이십  분 요량하고 기도를 가만히, 기도도 이제 묵상하는 것이, 주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해야 돼요. 이제 받은 바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가 과거에 악인의 꾀에  얼마나 빠졌으며, 죄인의 길에 내가 얼마나 옮겨 섰으며, 내가 오만해서 망령  부릴 때가 얼마나 있었는가? 나는 행함을 힘쓰다가는 그만 성경 잊어버리고,  성경 힘쓰다가는 행함 잊어버리고, 성경을 행함을 힘쓰다가는 내가 기도에 묵상  이 실험을 내가 잊어 버렸다 그런 것을 골고루 생각하면서 깊숙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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