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본주의 독재와 인본 민주주의

 

1988. 11. 28. 새벽

 

본문:출애굽기 20장 1절∼3절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 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육체의 이스라엘은 종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해 냈고, 또 전멸을 당할  애굽에서 인도 하여 냈고, 그 족속의 씨가  하나도 없도록 그렇게 만들 계획을  가지고 이루어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거게서 인도해 냈습니다.

우리는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서 전멸을 당할 우리를 인도해 내셨고 또 아주 우리의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의 종자가 아무것도 없도록 이렇게 멸망시킨 거게서 우리를 인 도해 냈습니다.

육체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인도해 냈고 우리는 세상에서 인도해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 말은 너를 없는 가운데에서 창조했고 또 네게 대해서 유일하신 한 분 이신 하나님 곧 “여호와라” 너와 계약을 선포해 놓고 계약대로  앞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갈 하나님이라 그말입니다. 여호와라  말은 선포해 놓은 계약대로  하신다는 말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말씀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 게 말지니라” 하는 말씀과 꼭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머리로 삼고 “내 앞에서” 하는 그렇게 기록된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삼아라 그렇게 말씀 한 것이고 또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 하는 “나 외에는” 너와 하 나님과 둘이지 그 외에 딴것은 아무것도 있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접하여 살 때에는 인간도 접하고 모든 만물도  접하는데 만물은 만물 대로 너희들에게 필요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너희들에게 필요하지마는 “하나님  나 외에는” 하나님이 네게 주는 사람, 하나님이 네게 접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이 네 게 주는 물질, 전부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 네가 보기에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전부 하나님으로 인해서 너와 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너와 관련된 게  하나도 없고 전부 하나님으로 인하여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으로 인했다는 것,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 하나님으로  시작했다는 것,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모든 범사에 하나님을 먼저 깨닫고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인 했다는 것을 네가 깨달아서 범사에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법도에 맞춰서 살도록 해라 하는 그런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 외에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범사에 살아라, 하나님 위주로 살아라, 또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아라 그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하나님 위주라는 것은 우리가 위하되 하나님을 제일 주로 위하고 또 우리가 이것 저 것 하는 그 속에 시발이나 끝이나 그 전부가, 전부를 합해서 중심이라  하는 것인데 전부를 합한 그 중심이 곧 하나님이어야 하고 또 하나님으로 시발해야 되는 걸 가리 켜서 “하나님으로 인해야 되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계명을 지키면 열 가지 계명을 다 지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 여 움직이라 했으니까 하나님이 시키지 안한 우상 숭배할 수 없고 하나님이 또 당신 의 하는 역사를 언제든지 감사히 받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불평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했으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되지 주일을 어 길 수 없고, 하나님이 오계명 지키라 했는데 오계명 어길  수 없고 하나님이 뭐 육계  칠계 팔계 구계를 십계를 지키라 했는데, 그분으로 인하여 움직인다면은 그런 것은  저절로 지 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계명 지키면 십계명까지를 다 지킨 것이 되고  이계명부터 지키면, 이계명부터 지킬 수 있습니다. 이계명부터 지킨 사람은 일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 문에 사람 보기에는 지킨 것 같지마는 하나님과는 상관 없고 그는 다 멸망할 생활입 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삼계명부터,  사계명부터, 오계명부터, 이렇게  육계명부터, 칠계명부터 이렇게 지키나 일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중심이 틀렸기 때문에, 위주가 틀렸기 때문에, 인함이 틀렸기 때문에 그거는  암만 해도 그 거는 다 인본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어제  오후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제일  존귀한 자로 이렇게 우대를 했는데 사람이 어데서 타락했느냐? 타락한 것은  인본주의로 타 락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근본이요 주인이요 제일 머리되시는데 하나님을 두고 인간 이 머리되고 주인되는 거게서부터 타락이 됐습니다. 인본주의에서 타락이 됐습니다.

그러면 인본주의 시발은 곧 하나님의 영이 아닌 악령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서 인본 주의 된 것입니다. 그 인본주의로 ‘사람이 그만 제일이라’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 서 사람 위주로, 사람 중심으로, 전부가 사람으로 인하여 움직입니다.  이것은 전부 멸망 생활입니다. 이것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서 하나님을 찾게 됐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을 찾아서 이제는 부활해 가지고서 영생할 때에 어떻게 영생하게 됐느 냐? 하나님을 향하여 영감과 진리로  사는 영생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향한다 말은 목적이라 말이요, 위한다 말이오. 이래서 진리로 살아도 하나님을 향해서 살지 안하 고 인간을 목표로 삼아서 살면 헛일입니다.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의 구속해 놓은 사람들이 타락할 때에, 내나  구속해서 중생된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은 그 타락의 길을 뭐라고 합니까? 중생된 사람들이 타락할 때 는 타락한 그것을 뭐라고 말합니까? 타락한 그것이 곧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라 말은 사람을 주로 삼는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인본주의라 말이나  민주주의라 말이 나 같은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장하도록 하는 것인데, 사람이 주장하는 그것이 민주주의인데 민 주주의의 그 시발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그 일이 났던 것 입니다. 인본주의가, 바벨탑을 쌓을 때에는 민주주의입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에 모 든 민간들이 다 주인이 돼 가지고  저희들이 다 일심단결이 돼 가지고  역사해 놓은 것이 바벨탑을 쌓은 그 건설입니다. 그 건설은 대단히 잘된  건설이지마는 하나님을 빼 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저주하시고 다 멸망하게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타락이 인본주의로 타락했고 민주주의로 타락했고 한 요것 을 언제든지 기억해서 제직회가 모이든지, 권찰회가 모이든지, 또 자기 가정 가족들 이 모이든지 어떤 무슨 뭐 모여서 회의를 하든지 회의를 할 때에 인본주의를 피해야 됩니다. 거게서 민주주의를 피해야 됩니다.

이거 민주주의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그래도 두 사람이 있으면 두 사람 의 견을 따라서 가기 쉽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 간다 하지마는 따라가는 그것이 여러 사람 의견이 하나님의 뜻과  엇갈리지 안할 때 에는 한 사람이 주장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게 낫습니다. 왜? 하나님의 뜻 에 바른 뜻을 한 사람이 주장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 지고 주장하면 그것이 더 권위가 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그대로 가는 그것이라고  해 가지고서 그게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주장했지마는 내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그 독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본주의를 항상 기억해서 여기에 빠지지 안하도록  우리가 주의해야 되고 무슨 개인이나 단체나 뭐나 볼 때에 ‘저것이 사람이  근본이냐 하나님이 근본 이냐?’ 그러면 이 세상에 지금 우리 나라에서 국회에서 모두 다 오공 비리를 청산한다고 하 고 있는데 그런 모든 운동, 또 세상에 지금 노벨상을 준다 뭐 세상에 평화조약을 맺 고 군비축소 조약을 맺고 이렇게 모두  운동을 하고, 하고 있는 모든  이런 운동들, 이런 운동들이 그것이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뭐입니까? 그거 인본주의라고 확실히 알 수 있습니까? 인본주의면 우리는 그것을, 거게 떠나서는 못 살고 거게 접하여 있지마는 우리는 거 게서 인본주의에 따라가지 안하고 신본주의 생활을 인본주의 속에서 합니다. 그러나 신본주의 생활을 인본주의 속에서 하니까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마찰이 됩니다.

마찰이 돼도, 마찰이 어데까지 되느냐? 마찰이 되는 그것이 생명을 빼앗기기까지 마 찰이 됩니다. 그래도 그것은 죽어도  다시 영원히 삽니다. 그러기에  아벨이 죽어도 살았고 첫 열매이신 예수님께서 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로 더불어  싸우다가서 죽임 을 당했는데 죽임을 당함으로써 예수님이 신본주의로 인본주의와 싸울 때의 그때 생 명과 다른 생명을 받게 됐습니다.

죽은 가운데서, 신본주의 때문에 죽은 그 생명이 다시 부활했을 때는 다시는 죽음을 보지 안하는 완전한 생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 열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다음 순서로서 그렇게 돼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근본으로 삼아서 제일계명을 지킬라고 할 때에 거게 대립되는 것이 뭐이냐? 인본주의와 대립됩니다.

그러면 그때에 사람이 타락해 가지고 인본주의가 됐는데 인본주의가 불택자들로서는 인본주의 그대로 계속하고 있지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로 다시 변화받은  일이 없습니 다.

노아 시대에 그때에 그 신본주의뿐이고 인본주의가 없는 것같이 보이지마는 그 속에 아들을 낳고 보니까 아들에 인본주의가 있었습니다. 아들에 인본주의 있는  것은 노 아가 홍수 후에 자기가 실수한 그런 것이 다 종자가 속에 남아 있어서  그렇게 됐던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신본주의로 살 때에 인본주의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 얼마나 그 싸움 이 힘들고 어려우냐? 생명을 빼앗기는 그 싸움입니다. 아벨과 가인이 제사드렸을 때 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꼭 같이 하나님 섬겼는데, 가인도 섬겼고 아벨도 섬겼는데 아벨이 섬긴 것은 뭐입니까? 신본주의로 섬겼고 가인이 섬긴 것은  인본주의로 섬겼 습니다.

섬긴 그것이 제일 동기가 사람으로 동기가 됐고, 목적은 하나님을  위한다 했지마는 근본 인함이 가인으로 인했고 아벨은 하나님으로 인했어. 하나님께서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라 했는데 가인은 대속의  제물로 섬기라는 그런 약속은  버려 버리고 제 생각대로 제가 농사 지으니까 제 농사 지은 것 가지고서 섬긴 그게  내나 그것입 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언제든지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데  타락해서 인본주의 된 것이 택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복구가 됐고 불택 자들에게는 인본주의가 그대로 복구되지 안하고 계속돼 있습니다.

그러면 요새 우리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로 더불어 싸우는 요 싸움이 계속한다는 것 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요것이 다른 껍데기를, 속에 알맹이는 꼭 같지마는 껍데기를 다른 껍데기를 쓰고 나온 것이 뭐이냐 하면은 하나는 민주주의 하나는 독재주의입니 다. 요 껍데기를 쓰고 나왔습니다.

그러면 독재주의 그것이 내나 신앙주의요 또 민주주의 그것이 내나 인본주의입니다.

이래서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본토 친척  아비 집 을 떠나라” 하신 것은 본토보다  하나님을 앞세웁니다. 본토를 버리고  하나님에게 속했습니다.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지시함을 받으니까 본토에 붙들리고 살던 것 이 본토에게서 떨어져서 하나님에게 붙었습니다. 또 인류에게, “친척  아비집” 인 류에게 붙들렸던 것이 하나님에게, 인류에게 떨어져서 하나님께 붙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사는 생활이  이것이 네가 땅에 속한 움직임이냐?  땅에 속한 움직임이냐? 네가 땅에 속한 것을 떨어져야 하나님에게 속해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네가 사람에게 따라 움직임이냐 하나님에게 따라 움직임이냐?  이거는 항 상 계속 우리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별하지 안하면 헛입니다.

자기 생활을 그냥 하나님 위한다는 목적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걸 제일 처 음부터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제일 초대 교인이 아담 해와요 그다음에 이세 교인 이 가인과 아벨인데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섬기는 것은 다 하나님 섬겼습니다.

가인도 하나님 섬기는 제사 드렸고 아벨도 하나님 섬기는 제사  드렸는데 그 근본이 틀려서, 아벨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 피동돼 가지고 했고 가인은 하나님으 로 피동되지 안하고 자기로 피동되어서 자기 능동으로, 자기가 동하고  정해 가지고 서 했기 때문에 그것이 멸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후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본토에게 사 람이 다 붙어 살았습니다. 친척  아비집에 붙어 살았습니다. “이런데  본토를 떠나 내가 지시할 곳으로 가라, 아비 친척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곳으로 가라.” 이것이 오늘까지 우리에게 계속되어 나오는 계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에 속했느냐 하나님에게 속했느냐? 땅으로 인해서 내가 움직이느냐 하나님으로 인해서 움직이느냐? 내가 인간으로 인하여 움직이느냐  하나님으로 인하 여 움직이느냐? 모든 인간이 감정으로 또 시기로 또 욕심으로 또 여러가지 분노로 그런 걸로 다, 이 런 욕심이나 저런 욕심이나 그런 걸로 인간이 욕심으로 뭐 생의 애착욕이 제일 큽니 다. 사람이 살고자 하는 욕심이 제일  커. 생의 애착욕이 욕심 중에는 제일  커. 돈 욕심보다도 권세 욕심보다도 자기 생명이 살고 싶은, 생명의 욕심, 살고 싶은 욕심, 그 생의 애착욕이 제일 큰데 생의 애착욕에 속해서 그 사람이 살기 위해서 움직이면 뭐입니까? 살기 위해서 움직이면 그 사람이 어데 속한 사람입니까?  살기 위해서 움 직이면 그 사람 어데 속한 사람입니까? 인간에게 속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 람입니까? 인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살기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의  뜻에 위반되지 안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에, 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어겨야 살지 어기지 안하면은 살 수 없을 때에는 그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라 고 하는 일을 버리고, 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어김이 없이 살라고 하는, 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어김이 없는 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뭐입니까? 그거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 니까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 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에 우리에게는 법칙을 주신 것이 이 자연법을  줬습니다. 자연 법을 줬어. 자연법을 준 것은 사람이 배고프면 먹고, 또 피곤하면 쉬고,  밤이면 자 고, 낮이면 일하고, 또 운동도 하고,  또 놀기도 하고 바람도 쐬우고 하는  이 모든 자연 생활 말이요, 자연 생활이 뭣이 자연 생활이냐 하면은  안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생활은 전부 자연 생활입니다. 자연 생활인데 이 자연 생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주신 법칙입니다.

자연 생활하는 이 자연법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주신 법칙인데  이 자연법을 가지고 서 바로 구별하지 못하고 타락을 해서 이차에 다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칙이 뭐이냐 하면은 성경 법칙 특별  계시입니다. 이래 처음에 가르쳐 준  것을 가리켜서 일반 계시라 자연 계시라 이렇게 말하고 두번째 가르쳐 준 것을 특별 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특별 계시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혹은 문서로 혹은 환상으로 혹은  꿈으로 이렇게 해 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런 것이, 문서에 기록된 그런 것은 다 특별 계시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자기가 배고프면 밥 먹고 또 목마르면 물 마시고 또 피곤하면 쉬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피곤해서 쉬지 안해 가지고서 고장이 나고  목마른데 물을 먹지 안해서 먹을 수 있는데 안 먹어서 고장나고 또 배고픈데 밥을  먹어야 될 터인데 밥 을 먹지 안해 가지고서 그 사람이 기진해서 병이 들고, 그라면 그 사람이 물 마시지 안하고 밥먹지 안하고 쉬지 안하고 자지 안하는 그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범죄한 것이 됩니까 그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 됩니까? 뭐이 됩니까? 저 뒤에? 범죄함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녜, 범죄함 이 됩니다. 무슨 법이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준 하나님의  자연법을 순종하지 안 했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 밥을 먹지 말아라’ 하는데 먹지 말라는 그 밥을, 죄를 짓지 안 하면 그 밥을 먹을 수 없는 그런 밥, 그러면 자기가 배가 되게  고픈데 ‘네가 배가 고프니까 이 밥을  내가 줄 터이니까  이 밥을 먹을라면 네가 이 우상에게 절을  해 라’ 그렇게 하면은 우상에게 절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면은 그 밥 먹는 것 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입니까 안 금하신 것입니까? 금한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 법에는  배고픈데 밥이 있으니까 먹을 수 있는데, 그걸 먹으면  되겠는 데, 자연법으로 봐서는 먹어야 되겠는데 이  특별 계신인 특별법을 보니까 먹지  말 라고 했으니 그 사람은 먹어야 됩니까 안 먹어야 됩니까? 먹으면 자연법에는 응했지 마는 특별법에 걸리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그러면 그거는 자연법에 먹으라 했지마는 그 밥은 먹지 말라 했기 때문에,  다른 밥 을 먹으라 했지 그 밥을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먹는 것이  자연법도 순종이요 특별법도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들에게는 자연법 특별법 이 두 법이  있어서 자연법을 가리 켜서 하나님께서 자연 계시라고 이렇게 말했고, 계시라 말은 우리에게 알려 줬다 그 말이오. 또 특별법인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켜서 특별 계시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연법을  지켜야 되고 특별법을 지켜야  되는데 자연법을 지킬 때에 특별법에서 금지 안 하는 자연법이면 그것을 지켜야 됩니까 안 지켜야 됩 니까? 만일 하나님이 금지하지 안한 자연법을  지키지 안한다면은 그게 죄가  됩니까 의가 됩니까? 저 뒤에?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저  뒤에도? 그거 죄가 됩니다. 이거 알아야 돼. 죄가 돼요.

또 특별법이 금지하는 자연법을 사용하면은 그게 죄가 됩니까 죄가 안 됩니까? 죄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저 뒤에 꼼뱅이 온 사람들도 뭐 아네, 손 드는 것 보니까. 참 기특합니다.

그래 그저 드문드문 그래 와 가지고서, 그거 못 써요. 첫 열매가 예수님이신데 첫열 매이신 예수님, 우리는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그 사람을 우리가  본보면 안 됩니다.

아무리 잘난 여자라도 그 사람 본보면 안 됩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하는 것은 바울이 뭘할 때 말했습니까?  성경 기록하면서 성경 기록에 “나를 본받으라” 이랬습니다.  성경 기록에 나를 본받으라  했으니까 성경 기록할 때에는 바울에게, 바울이 자기가 능동으로 동했습니까 하나님께 피동으 로 동했습니까? 피동으로 동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본받으라 말은 성령을 본 받으라 하는 그말입니다.

그래 우리는 사람은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장로들은 양무리의 본이 되라” 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모본을 보이라는 것이지 우리들이  장로를 본을 받아서 장로 따라가면 헛일입니다. 알겠습니까? 아무리 잘 믿는 장로라도 ‘내가 저 장로 따라서 장로와 같이 믿겠다’  틀렸소. 자기는 예수님과 같이 믿는  그것이 잘 믿는 장로와 같이 자기도 돼져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표본으로 삼아서 따라가기는 누구를 따라가야 돼요? 주님만 따라가야 됩니다. 주님을 따라가면은 어데까지 따라가야 돼요? 베드로전서 5장에 있으니 어데 까지 따라가야 돼요? 잘믿는 장로와 같이 되도록 따라가야 돼.

내가 혹 그렇게 하나님을 따라서 자꾸 이래 성화돼 나가다가서 잘 믿는 사람과 한번 비교는 해 볼 수 있지마는 그 사람을 내 표본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표본은 하나 님 한 분만을 표본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래서 제일계명, 어짜든지 그만 하나님 중심이 아니면 헛일니다. 하나님 중심 그것 이 인간 중심으로 바꿔져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다수에 따라서 움직여 인간 주장으로 따라서 움직여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된 사람들은, 중생된 사람들이 생활하는,  중생된 사람들이 움직이는 생활은 그 생활의 법칙은 무엇입니까? 중생된 사람들이 움직여 사는 그 유 일한 법칙은 뭐입니까?  원인이 뭐이냐 이라면은 신본이고 이렇지마는 움직이는  그 법칙은 뭐입니까? 하나님의 독재에, 독재에 자기가 독재당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하나님에게 독재당하는 것이 첫째 자기  할일이오. 독재를 당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독재대로 자기가 움직여 가지고서, 그러면 하나님에게 독재당한 그 독재를 어데다가 씁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독재를 당했고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는 독재를 해야 됩니까 타협 을 해야 됩니까? ○○○? 타협 안 하고? 하나님에게 독재당한, 하나님이 ‘이래라’ 했으면 자기가 그대로 독재를 당합니다.

독재고, 또 하나님께서 ‘네가 아무것에게 가 가지고 이렇게 해라’ 그라면 또 하나 님께 독재를 받아 가지고서 갔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 가 가지고  뭐라고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이래 하라더라. 이래라.’ 이래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독재가 쭈욱 계속 내려와 가지고 끝까지 독재로 계속되는  것이 이것이 기 독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재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민주주의라 하는 이거는 아주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큰 실패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가 자꾸 이렇게 자꾸 타락하고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지고 흔들 리는 것은 기독교를 민주주의라 하는 여기에서 흔들려졌습니다.  민주주의는 교회에 서 나왔습니다. 교회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시발의 뿌리 뻗기를  교회 정치에서 민주 주의가 나왔어.

이거 성경 어데다 근거하느냐? 근거하기를 신약에 와 가지고서는 집사들을  정할 때 에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집사들을  정할 때에 사람들이 의논해 가지고  정했다. 또 사도를 택할 때에 모두 의논해 가지고서 그렇게 했다.

그래도 거게는 제비를 뽑았기 때문에 권리를 자기네대로 하지 안하고 이렇게 하나님 께 뒀지마는 그래도 그거 그래 뽑은 것이 헛일이라 그말이오.  맛디아를 뽑았지마는 맛디아가 십이 사도 중에 가룟 유다를 대신하지 못했고 사도 바울이 가룟 유다를 대 신했습니다.

이래서, 또 집사를 이렇게 모두 다 뽑아 가지고 가 가지고서 사도들에게  가니까 사 도들이 보고서 ‘됐다’ 하고서, 뽑는 것을 명령하고 명령해서 뽑아 가지고 갈 때에 사도들이 인정할 때에 집사가 됐지 그전에는 집사가 안 됐습니다.

이거 전부 명령 계통이오. 전부  명령 계통.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순종 계통, 독재 계통이지 그거 인간 단체로 뭐이 뭉쳐 가지고 의논하는 그게 아니라 그말이오.

이래서 우리 총공회가 갈라진 것은 민주주의와 독재주의로 갈라졌기 때문에 이게 보 통으로 볼 것이 아니고 이것이 과연 뭐이 되는지? 한국에 제일 중심되는  뭐이 되는 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여게서 민주주의 독재주의라 하는 것이 큰 문제가 일어나 가지고서  지금 일이 일어 나는데 우리 안에서는 지금 민주주의 독재주의가 총공회서는 많이 말이 있지마는 이 다른 데는 나가지를 안했어. 다른 데 나가지 안해.

이것이 차차 차차 뻗어서 온 세계에 뻗쳐 나갈 것입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민주주 의가 아니고 독재주의다’ 하는 이것으로 뻗어 나가서 이제 교회가 새로워지고 분쟁 이 날 것입니다.

앞으로 입곱 머리 열 뿔  짐승이 하나가 돼 가지고서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울 터인 데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그러면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이 뭉쳐서 하나 됐으 니까 그거는 뭐입니까? 그거 무슨 주의요? 그거는 무슨 주의요? 그게 내나 민주주의 라.

또 이렇게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진실한 자들은, 어떤 자가 이깁니까? 서로 화목 잘하는 사람이 이깁니까, 또  희생하는 사람이 이깁니까, 서로  타협을 잘하는 사람이 이깁니까, 모든 사교성 있는 사람들이 이깁니까, 어떤 사람들이 이깁니까? 진실한 자는 뭐이 진실한 자인데? 진실한 자는 어떤 자가  진실한 자입니까? 진실한 자는 어떤 자들이 진실한 자? ○○○집사님 뒤에? 진실한 자들은  하나님 한 분에게 독재당한 사람입니다. 독재를 당한 사람이오.

그러면 세상에서 독재를 당했는데 제일 독재를 뿌스러기 하나도 남김  없이 완전 독 재 당한 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오. 완전 독재당한 이가 예수님이오.  그분은 생각 하나도 말 하나도 자기로 인해 한 거는 없습니다. 전부 독재요. 아버지에게 전부 피 동이오.

그다음으로 독재 잘 당한 사람은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오. 이래서 모든 사람을 보십 시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사람의 생애 법칙은 독재입니다. 독재에 복종하고 순종 으로 삽니다. 그러면 항상 독재로 삽니다.

제일, 만일 훌륭한 목사가 있다고  하면은, 훌륭한 주일학교 반사가  있다고 하면은 그 반사는 어떤 반사라야 됩니까? 자기 생각대로 지혜대로 잘 연구해서 모두  다 모 든 사람에게 많이 물어 보고 상식을 그런 광대한 상식을 가지고 사는,  상식을 가지 고 사는 그 반사가, 광문 다학한 그 반사가 일등 반사입니까 뭣이 일등 반사입니까? ○○○? 하나님에게 독재당한 그 반사가 제일 훌륭한 반사입니다.

그러면 그 반사가 학생을 인도하는데 학생을 인도할 때에는 어떻게  인도합니까? 어 떻게 인도하는 것이 제일 잘 인도하는 것입니까? 타협하는 것입니까  독재하는 것입 니까? 독재하는 것입니다. 독재하는 것인데 사람 독재가 거게 들어가면  안 됩니다.

사람 독재는 절단나고 하나님의 독재입니다.

하나님의 독재인데 그 독재를 할 때에 그건, 하나님께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 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했는데,  이것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 했는데,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했는데 그 껍데기는 뭐입니까? 어느 게 껍데기입니까? 껍 데기는 뭐이요? 거룩이 껍데기요 화평이 껍데기요? 화평이 껍데기요.

화평이란 껍데기 속에 속에 알맹이 목적은 뭐입니까? 거룩이라. 거룩을 위해서 화평 하는 거라. 거룩을 위해서. 거룩이 아니면, 거룩을 위하지 안한,  거룩을 목적한 화 평이 아니라면, 그 화평이 거룩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거는 결국은 다 인본주의 되고 말아 버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서, 하나님의 한 분의 그분의 뜻인 이 하나인 그걸 내가 바로 찾아 가지고 거게 내가 복종하고 나도 다른 사람을 지도할  때도 하 나님의 뜻이 하나인 그것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사람을 지도하고  가르쳐야 된다 요 하나에서 벗어나지 안해야 살고 하나에서 벗어 나가면 다 사망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광고할 것 하나 있습니다.

이 대신동으로 기도하러 가든지 뭐 새벽이나 낮이나, 또 꽃마을로  기도하러 가든지 또 저 양산동으로 기도하러 가든지 어데로 가든지 기도하러 갈  때에 그때에 기도하 면서 가고서 믿는 사람끼리 가면은 설교 재독도 할 수 있겠고 또 가르치기도  할 수 가 있겠습니다.

안 믿는 일반 버스에 타고 가면서  자꾸 믿는 이야기 하니까 자꾸  욕을 얻어먹습니 다. 저주를 받습니다. ‘에, 저 상식  없는 것들. 저거만이 아니고 여기  딴 사람도 있는데 우리 듣기 싫은 소리를 자꾸 저래 한다.’ 그거 얼마나 복음을  가루는지 모 릅니다. 그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 어떤 사람들 보면 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체면이 없어.

나 그전에 서울 다닐 때에 보면은 믿는 목사들 만나 놓으면은 그 옆에  다른 사람들 다 있는데 거게서 오만 소리 다 합니다. 저하고 나하고 둘이 앉은 것같이 자꾸 이야 기를 해. 이야기를 하는 걸 박절하게 말할 수도 없고 그만 이야기하면 내가 이래 그 만 눈을 감고 이래 가지고 이래 버리면 그만 알 건데 그래도 자꾸 대고  뭐 교회 이 야기 전부 다 하요. 우사스러워서. 도무지 그렇게 아무 체면도 없고 수양이 없어.

그래 저 양산동서 소문이 났어. 아따  예수 믿는 그것들 버스 타 놓으면  전부 저거 똑 독버스 모양으로 어떻게 떠들고 듣기 싫은 소리 하고 있는지 그렇다고서 욕을 하 는 것이 내 귀에까지 들어왔어. 체면이 있고 좀 염체가  있어요. 얌똥머리가 없으면 안 돼. 체통이 없으면 안 돼. 그 주책이야. 그거 하지 말아요.

그러고 또 이거 구원하는 거는 좋지마는 구원하는 것이 그 사람 자, 내가 그 사람을 내 구역인데 다른 구역으로 보냄으로써 그 사람  구원이 잘될 때에는 내가 ‘나보다 그 구역으로 가거라’ 그렇게 권면해야 되겠습니까 저 사람 구역으로 가면은 구원이 잘될 터인데 내 구역에 있으니까 구원이 그만 못하니 내가  저 사람 구역으로  가는 것만치 내게 있서 구원이 잘되도록 열심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열심을 해야 되겠다 하고서 열심히 해야 되겠습니까 저보다 나은 다른 구역으로 보내야  되겠습니까? 어 느 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자, 보내는 게 뜻입니까 자기가 좋은 구역으로 보낸 것만치 구원이 잘  되도록 열심 을 내서 그 사람을 구원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까? 노력을 해야 됩니까 보내야 됩니까? 보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틀 렸다 말이오. 틀렸어. 그만한 구원이 되도록 자기가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노력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이거야. 이런 것 바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돼요.

또 그 사람이 지금 다른 구역으로 갈라고 하든지 또 다른 구역으로, 우리 법에는 장 년반은 석 달인데 석 달이 지나서 이제 그 사람이 다른 구역으로 가 가지고 있는 사 람이라든지 그런 사람을 도로 자기 구역으로 끌고 와야 되겠소 갈라 하는 사람을 못 가구로 붙들어야 되겠소? 그러면 갈라 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석  달을 지내 가지고 다른 구역으로  간 사람이 나, 갈라 하는 사람이나 가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기어코  자기 구역으로 끌어와야 됩니까 거게 내비둬야 됩니까? 내비둬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또, 그래도  내 구역이기 때문에 끌어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다 알기는 아네. 끌어오면 죽어.

그 사람 죽여요.

그러기 때문에 구역 바꾸기 위해서 역부러 석 달 동안은 교회 나오지도 안하고 다른 교회로 다니고 이라다가 이제 석 달이 지났으니까 되지 싶어서  왔는데 다른 구역으 로 갔다 말이오. 가니까 아, 왔느냐고서. 그래 가지고 기어코라도 시비를 해 가지고 그 사람을 그라니까 아이구 나 교회 안 가겠다고서.

그게 뭐이요?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구원이 목적입니까 제것  만든다는 게 목적 이니까? 그런 못된 짓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미워하시요. 그게 뭐입니까? 그게 어 제 배운 대로, 어제 오전 설교에 배운 대로 그 사람 무슨 사람입니까?  양 도둑! 양 도둑! 양 절도! 양 강도! 그라면 자, 하나님의 사람을 제 사람 만들면은 삼키는 것이요 살리는 것이요?  이리 목자.  도둑 목자. 삯군 목자. 강도 목자. 절도 목자. 이걸 알아야 돼요.

어짜든지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주로 해서, 구원 위주로 한다고 ‘아이고 내 게 있는 것보다 그래 아무래도 원 구역장께로 가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만 맡아 주십시오.’ 그거는 제게 있는 것을 그리 낫다고 그리 맡아 달라고서 하는 그것은, 그게 옳아요, 원 구역장에게로 가는 것보다 내게 이미 맡겨 놨으니까 내가  뭐 모자 라지마는 그러니까 구역장보다 몇 배 힘을 써서 위해서 기도도 하고 노력도 하고 해 가지고서 어짜든지 거기 가는 것 못지 않는 그런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이것을 취해야 됩니까 자기가 벗어 넘겨서 보내야 됩니까? 보내야 되는 게 진리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자기가 가는 것만치 있는 힘 을 다 기울여서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그거야. 우리  환하게 다 알고 있어. 생각하면 다 아는데 속에 자기라는 중심 그놈이 들면 전부 다 어둡게 만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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