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1981. 11. 7. 토새

 

본문 : 야고보서 1 : 13 - 15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바른 지식을 먼저 가져야 하고 그 다음 바른 지식대로의  소원을 가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바른 지식대로의 그 소원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세상과 마찰이 되어집니다.

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인데, 바른 지식대로 하려고 할 때 마찰되는 거기에서  바른 지식이 그 심신을 주관하느냐, 세상 지식이 그 심신을 주관하느냐는 마찰이  생깁니다. 세상 지식이 심신을 꾀울 때는 심신의 욕심을 이용해서 꾀웁니다.

세상 지식이 그 심신을 주관하려고 애를 쓰게 되니까 하나님의 지식이 시작했던  주관이 그 대적이 옴을 인해서 흔들립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지식이 뒤에 들어왔고 세상 지식 마귀 지식은 먼저 들어 온  자입니다. 먼저 온 자는 강도요 절도라고 합니다. 먼저 온 자는 강도요 절도라고  한 곧 그 자인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선입적 관념이요 기존지식이요  자율이요. 또 주관이라 하는 자입니다. 그 자는 오래 동안 마음과 몸을 다스리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의 세력이 강합니다.

두 지식이 싸우고 또 두 소원이 싸우고 두 욕심이 싸우고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싸웁니다. 한 쪽은 다 육체의 소욕들이고 이쪽에는 성령의 것들입니다.

이 둘의 싸움은 그 실행하는 현실에서 판정이 납니다. 먼저 시작했던 하나님의  지식대로 또 성신의 소원대로 욕심대로 성령의 소욕 영생하는 이 길을  시작했지만 저 대적이 와 가지고 침노를 하니까 그때 그 현실에서 판정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대로 하나님의 인도대로 살려고 할 때에 세상이 대적하는 그  대적을 인해서 그때에 하나님의 인도대로 살려고 하는 그것이 그만 깨어져서  끝나는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깨어질 작정하고 깨어져도 하나님의  인도대로 살겠다고 했는데도 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을 떠나지 안겠다 하고 깨질 요랑 하고 깨지기를 각오하고  깨질 작정을 했는데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함으로 깨어져 끝난  것도 있으니 이렇게 깨어져 끝난 것은 세상이 붙들래야 붙들 끄나풀이 없습니다.

세상하고 완전히 이별해 버리고 세상과는 떠났기 때문에 세상이 붙들래야 붙들  수 없고 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 또  중생 된 자기 영의 것이 됐습니다. 세상이 '그러면 깬다. 그러면 죽인다. 그러면  없앤다. 네 살림살이가 다 절단이 난다.' 뭐 소유든지 자기 지위든지 권세든지  명예든지 자기 몸의 건강이든지 몸의 건강이든지 건강도 절단난다고 이렇게  세상이 위협도 하고 실지로 절단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 됐기 때문에 진리와 성령과 중생된 영은 언제든지  동행합니다. 이 중생 된 영은 참 자기인데 이 중생 된 영이나 진리나 영감이나  하나님과는 한 덩어리입니다.

영감은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에게 와서 역사 하는 그걸 가르쳐서 영감이라  말합니다. 영감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과 진리 사이에서 중매 역할을 합니다.

자기를 인도하는 하나님 진리 중생된 영 이 셋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힘을  쓰다보면 세상이 생명이나 몸이나 그 마음이나 소유나 이런 것을 뗀다면서  방해를 합니다. 세상이 그런 것을 동원하여 자기를 세상에게 붙여 제것으로  만들고 지금도 애를 씁니다. 과거에 하나되었던 것처럼 예수 믿고 나서도 계속  세상 자기 것으로 붙여 놓고 살기 위해서 저쪽으로 옮겨져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붙들려고 애를 씁니다.

애를 쓰는데 타일러도 안 듣고, 또 성을 내도 안 듣고, 두드려도 안 듣고,  그러면 너는 박살을 낸다 죽인다 해도 안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과 몸에는  인격성이 있고 자유성이 있고 독자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에게 속할 수도 있고  자기가 마귀에게 속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안 믿음을 때는 몸과 합해서 살았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요 주체입니다. 그 둘이 합해서 자기가 된 것을 가리켜 육체의 사람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안 떨어지려고 하니까 위협을 주다가주다가 마지막에는 어디까지 주느냐?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위협을 줄 수가 있습니다. 죽어도 안 떨어지려고 하니까  자꾸 시험하다가 그만 정말 죽어버렸습니다. 다시 세상이 손 댈 수 없도록  끝나버렸습니다. 세상에 손 댈 수 없도록 끝나는 것은 재산은 없어졌으면 다시  세상이 끝내지 못하고 그 생명도 떠나 없어졌으면 세상이 침노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진리 중생된 영을 인해서 거기에서 안 떨어지려고 함으로 없어졌으면  그것이 이제 없어진 것이요. 죽어졌습니다. 없어진 것이요 죽어진 것이요.

그러면 없어지고 죽어진 것은 어떻게 되느냐? 그것이 없어지고 죽어진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에게 속하게 됐고 또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됐느냐?  하나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의 것이 됐습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영에게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세상의 온갖 박해를 당해 가지고 죽었다는 말이요. 맞아 죽었다는  말이요. 또 그 재산이 다 절단 나버렸단 말이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세상에게  박해를 당해서 없어지고 죽어졌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과 영과 진리에게 속하여 그것의 것이 됐는데 그것의 것이  됐는데 그것의 것이 되어 가지고 그것의 것에서 떨어지지 안 하려고 하는  가운데에서 세상이 깨트렸습니다.

그러면 진리에게 속한 것을 이 세상이 깨트렸습니다. 세상이 깨트렸으면  진리에게 속한 것을 깨트렸고 진리의 것을 깨트렸고 진리에게 떨어지지 않고  진리와 하나되고 하나님과 하나된 그걸 깨트렸다 말이요. 깨트렸으면 그것은  어찌됩니까? 깨진다 하면 하나님의 권능이 깨졌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깨졌고  하니까 하나님이 깨진 것이 된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깨지지 않습니다.

이러면 그것이 시험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의 것이 완전히  되지 못하고 그것이 양쪽 사이에 끼어 세상은 세상 것이 되도록 하라고 애를  쓰고 하나님에게 속한 이 부분은 하나님의 것을 만드려고 애를 씁니다. 두  쪽에서 서로 잡아 당깁니다. 서로 잡아 당겨서 여기 속해라 저기 속하라 이래  양쪽에 시비하고 있는 거기에서 그것이 자유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에게 자기가 소속할 수도 있고 그것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이 악령과 이 세상 것에게 속해서 그것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자유가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에게 속하고 세상에게 속하지 않으려고 그들과 신강이를 하면서  집어 뜯고 당기고 협박을 하고 고문을 하고 고행을 하다가 이제는 더할 수 없이  끝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으니까 다시 더할 수가 없어 끝나버렸습니다.

끝났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것으로 세상과 싸움이 끝났고 진리에  속한 진리의 것으로 세상과 싸움이 끝났고 또 중생된 영의 것이 세상 것과  싸워서 영의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다시는 세상은 그를 시험하지 못하게 됐고 세상에서는 세상이 이겼고 죽어서  하나님에게 속했고 없어져 진리에 속했고 영의 것이 됐습니다. 됐으면 그것이  어찌되겠습니까? 그것이 십자가로 구원 얻는 것입니다. 시험받을 수 있는 그  위치에서는 죽었고 마귀가 싱강이할 수 있고 제것을 만들라고 하는 거기에서  죽었고 다시는 마귀와 세상이 저희 것을 만들라고는 손도 대지 못하는 것으로  못하는 것으로 끝나 진리의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영감의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중생의 것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끝났을 때에 이것을 하나님과 진리의 능력으로 다시 살리는 것이 십자가로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는 것과 같은 법칙으로 되는 것입니다.

요것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으로서 없어진 것을 완전히  이겼습니다. 그들에게 빼앗겨지는 것으로서 빼앗겨지는 것을 이겼습니다.

아주 어려우나 요것이 기독교 절정입니다. 최고 절정 절정인데 요것을 확실히  알아서 잡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항상 구원 이룬다고 해도 마지막에 구원이  되어지는 그 시기 가면 패전해버리고 맙니다.

세상과 싸움은 끝나버리고 다시는 침노할 수 없는 것으로 완전히 것이 주의 것과  진리의 것과 영의 것이 됐지만 세상에서는 없어져버렸습니다. 아주  없어졌습니다. 없어졌으면 그것이 진리의 것 영의 것 또 하나님의 것이 것으로  세상 싸움을 싸워 이겨 끝났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는 죽지 않는 것으로 있어지지  아니하는 것으로 부활시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활을 언제 하느냐? 그 부활은 무궁세계에서 합니다. 무궁세계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때 부활해 가지고 영원히 삽니다. 그때에 부활하지 않고  영계에 갈 수 있는 이 영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마음은 가버리고 또 이 공간에  제한을 받는 것들은 가지 못하고 승리한 주의 것으로 세상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의 것으로 세상에 머물고 있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때에 그 소유도  부활하고 몸도 부활하고 모두가 다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삼일만에 부활을 하셨는데 믿는 사람들의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모든 것이 부활합니다. 몸도 그때 부활하고 또 소유도 그때 부활하고 영광도  그때 부활하고 권위도 그때 부활하고 다만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세계도 갈 수 있는 마음의 기능 이것은 그때에 그 영과 함께 하늘나라에 가서  있다가 재림할 때에 같이 옵니다.

그러면 지금 이제 말한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십자가로 없어지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리는 것 진리의 것은 썩는데 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썩는 데 이르지 않습니다. 세상이 없어지기까지 해도 하나님께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붙은 것은 진리에 붙은 것은 그것은 죽지를 못합니다. 죽이지를  못합니다. 죽지 않습니다. 그것이 죽으면 하나님이 죽습니다. 진리가 죽습니다.

죽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이고 없어짐으로 없어짐을 이기는 것이고 또  끝남으로 끝나는 것을 이겨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이것으로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한 가지 좀 더 어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하나님과 진리와  중생된 영에게 속하여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하니까 세상은 그것을 떨어지게  하려고 꾀우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협박도 하고 고문도 하고 별별 일을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진리에게 속하고 거기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에  어디까지 고문이 오느냐? 그러면 죽이는 거 없애는 것 외에는 세상은 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거 이상은 더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최고도로 할  때에 자기는 세상에서 없어져도 또 자기는 죽어도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벌써  각오를 가지고 사선을 넘었습니다.

사선을 넘어서 벌써 죽을 각오을 가지고 없어질 각오를 가지고 죽어지고  없어져도 하나님과 진리에서 떨어지지 않겠다 하는 요것 벌써 작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작정이 됐으면 그것이 없어질 때가 됐으면 그것을 그들이 없앨 수  있습니다. 없어질 때가 됐으면 세상이 그것을 없앨 수 있습니다. 세상이 없애는  것은 없앨 때가 되었으면 없어져도 없어질 때가 되기 전에는 없애지 못하는  것입니다.

없어질 때가 되었으면 없앨 수 있어도 없어질 때가 되지 못한 것은 괴롭히기만  하고 흔들기만 하고 침노만 하기만 하지 없어지지 없어지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 예를 든다면 그 사람이 아직까지 일 년을 더 살 수 있는 생명이라면 그  생명을 지금은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와 영감에게 소속했다고 아주 죽을  각오하고 이제는 그 사선을 넘어 이렇게 붙어 있어도 죽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벌써 사선 넘어 죽기를 각오하고 죽기를 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안  하려고 애를 쓰니까 세상이 죽이고 없애는 그 이상 더 시험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죽이는 거 이상은 더 못하고 없이하는 것 이상은 더 못하는 것인데  없어지고 죽어도 하나님과 진리에게 속해 가지고 떨어지지 않으니까 세상은  그것을 더 시험할 권리가 없습니다. 남아 있기는 있는데 시험할 권리가 없었다는  이것이 제일 어렸습니다. 남아 있기는 있는데 시험할 권리가 없어집니다. 왜?  죽어도 하나님을 따르는 그 사람이 아직 죽을 기한이 남아 있으니 죽이려고 해도  죽지를 않습니다. 죽이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기한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기한이 되지 않은 사람이면 협박에 넘어가야 될 것인데 벌써 죽을 각오를  하고 없어질 각오를 하고 죽는 것을 소원하고 죽어도 없어져도 여기에서  떨어지지를 아니하려고 떨어지지를 아니하려고 하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괴롭히기만 했지 그걸 죽일 수는 없다 말이오.

이러면 그 기한이 지나갑니다. 열흘 동안 시험을 받는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대해서 만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열흘이라는 10은 인간 만수를 말하는 것인데  시험마다 그 시험에 그릇이 있습니다. 그 시험의 그릇 양이 있어서 그것이  관영하여 그릇이 차면 끝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죽을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시험의 양은 끝났고 죽지  않았습니다. 그기에 대한 시험의 그릇은 차고 마귀가 그 이상은 시험할 수가  없으니 그 사람에게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도 더 이상은 시험할 권리가  없어요.

왜 시험을 못합니까? 죽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으니 세상은 더할 수 없는  것이고 주님과 진리의 것이 되어져 있으니 하나님과 진리를 인해서 죽었고  하나님과 진리에게 쓰여지고 하나님과 진리의 것이 되고 하나님과 진리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진리에 속한 것으로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주관에 있어서는 벌써 생명을 내놓고 목숨을 내놨기 때문에 죽은  것이요 없어진 것이라 말입니다. 죽은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 해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죽일려고 할 때 안 죽으려고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을 해야  세상 자기 것이 되어지는데 죽어도 없어져도 진리와 이 하나님께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이렇게 딱 작정을 하여 그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죽어도 진리와  하나님을 떠나지 안 할 것이 되어 버렸으니까 세상은 손을 떼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했지만 시험을 하다 보니까 기한도 지나가 버렸고 이것은 그만  살아있지만 주님의 것이요 진리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것이요 진리의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살아 남아 있으면서 주님과 진리의 것이 됐습니다. 요것이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과 진리의 것이 됐습니다. 것이 됐으면 그것이 세상을 떠난 것  아니고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으면 그것이 어찌 되느냐? 그러면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없어진 것을 이기고 남아 있는 진리와  주님의 것이 되어 있는 것 있고 또 아직까지 시험을 통과하지 아니하고 마귀가  죽일 수 있고 협박을 놓을 수 있고 또 마귀에게 시험을 받아서 이 세상 것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것이 될 수도 있고 아직까지 그 이 전투를 하지 않고 미결에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들이 있고 통과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지 못한 것들이 있고 악령을  이기지 못한 것들이 있고 이 세상과 악령과 사망을 이긴 것들이 있습니다. 요 두  가지가 우리의 세상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은 그렇지 않지만 자기의 소유에 대해서 요 사람이 백원까지는  세상 싸움을 이겼고 하나님과 진리에 속한 것이 되었으나 백원 그 양이 넘는  천원 되는 것은 아직까지 시험을 받지 못했고 세상을 이기지 못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천원까지는 이겼었는데 만원이나 일억원일 때는 시험을 받지도 않았고  또 시험을 이기고 세상을 이긴 것도 아닌 미결의 이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백원은 천원은 자기 소유로 되어 있는 돈이요 세상을 이긴 돈이요  이긴 소유입니다만 그 일억이라는 액수는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과 진리에게 속한 양이 있고 또 아직까지  세상에도 속하고 하나님과 진리에게도 속하고 양쪽에 얽혀 가지고 중간에 끼어서  양쪽에 다 연결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자기에게 있고 요 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소유나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자기  행락이나 또 자기의 애정이나 이런 것은 벌써 다 그런 싸움을 해 가지고 남아  있습니다. 세상과 악령을 이기고 하나님과 진리의 것이 되어 있는 것으로 세상에  있습니다. 그런 것은 다 이긴 것으로 세상에 있지만 아직까지 생명은 이것이 그  시험을 받지를 못하고 미결로 되어 가지고 있는 생명으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생명도 이 시험을 받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데 진리와 속해서  세상이 어떤 협박을 줘도 그 협박에 당하지 않고 상관하지 않고 완전히 그  없어질 것 죽어지는 것 이것을 각오하고 없어 죽어져도 주님과 진리에게 속해  가지고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하는 것이 되었음으로서 세상이 온갖 수단을 다  가했지만 없애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한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는 벌써 사선을 초월한 것으로서 다 남아있지만 하나님이 남겨서 남은  것입니다. 벌써 세상을 이겨서 남아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남겨 두셔서 남아있는  것이지 그것이 세상에게 속해 가지고 세상의 협박이 세상에 고문에 요동될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요동되지 아니할 것으로서 벌써 남아 있는  것이라 말이오.

생명도 그러면 없어지는 것을 이겨서 영원한 하나님의 것이 되어지는 그것을  알았고, 둘째로 요것이 좀 어려운 것인데, 없어지지 아니하고 없어질 그 시련을  다 받아 가지고 없어지는 것을 이겼다 말이오. 없어지는 걸 이겨서 하나님과  진리에 속하여 완전히 하나님과 진리에 속해서 이 세상이 없애게 하는 그 세력이  있고 고통 주는 세력이 있고 죽이는 세력 있는데 이것 가지고 아무리 해봤자  상관없이 하나님과 진리에게 속해 가지고 그런 걸 아무리 받아도 자기는 그  위협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박해에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아무리 그래봤자  상관없이 하나님과 진리에게 속해서 아야 그것이 없어져도 죽을 각오하고  하나님께 딱 속해버렸으니까 그는 세상에 할대로 다 했는데 없애지 안한 것은  하나님이 남겨두는 시간이 있어서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이긴 것으로  자기에게 남아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것으로 자기에게 남아 있는 것을 성경이 가리켜 말하기를 "고난을  받은 자는 죄에서 벗어났느니라" 베드로전서 4장 1절에 말했습니다.

어떤 세상이 어떻게 고난을 줘도 그 고난을 안 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 고난을  면하려고 하지 않고 어떤 고난을 줘도 하나님과 진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세상이 주는 고난을 더 줄래야 더 줄 수 없는 고난을 다 줘도  하나님과 진리서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그 고난을 각오하고 고난을 받아도 세상이  아무리 고난을 줘도 진리와 하나님께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으로 땅 위에 남아  있는 것은 벌써 그것은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세상을 이기고 남아 있는 것들이 있고  아직까지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고 세상과  하나님과 진리의 것 둘의 것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 버리고 세상 것도 되고 세상  버리고 하나님 것도 되는 이런 둘에 속한 것이 되어 오른 팔은 하나님 잡고  왼팔은 세상 잡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런 고난에서 승리해서 세상과는 손을 딱 떼버리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있는 자기 것이 있으니 이 두 가지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에게만 손을  잡고 세상과 손을 떼고 있는 거는 세상과 미련이 끊어졌고 세상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하나님에게만 붙들린 것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벌써 죽음의 시험에서도 어떤 박해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하고 진리에게 속한 것은 진리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움직이고 하나님의 진리의 것으로 살고 하나님과 진리에게 쓰여지고  하나님과 진리의 역사를 이루는 그것이 자기 소원입니다. 그것이 자기  소원입니다. 남아 있는 것은 그런 소원이 자기 소원입니다.

그렇다고 시험 자체를 안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세상이 와 가지고  하나님과 진리에게 속했다고 해서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그것을 박해줍니다.

박해를 줘요. 박해를 주면 뭐 박해를 받을 때에 자기에게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세상에게 침노를 당하는데 침노를 당할 때에 세상과 연결이 되어있는 것은 그  침노를 당할 때에 고통이 되어집니다. 세상이 침노할 때에 고통이 되어지고  세상에서 줄이 끊어진 그것은 세상에서 침노를 할 때 그것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고통을 주면 오히려 좋아합니다. 만일 없애려고 한다 합시다. 죽이려고  한다 합시다. 죽이려고 없애려고 하면 세상에 남아있는 그것은 세상에서 없어는  것이 제 소원입니까, 세상에 더 있는 것이 제 소원입니까? 없어지는 것이 자기  소원입니다. 없어지면 어디 가려고? 그것이 세상에서 떠나 주와 같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같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주의 것으로 쓰여지고 주의 것이 되고 주님에게 이용되고  주님에게 속하기를 원하여 세상이 그런 박해를 해도 그 박해에서 주님의 것이  되어졌고 주께 쓰여졌고 그 주님에게 속해진 것으로서 나왔는데 그러면 그것이  세상과 싸울 때는 어디 가기를 원해서 세상이 붙들어도 세상이 어떻게 해도 어디  가기를 원해서 그랬습니까?  진리 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거기 속했지만  완전히 거기 들어갔습니까? 지금 거기 속하기는 속했지만 다 들어가지 못하고  지금 여기 세상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진리에게 쓰이기 위해서 남아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그 하나님에게 완전히 들어간 것입니까? 세상이 하나님에게 다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에게 아직까지 다 쓰여지지 못하고 덜 쓰여져 있소, 다  쓰여졌소? 다 쓰여지기를 원합니까, 쓰여지지 않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에게 속하려고 하나님의 것이 되려고 하나님에게 쓰여지려고 했는데  하나님에게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이제는 끝이났습니까? 안 났습니다.

그것이 아직까지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차차차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변질되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속하려고 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세상에  물이 들어 차차차차 세상을 향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또  타락될 수 있다 말이요. 변질 될 수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속화 타락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직까지 이것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세상에게로 돌아갈 우려성, 이 세상과 손을 뗐던 것을 세상과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는 그 우려성 그런 염려성 그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위험성이 있습니까? 세상을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는 그런 염려성  그런 위험성 있는 것은 어떤 것이며, 그 위험성이 끝난 것은 어떤 것인가?  위험성이 끝난 것은 어떤 것이 끝난 것입니까? 없어진 것은 이제 끝났습니다.

이것은 위험성이 없습니다. 완전히 되어 버렸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아직까지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위험성이 있는 것이라 이것은 끝나지를 못했습니다.

(③두 가지 마음) 그러면 끝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게는 어떤 역사가 있겠습니까? 그 마음에 어떤  역사가 있습니까? 두 가지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서 다시는 세상에게 침노  받을 것이 없는 것이 되려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에게 다 쓰여진 것 하나님의  것이 완전히 되어진 것 진리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다시는 하나님이 쓸 것은  남아 있지 않고 하나님이 다 써서 끝나 버렸으니 하나님 것이 다 되었습니다.

끝나는 그 세상이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것으로 끝나는 요것을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원하는 것은 어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라  말했습니다. 빌립보 1장 23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것은 너희들에게  유익 되기 위해서 주님이 세상에서 진리가 쓰기 위해서 주님이 쓰기 위해서  세상에 두시기 때문에 내가 아직 있다고 했습니다.

소원은 어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이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직까지 세상에서  쓰시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뭐 하려고? 여기 남아  있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둬 두어서 내가 세상에  남아 있다 말했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가 어찌 되었든지 소원은 어서 주님에게 다 쓰여지면 끝났으니까  주님에게 다 쓰여지고 싶은데 십분지 일만 쓰고 십분지 구가 남았으니까  께꾸름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어찌될 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다 쓰여지기를  원한다 말이오.

이러니까 다 쓰여지기를 원하는 소원이 하나 있고, 하나는 그에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 후에 버림이 될까 두려워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여기에 지금 전력한다고 했습니다. 왜? 이것은 지금 하나님과  진리와 영이 쓰기로 되어 있지만 실력은 있고 그것에 쓰여지기로 되어는 있지만  이것이 망령을 부려서 다시 세상과 세상에게 정을 붙이고 그 다시 옛날풀이를  다시 속화돼 가지고 재미를 붙여 가지고 그것에 것이 되어서 그것에게 복종하는  그것과 손을 잡는 것이 될까 해서 이것이 염려입니다.

그렇게 될까 해서 날마다 내가 싸우는 것은 이놈이 지금 세상과 손잡을까 싶어서  이놈 손잡지 못하도록 하는 이놈 손잡지 못하도록 하는 이거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싸우는 것이 허공을 치는 거와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싸움이 있느냐? 싸움은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켜서 이것이 다시 세상에게 또  되돌아 가지고 세상에게 지금 쓰여지고 세상과 미련 정을 붙일까 해서 그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두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 마음은 어서 어서 다 쓰여져 세상  끝마치고 주님과 함께 있는 이것이 속으로 소원이고, 하나 외부적으로 지금  애쓰는 것은 이것이 다시 세상과 손을 잡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바울은 이 두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에게 다 되어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속해 버리면 되는데 이 세상과 이 두 가지 사이에 지금 아직까지 남은  부분이 있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어째 쓰여지기를 원하는  요것이 되어서 성공이 돼야 되겠고 하나는 세상에 다시 손을 잡지 않도록 이렇게  단속을 해야 되겠고 이러니까 요 두 사이에 끼여서 고민을 다 하겠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것을 모르면 기독자는 다 패전합니다. 요것이 십자가에 도입니다.

십자가에 도, 우리는 요 두 가지로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아  있으나 속량을 받아서 십자가로 벌써 고난을 이기고 통과한 것은 박해가 올 때에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되겠습니다. 기쁨 하나뿐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되고싶은 기쁨이 있는 동시에 고통이 하나 있습니다. 패전할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그에게 미결이 있습니다. 이제 씨름을 해 가지고 씨름이 끝나버리고 완전히  이겨서 승리를 해버리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미결에 있기 때문에 질까 겁난다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도가 기도하는 것은 세상에 있고자 하는 기도가 아니고  주님에게 쓰여지기를 원하는 이것으로서 전폭이 되어 있는 것은 어려움이 올  때에 기쁘고 즐거운데 어려움이 올 때에 이것이 세상에게 미혹 받아 다시 승리한  것이 만일 패전으로 끝날까 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 육체로  변해질까 하는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쁨만 가지지를 못하고 그 중심에 기쁨에 소원이 있는데 혹  이것이 망령을 부릴까 해서 염려해서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기도인 것입니다.

만일 혀를 잘못 놀려서 고문과 고형을 받는 때에 변할까! 마음과 몸 이것이  미혹을 받아 가지고 그때 변질될까, 시험이 될까! 절정에서 하나님의 것이  되어지는 이것은 되어 있지만 그 소원은 강한데 혹 심신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넘어질까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것이 그것이 성녀들에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기쁘고 즐거웠던 것은 다  그것이 벌써 고난을 이긴 것들입니다. 다 이긴 것들이요. 그러기에 그것이  믿어지므로 말미암아 그거 생겨진 것입니다. 그 고난을 벌써 이긴 것은 죄에서  끝이 나버렸습니다.

요 순서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짐으로 승리된 것 있고 아직까지  남아 있으면서도 세상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세상을 이긴 것 세상을 이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세상을 이긴 것으로  남아있는 그것은 어서 떠나 주에게 가는 것이 중심의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게 하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었으니 그것이 남아있는 하나님의  나라, 남아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남겨 두었기 때문에 그곳에 쓰여지는  것을 원하고 그기에 쓰여져 다 끝나는 것을 원합니다. 그라나 조심되는 것은 혹  이것이 다시 세상에 감염을 받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 같은 입장의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한 사람은 기쁨이 되고 한 사람은  고통이 되는 것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기쁨이 되는 것은 자기가 벌써 고난에서  승리해서 주에 것이 되어진 그것에게만 왔을 때에는 기쁨뿐입니다. 그러나 그  아직까지 양쪽을 머물고 있는 것이 올 때에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런 사건이 올 때에는 소원이 둘이고 또 고통이 있고 두  사람이 주인이 되어 있고 요런 정도의 것이 올 때에는 두 사람이 없고 한 사람만  가지고 있으니까 차차차차 이겨서 나가는 것인데 그 낮은 계단에서는 옛사람을  버렸고 새사람이 주장이 되어 버렸고 속량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높은  고도에서는 높은 도수에서는 주인이 둘이요. 양쪽에 관련을 가지고 있고 있기  때문에 양쪽에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 자기에게는 고통이 되어지고 시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체에 고장이 나고 잘못되어짐으로 어려움이 되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바로 되면 어려움이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어 어려움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 잘못된 것이 바로 될 기회가 바로 어려움을 당한 기회니까  어려움 당한 그 기회에 어려움을 통해서 어쨌든지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자기를 부인해서 완전히 부인하고 깨지고 죽는 것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 하면  주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다 버렸을 때에 모든 것보다 진리 하나님을 낫게 여길 때에 이것은 떨어지고  이것이 되어지는 것이니까 그것이 자기의 그 인격으로 말하면 자기 주관을  부인하는 것이요 곧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악령을 부인하라 것입니다. 악령을  부인하라는 것은 옛사람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은 주님만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케 하려는 사람이니 이 사람을 부인해라는 말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그자인데 왜 그자를 부인하겠습니까? 그자가  강하게 살아야 되지요.

부인하라는 것은 옛사람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그때에 자기 아닌 것은 버려야 됩니다. 다 버려야 내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버려야 됩니다. 죽어야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우리가 굳게 잡고 바로 깨닫고 믿어야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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