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원리

 

1980. 4. 27. 주전

 

본문: 고린도전서 3장 16절-17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거는 설교 아닙니다. 설교가 아닙니다. 나도 이런 단점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는데 다른 사람의 또 잘못은 자기가 알게 됩니다.

 지난번에 ○○○ 목사님이 이 말씀을 증거 했는데 ○○○ 목사님 설교도 참  은혜로운 설교를 했는데 거게 한 사분지 일쯤 꼬리가 끊어져 버리고 없었으면  은혜가 될 터인데 한 사분지 일쯤 길게 필요 없는 말을 해서 은혜를 많이 감소  시켰습니다.

 어제 ○○ 목사님 설교는 삼분지 일이 끊어져야 돼 아주 은혜로운 설교를  했는데 두 분이 다 은혜로운 설교를 했는데 너무 길어서 그만 그 은혜를 그만  감소시켰습니다.

 ○○○ 목사님은 사분지 일쯤 끝이 없었으면 좋을 뻔했고 ○○ 목사님 설교는  삼분지 일쯤 끝이 없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저도 설교자가 된 본인으로서는 아마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데 교인들은 그런 걸  많이 느끼고 그만 그때부터 받은 은혜가 자꾸 감소돼지고 또 그 말씀의 권위성이  자꾸 감소되어지는 그런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고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번 모두 증거를 해서 들었습니다. 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이  사람의 소경 된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사건들은 그 사건이 다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 자연의 것들은 가지고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면 잘되고 어떻게 되면 잘못돼 실패한다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요 두  가지를 가르쳐 주셨는데 사람들이 타락한 후에 심령이 어두워져서 이 자연의  계시만 가지고는,  계시라 말은 하나님이 보여줘서 알게 한다 말인데 자연의 계시만 가지고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이 되고 어떻게 하면 저주가 된다 하는 그것을 타락 후에  모르는 고로 하나님이 덧붙여서 이 문서계시 또 형식계시 이래 특별히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특별계시를 줘 가지고 이것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자연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셨고 이것만 가지고 모르게  됐을 때에 하나님이 그 특별섭리를 가지고 알려 주셨으니 특별 섭리로 알려주신  그 방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문서를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셨고 또 하나는 그런 사건들은  가지고서 알려 주셨고 두 가지로 알려 주셨는데 성경 돼 가지고 온 것은  하나님께서 그 형식, 형식을 가지고 알려주신 그것을 다시 한 번 문서로 또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된 그 모든 것은 다 특별계시 기관으로 하나님이 쓰셔  가지고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역사 적인 사실을 아는 것으로서  끝난 것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한 어떤 역사라도 '아, 그런 역사가 있었다'  그렇게만 알면 그 사람 껍데기 그 성경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그런 일이 있는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그 이치를 무슨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가 그것이 가르치고 있는 이치를 우리가 예수 믿는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그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가 그 이치를  깨달아야 하나님께서 성경에 그 사실이나 문서나 기록해 주신 하나님의 그  목적을 바로 자기가 받아서 복음을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에 있는 이런 사실 저런 사실하는 그런 것을 그전에는  번역할 때에 이적이라고 번역했는데 지금은 표적이라 그렇게 번역이 나왔습니다.

이적이라는 것은 그 사실이 되는 데에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이 와 가지고서  역사 했다 그 역사를 이루시는 그 능력을 중점적으로 우리에게 알리는 것이고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인데 이것을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기록해 주셨나 하는 기록하신 목적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하는 것으로 표적이라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 그  표적이 우리에게 더 가까운 그런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이 환자가 나면서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불행한 부분 중에는 제일  불행한 부분이 이것이 눈 어두운 것입니다. 눈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눈먼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은 후에 거게다가 침을 뱉어 가지고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니까 눈은 보여야 되는 것인데 안보이지마는 그래도 불행 중에 불행인 그  불행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래도 이 소경이 반발하지  아니하고 불평하지 안하고 소망을 가지고 참고 견뎌서 요것을 우리에게 하나  가르칩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사람되어 오셨고 또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신 이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 사랑을 자기가 확실히 믿고  또 하나님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큰 것 작은 것  전체를 주님이 혼자 주권 하시는 이 사실을 믿으면 자기는 범사에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사람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당신이  있는 것 전부를 다 버리시기까지 온갖 곤욕 어려움을 당하시기까지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이 주님의 대속의 사랑을 자기가 믿는다고 하면 이분이 나를  고의적으로 해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될 것입니다.

 이분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이러한 큰 희생으로 대속해 주신 이 하나님의  대속을 사랑의 대속을 자기가 인정을 한다고 하면 이분이 고의적으로 나를  해치지는 않는다는 것은 자기가 인정될 것입니다. 또 이분이 나에게 유익한  도모하고 나를 위하기만 하시지 나를 해하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것을 또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인정 안 하면 주님의 사랑의  대속을 안 믿는 것이지 주님의 사랑의 대속을 믿는다면 이분은 나에게 천하에  모든 게 해쳐도 이분은 나에게 해하지 안 할 것이다. 이분은 나에게 유익 되게  하시는 이것만 당신이 하시지 나를 해치지를 아니할 것이다 하는 이것이 인정이  안되면 주님의 사랑의 대속이 인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대속을 자기가 참으로 믿는다면 나를 사랑해서 몸도 아끼지 안  해 생명도 아끼지 안 해 지위도 아끼지 안 해 또 나를 사랑함으로 나 위해서는  온갖 수치 욕 모욕 별별 일을 다 당해도 개의치 안하고 나만 사랑해서 내게 유익  되면 무엇이라든지 하신 이 주님의 사랑을 자기가 인정한다면 이분이 나를  해하지 아니할 분이요 나 이분이 내게 대해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를 위해서  하시지 나를 해하지는 해해서 하시지는 아니할 것을 자기가 인정될 것입니다.

그는 필연적으로 인정이 될 것이요.

 그러면 이분이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크고 작은 것  하나도 없이 이분 혼자 주권적 의지와 주권적 능력으로 홀로 이루고 계시는 이  세 가지를 자기가 인정한다면 주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자기에게 닥치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이야 넉넉히 안심하고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 된 자가 자기에게 제일 불행스럽고 제일 아주 참 어려운 점 그  점을 더 불행스럽게 어렵게 한 그것을 여기서 표시하는 어떤 일을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의 대속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그 증거는 그 사람이 어디서든지  안심하고 참고 견디느냐 견디지 않느냐 이것이 증거 됩니다. 참고 견디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속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여게서 확실히 증거 되는  것입니다. 참고 견딤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인정하지 안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속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전지를 믿지 않든지 하나님의  전능을 믿지 않든지 하나님의 사람의 대속과 전지와 전능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든지 뭐든지 안 믿는 사람이요.

 안 믿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하나님의 이  구속의 사랑과 하나님의 그분의 그 속성이 어떤 그 속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어데서나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참고 견디는 이것이 없느냐  있느냐 참고 견디는 그 강도가 약하냐 강하냐 한 이것은 두 말할 것 없이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그분의 그 지혜와 능력과 그분의 주권 이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거기에서 많이 인정하느냐 적게 인정하느냐 절대성 있게  인정하느냐 하나의 입술만 인정하느냐 요게서 주님의 구속을 주님이 구속해도  해야돼 무지무능의 자가 나를 구속한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 희생했다면  그것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무지해서 어떤 데 꼬여 가지고 어떤 충격 받아 한  것이니까 그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어떤 그 지혜를 가지신  분이요 어떤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어떤 주권 어느 범위의 주권을 가지신 그분을  알아야 그분이 나를 대속 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과 얼마나 권위 있는 것과  얼마나 존귀한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무지무능하고 죽는 자가 나 위해서 당신 위해서 죽겠다는 그거와 안 죽을  자가 죽는 것과 가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믿는 사람들은 참고 견디는 이것이  있어야 되는데 저 먼저 이 ○○○ 목사님이 참고 견디는 이게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 참고 견디는 그것이 무슨 표시냐 참고 견디는 그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나오는 것은 주님의 대속을 자기가 연구해서 깨닫는 거기에서 나옵니다. 주님의  대속을 자기가 어느 정도 믿고 있느냐 하는 그 믿음의 양은 자기에게 좋은  형편이 닥칠 때에 표시가 아니고 자기에게 어려운 형편이 닥칠 그때에 참고  견디는 그것으로서 주님의 이 사랑의 구속을 전지전능 주권자의 구속을 전지  전능 주권자가 나를 사랑하심으로 대속 하신 이것을 인정하는 그것으로 인해서  참고 견디는 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되 억지로 참고 견디는 일도 있을 수 있겠고 참고 견디되 안심하고  참고 견디는 일도 있겠고 기뻐 못 견뎌서 참고 견디는 일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하신 주님이신 것을 자기가 믿을 때에는 이렇게 날 사랑하시는  분이 역사 하니까 의례히 내게 좋은 것이 있으리라 깨달아지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닥치는 일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고 견딜 수 있겠고 그보다도  한 걸음 나아가서 의례히 이거야 이렇지마는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주님이 이렇게 나를 대속 하신 사랑이 큰데 이 큰사랑을 내가 더 믿고 인정하고  싶으나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좀 힘들여 인정하고 힘들여 참고 힘들여  견디고 할 수 있는 이런 형편이 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내가  감사하는 그 감격하는 그 감격을 표시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그런 형편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더 좋아질 거라는 그거는 내비두고  주님의 이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 자기의 사은에 대한 그 사은할 수 있는 형편과  기회를 만났기 때문에 더 기뻐 즐거워하는 그것이 저의 구속의 사랑의 감격이  끊어지지 안하고 그 감격이 자기에게 충격 되어있는 그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참고 견디는 그런 일이 없으면 참고 견디는 거야 좋은  데야 뭐 좋을 때야 아 제가 하고 싶어하는데 뭐 참고 견딜게 뭐 있겠습니까?  자기에게 불리한 그런데 어려울 때에 참고 견디는 그것이 주를 위해서 참고  견디는 게 아니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안심하고 참고 견딜 수 있고 안심하고 참고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전지 전능의 주권자가  움직이시니까 또 내게 좋은 거 올 거라 그 말이요. 소망으로 인해서 또 기쁨으로  참고 견딜 수 있고 이 구속의 사랑을 다는 모르지마는 그 참을 알면 거기 대해서  감사의 그 감격이 있으면 그로 인해서 좋아지는 그것 다 내비두고도 주를  사랑하고 주의 그 대속의 은혜를 참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났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앞으로 좋아질 거는 물론이지만 그거 내비두고 라도 사랑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났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무엇이 뒤에 결과로 어찌  된다는 그것보다도 당신을 그 구속을 기념할 수 있는 구속을 기념할 수 있는  구속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형편을 만났기 때문에 자기는 기쁘고 즐겁게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참고 견디는 이것은 주의 구속을 믿는 그 필연적인  행위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믿는 것은 아닙니다.

 또 거게서 내나 해봤자 좋은 일 안 해 놓고 또 씻으라 하는 그것이 필요 없는  일 같다 그 말이요. 발라 놓고 또 그 먼데 가서 씻으라 이랬지마는 이의 없이  순종했습니다. 그 사람이 가서 씻으면 눈이 뜨여지리라 하는 그런 생각은 가지지  아니했습니다. 씻으라는 것도 가 씻었소. 그것이 여게 표시 됐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순종도 그 타산적인 장사꾼 순종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해를 타산해서  이리되면 뭐 유익이 되리라 하는 그런 타산적 영리적 그 상업적인 이런 성질의  순종, 종의 순종이 있습니다. 종의 순종은 값에 팔려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저  순종함으로 죽는 날까지 자기는 순종함으로 땅위에 존재하는 것이고 또  순종시키는 그 일만 하면은 살려 두고 일을 시키면 그것은 좋은데 자기 생명을  주인이 이용하려고 네가 죽으라 해도 죽어야 되는 그것이 순종의 종의 그  본성입니다. 그 지방은 그때 종이라고 하는 것은 한정 있는 그 순종이 아니고  그만 자기의 움직임과 자기의 살아있는 생명과 자기 몸과 전부는 주인의 한  소유물 같이 그렇게 쓰는 그런 순종이었답니다. 그 지방에는 그 순종을 그  순종의 그 성질에 종이라 우리는 주님의 구속으로 값 주고 산 주의 피로 값 주고  산 주의 피에 팔린 주의 종입니다.

 종을 세 가지로 말한다는데 하나는 생명 없는 종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쓰는  도구 이거야 뭐 불집게는 항상 불에 꾸어도 그대로 쓰여지지 않습니까? 주인  쓰는 대로 쓰여지는 것 그거나 또 소 짐승 이런 거는 부리다가 나중에 먹는 것  그거나 이 돈주고 값 주고 산 종이나 그 세 가지 성격이 꼭 같은 것인데 하나는  그 성격이 같고 책임이 같고 이용에 의무와 직책이 같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순종을 하되 요렇게 순종을 하면 뭐 좋은 게 올 거다 이래  순종하면 다니엘처럼 죽음 가운데에 살아날 것이다. 뭐 유익할거다 하는 그것은  그것도 있지마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모든 것 보니 유익 된 그것도  있겠지마는 그것보다도 이제 그것은 당신이 주고 안주는 거는 상관 안하고  당신이 그 뭐 주실 라면 주시고 하는 것이고 우리가 지금 순종하는 것은 피에  팔렸기 때문에 피에 팔렸기 때문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대신  죽었다가 살아나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피에 팔린 그 값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다 바쳐서 나를 나에게 큰 구원 줬기 때문에 이  구원을 내가 했으니까 이것은 당신의 것이니까 당신이야 참 이렇게 쓰시든지  저렇게 쓰시든지 어떻게 쓰시든지 나를 당신 뜻대로 쓰실 것이니까 난 당신  뜻대로 움직이고 뜻대로 소모되고 뜻대로 이용되고 뜻대로 없어질 것들이라  그거요. 이 순종을 여게 가르칩니다.

 우리 택한 자들은 이렇게 순종하면 뭐가 좋다는 그것을 성경에 많이  말해놨지마는 실은 그것은 믿게 만들라는 것이요 주의 구속을 인정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만드는 것이지 주님의 구속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이렇게 순종함으로  세상에 있는 동안에 가장 불리한 일이 되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순종해야 됩니다.

왜? 당신의 모든 것 다해서 나에게 지극히 큰 구원 줬기 때문에 이 구원 줬기  때문에 내 전부는 이 구원 주신 당신에게 이 대가로 내가 내놔야 된다 이거요.

 이러니까 실은 이렇게 순종하면 뒤에 뭐 좋아질 것이다 하는 그것은 이 구속을  알려주기 위해서 어릴 때에 하는 말이고 이것은 아직까지 이 구속이 되지 못한  자에게 구속의 것이 되게 하려고 깨닫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주의 구속의 것이  된 자는 이렇게 순종함으로 뭐 어찌 될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서 당신이 쓰시는  데에서 다 쓰여지고 말 것만 이게 우리 것들입니다.

 당신이 쓰시는 데에 이래 쓰시든지 저래 쓰시든지 뭐 우리를 뭐 죽이는 것으로  쓰시든지 고문과 고행으로 쓰시든지 어쨌든지 자기는 주의 이 대속의 값에  팔려진 그 대속이 내것 됐기 때문에 나는 이제 당신이 뜻대로 당신이 죽여  필요하면 죽이시고 살려 필요하면 살리시고 권세를 줘 필요하면 권세를 주시고  어쨌든지 나는 당신의 구속을 받는 자로서 당신에게 쓰여지는 자라 당신의  것으로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소원대로 당신에게 쓰여질 자로 쓰여지는  것으로서 다 되는 것입니다. 만족입니다. 요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요 두 가지를 할 것 우리는 장사꾼 순종하면 안됩니다. 영리적인 이해 타산적인  순종하면 안됩니다. 이미 값에 팔린 자로 순종해야 됩니다. 값에 팔린 자로  순종해야 돼요. 이 두 가지가 돼야 주의 구속을 믿는 것이요 또 구속받은 자로  처세한 것이요 처음에 참고 견디는 것이 구속을 인정하는 자요 둘째 것이 구속을  받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있어야 기독자에게 무엇이 이루어지지 이것  없으면 되겠습니까?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지면 이제 그 다음에 큰 것 세 가지가 됐는데 큰 것 중에  하나는 이 사람이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뜨여졌소 이제는 그 사람의 모든  견해가 주와 같아요 그때에 바리새 교인이나 서기관이나 제사장이나 그런  사람들이 다 신령한 지혜 얻은 사람되어 다 최고의 권위 가진 사람들인데 그들의  견해와 정반대 되는 이 견해를 항상 했습니다.

 그 다음 내리 보면 말마디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들의 견해와  반대됐습니다. 모든 사람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의 견해는 다 이러했다면 이  사람의 견해는 저리 했소 정반대의 견해가 됐소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꿰뚫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꿰뚫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초월한 이것보다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의 지혜를 역항한 그것을 초월한 것도 어렵지마는 역항한 것은  더 어렵습니다. 이 역항 적이요 초월적인 이런 견해를 할 만한 눈이  밝아졌습니다. 온 세대를 세대가 다 온 세계가 다 잘못 견해 했을 때에는 자기  혼자 거게 역항 적이라도 혼자라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바로 알 수 있는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견해보다 뛰어난 견해 뛰어난 견해요 이거는 그 시대에 모든  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견해보다 뛰어난 그 깨달음을 가졌고 전  이스라엘에 거게 합류하지 안하고 전 이스라엘에 반대되는 그 옳은 견해를  자기는 잡았다 그 말이요.

 이렇게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눈이 밝아집니다. 깨달음이  밝아집니다. 이게 없으면 깨달음이 밝아지지 않습니다. 암만 배워봤자  헛일입니다. 깨달음이 밝아지는 것은 꼭 요 두 가지를 통해서 밝아진다는 요걸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 두 가지를 통해서 구속을 자기가 깨달음으로  참고 견딥니다.

 그러니까 억지로 참고 견딥니다. 억지로 참고 견디는 그거는 대속을 억지로  인정하는 것이지 인정이 안 되는 것이지 대속이 인정되면 이거는 필연적으로  참고 견디게 되고 대속에 대해서 감격하면 이 참고 견디는 것은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기다리기를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을 인정한다면 남은 자기는  당신의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순종이 뭐 당신 뜻대로 쓰기야 다 그게 필연한 일이요 합리적  예배입니다. 그 법적이요 합법적이요 당신 나 위해서 대속 했기 때문에 당신  전부를 가지고서 나에게 이 큰 구원 주었는데 이 구원 내가 받으니까 나는  당신의 것이 돼야 될 것 아니겠소? 아 남의 상점에 물건을 가져 왔으면 물건 만  원짜리 하나 가져 왔으면 내게 있는 호주머니 만 원을 내줘야 되는 것을 그 합리  아니요 법이 아니요?

 그 로마인서 12장에는 합법적 예배라 합리적 예배라 하는 뜻입니다. 이리되면  요게 있어야 우리 심령이 밝아져서 아 참 세상을 역류할 수 있는 세상이 되나  안되나 세상과 반대말만 좋은 게 아니라 세상이 바로 갈 때는 나도 그리 가고  세상이 거꾸로 가면 나는 옳고 세상이 옳게 가든지 바로 가든지 따라가지 안하고  참고 견딜 수 있는 요 대속을 믿는 것 주의 것이 된 것 이러니까 이것이  완전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모든 견해가 주와 하나라 이게 돼야 자기가 바로 깨닫는 것이  나오지 이 순서를 견디지 안하고 책상 위에서 암만 쪼아 보십시오 되는가  안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바로 깨달은 것 그 깨달으면 행한다는 거는 문제가  없습니다. 깨달으면 거의 다요.

 이러기 때문에 "너에게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지혜 구하면" 이 말은 무슨 말이냐 깨달으면 다됐다 그 말이요. 바로  깨달았으면 다 됐소. 아, 깨달으면 그 참가만 하면 되는데 또 바로 깨달으면  안심하고 기쁘고 즐겁게 가서 살 수 있는 건데 이래야 참고 견디는 이것이  대속을 믿는 것이고 또 어디서든지 어떤 순종을 하는 이것이 대속을 받은 자의  자기로서 처세하는 것이라 말이요. 이래야 바로 깨닫는 이것이 생겨집니다. 이거  없이는 안 생겨집니다. 이거 없이 자기 하는 거는 다 도적이요 강도입니다.

 대속을 믿지 안하고 주님의 지혜나 자기가 가 가지고서 해서 어떻게 바른 것  찾아간다 하는 그것은 제가 제 꾀에 속는 것이고 이거 도적이요 강도인데 주님이  도적을 맞습니까? 대속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이것이 인정치 않는 자에게  어떻게 그걸 제가 잡고 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이러니까 이 두 가지를 인정하고 순종하고 보니까 이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주님 편 됐습니다. 주님 편 됐소 벗이고 뭐 비판합니까? 그만 주님에게 싫어하는  소리면 그만 제게 싫어하는 것보다 더 싫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 옹호하면 그만  좋은 것보다 더 좋습니다. 그만 주님편이 돼 버려요. 이러므로 주님 편 됩니다.

아 이래 가지고서 자기 눈이 밝아지고 나니까 눈 밝은 그것 때문에 주님 편  됐소. 참고 견딤을 인해서 순종하게 됐어 순종함으로 눈 밝았어 눈 밝고 보니까  주님편이 됐어 떡 바로 깨닫고 보니까 주님편이 안될 수 없지요. 주님밖에는  살리는 이가 없는데 옳은 이가 없는데 바른 길 없는데 의지하고 맡길 분이  없는데 이 필연 다 필연 행동이라 필연적인 행동이라 그 주님편이 됐어.

 이거 소속이라는 것 편이라는 것 무섭습니다. 이것이 참 옳은 편이 돼 놓으면  그만 지혜가 없어도 옳은 편이 되면은 그 옳은 그의 전부가 다 자기 것이 돼  버리고 마요. 자기는 깨닫지 못했지마는 옳은 편이 되니까 그 사람 하는 데로  동하고 그 사람 편이 되고 그 사람 하는 대로 움직이고 그 사람 편에 서서 일할  것이고 그 사람 반대 자기 반대가 되고 이러니까 이거는 모르고 해 내도 그이  옳은 분의 편만 되면 돼 버린다 이거요. 이거 뭐 하나님편이 돼 놓으면 이거는  모르고도 그만 복된 일 하는 거라. 하나님편이 된다는 것. 이러면 하나님이 내편  되시지요 아주 이거 믿는 데에 큰 걸 다 말해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기 전보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모든 면이 안  좋아졌습니까? 가치도 높아졌고 대우도 높아졌고 대우도 높아졌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높아졌고 모든 게 다 이러면 모든 것이 점점 높아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것이 필연이라는 순종이라는 것이 필연이라는 것  참고 견디는 이 필연성 믿으면 참고 견디게 됩니다. 대속을 인정하면 대속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참고 견디는 일 기쁨으로 할 수 있고 참고 견디는 일을  기쁨으로 하는 자는 어디서든지 순종 못할 것도 순종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자체의 심령은 변화되어서 밝아지게 되고 모든 것을 바로 깨닫게 되고 바로  깨달으면 자기는 주님 편 외에 다른 편 될 게 없어 주님편이라 주님은 자기편  되고 말아 이러니까 점점 좋아지고 점점 행복 된 것입니다.

 이러기에 기독교의 이 구원은 전부가 다 필연성이요 필연적의 것이요 필연성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꾀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꾀 가지고 안 돼 꼭  돌담을 쌓는 것 같아요. 돌담을 쌓는 것 아무리 부족해도 돌 한 개 놓고 그 위에  또 한 개 놓고 이거야 되지마는 아무리 제가 능하다 할지라도 자 돌 한 개 안  놓고 그 위에 돌 놓을 자가 있습니까? 못 놓습니다. 천하에 기술자도 못 놓소.

그만 그 달든지 무슨 수가 있지 아 돌 하나 놓고 그 위에 놓는 그거야 돌 위에  놓는 거야 누가 못하겠소.

 이렇지마는 밑에 것 안 놓고 공중에 동 한 개 놓는 이거는 천하인간이 다해도  안 돼. 그거는 당그라 매든지 뭘 갖다가 밑에 들어 그 중량을 들어줘야 되지 그  당그라 매든지 그리 안 하면 안 돼. 이것 모양으로 기독자의 이 구원이라는 것은  단계적입니다. 단계적이요 순서적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하고 못하면 또 그  다음에 다음 번에 올라가고 이래서 초월적인 구원이지 이것을 뚝 떼어 가지고  초절적으로 뭐 한다는 그것은 공연히 자기 속고 다른 사람 속이는 것이지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구원의 시작은 주님의 대속을 의심 없이 인정하는 대속을  연구하는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라 그 말은 대속을 연구함으로 거게 소산이  나오는 그 힘을 가르쳐서 이제 피와 살을 양식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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