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바꾸라

 

1984. 10. 25. 새벽

 

본문 : 마태복음 3장 4절-12절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 세례 요한은 유력한 선지자입니다. 구약 교회의 마지막 선지요 신약 교회의  첫째의 위를 가진 선지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 사이에 역사한  선지자입니다.

 구약 교회가 오래 동안 선지자가 없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늘 묵은 교훈만 듣고 지냈기 때문에 하나의 이방인들 주문 읽는 거,  불교에서 주문을 읽고 또 이런 저런 모든 미신들과 이종교에서 주문을 읽는 그런  거와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그랬으나  자기네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들에게 해당된 에언의 말씀이나 경고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강퍅함을 인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제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고로 그듣은 참 하나님을 공경하나 구원은  이루지 못하는 그런 일로 계속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돌 위에.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첩놓이지 안하고 다 망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무화과  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죽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졸지에 참 역사에  드문 패망을 당할 것을 말씀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랬는데, 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세우셔 가지고, 그때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경제에 심히 곤궁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보내신 선지자인데. 이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궁하게 지내서 참 밤낮 물질에 대한 포원이 있고 소원이 있고 늘 마음에  갈급이 있는 그 사람들에게 이는 메뚜기와 석청, 메뚜기는 거기에 있는  곤충들이요 또 석청은 거기에 있는 그 잡벌들이 새끼 치면서 돌 밑에다가 모아  놓은 내나 그런 모든 것들이 석청입니다. 석청은 이거 꿀이니까 좋은 꿀로  생각하지마는 벌레들이 저거 먹을라고 해 놓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이 꿀은 아주  좋지 못하고 참 잡꿀들입니다. 그런 것을 먹고 있으면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그들이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갈급을 가지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아예 상대하지 안하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초월해서,  그들이 원하고 갈급한 것을 이 세례 요한이는 하나도 그런 것은 갈급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오는 것도 다 물리치고 그렇게 역행의 걸음을 걸었습니다.

그라면서 회개하라는 전도를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선지자 위치에서 선지자 노릇을 하는  우리들이요, 제사장 노릇을 하는 우리들이요. 또 왕의 노릇을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 마음으로 자기가 못났다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저 주일학교 학생이나 중간반이나  장년반이나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들이요 또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첫째로 요 세례 요한에게서 본받을 것이 뭐인가? 세례  요한은 그때에 온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것들을 완전히 던져 버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갈망하고 있는 그까짓 것을 아예 염두에 생각지도 안하고 그런  것을 참 던져 버리는 그런 정신을 가지고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그저 먹고 입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담당하시고 주실 것이니까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안하고, 의식주에 온 민족들이  거기에 끌려 가지고 거기에 매여서 날뛰는 그것을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노여워하시는 줄 알고 세례 요한은 그것을 미워하고 완전히 그것에게서 돌아서서  정반대의 생활을 했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가 그들이 갈망하는 것을 세례 요한도 갈망하고 그들이 모든  그런 것들이 다 부족해서 마음에 부족성을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갈급을 가지고  이런 사람으로 하나님의 도를 전했더라면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  요한에게 올리가 없습니다. '저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로구나'해서 올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소망이 다르고 갈망이 다른, 그들이 갈망하는 것을 다,  그까짓 것을 다 상대하지 안 하고 그거야 있든지 없든지 많든지 적든지 이렇게  완전히 거기에서 돌아선 생활을 하는 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 끌려와서  회개의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 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 전부 노리는 것이 '어떻게 하면 이 의식주를 좀  잘할까?' 의식주에 매여 가지고서 있는 것이 오늘의 안 믿는 사람의 전부요. 또  믿는 사람들도 대개는 다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상의 빛으로  보여 줄 것이 무엇인가? 제일 보여 줄 것은 의식주입니다.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입니다. 의식주에 대해서 그들에게 보일 빛이 우리에게 제일 밝은 빛이요  또 그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그런 빛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에 말씀 하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거는 다 이방인들이 하는 생활이지 너희들이 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신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다  증인들입니다.

 사도행전 1장 6절 이하에 보면은 너희들이 이 세상 소망을 가지고 '우리  이스라엘 나라도 회복해 가지고 어떻게 하면 좀 우리가 잘 살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고 따라다니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 가지고서 이제는 승천하실라고  하니까. 이제는 죽은 가운데 살아난 것도 봤고 확실히 예수님이,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달았기 때문에. 아마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하려고 지금 이분이 오신 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마지막날로 묻기를. 자기네들은 아주 그런 확실한 줄 알고  묻기를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독립되는 것이 지금입니까' 이렇게  말할 때에 주님이 거기에서 똑똑히 밝혀 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권한으로  이렇게 하시든지 저렇게 하시든지 할 것이요 너희들은 그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 얻는, 권능이 있어 성령의 능력의 사람이  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너희들이 이 세상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증인들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지난밤에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아주 좋은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예수님은 신인 양성 일위이신 그 인성을 가졌기 때문에 양성 일위로  아는 사람은 알았지마는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의 사람이라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다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런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떻게해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을 하느냐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지 믿지  못하거든 내가 하는 일을 인해서 믿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예수님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언행 심사는 다 아버지가 하시는 그 언행  심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언행 심사라고  이렇게 인정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내 언행 심사는 내 언행 심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언행 심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면,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무형의, 형체가 없는 존재이니까  하나님의 형체는 보지 안했지마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셔서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가  죽은 걸 살리는 살리는 부활의 능력도 가졌고 적은 것을 많게 하는 능력도  가졌고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능력도 가졌고 모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그런  능력도 다 가지셨다. 이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래 가지셨다. 이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우리도해서 세상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그 자체를 우리가  입으로 증거해야 하고, 또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능력도 우리가 세상에게 보여  줘야 되고,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지혜, 예수님이 뭣 보고 살았느냐? 미래 보고  살았는데 예수님이 그 사신 것도, 예수님이 어떻게 언행 심사를 하셨는지  예수님이 언행 심사 하신 그 일을 우리도 언행 심사해서, 예수님에게 나타나신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나타나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생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산 자의 생활, 산 자의 생활 하는 것이요, 전지자의 생활하는  것이요, 전능자의 생활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하시는 그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거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성령이 임하시면 이 일을 할 수가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에 죽은 일 땅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산 일만 하셨고, 아버지 우편에 앉으실 일만 하셨고, 모든  택자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사망에서 건지는 일을 했고, 다 영생케 하는 일을  했고 이렇게 하시는 그 일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보여 줘야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은 다 의식주에 끌려서 의식주만 바라보고 '의식주만 있으면 우리는  산다.' 의식주가 그들에게 사는 원동력이요 그들의 소망이요, 그들이 가치가  있다 높다 크다 작다 하는 그 평가가 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것을 표준해  가지고서 이렇게 평가했기 때문에 그런 거는 우리 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이렇게 광야에서 거처했고 또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것이 우리 할 일인가? 그게  아니고. 이 세례 요한은 의식주에 대한 것을 소망하지 안했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것을 소망하지 안했고 또 의식주에 대해서 자기가 노력하지도 안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하시는 그 일만 나타내는 것이 그것이 세례 요한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불신자들도 다 이 세상에 의식주 위주로 살고 있고  신자들도 의식주 위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우리가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우리가 주님의 증인 생활을 하는 데에는 첫째가 이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렇게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저거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아주 참 아주 딴사람, 저거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보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라고 모두 다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시오' 이렇게 전도를 해도 그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것은 세례 요한의 그 걸음을 걷지 않기 때문에 듣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걷는 걸음은 무슨 걸음인가? 그는 의식주에 대해서 관심이나  책임이나 노력이나 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면 뭣 했는가? 다만 그는 자기  속에서 주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거듭나게 한 이 생활을 거기에 움직여서  그 힘으로, 또 그 사상으로, 그 소망으로, 그 욕망으로, 그 생활 나타내는 거,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나 그리스도나 다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를 고대로 받아서 이 세상에게 보여 주고 나타내는 고것만이  우리의 할 일이기 때문에 자기는,  다시 말을, 근본을 말하면, 껍데기 결말을 말한다고 하면은 우리는 믿음 지키는  일, 믿음 지키는 일이라니?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만 하는 일고 일만 우리가  합니다. 밥 먹는 일 하는 것도 아니요. 옷을 마련하는 일 하는 것도 아니요,  세상에서 학비 마련하는 그런 일도 아니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그것들을  소망으로 삼고 상대해서 그것들을 마련하는 일이 우리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줘야되지 이것을 보여 주지 안하면 항상 그는 죽은 일이요 땅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알곡이 아니요 쭉정이요. 그것은 돌아서지 안하고  옛사람으로 사는 그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되는데, 요거 좀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식주. 의식주 일을 하지 안하다니? 모든 사람들이 말로는  그래도 다 의식주에 끌려 가지고 살고 있는데, 의식주에 끌려 가지고 사는데.

의식주에, 의식주에 대한 일은 우리 할 일이 아니라, 또 성경에 말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이런 일은 천부께서  다 너희에게 하실 것이요, 이것을 위주로 이것을 상대로 이것 목적으로 사는  것은 다 이방인, 안 믿는 사람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할 일이지 너거 할  일은 아니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똑똑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는 일은 근본으로 말하면,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욕심대로 하면 그게 바로 옛사람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소원대로  하면 그게 옛사람이요, 주님의 소원, 성령님의 생각. 또 진리대로의 하는 것  그것이 새사람의 하는 일인. 새사람의 생명이요 새사람의 하는 일인데. 제일  껍데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요, 껍데기 속에 고 속에 알맹이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고 속에 성령이 감동시켜서 하나님  말씀대로 하도록 고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하려고 내가 했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하려고 하는 고것을 바로 찾아 가지고 잘 하려고 애를 쓰면은  고 속에 성령님 이 그 안에 계셔 가지고서, 하나님이 말씀대로 하는데도  탈선되고 이탈될 것이 많이 있는데 고것을 성령님이 거기에 딱 들어맞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맞게 해 주시면 고대로, 성령님이 맞게 해 주시는 그대로  하면 되는데, 그 성령님이 맞도록 해 주시는 그 일은 무슨 일이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안에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사죄 안에서 살라고. 칭의 안에서 살라고, 하나님과 화친 안에서 살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이나 신구약 성경 말씀이 말씀 하신 그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나  그것이 뭐이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주님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가 우리  생명이 돼 가지고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의 그 줄기, 역사에게  연결이 돼 가지고서 그 역사대로 움직이는 그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속에 내재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생명이신 이 세  가지, 주님의 공로와 대속의 공로와 성령과 진리 이 셋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에 이 셋의 힘에 끌려서, 이 셋의 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  우리 생활이 돼야 됩니다.

 그러면, 소망은 세상의 의식주,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이 소망이 되고, 고  소망을 위해서 살기는 누가 사는가? 고 소망을 위해서 살기는 누가 사는가?  살기는 내가 주체가 돼 가지고, 내가 주체가 돼서 살고. 그러면, 나는 어디 피동  되는가? 나는 의식주 그것을 목적해서 내가 의식주 그걸 마련하려고 내가 살고,  의식주 마련하려고 사는 그것은 곧 욕심, 내 주관, 내 비판, 내 평가 이것이  내가 들어서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러면, 내가 들어 살고 있으면 나는 무엇에게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가? 무엇에게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러면, 제가 내나  의식주 위해서 노력하고 의식주에게 또 피동되어서 의식주로 인해서 의식주를  위해서 자기가 움직이고 있고, 그러니까 의식주는 자기를 움직이고 자기는  의식주를 움직이고 이렇게해서 둘이, 의식주는 자기를 움직이고 자기는 의식주를  움직이고. 자기는 의식주를 위해서 자기는 살고 자기는 또 의식주를 만들고 자꾸  이래 둘이 서로 바꿔가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불신자의 생활인데. 안 믿는  옛사람의 생활인데, 옛사람의 생활은 요것만이 보지마는, 그러면, 나는 의식주  위해 살고 나는 의식주로 인해서 살고. 의식주가 나를 잠을 못 자게도 하고 일도  하게 하기도 하고 쉬게도 하고 의식주가 들어서 나를 먹고 마시게도 하고,  '아무래도 내가 의식주의 일을 할라면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고 잠을 자야  되겠다.' 그러면 의식주에게 내가 피동되고 나는 또 의식주를 마련하고. 그러면  의식주는 나로 인해서 생기고 나는 또 의식주로 인해서 움직이고 내 생활은  의식주로 인해서 생겨지고, 의식주는 나를 만들어 내고 나는 의식주 만들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안 믿는 사람들의, 옛날 사람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자기와 세상 이 둘이 붙어 가지고서 자기는 세상을 인해서 움직이고 또  세상은 자기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보존되고 이러니까, 이렇게 하고 있는 이것이  불신자들이 알고 있는 생활이요, 그러면, 그것을 그 둘이 그와 같이 한다면 그  둘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 둘은, 그 움직임의 둘은 악령에서 나왔습니다.

악령에서 나왔고 악성하고 합해 가지고서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인데, 악령에서  나와 가지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거기에서 돌아서서 살아야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뭣을  위해서 사느냐? 첫째 의식주 그것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우리가,  그러면, 우리 소망이나 욕망이 아주 바꿔집니다. 의식주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금 어디다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살아야 될 건가?  '너희들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인하여 살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인하여 살면 음식도 먹지  안하고 그와 같이 산다는 말인가? 그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말하고, 껍데기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내나 성경 말씀이요  영감입니다.

 성경 말씀과 영감대로 살면 의식주라는 그런 것은 다 필요한 대로 되어집니다.

그것은 아주 우리가 굶어야 될 때는 굶는 일이 될 것이요, 먹어야 될 때는 먹는  일이 될 것이요, 아주 고기 먹어야 될 때는 고기 먹는 일이 될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서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하시니까 그거는 우리는 하지  말라 이랬습니다. 의식주의 일, 의식주의 일 그런 것은 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지 말라 했는데 또 다른 성경에는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아라 이랬으니까 이거는 뭐 뒤죽박죽으로 자꾸 거짓말로 해서 무슨  모순된 말 하니까 무슨 말을 들어야 될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쉽겠는데,  우리는 의식주를 위한 생활은 완전히 포기해야 됩니다. 의식주를 위한 생활. 뭐  의식주를 위한 생활, 또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위한 생활은 완전히 포기해  버려야 됩니다. 완전히 포기해 버리고 그것을 안해야 돼. 안해야 되는 건데  그것을 우리가 하면은 내나 옛사람으로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의식주의 생활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우리는 무슨 생활을 할 건가?  우리가 목적하는 거는 의식주의 그 수입을 우리의 소망을 삼고 그 수입하기  위해서 살던 우리가 그것은 포기해 버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 노릇,  예수님을 나타내는 그 생활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은 뭐 예수님을 나타내는 거  예수님을 많이 나타내느냐 적게 나타내느냐 잘 나타나느냐 잘 못 나타내느냐  하는 그것 문제가 우리 문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증인 생활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증인  생활 할라 하면은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예수님의 증인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  세상에 있는 과학을 공부해 가지고 과학의 힘으로 해야 되는가, 또 인류가  대대로 내려오는 그 모든 유전들, 유전들을 가지고서 해야 되는가? 그러면, 어떤  이 나라에나 사회에나 부모에나 또 이런 자기 직장이나 이런데 따라서 살아야 될  것인가?  그러면,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증거인데.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인데,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소망이요, 예수님을 나타내는 이 일을 하면은,  그러면 이 일을 하는 일을 세상에서 하다가 하늘나라가 가지고는 무슨 일 할  건가? 하늘나라에 가서는 그러면 이 일 하다가 무슨 일 하는가? 하늘나라 가도  예수님 나타내는 그 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 노릇 합니다. 예수님의 증거  생활, 예수님을 나타내는 그 생활하는 것이 지금도 그 일이오 부활 후도 그  일이요 하늘나라도 그 일이요 영원히 그 일입니다.

 그러면, 그 일은 무슨 일인가? 그 일은 영원 자존자가 없는 가운데 모든 걸  창조하신 그분인데, 자존자가 하시는 그 일을, 자존자가 하시는 그 일이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인성을 통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무슨 일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인성은 예수님의 신성이 하는 그 일을 예수님의 인성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성이 나타내는 신성에서 예수님의  인성으로 건너온 그 건너온 것이 예수님의 인성에서 우리에게 건너와 가지고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 만물에게 건너가는 이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이, 예수님의 신성이 하시는 그 일을,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과 일위가 돼 가지고 하나도 틀림 없이 고대로 나타내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활 전에 그래 했고 부활 후는 어떤가? 부활  후도 꼭 같은 일 합니다. 부활 후도 다른 일 하지 안하고서 부활 후도 내나 그  일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일 하고 계시는 것은 뭐 하려고 그 일 하고 계시나? 그 일 하고  계시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또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 하는 자를  순종하게 하셨고, 또 하나님과 화친되지 못한 것을 화친을 우리에게 시켰습니다.

사죄와 칭의 화친을 시켰는데, 제가 어제인가 저 아래인가 언제 한번 그 말을 또  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죄와 칭의와 화친으로 우리를 대속해서 해방을 시켜서  자유하게 했는데, 그러면, 죄에서 해방시키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의인으로, 대신 예수님이 행하셔 가지고서 의인으로 우리를  세웠고. 하나님과 화친을 시켜서 화친된 사람으로 우리를 세워 주셨으니까  이거는 예수님이 하셔 가지고, 예수님이 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이 공로를 입혀  줬습니다.

 입혀 줬으면, 이 공로를 입혀 주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의 공로만 가지고 우리가  할 것인가? 예수님의 공로를 가지고 우리에게 입힌 것은 우리가 잘못 저질러서  거리끼낌 있는 그 모든 거리낌을 다 영원히 해결해 놓은 것. 거리낌을 완전히 다  해결해 놓은 것이오. 거리낌을 해결해 놓은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일로 말하면  근본 구원입니다. 근본을 구원하시고. 해결하는 일 그 일만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죄 없는 자로 살 수 있는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의롭게 살 수 있는 그것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잘못된 걸 해결해 줄 뿐 아니라 앞으로 영원 무궁토록 우리는  무죄자로 살 수 있고 의로운 자로 살 수 있고 하나님과 결합되어서 연결된 자로  살 수 있도록 그 모든 자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자원을 주신 것이 무엇이 그 자원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그 주신 것은 그  자원 주신 것은 예수님의 공로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의 능력과 하나님이신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그 능력으로 우리를 살린 것이 그로 인해서 우리가 새생명  받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 생명으로 사는 그것이 곧 뭐이냐? 하나님이  하시는 그 모든 것을 나타내는, 그대로 사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 생활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근본 재료가 되고 근본 능력이. 원동력이 되는 것은 이 셋이  우리의 힘이 돼 가지고서 우리 속에서 역사해서 우리가 살게 되고, 그러면, 이래  해 가지고서 뭣 하는가? 이래 해 가지고 뭘 하는가? 이래 해 가지고 하는 일은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을 우리가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본체를 나타내, 본체를 나타내고. 예수님의 그 기능을 나타내고,  속성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소원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욕심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뜻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목적을 나타내고 이래 가지고 나타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  마치 내가 마이크를 대고 이렇게 말을 하니까 내 말이 마이크를 통해서 저  스피커의 양사방 퍼져 나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이 마이크와 같다 그  말이오. 예수님께서. 비유컨대는 예수님께서 이 마이크와 같은 우리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행사하시니까 우리에게 대해서 행사하신 그 행사가 어디로  나가는가? 모든 피조물에게 다 퍼져 나가 가지고서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하시는 그 일을 우리가 해서, 예수님은 삼십 삼 년 사  개월 동안 일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고 지금 안 계시는가?  승천하셨는데 우리와 밤낮으로 항상 함께 계십니다. 함께 계시는 것은 예수님의  그러면 신성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아니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인성이 함께 있으면 왜 보이지 않는가? 예수님의  인성은. 부활하신 인성은 시간과 공간을 다 초월한 인성이기 때문에 안 보일려면  안 보일 수 있고 보일려면 보일 수 있고 음식을 먹을려면 먹을 수 있고 안  먹을려면 안 먹을 수 있고, 이러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자들이 믿지 못하니까  그때 초기에는 이제 음식도 같이 먹고 이래 나타났지마는 이제는 많은 증인들이  다 있고 이랬으니까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형체를 보지 안해도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신인 양성 일위이신 그 하나님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이렇게 하시고 같이 하는데. 그러면 어디 계시는가? 이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신성인성 신인 양성 일위이신 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데. 그러기 때문에, 이분의 이름을  예수님이라고도 하고 이분의 이름을 그리스도라고도 하는데, 우리를 대속하시는  그 일을 할 때에는 예수님이라고 이름을 했지마는 대속하시고 난 다음에는  이분의 이름을 가리켜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으로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생명으로  계신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대속의 능력이 우리  생명이요 또 그리스도의 영인성령이 우리 생명이요, 진리가 우리 생명입니다. 이  셋은 합해서. 하나인데 이 셋이 구리의 생명이 돼 가지고서, 생명이 들어오면  모든 수족이 움직이고 생명이 떠나면 이것이 움직이지 못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 가지 능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우리 움직이는 것이요 우리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우리의 그 능동은 뭐이냐? 이 세 가지 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 이 세 가지 힘으로만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우리 움직임이요,  우리 움직임이 무슨 움직임인가? 우리 움직임은 이 세 가지 움직임, 진리의  움직임이요, 또 성령의 움직임이요, 예수의 대속의 움직임이오. 그러면 이  움직임은 무슨 움직임인가? 한 분 하나님의 움직이심이라. 그 움직임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하나님의 움직임이 우리에게 이 세 가지로 와 가지고서 역사하고,  이 세 가지로 역사하는 이 움직임이 우리가 이 세 가지로 움직여 가지고 세  가지로 움직임인 이 움직임은 무엇을 상대해 움직이느냐? 이 움직임은 모든  만물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만물이 우리에게 움직여지는  거기에 피동돼 가지고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마치 말하면 어떤 공장에 아주 수십 개 수백 개의, 수백 개의, 수백 개의 그  모든 기계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수백 개의 기계들이 움직이고 있는데 그  기계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보니까 여기에 모터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터라는 것 가지고서, 이거 모터라는 것이 있어 가지고 그 모터가 돌아가니까  이것들이 돌아가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터는 뭐로 가지고서 움직이고  있는가? 그 속에 전기, 전기줄이 가 가지고서, 전기줄을 타고 들어가는 이  전기의 힘으로 모터가 움직이고 모터의 힘으로써 이 모든 공장의 모든 기계들이  움직이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전기요 하나님은 전기요, 비유컨대  하나님은 전기요 예수님은 전기에게 피동된 모터요 또 모터에게 피동되는 모든  그 기계와 같은 우리들이요 또 우리들에게 피동되는 모든 만물들이 다 만들어  가지고 제작돼 가지고서 제품 돼 가지고서 나오는 거와 같은 그런 순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생활은, 우리 생활이 무엇이 우리 생활인가? 우리 생활은  예수님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생활이라. 그러기 때문에, 의식주가 우리 생활 아니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게 피동돼 예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예수님이 자주 움직이면 나도 자주 움직이고, 예수님이 이렇게  움직이면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예수님이 이렇게 움직이면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예수님이 요렇게 동그라미로 움직이면 내가 동그라미로 움직이고,  비유컨대 예수님의 움직이시는 대로 내가 따라서 움직이는 그것이 내 생활이라.

내 생활이라.

 그러면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나 할 일인데, 그러면, 따라서 움직이는데  예수님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우리는 이 의식주에 대해서 움직이는 것이  우리 일 아닙니다. 그러면, 다만 예수님 따라서, 따라서 움직이는데 예수님께서  감옥에 들어가도록 움직이면 우리가 감옥에 들어가야 될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오늘은 일 하지 말라고 일하지 안하도록 움직이면 일 안 해야 될 것이고. 오늘은  또 주일 지키도록 움직이면 또 주일을 지켜야 될 것이고 오늘은 또 가서  공장에서 일을 하라고 움직이면 내가 일을 해야 될 것이고 또 오늘은 밤샘의  일까지 하라 하면 밤샘의 일도 해야 될 것이고 또 이제 주님이 이제는  그만공장에 일하던 거. 그 공장에 일하던 거 치워 버리라 하면 또 치워야 될  것이고, 이러니까, 그분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것이 우리 생활이요 그러면, 그  생활하는 목적은 뭐이냐? 목적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

이것이 우리 생활이라는 거.

 그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여기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가죽 띠를 띠고  가죽 띠는 이거 다 험한 것입니다. 또 빈들판에서 살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라고 하니까 세례 요한이 그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의가 됐고 하나님을  나타냈지 그렇지 않으면 못 한다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정리해 나갈 것이 뭐이냐? 내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것을  소망하는 이것을 버리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소망하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비유컨대 예수님이  춤 추라고 하면은 우리가 춤 추는 것이 우리 소망이요, 예수님이 뛰라고 하면  뛰는 것이 우리 소망이요, 예수님이 또 감옥에 들어가라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소망이요, 또 예수님이 죽으라면 죽는 것이 우리 소망이요. 우리  소망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 그대로 피동돼서  나타내는 것이 우리 하는 일이라.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원형적으로, 원형적으로 하시는 일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원형적으로 하시는 거기에 따라서 피동되는 모형적 생활이 우리  생활이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가 의식주에 끌리지 안했고 그렇게 한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소망이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소망 의식주의 소망  이것을 버리고, 우리 소망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거, 예수님을 증거 하는 거 이게  우리 소망이라. 예수님이 한번. 비유컨대, 그게 비유가 될는지 몰라도 북을  놓고, 북을 놓고서 저기 콩을 놨습니다. 콩을 놓고 요 북을 한번 요라니까 '주:  북을 치는 것처럼 강단을 한번 치심' 콩이 톡 튀어오릅니다. 그렇지 안해요? 또  인제 두 번 이라니까 '주: 강단을 두 번 치심' 콩이 또 두번 톡톡 튑니다. 또  이거 이라니까 '주: 강단을 여러번 두드리심' 콩이 달달달달달 자꾸  튀어오릅니다. 고대로 따라서. 이라다가 딱 중단하면 콩이 가만히 있습니다.

 이거 모양으로 예수님에게 피동되는 이 속에 이 세 가지 능력으로 움직이는 그  능력에 따라서 우리 마음이 움직이고 우리 몸이 움직이면 그 움직임의 모든  움직임이 죽지 않는 영생이 됩니다.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움직여 놓은  것도 영원히 그것은 없어지지 안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그 효력을 주고 있고, 또  그 움직이는 움직임은 이 셋이 완전자요 영원자요 불변자이기 때문에 이 셋에  따라서 움직이는 자는 그 자는 영원 불변자요 완전자요 그 모든 피조물을 다  살리고 구원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작은 데서부터 연습을 해서 자꾸 나가야 될 터인데 이걸  나가지 안하고 자꾸 말로만 듣고 버리기 때문에 암만 봐야 모른다 그 말이오.

지난 밤에 ○목사님 설교에 '순종해 보니까 알았다. 순종해 보니까 알았다.'  순종해 보니까 알지. '순송해 보니까 알았다.' 순종해 보니까 아는데,  우리가 껍데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하려고 애를 쓰면은 껍데기가  말씀대로, 껍데기가 말씀대로 이래 순종이 돼지니까, 말씀대로 돼지니까 요  말씀대로 된 것이 예를 들면 열 가지가 있는데 거기에서 성령을 따라서 움직이는  고 일을 선택하니까 성령으로 따라서 움직이는 일은 고 속에 열 가지가 다  아니라 그총중에 하나만 내나 성령을 따라서 움직이는 일이 되더라 그 말이오.

그러면, 성령을 따라서 움직이는 그 일은 어디서 나왔느냐? 영원 자존하신 그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그 움직임이 이제 성령을 통해 가지고서 이렇게 우리에게  나왔다 그거요.

 이러니까, 나오는 데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이 예수님의 피공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피공로를 인해서 우리에게 왔고, 예수님의 피공로를 통해서 오는 일이  성신을 통해서 나타나고,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는 일이 진리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뭐 그때는 밥먹는 일도 생기고 일하는 일도 생기고 자꾸 이렇게  나타나요. 그러면, 주님이 밥 먹으라면 밥을 먹어야 되지 죽을 먹으라면 죽을  먹어야 되지, 주님이 놀라면 놀아야 되지 주님이 자라면 자야 되지, 그분에게  피동되는 그것이 우리 할 일이라.

 그러니까, '그 사람도 공장에서 일하네 그 사람도 이 일 저 일 하네. 목사님도  그래 설교하고 이 일 저 일 하네.' 목사님이 이 일 저 일 할수 있습니다.

목사님도 복음도 전할 수 있고 설교도 할 수 있고 또 지게도 질수 있고. 뭐 만일  지게 지고 너는 지금부터 농사를 지으라 하면서 오늘은 밭을 갈라 하면은 밭을  갈아야 되지 설교하면 그거는 죽은 일입니다. 또 너는 오늘 장사하라 하면  그날은 장사를 해야 되지 장사 안 하면 죽은 일입니다. 내나 옛사람의 일이오.

또 너는 이 장사 하라 하면은 그 장사를 해야 되지. 너는 이 직장에 일하라 하면  그 직장에 일해야 되지. 또 이 음식을 먹으라면 그 음식을 먹어야 되지. 너는  몇시에 자고 몇시에 깨라 하면 그대로 자고 그대로 깨야 된다 그 말이오. 거기에  피동되어서 하는 것이 우리의 움직임이요,  움직임의 목적은 뭐이냐? 움직임의 목적은 당신을 나타내는 그것이 목적이라.

그러면 나타내기를 어디다 나타내느냐? 만물에게 나타냅니다. 만물에게. 어떨  때는 일로 나타내고. 어떤 때는 돈벌이로 나타내고 어떤 때는 밥먹는 걸로  나타내고 이런데, 그분에게 피동되면 그분이 우리를 움직일 때에 밥 먹어야 될  때는 밥 먹게 하시고, 돈 가져야 될 때는 돈 가지게 하시고, 또 자야 할때는  자게 하시고, 그분이 전지자시기 때문에 우리를 움직이실 때에 실수하는  움직임을 하지 안하고 모든 것을 전지한 그 지혜를 가지고서 움직이는 계획을  하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실수가 없다 말이오  또 움직임의 힘은 뭐이냐? 전능하신 힘이 들어서 움직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우리 믿는 사람이 소망을 완전히 바꿔야  됩니다. 소망을. 의식주 그것을. 의식주 그것을 소망하면은 이거는 옛사람의  하는 행위요 그거 위해 사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의식주 하는 일은 뭐 할라 하느냐? 주님이 그 일 하라 하기 때문에  합니다. 주님이 그 일을 하라 하기 때문에 한다는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됩니다. 주님이 하라 하기 때문에 한다. 주님이 하라 하기 때문에 하지 그게  우리 할 일이라서 하는 거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에도  우리가 할 일 아닌 것도 하나도 없고 우리가 할 일인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하게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안 하는 요것을 결정을 지워 놓고,  그러면 결정지운 일은 뭐이냐? 전지자 전능자 창조주 대주재자 주권자 이분에게  연결돼 가지고 이분이 하는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움직임은 전능의  움직임이요 전지의 움직임이요 주재의 움직임이요 완전의 움직임이요 창조의  움직임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같이만 하면, 이렇게만 하면 영광이 나타난다 이렇게만  하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인간이 하니까 '아 하나님 정말로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라 하는데 우리가  거기에 순종하지 안하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지 못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어디 있노' 이렇게 말을 하고 믿지를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의식주 그것 위해서 살던 거 완전히 포기해야 됩니다. 완전히  포기하고 이제는 그라면 그 사람은 돈벌이 안 할 건가? 주님이 돈 벌이 하라  하면 돈벌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안 하지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지  내가 돈벌이 하는 사람 아니오.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지 돈벌이 하는  사람 아니고, 내가 그 질통을 지는 것은 내가 질통 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 주님이 질통 지라 하면 질통 지고, 주님이 자라  하면 자고, 이거 하라면 이거 하고 주님이 하라 하는 대로 하는 것이지. 우리가  이 세상 이것 저것 하는 것이 우리하는 일 아니라. 주님이 뭐 시킬라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너는 그만 세상을 떠나라 하면 또 떠나는데 따라서 순종해야  된다 그거요.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이 모든 것이 너에게 더해진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그 말은 당신 시키시는 대로만 그와 같이 하면은 이  모든 것은 전지전능자가 하시는 일로 잘된다 그 말입니다.

 요렇게, 내나 그게 그거고 그게 그거 같지마는 구별이 있습니다. 요렇게 안 한  데서 다 탈났어. 모두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 뭐 낭파났다고 와서 의논합니다.

의논하는 것은 뭐 두 말할 것 없이, 판단하기 쉬워. 모두 다 그에게 피동됨으로  하지 안하고 네가 했구나. 여기에서, 여기에서 네가 한 개 시작했구나. 여기에서  요라다가 네가 한 개 시작하고 여기에서 네가 한 개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서 나한테 말하기 때문에 '그 거 네가  해서 낭파당했다.' 언제 어디 가서 성경 열 독을 읽고 나오라고 했는데 성경  다섯 독, 그 사람은 성경 한 장을 못 읽을 사람이오. 한 장을 못 읽을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그만 뽈끈 당글어 매 가지고서 꼼짝 못 하게 나오면 요래 가지고  요래 가서 갇힐 모양이니까, 갇힐 모양이니까 요리 딱 피하도록 해 가지고서  그래 그때 성경 보게 했다 말이오. 성경 다섯 독을 읽었어. 다섯 독을 읽으니까  자기 마음에 '이만하면은 지금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고 세상에 가서 얼마든지  자유로이 이용을 할 수 있다' 요렇게 생각을 했는데, 열 독 하라 했는데 다섯 독  안 읽었어 나와 가지고서 '뭐 이렇고' 말하기 때문에 '네가 그때 열 독 하라 할  때에 열 독만 하고 나왔으면, 네가 처음에 성경 보기 전에 많은 재를 저질렀던  그 삐뚤어진 그 사람이 성경 다섯 독 읽고 나니까 그때 사람과는 아주 달라  가지고서 이제 반사까지 하는 그런 사람이 됐는데 네가 다섯 독만 더 읽었더라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안할 것인데 다섯 독을 덜 읽어서 이와 같이 실수했다.'  그러면, 그 실수가 무슨 실수입니까? 와 여러가지 낭파에 대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고통하고 이렇게 사람이 근심 걱정 고통으로서 낭파된 그 일이. 그  일이 뭐로 해서 그렇습니까? 그 일이 하나님에게 피동으로해서 그래 됐습니까 그  피동의 줄을 끊어 버리고 제 마음대로해서 그렇습니까? 예? 제 마음대로해서  그렇다 말이오. 제 마음대로 해서 그런데, 제 마음대로 해서 그런데 제 마음대로  해서 무슨 일 했는가? 제 마음대로 의식주 위해서 했다 말이오. 의식주 위해서  하고 의식주를 소망하는 제 마음대로 했는데 낭파라. 그러면, 의식주를 위해 제  마음대로 했는데. 그러면 제가 근본인가? 제가 몰라서 그렇지 그속에 악령이  근본 돼 가지고 그놈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겨 버렸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고, 또 하나님 말씀도 벗어 버리고, 또 제 생각대로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안 됐다 그 말이오.

 '아,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했는데.' 했지. 했지마는 죄와 의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피동되는 일을 계속 이렇게 하다가, 열 가지 중에 아홉 가지를  피동으로 하다가 한 가지만 피동으로 안 해 버리면 한 가지 때문에 전부 낭파 다  돼 버립니다.

 여러분들, 의를 행하면 그의 하나 행했다고서 그 사람이 전부 의인이 됩니까 안  됩니까? 예? 의인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러면 죄 하나를 지었으면 죄 하나  지었다고 그 사람이 하나 지은 죄만 죄입니까 죄 하나 지었으면 그 사람이  전부가 죄인이 됩니까? 전부가 죄인이 됩니다. 여기에 다르다는 걸 알아야 돼.

여기에 다르다는 것을. 그러기 때문에, 요걸 모르고 요래 하는 통에 낭파가 된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학개서에도 말했고 또 다른 데서도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도 말해 놨어.

 우리가 하다가 하나만 삐뚤어지면. 마귀란 놈이 졸졸졸, 하나님에게 피동돼서  어떤 공작을 하면은. 이제 막 이게 이대로만 하면 큰 일이 나겠는데, 공작 하면  큰 일이 나겠는데 하나가 삐뚤어지면 그만 안 돼요. 그러니까 마귀란 놈은  끝까지 하나라도 삐뚤어지기만 삐뚤어지면 그만 제것인데, 뭐 다 잘해서 백  가지에서 아혼 아홉 가지를 잘 해도 한 가지만 삐뚤어지면 고것 때문에 아흔  아홉 가지는 다 미결이 되고 만다 말이오. 아직까지 미결이 돼 있기 때문에  마귀란 놈은 끝까지 그렇게 우리를 유혹시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것을 깨닫고 어쩌든지 오늘 아침에는 소망을 완전히 바꿀 것 소망을  바꿀 것. 소망.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 소망은 무엇이지요? 예수님의  증인 되는 거 우리 소망은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 예수님의 증인 된다 그 말은  뭣이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요,  나타내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여 주는 것이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요,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요, 예수님의 지혜를 보여 주는 것이요,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소망을 보여 주는 것이요, 모든 예수님을 보여 주는 것이  우리 목적이요 우리 소망입니다.

 그러면, 무슨 힘으로 살 건가? 어디 피동돼 살 건가? 우리는 우리 속에  생명이신 이 세 가지의 힘으로 할 것이요, 세 가지의 능력에게 피동된 이  고기덩어리로 움직여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복잡한 일을 자기가 행해 봐야 알지 행해 보기 전에는 행해  보지 안하면 모릅니다. 그러니까, 행하는 이것은 참, 행하는 이것은 하나님을  차지하는 일이요, 자기가 듣고 배운 대로 행해서 경험과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이요 하나님 같은 자가 되어지는 이 지극히 큰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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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6 소망도 방편도 바꾸라/ 누가복음 5장1절11절/ 860831주후 선지자 2015.11.15
» 소망을 바꾸라/ 마태복음 3장 4절-12절/ 841025목새 선지자 2015.11.15
2884 소망을 주의 재림에 둔 결과는 거룩과 경건/ 마태복음 24장 35절-44절/ 870624수야 선지자 2015.11.15
2883 소망을 하늘에 두면 눈이 밝아진다/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820108금야 선지자 2015.11.15
2882 소망의 문/ 호세아 2장 14절-20절/ 840826주후 선지자 2015.11.22
2881 소망의 문/ 호세아 2장 15절/ 840829수새 선지자 2015.11.22
2880 소속과 능동을 바꾸라/ 창세기 12장 1절-9절/ 810123금야 선지자 2015.11.22
2879 소원/ 예레미야 5장 1절/ 791010수새 선지자 2015.11.22
2878 소원, 지식, 행동/ 고린도전서 4장 1절-5절/ 800512월새 선지자 2015.11.22
2877 소원성취법/ 요한복음 15장 7절/ 870802주후 선지자 201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