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비유


선지자선교회 1984 6. 13. 수새 

 

본문 :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를 가리켜서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한 영감과 진리대로 내가 희생하여  진리와 영감이 없는 그곳에 그 사람들에게 진리와 영감으로 감화 되어서 사람을  진리화,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도리 이 성경화 또 성신의 감화화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녹아질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살 때에는 이런 사람은 이런 무슨 소욕을 위해서, 혹은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을 위하는 것으로서 인생을 다 쓰고, 또 명예나 지위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문화 건설을 위해서, 어떤 사상을 위해시 그런  것들을 위해서 그저 오래 살든지 짧게 살든지 일생 사는 생활은 거기에 다  투자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다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래도 저래도 인간 일생이라 하는 것은 다  녹아지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건한 사람도 마지막에는 다 힘  없는 시체가 되고 말고 아무리 젊은 어린 사람이라도 마지막에는 젊음도 강건도  어림도 다 없어지고 마지막에는 다 시체로 화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가진 젊음이나 강건이나 지혜나 총명이나 온갖 기능이나 그 모든 것이 나  이래 없어지든지 저래 없어지든지 다 녹아지는 거는 일반입니다. 믿는 사람도  그렇게 다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 때문에 다 젊음도, 강건도, 아름다움도.

지혜도, 총명도 다 녹아지고 없어집니다. 그것을 인해서 다 쓰여지고  없어집니다.

 그렇게 살던 우리들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하는 말씀은, 짠 걸 말하는  것은 영감을 말합니다. 진리와 영감을 가리켜서 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이 진리와 영감으로 우리의 젊음이 다 없어져야 되겠고,  건강이 없어져야 되겠고. 또 모든 지식과 지혜와 모든 것이 이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없어져야 되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입니다. 그리 되면 우리가 이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없어지면 이 진리와 영감은 자기의 손길이 닿는 대로 어떤  사람은 한 가정에게. 어떤 사람은 한 단체. 어떤 사람은 한 민족에게, 어떤  사람은 조그만한 그 사회에. 또 한 국가에게. 한 세계에게. 한 시대에 이 진리와  영감을 그들에게 다 전파해 가지고 그것이 전파되어서 거기에서 주님의 이 생명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돈으로 인해서 녹아질 사람도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  녹아질 사람도 아니고, 또 무슨 학문을 위해서 녹아질 사람도 아니고, 어떤  권세를, 이 세상에서 출세를 위해서 녹아질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녹아지는  것은, 이미 선포해 놓으신 하나님의 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이 지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없어질 자들이라, 그리되면 이 진리와 영감은 자기 역량대로 몇  사람에게 퍼졌든지 어떻게 퍼졌든지 퍼진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무궁한 나라를 형성합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그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짐으로써의 그것으로 인해서 그  지리와 영감이 어느 정도 퍼졌으며, 몇 사람에게나 퍼졌으며, 몇 사람이나  진리와 영감화 만들었는가 하는 그것이 이제는 무궁세계의 자기의. 비유대로  말하면 자기의 차지할 고을입니다. 한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한 고을을 주고  열 므나 남긴 사람에게는 몇 고을을 준다고, 무궁세계의 자기의 활동할 무대 또  저기에게 속한 모든 것들 이런 것의 그 범위 이것이 다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레데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어찌 다시 짜게 하리요' 하는 그 말은  성도들에게는 다 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모든 것이 제한되어 있는데 자기의 가지  그것이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없어지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것은  반복되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진리와 영감을 자기가 건설할 것을 건설하고 확대할 것을 확대해야 되지.

오늘이라는 이 시기에 진리와 영감으로 자기가 희생되는, 다시 말하면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없어지는 요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자기는 진리의 건설은 못  합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도 진리화되지 못하고 영감화되지 못하고 또 자기는  진리와 영감으로 아무것도 점령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은 우리 자체가 쟌리와 영감에게  쓰여짐으로 없어지는 그것은 다 진리화된 것입니다. 다 영감화됩니다. 자기가  하루 동안을 진리와 영감대로 살아서 하루 산 것이 그만침,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생명이 만일 천 날이 지금 남았다 하면은 하루를 살았으면 천 날의 천분지 일이  줄었겠습니다. 천분지 일이 줄어서 구백 구십 구 일 밖에는 안 남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한 날을 진리와 영감대로 살아서,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다시  말하면 진리와 영감대로 살아서 그 하루가 끝났으며 하루에 쓰여진 그 시간이나  정력이나 자기의 온갖 모든 것은 다 그것이 지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진리화됐습니다. 진리화됐는데, 요 기회를 놓치면 자신이 다시는 진리 될 수가  없고 영감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는 진리들이 가서 사는 곳이요 영감들이 가서 사는 곳입니다.

이라니까, 그 사람이 부활은 하기는 하지마는서도 진리화된 것이 없고 영감화된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기는 갔지마는서도 지극히 작은 자가 될  것이요 또 자기의 그 활동할 무대나 세계는 아주 없는 거와 같은 그런 사람이  되어집니다.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 하는 이 말은,  오늘이라는 이 오늘은 우리 자신이 진리화되어서 진리는 아니지마는 진리같이  됩니다. 마치 등을 만들어 놓고 그 등 안에 불을 켜지 안하면 그 등은 아주  깜깜하게 되어 있지마는 그 안에다가 불을 켜면 그만 동은 불덩어리가 됩니다.

등은 불덩어리가 돼. 누가 봐도 등을 보고서 불이라 합니다.

 '아 저기 불빛이 있네. 저기 밝은 불이 저기 있다.' 이러나. 그 등은 불이  아닙니다. 불이 아니지마는서도 등속에 불을 켜면 그 등이 그 불의 빛을 받아  가지고서 그 빛이 등을 통하여서 나오기 때문에 그만 등도 고만 빛이 되고 불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리와 영감으로 쓰여짐으로 없어지면 쓰여짐으로  없어진 그것은 진리화됐고 영감화됐기 때문에 영원히 진리로 살고 영원히 빛으로  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진리와 영감이 영원히 역사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진리의 덩어리요 빛의 덩어리요 그 진리가 능력 가진 그 능력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고 영감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제삼자에게는 진리 노릇을 하고 영감 노릇을 하고 제삼자에게는  하나님처럼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오늘 우리 자신을 진리로 만들 수 있고 영감으로 만들 수  있다, 진리화시킬 수 있고 영감화 시킬 수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못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면 어찌 되느냐? '쓸 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비유입니다. 모든 존재에게 천대를 받게 된다. 그러면 세상에서도  천대받게 되고 또 무궁세계에서도, 거기에는 불신자는 없고 다 택자들 뿐인데  택자 중에 천대받습니다. 지금은 신불신자에게 천대받고 무궁세계 이는 택자들  가운데에서 천대를 받게 됩니다. 그거는 아무 데도 쓸 데가 없다고 다른 말씀에  보면 '거름에도 쓸 데 없다' 아무 데도 쓸 데없다 거름에도 쓸 데 없다. 그거는  이용 가치는 하나도 없습니다. 불택자들은 거름으로 쓰여집니다. 불택자들은  사람을 왜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마치 식물의 거름이  필요한 것처럼, 거름이 들어서 식물을 무성하게 하고 결실하게 하는 것처럼  이렇게 불택자들은 신자들의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고 그들이 구원  이루는 데에 이용을 당하는 것이지마는 택자들은 거기에도 이용 못 당하도록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소금으로만 이용될 수 있는 것이지,

 진리와 영감을 비추어 자신이 진리와 영감화되고 모든 사람을 자기 손길이 닿는  대로 진리와 영감화되어서 자기를 통해서 진리화되고 영감화된 것은 영원히  자기의 무대입니다. 그만침 자기에게 통치를 받아야 되는 자기 소유입니다.

 그래서  여기 고을이라 말한 것은 일 군(君)이라 말입니다. 일 군. 한 므나를  장사해서 남긴 자에게는 한 군을 주고 또 두 므나 남긴 자에게는 두 군을 주고,  그러면, 므나로 말하면은 하루 품삯입니다. 한 므나는 하루 품 삯인데, 하루  품삯을, 그 품삯이 앞으로는 일 군을 살 수 있는 댓가가 된다 그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이거는 사람들이 자신이 진리화되고 영감화된 그것 가지고서 다른  사람을 진리화시키고 영감화시킨 그것이 사람 보기에는 가치 없지마는서도 하루  동안 진리화시키고 영감화시켰으면 그 가치가 이 다음에는 일 군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하루 품삯이 일 군을 사게 된다. 이것도 참 끝없는 것을, 무한한  배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김해군 있는데, 김해군 하면은 김해군이. 하루  품삯이면 요새 보통 품삯이야 만 원 더 갑니까? 일반 노동자 품삯은 만 원일  거라 말이오. 만 원인데 만 원에 김해군을 살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돈  가치가 얼마나 올라갑니까? 지금 김해군 살라 하면은 얼마나 하면 사는고, 누가,  뭐고? 누가 이 콤퓨터인가 그거 할 줄 아는, 사람 없어? 그것만 하면은 아마  그거 대번에 댓가가 나을 거라. '아, 며칠 품삯만 하면 김해군을 살 수 있다.'  굉장히 많은 품삯이라야 김해군 하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비유한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진리와 영감으로 없어지는 것,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 없어지는 것은 자신이 진리와 영감화되고 싶여져 없어짐으로써,  소금이 녹으면은 다른 데가 가지고 그 간이 배는 것처럼 자기가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서 진리와 영감대로 하루의 생활이 없어지면 그것은 수 많은 다른 사람을  영감화 진리화시키게 됐다, 하루 동안 다른 사람을 영감화 진리화시켰다, 영감화  진리화시키는 데 자기 하루는 거기에 쓰여지고 소비됐다, 투자됐다, 이러면,  그것을 예사롭게 생각하지마는서도 이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보상으로 배수될  때에는 하루 품삯이 한 고을을 사는 것으로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하루 동안에 한 그 가치는 무궁세계에서는 몇 억억억만 배라 할 게  아니라 굉장한 배수로 된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도 그렇게 믿는  사람은 그 믿음에 따라서, 하루 동안 자기가 아무리 돈을 벌어 봤자 뭘 해 봤자  얼마나 할 것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수입으로서는 믿음  외에 더 수입이 없어. 무디 선생은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은 없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다른 말로 해석하면 자기가 영감과 진리에게 쓰여져서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것이, 영감과 진리에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영감과 진리에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은 없다, 자기가 영감과 진리에게  쓰여지는 그것보다 더 큰 수입은 없다, 더 큰 수입은 없습니다. 그러면, 수입을  또 주님어 말씀하시기를 얼마나 수입이 크냐?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네가  수입이 크다' 그렇게 말 했습니다.

 이러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러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그 말은, 이 현재에서  자기를 진리화시킬 수 있고 영감화시킬 수 있고 또 자기가 자기 주변에 있는  자기 이웃을 영감화시킬 수 있고 진리화시킬 수 있다, 이런데,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영감화 진리화는 안 된다, 그거는 안 됩니다. 영감화 된다 말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이요 진리화된다 말은 진리같이 되어지니까, 진리가 없는  가운데에 천지를 창조 하셨고 또 영감이 진리를 통치하고, 이거니까 그 진리가,  없는 가운데에 우주를 창조한 그 능력 가진 것이 진리요. 그 진리를 이리 저리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 영감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이거는 뭐 너무도 커서, 이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보장이 작으니까,  소인일수록 깨달음이 작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활이 변화 안 되고, 참 큰  사람들은 깨닫고 믿을 때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그것을 다 버리고 여기에  욕망을 가지고서 신앙생활 시작하는 것은 단번에 시작합니다. 사람의 그 보장에  따라서 달라요. 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그릇에 따라서, 깨달은 사람들은 이거  외에 소망할 것이 없고 이 외에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에 그만 베드로 그런  사람들은 깨닫고 난 다음에는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다 포기하고 그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했어. 이제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사실을  그들이 조금 그릇이 크고 사람이 크니까 이제 깨달음이 좀 커졌다 그거요.

그러나 사람이 소인이 될수록 깨닫지 못하니까. 어떤 사람은 이것을 그저 돈 백  원보다는 크게 여기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천 원보다 크게 여기는 사람, 어떤  사람은 만 원보다 크게 여기는 사람, 어떤 사람은 여러 수백억보다 크게 여기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이 천하를 차지하는 것보다 이것이 크다고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  이러니까, 주님은 보기를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잃는 것은 새사람을 잊어버리는 걸 가리켜 말합니다. 새사람을 잊어 버려. 어제  아침에 새사람 찾는 것을 말씀했는데, 새 사람을 새 사람 잊어버리면 어찌  됩니까? 새사람 잊어버리면 옛사람 자기 아닌 원수 악령이, 악령 그놈이 와서 내  마음 사로잡아 가지고서 악령적 사람이 됩니다. 시기의 사람이 되고, 질투의  사람이 되고, 이간의 사람이 되고, 간교의 사람이 되고 물욕의 사람이 되고.

정욕의 사람이 되고. 모든 음욕의 사람이 되고 이제 되는 그것이, 그게 뭐이냐?  그 영이 와 가지고 자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기 마음을 그놈에게 빼앗기고 자기 몸을 그놈에게 빼앗긴  그것이 뭐 이냐? 자기 마음과 몸을 진리화할 수 있고 영감화할 수 있는데. 이거  뭐 진리화하고 영감화할 수 있는데, 화할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진리화 영감화할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뺏기는 거. 거기에는 하루 뺏기는 거 일 년 뺏기는 거  그렇게 말하지 안했고 뺏기는 것을 말했으니까 하루 뺏기는 것도 그렇고 한 시간  뺏기는 것도 그렇고. 한 시간 자기를 진리화 영감화할 것을 빼앗긴 자는 천하를  얻어도 너는 손해갔다 그 말이오. 온 천하의 가치보다 자기가 한 시간 진리화  영감화된 것이 크다, 그것을 가리켜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니까, 진리화 영감화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버리지 안하려고 모든 걸 다 버리고 따르지마는 그래도 진리 대로 한  시간 산다는 것이, 살라고 해 보면, 진리대로 살고 영감대로 살라고 해 보면 참  사람은 연약하고 마귀는 민첩합니다. 살라 하면은 요런 건은 기도하는 가운데서  요런 건을 딱 가지고서 그거 기도 하다 보면 내가 그만 그리 치우쳐 가지고서 그  건에게 미혹 미혹 받아 가지고서 나는 그만 마귀화돼 버리고 지위화 돼 버리고  물질화돼 버리고 인간화돼 버리고, 진리화 영감화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돼 놓으니까 찬송일랑 냅두고 하루 종일  살아도 진리 영감, 진리 영감대로 쓰여지는, 진리 영감만 생각이 돼지는 데 어떤  사람은 일 분 동안도 그 진리와 영감만 생각할 수가 없어. 그만 이놈이 쑥  들어오고 저놈이 쑥 들어와 가지고, 그러니까. 이거 사람의 층하라 하는 것은  진리화된 그 가치가 하늘나라 가치요 영감화된 것이 하늘나라 가치인데, 자기  심신이 진리화 영감화된 것이 그것이 영원한 영생하는 기능인데 어떤 사람은 일  분도 진리화 영감화가 안돼요. 그 마음이나 몸이 일분도 되지 안하고서 그만  찬송할 때에도 이런 저런 면 자꾸 이래 쏟아지고 이래 돼지고 인제 오래 동안  힘을 써서 애를 쓴 사람은 무엇이든지 찬송하면 찬송, 진리면 진리 생각하면 그  진리가 끝나야, 진리가 끝나야 소 다른 진리를 거석하지 그 진리를 거머쥐고 그  진리대로 사는, 진리에게 쓰여지는 진리에게 복종하는 그것이 요동이 안 되고  이렇게 굳건하지마는 서도 그것을 길들이기 전에는 이렇게 저렇게 변동이 많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화 영감화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자신을 진리화시킬 기회요 영감화시킬 기회요, 자기가  진리화시키고 영감화시키는 거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자기가 진리에게 순종하고  영감에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자기가 진리에게 복종하고 영감에게 복종하는  요 믿음 생활을 하면 자기가 자기 심신이 진리화되고 영감화되고 자신이 진리화  영감화 되는 것이 그것이 나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리화 영감화 됨으로  말미암아 옆에서 그 사람의, 소금 간이 말이지 물 한 되를 간화시킬 수도 있고  어떤 거는 큰 도가지 한 도가지를 간화시킬 수도 있겠고 또 어떤 거는 많으면  아주 큰 못물 하나도 간화시킬 수가 있겠습니다. 이제 그 사람이 간화 시키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자기 실력이라 말이오. 소금의 실력이라.

 이러니까 자기가 각각 진리와 영감을 가진 그 실력대로서의 이렇게 변화를  시키는 것이니까 그것이 자기를 찾는 것이라.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라. 자기를  자기가. 자기 기능을 자기 기능으로써 보수하는 것인데 그만 그라다가 이 세상에  있는 무슨 소유 그런 것 때문에 그만 잊어 버렸다 말이오. 잊어 버렸으면 네가  천하를 얻어도 손해 가는데 네가 찍해야 조그만한 거, 조그만한 물질, 조그만한  사건, 조그만한 지위, 조그만한 권세 그것 가지고서 네 자신이 진리화되고  영감화되는 것 다 뺏겼다, 뺏겼다 그 말은 누구한테 뺏겼어? 뺏는 도적이 있기  때문에 뺏겼지. 뺏겼다 그 말은 세상에게 뺏겼다 그 말이오.

 와 뺏겼느냐? 네가 세상 거 차지하려고 뺏기지 안했느냐? 어리석은 자야 세상  거 차지하지마는 네가 차지해 봤자 부산 시내를 차지할 것이냐, 한국 땅덩어리를  차지할 것이냐? 온 천하를 차지해도 소용이 없고 손해 가는데, 자기를 빼앗기면  손해 가는데 네가 이 사소한 것 가지고서 뺏기고 마니까 너는 마귀에게  미혹받아서 절단 나는 것뿐이지 달리 그런 거는 아니라 그거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요 말씀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짜게 못 합니다. 오늘 자신을 진리화 영감화시킬 수 있는 요 기회 놓치면 다시  못해.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안돼, 그거는, 이거는 안 돼요 또 자기가 자기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하다 보면 자기 한 그것이 다른 사람을 진리화  영감화시킨 그것이 이루어지는데 그것도 안 돼. 그거는 뭐이냐? 고을 차지해.

그거는 하늘나라의 무대라. 자기 기업이라. 자기 활동의 무대가 커지는 것이라.

자기 소유가 커지는 것. 자기 명예가 커지는 것, 자기 지위가 커지는 것이고,  자기 영광이 커지는 것이라. 자기 소유가 크고 강해지는 거라. 이러니까, 참  생명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변동될 수가 없어. 이 거 어떻게 변동되겠습니까?  모든 것이 진리화 영감화돼 가지고서 그 나라에서 움직이는 나라인데 그것이  무슨 변동이 되겠습니까? 생명으로 막 충만하지.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저 말씀을 들어 깨달아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런, 신고함에 써 넣었어요, '성경 보기로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주일학교가 부흥이 됐는데 재독하기 시작하고 난 다음 에는 주일학교가  내려간다' 하는, 그 사람의 말도 참고가 됩니다.

 이러니까 뭣 때문에 설교 재독을 듣느냐? 설교 재독 듣는 것은 자기 단독으로  성경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깨닫기 위해서, 성경을 배우는 것이니까  성경 배우는 것은 성경 알기 위해서 배우지, 성경 배우는 그것이 성경을 알고  나면은 성경 배우는 게 필요가 없습니다. 배우는 것은 성경을 알기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단독 읽어서 모르니까. 이러기 때문에, 재독하는 것도  필요하고 재독은 한 번씩밖에는 없으니까, 재독은 한 번씩밖에 없으니까 재독은  재독을 들어야 되겠고, 깨달아야 되겠고, 성경은 다른 날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런데, 그 사람의, 신고함에 써 넣은 그 사람 속에는 뭐인가 좀 야릇한 것이  들어서 오해가 들어있는 것인데 그걸 그 사람이 회개를 해야, - 요 가운데  있는지 모르겠는데- 구원 이루어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 마음에는  '아이구. 재독? 성경을 봐야 되지' 하는 그 사람인데 제가 성경 암만 봐서.

성경을 봐서 깨달았으면, 성경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설교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셨기 때문에 놀라고  기절하고 생명을 내 두고 그럴 건데 그 사람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하나의 일종 설교의 반대의 그말이 아닌가 이래서, 그 사람이 좀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보여지는데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설교 재독은 성경을 가르쳐  깨닫게 하는 것이니까 그거는 찍해야 한 일 주일 동안에 아마 두 시간밖에는  없을 것이고, 두 시간밖에 없고 성경 보는 시간은 몇십 시간이든지 있어요.

일주일 동안이면 보자 이십 사 시간인데, 자, 여덟 시간 자고 열 여섯 시간씩  말하면 얼마나 돼? 한 여덟 시간 만 잡아도 칠 팔이 오십 육, 한 오십여  시간인데, 오십여 시간 되네. 오십 여 시간에 성경 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말이오. 그거는 뭐이냐? 마귀로서 지금 하나님이 복음 운동 역사를 깨트릴려는  그런 자기 주관주의에서 나온, 주관 신앙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때에 비판할 때에 '아, 그거는 일주일 동안에 두 시간만 하면 되는 것인데, 두  시간, 그거하고 나머지기 시간 성경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거는 성경만 봐  가지고 자기가 깨닫지 못하니까' 성경을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봤지마는서도  깨닫지 못하니까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자기가 배움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성경도 열심히 봐야 되고, 그래 늘 말하기를 여기 설교하면 설교  필기를 가지고서, 필기를 가지고서, 성경 본문을 보고 깨닫고 '아 이 본문에  이게 있구나' 본문 보고서 그것을 캐달을 수 있다고 하면은 설교 기록한 노트는  불에 태워 버리고 집어 뜯어 없애 버려야 됩니다. 왜? 성경만 보면 다 아는데 뭐  하려고 해석해 놓은 그걸 볼 필요가 있습니까? 성경만 보면 그 해석을 다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어짜든지 이거 깨달아야 되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해도  소금이라 하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 말이오. 암만 읽어 봤자 '나는 세상의  소금이라 소금이라' 암만 해봐도 모르면 안 된다 말이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말은 너희는 세상에게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짐으로 없어짐으로 인해서  세상을 진리화시키고 영감화시킬 네라. 그러면,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네가  현실에서 진리와 영감에게 쓰여져서 없어지면 없어진 것은 벌써 진리화됐고  영감화됐기 때문에 그것이 너를 바로 뺏기지 안하고 너를 바로 보존, 주님이  십자가의 대속한 것을 바로 보존한 것이다. 만일 그런데 현실에 네가 진리와  영감으로 살지 못했으면, 진리에게 영감에게 복종하는 생활 하지 못했으면  예수님이 대속해 놓은 것을 다 뺏겨 버렸다 그말이오. 너를 뺏겼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잃는다는 것과 뺏긴다는 것과 두 말이 달라. '잃든지  뺏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런데 조그만한 그까짓 것, 사소한  그것보고서 진리화 영감화 다 뺏기니까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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