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됨을 발견하라

 

1987. 3. 3. 새벽 (화)

 

본문:마가복음 10장 51절∼52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교인들은 많지는 못하지마는 그 교인들이나 또 교역자들이나 교회들이 우리 총공회는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하여 가고 있는가 하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진영이 많은 훼방을 받습니다. 많은 훼방을 받고 또 여러가지로 좀 멸시하는 그런 것을 당하고 있읍니다.

그 당하는 그것이 자기의 신앙에 손해가 없이 그저 참고 견디면 좋지마는 거게 피동돼 가지고 이 진영에 신앙 생활 하는 것은 이단처럼 또 못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데에서 손해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총공회가 열릴 때마다 총공회가 어떻게 모든 신앙 계획이나 또 신앙 행위한 과거나 또 현재나 미래가 어떻게 돼 가나 하는 그것을 와서 좀 들어 보고 이라면 우리 총공회가 어떻게 해서 이것이 생겼으며 신앙 생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어떻게 이렇게 이 총공회라 하는 것이 존재하게 됐으며 또 현재는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터인데 그런 일이 닥치면은 감당은 못 하면서도 알라고는 생각지 안하기 때문에 그 좀 답답한 일입니다.

지난밤에는 서기가 낭독할 때에 아주 말단의 그저 몇 가지를 제가 들을 때에 우리 총공회서 행사된 가운데에 몇 가지를 들어서 말했읍니다. 그러나 주욱 서기가 회의록을 낭독하는 데는 우리 총공회 그 시발된 그 모든 원인부터를 여러해를 자꾸 거듭 거듭 읽었읍니다. 제일 처음에는 많이 읽고 그 다음에는 또 알 만한 거는 제해 놓고 그 다음에 읽고 읽고 해서 이랬는데, 그러면 우리 총공회 신앙 사상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면 뒤돌아보지 안하고 자기 구원을 열심히 이루어 나갈 터인데 이걸 모르는 가운데서 미혹이 많은 것인데,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교인들이 참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혹 다 알아서 그럴 수 있겠고, 또 자기는 아무런 직접 마찰을 당하지 안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투쟁한 그 배후에서 아무른 접촉이나 마찰 없이 지내가고 있으니까 거게 대해서 무심해서 그런 사람이 많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이 돼집니다.

지난밤에도 경제에 대해서 약간 말을 했읍니다. 경제에 대해서 약간 말했는데 그 경제에 대한 그 말도 지금 우리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교회들도 그런데 그중에도 아직까지 신앙의 연조가 얕은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경제로써 교회가 크게 실패를 자꾸 보고 크게 그 타격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왜? 지난밤에 낭독한 회의록에 보니까 우리 신앙 생활 하는 것은 사랑이요 또 희생이요 봉사요 이런 그 성격을 띈 그 신앙 생활인데, 이 세상에서 사업을 하는 그런 것은 다 그것은 지금 전투 사업이요 우리는 사랑과 봉사의 사업인데 이 둘이 합해 가지고 서로 신앙 좋고 이렇게 신앙으로 친해지니까 물질 거래나 그런 것을 하는 게 좋겠다 생각하니까 이 사랑으로 관계되는 이 사랑의 관계성을 전투하는 그 싸움의 관계성으로 이와같이 착각해 가지고 관계를 가지니까 그런 결과에는 사랑이 깨지든지 사업이 깨지든지 둘 중에 하나는 깨진다 하는 것을 말해 줬으니 그것도 아주 지극히 큰 소리입니다.

그 가치가 적은 소리 아니고 뭐 수만 인 수십만 명이 그걸로써 실패를 하고서 지금 모두 신앙 생활 하다가 교회 그 장로에게 뭐 집사에게 돈 떼여 가지고 손해보고 낙심했다 하는 사람이 뭐 수만 명이요 수십만 명입니다. 그 손해보고 욕하고 한 그런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을 말해 준 그런 것도 아주 중요성인데 귀가 어두우면 들어도 듣지를 못합니다.

또, 우리 총공회는 어떤 공회보다도, 다른 데서는 거게서 시찰장이 있고, 당회장, 시찰장, 또 노회장, 총회장 이래, 노회 총회가 있어서 언제든지 당회는 시찰회에다 말할 권리가 있고, 시찰회는 노회다가 호소할 권리가 있고, 노회는 총회다가 말할 권리가 있고 이렇게 뭐 전부 제한 제한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우리 총공회는 그게 없읍니다.

바로 개인이, 개인이 당회에게도, 개인이 지방공회에게도, 개인이 총공회에게도 직통으로 모든 것을 연결할 수가 있고 또 서로 상담할 수가 있도록 이렇게 돼 가지고 있고 또 당회가 지방공회에게, 지방공회가 총공회에게 이렇게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이 종으로 횡으로 이렇게 어데든지 다 통할 수 있는 이런 행정을 가진 것이 우리 총공회 행정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교인들과 교역자와의 완력이라든지 뭐 이런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는 이것을 그저 ‘우리는 뭐 위에 상부에 호소할 데도 없고 이라니까 그만 우리는 은퇴해서 그저 물러가는 수밖에 없지 이 무슨 불만스러운 거나 불평스러운 것을 어데다가 호소해 가지고 이것을 바로 시정받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없다’ 하는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이 우리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까 이 총공회에 앞으로는 교인들을 많이 참석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또 교역자들은, 다 안 그렇지마는 교역자들은 교인들을 총공회 참석시키기를 싫어합니다. 왜 싫어하느냐? 싫어하는 것은 총공회서 하는 것을 교인들이 다 알면 그 교역자가 총공회 그 신앙 이념에 위반되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많이 제재가 있기 때문에 참석시키기를 싫어합니다.

또 교역자들은 이 설교록이 나가는데 이 설교록을 많이 받아서 보도록 하기를 싫어합니다. 왜? 그들이 보면은 교역자가 물론 더 많이 보지마는 어느 그 부분적으로 봐서 그것을 똑똑히 알았는데 교역자 설교하는 것이 설교록과 다르면은 ‘이 설교록이 틀렸나 교역자가 틀렸나?’ 이것을 두고서 연구 과제로 연구해 파고 들어가 보면은 뭣인가 틀린 것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교인들이 되면은 교역자가 마음대로 벌소리를 하지를 못하게 되고 또 그런 실수되는 것이 파묻혀지지를 안하게 되기 때문에 교역자들은 설교록을 그렇게 권장해서 읽도록 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교역자라는 것을 교인들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또 총공회에 교인들이 참석해서 이 모든 행정의 정신이나 사상이 어떻다는 것을 교인들이 모르기를 원합니다. 왜? 자기가 알면은 그 간섭을 많이 받게 되고 제재를 많이 받게 되고 모든 비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싫어한다 말이오. 이런데 교인들은 참석 안 하지 교역자는 참석해야 된다는 그 권면을 해 주지 않습니다.

이거 교역자를 우리 동역자로 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금 말을 내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일방적인 지식을 가지고는 안 되고 모든 면을 다 될 수 있는 대로 그 보는 눈이 넓고 또 다각도로 알아서 우리는 무슨 대국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에게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신 것은 전부를 다 알아야 된다 했읍니다. 전부를 다 알아야 된다.

이러기 때문에, 땅위에 종교들이 많고 철학들이 많고 모든 세상에 지식들이 많지마는 성경을 보고서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 몇만분의 일도 안 되는 그 부분 지식을 가지고 날뛰는 것이기 때문에 거게 대해서 그것을 정평하는고로 그들에게 그 실패될 그런 미래를 말해 줄 수가 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전체주의입니다. 전체주의라 말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다 망라해 가지고 거게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이 전체 지식입니다. 또 세상에는 전체주의라 하는 것들이 그런 철학이 있지마는 전체주의 그것도 샘 안에 개구리 모양으로 일부분을 말하고 있지 창조주가 어떻게 하는 그분의 주권 의지 개별 섭리라는 여게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있읍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교역자들도 이 면을 회개를 해서 어짜든지 성경을 교인들이 바로 알면 나도 바로 알게 됩니다. 내가 삐뚤어지면 교인들이 말하니까 교인들에게 교역자가 배우고 교역자에게 교인들이 배워서, 교역자는 교인들을 기르고 교인들을 교역자를 길러서 이래야 지금 상호 관계에서 올바른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지 자기가 독단으로서 자기는 기를라고만 생각하고 기름을 받을 그 위치에 있는 것은 모르는 그 사람은 자기는 결국은 일방적 신앙을 가지고 나중에 가 보면은 참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그런 그 구원 성취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난밤에 증거하던 말씀을 다시 봉독했는데 제가 마음에 그 안타까와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안타까와하는 그것보다도 내가 내게 대해서 안타까와하는 사실이 있는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간증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5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하는 것은 우리 성경으로 해석하면 이 길은 무슨 길인가? 우리의 일생 동안 살아나가는 우리의 미래는 다 이 길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가리켜서 길이라 말합니다.

현재와 미래를 가리켜서 길이라 하는 것인데, “길에 있는 동안에 사화해라” 급히 길에 있는 동안에 사화하라 말은 네가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이 현실에서, 현실과 미래인 이 세상살이에서 세상살이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하라 하는 그 말씀입니다.

길에서 좇았다 하는 이 길은 곧 자기 현실에서부터 주님을 따르는 걸음으로서 세상 떠날 때까지 주님 따르는 그 걸음을 가리켜서 길에서 좇았다 이렇게 말했읍니다.

그러면 자기가 길에서 지금 기다리고 있었다 하는 그 길은 그가 주님을 바라보는 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서 이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이 현실에서 예수님 만날 때까지 자기 현실 그 구원 이루는 그 신앙 생활은 전부 예수님 만나는 그 하나에 다 집중하고 전력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랬는데,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신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그 믿음이 제게 대해서는 제일 마음에 아쉽고 마음에 참 기가 찹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이제 모든 성경에 보면은 “너는 믿음이 적은 자다” “믿음이 모자랐다” 그 믿음에 대해서 칭찬한 사람들은 다 그 성공을 다 봤지 성공 못 본 사람이 하나도 없읍니다.

이랬는데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바디매오가 가진 그 믿음은 예수님이 보시고 그 모든 불행에서, 불행에서 완전한 구원을 받기에 넉넉한 그 믿음인 것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셨고 말씀하실 때에 그 믿음의 효력으로써 모든 것이 다 해결됐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집에 돌아가서라도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지난밤에도 우리가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가르쳐 주신 것은 다 그것은 뭐 구십구프로나 옳고 그르다. 일프로라도 흠점이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아니하고 거게는 참 백프로, 조금도 그 가감이 없는, 가르침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는 그대로의 되어 있는 그 실상인 것입니다.

그 실상이 다 되어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셔서 그 실상을 우리가 내 실상으로 만드는 것이 그것이 모든 계시에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그 실상이 되어 있는 그것을 내가 믿을 때에 그 실상이 내것이 되어지는 그것이 이 계시되어 있는 모든 계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계약으로 선포해 놓으신 이 계시해 놓으신, 계시라 말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다 하는 말을 계시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에는 문서로 알려 주신 것도 있고, 또 이런 무슨 역사적인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도 있고, 또 이 자연 모든 만물을 가지고 알려 주신 것도 있고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방편이 두 가지라.

처음에는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섭리, 인간들의 모든 변동되는 인간의 마음의 구조 이런 것을 가리켜서 자연계시라는데 이 자연을 가지고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 하나님을 뜻,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소망, 또 이 세상의 모든 중요한 요긴한 모든 필요 있는 것을 다 우리에게 그 자연계시로 알려 줬읍니다.

이래 가지고도 그것으로서 알지 못하고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자연계시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는데 그때는 자연계시라 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에는 다만 “이것 먹으면 네가 죽는다, 이런 거는 먹고 이건 먹지 마라.” 그것만이 특별계시로 나타났지 다른 거는 다 자연계시인데 타락되고 난 다음에 구약의 이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고, 더 타락되고 난 다음에 또 신약 계시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다음에 또 더 타락하면 더 주실 것인가? 그거는 더 주시지 안할 것을 이 계시 마지막에는 다시 여게 가하거나 감하거나 하는 것을 할 수 없도록 끝맺음을 지워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읍니다.

이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식으로 정확 무오하게 알려 주신,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이 실상, 알려 주신 이 실상을, 하나님은 전능이라면 전능 그 실상을, 이 계시로 알려 주신 그 실상을 우리가 아는 것만치 우리는 그 계시대로 행할 수 있고 행한 것만치 그 결과의 효력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로 우리에게 참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읍니다. 알려 주신 거는 뭐이냐? “너희들은 이렇게 복되다.

너희들의 배경은 이렇게 크다. 너희들의 소망은 이렇게 크다.” 땅위에 있는 모든 것과 계시해 주신 이 계시 안에 있는 우리의, 우리가 등댈 수 있는 우리의 배경이라든지,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이라든지, 그분에게 모든 걸 맡겨놓고 살 수 있는 것이라든지, 의심하지 안하고 그 지도를 받을 수 있는 분이라든지,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라든지, 또 우리가 이렇게 해 가지고 그분의 도움으로써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 돼서 자존자이신 완전자이신 하나님 한 분 다음가고 모든 천상 천하에 영계와 물질계에 있는 모든 존재 위 가는, 자존자 한 분 밑에 영계나 물질계의 수많은 피조물 위에 가는 이 위치에 앉는 것이 우리들이고, 우리의 할 일은 그 무한하신 그분의 것만을 얻어서, 그분에게서 얻어서 그분의 무한한 것을 우리가 뭐 다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그것이 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주님은 다 받으셨는데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다 내게 주셨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에게 준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어서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내가 다 받았다. 그와 같이 그 사랑, 그 능력, 그 실력, 그 소유 가지고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니까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으리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그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그와같은 꼭 동류의 실력, 동류의 희망, 동류에 효력, 동류의 속성 이것을 가지고 너희들을 사랑하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들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어, 내가 그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어 모든 것을 상속받은 거와같이 너희들이 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있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너희들의 것이라. 내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은 거와같이 너희들도 이기면 나의 보좌에 함께 앉으리라.” 이렇게 약속하신 이 약속을 우리가 뭐 새겨 본다면은 이거는 우주가 그와 비교가 되겠읍니까? 세상에 사람들이 이거 저거 시비하고 소망 가지고 뭐 이런 거 저런 거 자랑하고 있지만 그까짓 것들은 다 썩은 것들이오. 다 사망 이하에 있는 것들이오. 그거 가져 갈 것 아닙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가진 그와 같은 것들이오. 다 썩은 것들이오.

그것들도 우리가 믿음으로 가지면 우리가 땅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실상으로 무궁세계에 가서 누리지 하나도 썩는 데 이르지 않습니다. 돈을 가졌느냐? 가진 돈이 하나도 죽음 너머 하나도 효력이 없는 돈이 있고, 돈을 가졌느냐? 그 돈이 한 푼도 감함이 없이 오히려 뭐 수천 배로 확대해 가지고 무궁세계에 우리에게 효력이 있을 수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에 약속돼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둬라. 그러면 거기는 좀도 동록도 도적도 해하지 못한다.” 이뭐 계약을 보면은 말할 수 없는데 이 계약되어 있는 이 실상을 보는 눈이 우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계약되어 있는, 계약되어 있는 계약의 이 실상, 이 계약의 실효, 이 계약에 이루어질 결과 이것을 우리가 보는 것만치 우리가 안심할 수 있고, 보는 것만치 우리는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하는 것만치 그 결과를 볼 수 있는데 여게 대해서 우리는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계약에 대한 것을 그 실상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이것이 우리가 비참한 원인이요, 비겁한 원인이요, 조급한 원인이요, 천대받는 원인이요, 멸시받는 원인입니다.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됐기 때문에 사람에게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전능을 믿어서 내가 전능자가 됐는데 전능자를 누가 멸시하겠읍니까? 영계와 물질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다 내것이요 내 발 아래 있는 것인데 발 아래 있는 것이 어떻게 나를 멸시하겠읍니까? 어찌 멸시 받겠읍니까? 안 믿기 때문에 그 효력이 우리에게 와서 있지 안하니 우리 주관적으로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우리가 효력을 누리지 못하고 객관적으로는 그 효력이 와 가지고 우리에게 실효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가감 없는 이 권위 있는 진실하고 신실한 이 계약을 우리에게 해 주셨고 “나는 너희에게 이런 자가 되겠다.

전능자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모든 것 창조자인데 네 아버지가 되겠다.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 우주나 영계 안에 하나도 없고 다 내가 만든 내가 너 위해서 사람되어 왔다. 너 위해서 가난해졌다. 너 위해 죽기까지 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으면은 우리가 뭣 때문에 우리가 우리 주관적으로 불행을 느끼겠읍니까? 세상은 우리를 몰라서 천대를 한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가 불행이나 천대를 받지를 안할 것이고 또 믿는 대로 그 권능이 같이 오는데. 파사 나라에서는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그 한 계명을 지키면은, 그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그 배후에는 같이 하신다는 걸 그 한 계명을 지켰을 때에 파사 나라에는 확 뒤비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찼고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으로 가득 찼고 믿는 사람을 이렇게 하나님처럼 존대하는 이게 가득 찼는데, 이렇게 효력 있는 믿음인데! 이 믿음이라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능력이라” 로마서 1장 16절 이하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그 능력은 다이나마이트의 그 능력을 말합니다. 폭발력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믿기만 하면은 폭발의 그 능력이 나 가지고 나라도 뒤비지고 사회도 뒤비지고 다 뒤비지는데! 왜정 말년에도 ‘일본 나라가 이와같이 기독교를 일본 국권 아래에, 이 나라의 권세 안에다가 집어넣을라고 하는 것은 마치 큰 산 같은 바위더미를 사접시 안에 담을라 하는 거 같다. 담으면 어찌 되느냐? 큰 바위를 이 사접시 안에다 담으면 어찌 되느냐?’ ‘담으면 사접시가 바싹 깨지지.' 판사가 말했읍니다.

이와같이 일본이 기독교를 일본 정권 아래에 집어 넣을라 하는 것은 일본나라가 바싹 깨진다 하는 것을 판사 앞에서 말했지마는 그 사람이 그거야 뭐 불경죄라고 그때는 사형을 낼 수 있지마는 그 권위 앞에는 말 못 했던 것입니다. 그 나라가 깨지지 안했읍니까? 일본 나라가 깨졌다가 또 살아났읍니다.

이제 성도는 깨진 걸 보고 살고 멸망할 자는 상했다가 다시 나은 것 보고 삽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머리 중에 하나는 상했다가, 상했다가 나은 것 보고 상하니까 ‘아이구 상했다. 이거 그만 안 되는가보다.’ 했는데 새로 나으니까 나은 것 보고 뭐 별수 있느냐? 또 나았다 하고서 그를 높이 봤읍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도에 어겨서 깨진 거 보고 ‘깨진다’ 요것 보고, 깨진 거 아주 깨 버렸으면 그가운데 있는 구원 얻을 자가 구원 이루어지겠읍니까? 또 구원 이룰 자를 위해서 또 새로 치료해서 고쳐서 살려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도대로 깨졌구나’ 고거 보고 깨졌으면 됐어. 깨졌구나 하는 것 보는 사람만 봤으면 됐지 그 이상 깰 필요가 없어. 그라고 난 다음에 새로 치료해서 또 구원에 이용되도록 하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도 그 실상을 보지 못해. 이 하나님이 계시되어 있는 대로 이분인 것을 내가 믿음으로 가지고 확실히 알고 실상을 보듯이, 계시된 하나님의 그 크심을 내가 실상으로 내가 아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은 그분 외에 딴것을 뭘 의뢰하겠읍니까? 또 그분과 동거 동행하는 데에 그 동거 동행 못 하게 할 게 뭐 있으며 세상에서 제재받을 게 뭐 있읍니까? 이런데, 아무래도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이 신구약 성경 이 계시에 기록되어 있는 이 사실의 그 진상을, 그 실력을, 실지의 효력을, 그 실상을 우리가 봐야 됩니다. 실상을 봐야 그 실상을 내가 힘입어 행할 수 있고 힘입어 행해야 그 효력이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시를 “보고 네가 믿느냐? 보고 믿는 자 되어라. 보지 안하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다.”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요걸 가지고 나가면은 그 귀신이 들어서 여러분들 속에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 복있다고 했는데 자꾸 백 목사는 계시되어 있는 것을 봐야 된다고 자꾸 그라네. 보는 자가 복있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보지 못한 자가 복있다고 말하는데.’ 그 말씀이 틀립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있다” 말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된 것을 우리가 그것을 믿고 믿음으로 실행을 하면은 그 실행의 결과로 실상이 나타납니다. 계시 가운데 있는 실상을 보고 본 자라야 실행할 수 있고 실행한 자라야 그대로의 자기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것을 미리부터 말씀하셨는데 말씀한 것을 듣고 부활하실 것을 실상으로 자기가 알아서,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실상으로 자기가 보고 실상으로 알아 가지고 부활하시기 전에 십자가 못박혀 죽으시는 걸 보고서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울고 야단이니까 ‘부활하신다, 보라! 죽었기 때문에 부활하신다!’ 믿는 그자가 제일 복이 있고, 그자는 없었소.

제자들 가운데 그런 믿음 가진 자는 없었어.

그 다음에 마리아가, 부활하니까 ‘아이쿠, 주님 부활하셨다’ 놀래서 기뻐하고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 전하라 하니까 전하니까 ‘주님이 부활하셨다’ 하니까 듣고서 ‘부활하신다 하더니만 참으로 부활하셨는가보다’ 부활하셨다는 말을 믿었읍니다. 그 사람이 이등으로 복있는 사람이요, 삼등에 도마는 ‘우리가 다 봤다’ `나는 믿지 못한다. 내가 손가락으로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를 만져보고야 본다.’ 이라기 때문에, 그 믿음의 효력의 실상이 나타난 그 결과를 다 보고야 아는 그자야 무슨 복이 있읍니까? 그 도마가 셋째로 제일 삼등 복있는 사람이오.

눈으로 봐도 ‘무슨 환상이 나타났나? 딴 사람이 나타났지 예수는 아니겠지.’ 하는 그 자는 멸망이요 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일등 복있는 사람은 없었어. 일등 복있는 사람은 보지 못하고, 부활하시기 전에 주님의 말씀 보고서 부활할 것을 믿는 그 사람이 일등으로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말해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구약에 이렇게 정확무오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을 우리가 그 말씀의 실효를 실상을 우리가 아는 사람 돼야 됩니다. 보는 사람 된다 말은 이것도 비유입니다. 이 육안으로 보기 때문에 보는 걸 말하는 건데 실상 알도록 하기 위해서 본다고 말하는 것이지 실상은 안다는 걸 말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 실상을 우리가 봐야 합니다.

실상을 봐야 합니다. 실상을 봐야, 실상을 알아야 말이요, 봐야 된다 말은 안다 말이오. 그 실상을 알아야, 제가 실상을 아는 것만치 행합니다. 실상을 모르는데 어떻게 행합니까? 실상을 다 알면 다 행할 수 있읍니다. 행해야 자기 의가 됩니다. 행해야 자기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 바디매오를 통해서, 그는 자기가 불행한 걸 알았는데 우리는 불행한 걸 모릅니다. 왜 신구약 성경에 이렇게 모든 피조물에 으뜸 가는데, 으뜸이 갈 수 있는 우리들인데 이 피조물 중에 찌끄러기 찌끄러기보다도 천해져서 그렇게 천대를 받고 있읍니까?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가진 자가 뭣 때문에 물질 몇 푼에 종이 돼 가지고 있으며 참 말할 수 없는 미약한 중에 미약한, 미약한, 성경이 말한 데는 이거 짐승이라 했는데. 짐승을 보고 부러워하고, 성경은 말하기를 타락 후에 마귀란 놈이 준 지식인데 이 지식을 이것을 자기가 최고로 존대하는 따르는 이 지식으로 아는 그자를 가리켜서 음행의 포도주를 네가 마셨다. 그게 음행의 포도주다.

음행의 포도주라 말은 그걸 많이 먹으면 하나님과 너와의 그 사이가 벌어진다.

하나님에게 대한 정조를 뺏기게 된다. 그것을 네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돕기 위해서 그런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선물로 가지면 선물이 된다. 이 세상 지식도 선물로 가지면 선물되고 음행의 포도주 되면은 음행의 포도주 된다.

뭐 성경에 다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인데 이 사실을 우리가 사실로 알지 않는 데에서, 사실로 보지 않는다 말은 알지 않는다 말이오. 보지 않는다는 말은 알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러니까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실상을 우리가 실상으로 아는 것만치 자기는 거기 대해서 효력을 바라볼 것이고 아는 것만치 자기는 효력의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인데 여게 대한 그 실상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억만장자가 거지같이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지로 밥먹을 것 없다고 탄식하는 거와 마찬가지지 그보다도 우리는 더 미친 자요 더 정신 없는 자입니다.

이런데 이 눈을 뜨이는 데는 무슨 순서로 뜨이느냐?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이렇게 백만장자지마는 아침 먹을 거 없다고 지금 쫄쫄 곯고서 근심 걱정하고 있는 그자가 미친 자라면 우리는 몇천 배 미친 자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우리에게 약속돼 있는 거는 전부 내것인데, 믿으면 내것 다 되는데.

이렇게 우리가 그와 비교할 때 너무 비참하다는 것. 이것은 바디매오가 보지 못한 원인으로써 그와같이 비참하게 된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이 하나도 거짓 없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약속하셨고 가르쳐 줬어.

방편은 가르쳐 주셨고 낱낱이 약속적인 계약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했으니 네가 이렇게 행하면 내가 이렇게 해 주겠다” 전부 계약 조건의 가르치심이오.

이것을 우리가 실상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실상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눈이 어두워. 실상으로 아는, 실상으로 아는 실상으로 인정할 때에 우리는 거게 대해서 행동이 나오고, 실상을 아는 것만치 행동 나오고 행동 나온 것만치 그 실효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 이러기에 “믿음은 바라보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첫째 일호가 비참한 걸 알아야 될 터인데 우리가 비참한 자체라 하는 것을 아는 기독자가 없읍니다. 안다고 해도 억억억억?만분의 일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그분이 주권 개별 섭리자이신 것과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내 앞에 공산주의 독침이 와도 땅위에 버러지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들이나 인간이나 무엇이든지 이 모든 자연계나 이 모든 어떤 것이라도 털끝만한 것이라도 움직이는 것은 그분이 주권으로 섭리해서 움직이는 것이지 개미 한 마리가 수염을 요리조리 흔드는 것도 그분의 주권 개별 섭리로 요래 하라 할 때 요래 했지 주님이 요래 하지 안하면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에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있다” 이랬어.

만유시요 만유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만유라, 일만 만자 있을 유 자를 말했는데 만유라 말은 땅위에 모든 존재는 그리스도라 그말입니다. 알겠읍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가운데 만들었고 그 속에 또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그 모든, 그것이 생겨질 때부터, 모든 존재가 생겨질 때부터 그리스도로 생겨졌고 그것이 끝날 때도 그리스도로 끝나고 그 속에도 그리스도로 가득 차 가지고 있는 이 그리스도다. 만유 안에 계신다.

이 사실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비참해진 요것을 알고서 정말 우는 사람이 우리가 돼야 됩니다. 우리는 너무도 외식이요 참 기 차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믿습니까? 믿느냐 하면은 우리 현실에 우리 현실은 전부 믿느냐 안 믿느냐 시험이오. 하나님의 권능을 믿나 안 믿나 시험이오. 하나님의 약속의 부요를 믿나 안 믿나 시험이오. 백 배나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이 세상 것을 줄 터이니까 믿나 안 믿나 시험이오.

우리 현실에서는 이 신구약 성경에 이 자연의 축복 이 세상 축복도 계약해 놓은 것을 이걸 ‘말로 그렇게 해 놨지 실상 그리 될 줄로 믿느냐?’ 하는 게 우리가 아닙니까? 이 실상을 당할 때에는, 이 현실을 당할 때는 믿는, ‘요래 행하면 요래 된다’ 하는데 믿는 사람이 누가 있읍니까? 우리의 비참한 것을 모르는 이것이 우리의 불행 중에 제일 불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놓은 이 계시를 우리가 실상으로 알지 않기 때문에, 어누리를 막 해서 전부 거짓부리로 하고 실상으로 우리가 다 알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게 제일 불행인데 알지 못한 이 불행을 알고 이 알라고, 이 계시를 실상으로 알지 않는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란 걸 알고 실상으로 아는 요 믿음을 가질라고 애를 쓰는 데에는 바디매오가 어떻게 애썼느냐 그 순서가 와 있어. 그대로만 하면 돼.

길에서 이것만 기다리고 있읍니다. 딴거 안 하고 길에서 앉아서 예수님 만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의 일생이 이렇게 모든 이 계시에 되어 있는 이 사실을, 실상인 이 실상을 아는 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실 이는 주님밖에 없으니까, “내가 너를 보게 하면 보리라. 너희들이 본다 하므로 죄가 있다.” 본다 하므로 죄가 있다 무슨 말이요? 이 마귀 지식 가지고 이 세상 지식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판해서 세상 지식으로 있다 하니까 있는 줄 알지 성경에는 없다. “홍포 입은 부자야 네가 모든 거 구비해도 물 한방울도 네게는 없다” 하는 이 지식으로는 보지 안하고 이제 있으니까 있다 했는데, 자기네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조만간에 그게 실상으로 하나님 말씀하신 그대로에 실상을 당도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언제 당합니까? 십 년 후에 당합니까 일 년 후에 당합니까 언제 당합니까? ○○○목사님, 언제 당합니까? 몇 해 후에 당합니까? ○○○목사님, 몇 해 후에 당합니까? 귀가 안 뚫혀서 몰라. 못 들어. 언제 당해? 오늘 당할지 몰라! 이 시간에 당할지 몰라. 우리가 예배 보고 가다가 당할지 몰라. 숨 떨어질지 몰라. 안 들려. 암만 말해도 안 들려.

여러분들 귀도 뚫혀야 되고 눈도 뚫혀야 됩니다. 뚫히지 안하기 때문에 항상 말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 말과 꼭 같소. 소망도 세상 사람 소망과 같소. 평가도 세상 사람 평가와 같소.

세상이 모르는 평가가 우리의 평가요, 세상이 모르는 비판이 우리의 비판이요, 세상이 모르는 지식이 우리의 지식이요, 세상이 모르는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요, 세상이 모르는 승리가 우리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에 영원토록 완전 승리했건마는 누가 예수님을 승리했다고 봤읍니까? 세상이 모르는 것을, 이러기 때문에 요한일서 3장에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했지마는 하나님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를 몰라요.

우리도 우리가 이 받은 구속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마다 다 뺏겨서, 마귀에게 다 뺏겨서 이 현실에 구원 다 뺏기고 말았지 우리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길에서 그는 예수 만나기만 고대해, 예수님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는 예수님 만날라고 호소했는데, 많은 것들이 방해할수록이 방해에 제재받지 안하고 더 호소했다, 예수님이 오라는 소리 듣고 난 다음에는 뛰어 일어났다,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갔다,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요게까지가 결론된 신앙이니 바디매오의 구원을 이룬 신앙은 요게까지의 신앙이니 그 순서를 잡아야 될 터인데, 겉옷을 버렸읍니까? 많은 사람들이 방해하면서 잠잠하라고 할 때에 그 모든 세상의 방해, 사업이 방해하고, 인간이 방해하고, 가족이 방해하고, 자기의 생명이 방해하고, 자기의 몸의 건강이 방해하고, 모든 이 피조물들이 방해할 때에 그 방해를 역항해 가지고 우리가 만나기 위해서 방해를 돌보지 안하고 우리가 돌진했읍니까? 다 거짓부리입니다! 다 거짓부리요! 고치지 안하면 다 헛일입니다.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이것만 헛된 구원만 이루어 가지.

왜? 과거에 왜정 말년 때도 신사참배 그까짓 거야 뿌스러기요. 뿌스러기인데 그거 나와도 그 조선 교회는 다 쓰러졌읍니다. 조선 교회에서 그때 신사참배에 이긴 사람이 얼마나 있읍니까? 일본에 있는 천황을 여게서 보고서 절하라는 그게 다 우상화시키는 거 아닙니까? 황거요배를 이긴 사람이 한국에 몇 사람이나 됩니까? 아무 싸움 없이 하는 그거는 상대가 없고. 그들과 시비해 가지고 시비해서 기어코라도 신앙으로 이겨 나간 사람이 몇 사람이나? 열 사람 이내일 것입니다! 확신합니다! 다 못 봤기 때문에 그렇지.

전능자가, 전능자가 “어짜는고 보자” 숨어서 엿보시는 전능자의, 나를 이렇게 전능의 능력의 보호를 해 주시면서 엿보고 계시는 그분의 안면을 봤다면은 누가 용진으로서 그때 승리 못 할 자가 누가 있겠읍니까? 우리의 가련한 것을 압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저도 이번에 내가 결심하기를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새벽기도 또 대예배 세 번 내가 빼지 안하고 내가 꼭 계속하겠다. 혹 무슨 필요가 있을 때에, 내가 안 하는 게 아니고 더 필요를 위해서 강도사 시취 설교할 때와 같은 그런 때와 같은 때 이럴 때는, 또 재독해야 될 때는 그럴 때 하나 내가 한 그 제단도 빼지 안하고 계속하겠다.’ 늘 이래 가지고 늘 계속해 나왔읍니다.

나왔는데, 내가 하나 눈이 뜨여져서 하나 본 것은 ‘내가 이것만 가지고 자꾸 이래만 할 게 아니라 내가 실상 이거 눈이 멀어서 지금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 실상을 내가 보지 못한다.’ 그래서, 지나간 일주간 동안은 설교한 것을 재독을 하라 하고, 이 사회나 하고 설교는 재독으로 하라 하고 그래 가서 좀 산에 가서 한적한 곳에 가서 얼마 동안 좀, 월요일날 가 가지고 토요일날 오도록 있었읍니다.

그때 나는 하나 좋은 걸 하나 봤읍니다. 눈을 떠서 하나 좋은 것 하나 봤읍니다.

좋은 것 하나 봤는데 지난 주일날 내가 본 것을 여러분들에게 자랑을 했읍니다.

또 오늘 내가 여러분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나는 금년에 나이가 칠십여덟입니다. 이러니까, 이제는 뭐 구원 이룰 시간이 얼마 남지 안했다. 이제 뭐 다 모두 그런 줄 알고 서지도 옳게 못 하고비틀거리니까 구원 이룰 시간이 적다 하는 것으로서 마음에 항상 탄식을 했는데 그것을 해결을 받았읍니다.

왜? 내가 눈을 뜨고 보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칠십 팔십 백 세를 넘어서라도 구원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팔린 자이니 자기는 자기 것이 아니요 주의 것이오. 자기 마음 안에는 그리스도가 내주하시고 자기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가 자기 마음 안에 내주하시고 움직이는 거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움직이는 것 요 세 가지가 되는 그것만이 구원이지 그 외에는 구원이 하나도 없다. 백 세를 살아도 한 시간도 그렇게 구원 이루지 못하면 기본구원뿐이지 없다.

네가 지금 일 년일랑 냅두고 한 달을 산다 해도 한 달 동안을 네가 네 마음 속에 주님의 것이라는, 주님의 것인 것을 네가 인식하고 있는 거 ‘내 눈이다, 내 몸뚱이다, 내것이다.’ 네것으로 되찾을 때에는 옛사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당시에 구속은 확 벗어버렸다. 상관이 없다. 네가 네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인 것을 네가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있는 그것이 하루가 있으면, 네 안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네 안에서 주장하셔서 네 안에 내주하시고 주장하시고 너는 성전이 되고, 네 언행심사 생각이나 뭐나 그런 것이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이제 발원되는 거게 피동되는 삼각 요것을 네가 하루만 해도 백여 년 동안 세상에서 살면서 예수 믿어서 장로 목사 노릇한 그것보다도 구원은 더 많다, 크다. 요것만이 구원이다.

그라고 나서 보니까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할 때에 영생이 이루어졌는데 우리가 다한 그것을 보면 하나도 없어. “네 행위의 온전한 걸 내가 하나도 찾아보지 못한다”고 말씀했읍니다.

이러니까, ‘남은 시간이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요 세 가지가 계속되는 것이 문제다’ 하는 것을 발견했읍니다. 계속되는 것이 문제다.

내가 과거,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내가 과거에 산 것을 뭐 목사라고 그래도 말을 했고, 뭐 부흥사라고도 말을 했고, 또 설교도 많이 했다고 알고 있고 이러나 과거 내가 내 생활 내가 생각할 때에 요 세 가지가 계속된 생활이 내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내가 계속된 것이 무슨 십 분이 있었던가? 십 분도 없었다고 내가 인정이 됩니다, 나는. 십 분 전에 벌써 내 생각도 옛사람 생각, 제 생각인 줄 아나 옛사람 생각이지. 주님으로 안 인했으니 옛사람 생각이지.

이래서, 내가 칠십팔 년 오늘까지 산 모든 것은 다, 다 헛된 허공을 쳤고 구원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칠십팔 년 산 그것보다 하루를 내가 바로 살면 요것이, 하루를 바로 살면 요것이 내 구원에 그 수입의 양은 더 크다 하는 것을 이번에 내가 발견을 했읍니다. 봤읍니다.

이래서, 내가 설교는 했지마는 그리스도에게 피동되어 설교하지 안하고 옛사람 내가 들어서 설교했고 내가 들어 호령쳤고 내 속에는 내가 주인됐었지 그리스도가 내 주인되지 못하고 산 때가 너무 많았어요. 제가 이번에 본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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