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과 결합


선지자선교회 1985년 9월 4일 수야 

 

본문 : 베드로후서 3장 6절∼13절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것이 이번 닥쳐오는 주일 유치반 중간반 공과 공부가 되겠습니다. 전에 말한  대로 우리는 일곱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노아 홍수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귀넘어 듣고 모두 땅의 일로  분주해서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여덟 사람만 의인이  됐었습니다. 아래서 노아의 여덟 식구만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얻었고 남은  사람들은 땅 위에 그때도 지금 같이 좀 양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거의 비슷한  모든 세상이었지만 그 모든 것은 다 홍수 밑에 매몰되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는데 사람들이 그때에 땅의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예언으로 선포하신 이  불심판에 대해서 무관심한 거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 때도 그때와 꼭 같이 땅의  것에만 분망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이 불심판 멸망에 준비를 하지 안하는 것이  같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에 크게 각오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강퍅케 하지 안하도록, 완패하게 만들지 안하도록  스스로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경건치 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그라다가 다 불로 심판하신다 그렇게 했습니다.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 때에 멸망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다 의인이 되라고 많이 권고를 했지만 다 듣지  안하고 땅에 속해 살다가 멸망받았는데, 지금 이 하늘과 땅이 있는 것은 의인을  만드시는 이 역사가 끝나면 모든 것은 다 불로 사뤄서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둘째로는 우리가 기억해야만 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그러면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신 것이라' 그러면 경건은 뭐 인고 하니, 경건이라는  것은 의를 만드는 그 방편을 가리켜서 경건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의인을 만들라고 애를 쓰다가 그 의인 만드는 역사가 안 될 것은 안 되고 될  것은 되고 이렇게 판정이 나면 의인을 만드는 역사가 끝나면 하늘과 땅은 다  불로 사뤄서 원소로 돌아가 버립니다. 원소가 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는 다 멍얼멍얼한 그저 물도  아니고 또 무슨 단단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되어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 가운데  운행하셨다 이랬습니다. 그라다가 하나님이 여문 것은 여문 것으로서 그렇게  나누고. 물은 물로 나눠서 여문 것은 지구 땅덩어리도 되고 또 우주 가운데  수많은 뭐 별들도 되고. 또 그 외에 것은 이 우주에 물로 가득 차 있고. 물  액체와 고체로서 이렇게 되어 있고 그 가운데 비어 있는 것은 공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둘째로 기억할 것은 오늘 우리가 보고 접촉한 이것이 하나님이  의인 만드는 역사가 끝나면 이것은 다 불사른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것도 언제 될란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면 세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그 사랑의 긍휼성을 가리켜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치 아니하고, 멸망을 피하여야 할 구원 준비를 할 시기는 없는데  강퍅과 완패를 부리고 있으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천 년이 하루같이  지나가는 것으로 세월은 자꾸 빨리 빨리 지나가는데 구원 준비를 하지 안하니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그 심정을 발표했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다  그말은 이렇게 경건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의 악에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나  또 그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하늘과 새 땅을 어서 주어서 이 모든  죄악이나 불의한 것들이 없는 이 나라로 다 옮겨서 영생하도록 해야 하겠는데 그  의인들을 향해서 생각할 때에는 하루가 천 년 같아서 세월이 안 지나가서 애탄다  말입니다.

여기서 세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대속물로  보내실 뿐만 아니라 또, 그 후에도 우리의 회개하기를 심히 고대하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 생할 해 나갈라고  하면 여러 가지 생각 밖에도 애로들이 많이 있고, 또 이해 못 할 그런 모든  굴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악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안해야 됩니다.

네째로, 우리가 또 생각할 것은 그러나 10절에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 다른 데에 많이 말씀했습니다. 노아 때도 모든  사람들이 오리라 생각지 아니한, 뜻밖에 오셔 가지고 다 멸망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도 하나님은 늘 말씀하시고 성경에 여러 군데 기록해서  우리에게 경고를 하시지만 우리 사람들은 땅에 취해 가지고 그만 여게 대해서  아무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공연한 사욕과 허영 허욕에 분망해 가지고 땅의  것만 보고 거게 기울어져 있다가 갑자기 주님의 재림을 닥치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인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은 말씀하시기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도적같이 오지를 안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주의 이 재림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고 그때에 걸리지 안하도록 자기를 준비하고 단속하는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실 때에 오히려 영광이 되어지지 후회하거나 도적 맞거나  자기의 소유나 자유나 그런 것이 다 없어지지 안 하고 오히려 세상에게 눌려  가지고 있던 것이 도리어 활발스럽게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섯째로는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나리로다' 했습니다. 하늘은 불에 타서 풀어지고 모든 체질은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데 모든 일이 드러난다 이랬습니다. 드러난다 말은 그때에 이제  의로운 것과 불의한 것이 드러납니다. 지금은 다 모두 제 각각 의롭다고 스스로  속아서 위로를 받고 있고, 또 어리석게 주관적 인정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하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바울은  자기 양심에는 자책할 것이 없을 만치 깨끗하게 준비했지만 하나님이,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심판하실 거기 때문에 그분 앞에 가면 어떤 흠점이  드러날까 해서 한 가지도 자기는 이거는 됐다 완료를 시키지 못하고 항상 하나님  앞에 잘못됐는가 해서 긍휼을 구하면서 그렇게 살아간 것이 사도 바울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드러나는데 그때는 뭐 사람들의 입으로 증거하는 그것이  소용이 없고. 그저 하늘과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심판의 불에 타서 다  원소로 이렇게 녹아질 때에 그때에 이 불에 타지 않는 것은 의요 타는 것은 모든  불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불로서 불의한 것과 의로운 것을 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에는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모든 사람의  공력을 시험할 터인데 공력을 시험하는 것은 불로 시험한다, 비유입니다. 불로  시험하는데 그 공력이 불타면 기본구원은 얻었지만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같이 영원히 수치스러운 그런 구원을 얻고 자기 공력이 불타지 안하면 상을  받는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섯째로 여기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은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제 이 불에 소멸되지 안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두 원소로  다시 돌아가게 한 이런 것들을, 만물을 새롭게 한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 재창조입니다. 이제 이미 창조된 거는 창조됐지만 그것을 다시, 모든 형체를  다 없애고 원소로 돌아가게 해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제  모든 것을 다시 재창조해서 만물이 그때는 새로와져서 그것들도 영원히 멸하지  안하는, 불의가 상관없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이 지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의인들은 거게 가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일곱째로 기억할 것은, 그러면, 의로운 것을 만드는 방편을 일곱째로  말씀해 놨습니다. 의를 만드는 방편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의를 만드는 데에는 거룩과 경건으로 만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한다는 뜻인데. 우리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과 어찌되나  말씀과 서로 대조해 가지고 틀리고 안 틀린 것을 그것을 우리가 선별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자기의 양심과 이것이 어찌 되노 해서 양심과 한 번 비교를 해서  비판을 해 봅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  말씀한 거와같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제도를 하나님이 사람들을  시켜서 조성했다' 이랬습니다. 모든 제도를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랬는데, 그 제도  만든 것은 이 불탈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해 가지고 제도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세워 놓은 이 제도를 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반적 종들을 통해 가지고  제도를 세운 것이기 때문에 이 제도를 주를 위해서 순종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를 위해서 순종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만든 제도, 윤리라든지 도덕이라든지 또  사회성이라든지 모든 예의나 그런 모든 온갖 법이나 이런 것이 다 사람들이 세워  놓은 제도입니다. 그러면 이 제도와 어찌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또 참고로 해  가지고 거룩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우리에게 떠날 수 없는 이 물리가 있는 것이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과학이라고 말하는데 이 물리와 무슨 또 배치가 되지 않느냐 이래서  하나님의 성경 말씀과 내가 이 현실에서 언행 심사로 내 행위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과 어찌 되는가 해서 이거 구별하는 것이 이것이 거룩이요, 또 그 구별을  하고 난 다음에는 이것은 우리가 따라갈 것은 아닙니다만 내 양심이나 또 인간의  제도나 모든 이 물리의 과학이나 이런 것을 참고로 삼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데에 이런 것들을 참고로 삼으면 거기에 배치된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배치된 것이 대개 많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거는 인간들이 세운 제도라도 인간으로서의 모든 옳은 것을.

옳은 양심을 가지고 세워 놓은 그런 제도들이기 때문에 그것도 절대성 가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에는 대단히 참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고로 삼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감을 자기가 받아  가지고 영감과 이렇게 대조해 가지고 거기서 구별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에 어찌 되느냐. 그 성경 말씀과 일치가 되는 그런 것을  먼저 선별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 양심으로 이것이 옳은가 한번 생각해 보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인간들이 세워 놓은 이 제도와 어찌 되는가 한번 또 참고를 해  보고, 그다음에는 이 물리와 어찌 되는가 이런 것을 참고해 보면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는 차차 좀 밝아지고 깨끗해지고 좀 정확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감을 맞이해서 영감과 일치가 되나 안 되나 그것을  대조해 가지고 영감에 일치가 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서 영감에 일치해서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지 말라고 우리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바로  할라고 할 때에는 성신의 감화도 오고 악령의 감화도 우리에게 미혹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 벌써 문서법인 이 진리와 일치가 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 양심과 일치가 되고, 그 다음에는 모두 인간의 제도와  또 이 물리와 일치가 되면 거의 그것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영감을 만날  만한 그런 준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영감과 일치되는 그것을  찾아 가지고 영감과 일치를 시키고, 그러면 진리와 영감을 내가 찾아 가지고  진리와 하나 될라고 영감과 하나 될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주관  행위입니다.

 우리 주관 행위가 그 객관을 따라서 갈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인데, 그래서  영감과 일치가 되면 그런 가운데에서 마지막에는 내 주관은 그런 가운데에서  차차차차 이것은 삭아지고 이것은 차차차차 그렇게 소멸하게 되어지고, 이제는  내가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안하는 이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차차차차  보여져서 뚜렷하게 됩니다. 뚜렷하게 되면 이재는 이 하나님께 내가 복종하는 게  아니고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나는 나를 맡겨서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시고 나는 그 분에게 지배를 받는 그런 단계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체와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룩은 절대성 있는 이 셋에는 내가 따라서 따라감으로서 맞아야 되고,  이 따라가서 맞추는 이것이 바로 됐나 안 됐나 하는 것으로 참고로 이렇게 삼아  가지고 그 보조의 그 법칙으로 우리가 참고해 보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까 그  세 가지는 우리의 양심과 인간의 세운 제도들과 모든 이 물리라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렇게 대조해 가지고 참고로 삼아 가지고 차차차차  내가 진리와 거리가 가까워지고 나중에는 일치가 되어지고 영감과 일치가  되어지는 가운데에서 자존하신 하나님이 크심을 깨닫고 그분에게 이제 나는  복종하다가 그분이 나를 주관해서 그분에게 피동되는 사람으로 자꾸 이렇게 점점  성화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이오.

그 거룩과 경건이라 말은, 경건이라 말은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중심하고  위주로 해 가지고 이 모든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이것인데, 그러다 보니까  자꾸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나아가게 되니까 나중에 가서  그것이 결합이 됩니다. 결합이 지극히 큰 이 세 능력과 결합이 되는 것이 그것이  의입니다.

 이래서 지극히 큰 세 능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고 하니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전지, 전능, 영원, 완전 불변 주재 주권 이렇게 자존하신.

피조물이 아닌 자존하신 하나님을 셋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우리에게 나타났고. 그 본체가 역사하는 그 역사를 가리켜서 성경에  영감이라 이렇게 말씀했고, 또 영감이 우리에게 와서 부딪쳐 가지고 역사할 때에  그것을 진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없는 가운데서 만물을 지으신  것은 진리가 지었고. 만물을 지은 진리가 처음에 하나님께서 나을 때는  영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체에서 하나님의 역사인 영감이 나와 가지고  영감이 모든 만물을 짓게 될 때에는 그 진리가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셋은  하나입니다.

 이래서, 모든 것이 불타나 이 의는 영원히 타지 않는 이 의는 무엇이냐? 이 의는  이 셋과 결합된 것이 이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와 우리 본체가 결합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본체와 우리와 결합이 되는 것은 그 분을 숭배하고 소망하고 그  중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거기에 속하게 되어서 그 본체와 결합이 되어지고. 또  그 본체의 역사인 그 영감과 우리가 결합이 되어지고, 또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시는 그 성경 말씀인 이 진리와 결합이 되어지고 이 셋과 결합이 되어지는  것이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의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번 공과에 그 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해 놨습니다. 이 모든 죽은  의가 있고, 인간들이 만든 인본의 의가 있고 인조 의가 있고 이 가짜 의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들의 주관으로 만들어 낸 법칙을 맞추어 가지고 결합된 것을 의라고  하기 때문에 그거는 인본의 의요 인간 자유의 의입니다. 그러나 여게 심판의 불에  타지 안하고 영원히 멸망받지 않는 이 의는 지극히 큰 이 세 능력과 결합된  것입니다. 세 능력과 결합된 것은 하나님의 그 본체와 결합이 된 것이요, 본체에서  바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본체의 역사와 결합이 된 것이요,  또 그 역사가 우리 개별적으로 부딪친 그 진리와 결합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의 그 셋 요소와 하나님의 요소 셋과 우리와의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이를 해할 수 없습니다. 이 심판의 불도 피조물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도 해하지 못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여게 복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 1장 17절 이하에 쭉 내려보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복음에  나타났다 말은 신구약 성경 말씀에 나타났다는 말인데, 신구약 성경 말씀을 어찌  복음이라고 말했는가? 신구약 성경 말씀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의를 사람들에게  소개해 가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이 의를 사람들이 가질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이것은 참 복된 소식이다, 복음이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래서  하나님의 의를 자기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바라보고 그대로 내가 거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의지하고 그대로 순종해서 사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지식하고 인정하고 바라보고 맡기고 의지하고 그대로의 행동해서 복종하는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이 의를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자기가 믿는데, 처음에는 그 믿음이 어리지만 이 믿음이 차차 장성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이 셋 지극히 큰 능력과 인간이 삐뚤어져 가지고 인간이  삐뚤어져 가지고 지극히 큰 능력과 절단이 돼졌는데 절단으로서 영원한 사망이  된 것을 이 절단된 것을 다시 재연결을 할라고 하니까, 절단된 것은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절단시킨 것은 삐뚤어진 것 잘못한 것이 그게 죄인데. 그에 대한  값을 내야 되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죽으심의 일면 이  삐뚤어진 값을 내느라고 죽으셨습니다.

또 죽으심의 일면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에 완전 순종이어야 하나님의 심판을 다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대행하시기 위해 가지고 이렇게 죽기까지 하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이래서 처음에. 하나님이 만드신 이 의를 자기가 알고 인정하고 내 대신 그 의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의는 내 대신 만들었는고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주셨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이 의는 내 의가 됐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이 의를 버리지만  안하면 된다 하는 그것을 깨닫고 의를 버리지 않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래서 대신했기 때문에 이제 살아 있는 나는 내것이 아니라 주의 피로 값 주고  산 것이요 주님이 나를 대속했기 때문에 나는 주의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안하고 대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를 위해서 살게 하려 함이라고  성경에 기록하신 이 생활을 하면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대속이 내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이 내 모가치가 됐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의 모가치가 된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 것으로 살지 안하고 예수님의  것으로 이렇게 사는 일이 처음에는 안 되지만 차차차차 되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 이 생활이 차차차차 연성되고 숙달되고 나중에  가서는 성장되게 된다. 이래서 하나님과의 결합된 이 결랍을 자기를 대신했기  때문에 자기 결합인 것을 알고 이 결합을 버리지 안하고 이 결합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그렇게  로마서 1장에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라 하는 말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가 믿음으로써 자기 의가 된 그 사람은 영원히 산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의는 어떤 게 의냐?  의는 지극히 큰 이 세 능력과 자기와 결합되는 것이 그것이 의입니다. 이 결합은  사람이 결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우리 대신  결합을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하시면 될 터인데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했느냐 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계약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면 그  계약을 이행할 수 없고, 또 사람이 범한 것을 사람이라야 대신할 수 있지 사람이  아니면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득이 사람되어 오셨습니다. 사람되어  오셨으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대신할 수 있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대신할  수가 없는 것인데 인성뿐이라면 한 사람만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인데 신성이기  때문에, 신성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서, 무한하신 신성이 일위가 됐기 때문에  인간의 그 유한한 사람이 숫자가 암만 많아도 하나님의 거게 신성이 동참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신해서 이렇게 이 결합을 주신 것이 의라. 하나님의  의가 있다 그말은, 하나님의 의가 있다 그말은 하나님이 인성을 통해서 하나님과  절단된 이 택한 자들 또 절단된 모든 만물들, 인간이 하나님과 절단됐을 때에  만물도 다 절단됐습니다.

이래서 만물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만물들이 인간에게  대해서 저주한다는 것이 창세기 3장에다가 말씀해 놓았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을 대신하기 위해서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이 절단을 재결합을 시켰는데 이 결합은 영원한 결합을. 완전 결합을 하신  것입니다.

 완전 결합을 했는데. 이거 우리 대신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된  사람인데 영은 예수님이 대신 결합한 결합을 은혜로 입혀 췄습니다. 왜 은혜로  입혀 뒀느냐? 그것은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된 사람인데 영은 주격이요, 심신은  소유격이기 때문에 완전히 주격이 죽어 버려 죽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그걸  살리지 안하고는 그게 살아날 수가 없고 또 주격은 소유격으로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격은 할 수 없어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주격을 살린 것이  그것이 우리의 영을 이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시킨 것입니다. 주격을 살리고 난  다음에 주격의 소유가 되어 있는 이 심신의 기능은 영을 통해서 살리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데 이 살리는 역사가 바로 지금 현실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다 이 결합을 완전히 이루었고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우리 심신의 기능이 있고 형체가 있습니다. 심신에는 기능이 있고 형체가  있는데 심신의 형체는, 형체는 그것은 형체라 하는 거는 어떻게 작용할 수가 없고  안에 기능만 작용하지 형체는 아무 작용을 할 수가 없는 이거는 불가능한 존재기  때문에 이 형체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써 이것을 부활시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전적, 죽은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으로 살린 것은 영과 우리의  심신의 형체입니다. 심신의 형체인데, 영도 자체가 작용해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그 의를 입을 만한 작용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작용할 실력이  없기 때문에 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렸습니다.

또 이 심신의 기능은 작용할 수가 있지만 심신의 형체라 하는 것은 무작용의  것이요 이 기능에게 끌려서 자꾸 태여 돌아다니고 실려 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이 형체는 이것이 작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형체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 부활하도록 그렇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심신의 기능을 하나도 살리지 못했어도 택한 자들은 그  심신의 형체는 다 살아 가지고 부활합니다. 부활 하지만 그의 기능이 전연이  무기능입니다. 그 안에 있는 능력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능이라 하면 그 모든  지혜와 힘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 지금 현실에서 우리가 살아나도록  그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제일 처음에 있을 때에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형체만 있었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가지고 산  영이 된 이후부터는 산 것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면 일차는 죽음도 생명도  아무것도 없는 그저 존재로만 되어 있었고. 그다음에 이차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시는 생기로 가지고 살아나서 산 것이 되어졌습니다. 산 것이 되어졌던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이것이 다시 죽은 것이 됐습니다. 그러면  에베소 2장에 죄와 허물로 죽었다 하는 그말은 이제 이것이 삼차에 와 가지고  완전히 죽은 거 됐습니다.

 죽었던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택한 자들은 대속의 공로를 주님이  입히셨기 때문에 이 대속의 공로를 입힌 것은 어떤 면으로 입혔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약면으로 입혔습니다. 계약면으로 하나님이 입히셨고 또 심판적으로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계약면으로 입혔고 또  심판적으로 입혔고 이랬지만 실질적으로는 입히지를 못하고 실상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대속은 하나님의 이 계약으로 우리가 입고 있고, 또 하나님의 이  법칙으로 입고 있고, 이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으로 입고 있고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신해서 사탄으로 더불어 도전해 가지고  예수님께서 완전 이 세 능력과 결합이 끊어진 것을, 결합 끊어진 것은 형으로  이것을 끊어진 걸 없애 버렸고, 다시 재결합을 하기 위해서는 대행 대화친으로써  재결합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생도 사도 없었던 거, 그 다음에는 살았던 거,  그 다음에는 죽었던 거, 네째로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났으나  실질적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약적으로 살아났고, 법적으로  살아났고, 하나님의 심판적으로만 살아났지 실상으로는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면 그 네째로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난 그 삶을 입은 것입니다. 삶을  입어서 이것 세 가지 면으로서는 우리가 살아 가지고 있는 건데 이 현실이라는  그 현실을 통해서 현실을 통해서 이 세 가지 면으로 입고 가지는 대속을 입고  있는 이것이 이 현실에서 이 대속을 인정하나 안 하나 하는 그것이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유성을 가지지 못한 자는 거기서 능동적으로  살렸지만 자유성을 가진 것은 자유성에다 줘 가지고 자유성으로써 이 세 가지  대속을 그러면 이 대속을 네가 입겠느냐 안 입겠느냐 이 대속을 내가  받아들이겠느냐 안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평소에 아무리 받아들인다고  해도 평소에는 소용이 없고 다만 그 현실을 딱 만났을 때에 그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 현실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 이 기능이 예수님의 대속을 영접해  가지고 대속을 입은. 대속에게 팔린. 대속을 입은, 대속의 것이 되어 있는 그  심신의 기능으로 현실을 통과하느냐, 또 대속을 이것을 마다하고 부인하고 벗어  버려 버리고 이제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되어 잇는 이 세상 과거 옛사람의  것을 좋아해서 그것을 영접하고 그것의 기능이 되느냐?  그러면 현실에서 옛사람의 기능이 되느냐? 다시 말하면 대속의 기능이 되느냐?  이제 대속의 기능이 되는 것은 새사람의 기능이 되느냐 말입니다. 새사람으로  네가 이 기능을 새사람의 기능으로 살겠느냐 옛사람의 기능으로 살겠느냐?  이것이 현실에 돼 가지고 판정이 되어지는 것인데, 판정이 되어지는데. 이  현실에서 예수님 의 대속을 우리가,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입고 이 대속을 입은  자로, 대속은 결합인데 이 결합을 입은 자로, 의인으로, 의로. 이 현실에 의로  사느냐 의를 버리고 불의로 나아가게 되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 현실에 전투인데  그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 하는 그 싸움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은 우리에게 유혹도 하고 여러 가지 세력을 가지고 협박도 하는데  협박을 할 때는 두려움으로 협박을 하고. 또 유혹을 할 때는 좋은 걸로 유혹하고  그러면 우리가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의 의로 입고 이렇게 살면, 이 세  능력과 결합이 의인데, 이 의를 네가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 하는 것이 현재에서  자기의 행동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래서 믿으면 이 의가 자기 의가 되고  부인하면 이 의는 자기 의가 되지 안하고 의는 주님에게로 다시 돌아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유혹이 옵니다. 유혹이 올 때에는 좋은 걸 가지고 유혹합니다.

좋은 것을 가지고 유혹하는데 좋은 걸 가지고 유혹하는데 이 셋,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결합된 것을 믿으면 이 셋,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의 본체와  하나님의 역사와 또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와서 부딪치인 이 진리 이 셋과  결합된 이 결합을 자기가 믿으면 이 결합은 엿새 동안에 우주 만물을 창조했는데.

이분에게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암만 좋은 거보다 낫습니다. 이 세상에 좋은 그게  또 그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분이 지었습니다. 그분을 믿느냐 안 믿느냐? 이  대속을 믿느냐. 대속으로 하나님과 결합된 걸 믿느냐? 결합된 것을 믿는다면  악령과 세상이 세상 아무리 좋은 걸 가지고 꼬아도 그것보다 내가 결합되어 있는  주님에게 뭐 억억만 배도 더 좋은 게 있기 때문에 그걸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유혹받느냐 안 받는 데에서 진실로 네가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때에 여러 가지 협박을 가지고  이렇게 우리를 믿음을 버려서 이 의를 버리라고 할 때에 아무리 세상에 이런  저런 작용의 뭐, 불미불이 나오고 사자 구덩이가 나온다 할지라도 이제 그분이 더  크시고 능력 있고 그분이 모든 걸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제 그들이 암만  나를 삼킬라 해도 그분이 허락지 않으면 삼키지 못하고. 삼켰다 할지라도 이미  세상을 떠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은, 그들이 삼킬 수 없고 이분에게 모두  주권되어 있기 때문에. 의를 위해서 삼켜지면 그것이 의의 것이 됐기 때문에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두려움이 와도 그보다 여기 더 큰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에게 압도당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보다 더 큰 능력이 나와 하나 되어 있는데 그런 그 세력에게 기압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이 셋으로 더불어 결합된 그  영광을 안 다면, 영광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어떤 아름다운 것의 유혹을 받지 안  하고, 또 그 모든 부요 부강을 믿는다면 세상에 어떤 그 세력에게도 그 압도되지  안하는 그것이 뭐이냐? 믿는다는 증표입니다. 믿으면 그 결과가 맺고 안 믿으면  결과가 안 맺는다 말이오.

그러면, 믿으면 그는 그 시간에 그 시간에 세상은 나를 이 의와 결합을 끊을라고  하고 나는 안 끊을라고 하는 그것이 믿음의 싸움인데. 믿음의 선한 싸움인데.

믿음의 선! 싸움이라 말은 믿음의 하나님 중심 싸움인데, 그 싸움을 싸울 때에  나는 이 의를 입혀 주셨기 때문에 이 의인으로 살려 하고 그는 의를 벗어  놓으라고 하고 이럴 때에 그것이 현실의 싸움입니다. 그 현실에 전투에 참여한 이  전투에 참여한, 참전한 심신의 기능이 있습니다. 참전한 그 전투에 참석한, 참전한  그 심신의 기능은 그것으로서 그만 끝나 버렸습니다. 그때에 세상하고 싸울 때에  세상이 아무리 한다고 해도 나는 주님이 입혀 주신 이 의를 나는 입고 나는, 나는  주님의 것 됐고, 주님이 내게 주신 의는 내것 됐다 하고 의로 사는 사람은 그때에  참전된 기능은 그걸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도는 단번에 주신 도라고 성경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번  시험으로 그만 이제는 법적으로 또 계약적으로, 대심판적으로 입어 놓은 그 의를  내가 현실에서 참전 된 것은 그만 그것으로 완전히, 두 번 시험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완전히 그거는 영생이 돼 버렸고, 그때 내가 만일 이 의를 벗어 버렸다면  저는 다시 옛날로 돌아갔기 때문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 이렇게 말해 둘째  사망의 해라 말은 네째번에는 살아났는데. 이제 그것이 그만 네째번에 살아났는데  다섯번째 그만 져 버렸다 말이오. 그러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는  살았고, 또 그 다음에는 죽었고, 또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았고,  네번째 살아난 것이 다섯 번째 죽은 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았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이 의가 이렇게 능력 있는가? 이 의가 능력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내 심신의 기능이 연결돼서 하나가 됐습니다. 본질은 다르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본질은 다르지만 역사적으로는  하나가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리하고 나하고 역사로는 하나 됐어. 본질과  본성으로는 하나가 안 됐지만 역사로는 하나가 됐다 말이오. 역사로는 진리와  내가 하나가 됐기 때문에 진리가 죽어야 내가 죽고, 진리가는데 내가 가고, 진리  없는 데 내가 없고 진리 있는 데 내가 있고. 진리와 나와 역사적으로서는 운동과  이 움직여짐으로는 하나가 됐다 그말이오. 진리와 하나가 됐고 영감과 하나가  됐고 하나님의 본체와 하나가 됐기 때문에 이 모든 피조물을 탁월한, 피조물의  차원에서 탁월한 고차원인 이 자존자의 위치에서 있기 때문에 이 피조물을  가리켜서 발등상이라고 말했고, 만물을 발등상이라고 말했고, 교회를 만물 위라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몸이라고, 하나님 밑이라고 그리스도는 머리시요 우리는 그의  몸이라 말은 하나님 밑, 만물 위 교회의 위치가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노력할 것은 어떻게 노력하느냐? 의는 하나님과  결합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결합, 하나님과 결합이라 말은 하나님 이 진리로  나타났고 영감으로 나타났는데, 예수님과 결합이라 말이오. 예수님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영감이시요 진리시요, 내나 그렇게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셋으로 나타냈지. 내나 삼위는 본체가 하나요, 또 진리 영감 하나님은 내나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셋과 연결된 것은 피조물이 해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미 속에 들어갈 때에도 그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무슨 믿음을 믿었느냐? '아, 나는 하나님이 입혀 주신 의를  입었다. 의를 입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됐다.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다.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에게 속해서 동하고  젖하고 하는 것이지 너거들에게 동하고 정할 수가 없다.' 이래서, `그러면 불에  집어 넣어도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구원 할 수가 있겠느냐?' 할 때에 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당당히 말했습니다. `아, 구원할 수 있다. 구원할 수 있고, 또  불이 암만한다 해도 우리가 불 가운데 죽어도 주님이 불 가운데서 죽게 해야  죽는 것이지 우리의 생사는 그분에게 주권되어 있지. 그분에게 있지 우리가 지금  이래 살고 있지만 뭐이 될란지 모른다. 당신에게 주권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그분으로 말미암아 동하고 정하고 우리의 모든 앞으로 미래라 하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이지 피조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는 것을 단언짓는  그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결합됐으니까 불이라는 피조물이 그를  해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피조물인 사자가 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지난주에도, 저 지난 주일에도 설교할 때에 베드로가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실 때에 걸어 갈라고 떠뻑 내려서지 안했습니까? 푹 내려 설 때에 내려서는  그것은 뭐이냐 하면 믿음을 가졌어. 믿음 가졌다 말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인  진리와 결합됐고 영감과 결합됐고 하나님과 결합이 돼서 하나님과 결합이 됐기  때문에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기 때문에 그 결합된 결합으로 능력 왔던  것입니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쩔벅쩔벅 걸어갔습니다.

걸어가다가 걸어가다가 물 속에 떡 빠졌습니다. 왜 빠졌습니까?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크심을 바라보고 또 주님의 능력과 사랑과 자기와 결합되어지는 이것을  바라보고 바라보니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걸 힘입어 사니까, 사니까 산  거라 말이오. 그러니까 쭉쭉 걸어갔는데 걸어가다가 그만 풍랑을 보고  무서워하니까 하나님을 부인한 거라 말이오. 풍랑을 보니까 하나님을 주권자로  전능자로 믿는 것이 다 틀렸다. 거짓말이라. 이러니까 하나님의 크심도 부인한  것이요, 하나님의 그 모든 좋은 것도 부인한 것이요, 다 부인했으니까 빠져  들어갔다 그겁니다. 뭐 풍랑이 그때 인 거 아니오. 풍랑이 그때 인 것이 아니고  벌써 예수님이 오기 전에 풍랑을 만나 가지고 그들이 겁이 나 가지고 뻘뻘 떨고  있었지 풍랑이 그때 인거 아니라, 풍랑이 일었는데 풍랑이 일었는데 주님만 보고  주님의 그 크심과 주님의 약속만 보고 그대로 자꾸만 순종하는 거게 다 기울였기  때문에 보이지 안했는데, 보이지 안하고 그것만 볼 때에는 그 능력이 연결돼  가지고 물 위로 걸어갔는데 이제 이걸 봄으로써 그분과 끊어지니까 빠져  들어갔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가운데서 살린 그게 다 우리에게 계시로서 하나의 주시는  교훈인데, 돌을 옮겨 놓으라 하니까 죽은지가 나흘됐습니다. 이를 주님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안했느냐?' 이러니까 `예' 하며 옮겨  놓으니까 이제 살아났습니다. 만일 그때 `아, 죽었으니까 냄새가 나 안 됩니다.'  안 됩니다. 하면 예수님께서 `네가 믿으면 살아난다' 해도 '안 됩니다.' '믿으면  살아난다' `암만 그렇지만 냄새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일 마르다가  가령 가정을 해서 안 된다고 부정을 했으면. 나사로는 죽어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살아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꼭 부정을 하면 예수님은 강제하지  못해. 강제하면 불법입니다. 그 본인이 인정하고 원해야 되는 것이지  부정하는데는 강제로 하는 그런 거는 하나님이 강제를 못 하신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꾸 이래 말하니까 이제 그 다음에는 그 전에 보면 세 번이나  신강했습니다. 처음에는 믿던 것이 또 부정하니까 또 주님이 말씀을 해 가지고 또  긍정을 시켰습니다. `아 주님이 계셨으면 죽지 안할 터인데 지금이라도 주님이  기도 하시면 살아날 줄을 압니다. 그라니까 이제 주님이 있다가서 `너거 오빠가  이제 죽었으나 살아나리라' 아, 이러니까 `감사합니다 이라면 될 터인데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줄을 알지만 지금은 뭐 살아 나겠습니까?' 이렇게 말했어.

그라니까 또 주님이 또 설복을 시켜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데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러니까  또 그 다음에 긍정해 가지고 `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한 걸 믿습니다.' 이랬다 말이오. 믿는다 했는데 또 돌을 옮겨  놓으라 하니까 `아, 나흘이 됐는데 무슨 돌을 옮겨 놓겠습니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하지 안했느냐? ' 이러니까 '예' 하고 돌을 옮겨  놓으니까 됐다 그거야. 그 전에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극히 큰 이 세 능력과 예수님이 오셔서 이거 결합하기  위해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고  또 부활까지 하셨는데 이 결합을 우리가 내 결합인 것을 믿으면 이 셋 결합이  됐기 때문에 능치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다 그말은 믿음이  무슨 능치 못함이 없습니까?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다 하는 그말은 우리가 알아  듣기 쉽구로 한 말입니다. 믿음이 능치 못함이 없다 그말은 이 하나님이 대속해서  의를 만들어서 이 결합을 만들어준 이 결합을 인정하면 능치 못함이 없다, 그말은  인정하면 하나님과 결합된 것이 이것이 결합돼 가지고 결합의 역사가 나기  때문에 결합의 역사는 전지 전능의 역사라, 영생의 역사라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온 천하를 다 얻어도 까짓 거 무슨 소용  있습니까? 주님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를 얻어도 네가 자기를 뺏기면 소용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온 천하를 얻어도 네 현실에서 이  셋, 대속의 결합으로 결합된 이 결합을 네가 빼앗긴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온  천하가 네 것이라 할지라도. 이걸 다 뺏겨도, 네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뺏겨도 이  셋 대속으로 결합된 이 결합만 네가 양보하지 안하고 결합만 뺏기지 안하면 그  모든 거는 다 네것이 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현실에서 이 셋 결합을 뺏기지 안하도록, 이걸 실지로  알고 이 알고 현실에서 뺏기지 안할라고 전투를 해 가지고 뺏기지 안할라고하면  반드시 거기서 희생이 납니다. 희생이 나는 것도 있고 이러나. 그러면 내가 이  셋으로 결합을 할라고 하면 방해물들이 있어서 방해를 합니다. 방해를 하니까 이  결합하는 데에 방해를 당하기는 당하지 만 그 방해하는 것이 반드시 마지막에는  나한테 굴복을 해 가지고 하나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 방해해도 굴복을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과 일치된 이 결합을 끊치지 안할라고 이렇게 결합을 그대로  계속할라고 애를 쓰니까, 애를 쓰니까 그 모든 관민들이 다 합동해 가지고 이  다니엘을 반대해서 이 결합을 못 하도록 하지 안했습니까? 결합을 못 하도록,  저거는 모르지만 우리 성경 교리로 보면 이 `셋 연결에 결합을 네가 가지면 너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다 원수되기 때문에 우리가 널 죽인다' 이랬다 말이오.

그러나 그 결합이 끊어지지 안하니까 그 둘로 됐던 거는 하나가 됐습니다. 어찌  됐습니까? 하나된 것은 마지막에 그 둘이었는데 그 다니엘과 일치가 안 된 것은  다 죽여 없애서 없애 버립니다. 죽여 없애서 결국 대립이 없이 하나만 되고  말았습니다. 또 다리오 왕은 대립이 돼 가지고 정반대였었는데 그거는 어찌  됐습니까? 그거는 다니엘 이 살아나오고 난 다음에 그가 회개함으로써 이제  다니엘과 하나가 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 능력과 결합된 이 걸음을 걸어갈라 할 때에 이 세상이 이  결합을 끊을라고 애를 쓰나 우리가 끊기지 안하면 결국 그것은 내것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게 회개해서 내것이 되든지 그리 아니면 깨트려서 부숴져  가지고 내것이 되든지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현실에서 셋과 이 결합하는 이 결합을 뺏겨서는 안  됩니다. 이 결합을 뺏기지 안하는 데에는 무엇과 같다. 무엇을 빼앗기지 안해야  되느냐? 이 진리와 나와 하나 되는 것을 뺏기지 안해야 되고, 영감과 하나되는 걸  빼앗기지 안해야 되고. 하나님 본체와 하나되는 것을 빼앗기지 안해야 되는데.

하나 된다는 그것이 어느 것이 하나님의 본체인 지 영감인지 진리인지 그걸  모르겠다 그말이오. 그거 영감인지 진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려면 신구약 성경을 찾아 가지고 상고하면 진리를 알 수가 있고 또  영감을 찾을라고 할 때에 힘이 듭니다. 영감을 찾을라고 할 때에는 그 참고물이  셋이 있기 때문에 그 셋, 아이들이 공부할라면 참고 서적이 있지 많습니까? 참고  서적을 해 가지고 아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를 참고로 삼으면 된다. 세  가지 참고로 삼는 이거는 따라갈 거는 아닙니다. 이거 참고로 삼는 것이지 거게  복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봐서 참고로 삼는 것이지. 하나는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 모든 물리. 또 자기 양심 요거는 참고로 삼아 자기 양심에 맞으면  그래도 안심할 수가 있고, 모든 인간 제도에 맞으면 안심 할 수 있고 모든 물리에  맞으면 안심할 수 있는데 그게 절대성은 아닙니다.

어떨 때는 물리에 안 맞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제도에 안 맞을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구덩이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인간의 세운 제도와 맞지  안하기 때문에 안 맞을 때에 그들과 맞춰 가지고 했으면 다니엘은 죽었습니다.

이런데 안 맞을 때에 인간의 제도는 하나님의 제도를 맞추고 난 다 음에  하나님의 그 법칙과 맞나 안 맞나 하는 이것을 참고로 할라 할 때에 하나님의  진리와 맞나 안 맞나 할 때에 이제 인간의 제도도 한번 옆에다가 한번 참고를  삼아보고 또 양심도 참고로 삼아보고, 과학도 참고로 삼아보고 이래서 가급적이면  그런 데 맞는 게 바로 된 거라. 그거 다 전체에 맞는 게 바로 되는 것인데, 혹 안  맞을 때 있을 때에는 그게 틀렸는지 내가 틀렸는지 모르는데 내가 진리와 맞고  그게 안 맞을 때는 그게 틀린 것이기 때문에 진리와 삐뚤어지지 안한 인간  제도는 다 거게까지 맞추어 나가야 이제 그것이 뿌리를. 잔뿌리를 박고 널리  퍼져서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러고 모든 물리에도 맞아야 그게 힘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러나 정 하나님의 법칙에는 맞을라고 하면 과학에 안 맞고  또 하나님의 법칙에 맞을라 하면 인간 제도에 맞지 안하고. 하나님의 법칙에  맞출라니까 저거 인간 양심에 맞지 안하고 할 때에는 그때는 그것을 배격해  버리고 배척해 버리고 이 진리에 따라서 응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셋과,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의 본체와 결합되는 것이  이것이 의인데, 결합만 되면 전능자요 전지자요 완전자요 영원자입니다.

피조물이지만 창조주와 하나돼 가지고 행동적으로서는 창조주의 행동과 꼭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체라, 하나님의 몸이라  그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결합을 끊지 안해야 되는데, 이 결합을 끊치지 안하는 것도  중대한 문제, 또 이 결합을 바로 찾는 것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바로 찾지  못하면 진리와 결합된다 하는 것이 잘못하면 자기 자유와 결합되기 쉽고 영감과  결합된다는 것이 주관과 결합되기 쉬워.

내가 오늘 아침에도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내가 이렇게 꼭 조심해서  조심해서 주의해서 이렇게 하면 아주 마음이 깨운하고 이렇게 정신이 맑아지는데  그거 뭐입니까? 그래. 내가 두말할 것 없이 `그게 귀신이다. 귀신이니까 그거  귀신을 쫓아 버려 버리라.' 내가 그렇게 말했어 그거는 왜 그러냐? 조심하는 거는  그거는 조심하자면 그 발걸음을 그 자욱 떼 놓는 것 팔 놀리는 것, 이런 거 안  넘어지도록 조심하는 것 좋기는 좋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방이 있다 향방이  있다. 옳게 동으로 하나님이 가라 하는데 동을 향해 가지고는 구부러져 가든지  자빠져 가든지 어짜든지 해서 가면 결국은 늦어 그렇지 가기는 간다. 그러나  동으로 갈 것을 서로 향해 놓으면 서로 갈 때 암만 조심을 해서 발을 잘 떼놓고  뭐 재치, 있게 떼놓고 빨리 세놓고 뭐 어떻게 모든 것이 다 맞아도 그거는 잘  떼놓을수록 탈선 행위는 더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향방을 바로  찾아야 된다 그걸 말했어,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셋과 결합만 되면 이 일은 영생이요 완전 승리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모든 이 사는 것을 기적과 축복으로 살라고 애를 씁시다. 우리는  기적과 축복으로 살 사람이지 인간 손으로 꼽짝꼽짝 해 가지고 그런 거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천하 모든 민족 위에 뛰어 난다. 천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문화 건설을 본다면 벌써 그것이 일 년  이태에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수십 년 수백 년 들여 가지고 되는 것인데 아,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고 하면 암만 바로 잘 나간다 할지라도 수십 년이  돼야 될 터인데, 수십 년이 돼야 될 터인데 그거 어찌 일조 일석에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됐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기적으로 됐어. 이러기 때문에  기적과 축복은 언제 나 오는가? 이 셋과 나와 연결이 될 때에 나옵니다.

 이래서 우리가 지난번 대구 집회 때도 한 육백여 명이 그 육체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이 나타났고, 그 외에 보면 많고. 이번에도 보니까 신고함에 써넣기를  `이게 혹 낫아 가지고 뒤에 재발될까 몰라서 이걸 써넣지 안했는데 이제 회개를  하며 지금 써넣습니다.' 하면서 신고함에 써넣어 놓은 게 더러 있어, 보니까.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지극히 크신 분이 오니까 인간의  과학이 아니고 아무 인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솜씨로 와 가지고 했다는 것을  우리가 본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믿자 그말이오. 아, 금방 물 위에 걸어가던 것이 믿으니까  걸어갔는데 의심하니까 그만 빠져 버렸어. 이러니까 하나님과 이 결합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대신 결합해 놨기 때문에 믿으면 이 결합이 되고 의심나면 결합이  끊어지는 거라 말이오. 결합이 끊어지면 우리 혼자요. 믿어서 이 결합과 연결되면  능치 못하심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서 자기에게 주신 자기 분수에 따른  자기 분야에서 살 수 있는 그 걸음은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무릇 그 행사가  형통하다' 시편 1편에 말해 놓은, 형통하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요구하고 명령하고 부담시킨 의무와 책임은 다 완수할 수 있다  그말입니다.

 새벽 기도에 빠지지 말고 다 나옵시다. 다 나오도록 합시다. 새벽 기도에 안  나오면 여러분들이 도리를 몰라요. 도리를 모르면 힘이 없습니다. 이치를 모르면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지 안하면 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막 짓밟히는데. 믿지  안하면 피조물에게 짓밟힙니다. 그러니까 새벽 기도에 어짜든지 깨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해요. 이러니까 처음에 새벽 기도 나올라 하면 그게 쉽게  안 되니까 처음에 한 열흘 동안은 새벽 기도 나올라 하면 잠 하나도 못 잡니다.

이거 금방 또 자다가 시간 됐는가 싶어서 깨 보면 또 십 분 지나갔고, 또 하마 깰  때 됐는가 싶어 또 보면 또십 분 지나갔고 이래 가지고 밤새도록 신강하다가 잠  하나도 못 자고 그렇게 공을 들여 가지고 나중에는 `주여 깨워 주옵소서' 하면 그  시간에 딱딱 깨워 주시고 그렇게 갈 수 있도록 되어지는 것이지 그렇게 쉽게  되어집니까?  그러니까 어짜든지 노력해서 새벽 기도 다 나오도록 합시다. 다 나와서 우리  서부 교인들이 하나님과 결합돼 의인만 되면 다 돼. 의인만 되면 그 하나로써  모든 걸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의인은 지극히 큰 능력과 연결된 것입니다.

 어짜든지 이 결합을 놓치면 안 됩니다. 진리와 나와의 연결. 영감에 연결 영감을  소멸하지 맙시다. 뭐 생명을 뺏겨도 영감 소멸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힘이  납니다. 이렇게 하면 그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역사하는 것을 자기가 알  것입니다. 아, 큰 능력이 내게 왔는데 염려할 게 뭐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는 예수 예수 믿는 거는 받은 증거 많다. 이렇게 해 본 자는 받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낙망하지 않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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