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에 대하여

 

1981. 6. 17. 새벽(수)

 

본문:창세기 9장 21절 ~ 27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혹 셈을 가나안의 아비라. 셈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인데 셈의 가나안의 아비  가나안의 조상 셈이라 하는 그말에 대해서 혹 그때 그 함이라, 가나안의 조상  함이라 하는데 대해서 셈 함 야벳 그 삼 형제가 바로 노아 홍수 직후에 된 이런  일들인데 어떻게 그 가나안의 그 아비 조상 함이라고 이렇게 말할까?  가나안은 그 후 온전 뒤에 함의 자손들을 가르쳐서 가나안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나기도 전 바로 홍수 직후에 된 일인데 그렇게 그렇게 기록을 해서  표시를 했는가 하는데 대해서 혹 의문을 가질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말합니다.

이 창세기는 그 후 오랜 뒤에 모세 모세라는 이 선지자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선지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모세가 이  성경을 영감으로 받아서 기록할 때에는 그 미래에 있는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과거에 지나간 그것을 인생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록해 주셔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는 그 태초에 부터의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계시해주셔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역사적인 사실은 노아 홍수 직후에 된 일이지만 이것을 문서로  기록한 그 기록은 그 오랜 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록하셨기 때문에  과거사를 기록해서 이 기록한 것이 그때 현재에 기록하지 안했고 미래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과거사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록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이 되고 표현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래 다섯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인데 그 과거사를 기록한 것이 있고 현재사 기록한 것도 있기 때문에  그 면을 알면 거게 대한 오해가 돌아오지 안합니다.

또 이 장자 셈은“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는 것은 이 삼 형제  가운데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제일 그 주체적으로 주도적으로 하나님  섬기는 그 은혜는 장자 셈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면 인생과 하나님과의 관계되는 그 관련은 장자 셈에게 속하여 있었다. 셈의  그 계통으로 일이 존재하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또 야벳은 창태케해서  장자 셈의 장막에 거할 것이다 하는 것은 야벳이라는 그 백인종의 조상을  말했는데 백인종들은 이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관한 것은 그에게 없었고 다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을 풍성히 받아 가지고 셈이 섬기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기도  동참하게 된다 하는 것을 말을 했고, 요 둘째 아들 함은 그때에 그 동참은 셈의  하나님 찬송하는 셈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 또 야벳이 세상 창대한 일에 그  참가는 하기는 하지마는 종으로 참가해서 섬기는 위치에서 참가하고 거기에서  정상적인 그런 참가는 못하게 되고 종으로 참가하게 된다 하는 그것을 여게  나타내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그 세 아들에게 대해서 이 예언이라면 예언이요 또 축복과  저주라면 축복고 저주요. 또 그 삼형제 행위에 대해서 합당한 공평된 보응이라면  보응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언도 되고 그대로 됐기 때문에 미래사를 말했는데 그대로 됐기 때문에 예언도  되고 또 그 행위에 대해서 공평된 하나님의 갚음이라 보응이라 해도 그대로 되고  또 이 하나는 축복을 둘은 축복을 했고 하나는 저주를 했다 그렇게도 표시를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축복을 하되 하나는 위에 속한 축복이고 하나는 아래에 속한 땅에 속한  축복이라. 그것이 이 세 아들의 그 행위에 그대로 나타났고 나타난 그대로  노아가 말한 것이 그대로 됐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도 하나님의 저주도 참 두려워해야 하겠고  또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행한대로 그대로 결과가 맺어진다는 것 그 보응이  온다는 것 요것도 우리가 변할 수 없는 그런 진리적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님께 연결된 때에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그때는 그 모든  지식하는 것이나 지식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과 연결이 그 행동하시는  것 하나님이 섭리하는 것 그기나 꼭 그 형태도 같고 권위도 이 같습니다.

그래서 탁락 전에 아담이 만물에게 대해서 이름을 지은 그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거와 같았고 그때 그 모든 존재들에게 대해서 아담이 그 이름지은 것이 오늘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얼마나  변동할 수 없는 이 참 절대성이라고 할만침 권위성이 함께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또 우리의 그 행함이 일시로 지나가면 그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영원히 그것이 근거가 되는 것 영원의 근거 뿌리가 되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또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없을 때에 그 행동에 보응이  영원하지마는 또 하나님과 연결이 된 은혜의 위치에 있을 때에 그 행동한 것은  더욱 권위가 영원한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베드로에게 그렇게 한 선고같은 이런 말을 인해서 그 부부가 즉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과 연결된 위치에서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이 권위가 있어서 그 부부가 즉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된 은사 위치에 은사 위치에 있는 자로서는 그 말하는 것의 영향이  심히 크기 때문에 아주 이 면을 많이 조심해야 될 것을 우리에게 보입니다.

그것이 당장 눈 앞에 나타나지 안했을지라도 그것에 대한 그 영향이라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보입니다.

그 뒤에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시몬에게 대해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거와  말과같은 그런 말을 베드로가 그 선포했습니다. 이렇게 그 선포하고 난 다음에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베드로가 즉시 다시 그 말을 취소한 것은  아니지마는 그 말에 대해서 회개를 하면 다시 그것이 구속받을 수가 있다 하는  것을 거게서 표시해서 '네가 그 돈으로 하나님 은혜를 살라고 하니까 돈과 같이  돈과 함께 네가 망할 것이다' 이렇게 참 선고같은 이 선포를 하고 즉시 '네가  돌이키면 혹 하나님 앞에 사함을 받으리라' 해서 그가 즉시 베드로에게 돌이켜서  그는 화를 받지 안했습니다.

우리는 참 다른 사람에게 은혜 베푸는 이 은사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얼마나 그  언행심사에 행위가 책임 무거운 그런 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또 이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은혜의 기관에 대해서 밑에 사람에게도  조심하지마는 위에 사람에게도 많이 조심을 해서 그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하는  그런 깬 마음을 우리가 늘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육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성경대로 이렇게 비판과 평가를  가지지 안하는 데에서 우리는 착오를 많이 가져옵니다. 우리 육으로 말하면 참  자식은 부모에게 뭐 열 번 스무 번 속이도 그것이 그렇게 죄로 그렇게 인식을  안하고 참 부모는 자녀에게 한 번이라도 속인다면 그거는 그 없앨 수 없는 그런  아주 못쓸 죄악으로 큰 죄악으로 정죄하는 그것이 우리 세상 생각들입니다.

그러면 밑에 사람 위에 사람한테 잘못이 있을 수 있지마는 위에 사람은 밑에  사람한테 잘못이 있을 수 없다 하는 이것이 우리 세상에서 일반 상식적인 그런  도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보면 밑에 사람에게 범하는 것이나 위에 사람에게  범하는 것이나 그것이 별 차이 없이 다 그대로 보응이 되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밑에 사람에게도 같은 조심을 해야 되겠고 위에 사람에게도 같은 조심을  해야 되겠고 또 자기와 동등되는 옆에 사람에게도 같은 조심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다 가르쳐서 그 우리가 구원얻은 영의 모든 존재들은 안팎에 눈이  가득찼다 그렇게 성경에 말했습니다. 바깥만 보는 것이 아니고 안도 봐야 되고  밖에도 봐야 되고 옆에도 봐야 되고 이렇게 깨어서 모든 면이 바로 되야 되지  일방적으로 어떤 면만 되면 안 된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로서는 한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 힘, 뜻, 성품 또 내 모든  존재 생명 이것을 다 해서 결사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에게 대한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 대한다는 것이 곧 참에게 대한다는 것이요, 옳은 것에게 대한 다는  것이요, 바르고 틀림 없는데 대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거면 죄에 대한다는  것이 삐뚤어짐에 대한다는 것이고 또 의에 대한다는 것이 옳은 데 대한다는  것이요. 이것이 진리에 대한다는 것이요. 하나님에게 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 대해서 우리는 안팍의 눈을 가지고 이렇게 깨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로서는 한다는 것이 내기에 있는 것 그거 다 할 수 밖에 없지그 이 상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그거는 우리가 하면 할 수가 있고 또  안하면 안할 수가 있는 그 권한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자기 힘을 다 할 수는  있다 그말이오. 자기가 어떤 그 땅에 있는 욕심을 가지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도 다 기울이고 또 마음도 다 기울이고 뜻도 기울이고 또 그 참 성품도 거게  기울이고 그만 그 사람이 되고 그 자기가 병들어 죽을 줄도 모르고 있는 목숨도  다 기울려서 참 결사적으로 이렇게 한다 이기요. 세상 것도 자기가 참 욕심을  내고 하면은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보면 그렇고 또 권세를 탐하는 사람들도  그러하고 자기가 사업에서 물질을 탐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 이기요.

그러면 우리로서는 그것까지는 할 수 있지마는 그 이상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이것이 완전이 되느냐? 그 모든 철학들이 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철학들이 말하는 것은 이렇게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힘을 다 기울이면 자기 속에  완전이라는 것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다 기울이면 나중에 그것까지 일어나니  그 종말은 인간 단독의 노력으로 온전에 완전에 도달한다 하는 그것이  철학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보질상 진노의 자식이라 말했고 또  정죄받은 이후에는 근본 그것이 죄 아래에서 났기 때문에 인생의 본성이 악이라  이것을 성경에 말해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은 인간이 외부가 이렇지 속에 파고 들어가면 인간의 근원은  이렇게 완전자가 있다. 인간의 완전성을 말하는 것이 철학이고 성경은 인간의 그  부패성을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불교같은 이것도 다 하나의  철학 중의 하나인데 그 불교니 이런 것은 철학과 종교를 버물어 가지고 한  것이요 그 유교라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철학도 아니요 종교도 아니요 하나의  도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만 다하면 그 다음에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그것을 다시 재조정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공로를 인해서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재조정을 해서 그것이 모든 면으로 치우치지 안하고 그것이 다  온전하고 구비해져 가지고 단일성적인 그런 인격화된다 그럴 때에 비로서  하나님과 영생적으로 결함이 된다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하겠는데 요 셈은 요걸 봐서 장자 셈은 아버지가 벗고 있는 요게  대해서 어떤 면을 중점으로 다뤘느냐 하면 하나님께 대한 면을 중점으로 다뤘고  또 마지막 그 막내에 아들 야벳은 자기가 하나님과 아버지로 말미암아 노아 홍수  때에 전 인류가 전멸이 되는데 자기들의 여덟식구만 그 아버지의 인도를 따라서  구원얻었다.

그 홍수에서 구원얻은 그 광경과 은혜를 기억하고 신중이 다뤘고 요 장자 함은  그것도 중하지마는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렇게 멸하시고  건설하시고 지도하셨는데 그분에 대한 것을 그 중점적으로 다뤘고 이 함은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또 그때에 그 홍수 때의 광경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된 것은 자기의 스스로 된 것처럼 모든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은혜도  자기가 다 멸망을 받았는데 자기가 구원에 있다는 이 은혜도 잊어버려서 그  가치를 잊어 버리니까 그 위에 기관도 다 잊어버리고 그라다 보니까 마지막에는  자기만 남아서 그 무지한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서 강팍한 사람이 되었고 오히려  그 아버지에 대해서 훼방하고 그렇게 멸시하는 그런 그 멸망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셈 야벳에 대해서 내일 아침에 계속을 하겠습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 셈에 대하여/ 창세기 9장 21절-27절/ 810617수새 선지자 2015.11.08
2915 셋 결합 / 베드로후서 3장 13절/ 850830금새 선지자 2015.11.08
2914 셋과 결합/ 베드로후서 3장 6절-13절/ 850904수야 선지자 2015.11.08
2913 소경 바디메오/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870222주새 선지자 2015.11.08
2912 소경 바디메오/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870222주전 선지자 2015.11.08
2911 소경 바디메오/ 마가복음 10장 49절-52절/ 870223월새 선지자 2015.11.08
2910 소경 바디메오/ 마가복음 10장 50절-52절/ 870222주후 선지자 2015.11.08
2909 소경됨을 발견하라/ 마가복음 10장 51절-52절/ 870303화새 선지자 2015.11.08
2908 소경을 고치는 길/ 베드로후서 1장 4절-11절/ 1977년 32공과 선지자 2015.11.08
2907 소금/ 마가복음 9장 48절-50절/ 810703금야 선지자 2015.11.08
2906 소금/ 마태복음 6장 13절-16절/ 800224주전 선지자 2015.11.08
2905 소금/ 마가복음 9장 48절-50절/ 810702목새 선지자 2015.11.08
2904 소금/ 마가복음 9장 48절-50절/ 810703금새 선지자 2015.11.08
2903 소금 비유/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40613수새 선지자 2015.11.08
2902 소금비유/ 마태복음 5장 13절/ 1980년 7 공과 선지자 2015.11.08
2901 소금과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00229금새 선지자 2015.11.08
2900 소금과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00224주후 선지자 2015.11.08
2899 소금과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51017목새 선지자 2015.11.08
2898 소금과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51016수야 선지자 2015.11.08
2897 소금과 빛/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51018금야 선지자 2015.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