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살고 갈까

 

1987. 9. 13. 주일오후

 

본문:베드로전서 1장 24절∼25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오전에 사랑에 대해서 증거를 하고 거게 대해서 좀 덧붙여 증거하려고 하였으나 다른 말씀을 증거하게 됐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세 가지씩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 세 가지, 사람을 사랑하는 거 세 가지 그것만 기억하고 여러분들이 잘 새김질해서 기도하면 그 안에 있는 많은 생명과 힘과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여게 “모든 육체”라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 그 외의 것이 사람을 주관하고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을 다 총칭해서 육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아닌 언행심사는 다 육체의 일이요, 영감 아닌 언행심사도 다 육체의 일이요, 진리 아닌 언행심사도 다 육체의 일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외의 것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언행심사의 전부는 다 이 세 가지 아닌 것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령으로 말미암은 것, 인간의 원죄 악성으로 말미암은 것, 인간의 본죄 악습으로 말미암은 이것 가지고 살고 있는데 그런 것을 가리켜서 모든 육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모든 생각이나 소원이나 계획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할 것 없이 그런 것은 다 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풀은 마르고 그 아름다운 꽃은 떨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이 일시에 어떻게 인간을 놀라게 하고 떠들어 쌓아도 그것은 풀과같이 완전히 멸해지는 날이 있습니다. 또 그런 것들의 가치를 모든 사람들은 놀라서 야단이지마는 그런 것은 다 풀의 꽃과같이 시간 지나가면 떨어져서 그 아름다움은 하나도 없어지는 거와같이 됩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세세토록 있다 말은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 주의 말씀대로 행한 것은 영원하다, 주의 말씀 자체도 영원하다 하는 그 말씀이 뭐인가? 우리에게 전해 준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다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성, 완전성, 불변성, 생명성을 가진 것들입니다.

이래서 여게 대해서 첫째 생각하는 것은, 그러면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거게 첫째로, 생명 없는 물체가 홍수가 내려가면 거게 쏠려서 떠내려가는 그런 사람으로 우리가 살고 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피라미 새끼라도 생명 있는 것은 그 물을 역류합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물이 출렁거리는 대로 출렁거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회, 국가, 시대 이런 죄악의 세상이 홍수처럼 지옥을 향하여서 흘러 내려가고 있는데 여기에 피동돼서 그것이 멈추면 멈추고, 빨리 가면 빨리 가고, 돌면 돌고, 구불텅이 치면 구불텅이 치고, 여게 따라서 피동되어 생명 없는 물체처럼 그렇게 우리가 살고 갈 건가? 뭐 사람 어북, 제법 뭣하다 하는 사람도 시대의 조류에, 사회 조류에, 국가 조류에 막 쏠려서 거게 따라서 움직이고 점점,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지옥을 향하여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인생으로 살 건가? 그런 인생으로 우리가 살고 갈 건가? 둘째로는, 요한계시 13장 1절로 2절에 보면 “너희들이 사자 같은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했어. 이거 다 상징 비유입니다. 사자같이 자기 앞에 뭣이든지 닥치면 들이받아 가지고서 싸워서 이 투사의 인생으로 살아갈 건가? 뭣이든지 제게 마주 서면 마구 싸워서 부숴뜨리는 이 사자같이 투사 생활로 일생을 살고 가는 짐승 생활 할 건가? 우리가 이런 생활 할 수 없습니다.

거게 보면 “곰 발 같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이는 대로 뭐이든지 마구 거머닥쳐서, 보이는 대로 뭣이든지 거머닥쳐 가지고서 제것을 삼는 그런 곰 발 같은 그런 짐승 생활을 하고 갈 건가? 나는 뭘 하고 있는지? 거게 표범 같다고 한 말이 있습니다. 표범은 맹수 중에도 그 색깔이 얼룽얼룽얼룽해서 아주 자기의 엄격하고 용감스럽고 아름다운 자기의 광채를 자랑하는 취미로 사는 것이 표범입니다. 이와같이 저 잘난 재미로 자기의 뭐 이런 장점 저런 장점, 이런 특수점 저런 특수점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고 가는 이런 표범 같은 짐승으로 살고 갈 건가? 그까짓 거 암만 살아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세계 참피온 참피온 하지만 삼 년만 지나면 천하게 뚝 떨어져서 밀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또 다섯째로는, 과학을 따라서 살고 갈 것인가? 시대 물결을 따라서 자꾸, 과학이란 말은 물리란 말인데 물리가 자꾸 발전되니까 뭐 나왔다 뭐 나왔다, 뭣이 뭣이 하니까 과학 발달 따라서, 그게 인생 사는 건 줄 알고 거게 따라서 이렇게, 마치 물살 센 여울물같이 그렇게 달음질해서 하나님은 멀리 두고 그 과학 따라서, 과학이 달음질 치니까 저도 달음질 치고 과학이 외치니까 저도 외치고, 과학 따라서 네가 가다가 죽을래? 그리 살고 갈 것이냐? 과학이 우리를 영생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좀 깨야 됩니다.

여섯째로, 세계에 모든 풍경 ‘이런 찬란한 문화가 있다, 저런 찬란한 과학이 있다, 이런 뭐 좋은 것이 있다.’ 마치 관광객 모양으로, 철새가 철을 따라서 이리저리 훅훅 날아다니고, 매미 같은 곤충이 공기 좋고 볕 잘 쬐이고 선선한 곳을 따라 다니면서 맴맴거리고 울고 하는 것처럼 이렇게 이 세상 따라 관광 취미에서 이런 것을 자기 생애로 알고서 그렇게 살다가 갈 건가? 사람들이 세상을 이렇게 살고 가고 있습니다.

일곱째로는, 우리 안에 있는 짐승이, 우리 안에 있는 짐승이 제가 뭐인지, 제가 무슨 생활 하고 있는지, 제 생의 결말이 뭐이 될란지 생각지 않고 그저 사료통에 사료 있는 그놈만 보고 날마다 사료 먹고 썩히고 사료 먹고 썩히고 또 주니까 사료 먹어 썩히고, 네가 의식주로 만족을 하고 그저 벌어서 의식주가 넉넉하니까 ‘됐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짐승처럼 그렇게 살다가 갈 건가? 우리가 어떻게 살고 가야 할 건가? 이 우주에 사람의 손톱 같은, 우주에 사람의 손톱 같은 그 조그만한 지역을 제가 정복하고 제 권리로 압도하고 인도하고 이것으로써 만족하고, 그 손톱 외에 전체도 있고 우주 외에 영계도 있다. 그 위에 하나님도 계신다. 네가 그까짓 거 지극히 적은 부분을 정복하고 점령해 놓고 거게서 네가 ‘에헴’하고 살면 되는 줄 아느냐? 그라다가 네가 가는, 마치 우리 안에, 함정 안에 빠진 짐승같이, 수건으로 눈을 뽈끈 댕겨서 보이지 않는 이런 자와같이 전후 좌우 상하를 다 모르고 이렇게 네가 살고 갈 건가? 우리가 눈을 떠서 좀 평가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짜든지 이런 함정에서 헤어나야 됩니다. 이런 수건을, 마음의 눈을 가룬 수건을 벗어야 됩니다. 벗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네가 눈먼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천지는 변해도 획 하나도 변하지 안하고 요 말씀대로 되어지는데 말씀이야 뭐라 하든지 말든지 우리를 꼬와서 죽이는 마귀 그놈이 말하는 소리만 다 옳다고 바로 듣고 그것만 듣고 신구약 성경을 무시합니다.

내가 믿는 사람들, 성경은 말해야 무시합니다. 테레비에서 말하는 것은 성경보다 권위를 훨씬 낫게 여깁니다. 이 미친 자야! 정신 빠진 자야! 네가 눈이 멀었다! 성경 지식만이 그대로 어루어지지 성경 지식 외에 인간들이 시시비비 말하는 것은 다 이것은 없어질 날이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 건가 하는 것을 생각합시다.

무생물이 홍수에 피동되어서 떠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살 건가? 사자같이 살 건가, 곰같이 살 건가, 표범같이 살 건가, 과학 따라 살 건가, 세계의 풍경 따라서 살 건가, 우리 안의 짐승처럼 살 건가, 이 우주의 손톱 같은 지극히 적은 지역을 점령해 놓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만 보고 일생 동안 살다가 갈 건가, 함정 속에 빠진 짐승처럼, 수건으로 눈을 가루어서 보지 못하는 것처럼 이렇게 살다가 갈 건가? 우리는 좀 생각해야 됩니다. 어떻게 할 건가? 좀 마음을 넓혀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한 것이오.

둘째로, 영원 불멸의 존재인 사람입니다. 사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은 다 형체가 풀어질 때에 원소로 돌아가 버립니다. 인생은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인생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좋든지 나쁘든지 영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영원 불멸의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영원이라는 이 영원을 가지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이, 영원 중에 짤막한 이 세상이 제일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세상은 중요한 시기입니다. 영원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기를, 이것을 터라 말했습니다. 영원의 터입니다. 영원의 움싹과 같습니다.

움 그까짓 거, 움이 잘 자라면 아름드리 되는 나무도 되지만 처음에야 바늘내끼같이 약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보고 무시하지만 이 세상 생활이라고 하는 이 생활이 영원을 좌우하고 영원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한 토막인 세상, 영원을 가지고 있는 이 영원에 가장 중요한 토막이 세상살이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느껴야 됩니다.

첫째로, 이 세상은 영원의 기초를 마련하는 기초가 되는 세상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영원이라는 자기의 영원을 심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원은 이 세상에서 심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옥을 심든지 천국을 심든지, 영광을 심든지 수치를 심든지, 가련하고 비참을 심든지 자기는 영원을 심고 있는 이 세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이 세상은 심을 뿐만 아니라 가꾸고 있습니다. 멸망에서 멸망으로 자꾸 멸망을 키워 가꾸어 나가는 사람도 있고, 의와 진리를 심어서 의와 진리를 가꾸어 나가는 사람도 있고, 사랑을 심어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이 세상은 영원한 기초가 되고 영원을 심는 시기가 되고 영원을 잘 가꾸어 기르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아무나따나 그렇게 돈 보고 살 세상이 아니오.

우리 안에 있는 짐승이 사료만 있으면 안심하고 배부르면 누워자고 배고프면 먹고 이라다가 도살막으로 가는 거와 같은 이것은 참 짐승 생활입니다. 그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누워자고 하니까 ‘먹을 거 있고 마실 거 있고 입을 거 있으니까 족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생활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 짐승 생활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을 우리가 마련하는 세상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는 세상입니다. 거게 필요한 것들을 지금 생각하면서 성경 보고 깨달아서 없는 것을 구비시키는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라의 것을 지금 마련해야 되고 그 나라의 것을 지금 구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살이는, 가룟유다가 자기가 잘못된 것을 후회가 돼서 얼마나 후회했든지 그는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참 자결했습니다. 너무 원통하고 기가 막혀서. 주님을 팔고 난 다음에 너무 원통하고 기가 막혀서 자결해서 죽었습니다. 자결해 죽었다고 그것 가지고서 원통하고 후회되는 그것이 새로 재차로 자기에게 닥쳐오지는 안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을 만치 후회해도 다시 재판이 없는 세상입니다.

자기의 영원은 흉하든지 길하든지, 흉하든지 좋든지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것, 영원한 흉한 것도 길한 것도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지금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고린도후서 5장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들이 각각 자기 행한 대로 갚음을 받기 위함이라” 말씀했습니다.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는 것이 자기의 영원한 영광스러운 것을 자기가 만들든지 영원히 수치스럽고 흉한 것을 만들든지 우리는 만들고 있습니다.

뭐 살고 날이 지나가서 제 눈에 안 보이고 제 생각에 안 닿이고, 죽을 만치 나쁜 일이라도 세월이 지나가 잊어버리니까 짐승 같은! 네 두뇌에 잊어버려진다고! 하나님 앞에 없어지는 것 아니다! 하나님은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 그분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그 지식이 제한받지 않는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는 “심은 대로 거둔다. 속지 말아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 콩 심고 팥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콩을 심었으면 콩을 거두지.

또 “자기 열매를 자기가 먹는다, 자기 행위가 자기를 따른다.” 자기 열매 자기가 먹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그걸 보면은 정확합니다. 대번에 이루어지지 안하면 이 대 만에 이루어지고 삼 대 만에 이루어지고, 대 수가 늘어서 더디 이루어지면 더 무섭게 그 몇 배수로 크게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자기 행위 남 주지 않고 자기 심은 거 다른 사람이 거두지 못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게 진리입니다.

셋째로, 세상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을 잘못 알면 안 됩니다. 이 세상관도 발라야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이 뭐이 세상이냐? 세상을 아는 인간이 누구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 하나님만이 세상은 이러한 세상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세상살이에서 착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을 자기가 살 처소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그네라 했습니다. 우리 살 곳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오늘 떠날란지 내일 떠날란지 모릅니다. 세상을 자기가 살 곳이라고 착각하는 이런 착각을 우리가 벗어나야 됩니다.

또 세상에 이거 저거 모든 자기 앞에 닥쳐오는 물질,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 자기 손길에 닿는 대로의 모든 만물 그것을 자기 것을 삼아 가지고 자기의 소유로 가져야 할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런 착각을 버려야 됩니다. 네가 천하 것을 다 뭉쳐서 네것으로 가져도 네것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자기 소유로 자기가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건 아주 큰 착각입니다.

또 세상에 있는 것을 쓰는 사람들은 어짜든지, ‘다른 사람들은 생활비 만 원 쓰는데 나는 십만 원 쓴다. 다른 사람 어떤 데 많이 쓰나 나는 몇 배 쓴다.’ 성경이 말하기를 세상 것을 쓰는 사람들은 과도히 쓰지 말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것을 얼마든지 많이만 쓰면 제가 복 있는 줄로 알지만 절대로 요것이 다 댓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세상에서라도 무엇이라도 제가 쓰면은 사용의 댓가가 있으니까 쓰면 쓰는 것만치 저는 댓가를 내야 되니까 댓가를 낼라 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쓴 것만치 거게 대한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자기는 이렇게 저렇게 쓰고 가지만 낱낱이 다 그분에게 뒤에 가서 변상을 해야 됩니다. 다 반제를 해야 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쓰는 것을 어짜든지 많이만 쓰면 복되다고 이런 착각을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무슨 세상이냐? 자기가 이런 일을 해 보고 저런 일을 해 봐서 일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데에, 또 자기 행위를 이렇게 행위 해 보고 저렇게 행위 해 보고, 자신을 또 이런 사람으로 살아 보고 저런 사람으로 살아 봐서 어쨌든지 자기의 일과 행위와 자신을 이 세상에서 연습하는 것입니다.

연습하고 연단해서 훈련받는 데에 이것 저것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습과 훈련에 필요한 것으로 이런 것들을 잠깐 우리에게 주어 준 것입니다.

제것인 줄 알고 얼마든지 끌어 모으면 제것 되는 줄 알고, 어리석소. 네게 돈이 왔느냐? 이 돈으로 너를 연단시키고 너를 연습시키고, 네 행위를 연습시키고, 이런 것으로써 네가 사리를 알아라.

이래 해 보니까 틀렸고 저래 고쳐서 영원 무궁세계에 가서 너는 일을 닥치면 정확 무오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수많은 행위 가운데에 네 행위가 온전하여서 잘못됨이 없는 정확 무오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 네 자신이 여게도 저게도 오점이 없는 그런 네 자신으로, 이런 것들 가지고 마음대로 사용하면서 거게서 연습하고 연단받고 숙달시켜서 무궁한 세계에서, 하늘과 땅의 것이 통일되는 그 세계에서 모든 것들을 상대하고 취급할 때에 흠점이 없는, 익숙할 수 있는, 그때에 흠점이 있으면 그거는 안 돼.

그때에 흠점이 있을 수 있는 자는 아예 가지를 못해, 하나님은 전지자기 때문에.

그때에 흠점 없을 수 있는 그자만 옮기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죄가 없어. 그 나라에는 삐뚤어진 게 없어.

이러니까 모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접촉할 때에 이것으로 나는 내 자신과 행위와 내 모든 일들을 연습하고 연단하고 연성해서 영원히 온전한 빛의 세계에 가도 아무 흠점이 없는 그런 숙달한 이 숙달을 하기 위해서 줬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줄 알고 자기가 접촉하는 것이 지혜 있지 끌어 모으면 그거, 끌어 모으라고 준 것 아니오. 어리석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간 곳이 없더라”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모든 것이 다 그 형태와 색깔과 종류가 다 풀어져서 한 원소로 돌아갑니다. 개도 없고 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원소로 돌아갑니다. 다만 인간의 것이 되었던 것만 또록또록 남아 있습니다.

이라고, 모든 것은 풀어지는데,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인간의 행한 것은 말 한번 한 것, 생각 한번 한 것, 뜻 한번 가진 거, 제가 다른 사람에게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생각, 마음 한 번 가진 그것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놈이 그대로 또록또록하게 드러납니다.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말했어.

지금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자기의 모든 소행이 다 드러날 때에 누구에게 원망하며 무엇을 핑계하며 무슨 시비를 하겠습니까? 제 행위대로 다 하나님이 갚으시는데.

이걸 아는 사람은 이 날이 오기 전에 남편이 아내한테라도 잘못한 거 있으면 하나님에게 다 고해서 사함받고 아내도 남편에게, 남편도 아내에게, 이웃과 이웃에게, 위의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만물에게, 우리의 잘못된 것은 오늘에 다 정리해야 됩니다. 오늘에 주의 피에 씻어서 눈과같이 희게 속함을 받아야 합니다.

잠시 후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겨집니다. 이 모든 것이 원소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만물을 새롭게 할 때에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하는 이 말씀을 여러 군데 많이 말했습니다.

그곳이 우리들이 영주할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영원히 살 곳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오산이 없도록, 오산과 오판이 없도록 항상 깨어 정확한 비판과 평가의 계산으로 살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오산하면 안 되고 오판하면 안 되고 오평하면 안 되고 모든 것을 정확한 비판과 평가와 계산을 해 가지고 그렇게 우리는 살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계산하는 것은 계산의 표준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돈에다가 표준하고 계산합니다. ‘이 일이 돈이 얼마가 수입이 되나, 돈이 손해가 되나, 돈 수입이 많으나 적으나?’ 그거면 다인 줄 알고 돈을 표준으로 해서 모든 사람은 계산합니다. ‘내가 정권을 얻나 못 얻나?’ 그것으로 계산해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내 개인의 욕심이 이것이 이제 달성이 몇 프로 되나 안 되나?’ 거게 대고 모든 걸 계산합니다. 다 헛 계산입니다. 그것 다 헛 계산입니다.

오늘 공과에도 가르친 거와같이 그날을 두고 계산해야 됩니다, 그날을 두고.

그날을 두고 계산해야 돼. 그날의 것으로 계산해야 됩니다.

그날이라니? 나 개인은 언제든지 세상을 떠나야 되기 때문에 내가 죽는 그날에, 죽는 그날에 내 수입이 된 것이라야 되지, 죽는 그날에 내것이 된 것이라야 되지, 죽는 그날에 내 영광이 된 것이라야 되지 죽는 그날에 내 영광됐던 것 다 없어져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홍포 입은 부자와 같지.

그날을 두고, 주님이 구름타고 오셔서 불심판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그날을 두고 우리는 계산해야 되고,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거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는 영영히 영생하는 것으로 부활합니다. ‘부활할 때 내가 어떻게 부활하나?’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땅위에 있는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죽음에 동참해 가지고 그 부활의 권능에 이르려 하노라” 했습니다.

부활할 때 그때 영광이 영광이요, 권위가 권위요, 존귀가 존귀요, 부활할 그때의 수치가 수치지 땅위에 있는 수치 그까짓 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땅위의 인간들이 알아 주면 뭐 할 겁니까? 주님이, 대주재인 그분이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간단한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것에 충성하였으니 영원 무궁한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 주인의 즐거움에 와서 참여하라.” 완전자의 즐거움은 완전의 즐거움이요, 영원 불변자의 즐거움은 영원 불변의 즐거움이요, ‘영원 불변 완전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이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땅위의 사람들이 시시비비 하는 것 그것을 참고로 삼아서, 혹 내가 모르는 거 잘못된 거 있을까 그것은 참고로 삼지 그것을 절대성 있다고 상대해서 거게서 뭐 평가해서 ‘됐다. 안 됐다.’ 울고 불고 기뻐하고 안심하지를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공론은 매우 경한 것으로 내가 여긴다. 자기 양심이라는 그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앞에 가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날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떨고 간다.” 그렇게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데에 이용되는 것뿐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데에 이용되는 것뿐입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데에 이용하는 이용이 끝나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자기와는 완전히 상관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상관이 끊어지고 이다음에 무궁세계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살 때에 자기 행한 대로 우주와 영계 것은 자기가 통치권을, 이제 그때 영원한 통치권을 세상에서 마련한 대로 받습니다.

뭐 하룻밤 나그네의 고생도, 영광도, 존귀도, 수치도, 실패도 계산할 줄 알면서 이것에 억억만 배로도 계산 할 수 없는 영원 무궁에 대해서 계산할 줄 모르는 것이 그것이 마귀의 수건에 눈이 가리워서, 뜨고 있으나 눈먼 자요, 눈을 뜨고 있으나 눈먼 자라.

그런고로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구원을 이루는 데에 이용하는 그것만이 내게 필요합니다. 이용하는 그것만이 내게 필요하요. 억만금을 가져도 ‘보자, 너는 억만금을 가지니까 그 재산에 네가 후달리고 있나? 억만금이 있든지 말든지, 오든지 가든지 너는 주와만 관계가 변동되지 안하고 거게 피동되지 않는?’ 이것도 이용하는 것이오. 그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들의 영원한 구원을 연습하고 연단받고 훈련받는 데에 이용에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이 훈련이 끝나면 다 그런 것은 두고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다시 주인공으로 영원히 그것을 자기 실력 있는 대로 영원히 가질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월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됩니다.

우리가 소중한 것이 많다 해도 그중에 제일은 시간입니다, 시간. 한 시간 허비하면 다시 찾지 못합니다. 이 한 시간은 영원을 그만치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도 시간에 대해서 귀중성을 모르기 때문에 시간을 남용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김현봉 목사님에게 제가, 그 집회에 참석할 때에 그 어른이 그런 말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하고서 어짜든지 저녁 먹고 나면 이 사람 저 사람 주 만나 가지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해서, 자기의 영원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 정력을 다 거게 허비하고 늦게 누워 자니까, 피곤하니 할 일 못 하고 구원 이룰 일 못 하고, 이래서 마실 가고 저녁 먹고 놀러 다니는 거, 만나 가지고 노는 시간 요 시간을 우리가 없애지 안하면 안 된다는 그것을 강조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참 문제입니다.

그저 만나서, 뭐 요새는 테레비 본다는 이거는 더군다나 더 마구 강도요 살인 강도라. 이 테레비는 살인 강도라. 영원한 내가 될 것을 마구 죽이고 마구 녹히고, 마련할 수 있는 보배로운 재료의 이 시간을 다 도둑 맞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아까운 줄 알고 이 시간이 귀중하다는 것을 이것을 아는 우리가 돼야 될 터인데, 제가 미국 사람들을 좀 봤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귀중성을 압니다.

시간에 대한 귀중성을 압니다. 여게야 뭐 한 시간 두 시간 지내 보내는 거, 한 시간 두 시간 서로 노는 거, 한 시간 두 시간 그 사람 때문에 뺏기는 거, 한 시간 두 시간 그 사람을 위해서 뭐 어떻게 하는 거 이런 것을 아주 여게 대해서 계산하지를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으례히 십 분이면 십 분의 댓가가 있는 것입니다. 십 분의 댓가가 있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십 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으면 십 분 댓가를 내 줍니다. 십 분을 무슨 상담을 했으면 그만한 댓가 내고, 자기가 무슨 물을 것이 있든지 할 게 있으면 십 분을 물었으면 그만한 댓가를 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시간에 대해서 귀중성을 아는데 그 귀중성을 안다는 것이 돈을 표준해서 알고 있지 영원 무궁의 구원을 위해서 표준하고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한 말로 ‘미국은 유물주의의 나라다’ 그렇게 지금 확실히 내가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것도 우리 나라의 이 시간 몰라서 하는 이것보다는 나을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아끼는 것, “세월을 아끼라” 세월을 아끼라 말씀하는 것은 하늘나라를 표준해서, 네가 한 시간 허비하면 하늘나라가 그만치 손해갔다.

네가 두 시간 허비하면 그만치 손해간다. 하늘나라를 표준해서 시간 계산을 정확히 하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성경에 기회를 놓치면 “복빎을 받을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해도 회개할 기회를 놓치면 다시 찾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요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언제든지 기회는 기다리고 있어야 되지 기회를 닥치고 나면 그만 기회 지나가 버립니다. 미리부터 기도하고, ‘내가 요것은 언제 하련’ 요것을 할 수 있는 기회, 요것을 볼 수 있는 기회, 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 요것을 지식할 수 있는 기회, 요걸 연구할 수 있는 기회, 요것을 고칠 수 있는 기회, 자꾸 우리가 기회를 기다리고 있어야 그 기회가 내게 바로 이용이 돼지지 그저 기회가 떡 오고 난 다음에 생각해 가지고는 다 기회는 떨궈버리고 말지 기회를 떨구지 안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비유로 말하기를 ‘기회는 머리는 더풀더풀하고 꼬리는 매끌매끌하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서 오는 놈을 거머쥐면 그 기회는 다 내가 이용할 수 있지만 기회는 지내 놓고 난 다음에 뒤는 아무리 붙잡을라 해야 다 불거지고 다시 잡지 못한다.’ 그런 말을 어떤 책에 쓰인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런고로 내일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자꾸, ‘내일 하지’ 내일은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압니까? 내일을 있다고 생각 말아야 할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일 일은 내일 할 것이요” 내일 네가 있으면 또 내일 일 하지 “한 날의 괴로움이 그날에 족하니라” 너는 오늘 이것만 네가 살고 있지 내일은 네가 살란지 안 살란지 모른다. 이러기 때문에 내일을 있다고 네가 무엇을 미루지 마라. 오늘 할래도 못하는 일이면 너는 아예 못하는 일인 줄 알고 ‘내일 하지’를 말하지 마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내일이 있으면 내일 일 내일 하지. “한 날의 괴로움이 그날에 족하니라” 그런고로 우리는 내일이 있다고 뭐이 있다고 자꾸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우리가 다 속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날뿐인 걸로 우리는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할 일은 즉시 하고 뒤로 미루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시작도 주님으로, 시작도 주님으로, 계속하는 진행도 주님으로, 끝을 맺는 그 결말도 주님으로, 이 외에 딴것을 우리가 가지면 다 사망이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라, 목숨을 다하라, 힘을 다하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사랑하라 말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 세 가지 위해서 다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가지고 사람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그 생명 가지고 사람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그 힘 가지고서 사람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그 뜻 가지고서 사람 사랑해야 되지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큰 관계가 맺어졌기 때문에 이것을 이렇게 하지 안하면 이 구원을 우리가 보존해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그네 세상은 뺏길 수도 있고 내것 삼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귀중한 시간입니다. 하늘나라 가면은 다시 뺏길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 세상만이 융통성이 있고 성패가 있고 흥망이 있고 존비 귀천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잠깐 한번 더 말하겠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고 갈까? 생명 없는 물체처럼 세상 홍수 조류에 끌려서 흘러 떠내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자같이 자기 용기만, 자기 용기만 북돋아 가지고 자기 용맹으로 투사하는 취미에서 살고 가는 사자 짐승 같은, 사자도 짐승이오. 사자 같은 짐승 노릇 하고 가지 말 것이요, 뭣이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 거머닥쳐서 제것 만드는 곰 발 같은 이런 짐승 노릇으로 살고 가지 말 것이요, 표범처럼 자기의 장엄한 그 위엄성을 보이면서, 자기의 위엄을 시위하면서, 위엄을 시위하면서, 모든 것들에게 시위하면서 얼마든지 모든 사람에게 지나치게 과시할라고 시위하면서 가는 이 짐승 생활 우리가 하고 가서는 안 됩니다.

과학 따라서, 시대의 물결 따라 살아도 안 되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좋은 거 모두 이거 좋다 저거 좋다 하니까 좋다 하는 것만 자꾸 따라다니면서 좋은 것만 취해서, 진시황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 다 자기가 둘러 취했고 자기 마음에 싫은 것은 다 제거해 버렸고 이래 가지고 뭐 장생불사 하려 했지만 그것 다 소용 없습니다. 다 여산에 고혼이 되고 말았어.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안에 짐승처럼 밥통만 보고 사는 짐승으로 살고 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이 우주에 손톱 같은 그것도 그런데 하물며 ‘나는 빌딩 하나를 만들었다. 나는 무슨 회사를 하나 만들었다.’ 만들었으면 네가 어짤 것이고? 두고 갈 눈꼽재기 같은 거 쌀동가리 같은 거 그것 보고서 ‘나는 이 지역에, 나는 구미 대륙에 나는 무엇이다.’ ‘아시아 대륙에 뭣이다.' 그거 하면 뭐 하냐?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르니 그것도 다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다 헛된 것이오.

그런고로 함정에 빠진 짐승처럼 전후 좌우를 모르고 그저 살려고만 푸득거리고 우리가 살다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살려 하는 것보다도 죽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보다 언제 떠나는 걸 생각하는 것이 그게 더 중요합니다. 자꾸 거머닥치기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줄 수 있는 사람 되는 것이 그것이 더 성공적이요 장한 것입니다. 이래서 세상은 어떻게 살고 갈까?

불멸의 존재인 영원을 가진 우리들은 이 세상은 이렇게 중요한 세상인 줄 알고 살고 가야 됩니다. 세상은 참 중요한 세상입니다. 한 번 가면 다시 못 만나는 세상인데 영원을 좌우하는 이 중요한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의 터를 닦는 세상이요, 영원을 심는 세상이요, 영원을 가꾸는 세상이요, 영원을 마련하고 구비하는 세상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이것을 한 번 기회 놓쳐 놓으면 아무리 후회해 봤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원은 자기가 잘 만들었든지 못 만들었든지 자기의 영원 무궁은 자기가 만든 대로 자기가 받아 가지고서 산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뭣이든지 심은 대로 그대로 거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을 잘못 깨달으면 안 됩니다. 세상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을 자기가 살 처소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나그네입니다. 나는 여관에 자고 있소, 지금. 이 세상은 여관이라. 오늘 떠날는지 내일 떠날는지 세상은 우리 집이 아니라.

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게 세상 아니라. 이것 가지고 영원을 연습하는 데에 잠깐 사용하고 가는 것이라. 사용하고 난 다음에는 가. 그거는 주님에게 두고 가야 돼. 하나도 가져가지 못해. 먼지 하나도 가져가지 못해요.

그저 어짜든지 세상에서 많이만 쓰면 좋은 줄 알지만 쓰는 사람은 과도히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 다 변상이 있습니다. 변상이 있어.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쓰고 효력 있게 사는 게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은 자꾸 많이 쓸라 하지 안하고 적게 쓸라고 애를 쓰고 잘 먹을라고 애쓰는 게 아니라 이거 좀 졸하게 먹을라고, 이런데 나는 이거, 내 소원은 그만 이거 저 논두렁에 가 가지고서 잠깐 소 모양으로 어득어득 좀 뜯어먹어 버리고 나면 그만 괜찮고 이랬으면 좋겠는데 이놈의 먹는 요게 종된 거 내가, 그래서 하늘나라 가면 먹는 여게 종 안 될 터이니까 먹는 종된 요놈 벗어버리면 그때 시원하겠다.

참 뭐 아무것도 안 쓰고 사는 것이 좋지 쓰고 사는 게 좋은 게 아니라. 그래서 우리 ○○○집사가 나한테 가방 하나 사 준 거 그거 아마 근 이십 년 돼 갈 겁니다. 근 이십 년 돼 가는데 쟈크는 다 떨어졌고, 지금 내가 그거 쓰고 있어.

나는 그거 하나를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쓰고 적게 쓰는 것.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과도히 쓰지 말고, 쓰는 그게 좋은 게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그 일을 하는 데는 비용 적게 들고 그 일 하면 좋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세상 것을 적게 쓰고 가치 있는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일과 모든 행위와 자신을 연단하고 연습해서 자기를 강철같이 만들어서 영원 무궁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자기로 만드는 게 좋습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끝나버립니다. 무궁세계의 연습을 우리는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을 내가 보니까, 책을 보니까 그분은 젊을 때부터, 요새는 뭐 서이식이라 하는 건강 요법에서가 아니고 그분은 항상 판때기 위에서 잔다고.

판때기 위에 자는 것은 평안한 요 위에 자다가서 앞으로 주를 위해서 어떤 환난이 올 때에 그때 견디지 못 할까, 자기를 강철같은 연단을 시켜서 주를 따라가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조금도 지장받지 않고 따라가게 그 연습을 항상 하고 있다는 그런 것을 제가 어떤 책자에서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천지는 다 없어집니다. 이것은 다 체질도 없어지고 모든 형태도 없어지고 인간들의 행위만 덩그리 남아 있습니다. 행위만 남아 있어.

그러면 자기 행위 자기가 따라서, 그 사람 보면은 ‘저 사람은 이래 살았다 저래 살았다, 아무것이는 이래 살았다 저래 살았다.’ 하는 그거 행위는 남아 있을 터이니까 이것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땅위에서 영원한 수치를 지금 해결짓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정돈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다시 창조됩니다. 창조되면 그 세계가 우리의 살 곳입니다. 영계와 물질계가 다 하나되어서 영계나 물질계나 영이나 물질이나 다 서로 통해서, 물질은 물질이요 영은 영이지만 영물과 물질계가 다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영계와 물질계가 통일된 그 나라에 그리스도가 왕이 될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제사장, 선지, 왕이 될 것을 가리켜서 왕같은 제사장 선지를 우리가 가진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넷째로는, 오산이 없도록 우리가 정확한 비판과 평가, 계산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그날의 것으로만 우리는 계산해야 됩니다. 그날이라는 것은 개인의 죽음의 날, 주님의 재림의 날, 부활의 날, 심판의 날, 영원한 보응의 날, 그날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다 우리가 거기 도달해야 되기 때문에 그날 것을 가지고 오늘에 계산해서 그날에 수입이 있어야 되지 그날에 수입이 없는 것은 암만 있어야 소용 없습니다. 천하를 다 차지해도 아무 소용 없어. 그날을 두고 우리가 계산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전부가 다 오산 됩니다.

또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원을 준비하는 데에 필요하지 준비가 끝나면 우리와는 상관이 끊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간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얻지 못합니다. 내일 일을 있다고 우리가 자꾸 생각하는데 내일 일이 있다고 생각지 말고, 내일 일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내일 내 날이 있을런지 없을런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로 끝난다 요량하고 모든 것을 할 것이고 끝나서 못 하면 그거는 내일 주면 하고 내일 안 주면 그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일은 뒤로 미루지 말고 즉시 즉시 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시발이나 진행이나 모든 것을 항상 주로 인하여서 “나로 인하여 살리라” 말씀하신 대로 이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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