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00:59
세상에 대하여 담대해지는 이유
본문 :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은 l3절에 '이는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은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부정모혈로 난 것이 아니라.
또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라' 육의 정욕 생활에서 나온 그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또 사람의 무슨 생각이나 무슨 지식대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됐는데 우리라고 항상 이래 붙이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대속으로 인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됐지 대속이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안 됐습니다. 이래서 거게 우리라고 복수를 붙이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 합하여 복수로 칭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은 이것은 혈통으로 난 게 아니라, 그러면 혈통으로 났다 말은 이 육체로 난 것이 아니라 말이요 부정모혈로 난 게 아니라. 첫째 아담의 아들은 전부 혈통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은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요 또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요 육의 정이 나와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게 아니라 그 말입니다.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또 사람 생각, 사람 생각, 또 사람의 원함, 모든 육의 자손은 전부 사람들이 원해 가지고 자기 욕심하로 마음대로 소원대로 해 가다 보니까 자녀가 생겨졌습니다. 또 정욕 생활하는 가운데서 생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은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요, 육정으로 난 것도 아니요, 정욕 생활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또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의 생각이나 뭐, 사람들의 뜻이라 말은 사람들이 아는 이치로 난 것 아니라 그 말이오. 사람들이 생각한 이치로 난 것이 아니라.
육은 다, 결혼하는 것은 정 생활 하기 위해서, 또 자기 혈통에서 난 혈통의 자손을 낳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녀가 없으면 자녀 두기 위해서 결혼을 세 번 네 번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딸만 있는 사람은 아들 낳기 위해서 얼마든지 몇 번이든지 결혼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 건 다 사람의 뜻이요 사람의 정으로 나온 것이요, 그것이 자기 혈통 자손을 원해서 그런 것입니다. 혈통 자손을 양자 하는 것은 나중에 가서 재미가 없고 책임을 잘 지지 않는 것은 자기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혈통이 가 가지고 육이 분식돼 가지고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랬으나 오직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아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들이니라' 이거는 육정으로 나지 안했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 들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 가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우리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요소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을 많이 증거를 했습니다. 다만 첫째 아담의 자손도 아담의 요소의 실제가 와 가지고 실물이 와 가지고 우리가 됐고, 또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도 실물이 와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됐는데, 다만 다른 것은 첫째 아담의 자손은 이렇게 분자가 떨어져 나와 가지고 생겨졌고 우리는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애 우리 안에 와서 전체가 내주하셔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완전히 계십니다. 무슨 부분적으로 능력적으로 이렇게 와서 계심이 아니고 완전히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하신 그분의 본체가 와 가지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가 됐는데, 우리가 됐는데 우리의 뭐이 됐는가? 우리 생명이 됐습니다. 우리 생명이 됐습니다. 우리 생명이 됐는데 우리 생명은 인적 요소가 아니고 인간이 아니고 사람인 아담 하와의 챗째 아담의 자손의 그 영육을 통치하는 생명이 와 가지고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 육의 생명도 보면 육의 이목구비 수족이 있는데 이목구비 수족이 활동하는 것은 보기에는 이목구비 수족이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마는 실은 보이지 않는 그 생명이 이목 구비 수족을 붙들고 이렇게 생명 역사를 일으키는 것인데 생명이 떠나면 이목구비 수족은 그대로 있어도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이목구비 수족 그거와, 몸뚱이와 생명은 별개라 하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면 육과 마음은 꼭 그대로 있다 할지라도 생명은 별개입니다. 육의 생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그것의 역사로 이목구비 수족의 모든 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육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둘째 아담의 자손인 우리의 생명은 뭐인가?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영육도 아니요, 또 둘째 아담의 자손은 우리가 무슨 하나님이 떨어져 나와 가지고 우리가 무엇이 된 그것도 아니요 다만 우리 안에 생명으로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생명이 계시는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모든 영육으로 되어 있는 첫째 아담의 자손에 모든 작용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생명으로 작용한 것은 다 영생입니다. 같은 영육을 가지고 있지마는 이 생명이 없는 자들의 생에는 전부가 다 사망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에 연합해서 죽고 우리는 이 영육 안에 영생하는 생명이 들어와 가지고 계셔서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육이 작용을 하고 활동을 합니다.
그러면 이 생명이 무엇인가? 이 생명의 작용이 곧 진리의 작용이요, 성령의 작용이요,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작용이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의 작용인데 이 작용이 이것이 뭐인가?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진리도 하나님의 요소요, 성령도 하나님의 요소요, 또 이렇게 죄를 완전히 형을 받아서 없앤 이 대형한 것도 하나님의 요소요, 또 대행한 것도 하나님의 요소요, 대화친한 것도 하나님의 요소요,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요소가 첫째 아담의 자손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 제가 한 것처럼 이렇게 나타나 가지고 역사합니다.
이래서 우리에게는 전지 전능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전지 전능의 능력이 내주해 계시는데 이 능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산 것은 다 영생이 됩니다.
그러면 전지 전능으로 내주해 계시는 것을 우리들이 알기 쉽게 발표할라 하면은 이제 여섯 가지 말한 그것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 하늘에 소망, 성령, 진리 이 여섯 가지로 우리에게 나타나 가지고 역사하는데 이 여섯 가지 역사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여섯 가지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하시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서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인데 우리의 것인 이거는 뭐인가? 이거는 곧 하나님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요소라니? 성부, 성자, 성령,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뭐이 생명? 우리의 생명은 성부가 우리의 생명이요, 성자가 우리 생명이요, 성령이 우리 생명이요, 진리가 우리 생명이오.
성부, 성자, 성령, 진리가 역사한 그 역사, 사죄, 칭의, 화친은 그 역사가 한 역사요,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도 그 자체가 역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하늘나라의 소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은 분식된 것이 아니고 바로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 계십니다. 이래서 우리 안에는 그라면 성부, 성자, 성령, 진리가, 진리가 그 자제는 따로 있고, 그 자체는 따로 있고 우리에게는 능력으로 와서 있고 무슨 지혜로 와서 았고 감화 감동시키는 역사로 우리에게 와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그 실상이 우리 안에 와서 계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또 그분이 역사하신 그 역사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역사는 사활의 대속의 역사를 했는데 대속의 역사가 우리 안에 함께 있습니다. 대속의 역사가 우리 안에 함께 있는데 대속의 역사 속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고 진리가 계십니다.
그러면 대속의 역사를 우리가 입어서, 우리 안에 대속의 역사가 있고 대속 역사 속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 하나님이 계셔 가지고 대속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대속의 행위가 나옵니다. 대속의 행위가 나오는 것은 죄 없는 행위, 의로운 행위,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위, 영감대로의 행위, 진리대로의 행위, 하나님을 향한 소망 행위 이것이 우리에게 나옵니다.
나오나, 이제까지 어두워져 가지고 있던 거는 뭐이냐 하면 '그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중생한 것은 살아났다, 죽었던 것이 살아났다.' 이렇게만 우리가 생각을 가지고 어떡어떡하게 그렇게 좀 그 속에 있는 참이 보여지기는 해도 이것을 담대히 말하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다만 '죽은 영이 살아났다' 이렇게만 다 말들을 하고 또 '죽은 영이 살아난 게 아니라 마음이 살아나고 정신이 살아났다.' 뭐 이렇게 아주 거리 먼 데에서 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영육이 현재 법적으로 살아났고 해서 실질적으로 산 생활도 할 수가 있고 또 옛날로 돌아가 가지고 죽은 생활을 할 수 있다 하는 거게까지는 우리가 바로 알았었는데 우리 영육을 살릴 뿐만 아니라 영육을 살린 그것은 둘나 아담의 자손인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서 첫째 아담의 자손을 살렸는데, 영육을 살렸는데, 그러면 영육 살린, 둘째 아담의 자손이 영육을 살렸으면 둘째 아담의 자손은 그것은 뭐이냐? 그것은 영육의 생명입니다. 영육의 생명인데 영육의 생명 그것은 뭐인가? 영육의 생명은 어데서 나왔는가? 영육의 생명 속에는 뭐이 있는가?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진리가 친히 그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내주해 계셔 가지고 역사할 때에는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진리가 우리 영을 붙들고 역사해 가지고 육의 작용이 나오고, 그러면 육의 활동 나는 것은 영으로 말미암아 육의 활동이 나오고, 이런 모든 작용들이 나오고, 영으로 말미암아 육의 작용이 나왔는데 그러면 영은 뭘로 말미암아 되는가? 영은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또 성령이 그 안에 계셔 가지고 성령의 작용으로 영의 작용이 나오고, 영의 작용 안에서 성령이 작용하는데 성령이 작용할 때 어떻게 하는가? 진리대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우리 영 안에 진리, 진리 안에 하나님, 이렇게는 저도 과거에 발표를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발표를 많이 했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이것을 제가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발표를 하려고 해도 겁이 나서 발표를 못 했었습니다. 못 하고 오랫동안 내치 여게 대해서 생각하고 성경을 자꾸 증거할 때에 이것을 깨닫고 난 뒤에 성경을 보니까 성경 전체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랬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지금 제가 우리 본교회에서 얼마 전에 말했고 요번에 대구집회 가 가지고는 지금 말한 것이 이것이 벌써 설교록에 나갈 것이기 때문에 지금 교계에 가 가지고 이것이 다 퍼져나올 것입니다. 이러면 이것은 뭐 나가면 또 많은 이에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둘째 아담의 자손인데 둘째 아담의 자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신데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실제의 요소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예수님은 참사람이신 사람의 실제 요소가 와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의 자손이 됐는데 예수님의 자손은 곧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우리도 신인양성을 가졌습니다.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능력만 와 가지고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지혜만 와 가지고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역사만 와 가지고 하나님이신가? 그런 자 아니라 하나님 본체가, 삼위일체의 본체가 우리 안에 영원히 떠나지 안하고 내주해 계신다.
이것이 곧 그러면 둘째 아담의 자손으로 난,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볼 수 있게 거듭나지 안하고 볼 수 없게 거듭났는데 그것을 비유로 묘사한다고 하면은 바람이 임의로 부나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냐 다만 동풍인지 남풍인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람이 불고 난 다음에 바람으로 인하여 움직여지는 모든 것들을 보아서 남풍인지 북풍인지 알 수가 있다. 그 모양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난 자는 볼 수 없고 그 말은 인간의 지식으로도 볼 수 없고 생각으로도 볼 수 없고 인간이 논리하는 논리로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없으나 이제 거듭 나고 난 다음에, 새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난 그 자손이 생겨지고 난 다음에는 행동이 다르다, 행동에서 나타난다. 그것을 가리켜서 바람을 부는 걸 가지고 우리에게 묘사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듭난 것은 바람이 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바람은 안 보이나 바람의 작용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난 우리 이 둘째 아담의 자손은 난 것은 모른다. 난 것은 볼 수 없다. 난 것은 인간의 이치로도 볼 수 없고, 인간의 논리로도 볼 수 없고 추측으로도 볼 수 없고, 이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그것이 전연히 볼 수 없는 일인데 다만 나고 난 다음에 표가 난다.
거듭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난 다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예수를 잘 믿은 사람은 차차 잘 믿어 갈수록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것을 이제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l4장에는 '그때는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고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상호 내주하는 것,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상호 서로 내주해서 하나님 안에 아들이 있고 성령이 있고, 아들 안에 아버지가 있고 성령이 있고, 성령 안에 하나님 아벼지와 아들이 이렇게 계시는 거와 같이 너희들 안에 아버지가 있고 너희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고 아버지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거게? '보리라' 했어. '너희들이 보리라' 지금 본 것이 더디 보기 때문에 이게 흐미해서 슬슬 나와 가지고 이제 말한 것이 이제까지, 이제까지 이렇게 증거하고 저렇게 증거하게 삐쭉삐쭉하게 증거했는데 그 증거한 것이 하나도 뒤에 깨닫고 보니까 잘못됨이 없고 딱 진리에 맞도록 이렇게 증거가 됐으니, 하나님이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여게 둘째 아담의 자손으로서 중생된 데 대해서 이런 면에 이런 각도로 말하고 저런 각도로 말해서 그것이 어떻게 서로 모순되고 배치되는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이제 깨닫고 보니까 그렇게 부분적으로 증거한 것이 하나도 틀리지 안하고 그 부분적으로 증거한 것이 딱 들어맞은 이것이 신기한 이거 하나님의 내재적 역사지 인간의 생각으로 했으면 인간이 추측하고 추상하고 추론해 가지고 한 것이면 그게 참에게 맞을 리가 있습니까? 참에게 맞지 안하는데 그것이 참과 들어맞은 것은 뭐이냐 하면은 말을 할 때 제 생각대로 하지 안하고 전부 성경에 기록된 성경에 근거해 가지고 이것이 전체가 체계적으로는 되지 안했지마는 부분적으로 증거해도 성경대로 증거했기 때문에 증거한 것이 주 종합이 돼 놓으니까 딱 들어맞더라 그거요.
그래서, 이번 공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어진 구원 큰 거 여섯 가지를, 이번에 다섯 주째입니까? 이래 가르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된 것, 우리가 영생을 가져서 지금 영생이 살 수도 있고 죽음이 살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 하루를 지낼 수도 있고 죽음이라는 이 죽은 생활, 죽이는 죽는 생활, 죽는 생명이 하루 생활할 수도 있고 영생하는 생명이 하루 생활할 수도 있는 영생을 우리가 가졌고,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받을 이 부활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도 이것도 이제 영생하는 생활이 살고 보니 이게 죽을 리가 없습니다. 죽을 리가. 이거는 부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생활이 자꾸 되어져. 갈수록 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고 부활하는 데 대해서 확신이 자꾸 가져지게 됩니다.
그러면 세 가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우리, 또 우리는 영생을 이미 가지고 영생이라는 영생하는 이 생명이 살 수 있는 것, 영생하는 생명이 사는 생활도 살 수 있고 또 죽는 생명이 살 수도 있는데 우리는 두 가지 기로에 있기 때문에 영생하는 생명이 살면 영생이 되고 죽는 생명이 돼 살면은 죽음이 됩니다.
또 우리는 이 몸이 '겉사람은 점점 후패해 나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죽지 않는 자기 마음이 자꾸 자라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은 죽지 안하고 없어지지 안할, 진리대로의 된 진리와 하나된 마음이요, 영감과 하나된 마음이요, 또 예수님의 대속 안에 있는 이 마음, 이 생각, 또 행동도 우리가 진리와 함께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진리대로의 행동이 있어.
진리대로의 행동, 영감대로의 행동. 우리 말도 생각도 진리와 한덩어리된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본다 말이오.
이거는 무슨 육과 하나된 게 아니고 진리와 한덩어리돼서 진리 안에 있고 진리가 내 행동 안에 있고, 내 행동은 진리 안에 있고 진리는 내 행동 안에 있고 진리와 내 행동이 하나라는 것을 자꾸 자기가 깊이 자꾸 확실히 느끼기를 육으로 만지는 것보다 더 확고하게 느낀다 말이오. 육으로 만지는 거는 이거 육으로 만졌으니까 이 많이 길러 가르치고 있으니까 쥐고 있다 싶으지마는 이거는 허무하다 그 말이오.
이거는 허무한 것이 쥐고 있다 이래도 참 쥐었는가 안 쥐었는가, 이 쥐었다고 생각하는 것, 했었으니까 쥐었지요. 거머잡고 있는데 거머잡고 있는 이것보다도 진리와 나와의 행동이 하나된 이거는 그보다 더 확고하고 더 확실하고 이거는 변동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나에게 확실히 알아지게 되고 느껴지게 되고 또 실감되게 된다 그거요.
이래서, 영생하는 생활도 있고 이 다음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이 소망을 가졌는데 부활할 것이 그것이 부활이 뭐 부활이 이다음에 부활하는 게 아니고 지금 부활입니다. 지금 이 현실에 부활된 것은 죽지 않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첫째 아담의 자손 이것이 안 죽는화, 안 죽는 것으로 성화되고 또 죽는 것으로 화해지는 것을 분명히 둘을 볼 수가 있다 말이오. '이 마음은 이 행동은 안 죽는다.' 이 행동은 그건 죽을 수가 없어.
성경대로의 행동, 진리대로의 행동, 영감대로의 행동, 내 행동 속에, 요 행동 속에는 진리로 인해서 요 행동했고 요 행동 한 힘은 진리의 힘으로 힘고 요 행동하는 데는 성령이 내주해 계시고 요 행동과 진리와 성령은 한덩어리입니다.
한덩어리인데 어떻게 그것을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곧, 지금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 부활된 것 이것이요 다음에 이제 완전히 형상까지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 지금 우리가 진리와 영감과 성령으로 더불어 예수님의 대속 안에서 행동한 요 행동은 죽지 않습니다. 이미 영생이 산 영생한 그것이 이제 죽음의 꺼풀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영생하는 것으로 그렇게 나타나서 생활하는 그것이지.
이 부활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도 별스러운 것 아니라. 지금 부활해요. 지금 성화된 그것이 이제 이 겉어머리 형체까지 다 부활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지금 성화되지 안한 것은 요 다음에 부활할 때에 비유컨대면 조그마한 어린 아이로 돼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장성한 장성자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차이 있다 말이오.
우리가 제사장, 선지, 왕직의 이 직책을 가진 것, 이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데 우리가 벌써 오랫동안 가르쳤기 때문에 지식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우리가 이제 가르치는 그것만으로 안 되겠고, 그 준비는 내가 자꾸 이 여섯 가지 복을 자꾸 생각하고 믿고 생각하고 믿고 자기가 또 거게서 더 깊이 깨달아 들어가서 거게서 믿음이라는 것도 껍데기 하나 믿는 것과 속속들이 자꾸 믿어 들어가는 거, 자꾸 믿음의 실력과 본질과 본성이 달라진다 말이오. 더 확고해지고 더 정확해진다 그거야.
그러면 내가 이 여섯 가지 구원을 자기가 소망하는 것, 또 믿는 것, 가진 것.
내가 여섯 가지 구원을 가진 것, 또 이 구원을 앞으로 자꾸 얼마든지 무한히 성장해 나갈 이 소망하는 것, 또 여섯 가지 구원을 지금 이루어 가고 있는 것, 여섯 가지 구원이 내게 얼마나 담겨 가지고 역사하는 그것. 이게 자꾸 사람마다 다르고 자꾸 되어진다 말이오.
이러니까 반사가 같이 학생을 가르쳐도 자기가 이것을 자꾸 속에서 여섯 가지 이 구원으로 산 사람, 이 구원이 된 사람, 구원이 그라면 많이 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적게 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적게 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은 적게 전달이 될 것이고 많이 되어 있는 사람은 많이 전달되니까 우리가 지금 이 공과를 다섯 주간이나 가르치고 있는데 이 가르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은 외우는 것으로만 준비하면 아주 껍데기겠다 말이오.
외우는 거 안에 실상 자기가 믿는 것으로 준비하고, 확신하는 것으로 준비하고, 또 그것을 자기가 실지로 가지고 사는 것으로 준비해서, 그러면 우리가 사는 것으로 준비해서 여섯 가지 구원의 이 실상이 내게 없이 말만 전하면 그거는 껍데기요 이루어진 그 실상이 적게 있으면 적게 전달된 것이요, 강하게 있으면 강하게 전달되는 것이요 충만되면 충만히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공과를 자꾸 이래 준비하는 것은 자꾸 실지로 내가, 실지로 내가 인정하고 실지로 내가 그것으로 살고 요라니까 자꾸 그 속에 알맹이가 자꾸 충실해진다 말이오.
마치 이런 모든 곡식에, 모든 곡식들이나 만물의 그 열매를 보면은 그게 제일 처음에는 꺼풀이 생겨져요. 꺼풀이 생겨져 가지고 속에 알맹이가 차차 차차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열매도 한 가지만 아니라. 꺼풀이 먼저 다 돼. 쌀 같은 거는 꺼풀이 다 돼요. 꺼풀이 다 돼 가지고 난 다음에 꺼풀 만들어 놓고 속에 알맹이가 차차 차차 자라 가지고 그것이 되어지는 거 있고 어떤 것은 속에 알맹이가 이것이 자라가지고, 알맹이가 생겨 가지고 알맹이가 차차 차차 커 가면서 이제 껍데기하고 알맹이가 함께 커 나가는 게 있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가 말로만 가르치면 이 쌀 껍데기 모양으로 껍데기만 이래 돼 가지고 속에 알맹이가 없어. 그러니까 알맹이가, 껍데기는 아는 지식은 꼭 같지마는 그 속에 알맹이가 차차 차차 생명이 있으니까 자라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 믿는 믿음이 자라가고, 거게 대해서 확실한 소망이 자라가고, 그대로 자기가 실지로 행한 게 자라가고, 행해 가지고 실제의 그 실물이 자기 속에 생겨져가는 그것이 자라간다 그 말이오. 그것 때문에 이제 다 같은 말을 해도 권위가 있고 안 있고 하는 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공과에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우리들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죽지도 쇠하지도 아니할 부활받을 우리들' 또 '영원토록 영생을 받아 가진 우리들' 요거 순서가 잘못됐어. 요게 이호가 돼야 될 터인데 요거 삼호가 됐다 그거야.
'영원토록 영생을 받아 가진 우리들' 이러니까 요거는 말은 바로 했는데 요거는 현재사요 이호는 미래사인데 그 현재사를 먼저 가르쳐서 일호를 썼으면 좋을 것인데 그리 해도 그 단어만 그렇게 됐으면 됐습니다. 우리 영생은 이미 받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사요 현재사입니다. 부활받는 것은 이것은 미래사인데 미래사라는 이것도 껍데기가 미래지 알맹이는 현재사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몸이 부활받는 거는 껍데기는 이다음에 부활받지마는 알맹이는 지금 이 부활을 받고 있다 말이오. 부활을 받고 있어.
그래서 성령의 생각으로 살면 생명과 평강이라, 영생한다 하는, 그것은 영생하는 것은 모두 다 지금 내용으로 실지가 영생되는데 이다음에 껍데기까지 영생되는 그것이 이다음에 될 부활입니다. 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화평을 이루는 제사장직' '하나님의 충만을 피조물에게 충만케 해 줄 선지자직' 또 '창조주의 단일 통치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왕직' '이 여섯 가지 받은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복받는 유일한 법칙입니다.' 아주 이 공과가 이거 뭐 얼마나 아주 위대하고 좋은 공과인지 모릅니다.
이 공과는 내가 자꾸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걸 공과를 작성을 못 했습니다.
이런데 OOO조사님이 '공과가 오래 됐는데 이 공과가 어찌됩니까?' 이거 다그치는 바람에 이걸 뭐 생각하지도 '그라면 한번 그만 기록해 보자' 해 가지고, 제게 오랫동안 자꾸 생각하던 것을 그렇게 기록해서 그랬는데 말이 뭐 갑자기 할라 하니까 말이 순서도 안 맞고 조직도 안 맞아서 아마 OOO조사님이 좀, 말을 되도록 좀 고치라 했지? 말에 틀림 없이 좀 고쳐라. 내가 퍼뜩 말하니까 그 말이 조직이 잘 안된다. 그거요. 그래서 오랫동안 자꾸 이 생각 가지고 뭘 가르칠까? 이거는 오랫 동안 생각해도 그게 잘 안 돼요.
내가 뭘 이래, 너무 자꾸 이래 거석하니까 좀 안됐어서 정신 휴양도 좀 하고 또 신경도 좀 쉬고 이래서 뭐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러는데 이 고기를 키우던 걸 없애 버리고 고기를 그렇게 키우는데 키우면 또 그걸 꼭 이상적으로 완전히 해야 되지 그거 뭐 그리 희미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이래서 거게서 인제 고기를 키우는데 비단잉어 키우는 그까짓 거는 문제도 아니오. 비단잉어 인제 그것을 인제, 그거는 힘 하나 안 써도 되고. 또 이 미꾸라지 이걸 또 키워 가지고 이놈을 새끼를 내 봐야 되겠다 하는 그래 가지고 그걸 또 이래서 책을 보고 이제 미꾸라지 새끼 날는 것을 다 배우고, 또 꼼장어 새끼 낳는 거 이런 것도 기르는 걸 봐서, 모두 다 물으니까 막 어림도 없다고.
그래 자꾸 물어 들어가 가지고 꼼장어 새끼 기르는 걸 꼼장어 새끼 똑 실내끼 같은 거 가는 실내끼 같은 거 그래 낳아서 어북 굵구로 만들었어. 또 이거 메기를 이래 가지고 또 이래 놨어. 또 탱가리를, 탱가리를 시골에 있어 갖다 놨어. 망태를 또 갖다가 놨어. 또 가물치를 또 이래 낳아서 가물치 알로도 한번 키워 보고 이랬는데, 그래 가지고 이거 만반의 준비가 다 돼서, 집회 갈 달인데 집회 가는 날 토요일날 밤까지 그거 했어. 집회는 나는 생각을 마음에 눌리기만 눌리지 자꾸 그것을 토요일날 밤까지 했어. 했는데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래 이거 좀, 그것도 뭐이든지 좀 거게서 자꾸 그라며 발견은 해요. 그라며 하나님과 떨어지지는 안해, 자꾸. 하나님께 대한 것 생각하고 이래 하는데, 지난 주일날 아침에 와 가지고 설교를 준비할라 하니까 깜깜하게 도무지 영감이 안 와요. 영감이 와야 내가 설교하지 안 오는데, 영감이 안 와서 이 고통을 막 고민을 당하고 이라다가서 뭘 찾아봐도 찾을 게 없고 이래서 '그러면 이 고기 키우는 이게 당신 뜻에 기쁘지 안해서 그렇습니까?' 이라니까 그런 것 같애. 내가 모르니까. '만일 그것 같으면 내가 그것을 다 정리하기로 그리 하면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실랍니까? 충만케 하면 그거라 알고 당장에 내가 가서 철거를 하겠습니다.' 그라고 나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내게 와. 와서, 여러분들은 모르지만 지난주일 설교 내가 아주 은혜 있는 설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몰라도 은혜 있는 설교했어. 권위 있는 설교했어. 그라고 나니까 집회 준비 하나도 안 했어, 고기 준비했지. 고기 준비했는데, 그래 그 소리를 떡 하고 나니까 성령이 오시니까 집회에 증거할 것이 환하게 나오는데 요번 집회에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은혜 주실 걸 믿었다 말이오.
그래서 인제 '이거 치우라 하는갑다' 해서, 그래 주일날은 내가 말할 수 없고 가면서 월요일날 새벽 두시에 OOO집사를 불러 가지고 '네가 이렇고 이러니까 요걸 전부 낙동강에 거는 낙동강에 갖다 넣고 또 이거 저게 오륜대 것은 오륜대 갖다 넣고 다 치우고 싹 소제 다 하고. 그래 물을 새로 해서 물만 빙빙 도는 걸 하나 풍경으로만 보고 그라겠다. 그래 해라 그만.' 그래 시켜 놓았더니마는 그래 시키고 가니까 어떻게 마음이 기쁜지 줄을 딱 잡았기 때문에 '이번 집회에는 이거는 문제 없다' 이래 가지고 그래, 가서 은혜를 이번 집회에 나는 많이 받았어요. 많이 받고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려 그래 하니까 뭐 아무 어려움도 없고 편하고 수월했어.
이래서, 하나 내가 깨달은 게 뭐이냐?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뜻에 틀린 걸 당신의 기뻐하시는 일로 회개하는 것을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하는 그것을 내가 또, 내나 뭐 입이야 여러 만번 증거했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회개하는 것은 요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요렇게 큰 능력이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은 제가 이번에 깨달았어.
그래서, 고기 거석한 거 전부 본 고향으로 다 돌렸습니다. 다 돌리고 뭐 준비, 만반의 준비해서 뭐 이제는 양어쟁이 하고 살 수 있는 그만큼 상식을 가졌었는데 그래 그만 다 정리하고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이 고기를 기르라 하면 기를까 그리 안 하면 고기는 안 기르기로 그래 작정을 했었습니다.
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요.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내 마음에 고기 기르고 싶은 마음을 될 가지고 거게다가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어찌 집회 갈라 하는 사람이 집회에 대해서는 이거 뭐 기도는 이래 거석하며 내 마음은 실은 그 속에 있어. 토요일날 밤까지 계속을 했어요. 지난 토요일 밤까지.
요래 가지고 딱 모들때기 요래 가지고 있다가 그 요긴통에 가 가지고 모가지 자르는 거 모양으로 볼끈 그라니 사람이 죽을 지경이라. 그래 놓고는 내비둬요.
내비두니까 갈급해 죽을 지경이니까 발동하는 가운데에서 이제 그걸 깨닫게 하시고 깨달아 가지고 그걸 딱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셔.
그라니까 그만, 당장 그 작정하니까 증거로 성령의 감화가 내게 충만하게 와요.
그래서 그걸 '치우라' 하고 딱 그라고 나니까 그 시간부터 어떻게 평안한지. 그 시간부터 고기의 생각은 털끝만치도 안 나옵니다.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저렇게 해 가지고 우리를 자꾸 회개를 시켜서 온전케 하시요. 당신하고 가깝게 하는 이 역사를 하려고 자꾸 하나님이 하시오.
그러니까 어떨 때는 어떤 역사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을 이래 하나? 이래 가지고 또 무슨 지금 하나님이 역사를 하실란가?' 아이들 말로 말하면은 '하나님이 또 무슨 야바우를 꾸미노?' 이렇게 할 만치 '무슨 역사 하실란고?' 이래 가지고 우리를 길러 나오시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이번에 이번 집희는 아주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계를 많이 발견하셔 가지고 저에게 주셨고 증거를 했습니다. 이번 설교는, 또 그라고 총공회를 만날 나도 '이 자랑하는 것같이 이거 뭐 자랑을 할 건가?' 이랬는데 이번에는 총공회 자랑을 실컷 하고도 뭐, 어찌됐든지 지금 인제 더 자랑을 해야 되지. 이래 놓으니까 부끄러워하니까 이 총공회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따로 있다 하는 그것을 내게도 이번에 확신을 줬어요. 그래서 누가 총공회 교리와 신조 행정 그 다르다는 것을 그걸 누가 한번 간추려서 한번 만들어 보십시오. 우리 총공회 교리와 신조 행정, 총공회가 된 것이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달라서 총공회가 됐지, 그것 때문에 밀려 나와 가지고 모인 것이 총공회, 총공회라는 단체가 아니오. 총공회라 하는 건 우리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가리켜서, 몇이 모이면 회이고 전체가 다 모이면 공회입니다. 예루살렘 공회, 사도행전 l5장에 있는.
그러니까 이걸 전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나도 부끄러워해서, 간판 떼는 그 사람만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나도 부끄러워했어요. 나도 부끄러워서 자꾸 총공회 뭐 교리 신조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랑하는 것같이 좀 이랬는데 이제 요번에는 총공회 교리와 신조라 하는 자꾸 입에서 노래를 불러줘요.
'이 총공회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다르다' 그래서 과거에도 '예수 믿는 게 다르다.
여게는 예수 믿는 게 좀 다르다. 와서 들어 보니까 다르다. 그 사람들이 다르다 하는 걸. 이래 말해도 주저주저해서 일을 못 했었어요. 다릅니다. 지금 총신이나 고신이나 모든 장로교와 우리가 믿는 것이 다릅니다. 또 이 일반 교회와 달라요.
이래서 자꾸 그날 아침에는 내가 쪽 누워서 이래 밤에 이래 가만히 생각하니까 환하게 열려서 그걸 계통으로 가르치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줄기에서 자꾸 새 움이 돋고 새 움 돋고, 거게서 또 달라서 또 하나 새 것 튀어 나오고 새 것 튀어 나오고 이래 가지고서, 그러니까 이 예수교의 근본, 요번에 우리가 예수교 장로회라 했는데 예수교 된 그것이 이것이 유래를 저 위에서부터 내놔서 그것을 알면 세계의 교회라 하는 것이 기독교가 뭐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거고 거기서 자꾸 뻗어져 쭉 나오고 나면 그 유래를 알면은 이 총공회를 욕을 하지 안하고 '그들이 우리가 정말 다른 게 있나?' 이래 보고, 우리가 다른 것 많아요. 지금은 많이 있어요. 영 문제에 대해서도, 기본구원 건설구원 하는 이것도 어떻게 중요한지. 그게 아니고는 성경이 해석이 안 되고 항상 번민 가운데 있지. 왜? 성경에 보니까 기본구원에 관한 성경도 있고 건설구원에 관한 성경도 있는데 기본구원에 관한 그 성구를 건설구원에다 해석하니까 이거 아무것도 아니고 허트러져 헛일이라 말이오. 또 건설구원에 관한 성경을 기본구원에다 붙이면 또 안 된다 말이오.
이렇게 둘을 갈라 줘 놓으니까 환하게 다 되는데 갈라지지 안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제가 목사라도 확신 안 가지고 가요. 목사라도 확신을 못 가지고 간다 말이오. 못 가지고 가고 항상 그저 그러니까 그만 '믿사옵나이다' 그만 '믿사옵나이다. 믿어두자.' 이렇지 꼭 잡아 가지고서' 이렇게 되지를 못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성경에 난해절이 많은데 저는 난해절이 없어요. 이렇게 다 기본구원 건설구원으로 성경 보니까 난 해절이 없어. 다 거기 붙이니까 어려울 게 없어.
이래서 이번에 저도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많이 받은 것은 내가 탈선을, 고기 기르는 데로 탈선을 실컷 탈선을 시켜 가지고 거게서 날 목을 졸라 가치고 내가 깨달아 획 돌아서니까 하나님께서 내 심령을 그렇게 밝게 해 가지고 하나님이 그걸 알게 해 주시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것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 우리 안에 계셔 가지고, 이거 우리 몸뚱이는 껍데기요, 또 우리 마음도 껍데기요, 우리 영도 껍데기요.
우리 안에 이제 진리가 들어 있고, 진리 안에 성령 들어 있고, 성령 안에 하나님이 내주해 계시는데 이런 걸 자꾸 내가 말을 했지, 말을 했지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해서 확실히 계신 것 이게 확실히 믿어지고 확실히 증거하고 누가 말해도 확고한 이것을 안 것은 이번에 요 근경에 내가 깨달았어.
깨달은 것을 자꾸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전 말과 지금과 틀린다고 이래.
나는 그 말에 대해서 또 대답을 별로 못 했어. 그런데 지금 인제 확 깨닫고 보니까, 달라져야 나도 자라지 그러면 달라지지 안하면 항상 그대로? 깨달음도 자꾸 자라가고, 자꾸 믿음도 자라가고, 소망도 자꾸 자라간다 그거요. 이해가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