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전투와 깨달음, 기도


선지자선교회 1983년 10월 8일 토새

 

본문 : 시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 기독교를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전투 교회라 그렇게 표시를 합니다. 그는  전투가 없는 데는 곧 사망에게 삼키워진 때입니다. 여기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는  것은 이것은 자기의 현실에서 대외전 대내전 이 전투를 해서 승리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말씀이 참 자기에게 중요한 것도 깨닫게 되고 또 밤낮 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게 된다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투가 없을 때에는 첫째로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지를 아니합니다.

전투할 때에 우리 마음이 집중이 됩니다. 또 전투할 때에 그때에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됩니다. 전투할 때에 전심전력이 기울어지고 또 전투로 인해서 모든  우리의 대적하는 것과 방해하는 것과 장애가 되는 그런 모든 것이 다  제거되어지고 또 우리들에게 있어야 될 우리 소원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투가 없으면 성경 맛이 없고 또 전투가 없으면 성경에 대해서  아멘, 아멘 하는 그런 즐거움이 없게 됩니다.

 전투를 우리는 언제든지 계속해야 되는, 밤낮 계속해야 되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이라, 싸우는 일이 계속해야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현실에 자기가 '여기에서는 내가 전투해야 될, 나를  지금 멸하려고 하는 나의 대적이 여기에 누구라' 하는 것을 발견을 할 때에  그때에 자기는 깰 수 있고, 또 발견하고 그로 더불어 싸우려고 싸워볼 때에  그때에 자기의 힘이 미약한 것도 알게 되고, 또 이렇게 싸울 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믿음도 생겨지고 또 하나님과 가깝게도 되어지고 이래서 우리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혼자 골방에 앉아서 혼자 자기 방 안에 앉아 가지고 있을 때라도  전투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여기에야 나 혼자 있으니까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할 때는 벌써 그 사람은 죽은 때입니다.

 또 자기가 무슨 알뜰한 일을 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자기가 알뜰한 일을  합니다. 알뜰한 일을 할 때에 '이럴 때야 내가 한 가지 일만하고 알뜰히 하고  다른 잡념이 없으니까 지금이야 무슨 전투가 있겠느냐? 전투의 대상이  있겠느냐?' 그 사람은 벌써 알뜰한 일을 하는 것에게 삼키워졌습니다. 우리의  전투의 대상 다시 말하면 우리의 대적이 없는 때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대적이 없는 때는 없는 것이니 자기가 일을 할 때에도 거기에 대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되겠고, 자기가 혼자 있을 때도 대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을 해야 되겠고, 또 자기가 기도할 때도 대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기도할 때에 '내가 기도하니까 지금이야 순전히 기도만 하니  뭐 지금이야 내 대적이 무엇 있을까?' 아니오. 기도할 때도 대적이 없는 때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대적이 있고, 또 성경을 읽을 때도 대적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무슨 실행할 때도 대적이 있고, 사람 만날 때도 대적이 있고, 사건을 만날  때에도 대적이 있고, 우리가 예배드릴 때도 대적이 있고 언제든지 대적이 있는  이것을 발견하는 연습을 해서,  으례히 자기가 깨어서 현실이라는 그 한 현실 한 현실을 만나게 될 때마다  '여기에는 대적이 무엇이라' 그러면 대적을 발견해서 대적을 보는 눈이  감기워지지 안해야 됩니다. 언제든지 '여기에 대적은 내 대적은 무엇인가?'  그러면 대적 아닌 것인 줄 알고, 대적 아닌 줄 아는 그것이 대적이 될 때에는 큰  손해 갑니다. 그러기에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 하는 그 말씀은 대적 아닌 줄  아닌 그것이 네게 제일 큰 손해를 보인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대적 아닌 줄 아는데 그게 큰 대적이더라 그말입니다. 또 '이 사람은  나를 협력하고 협조하고 나를 돕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거기도 대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항시, 자면서도 누워잘 때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이 대적을 두고 기도를  하고 자는 것이 옳고, 또 깨어 있을 때도 서로 아무리 친한 자리에 이야기를  하면서라도 거기에 대적이 있는 것을 발견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남자가 내 원수라.' '남자가 왜 원수냐?' '남자가 내 원수가  되는 것은 나는 남자로 말미암아 유혹받아 가지고 멸망받기가 쉽기 때문에  남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존경은 하지마는 남자는 나의 원수가 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내게 있고 또 여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나는 남자가 나의 원수라.'  또 '나는 여자가 나의 원수라. 그러면 여자가 나의 원수가 돼 가지고 내가  패전할 그런 요소가 내게 있기 때문에 그 여자가 내게 원수될 수 있는 그것이  내게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원수될 수 있고 또 그 여자에게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여자라 하는 여자들에게는 다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나의 원수되기가  쉽다.'  자기는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해서 '내가 제일 사랑하고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는  가장 친밀한 이 가족이 나에게 원수라.' 그러면 원수라는 것은 그 사람이 무슨  원수가 아니지마는 결과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나에게 큰 해독을 끼치는 그  결과들이 많기 때문에 원수라, 원수라는 것은 원수될 수 있고 내가 그것을  전투하면 원수가 아니라 나를 유일로 돕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수를 발견해서 그 원수에게 지지 안하고 그 원수를 기본구원을  힘입어서 잘 취급을 하면 그 원수에게서 거기에서 승리가 나옵니다. 원수에게서  승리가 나오지 원수 없는 데서는 승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어데든지 자기의 대적이 있는 것을 이것을 발견하는 연습을 해서  '우리가 지금 의논하고 있는데 의논하는 여기에는 무슨 대적이 있느냐?' 적이  없는 곳은, 없는 시간은, 없는 사건은 없다는 것을 요것을 하나 명심하고  언제든지 무슨 현실을 당하든지 당할 때에 '여기에는 내가 싸워야 할 대적이  누구냐?' 하는 그것을 우리가 발견을 하고 그 대적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그때에  내 마음은 집중 집결이 되고, 또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나를 방해하는 모든  해독의 것들은 다 제거가 되어지고, 또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은혜의 성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투가 없는 때는 우리는 죽은 때와 같습니다. 아주 죽지는  안했지마는 그걸 가리켜서 잔다, 자는 자는 죽은 자와 꼭 같은 것 아닙니까?  자는 자와 죽은 자와 다른 것은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하고 자는 자는 살아나는  그것만 다르지 행동은 뭐 죽은 자도 이목구비 수족이 활동이 없고 또 자는 자도  그 활동이 호흡이나 있지 딴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그리 해서 자가가 평소에 대적을 발견해서 전투가  없는 시간이 없이 언제든지 전투하면 그것이 막바로 환난 때나 평안한 때나 꼭  같습니다. 그러면 평소에 자기의 대적된 자가 감옥 가운데 있을 때도 그자가  대적되고, 또 평소에 자기의 대적되어 있는 그자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그때도  대적이 되고, 또 평소에 자기의 대적된 그자가 자기가 참 존영한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자기를 높여 주는 그때도 자기의 대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보고 살지 안하고 속에 자기의 대적을 발견해 가지고 그 대적을  상대해서 전투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힘입어 나가는 그 생활을 하는 자는  언제든지, 뭐 사형이 온다고 해도 별 다른 현실이 아니고, 또 자기가 존영한  자리가 현실이 온다 해도 그것도 별 다른 현실이 아니고 자기의 현실은 꼭  같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할 일이 있고 어디서든지 승리할 일이  있고, 어디서든지 다 성과를 얻을 수 있고 하는 그 일체인 것을 자기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투를 세 가지로 말했는데 하나는 악인에게 끌려가지 말아라 하는  것은 자기 중심, 자기 중심의 사람에게도 끌리지 말고 자기 중심이라는 자기  속에 옛사람 자기에게도 끌리지 말고 그런 데에 끌리지 말아라 남을 끌지도 말고  끌려가지도 말아라. 또 죄인은 그것은 외부에 나타난 신구약 성경 법칙을 네가  어기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라.

 그러면 악인의 꾀라 하는 것은 그것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이기 때문에  네가 영감을 떠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든지 영감과 대적되어서  영감은 너와 한편되고 영감의 대적이 어디든지 있다는 그것을 깨닫고 영감의  대적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것은, 악인의 꾀를 좇지 말라는 것은 그것은  대내전이오. 대내전, 자기와 관계되는,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되는 그  대내전부터서 시작하는 것이고, 죄인의 길에 서지 말라는 것은 대외전 하나님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이 법칙을 어기는 그런데 서지 말아라.

 오만한 자리에 앉지 말라 말은 이런 일을 쉬고, 이런 일을 쉬고 '이제는 됐다'  하는 그런 네가 미혹에서 서지 말아라. 그런 것을 벗어나게 되면 그런 것을  싸우게 되면 싸워서 그런 것을 더불어 싸우고 또 싸워서 이기고 하는 이 전투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에게 참 꿀보다 더 달게 되고 이 말씀을 볼 때에  감동이 되어지고 깨달음이 생겨집니다.

 이 전투가 없는 사람은 성경에 깨달음이 없습니다. 성경을 자기가 깨달으려고  아무리 읽고 외우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깨달아지지  안하기 때문에 성경을 시작하면 쫙 끝까지 읽었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자기가, 성경을 아무리 연구하려고 해도 깜깜하게 이래 가지고 그저 자기가  과거에 외우던 것이면 외우던 것 또 아는 것이면 아는 것 그대로 지나가 버리지  거기에서 무엇인가 맛이 없다 말이요, 맛이. 음식을 먹어도 맛없을 때같이 성경  말씀을 이렇게 읽어도 맛이 없다 말은 새로운 깨달음이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참 많이 먹고 영양실조 되는 사람보다 적게 먹고 험한 음식 먹고  영양에 충족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요, 강건한 사람이요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성경을 자기가 외우는 성구도 외우는 성구도  이렇게 전투가 되는 그때는 외우는 성구다 다시 외우니까 거기에서 새 맛이 나서  나오고, 읽기 시작하니까 또 새로운, 맛이 난다 말은 그 영의 깨달음이 있으니까  영이 지금 좋아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는 성경을 '이번에는 가서 신구약 성경 전독을 하겠다. 한 번  읽겠다.' 하고 시작을 했는데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 읽어도 성경에 불과 몇  장 가지 못했습니다. 몇 장 가지 못하고 그저 자꾸 그 성경을 보니까 자기가  깨달음이 나서 그만 그 성경을 보니 깨달음이 나 가지고 한 장을 보니까 그 한  장의 깨달음이 뭐 한 달도 갈 수 있고 두 달도 갈 수 있고 이런데 '아무래도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 이것 좀 전체적으로 내가 봐야 되기 때문에 자꾸 좀  딴데를 나가 보자.' 이래도 자기가 깨달음이 생겨져서 거기 대해서 어떤가 또 그  면을 생각지 않을 수 없고 그 면에 대해서 자기가 참고를 안 할 수 없고 자꾸  이리 되어서 성경을 읽어도 내려가지 안하는 사람은 그 말씀이 즐겁고 맛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은 어디서 생기느냐? 다 전투력에서 생겨진다. 그것을 가리켜서 앞에 세  가지 전투를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전투가 없으면 깨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한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이 가족에 대해서 아주 단합이 된 그것이  좋은 것 같지마는 그것이 박애주의 넓게 보고 전체를 사랑하는 그 면에서는  그것은 다 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가족 단위기 때문에, 가족 단위 가문 단위 이러기 때문에 이가면  이가끼리 똘똘 뭉쳐 가지고, 이가가 뭣 때문에 공부하고 뭣 때문에 주의하고  이와같이 출세하려고 벼슬을 하려고 한 나라에서도 이가가 벼슬하려고 애를  쓰느냐 하면 벼슬하는 것이 좋아서 벼슬하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도 '우리  동리에는 김가하고 이가하고 사는데 김가가 저만큼 출세를 했기 때문에 우리  이가는 저보다 출세를 더 해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김가는 이가로 더불어  투쟁하는 그 투쟁에서 투쟁하는 것으로 공부하고,  그뭐 말을 해도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라 공부를 해야 이 사회에 대해서  유익을 끼치고 인류에 대해서 유익을 끼치고' 이렇게 말하면 아무 맛이 없는데  공부하라 할 때에 '봐라, 지금 우리 동리에 아무것이 봐라. 김가 봐라. 이가  봐라.'  이러니까 그 사람들과 우리와 자꾸 적이라는, 적이라는 인식을 시켜 가지고  자꾸 적대시 적이라는 인식을 시켜서 이러니까, 그저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이가가 요번에 일등을 했어? 내가 죽어도 내가 일등을 도로 뺏들어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좁은 범위에서 그 전투하는 거기에서 다 힘을 얻어 가지고 이  가문은 저 가문으로 더불어 대적하고 저 가문은 이 가문으로 대적해 가지고 그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이든지 사람은 자기가 이것을 하겠다 할 때에 못 하게  방해하는 것, 속으로 자기 혼자 암투하는 것이든지, 무슨 도덕의 전투라든지,  명예 전투라든지, 또 그 기능 전투라든지, 실력 전투라든지, 또 영광  전투라든지, 또 사람을 얻는 무슨 인간 취득의 전투라든지 그런 꼭 전투력이  있어야만 속에 있는 힘을 다 발휘할 수 있고 또 집중할 수 있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큰 문중으로 살던 대문중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문벌이 좀 강한 그런 사람들은 예수 믿기 참 어렵습니다. 그것 불행스러운  사람이요. 세상 것이 부자고 강하기 때문에 불행스럽다 그말이오. 그런 대성받이  속에 교회가 서면 교회가 잘 안 됩니다. 이 잡성받이 있는 데 가서 교회를  세워야 되지 아예 대성받이 있는 데에서 가서 교회를 세워봤자 교회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섬나라에 세우면 그 교회가 참 잘 안 됩니다. 왜 섬 사람들은 저거  섬끼리 섬 단합이 됩니다. '우리 섬은 저 아무 섬하고' 섬끼리 서로 대적하는  적대심 그걸 가지고 힘을 삼아 가지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게 강하니까  복음이 들어가야 복음화되지 안하고 언제든지 그 단체가 들어서 복음의 원수가  돼 가지고 하기 때문에 복음화시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일본은, 왜 일본이 왜 기독교가 잘 안 되느냐? 일본이 기독교가  도무지 무성하지 않고 기독교가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은 일본은 일본이라는 그  섬으로 됐기 때문에 그들과 똘똘 뭉친 단합되는 요 단결심이 강한 그것 때문에  그 전투 때문에 기독교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가 한번도  일본 나라에서는 흥왕된 일도 없었고 또 독실한 신앙가가 생긴 일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생긴 중에는 내촌감산씨, 또 하천풍언씨, 또 야나기하라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몇 사람 신앙을 가졌지마는 그 신앙들도 봐야 보면 뭐  허무합니다. 성경 주석해 놓은 것 보면 그 성경 주석들이 그렇게 깊이 들어간  신앙생활 아니고 모두 기독교 정치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그리 안 하면 기독교  무슨 도덕주의 그런 데서 머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람이 만들어지기를 하나님께서 이 타락을 주시고, 그 다음에  타락한 그 옛사람과 새사람이 싸우고, 또 악령으로 더불어 성령을 힘입어서  성령편에서 서 가지고 악령으로 더불어 싸우고 이래 가지고 이 발휘해서 이  세상에서 전투를 능숙해 가지고, 아가서에 보면 '다 싸움에 익숙한 자들인데  허리에 칼을 찼더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래 가지고 전투에 훈련을 시켜서 앞으로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서도  영광의 나라에서, 그 영광의 나라에는 대적이 없지마는, 대적이 없지마는 그  밖에 어떤 대적이 와도 그 대적을 다 승리할 수 있는 언제든지 전투적인 이런  태세를 갖추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사는 그런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전투 없는 일이 없고 깨지 안한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신은 당신하고 전투하십니다. 당신이 스스로 시험에 들지 안하고 시험에  어두워지지 안하려고 하는 그것이 자체 전투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체  승리로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전투가 있어야 된다는 그런 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말고 다 신청하고 그대로 들어서 가져야 됩니다.

 그 시골 그런 데 학교 가도 보면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멀리 '나는 이 사회  어떻게 된다' 그렇게 좀 넓게 적을 두고 넓은 범위에서 전투하는 그런 학생들도  있지마는 대개는 보면 '우리 학교는' 부모네들이 가르칠 때에 '야, 이번 너거  반에서 그 우등은 누구들이지?' '우등은 아무 성받이 그 성받이들이다.' 하면  부모들이 이를 갑니다. '야야, 네가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할 것고, 지금? 그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고 우리들로 싸워서 이렇게 대대로 지금 대적이 돼  나가는데 너희들이 지금 이 공부 이리 되면 어떻게 이겨 나가겠느냐?' 이래  가지고 그 조그만한 아이들에게 그들로 더불어 적기하는 적개심을 길러 줍니다  길러 줘서, '나는 지금 아무것이 저놈에게 내가 지금 저놈은 오늘 구십점  맞았어?' 내가 구십오점 맞으면 기분이 좋고, 만일 그 아이가 백점 맞았는데  자기는 구십오점 맞았으면 기분이 나쁘고, 이래 가지고 그런 조그만한 전투라도,  이제 집도 앞집에서, 그뭐 아주 이웃끼리 좋은듯이 지내도 뒷집하고 앞집하고  속으로는 암투의 적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자꾸 그 가족이 단합이 되고 이리  된다 말이오.

 그래 그런 것은 다 불완전한 전투이기 때문에 그것은 멸망이 되지마는 우리가  크게 의의 편에 서서 죄로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편에 들어서 마귀로 더불어  싸우고, 생명편에 들어서 사망으로 더불어 싸우는 이 싸움은 참 큰 싸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죄로 더불어 싸우는 이 싸움은 큰 싸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싸움을 여기에 자기 안에 있는 대내전 대외전 또 자기가 태만하는  그 태만으로 더불어 싸우는 태만전, 이런 몇 가지 말을 하면서 이러면 여호와의  말씀이 즐겁게 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러면 그래 싸워본 사람은 세상에서도 좀 그 현명한 사람, 불신자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나라에서 세워 놓은 법이 있기 때문에 그 법을  의존합니다. 그 법에 틀런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그 법에 뭐 그런 법에 틀린  그런 범법은 자기에게 몇 가지 그런 범법이 있다 해도 아무런 뭐 걱정하지도  안하고 이렇게 해 나가는데 그런 범법이 자기에게 털끝만치라 있으면 그것  때문에 그만 벌벌 떨고 일을 못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일수록이 범법이 없을 때에는 뭐 사회에  대해서나 국가거나 뭐라 해도 겁내지 안하고 범법이 없을 때에는 겁이 안 나고  담대히 나가고 조그매라도 법에 범한 게 있으면 거기에 그만 눌려 가지고 꼼짝을  못하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전투를 해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위반된 것은  털끝만한 것이 있으면 그만 힘을 쓰지 못하고 절단나고 죽게 되고 꼼짝을 못하고  하나님의 법에 일치되고 법에 위반되지 안할 때에는 아무것도 겁내지 안합니다.

겁내지 안하고, 그러기에 그 사람이 필연 적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됩니다.

 되고,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이것은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 현실을 당할 때에  현실을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라' 하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 율법을  자기가 안약과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의 어두운 눈이라면 자기 도수에 맞은  돋보기와 같이 이렇게 자기로 하여금 볼 수 없는 것을 바로 보게 하는 것인데,  자기가 여호와의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이렇게  해서 자기가 시작할 일도 묵상 가운데서 시작하고, 비판도 묵상 가운데  비판하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을 심사하는 것도 그것을 묵상 가운데서 심사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거기에서, 참 모종을 마치 그 온상에서 모종을 길러 가지고  이렇게 옮겨서 큰 것을 만드는 것처럼 자기 마음 안에서 이 묵상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다 움을 틔우고 또 거기에서 기를 만치 기르고 그래 가지고 이 사회에  모종을 옮기는 것처럼 나갔을 때에 성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번에 우리 서부교회서는 기도하기로 시작했는데 지난 밤에 기록된  그 기록한 숫자는 얼마나 되는고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봤어요? 그 알아봐야지.

으례히 엊저녁에 기록했으니까 오늘 아침에 지금 각처에 와서 이랬으니까 그것을  으례히 가서 말을 해 줘야 그 분들이 '이제 기도하는 사람들이 서부교회는  얼마가 등록이 됐단다' 이리 돼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은혜를 나누지요.

이러니까 그걸 잠깐이며 뭐 계수해 볼 수 있는데 아무도 계수 안 해 봤어 기록만  해 놓고? 그러면 그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그러니까 그것도 자꾸 묵상이 없어  그래요, 자꾸. 전투가 없어 그래.

 아마 내 생각에는 지난밤에 기록된 사람들이 그래도 몇 백 명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비가 와서 그만 그때에 밖에서 못 하고 안에 들어가  가지고 기록을 하니까 그 사람들이 혹 적었는지 모르지마는 비가 안 왔더라면 몇  백 명은 기록이 됐을 것입니다.

 그것을 그 지교회들도 가서, 여기에 본받는 게 아니라 자기네들도 좀 '이게 뭐  하는 일이냐?' 한번 생각을 해서 자기 속에서 '이렇다' 그 속에서 힘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 옥중에서 그래 가지고  있다가 찬송, 밤중 되어서 찬송하니까 그만 거기에 옥문이 열리고 지진이 났던  그런 일이 뭐이냐? 자기가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고 자기의 기본구원이나 모든  뭘 생각했는지 모르지마는 어쨌든지 지금 우리가 기도하려 하는 열 가지 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속에 자기도 모르게 속에 힘이 나와  가지고 그만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속에 힘이 나와 가지고 그만, 무슨 찬송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했는지  무슨 찬송했는지 어쨌든지 속에서 튀어나오는 강한 찬송은 그것이 찬송을 하게  하는 그 강함이, 기쁨이, 담대함이, 평안함이, 그렇게 죽도록 매맞고 이랬는데  기쁘고 즐거움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서 역사해 가지고 그 힘이  나왔기 때문에 내나 찬송하는 그 힘이 지진나게 한 힘이요, 그 힘이 내나  빌립보에 교회를 세우게 한 힘이요, 그 힘이 승리케 하는 힘이요, 기쁘게 하는  힘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설교를 들을 때에 그때에 감화를 받기는 받지마는, 감동을  받기는 받지마는 감동받는 그것으로 위주하는 것보다도 감동 받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위주로 해라.

 이래 가지고 아무 깨달음이 없이, 깨달음이 없이 감동만 되어지는 그 감동은  뒤에 새김질해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 감동은 자기가 어떤 그 유력한 설교자  밑에서 은혜받을 때 감동이 됐다, 산에서 자기가 무슨 산집회하는 데에서 감동을  받았다, 뭐 분위기에서 환경에서 감동을 받았다 하는 그런 감동은 다 피상적이요  다 외식이요 껍데기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승리 못 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감동은 하나님의 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까지  필요했고 깨닫고 난 다음에는 깨달은 도리만 거머쥐고 이제 감동이라 하는 것은  다 집어던져 버리라. 그런 말 했어. 감동이라 말은 다 던지라. 포기해 버려라.

 감동은 뭐 아무거나 다 던져버리고, 다 없애버리고, 네가 깨달은 그 말씀을 네  속에 단단히 기억하고 그 말씀을 새기고 새기고 그 말씀을 생각할 때에 '주여!'  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이걸 생각할 때에 이제 암만 감옥 속에서도, 자기가 무슨  환난을 만나 가지고, 왜정 말년에 그런 신사참배라든지 뭐이 그럴 때에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새김질하고 새김질하고 이걸 새김질하니까 '주여!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승리의 확신이 있습니다.'  이 도로 인해서 생명을 거두어지는 이것은 완전한 승리라. 옮기는 승리라.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은 기적이 나타날 때까지 또 옮길 때까지' 그말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은 이 사망에 속하여 있는 심신의 모든 것이 생명 세계로 옮겨져야  그게 완전한 성공인데 생명 세계로 옮겨지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고  진리의 것이 되고 영감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되면, 영감과 진리로 우리의 영도  살아났고 우리도 살아나는 것이라. 영감과 진리의 것이 되면 이게 되는 것인데  영감과 진리의 것이 되는 것이 이것이 옮겨지는 것이라 말이오.

 옮겨지기까지라 말은 이제 그것이 없어지기까지 완전히 변화되기까지 이것을  말하는 것이고, 기적이 나타날 때까지라는 것은 기적은,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으로 인해서 자기의 심신의 모든 것이 진리와 영감의 것이 돼 버림으로써  세상에 없고, 진리와 영감에게 속해짐으로써 없고, 진리와 영감에게 속해지고  다시는 이 세상 악령이나 죄악이나 그런 것이 침노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것이  되고 진리의 것이 되어지는 것은 이거는 없어지는 것이라 말이오. 예수님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하실 때 그때가 뭐냐 하면 완전히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됐기 때문에 마귀가 다시는 힐문하거나 시험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그것이 옮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옮기려고 하는데, 옮기기를 우리는 목적하고 있는데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만 옮기지 못하게 그 사건을 중단시켜 버리면 어쩔 수  없어 중단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과 진리, 영감과 진리로서 자기 전심전력 전체가 다 영감과  진리로 인해서 사자구덩이에 던져질 때에 그때에 그것이 끝이 나 버렸으면  다니엘의 그 모든 심신은 완전히 영감과 진리의 것이 돼 가지고 다 영생하는  요소로 완전히 성공을 해 가지고 끝을 마쳤을 터인데 그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죽지 못하게 살려내 놓으니까 이제 기적을 만났으니 그 싸움이  일단락져 버렸기 때문에 그 싸움에서 완성은 못 봤다 그거요. 완성은 못 봤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기적과 옮겨짐이 나타날 때까지 믿음을 계속하기를  그렇게 위해서 기도해라 하는, 기도의 제목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는 그것은  그것입니다.

 이렇게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가 자꾸 그걸 연습을 해요. 연습해서 무슨 난제가  있는데 기도하면 난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렇게 할 일이  환하게 있는데 거기에는 기도 가운데서 얻어진 것은 뭐이냐? 십자가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능력.

 기도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은 기도하면 거기에서 깨달아지는 것은 '이번에 이  일을 인해서 내 전부가 다 주의 것과 진리의 것이 되어야 되겠다' 이러니까  죽기를 원하고 없어지기를 원하는 자이니까 세상이 거기에는 따라오지를 못하고  벌벌 떤다 말이오. 죽어버리면 다시 제가 심문도 못 할 것이기 때문에 자꾸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건드리지를 않습니다. 만일 건드리면 좋게만 할 터이니까,  이용만 될 터이니까 안 건드리고 해하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나 살기를 원하는 그자에게는 이자는 아직까지 생명의 도를, 기본구원을  믿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이자는 건드리면 저거 수입이 나온다 말이오. 건드리면  제 종이 되고 건드리면 제 종이 되기 때문에-○○○목사님? ○○○목사님, 요새  은혜를 받지 못해. 자기가 오만해 그래. 자기 깨달은 것 가지고는 감감해.

아직까지 ○○○목사는 배우려면 죽는 날까지 배워도 저한테 배울 것이 무한히  남아 있어요. 안 돼.

 이러기 때문에 속에 벌써 어두움의 시험이 들어 그런데 그게 뭐이냐? 이렇게  여기 설교를 들으면서도 전투가 없기 때문에 그래. '지금 내 적이 뭐이다' 하는  그 적을 발견도 못 했기 때문에 헛일이라 그거요. 전투가 없으면 힘 안 나오요.

전투가 없는데 무슨 깰 힘이 나옵니까?  이래서 우리는 자기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해서 묵상하는 것,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 말은 신구약 성경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 무슨, 성경 가운데에는  크게 말하면 기본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말씀이 있고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이  많습니다. 그거는 방편을 말하기 때문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라 그것이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가운데에서 나온 힘이라야 세상을 이기고, 그런 데서 나온 힘이라야  자기를 이기고, 그런 가운데서 나온 힘이라야 죄를 이기지 그런 가운데 나오지  안 하는 것은 승리를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어머리 뭐 경치 좋은 데 가 가지고 감동받은 그까짓 것도 다  집어 던져버려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까지 중매쟁이로 필요했지 그게 와  가지고 일을 추지는 못한다 말이오. 일을 출 수 있는 진리와 영감의 깨달음을  가지게 하는 데에는 중매쟁이는 필요하지마는 그게 들어서 세상을 이기거나 죄를  이거거나 자기를 이기는 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못 한다 그거요.

 그러니까 경치 좋은 데서 받은 감동도 그것을 그 중매쟁이를 인해서 네가  깨달은 그 깨달음을, 깨달음은 신랑 한가지니까. 예를 들면은 중매쟁이의 목적은  신랑 만나게 하는 것 아니오? 신랑 만났으면 중매쟁이는 이별해야 되지 항상  중매쟁이만 따라다니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그저 중매쟁이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니까 어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 데도, 어떤  권위 있는 강사가 들어서 집회를 하는 데에도 거기에서 너는 감동받는 그 감동은  깨달음을 붙드는, 깨달음을 만나서 깨달음과 네가 결혼하는, 깨달음과 하나가  되는 거기에만 이용하고 난 다음에 깨달음만 거머쥐고 그것 버려라.

 이래 가지고 그 깨달음을 가지고 자기 속으로 묵상하는 데에 그 깨달음을  묵상하는 데에서 자기 속에 모든 염려가 다 물러가고, 공포와 비겁이 물러가고,  모든 헛된 육체의 소욕이 물러가고 전부가 자꾸 그런 가운데 변화가 돼 가지고  이제 거기에서 불이 나오고 거기서 강한 능력이 나오고 힘이 나오는 이것이라야  세상을 이긴다 말이오. 이것을 사람에게 전해 줄 때에 또 그 사람은 거기에서  깨달음을 전달받아 가지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꼭 같은 일을 만나지마는 그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신구약 성경에 대해서 무신론자는 신구약 성경을  볼 때에 전부 무신론으로 속이는 것으로만 보여지고, 또 성경에 대해서 자기는  한 면 요 면을 깨닫고 보면, 요 면을 깨달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모든  전성경은 요 면만 가르치고 있다 하는 것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또 자기가 이제 깨닫지 못하던 면을 깨달아 가지고서 성경을 보면 '이 성경은  이 성구도 여기에 대해서 가르쳤구나. 여기에 대해서 가르쳤구나.' 그러니까  자기가 기도하는, 기도하는 것을 깨달아져서 '우리가 아무래도 기도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깨닫고 보면은 신구약 성경은 전부 기도하라는 말이오. 신구약 성경은  전부 기도하라는 말이오. 기독자의 그 성공은 전부 기도에서 나온 것이라.

 보니까 '이것도 보니까 이 사람의' 성도의 신앙 위대도 기도에서 나왔고, 또  기적도 기도에서 나왔고, 영광도 기도에서 나왔고, 권위도 기도에서 나왔고,  대전도도 기도에서 나왔고, 대설교도 기도에서 나왔고, 대개혁도 기도에서  나왔고, 전부 보니까 다 기도에서 나왔다. 이러기 때문에 기도만 그것 하면  되겠다.' 이렇게 거기 대해서 깨달아지는 것인데 그 깨달아져야 이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돌아가서라도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어데서 나왔느냐?'  그 사람의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겪어보고는 '신앙의 위대는 기도에서 나왔다.

신앙의 승리는 기도에서 나왔다. 믿음의 사람 그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다.

용감스러운 그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은 그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온 다른 사람은 그  시험을 당할 때에 벌벌 떨고 두려워 떨고 나갔는데 그 사람은 웃음과 즐거움을  가지고서 해 나갔는데 다 그건 다 기도의 사람이었다.'  모든 기독자의 안팎의 승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모든 것은 다  기도에서 나왔고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기도의 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 거기에 꽃이 폈고 열매가 맺었지  기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꽃핀 일이 없었고 열매맺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 그것 하나만 해도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떤가?' 물을 때에 뭐  이런 건 성경 많이 보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 그 사람이 이래 행함이 많은 것도  있을 것이고, 물질에 대해서 충성해서 헌신에 대해서 하는 일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별로 기도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면 그 사람은  껍데기입니다.

 제가 겪어본 대로 그 사람은 참 성경을 많이 봤습니다. 성경을 많이 봐서  시골에 있는데 새 볼 때도 성경을 다른 사람 보면 새 보러 와서 성경 보고 집에  있으면서도 성경 보고 이러니까 뭐 어데 가든지 성경만 보는 사람이라. 이러니까  그 사람의 신앙 행위, 신앙 행위가 다른 사람 볼 때에 '참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라' 하는 이런 행위를 했지마는 실상 기도에서 본 세계, 기도에서 얻어  가지고 기도에서 발견해 가지고 이렇게 무엇을 해 보는 사람들이 볼 때는 그  사람이 껍데기 사람이라 말이오. 껍데기 사람이라.

 이러니까 자기가 기도에서 분명하기는 분명한데 그걸 말하면 그 사람이 이해를  안 해. 깜깜하다 그말이오. 기도 안 하는 사람은 그 심령이 깜깜합니다! 옳은 건  듣지 못해. 인본주의만 듣고 세본주의만 듣고 인화주의만 듣지 하나님의 뜻은  모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지 안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을 성경에 말해 놓지  안했습니까? '성경은 너희들이 배우고 믿음에 거하라. 확신에 거하라.' 이렇게  말씀했지마는 '자기 행할 일은 사람에게 배우지 말아라 했어.' '배우지 말아라.

너에게 기름부음이 너에게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 주나니 그대로 그 가운데  행해라.' 그 가운데 있으라 했어.

 이러니까 우리도 기도하지 안하면 자기가 행할 자기 진리는 기도가 아니면 자기  진리를 발견할 수가 없고 기도 아니면 자기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일은 기도하지 않고는 이런 유는 쫓아낼 수도  없다' '네가 시험에 들지 않기를' 시험에 드는 건 실수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말이오. 실수하지 안하고 승리하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기도에서 나온다고  말씀을 했어. '깨어 기도 하라.'  이러니까 우리가 과거에도 기도를 했지마는 우리가 한국에도 여러 노선이 있고  여러 진영이 있는데 여러 진영이 있는 그 진영 가운데서 '그 진영이 기도 많이  하는 진영이라' 이러면 그 진영이 차지합니다. '그 진영이 성경을 많이 보고  연구를 많이 하는 진영이라' 하면 그 사람들은 나중에 잘못하면 알맹이 없는  외식한 그 진영들이 되고 맙니다. 외식 껍데기 진영들이 되고 맙니다. 껍데기  세상이 볼 때에는 승리했지마는 하나님 보시는 승리는 하지 못하는 그런 진영이  됩니다.

 이러니까, 물론 성경을 보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마치 오른다리 왼다리 두 쪽  다리와 같이 성경하고 기도하고 이렇게 같이 어울러 가기는 가야 됩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다 성경을 통해서 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안하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요  무시하는 사람이요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다 기도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래 내가 언제 대구에 갔었는데, 장로인데 그 사람이 부자고 또 대구에 장로  중에는 왕장로로서 그 사람 앞에는 다른 사람들이 말을 못 하고 이랬는데, 그  사람이 언제 제가, 그 사람 모를 때인데 그 뒤에 알았습니다. 제가 처음에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대구를 가 가지고서 신정교회가 그때 제일 크고 흥왕된 교회인데  '신정교회 가서 한번 예 배를 보자' 하고 갔더니마는 그 장로님이 그날 밤에  설교를 했는데 '오늘밤에는 내가 설교하는 데에 새로운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아  가지고 설교를 못 하고 그전에 하던 설교를 기도로서 구워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말하는 것을 내가 그때 들었습니다. 기도로 구워 가지고 나와. 기도에다가  구워 가지고. 기도로 구워 가지고 나왔다.

 그 말을 듣고, 제가 그때에 한 예수 믿은 지 한 아마 몇 달 됐을 것입니다.

이랬는데 그 소리를 듣고 감흥을 받았습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설교한 것이라도 자꾸 기도로 자꾸 이렇게 해야 거기에서 참 요리가 되고 맛이  있게 되는가보다.' 기도로 구워 가지고 왔다는 그 말을 내대로는 그때 해석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꼭 같다 말이오.

 우리가 자기가 한 설교라도 이미 한 설교를 가서 그 설교 가지고서 묵상을  하면서 묵상을 하니까 그 설교대로 내가 살 것, 살려고 할 때에 대적이 생겨지는  것, 무엇을 방비해야 되는 것, 이렇게 다 이렇게 묵상 가운데서 그 설교를  묵상하고 보니까 자기가 설교한 것은 껍데기만 설교했다 말이요. 이제 적이 그  속에 알맹이 적이 꽉 찼는데 그 적은 하나도 말하지 못하고 껍데기 설교만 해  놨으니 이 설교를 새로 해야 되겠다 그말이오.

 또 새로 설교하면서 '이 면을 또 말해 줘야 되겠고 저 면을' 그 모든 사람에게  자꾸 전투하는 방편을 가르쳐 주고 이러니까 다른 사람은 또 설교를 새 설교하는  줄 아는데 내나 그 설교인데 너무 가르치기를 성글게 가르쳤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하는 데 이 말씀대로 실행하는 데에는 적이 있었는데 이 적은 발견도 못  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래 가지고 '이 전투할 때에 이건 적이 나온다. 이런  적에 대해서 이렇게 방비해라.'  이러니까 이제 한 말씀 가지고 설교를 하다 보니까 나중에 가서는 전말씀  전성경이 그 안에 다 들었다 그거요. 이래서 '성경 전체는 하나다. 한 진리다.'  하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신앙의 성공이 있기 전에 다 기도의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이 진리에 특수한 그 특수가 있기 전에 벌써 기도의 특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서는 이 총공회라고 나가는 총공회로 나가는 이  개교회 단체, 총공회로 나가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다 기도의 총공회다.

기도의 총공회다. 기도하는 총공회다.' 만일 이것이 된다고 하면은 한국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알맹이  당신으로 더불어 호흡하고, 당신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당신이 주시는 것을 다  받고, 당신이 요구하시는 것을 다 이루어 드리고, 당신이 말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고, 당신이 보이는 걸 다 볼 수 있고, 당신으로 더불어 다 대화해서 의논해  가지고 할 수 있고, 당신의 능력을 받아서 힘입어 가지고 할 수 있는 진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성경만 읽는다고 하면 외식하는 신자가 됩니다.

성경에 껍데기만 보지 알맹이 맛은 모른다 그거요.

 그러기에 기도 없는 사람은 자기를 벗지 못합니다. 기도 없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옛사람을 벗지 못하고 기도로만 옛사람을 벗을 수가 있고 기도로만  새사람이 나타날 수 있고, 기도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기도로만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기도로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기도로만 하나님을 붙들 수  있고, 기도로만 하나님을 힘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전투를 연습해야 되겠고 하나님 말씀 가지고 기도하는 것을  연습해야 되겠는데 그것이 전부 이 대내전이라 말이오. 자기 속에서 자기 마음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일을 하는 일을  연습을 해서,  뭐이 닥치면 사람하고 의논하려고, 무슨 사건이 닥치면 어떤 자는 '이 일을  하는 데는 이거 관서에 가 가지고 정권자들을 잡아야 되겠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아무 지금 교계에 유력한 인물 아무것이 아무것이 인간으로 더불어 이  교제를 하고 서로 부탁하고 사건해야 되겠다. 이 일을 하는 데에는 뭐 또 무슨  준비가 있어야 되겠다.' 어쨌든지 무슨 일이 당할 때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뭐  해야 된다는 요것이 첫째가 되지 안하고 딴데로 하는 것은 다 외식입니다. 외식.

그것은 참 신앙의 적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외식 신앙이 참 신앙들을 대적해 가지고 다 순교시켰습니다. 그러기에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외식 신앙생활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또 기도 외에는  참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시작한 것을 해서, 다 모두 해서 '총공회는 기도의 공회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데까지 기도의 사람들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다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진영에서 그 사람이 보면 벌써 탈선이 돼 버렸고 또 그 사람이 진실을  잊어버려 버렸고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려서 말씀은 진리는 가지고 있지만 말은  가지고 있지마는 권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다' 하는 그말은 말만 가져 가지고는 안 되고 권능에 있다는 것인데 그 말에  있고 권능이 없는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자꾸 설교 들으면 그거나 새김질해 가지고 왱하게 외우는 이 일만 했지  새짐질하는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말이오.

 기도가 없어서, 기도가 없고, 기도가 없이 성경을 봐도 외식자 되고, 기도 없이  설교를 자꾸 자기가 새김질해 외워도 외식자 됩니다. 그것만 자꾸 외워 가지고  하면 다른 데 설교할 때는 이런 것 되는 것 같지마는 처음에는 되는 것 같지마는  자기 기도가 차차 떨어지면 그 설교를 꼭 같은 설교를 해도 다른 사람에게  감화는 주지를 못합니다. 아무 은혜는 없습니다.

 이러니까 나중에는 도태가 되어지니까 과거에 하든 팔놀음도 다 하고 이러니까  '이럴 때 은혜가 와. 그때 보니까 은혜 받기를 이러니까 은혜를 받더라. 내가  굴리니까 은혜받더라. 뚜드리니까 은혜받더라.' 이래 가지고 하니까 완전히  그거는 배우와 같이 속에 아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없이 겉어머리 원숭이  모양으로 흉내만 내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흥사가 다 돼 가지고 벌써  부흥사가 그 속에 영감보다도 과거에 행동하던 형식 그 형식이 앞서 있고 속에  영감이 그 속에서 형식을 차고 나와 가지고서 이래 하는 그것이 아니면 그  부흥사가 불쌍한 사람 됩니다.

 그러기에 부흥사가 대개는 부흥사가 끝에 가서는 실패를 해 버리고 말고 이  기도의 사람, 성경을 가지고서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이 사람은 그 사람은 자꾸  갈수록이 능력이 나오고, 늙어 갈수록이 마지막 죽을 때에 그 사람이 제일 권위  있는 설교를 할 것이오. 제일 은혜 있는 설교를 할 것이오. 제일 마지막에 죽을  때에 그 사람에게 겉어머리 사람은 고기 덩어리는 이것이 노쇠해 가지고 이  부패해 있지마는 속에는 굉장히 새로운 힘이 있기 때문에 그만 그대로 날아  올라가는, 고기덩어리만, 그 찌끼 쳐져버렸지 이제 영과 이 혼 둘은 세상 뜰  때에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이니까 끝까지 힘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가 다 목회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또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이 기도 안에서 능력을 얻는, 기도 안에서  능력을 얻고 기도 안에서 말씀을 영접해서 말씀에서 능력을 얻어 기도 안에서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 안에서 능력을 얻어서 이래 살아가는 사람은 늙어서  여자나 남자나 죽을 때가 될수록까지 할 일은 더 많을 것이고 그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시간이 하나도 없고 주님에게 붙들려서 모든 주의 양떼들을 인해서  자기는 원치 않는 자리에 끌려갈 수밖에 없고 자기는 그러니까 시간이 없고  견디지를 못할 것이고 주님의 일과 모든 하는 일은 태산같이 밀릴 것이고 자기는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그런 인물이 되어질 것이오. 그게 없는 사람은 육체가  노쇠함에 따라서 그것도 다 노쇠해져 버리고 맙니다.

 노쇠해지고 말게 되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뭐 정년퇴직을 하라 소리 안 해도  정년퇴직을 안 할 수가 없어서, 설교해야 설교도 안 나오지 교인들은 은혜를 안  받지 자꾸 퇴퇴거리지 이러니까 제가 정년퇴직을 안 하고 어쩌겠습니까?  설교할 것 설교할 은혜의 설교가 자기에게 나타나지 안하는데 강단에 서는 것  그보다 죽을 일은 없습니다. 아마 목회자되는 사람들은 다 체험할 것이오.

자기가 뭐, 예배 시간 설교를 할 시간은 됐는데 자기 속에 하나님 말씀을 주시지  안하시면 그때는 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아무것도 안 보이요. 천하도 아무것도  안 보이요.

 이제 자기가 그 시간에 설교해야 될 위치와 그 사명은 자기가 받았지마는  아무런 영감과 진리가 뭐 있어야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자연히 제가 자원해서  정년퇴직을 안 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정년퇴직을 옆에서, 하기 싫지마는 다  정년퇴직 하고 온 교인들이 정년퇴직 하라 하니까 정년퇴직을 당하지 안할 수  없을 것이고,  자기가 정말로 기도의 사람으로 살았다고 하면 그때가 제일 힘이 강하니까 다른  교회는 다 정년퇴직이 있어도 그 교회는 그 사람이 정년퇴직을 안 하기를 원할  것이고 다 못 나가기 원할 것이고 자기도 나갈 마음도 없고, 또 정년퇴직을  시키면 '뭐 정년퇴직 시키면 나는 말씀 안 전할 수 없으니까' 정년퇴직  시켰으면, 시켰으면 그 예배당에 정년퇴직 만나 가지고서 그 옆에 길가에 가  가지고 설교하면 온 교인들이 예배당에 안 오고 그리 다 갈 것입니다. 그리 다  모일 것이오. 그런고로 신앙은 늙는 짓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묵상 기도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자꾸 평소에  연결해 가지고 그분의 것을 내다가 말하고, 그분의 말을 말하고, 그분의 능력을  전하고, 그분의 소원을 원하고, 이래서 말로는 마치, 이 말하니까 저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니까 스피커에서 소리 나오지마는 실은 말하는 사람의 소리가  스피커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속에서 말하는데 나는 스피커와 같이  돼 가지고 이와같이 하니까 그 입에서 하나님이 나오고 그러니까 그 혀 밑에서  젖과 꿀이 나온다 하는 아가서 비유한 것이 그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개인의 신앙도 실패, 또 교회의  신앙도 실패, 교계 신앙도 실패, 다 실패입니다.

 지난밤에 말한 것은 여러분들이 '자기 자랑한다' 그렇게 생각해. 나는 그  자랑을 정말로 하기 싫소. 여러분들 때문에 내가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만 말하면 될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은 내가 그런 사람을 내가 별로이  보지를 못했어. 어찌된지 그 사람, 나는 남의 전기라 하는 것을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른다 그거요.

 약간 들어 보면 그때 일정 때에 그 신사참배가 났을 때에 신사참배가 나니까  모든 사람이 거기서 교역자 회의를 하고서 이렇게 나뉘었는데 신사참배를 하고  나니까 각각 가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니까 아무래도 이 교회에 장로들과 이렇게 단합이 되어  가지고서 미리' 만일 신사참배가 와 가지고 자기가 신사참배를 해도 그 장로들이  배척하지 안하도록 위해서 그 운동하러 가는 사람 있고, 그것 마귀 운동이오.

 또 어떤 사람은 '신사참배를 하려 하면 그래도 지방에서 그렇게 시킬 터이니까  지방에 있는 관서를 손을 잡고 관서를 짜야 된다' 이래 가지고 관서에 뭐 경관  이건 사람들하고 친분을 가지려고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 있고,  이제 신사참배가 문제가 나니까 이것 뭐 교인들 단속하러 가는 사람들, 모든  지방에 유지 관민들을 붙들고 의논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있고, 이제 신사참배  문제가 나니까 '아무래도 기도해야 되겠다' 기도 하러 간 사람들,  기도하러 간 사람들 그말은 한상동 목사님이 그렇게 했다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모두 교역자회 하고 다 모두 '신사참배가 박두해 왔으니까 지금 곧 자꾸  박해가 오고 이러니까 어디로 어짜 해야 되나?' 할 때에 그말하고 난 다음에 다  갔는데 한상동 목사님이 그때 뭐 초량교회 계셨다던가 어디 있었는데, 그 한상동  목사님이 삼일교회 있었던가? 어디서 있었는지, 그때에 산으로 기도하러 간다  하는 그 사람은 한상동 목사님과 같이 간 사람이 그때 세 사람인가 네 사람인가  있었다고 하는데 네 사람 가운데에 한 사람은 중간에 기도하다가 돌아왔고 다른  사람은 끝까지 거기에서 기도하다가 이제 거기에서 붙들려 오고 이런 사람들은  다. 그대로 승리 길을 쭉 밀고 갔고 그때 기도 안 한 사람들은 다 실패를 했다  말 들었습니다.

 저는 신사참배에 대해서 뭐 어떻게 됐는지 아무 자극 없이 넘어갔습니다.

신사참배에 대해서 안 한다고 하는 것도 자극이 없어. 그러니까 또 그 교인들  거기에 '거기에는 아마 그런 법이 없었던갑다' 그 고제면이 교회도, 일 면에 넷  교회 있는 데는 고제면뿐이오. 고제면이고 또 거기에서 신앙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박해가 심했습니다.

 이랬는데 뭐 안 한다는 것도 그 참 무서운 줄 모르고 했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도 무서운 줄 모르고 대항했고, 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가 가지고 그때 다른  사람 붙들려 가지고 두드려 맞고 이래 왔어요. 두드려 맞았는데 두드려 맞고 온  그 사람들을 내가 보고 어찌 그 사람들 맞고 왔다 하니까 기쁘고 즐거운지, 그래  '맞아도 항복 안 했나?' 안 했다고, 기쁘고 즐겁다고 집에 청해 가지고 밥을 해  먹이고 이러는데, 그러면서도 으례히 '그거야 그렇지' 싶은 것이 뭐 고맙고  기쁘기만 기쁘지 별 아무런 자극이 없었더라 말이오.

 이랬는데 백사험씨라고 그분이 처음에 그렇게 이기고 난 다음에 나와 가지고  한번은 나한테 찾아와서 '집사님, 나는 아무래도 이거 신사참배 때문에 내가  이명직 목사님의,-이명직 목사님이 성결교 신학교 교장입니다.-이명직 목사님의  그 저서를 보고서 은혜를 받았는데 아무래도 이명직 목사님에게 한번 가서 요  신사참배에 대해서 물어보고 와야 되겠다.' 그렇게 말을 해요. 그래 찾아왔어요,  나한테.

 찾아왔는데, 그때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 저한테  찾아왔었습니다. 자기네들은 붙들려 가고 이래 가지고 야단을 쳐도 나는 안 가고  이래도 내가 신앙으로 앞섰다 하는 걸 그분들이 알고 뭐 이래 물으러 왔는데,  그래 내가 말하기를 '너 가 봐야, 가지 말아라.' 나하고 한동갑입니다. 성도  같고 한 동갑이라. '너 가지 마라. 가 봐야 소용없다. 벌써 이명직 목사님이 그  사람이 참 안 죽었으면, 다시 말하면 신앙이 안 죽었으면 감옥에 들어가 있을  것이고 또 신앙이 죽었으면 너를 만날 것이고, 너를 만나는 이명직은 너를  죽이는 이명직이 될 것이고 너를 살릴 수 있는 이명직이라면 가서 아직까지  면접도 하지 못할 터이니까 가지 말아라.' 내가 이랬다 말이오.

 실컷 말하니까 안 가겠 다고 말해 놓고 나 모르게 저리 빙빙 둘러서 자기  집으로 돌아 가지고 한 사십 리나 둘러 가지고 기어 올라갔다 말이오. 기어  올라갔다 와 가지고 나중에 가 신사참배 했습니다. 신사참배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비참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신앙의 모범의 사람이오.

 이랬는데 언제 테레비를 보니까 테레비를 누가 노랫가락을 하는데 무슨 소리가  그 소리 같애. 내가 자세히 보니까 그 사람 거기 나와서 노랫가락을 합디다.

노랫가락 하는 데 보니까 참 비참했어. 그래서 나중에 들어보니 여호와의  증인으로 넘어갔다 해서 서울에 있는데 서울에 있는 교우들을 보내서 만나라고  접하라고 이렇게 해서 접해도 이 신앙으로 돌아오지를 못해요. 이러니까 기도  없는 사람은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 알맹이 죽은 사람이오.

 기도, 내가 여러분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말합니다. 그때에 그 당시에 제가  거창에서, 먼 데는 모르는데 거창에 있으니까 거창에서 그 기도에 대해서 뭐  산기도나 금식기도나 또 이 기도에서 거석한 것은 그때 저는 거기에 기도로  유명해. 기도로 유명했어요. '그 사람은 산기도 많이 하는 사람인가?' 이랬는데  나중에 부산 와 보니까 부산에 소문이 퍼져서 '산기도 많이 하는 백집사라 하는  그분이냐?' 고, 누가 전달을 했는지? 기도의 사람이라고.

 그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산기도니 그런 걸 안 했어요. 그러나 제가 거기에  개명서 신앙생활할 때는 제가 개명 보고 봉산 보고 봉계 보고 그때는 집사로  있으면서 셋 교회를 이렇게 돌아다니며 봤는데 그 셋 교회는 다 기도의  교회들이었습니다.

 이러니까 왜정 말년에 저 딴데 있는 그 교회들은 그 사람들은 다 신사참배  했지마는 개명교회는 그랬고, 6·25 때도 거기에 있는 그 개명교회는 꼭 같이  하루 세 번씩 모여 가지고 종치고 예배보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아무리 해하려고 해도 해도 하나님이 막으시니  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지막 후퇴되고 난 다음에 하룻밤에 내려와 가지고  공비들이 내려와서 예배당을 불태웠어. 얼마나 원수가 돼서, 그 예배당만  불태웠지, 예배당만 태웠지 사람들은 해하지 못했다 그거요.

 예배당 불태웠다 하기 때문에 나는 위천에 그때 있을 때입니다. 기뻐 즐거워서  '한번 와서 예배당 연보하구로 한번 오라'고 쌓아서, 가니까 그날밤에 만나  가지고서 밤새껏 찬송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이러다 보니까 벌써  새벽에 예배볼 때가 됐어. 새벽에 벌써 네시가 거의 다 되어 가는데 그때까지  연보는 생각도 못했다 말이오.

 '이거 시간이 다 됐다. 이러니까 나는 오늘 가야 되니까 연보하자.' 이러고,  연보하자고 이러면서 기록을 합니다. 기록을 하니까 '이 액수를 우리가 정해  가지고 이 액수가 되는 때까지는 연보하고 이 액수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필요  없는 연보일랑 받지 말자. 또 우리가 분수 있는 예배당을 지어야 되지 딴걸  지어서는 안 되고' 우리는 그때 예배당 건축하는 건축 기술이 없어서 뭐 큰 돈  가지고 들여 가지고 지으려 해 봤자 지을 줄을 몰라요.

 '얼마만 하면 될 거다.' 이래 예산해 가지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몇 군데 한  이십 분 동안 이래 적고 보다 보니까 그만 액수가 다 차 버렸어. 나머지기는 못  하게 했습니다. 못 하게 하니까 울고 불고 이러면서 '모자라면 하지 그 다음에는  우리가 약속한 게 있기 때문에 못 한다.' 이랬더니마는 어떤 청년하나는 논 서  마지기를 바친다고 이렇게 하는 것을 늦게사 말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그걸  바치지 못해 가지고 원통히 이래 여기다가 마지막에 그 사람이 공비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래 가지고 예배당을 지은 예배당인데 그 예배당을 뜯고 지금  ○○○조사님이 더 크게 좋게 아름답게 짓는다 하는데 다 지었습니까? 다  지었으면 손 한번 들어 보이소. 녜, 다 지었답니다. '내가 언제 가서 이  개명교회 예배당 지은 걸 언제 한번 가 볼까?' 이 마음이 있어서 가려고 자꾸  이래 생각을 가지고 이랬는데 가면 자기, 내 고향은 아니지마는 제이 고향이니까  거기에 좀 한번 그 산천도 한번, 그 기도하던 곳도 있고 정든 곳이 있으니까  한번 가려고 이렇게 하다가, 그곳을 가려 하니까 어두워져. 그곳을 가려 하니까  어째 내게 영감이 어두워지고 이래서 그 할 수 없어 그만 안 하기로 작정을  했다고 내가 어느 날 아침에 예배 때인가 새벽기도 때인가 말했습니다. 안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자꾸 인제 옛날 고향을 찾고 그뭐 지방 정실이라 뭐 이런 혈육 정실 그런 걸  찾아보려 하니까 그만 어두워져 버려. 그게 나쁜 거는 아닌데 그만 내게  대해서는 어두워져. 이래서 안 하기로 했습니다.

 이래서 어쨌든지, 내가 이 말하는 것은 기도의 사람이라, 기도로 유력하다, 또  그 사람이 기도뿐만 아니라, 기도로 치우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 되는데  기도의 사람이면서 성경을 깊이 아는 성경의 사람이라. 기도의 사람, 성경의  사람, 또 그 사람이 행동이 다 신앙적이라. 이렇게 기도의 사람 성경의 사람  행함의 사람이라고 이것이 구비되면 뭐 문제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울며 불며  하는 것인데 웃으면서 신앙생활해 나갔지 그 어렵지를 안했다 그거요.

 이랬는데 내가 지금은 부산 와 가지고서는 얼마 동안 기도해 가지고 이렇게 뭐  교회도 이렇게 부흥되고 이렇게 됐지마는 그만 기도가 차차 차차 끊어져 가지고  끊어져서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좀 노여워하셔서 먼저 기도하라고 해 가지고  기도할 때 그새 주일학교가 제일 올라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기도를 시작하면 분명히 주일학교도 올라갈 뿐 아니라 이  예배당이 모자랄 터이니까 빨리 예배당에 모든, 돈을 빚을 얻어 가지고라도 이  의자를 만들어서 다 하자고 엊저녁에도 그 의논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의자에 대해서 의논하려고 그 사람들이 계약하려 내려왔답니다. 인제  오늘 아침에 만나 가지고, 한 열시나 돼서 만나 가지고 그 계약을 할 것입니다.

하면 돈을 뭐 빌려 가지고라도 나머지 모자라면 다 이거 의자 남은 걸 싹 다  하려고 생각합니다. 다 해도 하나님이 그것을 다 주실 것이오. 또 얼른 해 놔야  장소가 다 하나님이 인도하셔 보내시는 자의 수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다른 사람들이 다 알기를 '서부교회는 기도의 교회라' 이러면  분명히 앞으로는 그 모든 것을 그저 와도 문제가 없고 안 와도 문제가 없고  우리의 구원은 그대로 이루어 갈 것입니다.

 지금 이 국방돼 가지고 있는 것이 삼팔선 이거 국방을 해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것이 미군? 어림도 없습니다. 그 세상 사람들 그렇게 말해야 되지요. 이렇지만  그것 뭐, 오히려 속으로는 '이 미군들이 그만 가 버렸으면 좋겠다. 가면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겠다.'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것이고, 우리나라가 뭐  어쩝니까?  얼마 전에는 신문 보니까 우리나라에 어떤 부분적으로는 사 배 되는 것도 있고,  이 배 되는 것도 있고, 삼 배 되는 것도 있고, 그것보다도 그 사람들이 악독을  준비한 것이 이남 군인에다 비하면은 십 배가 넘습니다.

 그 용기를 가진, 싸움에는 용기라든지 그리 안 하면 독기라든지 뭐 그게 있어야  되는데 그 용기를 가진 것이 이남 군인들의 십 배 이상 가졌소. 그 사람들은 늘  거기서 참 생명 내대고 이래 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보면 일본서도 사회주의나 뭐이나 그런 사람들 보면 그 나라가 다  달려들어도 뻔뻔스럽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담력을 그 사람들이 자꾸 거기에서  길러 가지고 마귀의 담력을 받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주 강합니다.

 그런고로 어쩌든지 기도를 이것 가서 시작하도록 하고 기도의 제목 지난밤에 열  가지 가르친 그거는 집에 가서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알 것입니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기본구원입니다.

 건설구원이라는 것은 기본 구원을 가진 자면 그게 저절로 됩니다. 기본구원을  믿지 않는 데서 다 안 되는 것인데, 기본구원을 받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기본구원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기본구원을 가지고 기본구원으로 네가  사느냐? 기본구원으로 살면 그 전체가 능력이요 피조물의 다 머리인데  왕노릇이나 하지 뭐 그 피조물들에게 박해당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본구원을 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게 짓밟히고 두렵게 되어지는  것이지 기본구원을 우리가 확실히 믿는다면 세상이 올 때에 웃기나 웃지.

 손양원 목사님이 세상에 그렇츰 박해가 오고 이럴 때에 항상 웃음으로 대했소.

그들이 올 때에는 그들은 막 위협해서 이제는 간이 녹아 죽을 것이다 하는데  웃음으로 대했소. '오늘밤에는 지금 꺼꾸로 달아 놓고 소금물을 먹여 가지고서  죽이게 된다' 하는 그것을 저거가 약속을 해 놓고 또 미리 전달해, 손양원  목사님 떨라고.

 떨라고 또 전달한다 말이오. '오늘 저녁에는 꺼꾸로 달아 놓고 소금물을  먹이기로 했으니까 소금물을 얼마만 먹으면 죽어버립니다. 이러니까 오늘  저녁에는 소금물을 먹어도 속에 배가 꺼져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오늘  저녁에는 물 같은 걸 자시지 마시오.' 이런 기별을 들었다 말이오.

 기별을 들으니까 손 목사님은 속으로 좋아서, 그날 밤에 사정해. '내가 오늘  저녁에는 좀 먹어야 되겠으니까 여러분들 먹을 물을 미안하지만 좀 나를 즘  주십시오' 이래 가지고 그 물을 다. 그래 마시고 배를 탱탱하이 불려 가지고서  갔다 그말이오.

 가니까, 잡아다 놓고 지금 아직까지 고문 고형할 사람들이 좀 인원이 덜 왔어.

기다리는 판에 저거들도 모르게 '뭐 일본 나라가 아무래도 패전하겠어. 일본  나라가 이제는 안 돼. 뭐 어떻고 어떻고' 안 된다는 패전한다는 소리를 실컷  이래 손 목사님 있는데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이래 보니 손 목사님이 있거든.

 금방 일본 나라가 패전이니 뭐이니 그런 소리를 해 놓고서 거기다 뭐 고문할  그런 용기가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딱 돌아보다 '오마이 오루까?' 네가 거기  있나? '가라.' 부끄럽다 그말이오. 양심에 가책이 된다 말이오. 우리 일본  나라가 이긴다 어쩐다 이래 해야 뭐이 될 것인데.

 그러니까 그저 어디든지 닥쳐보려고 하니까 또 수월하고 닥쳐보려고 하니까  흠이 없고, 이렇게 우리가 그때에 다급해 가지고 놀라고 참 바짝 마르고 진액이  빠지고 죽을 지경인 그런 고민 고통의 십분지 일만 오늘에 들여서 기도해도 모든  게 무난히 다 나갈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 기도 제목 가운데 '징계를, 징계를 평강과 축복으로  바꾸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당신이 요거 하기를 원할 때에 고거 하도록 징계를  해서 그렇게 고통을 주는 것인데 그 고통 그것을 미리 기도하면 그게 다  해결되니까 징계가 올 터인데 뭐 징계가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징계 대신에  평강과 축복을 주시니까 징계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징계를 받기 전에 징계가  변해서 평강과 축복이 되어지도록 우리가 기도하자. 거기에까지 기도하자.

 기도의 제목 일곱 가지를 생각하면서 가서 기도하도록. 그래 가지고 우리 진영  교회는 다 기도하도록.

 이런데 여기에 참석한 사람 안 한 사람도, 내가 어제 말 들었는데 이 새벽기도  하는 이 설교는 어디로 가는지 알뜰히 다 챙겨 가지고서 그래 새벽기도 하는  기도는 다. 그대로 복사가 돼 가지고서 본인들에게 간 다고. 교역자들이 나누어  한다고 이래 하는데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외식자 되기 쉽다 그말이오. 깊이  기도 없으면 외식자 됩니다. 이러면 그것만 익혀 놓으면 다 됐다 하니까 벌써 그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았고 전투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진영은 어쩌든지 기도의 진영이 되어집시다. 아마 앞으로는 우리  서부교회 교인들은 다 이렇게 기도하는 기도회에 다 가입해 가지고 전부가  기도의 사람들이 되리라 그런 그 소망이 내게 믿어집니다.

 그전에는 이러면 열심히 좀 기도를 아마 얼마 할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 많을  것이다 이랬는데 이번에는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우리 서부교회 교인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기도의 사람이 다 될 것이다'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믿어지고, 또 이 자리가 다 좁을 것이다 하는 것이 믿어지니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광고합니다.

 지난밤에 의논하기를 오늘 아침에 예배 마치고 난 다음에 응접실에서  장로님들과 또 그 의자에 대해서 수고한 ○조사님, 또 ○○○집사님, 또  ○○○집사님, 또 ○○○집사님, 또 그 외에 장로님들은 다 좀 모여 가지고서  의논하서 앞으로 그 사람이 열시쯤 되면 올 터이니까 오기 까지는 의논을 해  가지고,  어떤 면을 의논하며 어떤 면을 계약을 해서 그 사람도 계약 위반하지 못하도록  또 우리도 계약 위반하지 못하도록 상호간에 이 물건이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양쪽이 다 꼼짝 못하고 붙들려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렇게 계약을 해야  되니까 그 일에 대해서 좀 가서 의논 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저는 거기 참석을 안  해도 될 것이고 또 참석 안 하겠습니다.

 십 분 기도 후에 권찰회 모입니다. 권찰회 모일 분들은 잠깐 모여 가지고, 제일  중요한 것은 요새는 뭐이냐? 주일학교 졸업반이 졸업이 되는데 졸업되기 전에 이  학생들을 중간반에게 예배 의탁이나 하지 심방 의탁이나 담임 의탁은 안 하고  자기네들이 낳은 자식을 자기네들이 기를 수 있고 거기 맡겨서 그저 예배볼 때에  그때나 맡기도록 하고 나머지기는 자기들이 맡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도 하고 그렇게 챙겨 주셔서 나중에 보면 졸업식 해 가지고 중간반에게 뭐  예배 의탁이나 하지 심방 의탁이나 모든 책임을 지우는 그런 학생은 그저 없을  만치 그렇게 모두 우리가 전도에 대한 그런 권위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십 분 기도 후에 권찰회 모이겠고, 또 기도 후에 응접실에서 장로님들과 이제  부른 그런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의논을 구체적으로 해서 짜 가지고 그 사람을  상대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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