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5:03
세 사랑의 연결
1986. 3. 16. 주일오전
본문:요한복음 15장 9절∼16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좀 깨닫기가 어렵고 또 들을 때에 믿음을 가지기가 힘이 드는 깊고 높은 말씀입니다. 그 위에 1절로부터 삼위 일체의 하나님께서 성부는 포도원 농부로 비유했고 성자는 포도나무 둥치로 비유했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했고 성령은 연결로 비유했습니다. ‘가지와 포도나무가 연결되어 붙어 있으면’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으로 말하면 성부나 성자나 성령, 삼위 일체의 하나님은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있는 우리를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고 역사하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9절에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사랑했다」 이랬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 것같이 너희들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또 그 뒤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말을 너희들에게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들의 기쁨이 충만케 되게 하려고 지금 이 말을 한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명령하시고 또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 계명이 무엇인가? 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 계명이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게 사랑이 셋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이 있었고, 또 아들이 우리 택자들을 사랑하신 사랑이 있었고, 또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여야 할 사랑이 우리에게 와서 있습니다. 이 셋 단계적인 사랑 이 사랑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세 사랑이 연결되어야 하는 사랑의 연결을 우리에게 첫째로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이 연결되고 또 아들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연결되는 이 셋 단계적인 사랑이 연결되는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주와 영계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예정하셨고 또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보존하시고 관리하시고 섭리하신다고 15장에 1절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단계적으로 나타나는 이 셋 사랑이 연결되는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주와 영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계획하신 예정을 하셨고 또 예정하신 대로 그 모든 것을 시공하셔서 창조하셨고 또 오늘까지 보존하시고 관리하시고 섭리하신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알 것은 다른 성경에 보면 다 그렇게 기록해 놨는데 요한계시 4장으로 부터 5장까지에도 보면은 똑똑히 기록해 놨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존재케 한 그대로 각 종류들은 하나님이 그 종류의 본질과 본성과 본능을 주신 그대로 움직여서 이 역사는 이루어가고 있고 모든 것은 다 순서를 따라서 전개돼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도 목적이 있고 전개도 목적이 있고 모든 역사도 다 목적이 있는데 이 목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든 존재들이 제 본질과 본성과 본능대로 움직이고 있는 그것만을 보기 때문에 그것만을 평가로 삼아서 거게만 상관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만 평가해서 존비 귀천의 가치를 정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도를 받기 전, 성령의 감화를 받기 전, 하나님의 도를 열심히 믿는 독실한 신앙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참 성경의 중심인 예수님과 예수님의 그 모든 도를 믿는 사람들을 다 십자가 못 박고 죽이고 가두고 이렇게 박해를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이 다메섹에 가다가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거게서 성화를 받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빌립보 3장에 그가 말하기를 ‘이전에 귀하게 여겼고 가치로 여겼던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다 이제 배설물인 것을 내가 알게 됐다. 땅 위에 어떤 대국이 생겼다가 무너지고 또 어떤 약소국이 강대국이 되어지고 강대국의 이런 저런 조직과 순서들과 나열들과 그 모든 제 각각의 본질과 본성 본능대로의 지능을 가지고서 역사하고 있는 그 모든 것 크고 작고 한 모든 땅 위에 역사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그것이 알맹이가 아니고 그 속에 알맹이가 따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난 뒤에는 그런 것이 다 배설물인 것을 알았다 이랬습니다. 그것은 알맹이는 뭐인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이랬습니다.
앞으로 영계와 이 물질계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될 것이고 통일된 그 나라는 알파와 오메가의 나라로서 영영 불변한 그 나라인데 그 나라에 모든 것을 지금 건설하고 조직하고 그 나라에 이루어질 그 모든 것을 지금 조성하고 있는 나그네 세상, 준비 세상, 영원에 대해서 시련 세상이요 하나님의 그 비밀을 배워서 아는 학교와 같은 세상이라 하는 것을 그는 발견했던 것입이다.
이래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가? 너는 사람으로 나 가지고 어떤 어떤 순서의 위치를 거쳐서, 생애를 거쳐서 결과를 이루어 나가고 있는 너는, 또 어떤 짐승 한 마리가 이렇게 저렇게 또 나 가지고서 움직여 생육하고 번식하는 결과를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 그 모든 것은 다 자체와 또 자체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배설물이 아닌, 찌기가 아닌 고 알맹이, 참 영영히 없어지지 않을 참이요 완전이요 거룩인 이 참을 이루기 위한 그런 것들은 다 배설물들이요 다 이용물들이요. 또 그런 것을 조성하기 위한 모든 활용의 것들이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들은 나는 내가 어떤 위치를 가졌으니까, 직책을 가졌으니까 이 직책을 알뜰히 해야 되겠다 하는 그 직책, 그것은 어데 속했으며 어느 범위에 있는가 하는 그것만 보아서 한 국부적으로 이렇게 보고 조금 시야가 넓은 그런 광문 다학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 범위가 넓어서 대국적으로 모든 것을 좀 또 파악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주와 피조물 과거의 영원 전과 현재와 영원 후 시간적으로나 존재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종류적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그 전체를 다 망라해서 시목하고 그걸 상대해서 계산도 하고 평가도 하고 계획도 하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그것이 신구약 성경이요 또 영감인 것입니다.
이래서, 이 모든 것들이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우주와 영계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그 목적이 바로 오늘 봉독한 말씀의 이 단계적으로 나타난 이 사랑이 연결되는 이 일을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이 다 존재하게 되었고 또 보존되고 자체는 몰라도 다 이용돼 가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 셋이 연결이 되면 그 사랑이 연결되는 것은 그 연결되는 방편은 무엇인가? 그 사랑이 연결되는 방편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과 연결된 것도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 사랑이 연결됐고 또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연결되는 것도 그 계명을 지키면 사랑이 연결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대체로 무엇인가? 그 사랑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도 우리가 알지를 못하게 뚜렷이 나타나지를 안했고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어떻게 사랑해야 될 거라 하는 것을 나타나지 안했는데 그 한가운데 토막인 한 가운데 토막이 되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것으로 가지고 아래 위를 다 가르쳐서 알게 해 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는 그 계명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같이 그렇게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 계명이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 또 아들이 우리를 사랑한 것, 또 우리가 모든 형제를 사랑할 것, 이 세 가지 사랑이 연결되는 것은 곧 이 계명을 지킴으로 된다.
그러면,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면서 내 사랑 안에 네가 거할라면 내 계명을 지키라 하는 것을 우리가 몰랐으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대로 지켜서 우리를 사랑한 것으로서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신 유일한 방편이 되는 그 계명은 곧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로구나.’ 그러면 또 우리가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이것은 어떻게 사랑할까 하는 그것도 그 계명이 곧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연결시키는 방법 또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 이 방법은 곧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으로서 우리가 다 알게 됐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그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됐고 또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그 계명을 지킴으로 사랑 안에 거할 수가 있다 하는, 사랑의 방편은 곧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하신 그 방편이 사랑의 방편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확고하게 깨닫고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셋 사람이 연결이 되면은 어떤 결과를 맺기에 이 모든 우주 영계에 모든 존재들과 모든 역사들이 그 자체가 알든지 모르든지 그 이의 존재와 생사와 활동의 그 모든 결과는 다 지극히 큰 이 세 가지 하나님의 목적인 사랑 연결 이것을 위해서 이용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모르든지 말든지.
무신론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지마는서도 무신론자들은 그들은 무신론을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서 이 큰 운동에 이용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 이용되지 않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것이 없고 또 다 하나님에게 창조하셔서 존재케 됐는데 창조의 목적이 곧 존재의 목적인데 그 목적이 곧 이 세 가지 이 사랑의 연결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종이라 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이렇게 피동이 되어서, 그에게 피동이 되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종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먹으라 하면 먹고 먹지 말라 하면 안 먹는 그게 종입니다. 종도 대단히 귀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 종이 아니고 친구가 됩니다. 친구는 이제는 종이 아니라, 다른 데 보면은 ‘친구는 항상 같이 있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우리가 자기는 무엇인지 하나님의 그 뜻을 모르나 다만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이라라면 이라고 저라라면 저라는데 친구가 되면 하나님의 것을 다 알게 된다.
다 알게 돼서 이제는 자기의 주관은 따로 있는데 객관에 따라서 주관이 피동으로 이래 사는 게 아니고 네 주관과 객관이 하나 되어서 전부가 다 하나님과 너와가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주관이 네요 네 주관이 하나님이라 이래서 하나님과 너와의 하나가 되어 가지고서 모든 것을 이루게 된다.
이래서, 「아버지가 나에게 알려 주신 그대로 나도 너희들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는 이것은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는 요 말에 대해서는 한국말로서는 잘 표현이 정확히 안 되지마는서도 이것은 과거사도 아니고 현재사와 미래사가 둘이 연합된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알게 하였음이니라’ 말은 현재에 알게 한 이 시발이 영원 무궁토록 알게 한다 하는 그런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종이 아니고 친구인데 아버지께서 나에게 알게 해서 내가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들었다 말은 도성 인신해서 신인 양성 일위이신 주님은 능동은 아니고, 언제든지 능동은 아니고 그분에게 이제, 그분이 원인이요 거게 따라서 이렇게 들음으로서 알게 되는, 주체성이 아닌 걸 말합니다. 주체성이 아니고 주체성은 이제 아버지가 주체이고 거게 소속해 가지고 된다 하는 그것을 표현해서 들은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들어서 안 것을’ 그러면 주님이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 때에 어떻게 들어서 알았는가? 음성으로 들어서 알았는가? 편지를 받아 가지고서 알았는가?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아신 것은 아버지가 주님에게 직접 알려 주셔서 하나님의 영으로 알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알게 해 가지고서 아버지의 뜻을 주님은 낱낱이 다 아셨습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아신 것은 어떤 피조물을 통과해 가지고서 안 것이 아니고 또 아버지와 아들과의 그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었는데 그 간격 있는 그것을 무엇으로 메꿔 가지고서 그 연결이 된 그런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과의 아무 간격이 없는, 아무 피조물도 그 사이에는 끼이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직접 아들에게 알리셨고 아들은 직접 아버지에게 알아서 아버지의 뜻과 아들이 알고 있는 뜻이,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이 연결됐습니다. 뜻이 연결됐습니다.
연결됐는데 이제 이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겠음이니라」 하는 것은 문서로 알게 하는 그것도 아니요 음성으로 알게 하는 그것도 아니요 음성도 필요 없고 문서도 필요 없고 아무 피조물도 필요가 없고 주님과 친구된, 이 계명을 지켜서 사랑으로 연결된 자와 직접 연결이 돼 가지고서 그 사이에는 아무 피조물도 들어 있지 아니하고 들어 있을 만한 그런 사이에 빈틈 간격이 없이 직접 연결돼서 아버지의 의사가 아들과의 연결되고 아들의 의사가 우리와의 연결되는 이 의사 연결의 결과를 맺기 위해서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켰습니다. 지금 듣고는 잠깐 이해가 안 될지라도 가서 기도하고서 이 성경을 자꾸 읽으면 여러분들에게 성신의 감동이 오면 깨닫게 됩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다’ 참 아주 큰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택했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사랑 연결이 되고 의사 연결이 되고, 의지 연결, 의사 연결이 되고 이래 가지고 나갈라고 하면 잘못하면, 주객이 전도되는 격으로 우리가 뭐 주체가 돼 가지고서 어떻게 되는 것으로서 근본과 또 그 결과가 이렇게 착각하고 오산해 가지고서 잘못될까 해서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구원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그분이 원인이 돼 가지고서 그분이 능동적으로 이 구원을 계획해 가지고서 이루신 것이지 어떤 피조물이 어떻게 해 가지고서 이 일이 시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 언제든지, 그렇기 때문에 기독자는 자기가 구원을 이루어서 어데까지 성자가 됐든지 성녀가 됐을지라도 영원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서 우리는 하나님과같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또 온전하고 이렇게 얻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러나, 언제든지 그분은 자존자시요 우리는 피조물이요 또 그분은 원인이요 우리는 그분에게 소속되어 있는 자인 것을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을 가리켜서 여게 ‘너희가 나를 택함이 아니요 내가 너희들을 택함이요 또 내가 나를 택한 것은 내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택해서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그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발아 되었고, 움이 텄다 말입니다. 시발되고 발아되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밝혀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이 과실을 항상 있게 하여」 이 과실이라 말은 뭣을 과실이라고 말씀하신 건고 하니 사랑의 연결이 되고 또 사랑의 연결로 말미암아 의사의 연결이 되고 이래서 이 과실이라는 것은 사랑과 의사의 연결이 완성된 것을 가리켜서 여게 과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연결이 그 결과가 완성돼서, 「이 과실이 항상 있어」 이 연결이 항상 있어 사랑 연결이 항상 있고 또 하나님과 우리의 중보자이신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과 우리와의 사랑 연결이 완전히 되고 의사 연결이 완전히 된 이 연결이 항상 있어 과실이 항상 있어」 이 연결을 가지고 이 연결로 있을 때에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는 활동, 작용, 활동 연결이 완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하면 구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게 한다 말은 사랑 연결이 일차적으로 되고 이차적으로 의사 연결이 되고 삼차적으로 활동 연결이 된다. 활동 연결이 된다.
그러면, 활동 연결이 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구할 때에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받으면 구해 가지고 받는 것인데 하나님의 본성을 구해서 우리가 본성을 받고 속성을 구해서 속성을 받고 그의 지능을 구해서 지능을 받고 그이의 또 모든 도덕을 구해서 도덕을 받고 거룩을 구해서 거룩을 받고 온전을 구해서 온전을 받고 그이의 전지 전능을 구해서 전지 전능을 받고 이렇게 모든 그분의 소유도 다 우리가 다 받고 이렇게 다 받게 해서 ‘구하는 것을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지금, 이 세 가지 연결, 첫째는 사랑 연결, 의사 연결, 모든 활동 연결, 구하는 것 다 받는 것은 활동 연결이요 곧 소유 연결이요 작용 연결이라 그말입니다. 이걸 받는 것은 뭐이냐? 이거 받는 것은 뭣 때문이냐?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이 일이 완성하기 위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완성하기 위함이라.
이러니까, 이것이 열매를 가지고서 구할 때에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연결의 그 결과를 가지고, 결실을 가지고 우리가 그 방편대로 할 때에 의사 연결이 되고 사랑과 의사 연결의 그 결과인 사랑과 의사의 연결을 가지고 활동 연결, 작용 연결 모든 역사 연결, 소유 연결 이 연결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이 연결을 가진 것은 뭣 때문에 요 연결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냐?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 결과를 맺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세 가지 연결이 되면은, 연결로 연결 연결로 연결 자꾸 연결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런데 연결이 되면은 뭐 할라고 그렇게 일차 연결 이차 연결 삼차 연결을 해 가지고서 그 연결을 계속해서 이 세 가지 연결이 계속되도록 그렇게 할라고 하는가? 그것은, 11절에 말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가 이것을 너희들에게 지금 부탁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쁨이 우리 안에 와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 가지고서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신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서 우리 기쁘이 충만하도록 하려 함이라.
그러면, 그 기쁨이 무슨 기쁨인가? 그 기쁨을 빌립보 2장 9절 이하에 보면 있습니다. 여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으로서 주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다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게 됐고 아버지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은 완전히 연결이 됐습니다.
9절에 「이러므로」 이렇게 이 연결이 되고 보니까 주님이 어떤 기쁨을 가졌느냐? 주님이 어떤 기쁨을 가지게 되었느냐 그걸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그를, 그라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신성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지마는서도 인성은 피조물인데 창조주가 피조물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에 예수라 말했습니다. 예수라 말하고 신인 양성 일위기 때문에 이는 참 하나님이요참 사람인데 두 양성이 한 격위를 이루어 가지고 우리를 대속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래서, 그를 지극히 높였다 말은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을 높였다 그말입니다.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줬다 말은, 나쁜 이름은 아니고, 나쁜 이름은 아니고 좋은 이름이라 말이오. 좋은 이름 여게 석가모니라는 유명한 이름이 있다 이이가 참 아주 공적이 크다 또 공자라 맹자라 하는 유교의 또 조상이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뭐 또 톨스토이가 이는 참 위대한 일을 했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일을 했다 뭐 석가모니가 위대한 일을 했다 노자가 위대한 일을 했다 뭐 위대한 사람들 이름이 참 많습니다. 이 이름이 좋은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호재피요’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고 `인재명이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이름을 남긴다 이래 가지고서 모두 다 자기 공로와 명예를 세울라고서 뭐 생명도 아끼지 안하고서 공명을 위해서 하는 것이 모두 인류들입니다. 다른, 동물에 없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있다 그말이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그러면 평가를 하는데 이 이름보다는 이 이름이 높다’ ‘이 공적, 이분이 공적한 이분의 공로보다는 이 공로가 크다 이 공로가 크다’ 모든 공로가 있어서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이 이 공로를 비판하고 평가할 때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모든 이름보다도 예수님이 이 만물을 대속하신 구세주의 이 역사하신 이 역사가 제일 크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이 그때는 자유성입니다. 지금은 강제가 없습니다. 그때는 모두 다 만물도 다 자유합니다. 모든 만물들이 다 자유권을 가졌기 때문에 만물 심판이 제일 두렵습니다. 하나님 심판과 만물 심판이 있는데 만물 심판이 조그만한 곤충 하나라도 ‘이것은 나에게 불공평하게 했다 ‘그거는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의 법으로 그래 되지 하나님의 계명의 법대로 되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법대로 됐다면은 그만이지마는서도 월권을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 보면은 만물들이 다 호소하고 탄식을 하고 지금 고소를 했습니다. 만물 심판. 오늘은 사람들은 인간 심판도 그까짓 거 권세 있을 때에 나중에 권세가 없어지면은 다 벌을 받습니다. 권세 없어지고 나면은 권세가 바꾸어지게 되면은 그 권세 밑에서 월권 남용한 것을 다 복수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해방 직후에 복수 역사가 많았고 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복수 역사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데, ‘모든 것이 무릎을 꿇게 한다.’ 강제로 꿇는 게 아니라, 모두가 다 보고서 ‘과연 그는 참으로 내가 존경할 만하다. 그 앞에 내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되겠다’ 모든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지옥에 있는 것까지 전부 다 무릎을 꿇고 그 앞게 감탄하면서 머리를 숙인다 말입니다.
이는 평가적으로 숙이는 것이고 비판적으로 숙이는 것이지 강제로 숙인 것은 반드시 그 강제는 뒤에 가서 폭로가 돼서 깨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불 십년이라 하는 것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 그 월권하고 남용하기 쉽기 때문에 반드시 권세 끝에는 복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가 조부랍게 생각하면 ‘권세 가지고 그만 이렇게 단단히 그만 이렇게 처리해 버리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처리를 못 할까?’ 하는 것은 그 뒤에 반드시 권세가 없어질 날이 있고 복수의 날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정권자가 위대한 정권자는 살인 안 하는 사람이 위대한 정권자라. 또 복수 사람이 없어, 복수할 원수가 없이 정치하는 것이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 또 그라면서도 옳고 바르게 해 가지고서 모든 사람들이 다 찬동하도록 하는 것이 바른 사람이라.
이랬는데, 모든 땅 위의 것은 다 이것이 저것을 대적하고 저것이 이것을 대적해서 다 전부 제 주장으로 이게 좋다. 불교는 불교가 저거가 저거 제일 좋다. 또 뭣은 뭐이 좋다. 또 이렇게 다 이래 또 인제 뭐 뭐 이런 종교 저런 종교가 다 저거가 좋다 하는 것이지 다른 종교는 그걸 좋다 하지 않습니다.
이러나, 「모든 천상 천하의 것이 무릎을 꿇고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모든 것이 주라 시인하여. ‘너 누구에게 속할래?’ `나는 예수님에게 속하겠습니다’ ‘너는 누구를 바라볼래?' `나는 예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너는 누구의 지도를 받을래?’ `예수님의 지도를 받겠습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누구에게 위임시킬래?' `주님에게 위임 시키겠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예수님을 주라 시인해 가지고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이것이 주님의 기쁨인 것입니다.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이제 이 주님의 기쁨은 위로 자존자 조물자 창조주 지공 지성의 이분이 기뻐하시고 만족하시고 옆과 아래로 모든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 개개 개개, 개별 개별 그것들이 다 기뻐 즐거워해서 환영을 하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의 혜택을 입은 것이 많고 그이에 반대한 것은 다 죽었고 그이에 반대한 것이 자기에 고통이 됐지 그이의 지도라든지 그이의 가르침이라든지 그이의 베푸시는 것이 모두가 다 환하게 모든 것이 열려서 다 알고 보니까, 보자기 속에 들어서 몰랐지마는 환하게 다 알고 보니까 이제 천상 천하에 예수님 밖에는 자기가 시인해서 존대할 게 없기 때문에 ‘주라 시인해 아버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것이 주님의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위대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모든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감탄하는 데에 기쁨이 있는 것이지 권세에 눌려서 꼼짝 못하고 이라면 벌벌벌벌벌 떨면서 하는 데는 영광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중심으로 자유성을 가지고서 환영하고 기뻐해서 ‘나는 그를 바라보겠다 그의 혜택을 나는 많이 봤다. 그의 은덕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평가적으로 비판적으로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죽 껍데기 속에 있어 모릅니다. 지금은 보면은 참 영원히 만물이 찬송할 수 있는 의로운 자가 포승줄에 묶여 가지고 끌려가고 지옥 밑층에 갈 자가 묶어 가지고 가는 그것이 다 이렇게 모든 것이 불공평한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모르지마는서도 앞으로 모든 것이 벌거벗은 거와같이 다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은 자기 남편이 돈 잘벌고 학문 있고 영광 있고 존귀 있고 권세 있으며 다 좋다고 이래 우리 남편이 제일이라 이라고, 제일이라 생각하니까 새벽기도 나올 것도 못 나오지 주일 나올 것도 못 나오지 뭐 예배 참석할 것도 못 지키지 성경 볼 것도 못 보지 만날 그 수종드느라고 일생을 종노릇하고 수종 든다 말이오. 이랬는데, 나중에 가죽 껍데기가 턱 벗겨지고 보니까 그게 아무 소용이 없어. 그게 다 지나가 버리니까 소용없어지니까 그때가서는 복수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일생 동안 내 진액을 다 빨아 먹었고 종노릇 삼았다. 내 원수 중에 원수가 네다.’ 가장 친한 것이 원수 중에 원수로서 뒤에 나타나는 것이 지옥의 시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제, 이제 모든 것이 다 비밀이 나타나서 모든 것이 다 나타나고 할 때에 그때에 평가적과 비판적으로서 주님을, 모든 것이 다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다 그를 믿고 의지해서 내 주로 삼겠습니다. 또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다 시인하는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들이 다 기뻐하고 즐거위하고 창조주와 피조물들에게 조금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이 잘못한 것을 다 오늘에 회개해서 다 정리해서 창조주와 피조물들이 다 나로 인해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기쁨이니 ‘이 기쁨을 우리에게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말을 한다’ 그러기에 너희들이 힘들어도 이 세 사랑의 연결과 세 의사의 연결과 세 가지 역사의 연결 이것을 가지면 내 기쁨을 너희들이 가지게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했으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어떻게 사랑했는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하신 것은 근본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서 그 근본 부요하신 분이 그 부요 다 내어놓고 존귀하신 분이 존귀 다 내어 놨고 창조주가 피조물같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만든 그거와 같이 우리가 천하게 된 것 한 가지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셨고 죽은 가운데에 또 부활하신 것도 창조주가 피조물의 꺼풀을 입고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셨으니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 평가로서는 이기주의라 자기 중심이라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몰아대야 되고 모든 것을 해 가지고 자기가 다 둘러 마셔야 되겠고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져야만 이제 평강을 누린다고 생각하고 기쁨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마귀의, 배암의 법칙인데 이 법칙에 정반대 ‘나는 모든 존재에게 다 이용되고 필요해서 한 존재도 내가 이용되지 안하는 것 없고 내가 한 존재에게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가 하나도 없는 이것이 되어지는 이것이 기쁨이요 행복이라 하는데 이것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우리에게 지극히 큰 소망을 주셨고 지극히 영광스럽고 존귀한 이 구원을 이루는 이 일을 오늘도 밝히 알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한 지역에 있는 한 종류인 사람에게 이렇게 인정받는 것도 힘드는데 하물며 전인류와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에게까지 인정받아 영광이 되는, 기쁨이 되는 이 생명의 구원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가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길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랑의 연결로서 전지자에게 의사 연결이 되고 전능자에게 역사 연결이 되어서 비로소 주님의 충만한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에게도 기뻐하여 모든 존재들과 창조주와 함께 기뻐하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 기쁨을 우리들의 소망으로 삼고 복으로 삼고 걸어가게 해 주시는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에는 모든 땅 위에 영광이라 존귀라 하는 모든 이 개적의 사적의 다 평가적으로 비판적으로 인정되지 안하는 모든 것들이 다 정죄받는 그럴 때에 이렇게 영광의 기쁨에 충만할 수 있는 이 걸음을 걷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다만 이 길을 걷는 데에는 십자가의 걸음으로만 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미련하다 어리석다 하나 십자가는 진실로 영영토록 하나님의 능력이요 최대의 최고의 축복인 것을 저들이 이제 깨닫습니다. 깨닫는 여게서 확고한 지식을 가지고 뒷걸음치지 안하고 이 십자가의 군병으로 날마다걸어가는 저희들 되게 하사 범위가 있는 대로 자기에게 실력이 있는 대로 모든 관련된 존재들에게 유익이 되고 털끝만치라도 피해 끼치는 이런 존재가 되지 안하도록 주님이 간섭하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 또 오늘 성경 상을 받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하시고 저들이 이렇게 성경을 읽어서 성경 가운데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뜻을 확실히 깨닫고 이대로 믿고 실행함으로 날마다 주의 영광의 찬미로 변화돼 나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끝끝내 축복받는 저희들이 되도록 하여 주시고 앞으로 땅 위에 있는 모든 독서량보다도 신구약 성경 읽는 독서량이 크지 안하면 주님 앞에 가서 부끄럽다는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깨어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처음 나온 형제들을 위해서 축복합니다. 이들은 다 주님의 택한 자요 주님의 백성이 되었사오니 알지 못했을 때에 주님 앞에 잘못된 허물를 다 사해 주시고 이제부터는 주님의 장중에 잡으시고 주님의 나래 아래 품어 주시고 모든 것을 책임 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의논해 주시고 붙들어 주셔서 저희의 앞길이 염려 없는 평강 가운데서 날마다 의의 걸음을 걸어서 모든 만물이 불탈 때도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항상 지켜 보호하시고 다시는 범죄하지 안하고 다시는 악령의 미혹받지 안하고 다시는 하나님을 거슬리는 우상을 가지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주님의 십자가의 걸음 이 십자가의 걸음 이렇게 걷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을 깨닫고 앞으로 게을하지 말고 겸손히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