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5:01
세 번 반성하라
1981. 6. 21. 주일 오후
본문 : 창세기 11장 1절∼9절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그 성을 쌓아 가지고 저 하늘 꼭대기로 해서 노아 홍수 같은 그런 홍수가 와도 호흡이 끊어지지 안 하도록 그렇게 쌓지 않았나 이것은 제가 한 30년 전에 이런 설교를 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에 제가 그게 대해서 인생의 미움이 그것이 대단히 미웠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도의 생의 법칙으로 주셨으니까 우리는 이 법칙대로 살면 책임이 없습니다. 이 법칙대로 살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을 져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법칙을 주셨는데 그 법칙대로 죽든지 살든지 당신만 바라보고 꼬박꼬박 그 법대로 사는데 당신이 책임지지 안 하신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내놔야지요.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법칙을 주신 이것을 하나씩 둘씩 참고해서 간추려 거머쥐고 이 법칙대로만 그저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 놓고 실행해 나갈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법칙대로만 무책임하고 책임 없이, 사람이 책임 짊어지는 데에 힘이 들지 책임 안 지는데는 힘이 안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법칙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우리에게 주신 그분이 책임을 지시지요. 그 위에 노아의 세 아들이 된 그런 것도 은혜 배반하면 망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또 은혜 된 것 그것만 보고 뭐 때문에 은혜 받은 것을 모르면 그것도 땅의 생활로 끝입니다. 야벳은 은혜 주신 그것만 소중히 여겼지 무엇 때문에 이 은혜를 줬는가 하는, 하나님의 그 목적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땅의 생활만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은혜도 잊어버리지 안 했고 은혜도 귀중히 여겼지만 그 은혜 주신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 주셨다는 이 사실을 그가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은총을 주셔서 그분으로 인해서 땅에 있는 수평을 초월해서 하늘의 인간의 영원한 생명 세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오전과 오후에 주신 말씀도 우리에게 간단하나 우리의 생의 법칙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풍부하게 넉넉하게 주셨고 서로 의논 좋게 무엇이든지 합심되고 단합되어서 이렇게 행복 되도록 살게 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하고 높이고 섬기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이것 가지고 배부르고 평안하니 하나님도 모르고 그만 저거가 높아 가지고 저거 높일 연구만 합니다. 또 저거가 마음도 단합, 힘도 단합하니까 이것만 귀중히 여겨서 이것만 흩어지지 않도록 언제까지나 우리가 일심 일력으로 이렇게 살아가자 하는 이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높일 줄 모르고 저거들 높이려는 그 중심에서 경영한 게 뭐 경영했느냐? 이 대를 쌓고 꼭지를 하늘까지 닿도록 해서 홍수가 와도 문제 없이 하자 하는 이것이 은연중 하나님을 반항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배은에 속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이 흩어지기를 싫어하는 그 뭉텅이를 산산이 부숴 버렸습니다. 저희들을 높이려는 목적에 정반대로 사람은 그때부터 비로소 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도리를 법칙을 고요히 생각하면서 적어도 우리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함으로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안 믿는 불 택자들은 인간의 마음과 힘을 합해 가지고 무엇을 해나가기도 합니다. 삐뚤어져도 그대로 나가다가 옆에 사람에게 망치는 큰 해독이 아니면 저 망할 길이라도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저 망할 길이라도 그대로 내버려두고 또 옆에 사람에게 해를 줘도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그렇지만 아주 심한 악이 될 때에는 하나님이 치십니다. 어지간한 악이나 죄가 되어도 하나님이 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안 믿는 사람들은 통계를 말하기를 죄만적 참필적이라 죄가 가득히 차면 하나님이 반드시 벤다. 절단 낸다.
그전에는 내비둡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그 죄악이 관영해서 얼마든지 교만하고 얼마든지 강퍅하고 얼마든지 망령되고 얼마든지 옆에 사람에게 약간 침해를 해도 죽는 날까지 평안하게 살다가 지옥 가게 만들어 놨다 했습니다. 이렇지만 우리는 주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같이 아끼시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대한 기대가 당신의 목적입니다. 이런 큰 욕망과 기대를 가지시고 자, 하늘의 부요를 다 우리 위해서 희생했지, 생명과 피를 다 희생해 가지고 우리를 구출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송장 속과 같은 우리 속에 성령이 들어와서 지금 친히 내주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이렇지만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해 계십니다. 이러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영원 전에 계획하고 조직하고 설계하고 이래가지고 그대로 착착 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또 지금 우리 앞에는 돌변된 일이 있는 것 같지만 뭐 20세기 과학이, 진화론으로 세계가 이렇게 진보되어 이런 것 같지만 영원 전 하나님께서 예정한 그대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나타나는 것이 이 구원을 위해서 창조하셔서 구비해 놓은 것들이요, 또 진행되는 모든 순서와 그 형편들이 영원 전에 예정한 그대로 이 광대한 이 구원을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이 안에 우리를 금이야 옥이야 보배로 여기셔 가지고 당신이 감추었던 것을 우리에게 다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것을 다 네 것 만들 수 있다. 천군 천사도 너희에게 다스림을 받고 재판을 받는다. 온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 받는다. 고린도전서 6장에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구속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일반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반인에서 주의 피로 특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인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거주지는 하늘나라요, 진리 세계요, 하나님의 절대의 보호의 통일된 단일성의 그 세계가 우리의 나라입니다. 다만 이 세상을 지나게 하는 것은 무궁을 연습하게 하는 것이요, 무궁을 마련하게 해서 이다음에 하나님이 얼마나 너를 주면 되겠느냐? 또 주면 감당하겠느냐? 주면 참으로 주신 주님 위해서 있겠느냐? 그것 가지고 네 욕심대로 네 몸 위주로 살겠느냐? 저울로 달아도 보시고 시험도 해보시고 연습도 시키시고 가르치시고, 이래서 우리로 하여금 무궁을 마련토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생각하면 너무 우리가 예사롭게 생각하고 있지 안 놀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천하에 유력한 인물들이 다 알라고 해도 인생을 아요, 하나님을 아요 나는 걸 아요, 죽는 걸 아요, 세상을 아요, 이 다음에 심판을 압니까? 부활을 압니까? 무궁 세계를 압니까? 뭘 압니까?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압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멸망인지 압니까? 우리는 잘 가르쳐 놨습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을 우리에게 알려서 우리가 바로 알고 있습니다. 자존하신 하나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뜻을 우리가 알아서 필요한 대로는 알고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고 우리가 나게 된 것도 정확히 알고 있고 또 두 종류 있는 것도 알고 살고 죽으면 부활이 있는 것도 알고 심판도 알고 무궁 세계도 알고 영원히 만물과 우리가 환영할 이 관련도 알고 모를 것이 없어.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는 다 알려주셨고 알려 주신대로 우리가 정확히 압니다. 이 신구약 성경이 정확한 것이요, 그저 추측이나 추론이 아닙니다. 가상이 아닙니다. 다 획 하나가 우주보다도 중량을 가진 절대성적인 이 지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도 하나 우리의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니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것을 구비해 주셨습니다.
원수가 없이 한 마음, 한 뜻, 한 움직임으로 이렇게 화합이 되어 가지고 먹을 것 많아, 입을 것 많아, 쓸 것 많아, 활동할 수 있는 면적이 많아. 뭐 그리운 것이 없이 살게 했는데 이것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했는가? 과거에 홍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생각지 않고 저거 좋도록 저거 위주로 사는 자도 홍수에 멸해졌고 천하가 이렇게 사는데도 오직 고독의 걸음이요, 독보의 걸음이지만 하나님을 중심하고 위주 하여 사는 노아를 천하를 정죄 해서 다 멸망시키고 이 여덟 식구만 구원시켜서 내놨기 때문에 약속을 여섯 번이나 했습니다. 내가 너희들과 약속한다. 내가 너희들을 멸하지 않을 터이니까 어쩌든지 과거에 너희가 멸해진 것을 기억하면서 너희들이 바른 중심과 바른 목표를 가지고 바른 방편으로 살아라. 이것을 몇 번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주신 이 풍부에서 하나님 잊어버리고 자, 어쩌든지 우리 이름을 높이자. 우리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이래 하자. 어떤 것이 와 가지고도, 말은 안 했지만 홍수가 와도, 우리 선조 노아 때 홍수 그까짓 것은 문제 없다. 꼭대기만 닿으면 호흡하지 않느냐? 은연중 암행입니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은 멀어지고 저거만 알고 또 저거끼리 단합되어서 잘 살려고 저거 위해 이미 있는 그것만 하면 살 줄 알고 하, 하나님이 복 안 주셔도 이것만 하면 된다. 우리가 합심돼. 합력 해. 모든 게 풍부해. 이만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느냐? 당장이라도 다 거지가 되어 버리고 다 굶어 죽이려면 다 굶어 죽일 수 있는데 이래가지고 그 망령을 부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그 욕심을 가지고 탐심을 가지고 하지 말고 나보다 높은 사람 위의 사람을 보고 하지 말고 거지가 그저 조반을 먹도록 은혜 주시니까 자기보다 부자를 봅니다. 부자 보니까 저는 불만입니다. 또 그만치 올려 주니까 또 그 위에 사람을 봅니다. 이렇게 탐심을 가지고서 점점 욕심을 내 가지고 저보다 위의 것만 탐하고 나는 과거에 이렇든 이 은혜 받았다. 이렇게 개구리가 올챙이 때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렇게 과거에 그것을 생각해서 내가 이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까 과거에 비해서 이렇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셨으니까 뭐 때문에 해 주셨겠느냐? 이거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나님을 위하라고 주신 것 아니냐? 이러면 되는데 이러니까 과거에 가난할 때 하나님을 섬겼으니 은혜 줘서 부요 해 졌으니까 더 섬겨야지. 과거에 아주 가난할 때도 이웃을 생각할 줄 알고 동정할 줄 알고 구제할 줄 알고 뭐이든지 힘 있는 대로 선한 일을 하려고 할 줄 알았으니까 하나님이 주셨으니 이제는 더 해야지.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더 힘써 나아가면 점점 풍부해지는 것인데 간단합니다. 인간은 직장이 부요 하게 하는 것 아니요. 자기의 기능이 부요 하게 하는 것 아니요. 자기 욕심이나 배짱이나 열심이나 노력이 이러는 것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작은 부자는 부지런한 데 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기를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법칙이 다릅니다. 이러니까 성경을 보면 사람은 암만 잘 나도 사람만으로는 안된다. 열심으로도 안된다. 지혜로도 안된다. 욕심으로도 안된다.
마음이 단합을 해도 안된다. 그게 다 좋지만 인간의 열심이나 노력이나 모든 기능이나 이게 다 좋지만 거기다가 하나님을 머리처럼 다루어야 되지. 하나님 떼내 버리면 마치 아무리 잘나도 목을 끊어 버리면 송장이지 제까짓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떤 좋은 것을 구비해 있어도 하나님을 주권자로 하나님을 지도자로 하나님을 거기 대해서 영도자로 이렇게 모시고 있어야 그게 살지 하나님을 떼 내 버리면 죽는다. 인간의 지식도 그 지식이 나쁜 건 아니지만 하나님의 지식은 빼버리고 자기 지식으로만 하려고 하면 거기다 바벨탑을 쌓는 것이요 망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머리로 삼아서 이 지식이 아무리 동으로 가자고 전 지식이 말해도 하나님의 지식이 안돼. 서로 가. 하면 복종하면 그 지식이 살아납니다. 오늘 우리 믿는 형제들이 옛날을 생각하고 판정을 해서 내가 이 모양되어 있는 이 형편 이 사정이 하나님이 주셔서 은혜로 된 것이지 내 힘으로 된 것이지 판정을 하십시오. 거기서 망하고 흥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아, 이거는 내가 피땀 흘려서 내가 했다. 네가 했다면 네가 판정을 해라. 네가 했으면 네 마음에도 할 수 있지. 여기서 망하고 흥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니면 다 화근 입니다. 각양 좋은 은혜와 온전한 것은 빛들의 아버지에게로 말미암아 왔지 우리 인간이 욕심 낸다고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자, 내가 현재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망합니다. 그 은혜를 모르는 자는 망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제 마음대로 살 것 아니겠소. 무슨 조심이 있겠소? 무슨 절제가 있겠소? 은혜가 아니니까 위에 물이 말랐는데 제것만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보려고 하니까 너무 저보다 큰 자가 많습니다. 낙망밖에는 안됩니다. 이것이 절대자 무한자로 말미암아 내게 온 것이기 때문에 내게 와 있는 것은 적지만 그분이 나에게, 그와 연결이 되면 무한히 나와.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의 대결은 온 천하가 다 달라 들어도 시뻐. 인생이 여기서 감사가 나오고, 감사가 나오는 거기서부터 모든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옛날에 비해서 나를 이렇게 해주셨으니 무엇 때문에 해주셨느냐? 이것을 바로 깨달으면 우리가 점점 흥망 되고 충만해질 것이고 이것 모르고 망령 되서 빽 돌아서면 하나님 떼 내버리고 저 혼자 날뛰면 그 결과는 성경이 말한 대로 멸망인 것입니다.
며칠전에 권사님들이 나한테 왔읍디다. 여럿이 왔기 때문에 어찌 왔는고 싶어서 내가 의사를 물으니까 아무래도 거창 집회에 중간반 학생들이 이천 명이나 간다고 하니 식사가 문제입니다. 이러니까 중간반 학생은 학생은 학생으로 따로 집회를 하고 장년반은 장년반으로 따로 갈라 하는 것이 어떨까 해서 의견을 묻습니다. 이래 말합니다. 그러면 그거는 그렇게 가르는 것보다도 더 세밀히 해서 쪼개고 쪼개 가지고 이 사람은 이 자리에서 저 사람은 저 자리에서, 나무 쪼가리 쪼개듯 쪼개면 더 간편하고 단순할 것 아닙니까? 하필 학생과 장년반만 쪼갤 것이 아니라 더 쪼개면 간편해지지요. 또 그럴 필요 없이 하필 거기 가야 은혜를 받습니까? 예배 보는 이것으로 족하지 않소? 꼭 예배는 봐야 됩니까? 예배당을 짓는다고 힘들고 신주머니니 오찻물이니 교통지도니 힘드니까 그것 안하고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자기 아이들이 개망나니인데 야야, 어쩌든지 이번에 집회 가자. 그러면 내가 돈도 많이 줘서 사 먹을 것도 많고 거기는 냇물도 좋고 하니 가자. 이러면. 아, 안가요. 안 간다고 할 때에 어떻게 어떻게 해서 데려갔습니다. 나 예배보는 것 싫어 안가요. 아, 예배 안 보면 네 마음대로 예배볼 때 뛰어 놀면 안돼나? 놀아도 가자. 와 가지고서 가면 같이 가고 오면 같이 오고 이래도 가 가지고 예배 참석도 안하고 뛰어 돌아 다니며 놉니다. 노니까 다른 부모가 말하기를 아무 것이는 이다음에 데려오지 말아라. 예배 방해만 하지 아무 소용 없는데 뭐할라고 데려오느냐? 그러면 그 부모 마음은 어떻겠느냐? 안와서 다른 동무들하고 돌아다니며 나쁜 놈하고 노는데 여기 와 가지고 예배는 참석 안 해도 예배드리는 사람, 그 분위기 속에 한번만 섞이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데 그러다가 보면 어째 혹 걸릴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아, 그 예배당에 오니까 한 시간 보고 안 보더라. 찍해야 예배 두 시간 밖에 더 보았느냐? 그거 데리고 오지 말아라. 그 부모 심정은 어떨 것인가? 그런데 자기네들 심정은 어떤 심정에서 그렇게 나오나? 자기네 자녀 중에 개망나니 같은 게 있다 하면 그래도 따라가서 물장난하고 예배 참석 안 해도 가서 그 분위기라도 쌓이어서 어떻게 하면 행여나 그런 때를 만나지 않겠는가? 가기를 원하겠는가, 안 가기를 원하겠는가? 이런 말을 하면서 서로 웃고 그쳤습니다. 또 말이 나왔습니다. 이 학생들을 작년에는 모두 차비를 대서 가 가지고 이러니까 도둑놈도 가고 불량자도 가고 이러는데 올해는 제 차비 낸 사람만 데려갑시다. 이러니까 그러자. 또 그러니까 또 부장은 천 원을 내면 데려갈 사람으로 작정을 합시다. 안 된다. 차비를 다 내어야 된다.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언제 물었습니다. 중간반 부장은 천 원만 내면 데리고 갑시다. 이러는데 나는 다 내어야 되지 안된다. 이래 말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기뻐할까 그 중간반 부장을 기뻐할까? 그 중간반 학생들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가 뜨거운가, 부장이 뜨거운가 한번 판단을 해보이소. 이랬어.
이러니까 목사님 말은 그대로 맛 뵈기로 들으면 큰 탈 난다고서 아,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 부장을 훨씬 나보다 기뻐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가 가지고 전도해서 안되면 도시락도 싸 가지고, 먼데 가서 그러면 도시락도 싸 가지고, 아, 나는 차비가 없는데. 차비 여기 있지 않나? 뭐 그런 것 걱정해. 차비들이고 도시락 싸고 이래가지고 와 가지고 그게 한 시간 내내 꾸벅꾸벅 좁니다. 자도 그래 와 주는 것으로 다행히 여기고 어떻게 그러면 뒤에 신자가 될까 싶어서 이래 하는 것이 우리 전도 아닙니까? 이런데 이번에는 중간반 학생들이 이천 명이나 간다고 하는데 차비 하나도 없습니다. 또 이천 명 밥을 해주려고 하니까 한끼에 쌀이 일곱 가마니 밥을 해야 돼. 또 천막 어디 있는가? 그러니까 그럴 것 없이 주려서 꼭 가려고 하는 사람만 가고 그럽시다. 또 장년반도 꼭 가려고 하는 사람만 가고 가고 싶은 사람만 가고 그것보다도 그냥 집회를 없애 버렸으면 편하겠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 서부교회는 가난해서 다른 데는 사람 숫자도 경제가 앞서서 넉넉한데 우리 서부교회는 가난해서 그 일을 못한다. 그거는 서부교회가 전도는 열심히 하지만 전부 도적질을 해서 그렇다. 무슨 도적질을? 하나님이 심으라 하는 씨는 심지 않고 이걸 볶아 먹고도, 씨를 심지 안하고 씨를 내가 먹어도 그 농장 주인이 야단을 칠 터인데 이 씨 팔아 가지고 제 마음대로 놀러 다니고 이 씨 팔아 가지고 장농사고 씨 팔아 가지고 창고 사고 이 씨 팔아 가지고 상점 사고 이 씨 팔아 가지고 옷 사고 이 씨 팔아 가지고 반지 사고, 뭣 사고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더 속겠느냐? 안 속는다. 이러기 때문에 서부교회에 경제가 해결이 되려고 하면 이미 그 씨를 없앤 것은 할 수 없지만 그 씨를 팔아서 장농을 샀으면 장농을 팔아서 심어라. 그 씨를 팔아 가지고 회사를 차렸으면 회사를 팔아 가지고 심어라. 자기 양심이 알 수 있습니다. 아, 씨하고 양식하고 두 가지를 줬는데 나 먹고 지나고 나머지는 이 씨로 심어라는 것이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니까 자기 중심이 당장 쓸 일이 없으면 이걸 가지고 논을 사 가지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공장을 만들어 가지고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지 심은 씨니 당장에 뿌려 심을 수도 있고 또 이렇게 해 가지고 심을 수도 있고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심어라 소리, 심을 자리를 주지 않았는데 던져 버리면 없어지지 않습니까? 아무리 심는 것이라도 땅에다 심어야지 되지 그걸 불 가운데 심으면 타버리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기회를 주실 때에 자기가 감동이, 이럴 때는 돈을 써라.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는 하고, 기회가 오기 전에는 이것 가지고 장사도 해 가지고 또 늘리면 하나님이 쓰게 하는 명령이 올 것이다. 또 공장도 뭣도 이리 하나 이것은 당신이 주신 씨 가지고 한 것이기 때문에 나 먹고 산 것외에는 전부 씨 가지고 한 것이라. 그것 가지고 만석꾼이 되어도 씨 가지고 한 것이기에 그거는 씨고 큰 회사를 백 개나 가지고 있어도 씨 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 씨고. 하나님의 것이지 내 모가치가 아니라. 이렇게 구별해서 자기 먹고 사는 그 이외의 것은 하나님께 인생 구원에, 복음을 위해서 있다는 이것을 구별을 딱 지우면 당장 부자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으라고 하신 그 기회를 제 마음대로 작정을 해서 사람을 구제하는 것도 사욕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참 이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씨라 하는 것을 자기 양심에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게 얼마 써야 되겠다. 이 증축하려면 얼마를 써야 되겠다. 이번에 집회를 가면 집회에 대해서 얼마를 써야 되겠다. 안다 그거요. 보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양성원 한다고 하니까 양성원 하는데 이천만 원 내는 사람도 있고 몇백만 원 낸 사람도 있고 보니까 그런 분들은 씨를 심으려고 애를 써는 사람들입니다.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 대로 우리가 구별을 해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수입에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것. 십일조 하지 안하고 무슨 하나님의 물질 축복 받겠다고 합니까? 으례히 십일조는 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십일조는 다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자기 몸을 가지고 이런 노력, 저런 노력을 해 가지고 수입한 것 중에 십분지 일은 떼 놓는 것입니다. 그 비용 다 제하고 예를 들어서 월급을 받았으면 월급의 십분지 일을 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월급 중에서 차비가 들었으니까 차비든 것. 또 뭐 하는 것 다 떼고 나머지 자기 수입에서 십분지 일을 뗄 수 있고, 이게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으례히 해야 되고 또 십일조 떼고 십분지 구조 가지고 저 먹을 것과 씨. 이 두 가지. 그런데 먹고 나머지를 심어라고 했는가? 그래 하지 안했어. 씨와 양식. 씨를 먼저 기록했어. 이러면 먹기 전에 이거는 얼마는 인간 구원 사업에 투자하고 얼마는 내가 쓸 것이다. 자기 양심이 판단하면 알 수 있다 말이오. 자, 인간 구원 사업으로 이걸 떼놨는데 이거는 분명히 씨인데 이 복음에 투자하라는 것인데 이것을 즉각 아는 사람을 줄까? 기회를 안주면 쓸데 없습니다. 안 주니 보자.
이것은 씨인데 이 씨를 그냥 땅속에 파묻어 놓을 수 없고 이걸 씨니까 기회가 있으니까 이 씨를 널구자. 장사해서 널구자. 예금을 해서 이자를 널구자. 공장을 해서 널구자. 하면서 이거는 아무리 쓸데 없이 이렇게 한다고 해도 이것이 회사가 열이 돼도 이거는 내게 아니고 이거는 씨로 한 거다. 씨다. 내 의식주 사는 것 외에는 전부 복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해서 있으면 하나님이 힘도 안 들고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할일 있으면 척 척 다하지.
그것 당신이 얼마든지 주시지. 이래야 이 조직이 이 질서가 이 모든 운영이 바로 될 터인데 우리 서부교회는 그것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다는데는 학생 하나를 데려오기 위해서 주일마다 빵도 주고 노트도 주고 하루 학생 하나 머리 백원씩 치인답니다. 한달이면 450원치이요. 한 학생 데려오려고 하면 이러니까 일년이면 벌써 오천사백 원이랍니다. 주일날 데려오는 것이 이렇게 라도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 오는 것 토큰 사는 이것을 인색해 가지고 올라 해도 토큰이 없어서 못 데려오고 또 그래 하면서 처음에는 토큰도 대주고 도시락도 주고 이러면서 차차 복음을 그 사람에게 넣어 주어서 복음으로 그 사람이 변화가 되지면 제가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이것으로 인해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안되었습니까? 그 사람들을 우리가 사랑으로 봉사로 구원할 때에 그 아이들도 나중에 봉사로 구원해지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천 명이 가면 한 사람 머리에 팔천원씩이 드는데 차비하고 식비하고 다른데서는 4박 5일하는데 8천 원 드는 그런 길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 자식 버리고 전부 인질, 인성 다 버려 버리고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암병 같은 것을 다 데려오는 그런 걸음도 돈이 많이 드는데 여기 오면 그래도 참 되는 것은 고쳐집니다. 아마 이번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인간 병 고쳐 가지고 육신의 병도 고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실 것을 제가 믿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이 다 좋은데 욕심 하나가 나빠서 평생 고생하는 사람 있습니다.
욕심 하나가 병이 들어서 못된 욕심 하나 그게 있어 가지고 평생 고생하고 자기 집도 망하고 옆에 사람에게도 사람같이 않게 보이는 그 욕심 병 하나 들었는데 그 육신의 병을 안 들리면 얼마나 손해를 지길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마음에 욕심 병이 들었으니까 팔이 하나 구불어 졌든지 아니면 절름발이가 됐든지 암병이 있든지 있다 말이오. 이번에 말씀 듣고 그 면에 고쳐 버리면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지요. 그러면 원인이 끊겨지는데 뿌리가 끊기는데 그 병이 안낫고 되겠소? 이런 집회에 한 사람에게 팔천 원이면 열 사람에게 8만원, 또 백 사람에게 80만원, 또 천 사람에게 800만원, 이천 명이면 1600만원. 1600만원이면 돈이야 크기야 크지만 많지만. 제가 돈이 있는데 1600만원을 들여 가지고 어떤 사업을 하는 게 이보다 더 큰 가치 있는 사업을 하겠느냐? 이래 가지고 만일 거게 간 사람이 이 인간이나 자기 가정이나 자기 사회나 국가에 대해서 크게 망칠 사람 하나만 변화가 돼도 얼마나 큰 장사요. 여기서 쓸모 있는 사람이 이 중에 몇 사람만 난다고 해도 얼마나 큰 성공을 한 것입니다. 돈은 벌기 보다 쓰기가 어렵습니다. 벌기는 이래 저래 해도 벌지만 바로 써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돈 쓰기는 참 어렵습니다. 저도 제게 있는 돈을 써 보려고 하지만 쓰는 것이 참 어려워. 돈을 못 쓰겠어. 옷을 한번 사주려고 해도 저 사람에게 이 옷을 사주는 것이 이 옷을 입고서 어떤 결과를 맺겠느냐? 이 옷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어찌 되겠느냐? 오만 수지 계산과 모든 배경의 일어날 관련될 사건들을 생각하니까 줄 사람이 없어. 이것을 주면 옷을 벗고 있는 게 족하지. 벗고 있는 그자에게 옷을 주면 그로 인해서 큰 화근이 된다는 것을 연상되기 때문에 안 된다 그거요. 이래서 저도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애를 쓰다가 뭐 나환자원에도 보냈고 양로원에도 보냈고 이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라, 다 보니까 위험스러워 그래서 성서 공회에 보냈습니다. 이런 집회에 데리고 가는 거야 잘못될 게 뭐 있겠소? 안돼 봤자 데리고 갔을 때 그 사람 그대로 있을 것이고 좀 잘되면 고쳐질 것이고 사람을 고쳐서 사람 만드는 이 사업에 제 일생 동안 여러 번 못해도 톨톨 털어 가지고 인간을 구원할 인간 구원 사업에 인간 고쳐 만드는 사업에 한몫 돈 1600만원 내놔 봤다. 이것이 여러분들이 고요히 평가해 보십시오. 제게 무슨 문화 사업을 무슨 구제 사업을 자선 사업을 그것 해 가지고 사람들이 그 결과에 그것 얻고 배워 가지고 그 결과에 어떤 사람이 됩니다. 무슨 사람들이 됩니까? 범에게 날개 준 것 같은 그런 결과밖에 더 이루어집니까?
이래서 나는 오후에 이 말씀을 증거 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는 이미 받아 가지고 있는 여기 대해서 이 사람들이 걸어가는 이 길을 걸어가지 안 해야 되겠다. 이미 가지고 있는 이것 가지고 "자기를 높이려는 이것이냐,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이냐?" 가지고 있는 것 이것만 하면 되니까 이것 가지고 하려고 하는 사람되느냐? 이것 가지고 이것은 하나님하고 교제비를 삼아서 이것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끌어 들여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붙어 가지고 이미 가지고 있는 이거는 하나님하고 한 덩어리 되는 데에 이것 투자해 가지고 이미 가지고 있는 이것으로서 하나님하고 하나 되어 가지고 무슨 일을 해보자. 하는 이거냐. 하나님 생각 안하고 가지고 있는 이것 가지고 뭐 하나 해보자 하는 이것이냐? 이것 가지고 하나님 높이려는 것이냐 이것 가지고 자기 높이려는 것이냐? 둘 중에 한 길인데 어느 길이냐? 이거 우리가 하나 반성해 봐야 되겠고, 그래서 첫째는 자기 중심을 한번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첫째로 깨어서 한번 살펴 보는 데에 자기 중심을 우리가 한번 살펴봅시다. 보자 내 중심은 이 현재에 나로, 내가 누구를 높이려는 중심이냐? 내가 이미 있는 것 이것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냐? 하나님하고 단합해서 하려고 하는 것이냐 내가 앞으로 경영하고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내게 있는 이것 가지고 하려고 하느냐? 다시 말하면 인간의 것 피조물로 하려고 하느냐? 하나님하고 한 덩어리가 되어 가지고 하려고 하는 것이냐? 내 중심이 어떠냐? 이들이 저희를 높이려는 그 중심이었고 우리가 똘똘 뭉치면 된다 그거 가지고 하려고 하는 그거와 같이 우리 중심이 그건지 저건지 자기 중심을 살펴야 되겠습니다. 자기 중심을 살펴서 하나님 중심인지 가족 중심인지 자기 중심인지 무슨 중심인지 무슨 위주인지 하나님 위주인지 자기 중심을 한번 살펴보고 하나님하고 하나 되어야 할 것으로 이 자본을 하나님하고 하나로 잡아 가지고 자본을 삼는지. 하나님 빼놓고 있는 것 이것만 하면 된다고 이 자본을 삼는 것인지 내 중심이 어떤 지 한번 살펴봐야 되겠고 또 자기가 어떤 일을 하든지 일을 하면 그 일이 잘 형통해질 때에 그 모든 일이 형통해지면 이만치 일이 잘되니까 문제 없다. 할 게 아니라 잘 되면 보자. 잘되는 이게 끝까지 잘되겠나? 이것 위험스럽나? 가다가 망할 것이 뻔하나? 잘되는데 거게서 한번 서로 반성해 봐야 되겠습니다.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 뭐 뜻이 같고 힘이 같으니까 주위 환경 있는 사람이 공연히 나를 돕습니다. 전체가 협조입니다. 협력이요, 협조요. 모든 것이 형통입니다. 전체가 협조 협력이라. 아, 그 사람이 말 한마디만 해도 전부가 협조 협력이라. 그렇다고 이만하면 됐다 하는 것은 무지한 인간이요. 우리는 여기서 이걸 배웠습니다. 아, 이 사람들이 그 성을 쌓고 탑을 싸 올리는데 얼마나 형통했습니까? 형통하니까 아무 반성 없이 생각해 볼 것 없이 그만 그 공사에만 열중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망하지 안 했습니까? 망했으니까 우리는 우리 하는 일이 공장이든지 또 자기가 무슨 장사든지 어떤 사업이든지 정치든지 문화 운동이든지 목회든지 무엇이든지 형통할 때에 살펴봐야 됩니다. 이 형통이 이게 참으로 실력 있나? 이 형통이 껍데기만 형통이지 속에 실력 없는 아주 공허하냐? 이 형통이 속이 텅 비었나? 속이 꽉 찼나? 살펴봅시다. 속이 비다니? 피조물뿐이면 비었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 형통해. 그래? 하는 일이야 어찌 되던 간에 이 일을 주장하는 내가, 내 중심이, 또 내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을 높이려는, 하나님의 것을,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목적은 이것 위해서다. 동기도 이거.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이다.
또 그러면 지금 해 나가고 있는 힘은? 야, 하나님께 거슬리는 것 이래 저래 해 가지고 그런 것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싹 중단해 버렸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것도 하나님의 기적이지 저것도 하나님의 기적이지.
하나님이 분명히 해준 것 아니냐? 하나님이 같이 한 것 아니냐? 내가 하는 이 일에 하나님이 같이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도 보니 분명하고 저것도 보니 분명하다. 또 잘못될지라도 내 중심이, 하나님이여 내 중심을 보십시오. 내가 무지몽매해서 모를지라도 내 중심이 당신이 아닙니까? 당신 높이려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의 복음을 위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내 중심을 보십시오. 내가 우매 무지하여 마귀에게 끌려 가지고 잘못 착각을 했는지 몰라도 내가 아는 대로는 내 중심은 이렇습니다. 이러면 알맹이는 찼습니다. 뭐 껍데기야 이런 저런 거 무슨 일이 있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형통할 때에 한번 반성해 볼 것. 이러다가 그 일이 가다가 자꾸 사고가 생깁니다. 서로 저거끼리도 의견 충돌이 납니다. 인간의 협조가 없습니다.
응원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이 일에만 주력해야 될 터인데 뜻밖에 다른 일이 생겨서 그 힘을 나누게 됩니다. 힘이 나누게 돼져. 의견이 나눠져. 모든 단일 의견, 협조 협력이 없어져. 야, 이것 안됐다. 이게 왜 이러냐? 그때 한번 또 반성을 해봐야 되겠습니다. 그때 살펴보지 안하고 아, 이 힘이 갈라지니까 못 갈라지도록 막아라. 막고 이래 단합을 시켜라. 이 협조가 없으니까 협조가 없으니까 가 가지고 잘 사교를 해라. 이래가지고 날뛰어서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불신자들이 가는 걸음입니다.
이러니까 어쩌든지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단합을 하자. 협동을 하자.
하는 이거 불신자들이 하는 일이요. 해 봤자 그것이 원인이 딴 데 있고 절대자가 간섭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낭파가 됩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깨어서 이것이 자꾸 흩어지기 시작하면 거기서 반성해 가지고 보자, 이거 중심이 틀렸구나. 또 하나님의 도움 없이 우리끼리 하려고 했구나.
이게 틀렸다. 어라 치워 버려라. 이래 가지고 거기서 다시 돌이키면 우리에게는 성공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질 때 그것만 가지고 날뛰면 마지막으로 끝장보고 마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도 그러는가? 우리가 과거에 이 예배당을 지을 때에 그때 시비가 많았습니다. 많았는데 그때 우리가 8월 집회는 가까웠고 지금 이때쯤 됐는 것 같습니다. 8월 집회는 가까웠고 이걸 하려고 양사방 애를 써도 안됩니다. 안돼서 봐라. 우리가 이러니까 바벨탑 쌓듯이 안되는 것이니 하나님께 맡겨 두고 이제 예배당 짓는 것은 제직 들을 모아 가지고 자, 무기 정지 처리했습니다. 몇 달, 몇 해 할 것 아니라 무기로 중단하기로 정지하고 전적 집회 준비만 하자. 집회 준비에만 전력을 기울여서 이렇게 해 나갔습니다. 이랬더니만 아, 집회 갔다 오니까 그 사람들이 달라져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했겠지요. 갔다 오니까 그만 방해하던 사람들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렸소. 날아가 버려서 예배당 짓는데 형통하고 협조를 해줍니다. 말하기를 아, 그렇게 젊은 사람을 그렇게 신세를 족치는 게 어디 있을까? 누구 신세를 족쳐요? 아, 그 사람 신세가 안갔습니까? 누가? 아, 예배당 짓는데 방해하던 사람. 그 사람이 무임소 장관인데 이 부산서는 제일 대가리인데 검찰총장에게 비수를 대면서 담배 한대 꺼내 하면 꼼짝 못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왜 망해? 영 신세 갔습니다. 그 뒤에 나는 모르겠어. 우리가 꼭 삼성(三省)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이미 모든 것이 닦아져 가지고 형통하게 재미 있게 되어 있을 때 그때에 우리는 한번 깨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거게서 우리는 옳은 길을 시작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발할 때에 자기 중심을 한번 살펴보고 시작할 때 자기 중심을 살펴서 무슨 중심으로 무슨 위주로 하는지 그 시작할 때 잘 살펴 가지고 이미 일은 이루어지지 안하고 있으니까 자기 중심을 살펴야 돼. 자, 내가 지금 이것 하는 것이 무슨 중심이냐? 제가 암만 변론을 해도 핑계를 대고 요리조리 삐딱거려서 암만 구서를 붙여 가지고서 해도 저는 안다 말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냐? 우리는 불신자가 아닙니다. 불 택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이 아니면 망할 일인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위주가 아니면 망할 일 인줄 알아야 됩니다. 또 이 일을 할 때에 이 일은 하나님 중심 위주로 하지만 이 일을 하나님이 안 도와줘도 이 일을 할 수 있다 하면 망합니다. 아예 하나님이 도우심이 아니면 안될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될 수 있는 일을 해야 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 해야 됩니다. 내가 이 일하는 것이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 아, 이 일은,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기는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적극 돕지는 않을 것이다 하면 안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중심으로 하는 일이 되어져야 하고 또 이 일 할 때는 하나님이 돕겠느냐, 안 돕겠느냐? 도와주시기까지는 안 하겠는데 아예 그러면 손떼십시오. 아, 이 일이라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왜 축복 안 하시겠느냐? 왜 안 돕겠느냐? 아, 내가 나를 아는 대로 양심에 자책할 것 없이 하나님 중심이다. 위주다. 또 이 일이 그래 안되겠느냐? 그러면 시작을 해야 합니다. 하다가 일이 형통해 나갑니다. 형통하면 그때 다시 한번 따져 봐야 됩니다.
또 거게서 한번 반성 해봐야 됩니다. 이래 나가니 이것이 하나님을 거슬려서 나가는 것이가, 하나님의 도움심을 입어 나가나? 하나님의 도움심은 아예 손 떨어졌고 우리 힘만 가지고 나가느냐? 사회 힘을 가지고 나가느냐? 국가 힘을 가지고 나가느냐? 무슨 힘으로 나가느냐? 이 힘은 무슨 힘이냐, 또 이렇게 해나가는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하나님을 높이는 이 일이 되어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 위주의 일이 되어 가느냐 뭐이 되느냐? 한번 거기서 살펴서, 아니면 다시 돌이켜야 됩니다.
또 그래도 우리 심령이 어두워서 모릅니다. 어두워서 모르다가 자기 딴에는 잘 살펴서 하나님의 위주로 하나님의 도우심의 기적으로 해 나간다고 인정이 되어져도 또 가다 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납니다. 무슨 사고가 일어납니다. 협조 협동이 자꾸 식어집니다. 분열이 돼져요. 분쟁이 나요. 신강이 납니다. 나면 그만하면 자기가 형통할 때 살펴서 모른다 할지라도 형통할 때 살펴본 사람이라면 벌써 조금 거기서 무엇이 나면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있으니까 거기서는 그렇게 된 것을 싸 잡아 맬라고 붙들어 맬라고 애쓸 게 아니라 일단 놓고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높이는 일이 안됐으면 그것을 바로 잡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없이 했으면 그것을 회개하고 이러면 우리 믿는 사람의 길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발할 때는 자기 중심을 살펴봐야 되겠고 시작되어 그 일이 잘 진행이 될 때는 진행되는 그 형태를 한번 살펴봐야 됩니다. 거기서도 몰랐으면 나중에 이것이 분열이 됩니다. 분열이 되고 혼잡이 일어나고 자꾸 지장이 일어납니다. 지장이 일어나면 그것을 인간끼리 수습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일단 둬두고 근본으로 찾아가서 그 근본을 바로 잡았을 때는 해결됩니다. 어리석은 것 같지요? 아니요. 참 미련한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 이래 하는 것 이것 안되면 안 되는데 이것은 아무 것이 찾아가 가지고 사건을 막아야 되고 아무 것이가 협조를 해야 되고 이래야 되는데 이걸 딱 중단해 놓고, 화약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 한 가지인데 중단해서 될 건가? 미련하고 어리석지요. 하나님은 우리 머리털까지 세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까지 당신이 섭리하시고 계십니다.
그럴 때에 가 가지고 네가 반성해서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여러 가지로 갈라지고 찢어지고 이러거 들랑 네가 들어서 수습하려고 하면 점점 재를 더 저지르니까 아예 손 딱 떼버리고 근본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하면 참 남의 일에는 마치 식은 죽 먹듯이 쉽게 그렇게 말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하지.
남의 일은 너무 쉽게 보고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니요. 다 경험한 사람들이 그래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그럴 때에 딱 내놓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근본 그것을 찾습니다. 잘못된 것을 찾소. 나는 이 일을 수습하지 안하고 잘못된 것 그것 찾습니다. 그것 찾아 가지고 그것이 되어지니까 생각도 없이 그 일이 당장에 복이 되어 버립니다. 누가 했는지 모르지. 하나님이 했지.
인간이 심리계를 당신이 주권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마음의 세계를 당신이 주권하고 계십니다. 원수같이 칼을 가진 자가 당장 반성되어 가지고 아, 목을 안고 울면서 협조해 달라 합니다. 칼을 들었던 에서가 당장에 야곱이 회개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그 마음을 돌이키고 나니까 400명 군대를 여러 수십년 연성해 가지고 야곱 죽이려고 연성했던 에서가 아, 당장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니까 그만 그 시간에 획 변해져서 야곱이 말하니까 내가 야곱의 심부름꾼이 되겠고 야곱의 앞잡이가 되겠고 수종을 들겠다고.
이렇게 변해지지 안했습니까? 여러분들, 인간의 활동계도 당신이 주권. 심리계도 당신이 주권. 모든 생사계도 당신이 주권. 공간계도 당신이 주권. 이 시간도 당신이 주권하요. 아무도 침노 못합니다. 아무도 침범 못합니다. 이걸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걸 믿고 사는 자에게 이런 기적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이들에게는 홍수의 큰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망령을 부렸기 때문에 그때 큰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오후의 제목이라고 말하면 삼성입니다. 세번 반성하라. 시발에 반성하고 형통에서 반성하고, 지장이 시작되걸들랑 빨리 반성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특수인인 기독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