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큰 믿음

 

1981년 7월 19일 주후

 

본문 : 마6:30-31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14:31-32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전에 예수교는 믿음의 도라 예수님도 믿음으로 온전한 승리를 이루었고  목적을 달성했고 우리도 믿음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누구시옴을 바로 깨닫고 바로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했습니다. 순종할  때에 아버지가 정하신 그 절정기를 향하여 갈 때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서 후퇴하지 아니하고 그 어려움에서 아버지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끝을 끝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씨가 된 우리는 주님과 같이 이제는 주님이 승리하시고  모든 것을 가졌으니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바로 깨닫고 그러므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되 주님이 그 사건 사건에 종말 종결을 지우는  절정기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당신이 정하신 대로 거기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후퇴하지 아니하고 순종으로 그 절정만 끝내면  주님의 온전과 같은 온전을 우리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남의 복음으로는 잘 듣습니다. 이 복음을 구경은 잘 합니다.

제가 현재 행하여야 될 그런 것이 아닌, 자기에게 너무 거리가 먼 그런 신앙의  도를 구경은 잘 하고 보기 좋다 아름답다 귀하다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런 도를 가지고 곧잘 정죄도 하고 판단도 하면서 자기는  이 도를 행하여야 할 것으로 책임을 가지고 받지 않는 통에 사람들은 강퍅해지고  완고해지고 헛되이 낙관하게 되고 방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전에 말씀하실 때에 주님이 의식주에 대해서 신앙이 적은 것을 꾸중하셨고 또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 예수님을 향하여 가다가 바람과 물결을 보고 무서워서  빠져 들어가면서 호소할 때에 주님이 건지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라고 꾸중을  하셨고, 또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다가 쫓아내지 못하는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을 꾸중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알려 주는 다 특별 계시의 기관으로 이 형식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형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걸어갈 구원의  길을 잘 배워야 합니다.

'믿음이 적다' 말은 믿음을 시작했다가 믿음이 중단되는 것을 가리켜서 적다고  말씀하고, 또 믿음의 구비 요소가 다 구비해서 순종하지 못하고 부분은 순종하고  또 순종하지 안하는 그 부분이 있을 때에 그런 것도 다 적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이 의식주라는 이 문제가 믿음이 어릴 때에는 얼마나 중한  양을 차지하고 있느냐 하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의식주와 하나님과 동등으로 상대할 만큼 그만큼 믿음 어린 사람들에게는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의식주라 그렇게 말씀해서 두 주인을 말할 때에 하나는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는 의식주를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의식주라는 이 문제가 중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의식주에 대해서 실패한 사람은 신앙에 대해서도 대개는 실패자이기  쉽습니다. 그런고로 이 의식주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지 못하면 그 사람은  참 바람에 밀려가는 배와 같이 걷잡을 수가 없는 정함이 없는 인격과 생애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잘 알고 그러면 그  다음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또 그러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가 되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모르는 데에서 다른 데에 눈을 기울이고 또 다른 것을 탐하고 두려워하고  찾고 이래 하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바로 알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외에 다른 데 소망을 두지 않는 것이 필연한 일이요, 또 이렇게 되면 다른 것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한다면 그의 인도 외에는 지도 받을 데가 아무 데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악령이 우리에게  어두움으로 가리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양성원에서도  제목을 내어 가지고 전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나님의  성질은 어떠며, 하나님의 능력은 어떠며, 하나님의 존재는 어찌되며, 하나님의  목적은 어떠며, 역사는 어떠하며, 그 분의 본질과 본성은 어떠하며, 그 분의  심사는 경영은 어떠한가? 그런데 대해서 연구하라고 과제를 내 줘 가지고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자기가 깨닫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을 맺지 말고  또 연구하면 좀 더 알아지고 또 연구하면 좀 더 알아지고 연구할수록  알아집니다.

(녹음기 치워 버려요 모든 교역자들 녹음기 치워. 녹음기 떡 대놓고 저는 엉뚱한  짓하고 그러면 못써요. 그것 안돼요. 녹음기 우상 버리라고. 실은 필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의 능력이 와서 변화 받아 버려요.

변화돼야 돼요. 변화 받아야 됩니다. 필기가 무슨 필요가 있소 또 녹음기는  더욱이 그런 외식이 어디 있소. 이 말씀 증거할 때에 이 말씀과 능력과 영감이  갈 때에 여기서 변화 받아야 됩니다. 이 말씀대로의 사람이 돼 버려요 사람 돼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다른 노력할 게 뭐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 것을 자기가 어디까지 알았다고 해도 이만큼  알았으면 다 알았지 하는 그 사람은 강퍅한 사람이요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데 우리가 유한한 것이 어떻게 다 알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도 아는데에 전능이라 하지만 전능의 그 능력을 아는  정도는 천명이면 천명 다 다릅니다. 만 명이면 만 명이 다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말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가 아는 지식에 대해서도 느낌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충분히 알도록 하나님은 모든 것이 없는 가운데에 홀로 계신  하나님이시오, 또 그 분이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크고 작은 것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오늘 과학자들이 엿새 동안에 만든 것 중에 원자 하나 그걸 지금 눈을 떠서  보고 난 다음에 야단을 지기도 떠들어대면서 과학 만능이라고 날뛰는 것이  너무도 가증스럽고 너무도 어리석고 우습습니다. 엿새 동안 만든 그 가운데에 한  요소인데, 육천년이나 지난 오늘 그것을 한 번 눈 떠보고 난 다음에 '햐! 이게  있다' 있는 것 제가 발견한 것이 만능이면 만든 자는 어떻게 하고, 과학 만능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 자는 그 과학으로 영원히 망합니다. 내 말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이요. 영원히 망합니다. 또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은 이  분이 만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했습니다. 세상도 이 분이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이 지금도 영원도 그 분의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버러지 한 마리 나고  죽는 것도 그분이 주권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권리가 없어요. 그분 혼자의  권리대로 하고 있어.

또 무슨 돌변적인 일이 생기는 줄 압니까? 영원 전에 딱 설계해서 계획한 그  예정 그대로 한 순서 한 순서 전개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정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가감을 하는 줄 압니까?  그 분 혼자의 능력으로 이루시는데, 만들어 놓으시고 이것을 사용해서 이루기도  하고 저것을 사용해 이루게도 하시고 당신이 사용만 하시는 것이지, 제가 이용  안 되려면 이용 안 될 수 있습니까?  주권자요 예정자시오 창조자시오 또 대주재십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모든 통치를  그 분이 대가리를 쥐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지극히 작은 것도 그 분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가 하나님을 아무리 욕하며 나한테  달려들어도 그것이 사랑하시는 주님이 그렇게 말하게 하는 것이고 주님이 그렇게  그 사람 만들어 냈고, 그 사람에게 기운을 줬고 그런 말하게 하시고 나한테  대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너머 주님이 그를 주권 하셔 가지고 그렇게 섭리하셔서 나한테  하는 것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의지하며  어떻게 순종하며 어떻게 그 분을 평가하고 숭배하는 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말로 말하면 시험이요, 다른 말로 말하면 당신이 나와의 영원히  결합을 가지고자 하시는 사랑의 역사요, 그것이 나로 하여금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울 때에 다른 것들이 시기하지 못하고 질투하지 못하고 유익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분을 바라보고 이 분을 소망한다 말입니다. 이 분이 나에게 모든  것을 잘해 주실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뭐 시대가 어찌되면 시대도 나에게 좋게  못해 주고 사회도 국가도 이웃도 부모도 형제도 나도 만물도 당신이 해 주실  때에 그 분이 이것저것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니 그것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때에 은혜의 기구는 되고 은혜의 도구는 될지언정 내게 은혜를 베푸는 은혜에  주인공은 아닙니다.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나아갈 때에 어떤 것이 어떻다 할지라도 이  분만을 의지하고 이 분을 든든히 의지하고 어떤 강한 대적이 와도 그 대적보다  강하신 주님이 나를 지키시니 그것이 나를 어떻게 하리요 할 때에 주님은 당신을  인정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당신을 당신으로 대우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라보는  것이고 그것이 의지하는 것이고, 이렇게 바라고 의지하면서, 당신이 문서로  나에게 인도하시는 것도 있고 섭리로 인도하시는 것도 영감으로 인도하시는 것도  있는데 그 인도를 순종할 때에 수월해도 순종하고 어려워도 순종하고 '순종하라'  할 때에 천하가 막아도 의심 없이 막혀지리라 생각지 아니하고 주님이 나를  도우시니 순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순종으로 끝을 내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주에 대해서 이것이 중대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제일  초급 신자에게는 이것이 중대한 문제로 보이지만 장성한 신자에게는 이것은  그렇게 중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보다 중대한 문제 둘이 남아 있습니다.

제일 어린 입학생 때에 중대한 문제가 되는 이 의식주에 대해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잘해 주시리라 바라봅니다. 잘해 주시리라 잘해  주시리라, 의식주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잘해 주시리라 하는 것을  바랍니다.

또 의식주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해도 하나님을 든든히 의지합니다. 내 눈에  보일 때에 이렇게 저렇게 되어져도 하나님을 든든히 의지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책임지리라 하는 요 의지를 가집니다.

그러면서 이 의식주에 대해서 당신에게 순종만 합니다. 의식주에 대해서 '너  이런 이런 종류의 의식주를 줄까? 저런 종류의 의식주를 줄까?''아닙니다. 내가  전권을 주님에게 맡기겠습니다. 뭘 주든지 나는 내게 뭣이 좋을지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 주실 때에 주시는 종류도 당신이 선택해 주십시오. 내가 한 시간 뒤도  모르고 초지장만을 판다 해도 그 밑을 모르는 내가 뭘 알겠습니까? 당신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에 종류를 나한테 물을 것이 아니라  그것도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것도 당신을 의지합니다. 주시면 주시는 대로 나는  받을 것뿐입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할 것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아!  그래요? 아! 아닙니다. 나는 밥을 주십시오. 아! 아닙니다. 나는 돈을 주십시오.

제 생각대로 종류를 정해가지고서 이걸 주십시오. 저걸 주십시오. 하는데  하나님은 거기에 따라서 응할 수가 없습니다. 왜? 당신이 교만해서 저자세가  되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종류를  선택한 것이 과연 나에게 유익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오, 주마' 하실 것이요.

그러나 내가 선택하는 것은 오늘에 좋다는 것이 내일에 나쁠 수도 있고 나쁘다는  것이 나에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정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종류의 선택권을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종류를 참 황소의 뒷발로 쥐를 잡았다는 말 같이 내가 종류를 선택할  때에 하나 옳게 선택했다 할지라도 내가 선택하는 종류를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면 나는 그 종류 선택은 내가 모든 걸 도맡아 놓고 할 사람이 될 터이니까  마지막에는 그 종류를 알지도 못하는 게 제가 선택해 놓으면 멸망할 그 종류를  마귀가 선택을 할 때에 그걸 선택하면 어찌 됩니까?  그런고로 하나님을 우리가 바로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상이점이  있어 가지고 의식주에 여러 가지 상이점, 마찰점이 있어서 번민 고통 되는 것이  제가 믿음이 없어 지옥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의식주에 대해서 종류적으로 하나님에게 전권을 맡겨야 됩니다. '이걸  줄까 저걸 줄까' '아닙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아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책임지셨으니 나는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당신이 책임자 아닙니까? 나는  당신만 바라봅니다. 무엇이든지 나에게 좋은 걸 주십시오.' 이것이 종류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를 줘도 '아! 이걸 주십니까? 이거는 안됐는데' 하는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 이걸 주십니까? 나는 몰라도 분명히 좋은 걸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갑자기 많은 의식주를 줬다가, 갑자기 아무 것도 없어 지금 먹지 못하는 감옥  속에 들어서 떡 한 개도 먹지를 못하는,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면 그것도  그 의식주에게 주님이 책임졌습니다.

주여! 나 혼자 쓰면 아마도 요렇게 배고픈 요것을 찾지는 않을 터인데 당신에게  맡겨 놓으니까 당신이 요렇게 배고픈 요것을, 나에게 요때는 요것이 내  의식주로서 요것이 가장 좋기 때문에 주시니까, 감사합니다. 자기 주관과 거리가  멀 때에 더 감사하고 탄복하는 것이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알아  들려집니까?  종류도 당신에게 내가 다 맡깁니다. 나는 당신만 바라봅니다. 종류면도 당신만  바라봅니다. 당신만 의지합니다. 당신에게만 순종합니다. 큰 것 줘도 '예,  감사합니다.'하고 받고, 작은 것 줘도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바라고 있던 것이  없어져도 아! 이게 의식주에 대해서 좋습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받고 나는  종류에 대해서 당신에게 전권을 맡깁니다.

 종류뿐만 아니라 그 양에 있어서도 당신에게 전권을 맡깁니다.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양이 많든지 적든지 없든지 많은 게 갑자기 없어지든지 적은 것이  갑자기 많아지든지 양도 당신에게 전적 맡겨 놓고 당신만 바라봅니다.

또 그 질도 이런 질의 것을 저런 질의 것을 아주 까다로운 질의 것을 순한 질의  것을 험한 질의 것을 아주 고귀한 질의 것을 어떤 질의 것을 주든지 질도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만 바라봅니다. 정말로 그러나? 아주 험악한 그  의식주에 질적으로 아주 험한 것을 줍니다. 상이 찡그려집니다. '왜 좀  불만스럽나? 네 마음에 좀 안 됐나?' '아닙니다.' '왜 그러면 상이 찡그러지나  내가 선택한 것과 네가 선택한 것이 다른 것 아닌가? 나한테 전권을 맡기고 내  사랑을 믿고 정말로 나만 바라보느냐? 좀 이상한데' '아닙니다. 내가 회개를  합니다. 질적으로 어떤 것을 줘도, 아! 감사합니다.' '뭐이 감사하느냐?'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보기에는 이거 악질이고 나쁜 질이고 저질인데 이것이 나에게  좋기 때문에 당신이 주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 내가 선택하면 이거는 선택하지  않을 터인데 전지하신 당신이, 생명까지 나를 사랑함으로 버리는 당신이 이것을  아시고 좋기 때문에 당신이 선택해 줬지 나 혼자만 줬다면 이런 것을 피하지  이것을 선택할 리가 있겠습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그러면 양과 질과 종류를 나한테 전적 맡겼으면 그러면 그것을 언제 줄까?'  '아닙니다. 시기도 당신에게 맡깁니다. 나는 모릅니다. 오늘 가난이 좋은지  가난이 내일 좋은지 부자가 오늘 좋은지 부자가 내일 좋은지 나는 모릅니다.

언제 없어져야 될지도 모르고 언제 있어져야 될지도 나는 모릅니다. 많아지고  적어지는 것도 나는 모릅니다. 그 시기도 당신이 잘 압니다. 나는 당신에게  맡깁니다.'  그래 죽는 날까지 약속해 놓고 안 줍니다. '아브라함아! 어떠냐? 시기가 다  지나가지 않느냐?' '아닙니다. 시기 그 때도 당신에게 맡겼습니다. 전적  맡겼습니다. 죽는 날까지 안 줘도 죽기 전에 주는 것보다 죽고 난 다음에 주는  것이 좋기 때문에 그런 줄 나는 믿습니다. 당신을 전적 믿습니다. 바라봅니다.

의지합니다. 순종합니다.' 그래! 죽는 날까지 하나님이 안 줬습니까. 안  줬으니까 아브라함은 영원무궁 불변의 진동치 아니할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구나! 진동될 걸로 안 주시는 것 보니까 준다 했는데 안 주시는 것 보니  진동되지 아니할 가나안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요. 아브라함이 보이는 가나안을 그것을 자기 주관으로 그것을 끝맺지  안하고 바라봤기 때문에 무궁한 하늘나라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그 모든 씨의  종류의 신앙의 백성들에게 다 소유가 상속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장소는 어디서 줄까 땅에서 줄까 미국에서 줄까 동양에서 줄까 여기서  줄까 어디서 줄까 하늘나라에서 줄까 세상에서 줄까?' '아닙니다. 장소도  주님에게 전적 맡기겠습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전권을  맡겼습니다.'  그저 당신이 시키는 대로 '지금은 네가 곤란을 당해라.' '예.' '지금은  풍부하게 많이 먹어라,' '예.' '지금 안 주니까 기다려라,' '예.' '죽을 때까지  안 주니까 기다려가,' '예.' '무궁세계에서 줄 터이니까 기다려라,' '예.'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이러기에 의식주에 대해서 사람들이 신앙을 가졌다가 끝까지 성공을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변동되어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우리의 욕망을 초월한 무한에 영원에 속한 그 보배로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실 때에 그때까지 우리가 조급하고 믿음 적고 경거망동해  가지고 얻지 못하는 이 일을 주님께서 탄식을 하시면서 의식주에 대한 믿음 적은  것을 꾸중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야, 믿음이 적은 자야! 이것은 세상만을 소망하고 있는 자들이  이런 것을 이렇게 생각하지 금생은 하루 밤 나그네요, 영원무궁을 바라보고 네  나라로 삼고 있는 영주처로 삼고 있는 너는 이렇게 소망하고 염려하고 하는 이런  짧은 믿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의식주에 대해서 작은 믿음을 버립시다. 적고 작은 믿음을  버리고 영원한 믿음, 큰 믿음, 장성한 믿음, 이 믿음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대해서 자유자제로 쓰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들고  세상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봐라! 봐라! 봐라! 얼마든지 보여 주면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많은 사람에게 빛이 될 수 있고, 많은 사람을 깨닫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석으로 변해서 하루도 믿지 못하고 한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십 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몇 십 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경거망동하니 이것을  붙들고 무한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겠소? 하기를.

우리는 조급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 조브랍고 이 작고 가는 이런 것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벗어나서 모든 감옥을 다 벗어나서 자유 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시간에도 자유, '야 시간이 간다 간다 시간이 간다 네 죽을 때가 다 와 간다  간다' '멀리 가라 영원히 나에게는 시간이 있다. 이놈아! 네가 어느 곳에  제한했다고서, 네가 이 시간 지나가면 너는 헛일이라 세상 떠나면 네게 시간  없다 이렇게 나를 위협을 주고 있느냐 나는 그런 감옥에 쌓여지지 않는다. 나는  영원한 시간이 있다. 육천 년 유사 세 유사의 그 기간을 나는 깔본다. 억만년도  나는 그 시간 안에 들어 살기 싫다, 억만년도 내 시간 아니다, 억 억 만년도 내  시간 아니다 내 시간은 영원이 내 시간이다' 하고 호령을 칠 때에 짧은 시간  가지고 이 시간 지나가면 너는 불쌍하다 하는 위협하는 그 모든 마귀는 우리에게  머리를 숙이고 도망을 칩니다.

 의식주에 대해서 종류적으로 양적으로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장소적으로  당신에게 전적 맡기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가끔 가다가 당신이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시험하시고 엿보시려고 어떤 것을 주면서 달콤한 걸 주면서, 내가  좋다고 웃는가 보려고 주시면서 웃으니 탄식이요, 또 뺏어 보자하고 뺏으니 또  우니까 탄식이요. 믿음의 사람들은 거기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웃을 수  있는 어떤 걸 줍니다. 줄 때에 주여 이거 안 줘도 괜찮습니다. 나는 전적 당신을  바라봅니다. 휘뜩 뺏들어 가지고 또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네. 이것도 저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금생 내세에 영원을 당신에게 맡기고 당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든든히 바라봅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든든히 바라봅니다. 든든히  의지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대로 그대로 받는 그 수동적으로 나는 영원히 살려 합니다.

이럴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을 붙들고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그 사람은  세상에 많은 것이 미혹 주지 못하고 적은 것이 미혹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혹  주지 못하고 없는 것이 미혹 주지 못하고, 있다가 없다가 적었다가 많았다가  하는 그것 밖에는 세상놀음 없습니다, 세상 세상 제까짓 게 해봤자 그 이상 더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거야 천만번 해봤자 믿음의 사람들은 눈도  꼼짝거리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가다가 바람과 물결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빠져 들어갈 때에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이거는 초인간의 생활이요, 초자연의 생활입니다. 크고 작고 믿는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주위와 환경에 피동되지 않는 것은 다 초인간적 생활이요  초자연적 생활입니다.

악령은 모든 사람을 붙들고 인간 생각대로 인간 욕심대로 인간 전통대로 인간  주장대로 잘나고 못나고 해봤자 모두가 다 인간 생각, 인본으로 움직이는데  적어도 성경 말씀대로 조그마한 일이라고 자기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서 움직이는 생활은 비록 그것이 가치로는 몇 닢 푼치 안 되는 일  사소한 일이라도 이거는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는 거와 꼭 같은 초자연의,  초인간의, 초인류의 생애입니다. 마귀를 밟고 초마귀의 성령으로 사는  생애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다, 친구가 백 명이 모여 가지고 지금 연회를 하는데  모두가 음식이 닥치니까 그만 썩 입에 들어갔는데 혼자 눈감고 기도하고  먹는다는 그것도 초인간이요, 거기 백 명 모인 데에 뛰어난 사람입니다.

초역사의 행위요. 무엇이든지 믿는 사람이 이렇게 환경 따라 움직이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움직이는 이 생활은 그것이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는  초자연의 걸음과 똑같은 걸음입니다. 그것과 조금도 다른 것 아닌 초인간 초자연  걸음이요.

이렇게 자기가 직장에서 모든 직원들이 다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데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 지키려고 하니 거기에 동참할 수 없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하니까 그들에게 좀 섭섭하고 이해 못하고 그들과 딱 들어붙는 그 사이가  성글어지고 하는 그 사소한 일에도 믿음을 지킬 때에 그것이 바다 위로 걸어가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초인간의 생활이요, 초멸망의 생활입니다. 그거는 다  멸망아래 저주아래에 있는, 다 사망과 멸망과 범죄의 수평선 아래에 있는,  악령과 악성의 그 수평아래에 있는 것인데 거기서 초월한 생명의 믿음의  생애입니다. 이 생애를 하다가 그만 바람 불고 물결 일어나는 것 보고 빠져  들어갈 때에 '믿음이 적은 자야' 하며 꾸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생활을 하다가 사람 바람이 불어오고 돈 바람이 불어오고 외로움의  바람이 불어오고 마찰의 바람이 불어오고 직장이 떨어지는 바람이 불어오고  신입하고 애착 받다가 배척을 당하는 바람이 불어오고 이런 박해 저런 박해의  바람이 불어오고 이런 협조가 다 떨어져서 고독의 바람이 불어오고,  (이 장로님도 녹음기는 들어도 이 장로님은 설교 안 듣습니다. 그러면  헛일입니다.)  이제 이렇게 바람과 물결이 일어날 때에 이것보고 인간이 빠져 들어가는 이것이  뭐이냐? 초자연의 생활에서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그때에 그걸 보고 야 저거  이거 안 맞추면 안 되겠다., 저 사람이 나하고 단 둘도 없는 친근한 사이인데 저  사람하고 성글어지면 안 되겠다., 저 상관을 거슬리면 안 되겠다., 이렇게  저렇게 다 바람이 두렵고, 바람은 운동이요 파동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모든 인간 움직임 세상 움직임 사회 정부 정치 경제 문화 이 모든  이런 움직임을 두려워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그게 두려워서 그걸 바라볼  때에 거기에 피동 될 때에 자기는 세상에 빠지고 그 신앙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주로 말미암은 것보다 큽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큰 것은 이겨 나가다가, 아주 큰 풍랑 불 때에는 물위로  걸어가다가 작은 풍랑에서는 걸어가지 못하고 싶으게 보다가 물에 빠져 들어가기  쉽습니다. 이것에 주님이 믿음이 중단된 것을 탄식했습니다.

자기가 이런 그 해상 행보는 잘 걸었지만, 저런 해상 행보는 걷지를 못하는 것,  이 욕심 바람도 바람아 불어라! 하고서 담대히 나아갔는데 조그마한 사소한  가정에서 아기자기 하는 그 인정적이 가정적인 그런 사소한 바람에서는 거기에  두려워서 거꾸러지고, 또 사소한 것은 이겼지만 큰 것은 거꾸러지고 하는 이런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 적다'고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이런 종류에는 신앙을 가졌지만 저런 종류에는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약점입니다. 우리는 바다 위로 걸어갈 때에 걸어가는 것은 내  힘으로 가는 것 아닙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이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서 걸으니까 됐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따라서 환경에 피동 되지 안하고 걸어가는 것은 주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이요 주를 의지하는 것이요, 주의 능력의 보호로 거기에 걷는  것이 거기만 걷는 게 아니라 그 걸음 걷는 그 요소 그대로 걸으면 그 걸음 걸을  때에 함께 하는 권능이 세상도 깨고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도 크고 작은  것 있습니다. 작은 데 걷게 한 것은 큰 데도 걷게 합니다. 지극히 적은 수  하나를 이기게 한 것은 온 우주도 세계도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식주에 든든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큰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많은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가 초자연의,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간 거와 같은 초인간적인 초인류적인 초사회적인  초통계적인 초감정적인 초정실적인 이런 걸음을 걷다가 공연히 그 바람보다 큰  하나님이 그 앞에 있는데 물결보다 큰 분이 앞에 있는데 바람과 물결을 지으신  분이 내 앞에 있는데 나아오라 했는데 바람과 물결이 나에게 필요 없을 때에는  당장 없애고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인데 염려 없이 걸으면 될 터인데  우리가 가다가 바람과 물결을 보고 두려워 빠져 들어가는 이것을, 이 믿음이  가다가 중단되고 끊어지는 이것을, 주님께서 탄식하시면서 우리에게  꾸중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야 네가 위에 바람을 보고 왜  의심하느냐? 몰아오는 풍랑을 보고 왜 의심하느냐? 네가 왜 이 위를 보고  의심하느냐? 시대의 운동을 보고 네가 왜 의심하느냐? 모든 인류의 물결을 보고  네가 왜 의심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여론을 보고 왜 의심하느냐? 하나님만  바라봐라! 의심하지 말라! 그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 명령대로 순종할  때에 그분이 너를 지키시는데 무엇이 너를 어떻게 한다고 네가 의심하고서 빠져  들어가느냐!' 말씀을 했습니다.

 그보다도 우리에게 제일 어려운 것 하나 있는 것은 귀신 쫓아내는 일입니다.

죄마다 귀신 붙지 않은 죄가 없습니다. 병마다 귀신 붙지 않은 병이 없습니다.

세상의 운동마다 귀신 붙지 않은 운동이 없습니다. 권세마다 귀신 붙지 않은  권세가 없습니다. 전부 그 종류 하나 하나에 둘이 붙어 있습니다. 귀신도 붙어  있고 조물주 하나님도 그때에 붙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영접하려면  하나님을 영접하고 거기에서 귀신을 영접하려면 귀신을 영접하고 우리는 이  기로에서 자유를 가지고 죽고 사는 것을 결정 지우는 것이 자기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부딪혀지는 현실마다 귀신이 붙어 있는데 귀신은 물리치고  현실에 동참하여 기다리시는 주님과 진리를 영접하고 귀신을 물리치고, 또 다음  현실이 오는 데 귀신 오고 사람 오고 친구 오고 운동 오고 돈 오고 유혹 오고  협박 오고 독침 오고 공산주의 오고 별것이 오는데 동시에 진리와 하나님이 같이  올 때에 '이 놈아 물러가라! 너는 내게 상관이 없다! 이 간부 같은 이 미혹자야!  물러가라! 주여! 당신만이 내게 상대자요, 나의 주시요! 나의 창조주시요! 내가  바라보는 자요 내가 의지하는 자요 나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한 때에 요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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