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방편

 

1986. 12. 11. 목새

 

본문:누가복음 2장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사람이 하나님에게 지음 받은 근본 위치는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도움과 위함을 받고 그다음에 모든 언행심사의 생활은 다 자기 아닌 다른 것을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사람이 타락하게 된 그 타락 생활이 어떤 것이 타락 생활인고 하니 이것이 정반대로 된 것이 타락 생활입니다. 처음에 말한, 받기는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받고 주기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주는 이것이 사람이 지음 받은 근본 정상이요 이것이 변질된 것은 정반대로 모든 피조물에게서 받고 하나님에게서는 받지도 주지도 아니하는 그 관계를 끊는 그것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변질된 이것이 사망입니다.

사람이 뭐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흐미한 것이나 똑똑한 것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면 전면이 다른 것에게서 도움을 입고 다른 것에서 받으려고 하는 그거는 전체가 사망입니다. 속도는 빠르든지 더디든지 그 결과는 다 사망이 됩니다.

그러기에, 타락 이후의 사람은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크다, 높다, 위대하다, 못났다 할 것 없이 전부의 생활은 다 접촉하는 거 자기가 아는 것마다 모든 피조물에게서 받으려고 하는 거, 유익을 보려고 하는 거, 그에게서 자기가 뭣인가, 그뭐 말을 표시할라면 받으려고 하는 거, 그것에게 내가 취득할라고 하는 거 그것이 전생활입니다. 뭐 석가모니도 그러하고 공자도 그러하고 마호메트도 그러하고 전부 다 모든 사람의 전 타락한 인류의 생활은 분석하면 다 그 생활이요 또 그 결말은 다 사망입니다.

하나님에게서는 한 분에게서만 받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에게서는 받지 안할라고 합니다. 받지 아니할려고 하나 실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다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서는 받지 아니할라고 하는 것이 인생 생애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것을 받아라 받아라’ 그렇게 아무리 해도 받지 안할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주는 것도 또 준 것도 ‘하나님에게 받은 것 아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것도 또 현재에 받는 것도 앞으로 받을 것도 하나님에게 받은 것 아니라고서 하는 것이 타락한 사람들의 전 사상입니다. 또 하나님에게 받을라고도 하지 안하고 안 받을라고 하는 것이 전인류의 사상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 난 다음의 영원 세계의 한 토막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다가 보인 일이 있으니 그것이 곧 홍포 입은 부자입니다. 그러면 홍포 입은 부자가 당한 그 일에 자기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풍성하게 누구보다도 풍성하게 받아서 누린 자이지마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도, 받을라고도, 받는 것도 하나도 다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부인하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는 자꾸 은혜를 베풀어서 주시려고 애를 쓰고 또 준 것을 깨닫게 할라고 애를 쓰고 이렇게 노력을 하지마는 부인했습니다.

이러니까 영원 무궁세계에서는 ‘그러면 네가 나한테는 받을라고도 하지 안하고 또 받은 것도 나한테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하니까 그러면 내것은 내가 다 너에게서 찾고 내것은 너에게 하나도 주지 않겠다. 나 없이 내것 없이 사는 것이 네 소원이고 그게 다 네 행복이고 네것 가지고서 네 힘으로 사는 것이 네 전생의 일생 동안 그것을 그래 했기 때문에 이제,’ 사후 그때에 금생에는, 우리가 금생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금생에 영원 무궁세계에서는 하나님의 것이 하나도 없이 사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때 그러면 그 불꽃 가운데서 고통하면서 물 한방울, 물 한방울 그걸 요구해서 해도 물 한방울의 요구도 응해주지 안하고 주지 안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이 물 한방울도 없는 곳이 그것이 영원 유황불 구렁텅이입니다.

그러기에 피조물이 자기 것으로만, 또 자기 힘으로, 피조물의 것으로만 이렇게 살라고 하는 자 영원 무궁세계에서 피조물의 것으로만 살지 하나님의 것은 하나도 없이 견디는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요 영원한 세계입니다.

또 땅위에서 자신이 자신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그 전부의 생활하는 그자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신만을 위하는 그런 생활을 하도록 자기는 전부 모든 존재와의 관계가 자기는 자기만을 위하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그런 일이 소원 성취가 돼 가지고서 영원한 세계에서는 전부, 땅위에서는 자체가 자체를 위하고 모든 존재로 자체를 위하는 자 되어지도록 할려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해도 하나님의 것을 남용해 가지고서 그렇게 했지마는 무궁세계는 그대로 옮겨 가 가지고 자신은 모든 피조물에게서 받을라고 취해서 뺏들라고만 이렇게 애를 쓰는 이런 자 되어 있는데 무궁세계 가서는 아무도 주는 이가 없습니다.

아무도, 여게서는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 세계에서 제가 불량을 지기고 남용하고 악용하고 이렇게 악하고 덤비니까 그 세상에서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모든 존재를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도록 이렇게 할려고 하는 순 악인데, 악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본위가 악인데, 순 악인데 그 악이 활동을 하고 악이 역사를 했지마는 무궁세계에서는 악이 악으로 할라고 해도 악의 소원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무궁세계입니다.

이러니까, 그것을 한 토막 보여서 나사로를 보고서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저 나사로를 보내 가지고서 나에게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이라도 찍어 가지고서 나를 좀 위하게 해 달라고 말했지마는, 그러니까 그 무궁세계 영원 세계 말이오.

안 믿는 사람은 유황불 구렁텅이의 그 무궁세계에서 영원히 사망하고, 사망한다는 건 뭐 죽어, 사망한다는 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망하는 거는 없어지는 게 아니고 자꾸 못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가리켜 말하고 영생하는 것은 그 정반대로 점점 좋아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 세계에서 거게서도 그 나사로를 자기 위하는 자, 심부름시켜 달라고서 그렇게 말했지만 그 소원과 요구가 하나도 이루어지지를 안했습니다.

또, 여게 오지 안한 자기 형제 다섯이 있었기 때문에 그 형제에게 사람 보내 가지고서 그와 같이 해 달라는 그 말 했지마는 그 요구도 다 거부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영원 유황불 구렁텅이의 그 세계에서는 자기는 모든 존재에게 대해 가지고 자꾸 이렇게 땅위에서 그 버릇, 버르징이를 만들어 놓은 것이 전부 그뿐이기 때문에 전부 모든 것을 자기가 이용해 가지고 자기 유익되도록 하려는 그것만 가득 찬 그런 인물이 돼 가지고 있는데 무궁세계에서는 거기 대해서 응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것이 인제 그런 것이 들어서 고통입니다.

제가 그전에 제 밑에 있던 청년들이 입대를 해 가지고서 군 생활을 하고 왔는데, 그 처음에 이제 모두 다 파병받지 안하고서 거기서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왔는데 어떤 사람은 바짝 말라 가지고서 그뭐 죽을 지경이라서 어짜든지 돈을 들여 가지고라도 좀 어떻게 해 줬으면 하고 뭐 와 가지고 죽자 살자 하고 부모에게 조아 댑니다. 빠짝 말라 다 죽어가요, 보니까.

그 입대하기 전에는 그 사람이 제일 잘났고 안하무인이고 이런데 갔다 왔는데 다 죽어가. 이거는 입대하기 전에는 아주 천물로 알았고 아주 못난 사람으로 이래 알았는데 갔다 왔는데 살이 뚱뚱하이 찌고 뭐 거게보다 더 평안하고 좋은 자리가 없다고서.

그걸 보고서 내가 말했어. ‘너는 잘됐다. 너는 이 세상에서 입대하기 전에 좋은 것을 취했고 너는 항상 홍포 입은 부자 모양으로 그래 살았고 이 사람은 나사로같이 살았기 때문에 거게가 아주 좋은 곳이라 살이 찌고 평안하고 그렇츰 좋은 데가 없다 그래 싶은데 네게 대해서는 지옥이 됐지?’ 대개 보면은 맏아들, 또 외동아들, 또 저거집에서 많은 자녀들 가운데서도 제일 우야우야로 자꾸 이래 좋도록만 얼러키워서 그뭐 어데든지 가 가지고서 저를 위할 줄 알고, 그러니까 아무 데 가도 이 세상에 나가면 섭섭한 곳뿐입니다.

섭섭한 곳뿐이오.

왜? 이제까지 버릇 들이기를 모든 것이 다 저를 위해 주고 자꾸 이런 것만 봤고 이런 것에만 잦아 가지고 자랐기 때문에 가 보니까 누가 자기를 위해 줍니까? 자기 위해 주는 것이 없으니 그게 자기는 가는 곳곳마다 지옥이요 고통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아예 이용당할 줄 알고 심부름할 줄 알고, 그러니까 형제간 중에서도 종노릇하지 부모에게도 종노릇하지 이웃에게도 종노릇했지 이용만 당하고자 하는 그 사람은 이 사회에 나가면은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고 모든 사람이 환영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근본 만듦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한 분에게만 받고 모든 피조물에게는 다 그를 위하고 주는 그런 자 되도록 만든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게 사람이오.

이런데 사람이 변질이 돼서, 받기는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받는데 하나님에게는 안 받을라 하고, 안 받은 줄 알고, 안 받았다 하고, 필요 없다 하고, 이렇게 하나님 한 분에게만 받아야 되는데 저는 일시라도 받지 안하면 못 살 그런 존재인데, 다른 것이 주지 않으면은 일 초도, 일 초 그런 거는 살지 모르지요. 일 초도 아마 살기가 어려울 것이오. 뭐 공기도 받아야 되지 오만 거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필요한 게 많은데 그런 것 다 하나님 한 분에게 받아 가지고서 사는데 하나님께 받는 것을 부인하고, 또 정반대로 모든 피조물, 접촉하는 피조물마다 ‘이게 내게 뭐이 필요하노?’ 만나면 ‘뭐이 필요하노?’ 이랬는데 나는 영어를 못 배웠는데 영어 배운 사람들은 그거 그뭐 그렇게 놀래지 안했을 터인데.

해방 후에 제가 차를 타고서, 그때는 거창서 여기 부산 올라 하면 사흘 걸리요.

요새는 뭐 참 고속 시대인데, 차를 타도 그래요, 또. 차 타고 오는데 온다고 해도 느려서, 속도가 느려서 그래요. 또 오면은 세 번 네 번 고장나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 거석하지 뭐 그대로 오는 차가 없었어요, 그때는.

이랬는데, 이 길에 오니까 그 패목이 쓰였는데 커단하게 쓰였는데 ‘어서 오십시오’ 그렇게 쓰였어. 그래서,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 물론 뭐 이웃에서 하지마는 사람들은 모두 참 호랑이가 개 보면 반가워하는 것처럼 전부 그런 반가움이지, 요새는 이도 그거 몰라요. 그런 수수께끼가 있어요. ‘안 만나면 섭섭하고 만나고 싶어서 자꾸 애를 쓰다가 만나면 죽여 버리는 게 뭐꼬?’ 그거 뭐입니까? 그거 뭐이라요? 그거 젊은 사람들은 몰라, 지금. 그거 무슨 수수께끼지요? 한번 알아 봐, 자기? 자, 여기 알아 봐. 아는 사람, 여기 자 삼십 이내 되는 사람 아는 사람 손 들어 봐. 삼십 이내 되는 사람 아는 사람? 몰라.

몰라 몰라. 자, 여 대답해 봐. 이, 이, 이라. 이거 어린 사람들은 몰라. 그때는 이가 뭐 어떻게 가득했는지 지금은 참 문화 거석으로 뭐 좋아졌습니다.

이래서, 이가 이런데 이놈 이는 이가 물어 쌓아니까 이 잡을라 하다가서, 이를 잡을라고 이래 찾아다녀도 암만 이래도 못 잡는다 말이오. 그라면 섭섭하다 만나면은 똑딱 죽여 버려. 이거 모양으로 모든 사람이 다 만나고자 해도 잡아먹을라고 말이지 그래 하는 것이지 뭘 상대방을 위해서 만나기를 원하는 그런 반가와하는 사람이 없어.

이랬는데, ‘어서 오십시오 그 이상한 말 해 놨다.’ 그래서 그거 조금 그걸 보고서 ‘이상하다. 저거 뭐일까?’ 이랬는데 그다음에 보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이게 쓰였어. 그 두 말을 합하니까 말이 돼져. 이래서 ‘이거 참 이거 미국 사람들이 오고 이라니까 이 세계가 다르구나. 소문 듣기에는 미국이 그렇게 다 신사국이라고 이렇게 말하더니마는’ 우리 나라는 ‘어서 오십시오’ 하면은 징그러운데 이거 인제 이 모양으로, 고기 잡으러 간 사람이 고기 만나니까 반가워서 여게 있다고 하나마 그 반가운 것이 잡아먹을라고 반가워하는 것이지 전부 이것뿐인데 그 나라에서, 그 나라도 ‘어서 오십시오’ 이러니까 정이 떨어진다 말이오. 이러다니마는 그다음 모퉁이에 가 보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이게 있어. ‘그러면 도와 주기 위해서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는 이러니까 이 나라가 참 아주 부강한 나라가 되겠고 이거 복받는 나라가 되겠다. 이거 참 성경대로의 나라다.’ 제가 그걸 보고서 깜짝 놀랬어요.

놀랬는데, 또 다른 사람 심부름을 시키다가서 한번 은행에 갔어요. 은행에 한번 갔는데 가니까 여기는 패목을 뭐 써서 모두 여게 저게 모두 세워 놨는데 쪼그매씩하게 여게 뭐 반뼘씩 되는 거 요런 거 하나 모두 패목을 세워 놨는데 모두 다 쓰이기를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게 쓰였어. 그래 그거 또 내가 그만 은행이 그만 별 은행으로 보이고 놀랬어요.

그래 가지고서 그거 내가 나와서 자랑하기를 ‘이 사람들 아, 은행에 가 봤나? 은행에 가 보니까 이런 문구가 쓰였더라. 세상에 이거 참 이제 살 세계를 만났다.

이거 미국 사람들이 오니까 이런가? 이거 해방 세계는 참 이 살 세계를 만났다.’ 이라면서 그래 기뻐하고 즐거워했어. 그런 것이 우리 나라서는 보지를 못했었어요. 그게 성경에 나온 겁니다.

이랬는데 변질된 사상은, 어떤 것이 변질된 사람이냐 하면은 변질된 사람은 한 분이신 근본이신 하나님에게, 받는 것은 그분 한 분에게만 받는 건데 하나님 한 분에게서는 받지 안할라고 하는 거, 안 받은 줄 아는 거, 받는 것을 부인하는 거 요것이 첫째로 인간에게 변질된 것입니다. 인간 변질이 첫째 변질이 요것이 변질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꾸 정상의 사람 영원 무궁에 영생을 할 수 있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존대를 받을 수 있고 모든 피조물들을 위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에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이런 존재가 되어지는 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일곱 가지 대속을 받은 것이 그것인데.

대속받은 것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 무슨 다른 데서는 받을라고 하지 않는 거, 또 받을 줄로 바라지 않는 거, 그러면 그분 한 분만 바라보고, 그분에게 받는 것을 뭐라 합니까? 받는데 우리가 뭐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고 뭣이든지 댓가를 내지 안하고 받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은혜입니다. 그러면 그분 한 분만 바라보고 그분의 은혜로만 살라 하는 그것이 이것이 본질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으로 돌아간 것이오.

또, 그다음에 하나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든 것을 만날 때에 ‘내가 이이에게 무엇을 도와 줄까, 무엇을 유익하게 할까?’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유익을 줄까?’ 얘기를 하면서도 ‘이 사람에게 무슨 무엇을 줄까?’ 자기로서 줄 수 있는 거 줘서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그것을 처음에 생각해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 말이 이거 성경에 나온 말이요 참 너무 놀랜 말이고 처음 보기 때문에, 나는 그때 차를 타고 오면서 처음에 ‘어서 오십시오’ 하는데 정이 떨어진다 말이오.

‘어서 오십시오’ 하는 데는 다른 데는 없고 보면 제가 그때 열 살 먹어서, 나는 어릴 때인데 모두 큰 사람들이 그때 일본 갈라고 와 가지고 구경하러 가자 해 가지고서 구경하러 이래 나가니까 아마 그때 여기 뭐꼬? 남포동도 아니고 그게 뭐꼬? 초장동도 아니고 그 사창굴 있는데 그 뭣이지? 완월동. 옳지, 완월동이라.

완월동인데, 완월동에 가니까 여게도 가니까 반갑게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하는데 그래 나는 학교 다니다가서 이라니까 어서 오십시오 하는데 ‘여기 참 친절한 곳이다’ 어서 오십시오 하니까. 그래 나는 위에 어른들만 따라가면서 이래 가만 보니까 그래 가더니만 뭐라고 뭐라고 쌓고 또 이래 가고 이라는데 그거 전부 그것을 가만히 따라가며 보니까 지금 가는 청년들이나 모든 남자들을 다 홀켜먹을라고 지금 어서오십시오 한다 말이오, 홀켜먹을라고.

거게밖에 ‘어서 오십시오’ 없는데 차를 타고 보니까 `어서 오십시오' 하니까 그만 정이 떨어진다 말이오. ‘여기 이거 뭐인고?’ 정이 떨어졌는데 그다음에 보니까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인제 오는 것을 반가워하는 것은 도와 주기 위해서 오는 걸 반가와하지 그 착취하기 위해서 반가워하지를 안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래서 놀랬는데 그게 인간의 원상으로,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회사를 경영해도 ‘내가 어떻게 하면은 이 백성 가운데서 요래 빼먹을까 조래 빼먹을까? 요렇게 착취할까 조렇게 착취할까? 어떻게 해서 요거 홀켜서, 요것들을 홀켜 가지고 내게 유익되도록 할까?’ 하는 그놈의 회사는 망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고걸 일일이 저주를 합니다. 그래서 그런 회사는 다 망해. 회사가 망하는 것은 벌써 회사의 정신이 틀렸다 말이오.

이거 나쁜 것도 많지마는 미국 구미 문화가 와 가지고서 아주 좋아진 것도 많습니다. 구미 문화가 온 것은 성경적인 것이 거게 다소 섞여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인데,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람 만나면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도와줄꼬?’ 같이 단둘이 만나서 얘기하면은 ‘내가 이 사람하고 만나서 무엇을 이 사람에게 다소라도 내가 유익을 주고, 주고 갈까?’ 위로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에게는 내가 전부 얻은 건 그분에게는 뭐 없는 게 없고 무진장으로 무한인데, 하나님의 곳간에는 무한히 들어 있는데 그분에게 얻는데 그분에게 얻는 데는 그분은 내가 얼마든지 달라 하면 주시고 나는 이것을 얼마든지 주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 하는 것을 보여줘서 뭐, 하나님에게 얼마든지 얻어 가지고서 이제 모두 다 손 벌리고 있는 구걸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다 이렇게 줘서 그들에게 빛이 되고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이것인데 이게 정상의 사람인데, 그렇지 안하고 비정상의 사람은 만나면 반가워하는 건 뭐이냐 하면은 반가워하는 것은 ‘이제 내가 하나 먹을 거 하나 생겼다.’ 이 사람에게는 얘기하면서도 ‘뭘 어떻게 해야 이 사람에게 유익 얻을까?’ 유익보는 것이 그게 이 장깸뽀이 하는 거 모양으로 그게 수단적이라서 ‘이 사람에게 내가 먼저 주고 그다음에 내가 받는 것이 수지가 맞겠나, 또 두 번 주고 세번째 내가 받는 것이 수지가 맞겠나, 내가 이런 것들은 다 주고 그 사람이 모르는 그 가치 보배로운 그걸 내가 빼오는 게 가치 있겠나?’ 전부 하나 착취하는 그런 방편으로서 반가워하고 그것만 계획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게 자살 행위입니다. 그게 자살 행위요. 하나님이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것이 그것은 사망법이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사망밖에 없다는 것은 자기가 이렇게 그 따지면은 전부 자살하는 그 행위 계획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예수님 생활은 이것이 생명 생활이오. 생명 생활, 예수님이 우리에게 뭐 사활로 다 주셨습니다. 사활로 주셨는데, 그분이 사활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시지마는 또 하나님의 위치, 하나님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것을 그분이 다 받았습니다.

이래서,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그 아들이라는 건 뭐입니까?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는 걸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는 나의 사랑하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라 말은 이거 내가 그에게 모조리 있는 것은 싹 다, 사랑은 주는 건데 모조리 있는 것을 다 주는 하나님이라.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가 가지고서 장막 서이를 짓고 여게서 하나는 예수님, 하나는 모세를, 하나는 엘리야를 이래 두기로 이렇게 하니까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 가지고 말하기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 이런고로 너희들은 저의말을 들으라.” 저를 따라서 저를 배우고 저를 본받고 저를 따라서 살아서 저와 같은 사람이 되어져라. 그말은 무슨 말이냐? 나는 창조주요 대주재이신데 내 모든 것을 내가 이에게 다 줄 수 있고 이는예수님은내 모든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자다.

그게 뭐이냐 하면은 “나의 사랑하는 자요, 또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 그말은, 기뻐하는 자라 말은 당신이 모든 걸 다 주는데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에 자꾸 뺏들라고 얻을라고 취할라고 하지 안하고 주는 자, 하나님에게만 받고 이 모든 것에게 주는 자 이 정상의 사람이 됐고 모든 이 타락한 멸망하는 멸망을 정상으로 완전히 돌릴 자가 됐기 때문에 기뻐한다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이게 정상인데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은 이것이 회복돼서 근본되는 이것이 정상의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온 것이기 때문에 그 외부적으로 간략하게 생각해서 우리는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받고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주는 사람 되는 거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면 또 말씀하시기를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전토나 다 손해본 자는 여러 배 백 배 준다” 손해 본 자는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거 가지고서 상대방을 도와서 주기는 쉽습니다. 주는 건 쉽지마는 뺏기고 견디는 것은 어렵습니다.

뺏기고, 내가 뺏기고 그 상대방을 위해서 견딘다는 것과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주는 것과,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주는 것이 어렵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억울하게 뺏기고 견디는 게 어렵습니까? 어떤 게 어렵습니까? 뺏기고 견디는 게 어렵습니까 내가 내것을 주는 것이 어렵습니까? 뺏기고 견디는 것은 적극성이오.

알겠습니까? 내가 주는 것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정상화되는 것인데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지금 이 성탄을 맞이하는데 성탄 맞이하는 요런 기회에서 인간의 정상을 한번 찾아 가지고서 자기가 연구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앞으로 좀 계속할 건데오늘 아침에는 그것을 기억합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원 정상으로 돌아가자!’ 정상으로 돌아가는 건 어떤 게 돌아가느냐? 하나님 한 분에게서만 알고 딴데서는 얻지 안해. 딴데는 얻을 데가 없어. 딴데는 얻으면 뒤에 후유증이 있고 그거 큰 빚이 지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아라”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아라” 그것이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어.

“너희들이 빚을 지되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아라”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너희들이 인인 관계에 대해서, 인인 관계에 대해서는 주는 것 외에는 하지 말아라 그말이오. 뭣이든지 네가 거기서 받지를 말아라. 그래 또 “주는 자가 복이 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이거 이 세상에 사망법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피조물에게 대해서는 뭐이든지 주고, 나무가 여기 하나 자랐는데 이 나무를 베어서 내가 이용하니까 이용합니까? 나무 베어서 이용하는 것이 그거 이용하는 것이 그 나무 한 개를 베어 가지고서 그것이 내가 ‘나무 한 개는 내가 덕을 봤다’ 하면은 그거 생명에 사망법이 돼 버리고 맙니다.

이제 한 개를 베어서 내가 가진 것은 이거 백 원짜리 하나를 베어 가지고 가지는 것은 이것은 내가 나를 보태 가지고서, 나를 보태 가지고서 이백 원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이걸 하나 받은 것은 이거 받아 가지고서 그거와 나와 합해 가지고 주기 위해서 하는 이것이지 만일 자기가 받아서 소모해 버렸으면 헛일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연탄 한 개를 태운다 할지라도 이 연탄 한 개 태우는 것이 이거 내가 연탄 안 태우면 내가 다른 것을 위해서 희생할 수 없는데 이거 하나 태워 하는 것은 나를 희생하는 협조물을 받아 가지고서 이거와 나와 합해 가지고서 이웃에게 주는 자 되어지는 요 결과가 맺어지지 안하면 그거는 전부 사망 행위입니다.

전부 사망 행위. 이거 조금 알아듣기가 어려운 말인데, 그건 사망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한 분에게만 얻고 모든 피조물에게는 어떤 것이라도, 자기가 만일 회사를 경영해도 내가 이 기관을 통해 가지고서 내라는 것을 이 모든 인간에게 다,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분산해서 내라는 것을 가루를 내 분산해서 이 가루를 다 뿌려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가루를 이래 먹고 유익을 보도록, 자기를, 그 회사에서 자기를 녹혀 가지고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 주도록 먹이기 위해서 하는 그 회사는 그게 바로 잘 됩니다. 그러나 이걸 회사라 하는 기관을 통해 가지고서 모든 사람을 다 긁어서 착취를 해서 내가 긁어서 이걸 내가 다 도식을 해야 되겠다 하고 했으면 그 회사는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정치가도 그렇고 모두가 다 그러합니다.

가정도 그래. 조그만한 가정에서도 이제 그 정상이 조그매 있으면 그 가정이 조금 돼지고 정상이 많으면 많이 되고 정상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부부라 하는 것도 타락한 사람이라도 그래도 그 인간의 정상성이 백분의 일이라도 있으면 고게 좀 희망이 있지마는 전부 이 타락성 그것만 있으면은 반드시 이혼이 될 것이요 가정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받기는 하나님 한 분에게서 받고 모든 피조물에게는 주는 것 이것이 정상 생활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요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다 회개를 합시다, 우리가. 다 우리가 함께 회개합시다. 하나님 한 분 외에서 딴데서 뭣이든지 유익을 볼라고 받을라고 하는 그런 것은 다 자살 행위기 때문에 그것을 만든다는 것이 일 없습니다. 그라고 모든 존재에게는 내가 뭐 어느 면으로써라도 결과적으로 도와 주는 것이 되지 안하면 그것도 영원히 사망하는 거고 영생은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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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596 세 가지 접촉의 중요성/ 마태복음 6장 24절/ 88012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06
2595 세 가지 전투/ 마태복음 13장 1절-9절/ 860525주전 선지자 2015.11.06
2594 세 가지 인도/ 출애굽기 13장 17절-22절/ 810403금야 선지자 2015.11.06
2593 세 가지 시험/ 마태복음 4장 1절-11절/ 860504주전 선지자 2015.11.06
2592 세 가지 시험/ 마태복음 4장 1절-11절/ 860504주후 선지자 2015.11.06
2591 세 가지 순종의 근거와 결과/ 요한복음 5장 5절-13절/ 820625금야 선지자 2015.11.06
2590 세 가지 생명/ 요한계시룩 3장 1 절-6절/ 1985. 1. 10.새벽 - 중복 선지자 2015.11.06
2589 세 가지 생명/ 요한계시룩 3장 1 절-6절/ 850110목새 선지자 2015.11.06
2588 세 가지 사망의 법/ 누가복음 2장 13절-14절/ 861214주후 선지자 2015.11.06
2587 세 가지 복음 운동/ 마태복음 28장 16절-20절/ 841028주새 선지자 2015.11.06
2586 세 가지 복/ 요한계시록 1장 3절 / 890811금야 선지자 2015.11.06
2585 세 가지 방편/ 누가복음 2장 14절/ 861212금새 선지자 2015.11.06
» 세 가지 방편/ 누가복음 2장 14절/ 861211목새 선지자 2015.11.06
2583 세 가지 방편/ 누가복음 2장 14절/ 861210수야 선지자 2015.11.06
2582 세 가지 방편/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841207금새 선지자 2015.11.06
2581 세 가지 받는 방편/ 히브리서 11장 6절/ 791113화새 선지자 2015.11.06
2580 세 가지 받는 방편/ 히브리서 11장 6절/ 791114수새 선지자 2015.11.06
2579 세 가지 믿음 만드는 일/ 로마서 1장 14절-17절/ 860304화새 선지자 2015.11.06
2578 세 가지 멸망/ 누가복음 2장 1절-14절/ 851229주전 선지자 2015.11.06
2577 세 가지 대속의 공로의 역사/ 누가복음 16장 1절-13절/ 820611금야 선지자 2015.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