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4:20
세 가지 대속의 공로의 역사
1982. 6. 11. 금야
본문:누가복음 16장 1절~13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비유는 실상만치 정확하지 못하지마는 실상과 비슷한 것을 들어서 알기 어려운 그 실상을 해명해 주는 것이 비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청지기 비유가 가르치는 이 교훈을 지키기는 심히 어렵습니다. 간단한 비유로 우리 기독교에 대한 폭넓고 세밀한 교리와 신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비유가 증거하고 있는 실상을 간단하게 들어서 해석하겠습니다.
여기 부자로 비유한 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주 하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청지기가 있는데 청지기는 부자의 집의 주인 대리자, 그 부자의 집에 모든 것을 책임맡은 총무를 청지기라 이렇게 세상에서 부릅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각각 주님이 하나님으로 사람 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까지 하신 주님의 대속을 자기의 공로로 받아가진 자는 다 자기와 자기의 것은 주님의 대속의 공로로 값주고 산 주님의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속받은 사람들은 자기와 자기의 모든 소유는 다 주님의 것이요 주님이 이 구속을 위해서 공로를 설정한 이 공로는 자기의 것이 다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대속의 공로가 자기 것 된 것은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 편에서 주님의 공로를 다 우리 것 삼아 주셨고 또 우리는 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공심판에서 우리를 손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이 건설구원면에서는 대속하신 공로를 자기의 공로로 삼을려고 하면 자기는 대속하신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된 사람도 있고 실상으로 조금 된 사람도 있고 많이 된 사람도 있고 다 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겠습니다.
주님의 대속의 공로가 이 건설구원인 자기 실생활에 있어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자기가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대속의 공로는 죄가 없는 공로요 완전 의로운 공로요 또 하나님과 화친의 결합이 된 공로입니다. 죄로 인한 저주와 사망의 것이 하나도 침노하지 못하는 공로입니다. 또 어디든지 자유할 수 있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어떤 축복과 은혜와 권세 위치라도 자유로 출입하고 자유로 갈 수 있습니다. 어디든지 우리는 자유할 수 있는 의의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격이 모자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그런 면은 없습니다.
자격은 훌륭합니다. 삐뚤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자격, 모든 것이 옳고 바르고 참된 자격, 또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이 자기와 결합되어 그 무한하심이 자기 것이 되고 그 무한하심이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믿는 사람이 수많게 있지마는,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기본구원은 똑 같지마는 건설구원은 죄로 인한 모든 원치 않는 저주 손해, 실패, 어두워지는 것, 모든 것 해되는 것, 수치되는 것 이 죄와 죄의 댓가로 오는 이런 것이 하나도 우리에게는 침노할 수 없도록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죄의 권세가 어느 정도 우리에게 침노를 못하는지, 비유컨대 백분지 일쯤 침노를 못하고 백분지 구십 구는 죄와 저주와 죄로 말미암은 모든 불행이 와서 침노를 하고 있는지, 혹은 죄와 죄의 댓가로 말미암아 오는 그런 모든 망하고 죽는 데 속한 이 불행에 속한 것이 하나도 침노를 못하는지 이것은 예수님의 사죄의 공로가 자기의 것이 얼마가 되어 있나 하는 그것 때문에 그와 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 같이 예수믿는 사람이지마는 죄의 세력이 어떤 사람에게는 전폭을 둘러싸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죄의 세력에서 호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세력이 그 사람을 한번 사로잡아 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가까이 오지도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의로운 것만이 받을 자격이 있고 통과할 자격이 있고 받을 자격이 있고, 온갖 권세, 지혜, 능력, 축복, 영광, 존귀, 온갖 받는 것 이 받는 자격, 또 자기가 통과하는 자격 그러면 이 두 가지 자격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지마는 하나도 없는 사람 있습니다. 의인은 그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야 됩니다. 안 듣지를 못합니다. 의인은 어디든지 통과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어떤 사람은 외국에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평생 갈려 해도 못 갑니다. 그거는 출국 입국 그 권세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거 모양으로 이 의는 하나님이 입혀 주신 완전한 의이기 때문에 이 의는 옳고 좋고 바른 것은 어떤 것이든지 다 받을 수 있는 실력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지혜도 온갖 하나님의 은총도 다 받을 실력을 가졌습니다. 그만 의라는 이 증명만 하나 가지면 하나님의 어떤 좋은 것이라도, 여기서 돈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비유컨대 돈 잔치하고 있습니다. 내가 썩 가서 ‘나도 그 돈을 주시오’ 하면 ‘네가 뭐인데 이 돈을 주겠느냐?’ 요새 뭐 패스포트라든가 이것 모양으로 척 내 놓습니다. ‘보시오.’ 의의 증명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거기 동참해서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의만 있으면. 또 어디든지 의만 있으면 통과를 합니다. 또 의가 있으면 피조물에게는 어떤 명령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혀 주신 의입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실천으로 통과한 그 자에게 주신 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완전 통행한 그 증명서가 있기 때문에 어디든지 좋은 데는 다 참가할 수 있고 어디든지 자유로 통과할 수가 있는 것이 의입니다.
이런데 우리 믿는 사람 가운데는 이 권세가 참 천층 만층도 더 됩니다. 저 사람은 그 축복에 참가를 하는데 나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온갖 신령한 세계, 온갖 난제의 어려움 그런 것도 있는가 없는가 상관없이 자유합니다.
어디든지 자유합니다. 이렇지마는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자유를 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이 그를 통해서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적의 은혜도 사도바울의 손수건을 가지고, 바울의 손수건을 다른 사람이 들고, 바울은 강단에 섰고 다른 사람이 바울의 손수건만 들고 철렁철렁 철렁철렁 이래 흔들고 다녀도 그때에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병이 다 나았습니다. 손수건 흔드는 그 근방에만 가도 마귀와 질병이 다 물러 갔습니다.
이는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이 잘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온갖 충만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 하나님과 연통되어 있는 그 면이 더 견고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저수지 연결은 되어 있다 할지라도 수도관이 작으면 물이 적게 나오고 수도관이 크면 물이 많이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성이 많이 된 사람 적게 된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온갖 능력의 역사가 많이 나타나고 적게 나타나고 또 그 사람이 온갖 해되는 것을 많이 물리치고 적게 물리치고 하나도 물리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온갖 축복과 온갖 경우를 무사히 통과하는 사람 하나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 다 같은 신자이지마는 참 천층 만층입니다.
다니엘은 그 앞에 어려운 사형 문제가 있었지마는 그에게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런 일이 다 통과됩니다. 이것이 그에게 의의, 의가 있는 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자기의 모든 불행 다른 사람의 불행, 자기에게 오는 죄 다른 사람에게 오는 죄 이것을 방어하는 그 실력이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방어하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불행을 방어하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방어하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방어하는 힘도 없고 모든 불행을 방어하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와 모든 불행을 방어하는 힘이 강합니다. 또 자기만 강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사람까지도 그에게 오는 불행도 이 사람이 방어하는 힘이 강해서 이 사람의 힘으로 방어를 합니다.
또 그 사람에게 오는 죄도 이 사람의 힘으로 그 죄를 방어합니다.
이러니까 죄와 모든 불행을 방어하는 힘이 한 사람이 천 사람 만 사람도 더 당할 수가 있고 만 사람이 있어도 죄를 끌어 들이기나 하고 모든 불행을 끌어 들이기나 하지 있는 불행을 물리치거나 있는 죄를 물리치거나 죄를 방어하는 그런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 있습니다.
죄를 방어하는 힘이 있고 없는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죄값으로 오는 모든 사망적인 불행을 방어하고 있는 것을 제거해 버리는 이 능력이 어디서 오느냐? 이는 예수님의 사죄의 권세입니다. 사죄의 권세가, 사죄의 권세가 그에게 많이 있으면 이것을 많이 방어하고 적게 있으면 적게 방어하고 하나도 없으면 하나도 방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죄의 공로가 자기 것이, 입으로는 주님의 사죄의 대속을 입었다고 아무리 말을 하지마는 실상은 입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실상을 입은 것만치 불행 모든 죄의 것을 방어하고 제거할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의는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완성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요구에 완전 응해서 만족케 하는 이 지성 지공법을 완전 복종으로 만족케 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갖 축복은 다 자기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그의 명령을 따라서 주시기로 이렇게 작정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법과 지공법을 완전히 순종해서 완수한 자에게 하나님의 온갖 은혜와 축복은 하나도 그이에게는 안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조건이 그리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의 그 법을 이행하는 그 댓가로 주기로, 이행하는 그 이행을 통해서 본인이 가질 수 있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계약을 선포해 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는 완전한 의입니다. 이 의가 자기 것이 된 자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가 있고 벌써 제것이 된 자입니다. 모든 것은 제가 제것이 되어 있는데 가질려면 가지고 안 가질려면 안 가지고 쓸려면 쓰고 자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충만은 제가 전부 다라도 자기가 가질 수 있도록 벌써 그 시험을 통과해 놨다 그거요. 이것이 우리에게 입혀 주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이 의를 우리가 입었다고 하면서도 실은 하나님의 충만한 것에 대해서는 털끝만치도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의 권리도 없습니다. 말로는 아무리 말하지마는 하나님의 그 충만한 것이 자기 것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권리가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의 참가할, 좋은 것을 자기가 얼마든지 자유로 취할 수 있는 그런 취득의 권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어떤 그 금지 구역이라도, 어떤 금지 구역이라도 이 의를 가진 자는 어디든지 자유로 출입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지성법과 지공법에 완전 순종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유를 줬는고로 그에게는 제한이 없습니다. 금지 지역도 없고 제한도 없고, ‘여기는, 산 발치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오지 이방 사람들은 오면 다 죽는다.’ 제한된 경계가 있습니다. ‘산중턱에는 아론만 오지 일반 백성들은 못 온다.’ 또 금지가 되어 있습니다. ‘이 산만당에는 모세만 올라오지 다른 사람은 못 올라온다’ 또 금지 구역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까이 오는 이것은 모세도 갈 수 없도록 금지 구역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 모양으로 무한한 금지 지역이 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에 금지 지역을 하나 통과하고 둘 통과하고 열 통과하고 백을 통과하고 모든 금지 지역을 다 자유로 통과합니다. 어디든지 다 다닙니다. 그것은 의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의는 우리의 것입니다. 대속의 의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조그만한 금지 지역도 통과를 못 합니다. 자유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주님과 동행하는데 자기는 주님을 보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데 자기는 성신의 감화의 증거의 말씀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이는 어디 박혔느냐? 이 의라는 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라는 증명이 없어서. 의인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모든 소유의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 그 자체의 무한하신 능력,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속성에서 그 속성적 무한의 은혜가 우리 구속받은 자들에게 무한하게 그 능력이 나타나도록 되어 가지고 있는데 그 능력이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자기는 받지를 못합니다. 자기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생동안 해도 자기를 통해서는 하나님 그 자체의 속성적 무한의 그 능력이, 무한의 지혜가, 무한의 사랑이 자기를 통해서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과 이렇게 접선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화친의 이 대속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화친된 화친의 대속, 대속된 이 화친이 자기에게는 실상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는 기본적으로 건설적으로 역사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이 대속의 공로가 어디 가서 역사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공심판에 가 가지고 역사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하나님의 공심판에 가 가지고 이 공로가 거기서 역사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택한 자는 이 세 가지 공로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가 가지고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은 잡아닥칠 수가 없습니다.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가 가지고 이 공로가 역사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역사는 택한 자에게 대해서는 꼭 같습니다. 이 공로가 하나님의 심판에 가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에서 그 사람을 정죄 못합니다. 심판을 못합니다.
이러니까 그 심판을, 이 공로가 역사해서 그 심판을 다 이기고 승리자로, 영생 얻은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의인으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이렇게 영원히 그 심판을 통과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공로가 건설적으로는, 건설적으로는 어디서 이 공로가 역사를 하느냐? 그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사람의 현실 현실의 생활에서 이 건설 공로가 역사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 가지 공로가 그 사람의 세상 살이에서, 건설구원을 이루는 현실이라는 그 사람의 현실 생애에서 이 세 가지 공로가 역사를 합니다.
이 세 가지 공로는 우리의 세상 살이에 있어서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진 공로입니다. 이 세 가지 공로가 우리 세상 살이, 과거도 미래도 다 내게는 상관이 없는 세상 살이입니다. 과거도 내게는 상관 없는 세상 살이요 내 미래도 내게는 상관없는 세상 살이요 다만 이 세상 살이는 현재라는 그 현재만이 내게 상관을 가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현재만 내게 상관을 가지고 있는 세상인데 내 세상에 이 세 가지 공로는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지고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공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새새명의 이 공로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 가 가지고 지금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대해서는 상관을 못 합니다. 왜? 예수님의 공로가 그 심판 앞에 서서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는 죄없는 자로 통과하고 의인으로 통과하고 하나님과 화친된 만물의 영장으로 통과시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런데 이제 이 건설적으로는, 우리의 생활적으로는, 우리의 세상 살이적으로는 이 세 가지 공로가 우리 현실에서 역사를 합니다. 이 세 가지 공로가 우리 현실에서 역사를 합니다. 우리 현실에서 어떤 역사를 하는가? 죄를 없이 한, 죄를 없이 한 죄없는 역사를 합니다. 죄없는 역사를 우리 현실에서 하는 것이 사죄의 공로입니다.
죄없는 역사를 하다니? 죄없는 지극히 큰 능력, 죄를 멸한, 죄를 완전히 멸해서, 죄를 완전히 멸해서 죄를 없이 한, 죄를 완전히 멸한 죄를 없이 한, 죄를 완전히 멸하고 죄를 없이 한 이 지극히 큰 능력이 믿는 자의 현실에서, 이 능력이 믿는 자의 현실을 이 능력이 지킵니다. 이 능력이 와 가지고 지킬 때에 죄는 거기 범접을 못 합니다.
또 죄를 힘입어서, 죄로 인해서, 죄의 배경을 가지고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이랬습니다. 우리를 망치고 우리를 죽게 만드는, 사망하게 만드는 이것은, 우리를 망치는 세력 죽이는 세력 이 세력이 이것이 어찌 그리 세력 있는가?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이 죄의 세력을, 죄의 세력을 입어 가지고, (이거 참. 아이들 좀 단속해요. 참.) 뭐 이런 말 듣기 싫을 것이고 그저 일반 예수 믿듯이 그래 믿으면 편하고 좋지마는 실상이 안 이루어집니다. 길을 갈려고 길을 물으니까 어떤 사람에게 길을 물으니까 ‘아, 네 앞으로만 가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이러니까 ‘고맙습니다.’ 그 다음 사람에게 길을 물으니까 그 다음 사람이 있다가 ‘이렇게 가면 두 갈래길이 나오는데 그때는 처음 갈래길 나올 때는 오른쪽으로 가야 되고 그 다음에 갈래길 나올 때는 또 왼쪽으로 가야 되고 그 다음에 갈래길 나올 때는 이리도 저리도 말고 가운데로 가야 되고 그 다음에는 강이 있는데 강을 둘러 가면 안되고 강을 바로 꿰뚫어 건너가야 되고 …’ 복잡하니까 ‘여보, 왜 길을 그래 가르쳐요? 이전에 그분에게는 물으니까 앞으로 바로만 가라 그러면 된다 이렇게 한 마디로 쉽게 가르쳐 주던데 자기는 왜 이렇게 까다롭게, 그뭐 들어 봐야 다 잊어버려요. 뭐 길을 안내할려면 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그래 안내를 하지, 그분은 앞으로 가면 된다 하는데 자기는 뭐 이리 저리 꼭닥스럽게 그래 말하는가?’ 듣기는 까다롭지마는 그 사람 안내하는 대로 가르쳐 주는 대로 가면 제 목적지를 가게 될 것이고 앞으로만 가라고 했으면 그 사람이 가르친 그 가르침이 가짜배기라 하는 것을 걸어본 사람은 대번에 알 것이오. 가니까 두 갈래길이 떡 있습니다. ‘앞으로 가라? 앞으로 가면 두 갈래길이 있으니까 가운데로 이리 꿰뚫고 가라 말인가?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에 그 사람 길도 더럽게 가르쳤다.’ 대번 나올 것이라 말이오.
예수 믿는 것도 그렇소. 예수 믿기 쉬운 것을 말하면 그만 ‘좋다’ 하고 예수 믿는 것을 참으로 예수 믿는 이치를 바로 말해 주면 ‘아이고 까다롭다.’ (허 참, 여기 설교하는데 여기 신관에는 설교 소리보다 훨씬 더 많이 나는구만.
그것도 어릴 때부터 아이를 마귀 감화를 주지 말아요. 마귀에게 이용물 되면 커서도 자꾸 마귀 이용물 됩니다. 그래 까다로워도 들어야 돼요.) 예수님의 공로는 무한의 공로요. 이분의 사죄, 주님의 이 대속의 공로, 이 공로의 범위가 무한하다. 이 광대한 대속의 공로, 이 무한한 대속의 공로, 세밀한 대속의 공로, 지극히 능력있는 대속의 공로, 이래 쌓으면 그저 말쟁이 말로 ‘백지 저러는가 보다.’ 여러분들! 이 대속의 공로는 능력이 무한합니다. 범위도 무한합니다. 공간도 무한해요. 종류도 무한해요. 이 종류도 대속 저 종류도 대속 그 대속이 몇백 가지 종류의 대속이 됐는가? 무한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전지자이니까 이 전지자의 지성 지공법의 이 법이 얼마나 세밀하겠습니까? 나라에서 만든 법도 뭐 천도 넘고 만 가지도 넘는데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법이 얼마나 많겠습니까?그 모든 법에 사죄, 칭의, 그러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화친 이 공로는 지극히 큰 공로인데, 오늘 저녁에 이것만 배우십시오.
지극히 큰 공로인데 이 공로가 기본적으로는 우리를 떡 데리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딱 설 때에 이 공로가 우리를 위해서 역사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 법을 내고 저 법을 내 가지고 마구 정죄하려고 온갖 법을 다 들이대도 하나도 정죄할 수가 없어. 거기 대해서도 다 형을 치뤄서 해결됐고 이 요구 명령에 대해서도 다 순종해서 해결됐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정죄할려 해도 정죄할 수가 있어야지? 무엇이 모자라다고, 모자라다고 할 수가 있어야지?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는데 하나님과 친밀된 데에 뭐 틈난 것이 있어야지? 사이 빈 게 있어야지? 이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대해서는 손을 들지요.
이 지극히 큰 능력이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 심판대 가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일합니다. 이제 이 지극히 큰 능력이 기본적으로는 거기서 일하지마는 이 세상적으로는 어디서 일하느냐? 이 세상적으로는 이 대속의 지극히 큰 능력의 참 공로가 세상적으로는 우리 현실에서 이 공로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큰 공로가 우리 현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하고 있으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정죄를, 정죄를 깨트리는 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축복은, 이 축복은 털끝만치도 죄 있는 자는 이 축복은 받지 못한다.’ 내놓습니다. ‘자, 날 정죄할려면 정죄해 봐라. 죄 있는가 똑똑히 봐라.’ 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죄만 없으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완성을 한 완전 복종,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 만족을 일으킬 수 있는, 일으킨 그 공로가 있는 자라야, 행함이 있는 자라야 됩니다. ‘자,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이 인정을 받은 이 증명이 있으니까 봐라.’ 이렇게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에 오는 죄를, 우리 현실에 오는 죄를 누가 멸합니까? 오는 죄를 멸할 자 없습니다. 아무도 못 멸합니다. 예수님의 사죄의 공로의 능력이 오는 죄를 깨트려 버립니다. 또 우리에게 불행이 오는 것을 인간은 막지 못합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에 해충이 와서 긁어 먹었는데 포도나무 가지나 잎사귀는 그 해충을 쫓지 못해요. 물리치지 못해요. 찍해야 물리친다는 것이 포도나무 잎을 갉아 먹으니까 그것 물리친다는 것이 갉아 먹으니까 밑에서 진액이 막 올라와 가지고 그 해충을 대항해 싸우겠다고, 싸울래야 싸울 무기 아무것도 없어서 이 밑에서 진액이 마구 올라옵니다. 올라오니까 이놈은 좋다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쭐쭐쭐쭐 빨아 먹고 자꾸 커집니다. 그거 모양으로 인생은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망의 것을 방어 못합니다. 방어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어하려고 날뛰면 죄 그놈만 배부르게 합니다. 이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귀를 알아듣는지? 우리 현실에 부딪혀 오는 수많은 죄를 오는 대로 모조리 박살을 내서, 이 죄를 초전박살을 내 가지고, 이 죄를 박살을 내어서 죄가 와 가지고 부스러기도 안 남고 깨지고, 이러니까 우리에게 태산 같은 밀어 붙이는 모든 사망의 것이 오는데 이 사망이 올 때에는 이 죄를 제일 앞에 세운 대장으로, 아주 전대장 후대장, 전대장으로 이 죄를 떡 앞세워 놓고 사망이 오는데 오니까 이 죄를 마구 당장에 박살을 내 버립니다.
이러니까 그 뒤에 사망 이것은 뭐 말할 것이 없이 저절로 그만 박살이 돼 버립니다. 초전박살을 내 버립니다. 이 죄를 박살내고 모든 사망을 박살내는 것이 이것이 인간은 못합니다. 인생은 못해요. 인간은 절대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사죄의 이 무한한 능력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에게 오는 죄를 박살내지 못하고 오는 사망을 박살내지 못하고 그놈에게 삼키워져서 해를 받는 것은 어떻게 받느냐? 받는 이유는 그놈을 박살을 내고 나를 그놈에게서 구출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사죄의 이 공로의 능력이, 사죄의 능력이 내게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사죄의 능력이 없느냐, 나는 사죄 받은 사람인데? 사죄의 능력이 없는 이유는 네가 사죄가 네것 될려고 하면 너는 주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네가 주의 것이 안됐기 때문에, 너는 네것으로 있고 주님이 대속하신 공로도 네것이고, 네가 도둑놈이로구만. 너를 대속하신 주님의 공로와 공로를 설정하신 주님의 설정, 공로 설정한 주님과 그 공로와 그로 말미암아 대속한 그 대속을 네것 삼으면 너는 주님의 것이 되어야 되지 않느냐? 이런데 주님의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고 있고 말도 하지마는 실상의 사죄의 지극히 큰 능력은 실상적으로 자기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죄를 멸하지 못합니다. 죄를 멸하지 못합니다. 오는 사망을 절대 멸하지 못합니다. 죄와 사망을 방어하는 것은 주님의 사죄의 능력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죄의 능력이 왜 내게는 와서 역사하지 못하느냐? 역사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내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죄는 내것으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대속의 공로로 주의 것 된 것을 자기가 인정해서 자기가 주의 것 됐으면 주님의 공로는 자기 것 됐기 때문에, 자기가 주의 것 된 것만치 주의 공로는 자기 것 됩니다. 사죄하신 주의 것이 자기가 주의 것이 된 이것이 자기의 백분지 일이 주의 것 됐으면 주님의 사죄의 능력은 백분지 일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역사합니다. 오십이 주의 것 됐으면 오십이 역사합니다. 하나도 주의 것 안 됐으면 주의 사죄의 공로는 하나도 자기에게 와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사죄를 노래 부르고 칭의를 노래 부르고 화친의 새생명을 노래 불러도 실질적으로 이 능력이 와 가지고 자기 현실에서 죄를 멸하고 이 모든 저주와 사망을 멸하는 이 능력이 없는 것은 저는 제대로 있기 때문에, 제대로 있기 때문에 주의 공로가 기본적으로는 자기를 위해서 변명을 했지마는 이 세상적으로는 자기가 주의 공로를 받지 않으려 하니까 그 공로가 어떻게 와서 일할 수 있습니까? 공로를 물리치는데, ‘나는 그 능력 싫소. 나는 내것 내 할라요.’ 제것을 제것으로 가지는 것이 주의 공로를 싫다는 것이오.
주의 공로를 제것으로 삼는 것은 자기가 주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값을 내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청지기, 부자의 것을 자기가 대리 맡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 비유한 것은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주의 공로를 자기 것 삼았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소유인데, 이게 참 부자요. 나 하나가 주님의 소유 됐는데 나 하나라는 이거는 굉장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차지할 수 있는 이런 부자요. 이것을 내가 대리 맡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가 부자의 청지기라는 것은 다른 데 청지기 있는 거 아니라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값주고 산 그것을 나에게 보관시켜 놓은 그것을 내가 맡아 가지고 청지기 노릇 하는데 이것이 영계 것도 다 차지하고 물질계도 다 차지할 수 있는 지극히 큰 부자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가난 이것이 우리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모든 불행, 우리가 원하는 모든 행복, 영광, 존귀, 칭찬, 기쁨, 사랑, 평강, 풍부, 충만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을 이행하는 그 이행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도록 딱 그렇게 만들어 놨소. 저수지의 물이 수도관을 통해서만 자기 집에 오도록 딱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충만한 그 모든, 자체의 은혜 말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소유의 은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그 지킴을 통해 가지고 우리에게 오도록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도 달리는 못해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이 도는 이 법을 지키는, 그 법 지키는, 이 법 지키는, 그 법 지키는 그 지킴을 통해서 부자가 되고, 하나님의,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세를 주시는 이것은 그 법을 지킴을 통해서 권세가 오고, 이래서 한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충만한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이 지성과 지공법을 순종하는 이 순종을 통해서만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것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영원 불변의 제도로 딱 정해 놨기 때문에 이 법을 통과한 사람은 그게 전부 다요. 주님이 우리에게 칭의를 입혀 주신 것은 어떤 칭의냐? 하나님이 지성과 지공법을 완전히 통과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충만은 다 우리의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충만의 것을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을 우리가 취하려고 하니까 안 줄려 합니다. 주지 않으려 해요. 하나님의 온갖 충만을 내가 받을려 하니까, 욕심을 내고 마구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배짱도 부리고 활동도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온갖 축복을 자기가 받을려고 온갖 방편을 다 씁니다. 온갖 방편을 다 써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만한 아무 실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호리의 추호의 축복도 못 가져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우리는 그 법을 완전히 이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의는 때묻은 옷과 같다고 욥기에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법을 하나도 통과 못하니까 하나님의 온갖 충만은 하나도 받지 못하지. 하나도 받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이 지극히 큰 능력의 의가, 하나님의 충만을 그것을 나 혼자 하나님의 충만을 받을려고 철야기도도 해 봤고 금식기도도 해 봤고 산기도도 해 봤고 열심히 전도도 해 봤고 온갖 노력 다 해도 이 축복이 내게 안 옵니다. 달라 하니까 안 됩니다. ‘못 준다.’ ‘왜 못 주느냐?’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만족의, 만족의 통과자라야 받는 것인데 네가 이걸 통과했느냐?’ 못 받는다 그거요.
그럴 때에 예수님의 이 칭의의 능력이 그 자리에 역사해서 나를 대신해서 그 능력이 역사할 때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충만이 전부 내것 다 돼 버려. 그저 필요한 대로 돈이 필요하면 돈, 권세 필요하면 권세, 또 인간들의 환영이 필요하면 환영, 온갖 것이 다 우리에게 그 좋은 것이 오는 것은 하나님의 의의 능력만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갖다가 줄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받을려고 할 때에 안된다고 하는, 거부하는, 하나님의 충만을 내게 주지 않으려고 하는, 이 충만을 나에게 거부하는 이 거부는 예수님의 칭의의 공로의 능력만이 이것을 해결합니다. 이 문을 엽니다. 하나님의 충만의 이 곡간이 있는데 그 곡간 문을 딱 닫아 놓고 안 열어 줍니다. 기도해도 금식해도 산기도해도 아무리 활동을 해도 안 열어 줍니다. 어림도 없어. 예수님의 대속의 칭의의 공로가 척 오니까, 그 능력이 오니까 이 창고의 문이 확 열려 버려. 아무도 닫을 자가 없어.
그러기에 하나님의 온갖 축복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칭의의 능력이 우리에게 와서 이 능력만이 우리에게 갖다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곡간의 것을 옛것 새것 마음대로 내다 써. 이것을 가리켜서 천국의 서기관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은혜를 우리가 자유롭게 얼마든지 갖다가 쓸 수가 있는데, 쓸 권리가 벌써 되어 있고 벌써 우리의 것이 되어 있는데, 왜 우리가 원하는데 하나님의 온갖 원하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가? 세상 축복 천국 축복이 우리에게 오지를 않는가? 않는 그 이유는 우리가 의가 없이 받을려면 됩니까? 우리에게 줄려는 것을 의가 없는데 어떻게 받습니까? 조건이 의가 있는 자가 받는데 의가 없는 자가 받을 수가 없어.
왜, 주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칭의가 우리에게 있는데 왜 의가 없는가? 의는 논리적으로 있고 지식적으로 있고 말로 있고 실상으로 이 의가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무한한 은혜의 문을 활짝 열고 내 마음대로 내가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가 없기 때문에.
왜 우리에게 의가 없습니까? 말로 우리에게 주님의 칭의가 우리에게 있고, 지식으로 있고, 우리 마음으로 있고, 우리가 교리와 신조적으로 있고, 있는데 왜, 실지로 이 의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제것으로 가질 수 있도록 완전 의인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법을 하나 통과하면, 이 법 통하면 이거 가고 저 법 통과하면 저거 가고 이거 가고 이래 되는 이건데 이걸 통과를 통해서만 오지 달리는 못 온다 그말이오.
이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이 의를 입혀 준 것은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 만족을 이루어서 완성을 한 이 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를 통해서 주시마 한 것은 전부 우리 것 다 되어 가지고 있어. 다 되어 가지고 있는데 왜 이것이 실질적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도 되어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은 하나도 안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많이 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쓰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갖다 쓰고.
바울이 말하기를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 가난한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부요자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얼마든지 갖다 써. 이런데 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은혜가 내것이 안 되느냐? 나는 원하는데 왜 내것이 안 되느냐? 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율법을 통과한 의인에게만 주는 것인데 나는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안 오지. ‘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나는 의인이 됐는데’ 네가 의인 된 것은 지식으로만 됐고 말로만 됐지 실질적으로는 네가 의인이 안 됐디. 왜 실질적으로 의인이 안 됐습니까? 실질적으로 네가 주의 것이 안 됐기 때문에 주의 대속의 공로도 네것이 안 돼 가지고 있다. ‘값을 내고 사라’ 이래서 자기가 주의 것이 될 때에 이 의는 자기 것이 되고, 자기 것이 될 때에 이 의의 지극히 큰 능력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다 끌어서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남았는데, 이제 하나님의 소유 아니오. 하나님 자체의 능력,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오는 이 모든 능력, 하나님의 소유가 오는 거 아니고 하나님 자체에서 나오는 이 무한하신 능력 무한하신 지혜, 무한한 속성적인 이 모든 능력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지혜를 받을려고, 능력을 받을려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려고, 하나님의 속성대로의 성화의 그 능력을, 그 속성적의 생애를 우리가 하려고, 그 능력을 받을려고 암만 해도 요것은 하나님과 화친이 된, 하나님과 화친이 된 고 화친을 통해서만 요 능력은 그에게 나타납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친이 심판법적으로 된 것은 기본적으로 화친이 됐기 때문에 지옥을 면하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졌지만 세상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가 화친되는 것이 말로만 된 사람도 있고 지식으로만 된 사람도 있고 실질적으로 된 사람도 있고, 말로도 안된 사람도 있고 지식으로도 안된 사람도 있고 또 실질적으로 안된 사람도 있고 여러 층어리가 있습니다. 된 데도 조금 된 사람 많이 된 사람 이와 같이 차이있어, 하나님과 자기가 실상으로 화친된, 그 화친된 그 실상이 이루어진 것만치 이 화친의 지극히 큰 능력은 역사하기 때문에 화친이 된 것만치 된 고것을 통해서 하나님 본체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은 그에게 건너와서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하나님의 화친 이것도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화친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나를 댓가로 내놔야 됩니다. 내놔서, 내가 내것이 아니고 주의 것인 것을 말로 할 때에는 말로 이 공로가 역사하고, 지식으로 할 때에는 지식으로 역사하고, 실질적으로 실상으로 역사하는데, 실상으로 내가 주의 것인 것을 알고 실상으로, 실상으로 주의 것이 되어서 실상으로 주의 것으로 역사할 때에, 실상이 되어졌을 때에 실상은 와서 일합니다. 실상이 됐을 때에 실상이 내게 대해, 내게 와 역사하고, 실상으로 일할 때에 실상이 와서 내게 일해 가지고 이루어지는 이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대 가서 역사하고, 세상적으로는 우리 현실에 와 가지고 역사하는데, 기본적의 것은 우리가 상관없이 순전히 주님의 객관 단독 역사로 이것을 우리의 것을 삼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 주체성이 죽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할 수 없고 하나님의 객관 능력으로 이 공로를 우리 것을 삼아 심판대에서 변증하도록 해 가지고 이 심판을 면하게 역사했지마는, 중생된 우리들이 건설적으로 세상적으로는 이 공로가 지식으로 이 공로가 자기 공로가 되고 자기가 주의 것이 됐으면 지식적으로 돼 있고, 또 논리적으로 돼 가지고 있으면 논리적으로 돼 가지고 있고, 실상으로 돼 가지고 있으면 실상으로 돼 가지고 있고,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 대한 모든 이 사망의 세력과 죄의 세력은 사죄 능력만이 그것을 격멸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모든 축복과 하나님의 모든 그 축복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이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칭의의 공로로만, 지극히 큰 이 공로로만 일할 수 있는데 이 공로도 역연 지식적이면 지식적으로 와서 역사하고, 논리적이면 논리적으로 와서 역사하고, 실상적이면 실상적으로 와서 역사하는 이것만이 할 수 있지 우리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것 요것.
또 하나님 본체에서 나오는 그 속성적 능력 이것이 우리에게 오는 것도 하나님과 화친되어서 화친의 아들 된 것. 지식으로 아들, 화친의 아들이 된 것, 말로 화친의 아들 된 것, 실상으로 화친의 아들이 되어 실상으로 행동할 때에 그 실상의 공로는 또 실상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 청지기입니다.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허비했다 그 말은 이 공로로 대속했기 때문에 주의 것인데, 주의 것으로 주님 심부름으로 이것을 활용하지 않고 제것인 줄 알고 제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주의 것을 허비하고 낭비했다 그말이오. 제 마음대로 썼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오늘 저녁에 요 교리를 똑똑히 배우십시오. 요 교리, 요 교리는 아직까지, 아직까지 논리적으로 나타나 있고 또 지식적으로 나타나 있지, 지식적으로 문서에 나타나있고 또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말로 이와 같이 하고 있고 실상으로 한 요것은 천인만인이 각각 다 다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에 죄에 관한 거 우리는 할 권리 없는 것, 털끝만치도 없다는 것, 이것이 교리입니다. 사망을 우리는 털끝만치도 방어할 권리도 파괴할 권리도 없습니다. 죄를 멸할 권리도 없습니다. 죄를 방어할 권리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죄의 공로가 직접 와서 일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모든 은혜를 가로막는 담보 이 칭의의 능력이 와서 이것을 틔워야 됩니다. 하나님의 온갖 모든 것을 내가 문을 열어 놓고 내것을 삼아서 내것으로 얼마든지 필요한 가운데 쓸 수 있는 이것도 주님의 칭의의 공로가 와서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가 와 가지고 내게 역사해야 이 일이 되지, 주님의 공로가 내게 와 역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나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는 데에는 주님의 이 화친의 공로가 와 가지고 역사해야 되지 딴것은 안됩니다.
그러기에 이 세 가지 문제는 세 가지 공로가 실상으로 와 가지고 지극히 큰 능력으로 역사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 공로 없이 우리는 암만 해도 털끝만치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로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실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데는 지식적으로 가지는 이것도 좋지마는 이것 가지고도 미달, 말로 하는 것도 미달, 실상으로 주님의 공로가 내 공로 되는 데에는 내가 주의 것 되어지는 요것이 실상으로 되어지는 그 양만치 세 가지 공로는 우리에게 실상으로 와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요 전법을 가지고, 요 생명법을 가지고, 요 능력 받는 법을 가지고 나만 주의 것 되면 이 세 가지 종류의 모든 것은 당장에 나의 것이 된다. 내가 이 시간 당장에 주의 것 다 됐으면 주님의 능력은 내것 다 됐다. 됐다가 나를 도로 찾으면 주님의 이 지극히 큰 능력은 다시 돌아간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깨닫고 요 교리를 요것을 단단히 잡도록 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값을 내고 사지 않으면 안됩니다. 값은 안됩니다. 값이 없어도 값을 내고 사라 했습니다. 바꿀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만 이것 주의 것 다 되면 주의 공로 내것 됩니다. 주의 세 가지 공로가 내것 되면 세 가지 방면에는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