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1989. 8. 13.주일오전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23절∼26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기도할 때 내가 떠서 보니까 이 찬양대는 다 눈 뜨고 있네요. 그라면 안 돼요.

눈을 감고 기도를 해야 되지 모두 눈 뜨고 있는 것 그거 고쳐서 앞으로 기도하라  하면 다 눈 감고 정성되이 기도해야 됩니다.

 또 찬송하는 거는 인제 고속 시대가 돼서 어짜든지 빠르게 해서 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치 빠르게 찬송합니다. 빠른 거는 좋은데 그것도 은혜가 있어  가지고 영육이 하나가 됐을 때에 그렇게 돼지지 그러면 영은 근방에 생각지도  못하고 마음도 거게 찬송에 가담하지 않고 그저 소리만 가지고 떠들기 쉽습니다.

그러고 찬송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또 가사도 고칠  수 있습니다.

 요새는 보면 찬송의 유행이 나는 곡을 잘 몰라서 그리 됐는지 몰라도 그리  됐어도 그거 고쳐야 돼요. 곡도. 가사는 할 때에 정신도 못 차리게 무슨 말인지  뜻도 모르게 빴리 해 놓고 맨 끄트머리는 쭈욱 이래 뺍니다. 그 꼬랑댕이는  어떻게 길게 빼 재끼는지. 그게 뭐 찬송가 곡을 지을 때 그래 해 놨는지? 했으면  그거 고쳐야 돼요. 작곡한 사람이 잘못했어 그거.

 그러고 찬송하는 것이 경건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미치괭이 돌팔이들 뭐  이렇게 장난하면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안하고 경건미가 하나도 없어요. 정성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엄격미가 없어요.

아마 내가 이 말 하는 걸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번에 집회 때는 조금  그게 덜했는데 거게서 아마 병이 들어왔는지 오늘 아침에는 정신도 없어.

 그라고 또 요새 늘 보면 그래. 찬송 끄트머리 뭐 빼는 건 쭈욱 빼서 이거 뭐  얼마나 제 성대를 자랑하는지 쭉 빼서 우리는 따라 갈라면 끊고 난 다음에 한참  있으면 저거 인제 쭉 뺄 대로 다 빼고 그래 해 O집사님? 그게 원 본곡입니까?  그거 그전에도 곡이 그렇습니까? 그러면 곡 그거 고쳐야 돼요. 성악가들 저거  취미대로 이래 해 놓은 거 그거,  찬송은 제일 장점이 무슨 장점이 있느냐? 세상에 다른 곡은 어떤 곡이라도 그  곡은 하면은 유흥적 감정적 그런 흥미가 있습니다. 어떤 음악이든지. 그래도  찬송가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색입니다. 언제든지 흥미나 취미나 그런  건 없고 그저 아주 정성되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곡으로 작곡돼 가지고 있는  것이 찬송의 근본 작곡입니다. 아마 요새 그렇게 시설지겨 떠는 거는 중간에 고친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어요.

 찬송을 처음에 성신의 감화로 가사를 지은 그 작가들의 가사를 저거 마음대로  고쳐서 백칠십 장, 한 장 두 장 하는 백칠십 장 그 찬송에 아무 잘되지도 못하고  도로 뻐뚤어지게 고치면서 구백구십? 얼마? 구백구십 군데를 고쳤어. 고친 게  전부 저거 흥미대로 제 좋도록 하고 세상 인간 좋도록 고쳐 놨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으로 고친 거는 아니야.

 또 성경 번역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획 하나도 가감할 수 없는, 한 획이  피조물 우주보다 큰 것이 성경 말씀인데 이래 저래 마구 고쳐 놓으니까 성경의  권위성이나 성경의 엄격성이나 신중성은 다 없앴습니다. 아이들 노리개고 아이들  농담하고 노라리하는 그런 성경으로 고쳐서 그 성경을 뭐라더라, 뭐? 이야기  성경이라던가? 저거 마음대로 하지마는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인제 그 복수를  얼마나 할 줄 압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 성도에게 대한  하나님의 요구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성도들도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 아닙니까? 그전에는 찬송하면  좀 경건과 엄중성이 있고 엄격성이 있는데 이거는 혀에 발려서 뭐 아이들 새들  지꺼리는 것 모양으로 뭐 아무 경건성이나 엄격성이나 그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찬송에 성악가들 중에 신앙 좋은 사람이 별로이 없습니다. 있기는 있지만 별로이  없어. 아주 드뭅니다. 찬송은 저거 좋으라고 찬송하는 것 아니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찬송하는 것이지,  어떤 사람은 찬송하라 이라니까 찬송 안 하더래. 자꾸 찬송하라 하니까 '이거  우리가 찬송을 원하니까 그래도 우리를 대접해서 찬송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래 말하니까 안 해요. 그래 나중에 물으니까 (나는 사람 위해서 찬송해 본 일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찬양하고 찬양하지 인간 듣기 좋으라고 인간  좋으라고 나는 찬송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라며 딱 거절해요. 그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오.

 요새는 예수교라 하는, 예수교를 뭐 전부 다 제 마음대로 이용해 먹습니다.

예수교를 이용하는 것이 오늘 예수교지 예수교에게 자기가 이용을 당하는 그런  신자가 있습니까? 실은 예수 믿는 사람은 이제는 하나님에게 이용당하는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면 저주를 받아요. 얼마나  받아 망할 것입니까?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많았지마는 여덟  식구 외에는 아 저주받아서 하늘나라는 갔지마는 다 영광없는 부끄러운 구원  얻었지 영광 있는 구원은 못 얻었습니다.

 옛날 찬송 한번 해 볼까요? 157장. 우리는 이게 본곡에는 맞는지 안 맞는지 그래  조금 느리게 하니까 좀 괜찮던데. '날 구원하신' 그것도 곡을 누가 하기를 곡을 그  작곡을 잘못 해 놨어. 그 곡은 우연히 자연히 노래 부르다 보면 찌딱찌딱  찌딱찌딱 그래 가지고 그만 똑 뭐 요새 기타 치고 춤추고 뭐, 무슨 춤이라 하더라  뭐? 그거 거게 맞아요. 춤곡이라 모두. 157장 찬송. 이제 꼭, 곡을 나는 몰라. 곡을  몰라요. 곡이 그래 돼 있으면 그거 틀린 거라. 꼭 한번 좀 곡대로 한번 쳐 봐요.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내 쉬지 못하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깨게 합소서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깨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날 믿음 줍소서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날 믿음 줍소서

 우리가 그래 못 해 그렇지 찬송할 때는 참 울면서 눈물을 홀리면서 찬송할 수  있는 그런, 감사. 뭐 찬송을 하는 게 좋은데 그런 건 없고 저거 좋아서 신명풀이만  야단입니다. 꼭 이 세상 사람들이 모여서 뭐 신명 하는데, 저 언제 내가 해수욕에  가 보니까 얄라궂게 춤을 추는데 그거와 똑 같애. 인제 그래 못 하니까 찬송가로  마구 신명풀이를 해 재낍니다. 찬송은 저거 기쁜 것 아니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는 언제든지 감사하면서도  참 황송해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눈물이라도 감사의 눈물이라야 되지 뭐 다른  정서 눈물 아니오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에 성찬을 베풀었습니다. 이 성찬을 베푸실 때에 내가 이  유월절 성찬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유월절 성찬은  예수님의 피와 몸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바치기를, 바치기로 작정한 것을  선포해서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 유월절 성찬입니다. 이 성찬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피와 몸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다 희생해 바치기를  원하고 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못박히신 몸을 떡으로 표시했습니다.

또 우리로 더불어 새생명의 언약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이 피를 포도주로  대표했습니다. 대표라 말은 표시라는 표(表)자입니다. 대표했습니다.

 여게 대해서 어떤 교과들은, 이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지의 피와 살이  되었다 하는 그 주장이 화육설이라는 주장입니다. 그것도 이단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는 하나의 표시한 표시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와 살과는 상관없이  그저 우리가 이렇게 의식으로, 종교 의식으로 행하는 것뿐이다 하는 그것도  이단입니다. 이 성찬에 쓴 떡과 포도주는 남으면 흙에 묻든지 불에 태워서 없애고  그것을 사람들이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는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기념식에 썼던 것이라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와 살의 그 실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대하는 그 표시물로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에  이 떡을 먹으면서 예수님의 몸과 살이 나를 대속하신 것을 자기가 확실히 믿고  할 때에 예수님의 몸과 내 몸이 연합이 됩니다 또 포도주를 마실 때에 이는  예수님의 피를 대하는 하나의 상징물로 표시물로 해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이를 먹을 때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고 기념하고 믿는 그 마음으로 먹을  때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가 우리에게 실지로 와 가지고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찬을 성경대로 잘 먹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의 그 효력이  우리에게 직접 오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경험할 수가 있고 또 이렇게  이거 잘못되게 하나의 속되게 이래 먹으면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병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든 사람은 그 병이 좀체 낫지 않습니다. 그걸 뒤에 아주  깨끗하게 회개하면 안 나을 바는 아니지마는 깨끗하게 회개한다는 것이 매우  힘드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떡과 포도주로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대속하신 것을 우리가 기념하면서,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라.

이래서 요한복음 6장에는 말씀하시기를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내 피와 살을 먹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이 피와 살을 먹는 자  속에는 생명이 있어서 영생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사는 생활이 필연적으로 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게는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이 성찬, 이거는, 성찬은 어떤 교회서는  주일마다 성찬을 베푸는 그런 교회도 있고 또 어떤 교회는 일 년에 두 번이나 한  번 성찬을 베푸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매일 성찬을 베푸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그거는 자기네들이 다 은혜되는 대로 이래 하지마는 자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습성같이 돼서 예수님의 피와 살에 대한 깨달음과  그 감동이 없고 느낌이 없이 그렇게 하는 잡된 것으로 속화될까 심히 염려스럽고  또 일 년에 한 번만 하는 것은 그만 예수님의 피와 살을 일 년에 한 번만  생각하고 생각지 않는 그런 일이 될까 심히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일 년에 한 번 성찬식을 합니다. 한 번 성찬식 한 사람은 한 번  성찬식 한 그것을 일 년 내내 계속하는 그 일을 해야 됩니다. 계속하는 그 일을  하는 것을 여게 가리켜서 말하기를 기념하라 그렇게 말했어. '내 피와 살을  기념하라' 기념이라는 것은 한 번만 있었던 행사, 한 번만 있었던 행사를 그 뒤에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세상에서는 혹 백 년 혹 천 년, 천 년도 더 지나고 한  이삼천 년 가는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삼천 년 세월이 지나가도 그때  한 번 있었던 그 일을 그와 같은 일을 그 뒤에, 그것을 그 뜻을 새기면서 그와  같은 행사를 하는 것을 가리켜서 기념하는 것이라 그렇게 우리가 일반적  기념이라는 그 용어가 고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 피와 살을 기념하라 하는 이 말씀은 주님이 피를 어떻게  흘리셨으며 무엇을 위해서 흘리셨는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깨닫고, 우리가 깨닫고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몸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살을 찢으신 그 일을 하실 때에  무엇 때문에 했는지, 또 어떻게 했는지 하는 그것을 우리가 깨닫고 우리는 이  일을,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몸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가시 면류관에 찢기신 이  일을 우리는 기념하라 했으니까, 여게는 기념하라, 먹을 때마다 기념하라 이랬는데  먹기는 그라면 일 년에 한 번 먹으면 됩니까, 십 년에 한 번 먹으면 됩니까. 하루  한 번 먹으면 됩니까?  요한복음 6장에는 보면은 이 피와 살은 계속 먹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 피와  살을 먹지 안할 때는 생명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면 생명은 세속 있는 게  생명입니다. 생명이 있다가 끊어져 버리면 죽어 버리고 못 살아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은 먹으면 생명이 있고 이제 안 먹으면 생명이 없는  것이니까 생명이 계속해야 생명이지 끊어지면 생명이 실패합니다.

 이래서, 이 말씀들의 뜻을 가만히 깊이 생각해 보면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은, 기념하는 것은 그저 밤이나 낮이나 계속 기념해야 되고 언제든지  일 년이고 십 년이고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념해야 되는 것을 우리는  거게서 확고하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래서 성경에 있는 것을 더 지나치게, 더 잘하기 위해서 지내쳐도 그것은  뼈뚤어지는 것입니다. 미달돼도 삐뚤어지는 것입니다. 좌우로 치우쳐도  삐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기념하는 이것을  지내쳐도 안 되고 꼭 그대로 우리는 기념을 해야 되는데, 요 죄라 하는 것은 좌우  상하로 삐뚤어지면 죄가 되는 것이고, 꼭 활을 쏘는 사람이 고 과녁을 딱  들어맞출 때에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이지 거게 삐뚤어지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와 살을 죄되게 먹지 않는 것은 그 과녁을 맞춘 거와  갈이 이리 저리 치우치지 안하고 똑 바로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이라야,  먹는 것이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할 의무가 하나 있습니다. 기념할 의무가  하나 있고, 또 하나 의무가 있는 것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 구속을 받은 우리들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고 또 한 가지 할 일은 내가 기념하는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다른 사람도 기념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요 본분인 것입니다.

 이래서, 내 자신이 주님의 이 대속하신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일을, 내 자신이 평생  기념하는 일을 계속을 해야 내게 생명이 있지 계속이 중단될 때에는 생명이  중단됩니다. 영에게는 생명이 와서 있지마는 이 기념하는 것은 이 변동되는  마음과 몸이 기념하는 것이지 영은 영원히 불변의 기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과 몸이라 하는 것은 이거 변하기 때문에 기념하다가 또 잊어버리고 말다가  또 마귀 기념하다가 뭐 귀신 기념하다가 이 세상 걸 기념하다가 오만 일을 다  그렇게 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일을 할 때는 그때는 그 속에  생명이 충만합니다. 그 속에는 성령과 진리와 주님의 피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렇게 역사하던 훌륭한 목사가 만일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일은 딱  중단을 해 버리고 세상 어떤 물질이나 사람이나 무슨 행사나 그런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행동을 하는 마음과 몸이 되었을 때에는 그때는 예수님의 그 생명은  거게는 없습니다. 그 몸 안에 없습니다. 그 마음 안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과 몸은 벌써 생명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과 몸은 생명을 얻었다가 끊어졌다가, 일생 동안에 수천 번  수만 번 끊겼다가 이었다가 끊겼다가 이었다가 이리 되고 어떤 사람은 열 번  끊기고, 어떤 사람은 만 번 끊기고, 어떤 사람은 억만 번 끊기고, 어떤 사람은 한  번도 살아나지 못하고 그대로 지금 예수 믿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열 번  끊기고 어떤 사람은 네 번 끊기고 다섯 번 끊기고,  산다씽이라 하는 그 사람의 전기를 읽어보면은 그 사람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이 기념이 끊쳐지는 것이 한 번밖에는 없었다는 것을 기록한 걸  봤습니다. 본인이 기록했는데. 한 번밖에 없었는데 그 없은 것이 몇 시간이나  얼마나 없었느냐? 네 시간 동안이 없었더라고. 네 시간 동안, 자기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이 공로를 기념하며 찬양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네 시간이  있었다고.

 그 네 시간은 어데서 그래 됐느냐? 불란서는 하도 화려하고 사치한 곳이라, 미국  가 가지고도 그런 시험을 당하지 안했는대 불란서에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그런 것을 이래 돌아다니면서 보다가 보니까, 미국에서는 순간도 찰나도 끊김이  없었는데 불란서 가 가지고 콜이라 하는 그 거리를 지나가면서 이래 구경하다  보니까 주님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 네 시간 잊어버렸다 하는 그것을 그분이 평생  전기에 기록해 놓고 그는 평생 마음 아피 그라면서 회개한다는 그것을 봤습니다.

 이래서, 그러면 우리는 이 기념하는 일을 계속해야 된다는 이것을 우리가 알고  계속을 못 하면 우리 의무를 하지 뭇 한 것인 것을 알고, 계속하는 것이 뭐  지나치게 잘하는 게 아니라 계속하는 것이 이것이 본분이요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념은 어떤 게 기념입니까? 주님은, 주님의 우리의 대속은 세밀히  말하면 사사 십육이 됩니다. 사사 십육이 됩니다. 주님이 죄에 대해서 너 이, 의에  대해서 너 이, 하나님과 화친에 대해서 너 이,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영생에  대해서 넷 이래서 요 네 가지를 위해서 주님은 살도 죽으시고 피도 죽으시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지신 피와 살 그 생명은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나를 대속하신 것은 이 사사 십육 열여섯 가지로 나를 대속하셨는데, 열여섯  가지로 대속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 심신은, 예수님의 심신은 이 열여섯  가지를 대속하기 위해서 완전히 거게 다 바쳐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심신은 나를 대속하신 데만 쓰여졌지 나를 대속하시지  안하고 달리 쓴 것은 털끝만치라도 없습니다. 공연히 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털끝만치라도 딴데 쓴 게 있었다고 하면은 우리 대속은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의 공평에서 거부됩니다. 왜? 우리의 대속이 안 됩니다. 대속이 안 되는  정죄를 받기 때문에 그는 나를 대신한 것이 되지 못하고 나를 대신한 것이라면  흠 있는 대속이기 때문에 하나님 법에는 죄가 큰 것이나 가장 작은 죄나 꼭 같은  죄요 그만하면 영원한 사망을 받는 것이요 거게서 회복을 못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죄에 대해서 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한 죄, 하라는  것을 안 한 죄, 하나님에게만 피동돼 살라 했는데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안한 죄,  하나님만 소망하고 살라 했는데 소망하지 않은 죄 이것이 말하자면 네 가지  죄입니다. 또 네 가지 의는, 네 가지 의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안 한 것 의  하나님이 하라 하는 대로 한 것이 의, 하나님만 모시고 하나님으로 피동돼 살라  하는 것을 한 것이 그 의, 하나님만 소망하고 하나님에게만 얻어 가지는 그것이  의, 그 의도 네 가지.

 하나님과 동행도 네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도 죄에 대해서 동행하셨고, 의에  대해서 둥행하셨고, 또 영원한 소망에 대해서 영생에 동행하셨고, 하나님과  화친하는 그것도 동행한 이 동행도 넷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에 대해서도 넷입니다. 죄를, 죄를 이것을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여게도 이 일을 주님과 같이 하시면서 소망으로 금하는 것을  소망으로 하지 안했고, 명령한 것을 소망으로 허고, 또 하나님과 화친하는 것을  소망으로 했고,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것도 이 소망으로 했기 때문에 깊이  말하면 네 가지가 다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예수님이 이 네 가지 대속을 하시기  위해서 그 몸과 마음은 완전히 대속물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대속물로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대속하실 때에 이 마음과 몸의 그  전부를 가지고 대속했는데 대속하는 데만 예수님의 마음과 몸을 전용했는가? 혹  다른 데에 분용했는가? 분용하지 안했습니다. 거게만 전용을 했습니다. 그러면,  전용을 했으면은 하다가 지금 좀 남궈 뒀는가? 남궈 두지 안하고 완전히 다  했습니다.요걸 여러분들이 자꾸 해석해 깨달아요. 완전히 다 했습니다. 완전히 다  했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이 아직까지 십자가에 못박혀 계셔도 생명이 붙어  있을 때는 완전히 다 투자된 것입니까 아직까지 다 투자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O장로님?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운명했을 때 완전히  투자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이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신 그대로 나도 심신이 다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배서, 죄를 멸하기 위해서 내 전부가, 심신의 요소가 전부 다 쓰여지는 것이고,  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소망하고 나아가는 그  일을 위해서 내 몸과 마음과 내 소유는 거게 완전히 투자되야 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이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어떻게 그 심신을 다  완전히 사용해서 없어지기까지 하셨는가? 이 네 가지 위해서 하심같이 나도 이  네 가지를 위해서 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의 이 포도주와 떡을 기념하는 거,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기념하는데 그 기념이 언제까지 끝마쳐지느냐? 현실 현실에서 그것이  끝마쳐지는데 완전히, 다시는 다른 데에 오용할 것이 없이 완전히 끝을 맺어져야,  죽음이라 하는 끝을 맺어져야 이것이 완전히 기념하는 일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받았지마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기념하는 데에는 한 시간도 한 냥쭝도 쓰지 안하고 전부 제 욕심을  위해서 쓰는 사람도 있고, 전체를 다 여기 쓰는 사람은 그 일 외에는 자기는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념하는 일이 아니라면 말도 못  하고 행동도 못 하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든지 모르든지 그 언행심사의  전 행동은 이것을 기념하는 일을 이래 하는 것으로서 자기는 다 알고 거게 다  투자하는 것입니다.

 또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26절에 말씀하는 것은, 전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그렇게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내가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전달해서 다른 사람이 나와 갈이  피와 살을 기념하는, 피와 살을 기념하는 그 사람을 만드는 그것이 우리의 의무와  책임입니다.

 내가 주님의 피와 살을 세상에 있는 동안에 기념물로 다, 기념으로 다 바쳐서,  기념물로 다 바쳐서 기념하고, 나만 할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다른 사람도 이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사람을 전해서 만들어서 그런 사람들 만드는 것이 우리의 할  의무요. 그러면 우리 할 의무는 두 가지입니다. 내 자신이 기념하는 것, 기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그 사람도 기념하도록,  어떤 사람은 기념하는 사람을 천 명 만들었고 만 명 만들었고 억만 명 만들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일생 동안 목회를 했다 뭐 권찰 일을 봤다 장로를 했다 해도  자기가 기념하는 사람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주 예수를 믿기는 믿지마는  자기의 피와 살로써 주님의 이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이 일은 하나도 안 하고  입으로만 예수 믿고, 죄를 인하여 자기 심신을 투자 안하고 의를 위해서 심신을  투자 안하고 하나님과 동행에 심신을 투자 안하고 하나님께 소망 둔 소망을  인해서 자기 심신을 투자 안 하고 그 심신은 전부 세상에 썩어질 것만 위해서  투자하는 그런 사람을 억만 명을 만들어 놔도 그까짓 거 가 봤자 아무 가치  없습니다. 택한 자면 하늘나라 구원은 있지마는 그의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피와 살을 내 자신이 기념하는 이 기념물입니다. 내가  피와 살이 지금 젊어서 많이 남아 있든지, 나는 남은 시간 얼마 남지 안했든지  내가 가진 피와 살은 주님의 그 대속을 내가 믿기 때문에 주님의 피에 팔건 자요  주님의 것이 됐기 때문에 내것이 아니니까 이제 내라는 심신 전부 이거는 뭐할  것이냐?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할 기념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기념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기념에 다 써야 됩니다.

 기념에 다 쓰면은 생명도 기념 위해서 다 없어지고 자기가 병들어도, 언제  '병들어 죽고 또 늙어 죽고 하는 그것은 저주의 사망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고 주님의 것으로 주를 위해서 이제 죽는 것이 아니고  뭐 아파 죽고 늙어 죽고, 그때 늙어 죽으면서라도 주님을 위해서만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죽었으면 그거는 주를 위해 죽은 것이지마는 아픈 것만 생각하고  주님 다 잊어버리고 이라다가 죽음이와 덜컥 죽어버리는 그런 것은 다 그것은  일반인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주님의 피와 살을 우리 양식으로 먹어, 양식으로 먹는다  그러면, 주님의 피와 살이, 양식이 뭐입니까? 요한복음 4장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은 곧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온전히,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그것이 나의 양식이라, 그거 인격의 양식입니다.

 이러니까 주의 피와 살을 양식 삼는다 그말은 주님의 피와 살의 그 목적, 주님의  피와 살의 운동, 주님의 피와 살의 그 본질 본성, 주님의 피와 살의 그 역사 운동  거기에만 다 바쳐지도록 주님의 피와 살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이게 참된  양식이 된다 말은 주님의 피와 살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주님의 피와 살을  인해서 살고, 피와 살을 위해서 살고, 피와 살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는 이것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주님의 피와 '살을 자꾸  생각할 때에 우리는 양식이 돼서 참사람의 행위를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이 보내신  이의 그 뜻을 온전히 이룰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구속받은 우리들은 두 가지. 하나는 기념하는 거, 하나는 이 기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그 사람들로 기념하도록 만드는 것, 내 자신이  기념하는 생활, 다른 사람이 기념하는 생활하도록, 기념하는 자가 되어지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 이것이 두 가지 우리의 구속받은 자의 할 일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같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심신이 없어진  것같이 없어져야 합니다. 주님의 소유가 없어진 것같이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기념하는 일과 기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그것이 우리의 할 일  중에 또 하나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주님의 찢으심에, 주님의 피흘리심에, 주님은 전부 우리의  대속을 위해서 다 하나도 없이 다 바치고 허비 하나도 안 했습니다. 남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바쳐 살았으며 얼마나 또 남아 있는지?  남아 있는 것은 이제 기념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으로 다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다 멸망이요 구원이 없습니다. 암만 소망해 봤자  기본구원뿐이지 영광의 구원은 없습니다.

(기도)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활로 대속하시고 생명길을 열어서 죽음으로  가득찬 이 세상 속에서 털끝만한 죽음도 죽지 안하고 전부 영생으로 살 수 있는  이 생명길을 열어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생명길을 걸어가는 이 생명 생활은 주님이 생명 생활 하신 대로 주님의  죽으심을 무엇 때문에 죽으신, 주님의 네 가지 때문에 죽으심을 우리도 이 네  가지 때문에 죽는 것으로써 기념하고, 또 이 일을 나만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해서 이 기념하는 생활을 그들도 . 하여 완전히 죄와 상관 없는  생애, 의로운 생애, 하나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생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이  생애로 남은 바의 몸이나 생명 이나 소유나 전부를 다 여게 투자하여 이만을  위해서 살아 하나도 허비 낭비하지 안하고 하나도 남겨 두지 안하고 완전히 이  생명 생활에 다 바쳐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또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고,  나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을 전해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기념하고 전하는 이것으로서 영생하는 이 생애를 모두가 다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은총을 주시옵소서.

 또 이렇게 여러 사람을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도 주님의 이 사활의  대속을 깨달아 어떻게 주님이 사활하신 것을 우리 몸에서 친히 기념하여 날마다  생명 생활을 하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총을 주시고, 주님에게 범사를 구해서 염려  없이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사는 저희들이 되도록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도 늘 주님을 사랑함과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항상 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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