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1982. 3. 22. 월새

 

본문 : 고린도전서 11장 26절 - 32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기독자는 하나님의 공심판의 정죄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다 면죄  받았습니다. 공심판에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정죄 받아 죄의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죄를 공심판에서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정죄함을 받습니다.

공심판에서 사죄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심판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새생명을  받은 그대로 있는 것은 구원이 되고 실지로 자체가 그리스도의 이 대속을 부인해  버렸든지 이 대속을 포기해 벗어버리고 자기 현실에서 죄대로 그대로 산 것은 다  정죄 받아 사망의 던짐을 받는 것이니 이 사망을 가르쳐서 둘째 사망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는 32절에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은 공심판의 정죄를 다 받아서 멸망하지마는 우리가 공심판 정죄는 면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실질적으로 죄를 벗지 아니하고 회개를 아니할 때에는  사심판에서 정죄 받아 가지고 둘째 사망의 해로 멸망을 받습니다 이러니까 주님께서 이 성찬을 베풀 때에 자기가 깨끗이 회개를 하고 성찬에  참여해서 주님의 피와 살과 자기의 이 피와 살의 심신인 것이 주님의 구속으로  인하여 주님의 심신인 것과 연합한 자가 된 것인 것을 깨닫고 연합한 자가 되는  마음을 가지고 소원을 가지고 연합한 자 된 이 표현으로 주의 몸과 주의 피에  참여를 해서 연결을 할 때에 주님이 먼저 승리하신 이 승리의 능력이 승리케  하신 이 능력이 그에게도 함께 하셔야 그로 섭리하도록 하시고 만일 이 사실을  부인하고 회개하여 주님의 대속을 입음으로 자체는 사죄와 칭의를 받아 깨끗해진  주의 대속의 공로로 깨끗해진 자기인 것을 깨닫고 이 깨끗해짐을 자기가  이제까지 더럽히는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이 깨끗해짐을 잊어버린 죄를 회개를  하면서 깨끗해진 자기가 주님의 깨끗한 이 피와 살과 연합을 이제까지 가지지  못했던 것을 성찬식에서 다시 새롭게 깨끗해짐으로 깨끗한 주님의 피와 살과  연합이 되지 못했던 것을 후회를 하면서 연합된 자기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  가지고 연합된 자기로 다시 결심하고 다시 일어나는 이 각오를 가지고 '이제는  주님의 피와 살과 깨끗하신 주의 피와 살과 네가 나와 연합이 된다, 나는 지극히  거룩한 주님의 피와 살과 나는 연합될 수 없는 순전히 주홍 같은 붉은  죄인이지마는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나는 깨끗해져, 깨끗한 주의 피와  살과 지금 다시 연합한다' 하는 요 사실을 깨닫고  떡을 먹으면서 연합하고 잔을 마시면서 연합하는 그자에게는 주님 안에서 역사  하셔서 이 대속의 지극히 거룩하고 승리한 이 승리를 이루게 하신 그 능력이  그때에 그에게 들어가서 역사해서 예수님이 완전 승리하심같이 완전승리의  십자가는 완전 최종 승리인데, 최종 완성의 십자가에 승리를 하게 하시고 자기가  이 은혜를 받았다가 또 이 은혜를 자신이 배반하면 배반하는 그 동안은 다  사망을 이루고 또 배반했다가 다시 회개를 하고 고치면 또 이 능력이 같이 해서  사는 그 동안은 영생을 하고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영생은 잠깐 하고 둘째  사망의 해는 길게 받고, 어떤 사람은 영생은 길게 하고 둘째 사망의 해는 잠깐  받고 이렇게 중복적인 건설구원의 역사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 믿음으로 자기가 깨끗해졌고 또 믿음으로  깨끗하신 주의 피와 살과 연합이 된 자에게는 지극히 큰 능력이 역사를 하고  역사 할 때에 아무 피조물도 이 역사를 방해할 자 없습니다. 사탄도 방해하지  못하고 사탄도 이길 만한 그런 지극히 큰 능력이 내주하는데 다만 이 능력이  제재를 받는 면이 있으니 어떤 면으로 제재를 받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자유성을  주고 이 자유성을 살려서 구원해야 되지 자유성을 말살하면 구원이 안 되는 그런  종의 것이기 때문에 자유성을 살려서 유기적으로 자유의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려는 이 능동성을 가진 구원이기 때문에 이 능동성, 이 자유성  이것에게는 이 능력이 제재를 받습니다.

이 능력을 부인할 때에 물러가야 되고 배척할 때에 물러가야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부인치 아니하고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 어떤 세력도 이는 꺾지 못하고  그대로 이루어 나가는 지극히 큰 능력의 역사가 내주해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부인할 때에는 부인을 당하고 추방을 시킬 때에는 추방을  당합니다. 무엇이 추방을 당합니까? 지극히 큰 능력이 추방을 당합니다. 지극히  큰 능력의 주님이 배척당합니다. 당해도 또 당하셨다가 다시 잘못됐다고 회개를  하고 영접을 할 때에는 다시 또 들어오십니다. 이것이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는  이것이 두드리는 자가 전능자입니다. 전능의 능력인데도 우리에게 문을  두드리면서 사정을 해 가지고 '그러면 들어오시오' 하면 들어오고 그저 감사히  하든지 안 하든지 들어오도록 용납만 하면 '좋다' 하시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의 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렇게  관영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이 사랑을 가지고 대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만 배반치  안 하면 이 능력이 역사해서 이 능력이 역사 하는 그 생애는 전체가 다  영생입니다. 죽음이 아니고 영생이고 이 능력을 배반하고 산 그때는 옛사람으로  사는 때요, 전부가 다 둘째 사망의 해로 영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이 성찬할 때에 자기가 이 사실을 하나님이 계약하시고 선포하신 이  사실인데 권위가 지극히 큰 이 무한의 권위를 가진 사실인데 이 사실을 믿지  안하고 업신여기고 지극히 거룩한 주의 피와 살을 하나 모형한 외식으로 하는 이  떡과 포도주는 이는 이것이 주님의 피와 살은 아니지마는 주님의 피와 살을  나타내는 하나의 의식으로 이렇게 된 것이지마는 이 피로 나타내는 그 실상은  주님의 실상의 피요, 살과 자기가 믿음으로 연합이 되어지는 것인데 자기를  대속으로 인하여 깨끗해져 가지고 연합하지 안하고 대속도 부인하고 깨끗지 안한  그대로 깨끗한 것은 회개하면 주의 대속으로 인해서 깨끗해지고 믿음으로  회개하지 안 하면 자기는 구속을 벗었기 때문에 더러워진 그대로 있는 것인데  더러워진 이것 가지고 주의 피와 연합을 하면 실지의 연합은 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의 피와 살을 깨끗한 피와 살을 거룩한 피와 살을, 더러운 자기의 피와 살과  연합을 할려고 해서 달려들어 이 성찬을 먹어 연합을 자기의 이 의식적인 연합된  모형적 연합을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피를 모욕시키는 것이요, 살을  모욕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피와 살과 그 몸을 범하는 죄가 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범하는 자가 되고 자기는 주의 피와 살과 자기의 피와 살, 연합되어야 할  연합하는 이 시점에 있어서 주님의 피와 살과 자기의 대속으로 인해서 깨끗해진  피와 살이 연합되면 지극히 큰 능력의 것이 되어지는데 자기를 대속을 입어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연합식을 했기 때문에 실지의 주의 피와 살은 모욕시켜  주고 모욕을 주고 한 것뿐이지 제가 그렇게 한다고 주님의 피와 살이 그 더러운  것과 연합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실지로는 연합은 안되고 자기는 어떤 것과  그렇게 이 특수 기회에 연합을 하게 되느냐, 자기는 깨끗지 못한 자기의 구속받지  안한 피와 살, 깨끗케 되지 못한 피와 살, 구속받지 못한 이 피와 살과 자기는  다시 재연결한 이 연결식이 되어지기 때문에 잘하면 지극히 큰 능력의 자체가  되어지는데 정반대로 이렇게 하니까 이전보다 크고 강한 이 죄악의 능력으로  다시 이루어진 이 죄악으로 강한, 강해진 악령으로 강해진 이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성찬할 기회는 성찬을 먹는 기회는 주의 대속으로 인해서 자기가 깨끗해질 수  있는 이 일을 평시도 되지마는 성찬 먹는 그때에 우리가 이 의식을 인해서  새롭게 자기의 깨끗케 하신 이의 공로를 깨달아 자기가 깨끗해짐으로 깨끗한  주님의 이 피와 살과 연결식이 이루어짐으로 이거는 하나의 의식뿐만이 아니고  이 의식이 이루어짐으로 자기에게는 지극히 큰 예수님 안에서 역사 하던 지극히  큰 능력이 예수님의 피와 살과 내가 연결식을 가지는 여기에서 지극히 큰 능력이  다시 새롭게 자기는 연합되어서 받을 수 있는 이 능력 받는 기회인데 깨끗한  자기로 깨끗함에 연결하지는 못하고 자기가 주의 구속으로 얼마든지 깨끗해질 수  있는 데도 깨끗해지기를 싫어하고 이것을 무시하고 깨끗해지지 아니하고 깨끗지  안한 것을 주의 피와 살과 연결하는 연결식의 이 떡을 먹으니까 주의 피와 살은  모욕을 준 것이 되고 실지로는 연결이 안되고 이 더러운 것으로서 주님의 피와  살과 연결할려고 했지마는 그 연결이 안되고 정 반대인 옛사람 악령으로 더불어  연결되어서 이 연결식에 옛사람의 마음이 더 됐고, 옛사람의 몸이 더 됐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의 이 심신이 더 되었기 때문에 범죄 하는 율이 탈선되는  율이 삐뚤어지는 율이 이것이 가속도로 더 크게 되어지기 때문에 죄의 값으로  병들고 죄의 값으로 사망하고 하는 이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때에 잘된 것만 취해서 잘되면 좋고 못돼봤자 본전이고  손해는 없게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잘되면 좋고 잘되지 안 하면 정 반대로 큰  손해 가는, 못되지는 이런 일을 하게 하셨느냐 왜 이렇게 잘되면 좋고 못되면  못돼봤자 그거는 상관없도록 이렇게 했으면 못되는 손해가 없을 터인데 왜  이렇게 못되지는 손해 되는 이런 일도 있도록 했느냐 한 것은,  32절 하반절에 한 것은 말이요 32절 한 번 읽어봅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왜 징계를 왜 있게 했느냐 그 말이요. 징계를 왜  있게 했느냐. 이는 우리도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하신 것은 성찬을 잘못 먹으면 죄로 강해지고 잘 먹으면 의로 강해지게  이렇게 하셔서 잘 먹으면 의로운 지극히 큰 능력으로 강해져서 세상이 이길 수  없는 능력으로 자기가 배척 안 하면 버리지 안 하면은 세상은 해할 수 없는 이런  지극히 큰 능력으로 변화가 되어지는 이 능력이 내주 하게 되는 이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반면에 이렇지 아니하고 살피지 아니하고 먹으면 이는 큰  죄악으로 더불어 연합한 자가 된다. 이래 가지고 배나 범죄 하는 것이 가속도로  되어짐으로 병들고 잠자고 하는 자가 있다.

왜 이렇게 징계 제도를 내셨느냐? 자꾸 구원 제도만 내고 징계 제도를 내지 안  하면 좋을 건데 왜 징계 제도를 냈느냐? 낸 그것은 이는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런 범죄의 행위 속에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징계의 제도를 내 놨다 하는 말씀입니다.

징계는 멸망을 받으라고 바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돌이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매를 때리는 것이 징계입니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그것  때문에 받는 것인데 벌로 받으면 잘못된 그 값으로 멸망을 시키는 것이고 징계는  다 같이 벌받는데 징계라 말은 사랑으로 소망을 가지고 고쳐서 더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고치기 위해서 주는 매가 징계입니다. 벌로 맞는 매와 징계로 맞는  매가 내나 아프기는 같지마는 벌로 맞는 매는 그것으로서 그만치 망하게 되는  것이고 징계로 맞는 것은 그렇게 맞아 맞음을 인해서 더 좋도록 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소망을 가지고 희망을 주면서 고쳐 유익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징계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징계나 벌이나 아프기는 꼭 같고 꼭 같은 벌이지마는 하나는  사랑으로 소망을 가지고 유익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로 인해서 더 좋아지도록  역사 하는 그 역사에서 매를 칠 때는 징계고 이는 너는 이 죄 값으로 '너는  맞아서 망해라' 하고 그와 같이 '소망으로 살아라'는 그 후원이 없이 사랑이 없이  때릴 때에는 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찬을 잘못 먹으면 그 표로 현저히 병도 들고 또  죽게도 하고 하는 이 일을 하게 하는 것은 뭐 때문이냐? 마음대로 죄짓고 이렇게  행동하는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내셨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찬을 잘못 먹어 이 징계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했으면 즉시  그 일을 했으면 즉시 그 일은 회개를 하고 다시 돌아서고 일어서면 그 징계가  왔다가 물러가고 그 징계 중에서도 일어서지마는 이렇게 징계 받아 가지고  되어진 이것을 징계에는 회개치는 아니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꾸만 치료만 하고  과학을 들이대 가지고 이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과학을 들이대 가지고  어떻게 할려고 암만 해봤자 안 된다 이거요. 이거는 왜 그러냐, 이는 구속받은  자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 같이 정죄 받아 자꾸 죄만 지어 멸망 받는 그 멸망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범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위에서 한 것은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자유성을 살려하고 이것은  자유성을 줬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범죄 했으니 네가 지금 그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자유성을 살려 우리를 범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징계요, 이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어도 이 교리와 신조를 바로 배워 깨달아서 이렇게 믿는  사람은 자기가 깨달아 구별한데까지는 신앙에 나아갑니다. 깨달아 구별을 하는  데까지는 신앙이 나아가지마는 자기가 구별해서 깨달아진 거기까지만 신앙이  나아가지 그 넘어놓은 이런가 저런가 모를 때에는 신앙은 전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머물러 가지고 이래야 되느냐 저래야 되느냐, 유리 방황하고서  방황하고 있지 거기서 나갈 길을 모르기 때문에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든지 한 번 가보자 훅 뛰어서 간다 할지라도 기독자의 걸음은  자기가 깨닫고 원하는 걸어가는 그 걸음에서 자기 걸음이 되어져 구원이 되는  것이지 깨닫지 못하고 이런가 저런가 모르니 모험성으로 한 번 푹 뛰어보자 해  가지고 뛰는 것은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암만 그 옳은 일을 해도 그  일을 하나님이 인정치 않습니다. 인정치 않고 자기 인격이 그것으로서 자라가지는  못합니다. 벌써 인격 그거 알지 못하고 의문 중에 있는 걸 한 번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고 해보기 때문에 그것은 우상이요, 그거는 죄악이기 때문에 죄악이  한 것이 의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된다 그 말이요. 이 성화의  구원은 자기가 똑똑히 알고 이성 비판으로 똑똑히 알아 지식하고 확신 가지고  소원 가지고 이와 같이 행할 때에 그때에 자기의 인격이라 하는 것은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구별인데 그 교파가 아무리 열심 있다 할지라도 무식한  열심은 구원은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교파의 구원은 그  교파가 구별한 신조와 교리 이상은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혹 간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험 속으로 갔기 때문에 그거는 내나 죄악이 그와 같이 하는  허영심 허욕심에서 하는 것이지 그 온전한 지능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교파의 구원의 성장 그 도수가 성장된 그 높이의 높이가 어디  있느냐 교리와 신조의 구별된 그 구별의 높이 만치 갑니다. 그 이상은 못 갑니다.

그 사람의 구원도 그 이상은 가지 못합니다. 거기 만치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구별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만 구별 없는 보편 일반에서 예수  믿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이것을 말하면 까다롭고 힘 쓰이고 또 옳고 그른  걸 알게 되니까 양심에 가책되고 불안하고 이러니까 그저 다 일반적으로 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얻는다. 공짜배기 그래 얻는다 하니까 사람들은 좋아하고  뛰고 굴리지마는 하나님의 심판 우리가 아무리 깨닫고 구별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심판 만치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보다 더 밝은 심판이 있기 때문에 가봤자  걸립니다. 안심하고 웃으며 가봐도 걸렸소 울면서 근심하면서 불안에 가도 맞은  것만치는 그때 통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서부교회 나와도 이 밑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믿어서  목사가 된다 할지라도 요 구별하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안한 사람은 그 이상은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고 상대를 해야지 그렇지  안 하면 나중에 가서 큰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좋은 비결이 있는 것은 자기가 구별해 나가는 이 구별에 대해서  자기의 기능이 모자라서 뭐 구별할 만한 아무런 그런 이치도 모르고 그런 지식도  없고 한 사람은 그 구별이 심히 낫을 터인데 어떻게 하느냐, 그 사람이 구별은  아주 어려도 지능이 있어서 유식해서 구별이 많은 사람보다 앞서 갈 수 있는 이  지름길이 있습니다. 질러가는 지름길이 있소. 이 길이 제일 상등길입니다.

지름길은 어떤 지름길인가? 자기의 주관과 사욕과 세상 소망 이 모든 것을  바라고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 주님이 죽어라 하거나 살라 하거나 주여 명령만  마시고 나에게 인도만 하시옵소서. 옳다는 것을 나에게 인식만 시켜 주시옵소서.

그러면 주님에게 어디까지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인도의 길이 암만 어려워도 달게 받아가겠습니다 하는 십자가 지는 것,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 사람이면 완성입니다. 이 사람이  완성이요. 이러니까 이것으로 무식하지마는 가는 사람 자기 양심에 하나님께서  이렇다 깨달아지는 그대로 갑니다.

제가 개명교회 있을 때에 그때에 제가 집사로 있을 때인데 주 남선 목사님이  와서 세례 문답을 하러 오셨는데 그때는 세례 받는 사람이 그때는 당회장이 와야  세 사람 아니면 두 사람 그리 안 하면 혹 네 사람 그래 밖에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좀 문답을 우리가 이렇게 기록해서 필기구로 기록한 것처럼 그렇게  많은 것을 묻습니다. 구두로 물으니까 물어야 답을 하나도 못한다 말이요. 답을  하나도 못하니까 한글도 모르지 그런 사람들이라 주 목사님 불러 가지고 '이거  집사님 이 세례를 하나도 주지 못하겠는데요' '녜? 어찌 그렇습니까?' '이 문답을  해 보니까 하나도 답을 못합니다. 그런데 묻는 방식을 좀 달리 해 보십시오.

이런가 저런가 이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건가 그것을 그래 물으면 구별도  없고 무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논리 정연하게 답을 할 만한 그런 지식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래 묻지 말고 목사님이 둘을 해놓고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그래 물어 보십시오. 이게 옳으냐 이게 옳으냐 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어느 것이 옳으냐 이럴 때는 행해야 옳으냐  이렇게 행해야 옳으냐 어느 게 옳으냐 그렇게 물어 보십시오.' 이러니까 웃으면서 '녜, 그거 그러면 그래 가지고 옳은 것을 그 둘이 있을 때에  옳은 판단해 가지고 옳게만 걸어가면 구원될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그래 한번  물어 보십시오' 이러니까 웃으시면서 '그래 보겠다'고 새로 불러 들여 가지고  묻습니다. '자, 이 주장이 있고 이 주장이 있으니까 어느 주장이 옳습니까?' '이  주장이 옳습니다.' 이렇게 물으니까 주남선 목사님이 있는 힘을 다 들여서 어려운  걸 다 물어도 딱딱 옳게 대답한다 그 말이요. 그때에 탄복을 하시면서 '예,  알았습니다.' 그 칭찬을 하면서 세례를 줬습니다.

개명교회 그때 세례 받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인데 다 순교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러니까 신앙생활 할 때에 뭐 죽음을, 목숨 안 내놓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왔을 때에도 목숨 다 내놓고 그들이 후퇴해 갈  때까지 계속해서 하루 세 번씩 예배보고 뭐 죽인다 살린다 해도 꼭 기어코 라도  예배 본 사람들이요.

그러니까 그들이 후퇴해 가지고 월북도 하지 못하고 중간에 갇혀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산에 있는 공비였었는데 공비들이 가만히 가 생각하니까 예수 믿는  이놈들이 자꾸 매일 하지 말라 해도 하루 세 번씩 기도하니까 그들의 기도를  듣고 이렇게 했다 하는 분개한 마음이 들어서 후퇴해 올라가 가지고 밤에 모르게  내려와 가지고 밤에 와서 온 동리를 포위를 해 가지고 총을 놓으며 이러니까  꼼짝 못하고 그 방위대 지서는 저 멀리 있고 그래 가지고 예배당을 불을 질러서  예배당이 불에 탔습니다. 불이 타서 타고 난 다음에 그 뒤에 저에게 기별이 와  가지고 가서 그 예배당 지을 연보 한 것 그때는 '예배당을 짓는데 필요 있는  물품을 누구든지 가져오십시오' 이러니까 어떻게 많이 가져 와놨든지 앞에 가져온  거는 못 쓰고 뒤에 가져온 것은 쓰게 되기 때문에 그러지 말라 가져온 것은  반드시 밑에서부터 빼 써라 이랬습니다.

순위가 밑에서부터 빼 썼는데 가져온 걸 다 쓸 수가 있습니까? 밤새껏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다가 새벽에 네 시 돼서 '자, 연보하자' 하고 연보 하니까 연보 할  때에 서로 연보 할라 하니까 이 액수를 정해 놓고 '이 이상은 연보를 받지  못한다'고 나중에 처음에서부터 순서로 받으니까 마지막에 거석한 사람들은  연보를 낼라 해도 연보를 못했습니다. 연보를 못 냈는데 그 중에 제일 좀 마음에  미안하게 된 사람은 ○○○이라고 ○○○씨 동생이요. 논 서 마지기를 바치려고  했는데 액수로 보니까 다 참여할 수 없어. '이거는 약속대로 이거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받지 못하고 논 서 마지기를 받지 못했는데 그만 그 뒤에  공비에게 총살되어서 죽었다 그 말이요.

그때 연보 했으면 하늘나라 옮겼을 터인데 연보 받지 못하고 그와 같이 한 것이  미안해. 어떻게 미안한지 그 미안한 말을 하고 그때 그 논 서 마지기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말을 했든지 내가 그것은 그 뒤에는 내가 잘 모르겠습니다. 받지  못해서 원통하다 했고 그러면 이것을 다른 데라도 연보해서 어떻게 죽고 난  다음에라도 쓰여지도록 그래 하자 하는 그런 말도 있고 저런 말도 있는데 그  뒤에 처리는 어떻게 됐는지 ○○○씨가 여기 새벽기도 나왔을 터인데 그분이 잘  알 것입니다.

그렇게 참 거짓말 같은 참말 신앙걸음을 걸은 것이 개명교회입니다. 개인마다  가정에서도 다 순교를 통과한 죽음을 다 초월한 신앙을 가졌었고 그랬습니다.

여기 ○○○ 씨 와 있지, 아마 있는데 그분의 어머니도 다 죽음을 초월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예수 믿는다고 해 가지고 뭐 매도 수없이 맞았고  한번은 집회 간다고 거기는 땅까시가 어떻게 날카로운지 땅까시 밑에 바늘 이래  세워놓은 것 모양으로 땅까시가 첩첩이 이래서 땅까시 이거 갈다가 밭이라 하면  거기는 요만한 손가락도 찔리지 안하고는 낄 수 없는 그런 꽉 얽혀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자기는 그 군화 신고 군화 신고, 군화는 아무것이 아무래도 안  찔리거든. 군화 신고 모가지를 새끼로 홀카 가지고 마구 끌고 달아납니다.

달아나니까 땅까시 발을 끌고 달아나, 이러니까 그 바늘 위를 걸어간 거라.

이러니까 발바닥에는 전부 다 피요. 이러니까 막 아프니까 아무래도 덜  끌려가니까 모가지는 끌고 가지 모가지에서는 피가 올라가고 이러니까 자빠지면  질질 끌고 이래도 예수 믿는 것을 안 믿겠다고 항복하지 안하고 그래 믿은 다  그런 신앙들입니다. 그것은 또 소군지요 모두 다 더 컸습니다. 이랬는데 내가  올해도 거창 팔월 달 집회 가니까 그분이 와 가지고 손을 잡으면서 '아이구,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할 때에 어떻게 마음에 반가운지 여기 와도 아들집에 와  가지고 얼마 있다가 갔는데 지금 갔는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정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데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소.

 그러므로 {내 죽음을 기념하라} 그 말은 예수님이 대속해 죽으신 이 사랑을 이  공로 큰 구원의 소망을 증거하고 증거하면서 나도 주를 따라서 죽는다 하는  자기가 십자가로 죽어서 주를 위하고 형제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되어지는  이것으로서 증거 하는 것을 가르쳐서 "나를 증거 하라 땅 끝까지 나를 내 증인이  되어달라, 또 나의 죽음을 내가 올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각오에는, 이 각오에는 우리가 눈물로 시작해 가지고 눈물이  없어지는 마음이 뜨거운 각오, 이를 가는 각오 이것이 아니면 이 걸음을 걸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줄줄 우는 감정적인 그 정서적인 신앙 가지고 걸어가지 못하는  것을 어제 성찬 때에 말했습니다.

장성한 이 성찬에 역사를 어제 했지마는 아직까지 어린 사람은 그 눈물이 최고의  이 성찬인줄 아는 사람들은 어제 은혜를 받지 못했을는지 모르겠고 또  비웃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대속하신 이 대속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의 몸과 생명을 바칠 때에는 뜨겁고 강한 승리의 영원한 소망의  각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주의 죽으심에 고난에 참여하여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려 함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이 죽음에  동참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권능에 동참하려 함이라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감사의 눈물이 하늘에 소망으로 인한 기쁨으로 성장되고  기쁨으로 성장된 것이 주님의 사랑의 계대되어 사랑의 제물이 될 뜨거운 강한  죽음을 초월한 이 뜨거운 강한 각오의 믿음으로 성장되고 이 믿음이 자존자의  목적, 자존자의 예정, 창조, 섭리의 대속, 성령과 진리와 주의 피가 보증, 모든  존재가 이거 위해서 지음을 받아 대기하고 존재하고 있는 것, 모든 움직임이 이를  위해서 영원 전 예정하신 그 순서대로 착착 이루어져 나가는 이 관계 속에서  한없는 감사와 기쁨과 하늘에 욕망의 넘침과 이 보증으로 인한 평강과 욕망으로  인한 단 마음의 순생 순교가 되어지는 여기에 나아가야 십자가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늘 명상해야 됩니다. 아 내 구원의 유래는 영원 자존자의 그  자존한 사랑, 자존한 기쁨, 자존의 뜻, 자존의 뜻이 목적을 정하시고 자존의  지능이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자존의 능력의 섭리가 보존 재창조 대기를  시키시고 도성인신하셔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대속하신 우리들을 온전한 구원에  목적 달성인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그  순서대로 지극히 큰 전능의 성령이 이 일을 책임지고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영원히 다스리는 이 전능의 진리가 수종들고 성령이 책임주가 되시고  진리가 동행 이바지를 하고 예수님의 피공로가 모든 뒤닦이를 하고 모든 이 값을  다 치러서 조금도 죄의 면이나 의의 면이나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면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이 대신 낸 이 대가가 보증을 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대로  창조하신 모든 것이 대기 속에서 기다리고 대기 속에서 이 지음 받은 것들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속에서 공산주의가 독침을 척 내는 그것도 이 일을 위해서  창조 받은 피조물, 창조 받아 고대하고 있는 것이요.

그 순서도 하나님이 예정한 순서요, 이 목적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의 사랑  속에서 여기서 성령의 도우심, 진리의 도움, 주의 피공로의 대속, 어디까지 내가  어떤 무엇이 있어도 대속으로 인해서 사죄와 칭의와 새새명으로 깨끗해진 이것이  이 능력을 힘입어 기다리고 있는 만물이 고대하는 소원대로 하나님이 순서대로  하나님이 순서한 예정이 사랑 속에서 자기 하나만이 자기 하나만이 능동적으로  유기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에 하나님의 법칙, 그 이행에 수행에 척  들여서 단 마음으로 순생도 순생이라 하는 것은 죽음으로 살았는데 자기가 죽어  자기가 죽어 자기가 부인됨으로 주의 뜻을 행해야 되고 자기 욕심이 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그것이 순생입니다.

자기 하고자 하는 요것을 죽음으로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생활하는 그게  순생이요, 죽음으로 산다 말이요. 순생이요. 마지막에 자기의 전부가 주의 뜻  요것을 위해서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그것이 순교입니다. 단 마음으로 순생  순교를 이렇게 하는 것이 요렇게 깨달은 요 지성적인 믿음, 요 믿음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이러니까 답을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성령으로 역사해서 행해 가면  걸은 것 만치 자기는 벌써 지식이 됐어.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높은 신앙 걸음을 걸은 그 사람은 아무리  일자무식이라고 세상에 박사가 그 사람을 미혹시키지 못하고 그 사람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이것이 무식한 자를 택하여 유식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번에 깨끗하심을 받은 여기에는 어제가 아닌 아래보다도  여러분들에게 시험이 많을 것입니다. 주의 피와 살과 연결된 것을 이 연결에서  끊어지게 하려고 마귀란 놈이 얼마든지 유혹하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나  끊어짐을 유혹 받아서 받았으면 즉시 일어서십시오. 즉시 일어서서 다시 연결된  것을 찾으십시오. 다시 찾으면 그 능력이 다시 역사 합니다.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일어서십시오.

그러나 이렇게 끊어져도 일어선다는 그것은 큰 죄악이 됩니다. 큰 죄악이 돼, 아  이래 끊어졌다가 또 뒤에 일어서면 되지 않느냐? 끊어졌다가 일어서도 된다고  하는 그것은 그 끊어짐이 큰 죄악이 됩니다. 그래서 끊어졌을지라도 일어서기는  일어서십시오.

일어서는 것은 그건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인간이  걸어갈 수 없는 이 지극히 거룩한 이 능력의 걸음을 누구든지 다 걸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걸어가려면 다 걸어갈 수 있습니다. 다 걸어갈 수 있으나  인생 단독은 일보도 걸어갈 수 없는 지극히 높은 걸음입니다. 믿음으로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를 힘입으면 걸어갈 수 있소.

이러기 때문에 이 순서가 안되면 안 돼. 이 순서를 자꾸 돌아서서 이 순서대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하시는 거는 꼭 법으로 구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거는 법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합법적이 아니면 안 돼. 합법적이  아니면, 그러기 때문에 합법적이어야 되기 때문에 이 법을 밟으려고 하나님이  애를 쓰시고 자유하지 못하시고 우리에게 자꾸 권면 하시고 타이르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리 신조가 높은 데는 신앙이 높다는 징조입니다. 교리 신조 이상은  가지를 못합니다. 불이니 방언이니 지시니 그 진동이니 이것이 왜 생깁니까?  교리가 거기까지 가고 더 이상 가지 못했기 때문에 가는 길을 몰라서 갈래야  어떻게 열심을 내야 될는지 어떻게 힘을 써야 될는지 어떻게 애를 써야 될는지  어떻게 노력해야 될는지 노력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잘 모르니까 몸이 뜨겁기만  노력하고 떨리기만 노력하고 그것 밖에는 노력할 길이 앞길이 전진이 없으니까  군대를 인도하는 데에 앞으로 전진하는 길이 없으니까 옆으로 퍼질 수밖에 없는  이것이 필연적으로 인도자들 때문에 탈선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리와 신조를 이것을 보아서 알려고 노력하지 안 하면 안됩니다.

일반적으로 교리와 신조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 깨달음이 참 혼자 깨닫는 것,  여러 사람이 깨달아 그 사회성 있고 또 어느 시대나 변하지 안 하는 그 역사성이  있을 때에 비로소 교리로 제정을 하는 것이나 교리에 제정되지 못한 그 교리와  신조가 탈선이 되든지 그것이 발단이 되어 바로 되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을 알고 여러분들이 믿어야 될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그렇게 일반 신자들이 아는 그게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굳게 잡지  안하고 나가면은 이단이라는 말 자꾸 들을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똑똑히 알아서  똑똑히 배워, 배울 때에 성신의 감동이 자기 속에 있었으면 가서 이단이라고 하는  미혹을 받았다가도 마지막에 반드시 반성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또 자기가 깨달을  때에 확신을 가지고 깨달았으면 미혹을 받지 안 해요.

그러므로 두 가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자에게는 무식해도 그때그때 한  걸음 약 한 걸음 인도를 따르면 어디까지든지 나아갈 수가 있고 이 방편의 길이  있고 이것이 아니고 자기가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평가해 가지고  걸어가는 이 또 걸음이 있으니 이 걸음은 자기가 알려고 깨달으려고 하는 이  기회기회 알게 해 주는 것을 자꾸 깨달아 가질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바로 깨닫지 못한 성구가 있으면 그 성구는  여기 호주머니에 적어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오랫동안 여기 적어 있지 안 해도  기억하고 있으나 그걸 깨닫지 못하는 의문 중에 있는 그런 성구를 어떨 때는  목욕탕에 가서 퍼뜩 깨닫게 되고 어떤 때는 어떤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에 퍼뜩  깨달아지고 어떨 때는 변소 가서 용변할 때에 깨달아지고 이렇게 깨달아질 때에  퍼뜩 빛이 오니까 아 환하게 보여서 깨달아졌는데 깨달아진 그것을 아  깨달아졌다 하고 나니까 뒤에 가버리고 없습니다. 없으니까 여러 번 속았기  때문에 깨달아지면 그 자리에 갈 가는 것도 안가고 급한 것도 아니고 변소  들어갔다가 나오지도 안하고 자꾸 재론 재론할라 하지만 붓을 안 가지고 있으니  기록하지는 못하겠고 또 새기고 또 새기고 수십 번 새겨서 자기에게 박히도록  이렇게 깨달아 새기고 난 다음에 이제 그 자리를 떠나 나와도 나중에 보면  어디로 갔는지 없어서 다시 그걸 깨달으려고 자꾸 이래 기도하고 생각하면 다시  그것이 새로 발견이 되어지고 이렇게 되는 것이 발단적인 이 깨달음의 지식인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안 믿는 사람이 과학적으로 말하면 새로운 발명과  같은 것이라 그 말이요.

이러니까 그것을 기록하고 이래 가지고 오랫동안 깨닫고 자기 혼자 그와 같이  살고 이렇게 한 것이 그것이 그 사람의 교리와 신조가 돼 가지고 그 말로 발표가  되고 나가는 것이니까 그렇게 쉽게 알아지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거요.

마음을 기울이지 안 하면 졸며 들어도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거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기독자의 구원은 논리적인 구원인데 논리의 최고의 완성인 진리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 참된 이치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치 없는 그런 무식한 데에서 아무나 따나 따지지 안하고 구별하지 안  하는 데에서 되는 구원 아닙니다.

한 십 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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