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건축

 

1985. 3.  13. 수새

 

 본문 : 학2:18-23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 달 이십사 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십 사일 오늘부터 네가 추억하라 그것은 과거를 미루어 기억하고 생각해라. 다시  말하면 과거를 현재를 삼아라 하는 말입니다.

 또, 여기 학개서에 보면 네 소위를 살펴 보라, 네 형편을 살펴 보라, 네 형편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너와의 관계가 쉬지 않는 것을 네가 알 수 있으리라, 네 소위라  말은 자기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네 소위를 네가 살펴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와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또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시고 너를 저주하시고 하는 것이  그것이 시간을 두고도 확실할 것이고 또 날을 두고는 더욱 뚜렷할 것인데 네 소위를  살피지 아니하기 때문에, 너와 하나님과의 그 관계가 현저히 뚜렷하게 하나도  빠짐이 없이 그 관계가 맺어지고 있어서, 하나님께 네가 순종하면, 하나님의 계약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또 너와 계약한 그 계약에 순종을 하고 하는 것이 시간은  내버려두고 그저 그 순간, 순간 순간 그것이 확실한 그것을 네가 알 터인데 네  소위를 살피지 안하기 때문에 모르게 된다. 그런고로 소위를 살펴라.

 찰나라고 말하면 참고 계산할 수 없는 그런 짧은 시간을 가리켜서 찰나라고  말하고, 순간이라고 말하면 찰나보다는 좀 길지만 그걸 뭐한 시간이니 십 분이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그런 아주 짧은 시간을 가리켜서 순간이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하시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계약을 준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하든지 어기든지 하면 또  하나님께서는 내 순종과 어기는 거기 따라서 당신이 어떻게 또 순종하시고  어기시고, 어긴다 말은 하나님이 위약을 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실라고 했는데 복이 복되지 안하고 저주하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피동 되는 대로, 하나님께 우리가 피동 되는 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동  하시는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피동 하시는 것이 그것이 사람이 둔해서 잘 모르지. 찰나도 지체하지  안하고 그 찰나 찰나마다 우리의 그 피동에 따라서 하나님은 거기 대해서 피동적  행위를 하십니다. 우리가 복 받을 피동을 했으면 당신이 내 복 받을 피동에 즉시  피동 돼서 복을 주시고, 내가 화를 받을 피동을 했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했는데 하라는 걸 하지 안하고, 하라는 것을 안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화  받을 그런 피동을 한 것입니다. 화를 받을 그런 피동을 했으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나에게 내 행동에 피동 돼서 화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 뭐한 시간을 두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그 찰나 찰나로 이루시는데. 우리가 둔해서  그렇게 구별하지 못하지 하나님은 즉각 즉각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거울을  두고 거울에다가 물건을 이렇게 두면 즉시 반사돼서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 행동에  따라서 즉시 하나님께서는 그 거울에 반사되는 것처럼 우리 행동에 따라서 즉시  당신이 거기 반응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사귀기도 쉽고 또 하나님과 멀어지기도  쉽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좀 권력가나 좀 내게 필요한 그런 권위의 사람은  만날라 하면 그 만나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뭐 시간이 상당히 걸리고 준비를 해도  안되는 것인데, 그와 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그렇게 힘든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와 힘드는고 하니, 사람은 둔하고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만날라 하는 사람이나 만나 줄 사람이나 다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많이 받아 있으니까 그런 것을 정리하고 처리하는 것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못 만날 사람을 만나려면 그 만날 만한 그런 이유가 있어야  되니까 그 이유를 만드는 데에는 몇 달 걸리는 것도 있고 몇 해 걸리는 것도 있고  또 몇십 명을 거쳐야 되는 그런 일도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와는 직접입니다.

직접이기 때문에, 내가 몰라 그렇지 하나님은 내게 대해서 반응하시는 그 반응이  찰나적인 반응이요 순간적인 반응이요 시간적인 반응이요 언제든지 즉시 즉시 거기  대해서 하나님은 반응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의 소위를 살펴보지 안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도  하나님은 내게 대해서 아무 그렇게 관심이 없는 거같이, 또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무슨 지각이 없는 거같이 그렇게 여기기 쉽습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지극히  크시다고 하는 하나님께 무슨 감각이 있으며 무슨 지각이 있는 줄 아느냐 그  하나님께서 무슨 우리에게 대해서 무슨 반응이나 그렇게 그런 것이 재빨리 있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동할라 하면 그래도 몇십 년 걸려야 동하고 정하는 것도 몇십 년  걸려야 정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둔하게 보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시편 73편에 나타난 그 사람이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상대해서 자기 행동에 따른 반응이, 자기  행동에 따라서 움직이심이 아주 심히 번개같이 빠르다는 그런 것을 느끼는 그런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의 소위를 살펴서 하나님이 자기 소위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살펴보고, 자기 정신을 살펴보고, 자기 성질을 살펴보고, 자기 기분을  살펴보고, 자기에게 있는 평강을 살펴보고 살펴보면 즉각 즉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기 행동에 따라서 반응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보면 하나님께 대해서 아무 감각 없는 하나님으로 이렇게 상관을 가지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좀 노여워했는지 하나님이 기뻐했는지,  참 '순간 순간 찰나 찰나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변동된다. 언제든지 그 하나님으로  그렇게 요동치 않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 행동이 심히 가속도로, 가속도로  변동된다.' 그러면, 자기의 소위를 살필 때에 자기가 그렇게 아주 신속하게  변동되는 자기는 참 변하는 사람이라, 자기의 마음도 생각도 뜻도 욕심도 정신도  성품도 자기 행동도 변하는 사람이라. 자기를 살펴서 자기가 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은 또 자기 소위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그렇게  변동하시는 것을 자기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자기가 하나님의 이 선포해 놓으신 계약의 말씀을 준해서 그  계약의 말씀을 따라서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 행동이 그것이 빠르기는  빠르지만 그 행동보다도 더 빠른 것은 자기에게 하나님 같아서 영감 시켜 주시는 그  영감에 따라서 피동 되는 것은 더 빠릅니다. 그러면, 자기의 소위가 하나님의 법에  준해서 피동 되는 그 피동이 한갓 되지를 못하고 이렇게, 다시 말하면 그저  순종이면 순종으로 이렇게 하지를 못하고 순종했다가 또 거역했다가 순종했다가  거역했다가 이렇게 한갓 되지를 못하고,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그저 내가 피동  할라 하면 그분은 내게 대해서 능동자가 되는 것인데 그 능동이 하나님이 내게 능동  하시는 것이 그것이 혹 시간마다 바꾸어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찰나마다  바꾸어지느냐? 바꾸어지는 것이 찰나마다 바꿔집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인도하는 것이 찰나마다 바꾸어지는 것을 자기가 살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가라 했으면, 가라 하고 난 가라는 것이 그것이 그만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이고 한 번 명령했으면 그 명령만 명령해 놓고 그 다음에는 하는 걸 보고 가만히  두는 그게 아니고, 한 명령이 이것이 가라 하다가 가지 말라 가라 가지 말라 가라  가지 말라, 이래 가라 할 때는 가고 가지 말라 할 때는 섰고 자꾸 이게, 비유건대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능동 됨이 심히 가속도의 변동성이  있다. 변동한다.

 그러면서, 그러면 변동이냐? 변동이냐? 변동이 아니고 이것은 일 년이고 십 년이고  한 번 명령한 그 명령이 또 변동 안하는 것도 있다. 이러니까, 변동하고 변동 안  하고 이러니까 그분을 따라서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든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변동되는 주님께 내가 따라서 또 변동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열 번 변동했는데 나는 다섯 번 변동했으면 다섯 번은 벌써  복종치 안한 것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열 번 변동하는데 내가 열 번 변동을 했으면  다 복종한 것이 되겠습니다. 그럴 때에 내가 당신에 따라서 열 번 변동되는 그  변동에 피동이 되니까 또 당신이 내게 대해서 반응해 주시기를 열 번 또 피동 된  것을 그렇게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소행을, 자기 소위를 살피는 데에서 자기도 알 수가 있고 또  주님도 알 수가 있고, 살피는 거기서 주님과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을 정확히 알  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살피지 안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그대로로써 변동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스겔 1장에는 보면 그가 번개와 같이 움직인다 했어요. 번개같이  움직인다 했어. 번개같이 움직이는데, 보니까 그 생물들이 번개같이 움직이니까  따라서 또 번개같이 움직이더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동 되실 때에 번개같이 그 능동이 변동되고 번개같이 변동되는 그 능동에 나는  피동이 번개같이 되어지고. 또 내가 번개같이 피동 되는 그 피동에 하나님께서 나를  따라서 또 반응하시는 그 피동 됨이 번개같이 되어지더라.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번개같은 사귐, 번개같은 나뉨, 번개같이 사귀었다가 번개같이 또 떨어졌다가  번개같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다가 내가 번개같이 하나님께 미움을 받았다가 또  사랑을 받았다가 이렇게 되는 그것을 가리켜서 번개같다 그렇게 에스겔 1장에는  그렇게 말씀을 해 놨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그래도 '아,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주님이 이렇게 하신다. 아,  내가 그만 이렇게 말한 마디 했더니만, 이런 말한 마디 했더니만 그만 주님과 나와  멀어지고 주님의 그만 감동이 없어지더라. 주님이 그만 떠나 버리더라. 또 내가  이래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더라.' 이래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사귀는 그것이 마치, 사람 사귐은 그렇츰 변동될 수가 없는데 사람  이상으로 변동되는 그것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 신앙의  사람들이오.

 그런데, 그것이 또 잘못됨이 있습니다. 잘못됨이 있는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불건전한 신비주의라 하고 바로 된 것을 건전한 신비주의라고 하는데, 건전한  신비주의가 돼야 참 기독교지 신비가 없는 그런 기독자는 그는 대개는 보면 그만  하나의 육체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법적인 사람,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지 은혜의 영감 아래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는 어떤 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인고 하니, 그  사람이 피동이 되기는 되는데, 이렇게 '주님이 날 지금 가라 한다 오라 한다,  먹어라 한다 먹지 말라 한다, 일하라 한다, 또 이 말 하라 한다 하지 말라 한다'  이렇게, 한 시간을 두고도 그 사람의 그 언행 심사의 행동이 여러 번 혹은 수십 번  이렇게 변동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동을 합니다.

 변동하는데, 그렇게 변동되는 것이 그 변동되는 작용이 없는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아니라 변동 있는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인데, 변동 있는 사람  가운데에 두 종류가 있으니까 한 종류는 아주 못 쓸 사람이고 한 종류는 좋은  사람입니다. 둘 다 자기가 다른 것에게 피동이 되어야, 하나님께 피동 되어야 될 줄  알고 이래 피동될라고 이렇게, 그것이 신앙생활인 것을 알고 피동될라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이 그 희로 애락을 다 주장하시고 언행 심사를 주장하시니까,  하나님이 말하라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라는 대로 행동하고 할라 하니까 하나님께  내가 피동이 돼야 된다 하는 그게 자기 신앙 생활인 줄 알고 피동될라고 애를  씁니다.

 애를 쓰는데, 내가 피동 되는 그 능동이라는 대상이, 내가 움직이기는 어디 따라  움직이느냐? 내가 따라서 움직이는, 나를 움직이는 그 능동인 그 능동이, 나를  움직이는 그 능동인 능동이 하나님의 이 율법의,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이 초보에는  능동이 되고, 능동이 되고, 말씀의 율법이 능동이 되고, 그 다음에는,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 성신의 감동이 우리에게 감동시키는 그 감동이 능동이 됩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이 계약의 말씀, 신구약 성경, 이 계약의 말씀에 내가 피동  되는 이 피동을 가지면 그 다음에는 성신의 감화에 내가 피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 사람이 피동 되는 것이 그렇게 둔하지 안하고 자주 자주 이렇게 피동이  됩니다. 아주 순간적으로 피동이 됩니다. 순간적으로 피동이 되는 그 피동이니.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연습시키기 위해서 아주 피동을 이렇게 피동 되고  저렇게 피동 되고 자꾸, 하나님이 이렇게 피동 하게 하고 저렇게 피동 하게 하고  자꾸 피동 하게 한다 말이오. 피동 하게 하는데, 그 연습을 해서 하나님이 순간에,  비유건대 순간에 열 번 당신이 변동하는 그 능동을 역사 하시면 나는 열 번 따라서  거기 피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러니까 이러고 자꾸 따라서  이렇게 따라서 움직이기를 우리 마음에 따라서 몸이 움직이는 것처럼. 마음은 영에  따라서 움직이고 영은 하나님을 따라서 이래 움직이는 것처럼 이렇게 움직여지는  그것이 건전한 신비주의자입니다. 건전한 신비주의자이니까 그 사람이 참으로 실수  없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는 어떤 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인고 하니 자기는  피동 해야 될 사람인 줄 알고 피동을 하는데 영감 피동을 자기가 언제든지 중하게  여겨서 영감 피동에 힘을 쓰고, 하나님의 선포해 놓으신 계약, 진리 피동, 다시  말하면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뚜렷이 보이는 이 문서 계약에, 문서 계시에 피동  하는 이 피동을 무시하고 그만 영감 피동에 주력을 하는 사람이 나중에 탈선돼  가지고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서 계시에 피동 되는 이 피동을 처음에 많이 연습하고, 문서  계시 피동 속에 영감 계시가 있습니다. 영감 계시는 언제든지 문서 계시 피동 속에  영감 계시가 있기 때문에 문서 계시를 순종해서, 문서 계시에 순종하면 문서 계시  순종으로 그 울타리 속에 들어갔습니다. 탈선되지 안할 수 있는, 죄가 되지 안할 수  있는 진리 안에 들어갔습니다. 진리 울타리 안에 들어갔으면, 들어갔지만 진리  울타리 안에는 범위가 넓습니다. 진리 안에는, 울타리 안에는 범위가 넓은데, 이  울타리 안에서 한가운데가 그게 중앙인데. 한가운데가 중앙인데 그 한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이라 그 말이오.

 예를 들면 백 평 속이라는, 백 평이라는 울장을 해 놓은 그 백 평 안에 들어가기는  들어갔지만 그 한가운데가 있는데, 그 한가운데가 있는데 한가운데도 가 있을 수  있고 저 변두리 울타리 근방에 붙을 수도 있고 이래 있는데, 거기서 울타리밖에는,  울타리밖에는 나가지 안해서 탈선은 안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명중은 안 됐다  그 말이오. 그랬는데, 울타리 밖에서 안에 들어갔으니까 탈선은 안 돼서 죄는 되지  안하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명중하지는 못했다 그거요. 문서 계시는 둔해서  그렇게 다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니까, 그 문서 계시 복종으로서 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거기서는 누가 인도하는고 하니 성령이 중앙으로 인도합니다. 제일 한  가운데. '여기가 한 가운데다.' 이것도 이리 치우쳤고 저것도 저리 치우쳤고 이래  치우쳤는데 여기가 한 가운데 이게 명중이다 그 말이오. 명중.

 좌우 상하로 치우치면 그거 틀리지 안해요? 그거 죄라 말이오. 그러니까, 울타리  안에 들어갔으니까 죄에까지는 나아가지 안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명중은 되지  안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거기 명중되도록, '너는' 울타리가 저기 있는데 울타리  이쪽 동쪽 울타리에 붙어 있고 서쪽 울타리에 붙어 있고 남쪽 울타리에 붙어 있고  북쪽 울타리에 붙어 있으니까 '너는 여기 붙어 이라면 안된다.' 성령이 인도해  가지고, '좀 들어 오라 들어 오라 들어 오라' 해 가지고 한 가운데, 중추점이 되는,  중추점이 되는 그 한 가운데 딱 인도해서 세우는 이는 누구냐 하면 성령이라 그  말이오.

 이런데,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이 어디서 생기지는고 하니 하나님의 문서 계시, 이  문서 계시는 이것은 알라고 해도 노력이 필요하고 또 거기 복종할라 해도 노력이  필요하고 또 복종하고 안하는 것이 환하게 알 수 있다 그 말이오. 알 수 있고, 이  영감 계시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안하는 것이요 참 고상한 것이니까 영감 계시는  그것은 노력도 들지 안해도 말할 수 있고 또 영감 계시는 다른 사람이 틀렸는가  옳은가 하는 그것을 확실히 알기 어렵다 말이오. 영감 계시는. 이러니까, 이 게을한  사람들이 문서 계시를 취급하지 안하고 그만 직접 영감 계시를 받을라고 애를 쓰는  가운데에서 그 실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접 영감 계시를 받을라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어떤 사람들인고  하니 하나님의 문서 계시에는 노력이 들어야 되기 때문에 문서 계시의 노력을 하지  안하고 자기는 그저 공짜배기로 따먹으면서 영감 계시 받았다는 이런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주장을 해 가지고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제자들이  대개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문서 계시를 할라  하니까 힘이 드니까, 문서 계시를 연구해서 신구약 성경을 다 통달할라 하니까 힘이  드니까 신구약 성경 연구는 하지 안하고 '성신에게 감동됐다' 이래 가지고 자꾸,  성경을 위주로 하지 아니하고 기도를 많이 위주로 하고 명상을 위주로 하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 그만 자기도 모르게 탈선이 돼 가지고 성신의 감화에 피동 된다는 그  영감 피동이 그 것이 자기 주관 피동이 된다 말이오. 자기 주관 피동이 돼서  자기에게 이런 생각이 들면 '아, 이게 영감이다.' 그만 자기 주관이라는 자기 생각,  자기 주관 그것을 영감으로 이렇게 인정해 가지고 그만 자꾸 영감 피동인 줄 알고  하는 것이 자기 생각 나는 대로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자기 생각 나는 대로하는  사람이 돼 버리고 말아요.

 이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서 생겨지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미끄러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미끄러지는 구멍을 만들어 놨는데  미끄러지는 구멍에 빠져 버렸습니다. 미끄러지는 구멍에 빠지게 해 가지고 그만  미끄러져 버립니다. 그 미끄러지는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 이름이 뭐인지 혹 누가  아는지? 저 O 조사님 한번 구멍을 한번 말해 봐. 그 미끄러지는 구멍이 뭐지?  주관은 내나 내가 주관 말 했는데.

 그 미끄러지는 구멍이 뭐이냐? 자기 중심,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욕심.

그래서,'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됐다.' 그거 내나 원죄입니다. 선악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됐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당신  중심으로 선악을 다 구별하는 것처럼 제가 하나님이 돼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저  좋아하면 선이고 저 싫어하면 악이고 저에게 가까이하면 제게 속하면 선이고 저를  배반하면 악이고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중심해 하는 것처럼 이제 사람이 자기 중심  하는 그것이 같이됐다 그 말이오. 그게 원죄입니다.

 원죄인데, 그것이 뭐인고 하니 좀 전에 우리 말씀들을 때에 사울 왕이 가서 아말렉  족속을 치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진노 받을 터인데 그 사람이 가 가지고 '사울이  어디 가 있느냐?' 사무엘이 물으니까 '지금 길갈에 가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기념비  세우고, 자기 위해서 기념비 세우고 지금 아마 길갈로 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 '자기 위해서 기념비 세우고 길갈로 갔을 것입니다.' 자기 위해서 기념비  세우는 그게 말하면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자기 중심 위주 내나 그게 분산되면  자기 높이고자 하는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명예 영광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벌써 무서운 가운데 빠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문서 계시로 나타난 문서 계시도 바로 명중할 수가 없고  또 영감 계시는 더욱 명중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감 계시라 하는 것은  뭐이냐? 자기 중심 또 자기 주관 그것이 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그런 제자들을 많이 내놓고 있느냐 하면 자기가 인기를  얻고자 하는 사람, 인기를 얻고자 하는 사람, 또 자기가 존귀를 받고자 하는 사람,  자기가 높임을 받고자 하는 사람. 자기가 많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끌어 들여서  인기를 집중하고자 하는 사람, 자기가 높임을 받고자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그  구멍에 빠져 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왜 그 구멍에 빠지는고? 처음에는 문서 계시로  거석하는데도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영감이 이렇게 말한다. 성신의 감화가 이렇게  말한다' 이래 가지고,  성신의 감화는 자기가 꼭 예수님의 대속을 입었을 때에. 대속을 입었을 때에  영감이 오는 것인데, 대속을 입었을 때에 영감이 온다. 대속을 입는다 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대속을 몇 가지로 입습니까? 몇 가지로 입지요? 예?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세 가지로 입는데, 세 가지로 입는데 이 세 가지가 또 몇 가지  되지요? 여섯 가지. 세 가지가 여섯 가지가 돼야 된다 말이오. 여섯 가지가 돼야  되는데, 하나는 율법으로 정죄되고 하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이제 대속함을 받는다  말이오. 정죄받고, 정죄받고 또 은혜 받고, 정죄받고 은혜 받고 그 둘을 받아야  돼요. 은혜는 공짜 배기로 받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정죄 받아서 은혜가 필요  있는 사람되고 은혜 받아 가지고 비로소 산 사람이라. 이 사람이 돼야만 성신의  감화가 오는 것인데,  성신의 감화를 이렇게 하지를 안하고, 율법도 지키지 안하고 그만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삐뚤어진 것도 인정받기 위해서 '이거는 내가 성신의 감화를 받아  이렇다.' '성경 말씀에' '성경 말씀보다 이거는 내가 영감 받아 이랬다.' 다른  사람에게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 '영감 받아 이랬다. 성신의 감화가 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자꾸 이래 가지고 그렇게 거기서부터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높이기  위하니까 뭐가 나오느냐? 허위가 나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고 나니까 허위가  나와 버려. 허위가 나와 가지고 그래 가지고 한 번씩 두 번 씩 자꾸 이게 자라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그만 성경 말씀 뒤빌라 하니까 힘드니까 그거 냅두고 '이는  영감이다 영감이다' 그래 가지고, 또 '영감이면 다 됐지 성경 볼 게 뭐 있느냐? 다  성경은 사람들이 기록한 거 아니냐? 사람들이 기록한 것인데 영감 받아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니까, 영감 받아 기록한 것이니까, 내가 영감 받으면 성경 볼 필요가 뭐  있느냐?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인데. 이러니까, 성경 기록해 놓은,  남이 기록해 놓은 거 구차스럽게 볼 게 아니라 내가 영감만 받으면 성경 없어도  된다' 이렇게 돼 가지고 탈선이 돼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는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피동 되는 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요, 또 건전한 신비주의자는 하나님께 피동 되는 것이 건전한  신비주의자인 것입니다.

 신비주의가, 신비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실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난 다음에는 또 그 다음에는 성경에 가서 공부하고 성경  공부하고 난 다음에 신학교 공부하고 자꾸 학으로 학으로서, 그만 학으로만 자꾸  이렇게 올라가고, 자기가 언제 벌써 한 삼십여 세가 되도록 까지 학으로만 자꾸  가다 보니까 이거, 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학만 전공을 하기 때문에 언제 이  신비한 신비성을 자기네들이 체험할 수도 없고 공부하지를 못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 사람들은 영감을 무시해 버립니다.

 얼마 전에 내가, 지금은 그 말이 또 쑥 들어가 버렸어. 아마 말만 하면 암만  구석에서 말해도 그 말이 퍼져 나가는 것 같아요. 어떤 아주 유력한 신학자입니다.

한국에 있는 유력한 신학자인데. 내가 이름은 말하지 안해. 신학자인데. 그 사람이  또 유력한 정통 교파에 있는 사람입니다.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언제 글을 쓴  거 보니까 '영감 영감 말하는 거, 영감이 어디 있느냐? 지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만 살면 되어지는 것이지 영감이 어디 있느냐?' 영감을 무시하는 그런 글을  써냈어요. 써냈다 말이오. 영감을 무시하는 글을 써냈어. '성경 진리면 제일이고  모든 사람이 교리 신조 말했기 때문에 교리와 신조대로만 살면 되는 것이지  영감이라 하는 거 뭐 있느냐?' 그렇게 써냈는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보고 반박을  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반박할 만한 그런 필적도 없고 이러기 때문에 강단에서 모일  때마다 좀 많이 말했어요. 대구 집회에서도 말했고 거창 집회에서도 말했고  교회서도 말했고 이래 말했는데, 그것은 지금 쑥 들어가서 영감은 필요 없다 하는  그런 말은 지금 들어간 거 같아요.

 제가 저 OO 교회 가 가지고 집회를 하니까, 그때 OO 신학교가 여기 OO동 빌딩에서  OO 신학교를 하고 있을 때인데, 그때에 신학생들이 전부 다 올라왔어요, 그 집회에,  하나도 안 빠지고 다 올라왔어. 다 올라 왔는데, 공부하는 중에 있고 지금 이제  휴강될 때가 아닌데 다 올라왔어. '이거 어쩐 일로 다 올라왔느냐?' 나는 그때 몇  사람밖에 모르지, 나는 그때 별로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처음에  입학했다가, OO 신학에, OO 신학교 제일 첫 학기에 입학을 해서 나흘 동안 있다가  그만 마음에 '에이, 내가 여기만 자꾸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게 뭐이냐? 나는 그만  가버릴란다.' 그래 그만 나는 여기 그만 안 배우고 가겠다고 그래 그만 왔는데,  그때 그러고 마니까 별로 모른다 그 말이오.

 신학생들이 다 왔다 해서, 왔어.' 내 하나 보니까 저게 지금 대만에 가 가지고  선교사로 가 있는 사람. O 무슨 목사, O 무슨 목사인데, OOO 목사가 거기 왔어요.

왔는데, 그때 학생인데 와 가지고 돈 봉투를 하나 가지고 왔어. '이거 뭐이냐?'  '어머니가 갖다 드리라 합디다.' '아, 나는 이런 거 안 받는다' 이러니까 '어머니가  이제까지 평생 살아오시기를 언제든지 하나님의 종에게 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지  안하고 이래서, 빈손으로 안 간다고 거석 해서, 어머니가 평생 이거 지켜 나오는  것이니까 이걸 받아 주십시오' 그 말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것도 참 믿음 있는  사람의 소리라. 꼭 그래. 그래서 그만 받고 그래 인제 묻기를 '왜 이렇게  신학생들이 이렇게 왔느냐?' '예, 온 것은' 그때 그 OO 신학교가, OO 교파가 노회가  여럿이 있지 안하고 노회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 그 노회 이름이 총노회라.

총노회. 총노회가 나중에 이제 차차 차차 커져 가지고 무슨 노회 무슨 노회 노회가  갈라졌습니다. 그 총노회 회장이 OOO 목사님인데 OOO 목사님이 와 가지고 '이렇게  말라빠진 교리와 신조만 자꾸 거머쥐고 있으면 뭐할 것이고? 성신의 권능을 받아야  되지. 성신의 감화를 받아야 되지 뭐할 것이냐?' 가 봤자 아무 일도 하지도  못하면서 뭐 하고 있냐고. 성신의 감화를 받으라고. 성신의 감화를 받으려면 OO  교회 지금 백 아무것이가 집회하고 있는데 거기 가서 다 성령 받으라고. 이래  가지고 호통을 쳐서 그래 올라 왔다 해요. 그래 다 올라왔다고 이라는데,  그때에 그 신학교에서는 왜? 영감이라 하는 소리를 무시했었습니다. OO 교파가  처음에 거석할 때 영감이라는 말이 없었고 영감이라는 것을 아주 무시했습니다.

그저 자꾸 말하는 것이 지식 말했고 교리 신조, 자꾸 이렇게 교리와 신조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말을 했는데, 그때부터 영감이라는 것이 좀 있다가 또 그 뒤에 그만  이래 또 좀 영감 받은 사람들 다 이래 그만 쫓겨나 버리고 이리 저리 해 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별로 영감이라는 걸 말하지 안해. 영감은 말하면 생전  영감이라는 것을 경험도 없지 체험도 없지 만나 보지도 못했지 이러니까 거기  가서는 그만, 거기 가서는 아주 백지라 그 말이오. 백지지,  이제 자기네들이 자랑할 것은 뭐이냐 하면 교리 신조,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고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고' 마구 신학을 주 대서 헬라어 히브리어 불란서  어 독일 어 이래 주 대면서 이렇게 해 봐야 그만 정신이 빠져 가지고 그만  얼떨떨해서 그만 그 단어 외울라고 하다 보니까 혼 다 빠져 버렸고 그만 그래야  두드려 잡아 놓고 복종을 시키지 안 되겠다 그 말이오. 이라니까, 신학 삼 년에,  그때, 지금은 사 년이지만 그때는 삼 년인데. '신학 삼 년에 신앙 뺏기지 안했으면  위대한 일군이 된다' 이랬는데, 신학 삼 년에 그만 그 과목 그거 학점 얻을라 하다  보니까 그만 기도도 못 하고 영감도, 영감 기도 다 없어져 버렸다 말이오. 그래  놓으니까, 자, 신학 삼 년하고 나니까 남은 거라 해 봤자 이거 사람들이 말해 놓은  사람들 말. '어느 학자가 말하고 어느 학자가 말하고 어느 학자가 말하고' 사람들의  말만 남아 있지, 또 '어느 교파의 교리와 신조' 교리와 신조만 남아 있지, 말라빠진  교리와 신조, 신학자들의 사람 말만 남아 있지 영감은 없다. 생명 된 영감은  버렸어.

 이래 놓으니까 그만 나와 가지고, 또 그 사람 나오면 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나오면 목회 하는 데에. 목회 하는 데에 영감은 다 떠나 버렸지, 믿음은 떠나  버렸지, 은혜는 떠나 버렸으니까 이거 순전히 율법만 가지고, 지식만 가지고 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이오. 지식만 가지고 이래 하니까 또 아무 인기를 끌지 못하니까  이거 모두 다, 무식한 사람들이 또 은혜 있거든. 무식한 사람이 은혜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 말하는 그런 소리만 듣고 이란다고 이라면서 언어에 무엇을  영어를 한 마디 턱 내면서 에이 비이 에 뭐 어떻고 또 불란서 어에 뭐 어떻고 뭐한  마디씩 턱 턱 이래 내놓으면 그게 인제 자랑이고 인기니까 주님이 얼마나  미워하시겠소? 주님의 말씀과 영감은 나타내지 안하고 그것만 말하니까 얼마나  미워하시겠소? 이래 놓으니 교인들이 무식해 놓으니까 듣는다고 하지만 은혜를  받아야지.

 내가 어떤 저 OO 교회인가 어느 교회에 그 교회 가니까, 그 교회 교역자가 나하고  동창생인데 본과생이오. 나는 별과생입니다. 집회를 갔는데, 한번 집회하고 나니까  막, 한 시간 하고 나니까 교인들이 야단을 지기는데 그래 와 가지고, 아, 지금 우리  조사님은 하나님 말씀은 가르치지 안하고, 성경 안 가르치고 이 원어가 어떻고  어떻고 하면서 뭘 얄궂은 소리를 하면서 이래 가지고 이러는데 도무지 은혜가 안  되고 이러니 참 문제라고 이래서 내가 있다가 '그래도 그분들은 다 학자 축에 갈  사람들이고 이러니까 잘 듣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이랬는데, 금요일날 저녁부터  월요일날 아침까지, 그러면 몇 시간입니까? 여덟 시간 했다 말이오. 여덟 시간하고  나니까 교회가 획 디비져 버려. 그만 그날 집에 일찍 온다 하니까 교인들이 하나도  안 남고 다 따라나와 가지고 막 울면서 진정 눈물 좔좔 흘리며, 그래도 한 몇 시간  동안에 그렇츰 정이 붙은 모양이라. 다 양떼들은 은혜 받을라 해요. 이래 놓으니까  이 교역자는 또 인제 시기한다 말이오. 시기하고 이래 가지고, 그 사람이 만날 그런  소리한다 하더니만 내가 며칠 전에 물었어. 거기 있는 어떤 사모님이 나한테  찾아와서 '그분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분이 아무 데, 그분이 어디, 서울에 있다  하던가 어디 있다 하는데 교회가 모두 은혜 없다고 만날 배척이고 장 형편이 없는  모양이라.

 이러니까, 사람들이 그만 영감, 영감 그걸 무시해 버렸습니다. 영감을 무시하고,

 또, 기적을 무시해 버렸어. 기적을, 자기네는 기적이 안 나오니까, 지금 기적,  마귀 역사지 지금 무슨 기적이 있느냐고. '말씀이면 다지.' 이래 가지고 이랬는데,  저도 그만 거기 물이 들어 가지고 기적이라 하는 것을 나는 처음에 기적 무시한  것을 그래 무시한 건 아니지만 그만 그 뒤에 그만 기적이라 하는 것을 이걸  무시해서 무슨 예수 믿고 병 나았다 하면 그것은, '기적은 믿음 없는 자에게  나타나는 일이라' 이래 버렸으니까 이거 그만 수치인 줄 알고 이랬는데,  가만히, 내가 작년에야 깨달았오. 이번에 아프고 난 다음에 내가 깨달아지기를  '아니다. 이거. 요새는 기적의 세월이다. 기적이 나타나야 되 지, 설교는 전부 다 천사니까' 설교는 이 강단 저 강단 다 천사요. 다 천사이니까  이거는 마귀 천사인지 참 하나님의 천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진가를 뭐로 알 수  있느냐? 진가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기적으로 진가를 알 수 있다 말이오.

마귀는 이적 못하는가? 마귀 이적 행합니다. 마귀가 이적을 행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한다 했지만 마귀가 이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그  반대에서 그런 것이 일어나지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는 거기에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이적은 없다 그 말이오. 마귀 이적은 용납 못해요, 거기. 그래서, 그걸  지금 주장을 하고 누구든지 이 표적 나타나는 이것을, '이것을 누가 기록해서  그랬으면 좋겠다' 이런데, 그거 기록할 사람이 없어.

 내가 언제 목사 한 분 내가 만났는데, 제 밑에 배우던 목사인데. '네가 보자. 지금  힘이 있나 없나?' '예, 제가 가 가지고, 그 교회 부임해 가지고 어떤 환자가  있는데, 환자가 있어서 아주 난처하게 이래 쌓아서 그래 가 가지고 기도하니까 대번  낫습디다.' 기도하니까 환자 몇 번 나은 걸보고, 성경 그 사람이 백 독한 사람인데,  여기 양성원 졸업 맞았는데 성경 백 독 한 것보다 말이오 환자 몇 사람 나은 거  보고 힘을 더 얻었어. 보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러니까, 또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들을 수 있는 기도해야 되지 들을 수 있는 기도 아니면 안된다. 또  기적 나타나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만일 범죄 하면  하나님이 나와 같이하지 않는다.' 여기 표준을 잡으니까 그 사람은 신앙이 아주  새로워졌다 그 말이오.

 이랬는데,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는 어떤 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냐? 이것은  자기에게, 자기 주관에게 피동 되는 그 연습이 자꾸 돼 가지고 그만 자기 생각나면,  이래 있다가 '가고 싶다.' 자기 생각에, 마귀란 놈이 자기 속에 와 가지고 자기  가고 싶게 하면 가야 된다, 있고 싶으면 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 여기 서부 교회 왔었는데, 그때 O 집사라는 사람인데 '네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귀신에 들렸으니까 네가 조심을 해라' 이러니까 안 듣고 그만  서울로 피해 가 버리더니만 제가 서울에 OO 교회 집회를 하니까, OOO 목사님하고  OOO 목사님하고 두 분이 그때 개혁 교회를 자꾸 하자고 쌓아서 나는 안 들었어.

'당신들하고 개혁 교회 해 봤자 하다가 또 딴 데로 돌아다닐 터이니까 따라가다가  나중에 참 꿩 떨어진 매라고 나는 뭐하고?' 안한다고 이러니까, 그때 와 가지고  자꾸 같이하자고 쌓아서 같이 인제 차를 나누는데 그 O 집사가 어째 왔는지 왔어.

 와 가지고 '안녕하십니까?' 이르더니만 '예, 이 차 한 잔 하십시오' 이라니 차를  떡 들더니만 딱 놓고, '드이소.' '아, 주님이 못 먹게 합니다.' 또 이르더니만, 이  말 하더니만 '가 봐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가라 합니다.' 또 나가요. 나가서 '저게  인제 점점 짙어졌구나' 이랬는데, 조금 있다가 또 와. 와 가지고, 오디만 '하나님이  가서 이 말씀하고, 이 말씀하고 오라 합니다.' 또 와서 말한 마디하고 차 들어라  하니까 또 이래 들더니만 조금 마시더니만 '아, 먹지 말라 합니다. 또 가라  합니다.' 이거 거기 붙들려 가지고 참한 시간에도 몇 번이나 움직이는지.

 이러니까, 그만 자기 속에 악령이 들어와 가지고 자기 주관을 이렇게 악령이  주관하고 있는 그 자기 주관에게 피동 되는 이런 사람이 돼서 그것이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참 건전한 신비주의자도 자기가 발표는 안하지만 그 시간에  서로 말할 때에, 서로 말하고 있는데 '아, 이 말은 상대방이, 이거는 영감의 말이  아니다. 이거는 육의 말이다. 이거는 네 미혹의 말이다. 이거는 너에게 참 주님이  너에게 말씀하는 말이다.' 말하는 것도 그걸 표시를 안 해 그렇지, 생각에도 '아,  지금 상대방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너에게는, 그러면, 그럴 때 대해서는 너는  시험에 들지 말고 이런 생각을 가져야 된다.' 이게 말을 할라 하면 다른 사람이  보고 미친 사람이라 할 만침 그 속의 작용은 계속 있다 말이오. 계속 있는데,  그것이 건전한 신비주의자도 그렇게 번개같이 움직이는데.

 건전한 신비주의자와 불건전한 신비주의자와 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들어가는 그  입문이 무엇이며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들어가는 입문이 무엇입니까?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들어가는 입문이 뭐이야? 네, 자기 주관인데, 자기 인기 끌라 하면 그만  그리 들어가 버립니다. 자기에게 진실이 없다 그 말이오. 그거는 진실이 없는 거라.

그만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성령의 소욕이 그만 떠나, 이 세 가지가 바꿔져 버리면  그만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빠져들어 가 버립니다.

 그러면, 건전한 신비주의로 들어가는 입문은 뭐입니까? 예? 아니야. 하나님 중심  그거 애매해. 예? 뭐? 문서 계시. 문서 계시 떠나서는, 문서 계시를 떠나서는  건전한 신비주의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문서 계시에 이 울타리 속에  들어가야 그 안에 영감 계시가 있는 것이지 이 울타리 밖에서는 없습니다. 울타리  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말은 이 율법 계시, 문서 계시를 이행해서 문서 계시대로  행한 그자에게 그 속에 영감 계시가 있지 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시간 많이 됐는데, 여러분들이 자꾸 나와서 좀 이것을 좀  잘 배워서 이제, '네가 추억하라.' 소행을 살펴라. 자기 소행을 살피는 데에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찰나적으로 움직여 주시는데, 찰나적으로 반응하는데, 내가  하나님께 대해서 상대하는 것도 찰나적으로 변해지고, 또 내가 찰나적으로 변동되는  여기에서 하나님도 찰나적으로 반응을 해 주시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귈라 해도  얼마든지 사귈 수 있고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도 얼마든지 떨어질 수가 있다 그거요.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기도 많이 해서 우리 심령이 밝아지도록, 주님은 빛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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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7 성전 밖마당은 측량하지 말라/ 마태복음 10장 11절-14절/ 820629화새 선지자 201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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