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08:51
성전
본문: 학개 2장 10절~14절 다리오왕 이년 구월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우리는 우리의 모든 화나 실패나 모든, 한마디로 말해서 불행이라고 할런지, 죽음이나 실패나 대적이나 화나 모든 좋지 못한 것을 벗어버리는 것도 현실입니다. 모든 좋지 못한 것을 치료받는 것도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그것을 받아야지 현실에서 받지 아니하고, 시간으로 말하면 이 시간, 장소로 말하면 지금 이 자리, 또 자기가 접촉하고 있는 만물이라면 내가 지금 접촉하고 있는 것, 일도 그러하고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또 그것을 좋게 복되게 하는 것도 요 현실에서만 되지 다른 데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현실은 참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은 현실은 사용하지 아니하고, 현실은 사용하지 아니하고 장래 미래에 대해서 미래를 사용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 그것도 아무 소용없고, 과거를 사용해서 ‘내가 과거에 이리 이리 한 것이 참 후회가 된다.’ 원통히 여깁니다. 암만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에 잘못된 것을 자기가 깨달아 원통히 여기는 그것도 좋은 건데 그것은 왜 좋으냐? 그것을 현재에 치료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좋습니다.
또 ‘앞으로 내가 이렇게 하겠다.’ 하는 그런 모든 소원이나 경영도, 그것이 좋은 점은 소원하는 그것을 이 시간에 하면 되기 때문에 그게 좋은 것이지, 미래에 대해서 아무리 좋은 것을 경영한다 할지라도 이 현실이라는 그 현실에 그것을 좋게 만들어야 되지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고, 과거에 대한 것을 아무리 후회하고 잘못된 걸 후회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현재에 그것을 치료받아야 되지 현재에 치료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과거가 우리에게 참 밑거름이 되고 또 미래가 우리에게 대한 희망이 되는 것은 현재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현재만 빼 놓으면 과거를 어떻게 잘못된 걸 후회하고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잘할 것을 각오해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 중에는 현재가 내 시간이지, 또 장소로는 현 장소가 내 장소이고, 또 모든 만물도 현재에 닥친 그것이 나와 관련있지 다른 데 것은 소용없습니다. 일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이 현재라는 것은 참 중요한데, 현재 속에 일곱 가지가 들어 있고 두 가지가 죽고 사는 것이 이 현재에서 결정이 되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현재에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현재가 지나가기 전에 현재에 해야 되지 그만 어정어정 하다가 현재가 지나가 버리면 그 현재에 해당된 모든 것은 다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에 일곱 가지 들어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또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잘 기억하고 있을 줄 압니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내 마음과 몸의 기능 이것을 살리면 영원히 내 기능이 되고 이것을 살 수 있는 것인데 죽여 버리면 영원히 죽어 버립니다.
그것이 살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참 아무리 자기 몸 밖에 물건이 뭐 사람이 많은 것이 있다 해도 자기 심신의 기능만치 자기에게는 필요치를 못합니다.
이런데 이 필요한 것을 현실에서 내가 들어서 영원히 죽이든지 영원히 살려서 내가 가지든지 할 수 있는 이것이 현실에 지금 죽고 사는 것을 기다리면서 있고, 이러니까 누가 말하기를 ‘그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을 달래라.’ 새벽에도 나오려 할 때에 이것이 ‘몸이 피곤하다, 잠이 온다’ 해서 안 나올려고 이렇게 하거든 그 타일러라.
‘지금 이 시간 네가 하루종일 시간 중에는 요긴한 새벽 시간이니까 이 시간에 가 가지고 하나님 말씀으로 새롭게 되면 영원히 지옥 갈 마음의 기능 너도 하늘나라 가게 되고 몸의 기능 너도 하늘나라 가게 되고, 또 말하는 나도 좋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렇지만 이 시간에 네가 게을부리고 안 갈려고 하면 안 가는 너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기 쉬우니 이러한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네가 일어나라.’ 이렇게 자기 마음에게 타일러서 마음의 힘을 얻고 또 몸에게 타일러서 몸의 힘을 얻어서 그래 달래서, 잘 타일러 달래서 그렇게 멸망하는 그 현실이 오기 전에 준비해 가지고 멸망하는 그 현실이 올 때에는 멸망을 피하고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그렇게 해라. 그렇게 자기 마음을 달래라. 가꾸어라. 자기 몸에 있는 기능을 달래고 가꿔라 그렇게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현실이라는 이 아주 짧막한 요, 그만 현실은 지나가 버리면, 현실이 지나가면 그만 과거되는 것입니다. 현실이 지나가면 과거가 되는데 과거가 돼버리면 소용없습니다. 현실이 지나가 과거가 돼 버리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니 요 현실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가 그 현실에서 할일이 몇 가지가 있느냐? 현실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네 가지는 우리를 멸하는 힘들이고 세 가지는 우리를 구원하는 힘들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 우리 멸하는 힘들은 마귀도 우리를 멸할려고 하고 있고, 죄도 우리를 멸하려고 하고 있고, 사망도 우리를 멸하려고 하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법도 우리를 멸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넷이 멸하려고 하는 데에 그때에 이 넷에게서 멸망을 받지 아니하려고 하면 어느 것을 먼저 잡고 그것부터 방비하고 그것부터 꺾어 놔야 되느냐 하면 마귀도 아니오. 안 망할려고 해도 안됩니다. 사망도 아니오 하나님 심판도 아니오. 제일 먼저가 죄입니다. 죄 이것만 정리가 되면 마귀도, 사망도, 하나님의 심판법도 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죄를 멸하기는 멸했지만, 멸하기는 멸했지만 하나님의 이 안보의,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보호하는 이 안보의 법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안보의 법에 속하지 않게 되면 자기가 자기보다 강한 마귀 죄 사망 하나님의 심판법 앞에 자기 단독이 서 있기 때문에 삼켜지게 됩니다. 단독이 서 있기 때문에 삼켜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동시에 되어야 됩니다.
죄를 멸하고, 죄를 멸하면 즉시 그 나머지기 셋도 자기에게는 손대지 못하도록 되는데 요것이 현재라는, 요 시간으로 말하면 현재, 또 장소라 말하면 자기 현장, 모든 사물이라고 사물로 말하면 바로 내가 당하고 있는 것 이것을 여기에서, 이 장소를 옮기기 전에, 시간도 지나가기 전에 이 자리에서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서 죄를 멸합니다. 죄를 멸하고 생명법에 즉시 연결이 됩니다.
그러면 생명법에 즉시 연결이 되면 그게 다 현재에 됩니다. 동시에 돼야 됩니다.
순서 논리로, 이렇게 논리로 그 순서를 말한다면 죄를 멸하니까 그다음에 마귀는 손대지 못하고, 또 죄와 마귀가 손대지 못하니 사망도 손을 대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법도 우리를 손대지 못하고, 논리 순서를 하니까 그 순서가 죄, 그다음에는 마귀, 그다음에는 사망, 그다음에는 심판. 이 논리로 말하니까 이 순서가 이렇게 순서가 있지 그 닥치는 것은 동시입니다. 동시에, 이 네 가지가 한꺼번에 되어지는 것이고, 또 그러고 난 다음에 생명법에 소속하게 되면 이것은 이래 놓고 시간을 두고 생명법에 내가 연결이 되어서 생명법이 나를 책임지고 보호하도록 하는 이것이 또 시간을 그 사이에 두고 되는 것이 아니요, 이것도 동시에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를 도울려고 하는 이 세 가지 능력을 동시에 힘입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현실이라는 것은 동시인데, 동시에 나를 죽일려고 해하는 것도 이것을 멸하고 또 나를 구출하려고 하는 이 구출을 동시에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 영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이 하나님에게 소속하게 되기 때문에 해를 받지 아니하고 우리는 영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현실이 아주 긴급한 아주 현실입니다. 긴급한 현실인데 우리가 이 시간을 동시에 하지 아니하고 머뭇거리면 우리는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서 하나 더 깨달아야 할 것은 어떤 것이냐? 그 현실에 해당된 요소가 있고, 현실에 해당되지 않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현실에 해당된 요소는 고 현실에서 해결이 됐지만, 현실에 해당되지 않은 그 요소는 그다음에 어떤 현실에 그것이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그런 현실이 올런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 현실은 이 현실에 해당되지 않은 것이면 이 다음에 어떤 현실을 기다려야 될 그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죄도 그러하고 이 일곱 가지가 다 그러합니다. 자기가 이 현실에, 이 현실에 해당된 것은 이 현실에 해결을 짓고 이 현실에 해당되지 않은 것은 이 다음 현실을 기다려야 됩니다.
그러면 한 번씩, 멸망을 피하고 구원이 되는 것은 여러번 중복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단번인데, 한 번뿐인데, 살고 죽는 것이 한 번뿐인데 그 한 번이란 그것이 기회요, 그것이 자기 현실이라는 것인데, 그 현실에 닥치지 아니한 것도 자기가 살릴 수가 없고 또 죽일 수도 없고, 또 그 현실에 당해 놓은 것은 그것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한 번 살았으면 다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개별, 이 개별, 개별체, 영은 단일체요 단일성의 것이기 때문에 영은 단번에 그 영이 전부, 전부라고 말하면 좀 모순이지만 영은 단번에 살아났습니다. 단번에 죽었고 단번에 살아났습니다. 그 왜?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렇지만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뿐이 아닙니다.
여럿입니다. 마음의 이 요소가 수를 헬 수 없을 만치 요소가 많고 몸의 요소도 많습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비유컨대 100분의 1을 살렸고, 어떤 사람은 100분의 1만 죽였고, 100분의 1만 죽였고 100분의 99는 살렸고, 또 어떤 사람은 100분의 99는 죽였고 100분의 1만 살렸고 이렇게 차이있는 것이 부활의 능력의 차이있는 것이며 부활의 영광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자기 현실에서 부딪힌 그 죄를 문제를 해결짓고 그 현실에서 네 가지의 해를 다 벗어버리고 세 가지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으로서 다가 아닙니다.
다가 아니고, 그 면으로는 마귀가 우리를 침노하지 못하고 사망도 또 하나님의 심판법도 침노하지 못하지만 그 외의 것은 아직까지 우리가 해결을 짓지 못했기 때문에 남은 부분은 그것이 우리를 침노할 수가 있고 또 하나님이 책임을 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왜 이 세상에다가 얼마동안 오랫동안 살고 있도록 하고, 또 이런 현실 저런 현실을 자꾸 바꾸어 주느냐 하면 그 현실에서 수많은 그 심신의 요소들을 살릴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전부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도 필요없는 기회는 없고 이 기회는 이거 살리고 저 기회는 저거 살리고 그렇게 살릴 수 있는 그 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에 하나 살렸다고 해서 그 현실에 해당되지 않은 것들도 다 살아나는 것 아닙니다. 또 현실에 해당되어서 살렸는데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이 죽어 있다고 그것도 같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화된 것은, 살아난 것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가리켜서 ‘영생이라’ 그러면 자기가 현실에서 하나님의 그 면은, 어떤 면은, 예를 들면 정직면으로, 이 현실에는 네가 정직하냐 부정하냐 하는 고것만 해당되는 현실이 있고, 네가 이 시간에는 자비하냐 잔인하냐 하는 고것만 해당되는 그런 현실이 있고, 네가 이 시간에는 충성이냐 불의냐 하는 그것만 해당되는 것도 있고, 이 시간에는 네가 참 혀를 바로 놀려서 혀로 죄짓지 않느냐 혀로 죄짓느냐? 혀에 대한 문제, 말에 대한 문제가 또 해당되는 것들도 있다 그 말이오.
이 시간에는 네가 불의한 취미를 네가 누리느냐 불의한 취미를 누리지 않느냐? 그러면 취미를 어떤 취미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취미를 누리느냐 이것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죄악의 취미를 누리느냐? 그게 또 해당 될 때도 있고, 그 현실마다 이런 것 저런 것 해당될 때가 있는데 그 현실에 해당된 것을 살렸으면 그 면으로는 마귀는 침노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안보하고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는 그만큼 더 견고해졌고 마귀와 나와는 멀어졌고 세상은 내가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하나씩 구원을 이루어 나가기 때문에 이루어 나가는 것이 이것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나간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져 나간다.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이 성화의 구원은 중복적입니다. 한목에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중복적으로 또 되고 또 되고 자꾸 이래 되어 나가는 것인데, 우리가 이 학개서에 말씀한 대로 자기가 그 현실에서 하나를 이 사망에서 구출해 가지고 생명법에 소속이 됐다고 해서 하나가 되니까 이만하면 다 됐다고 생각해 가지고 하나 됐는데 모든 것 다 된 줄로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서 오산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하기를, 아무리 거룩한 제물이지만 제물 그것만 거룩하지 그 제물 그거 하나 거룩하다고 해서 다른 모든 것이 다 전부 거룩하게 되어지느냐? 또 다른 것도 거룩해져야 되지. 또 자기가 더러워지는 것은 하나가 더러워졌을 때에 다 깨끗한 것 그것까지도, 아직까지도, 그것이 깨끗하게 되기는 됐지만 그 자기라는 전체로 말하면 하나 더러워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기는 더러운 사람으로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된다.
받게 되나 깨끗하게 된 그것이 더러워진 것은 아니고 그대로 있는 것인데, 그것이 네 자체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더러운 게 네게 붙어 있으니까 더러운 그것 때문에 마귀와 사망 하나님의 심판법이 너를 심판하고 너를 침노한다. 하지만 그 면 때문에 침노하지 다른 면 때문에 침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지 그것을 생각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제일 복이 있고 지혜있는 사람이냐? 돈을 많이 버는 사람, 세상 권세를 많이 가지는 사람, 아무리 그걸 많이 가져봤자 그것은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부르면 떠나면 그것은 제게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라 그 말이오. 상관이 없는 것들인데, 그런 상관없는 그런 데에만 이 현실이라는 것을 쓰고 이 중요한 문제에는 현실을 쓰지 않는 일을 하기 쉽습니다.
저 ○○○씨 아니오? 아닙니까? 저 푸른 옷 입은 사람, 예? ○○○씨 아니라? 아니라? 설교 들으면서 성경 읽으면 그게 내나 죄가 됩니다. 왜?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이 지금 말씀해 주시는데 이 말씀을 들어야 되지 이 말씀 듣지 아니하고 성경 읽으면 하나님과 삐뚤어져 있는 거라 그 말이오. 자기가 예배드리는 그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잘못된 일 하기 때문에 그게 내나 역연 그것도 죄입니다. 도적질하는 죄나 그 죄나 꼭 같은 죄라 그 말이오.
이 현실에는 우리가 할일이 뭐이냐? 이 두 가지를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이 일이 우리 현실에서 할일이지, 이 일이 할일이지 이거 두고 세상에 어떤 것을 취한다 뺏긴다 하는 그런 것은 우리의 할일 아닙니다. 암만 빼앗겨 봤자, 빼앗겨 봤자 그것들은 밑에 지저분한 말단 것들이 하는 것이지 그 위에, 그 위에 하나님의 법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법에서 해결받으면 그 밑의 것들이 어떻게 말한다 해도 소용없어, 까짓 거. 소용이 있습니까? 또 하나님이 또 책임을 진다면 그 밑의 것들이 무슨 소리 해 봤자 소용이 없다 말이오. 왜? 법에 따르고 법은 하나님께 따르고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 해결이 지우면 내게 있는 것 암만 뺏들어 가 봤자 법적으로 내가 빼앗기지 아니하고 법적으로 내가 취하고 하나님이, 내가 취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아무리 생명 빼앗기고 아무걸 빼앗아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 법대로 돌아오게 되고 하나님 처리대로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할일이 뭐이냐? 요 두 가지만이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는 할일입니다. 요것을 굳게 잡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할일이 뭐이냐? 우리가 죽이느냐 살리느냐? 죽느냐 사느냐? 뭐? 자기의 심신의 기능, 또 모든 만물 이것을 자기 것을 만드느냐 이제 저걸 뺏겨 버리느냐? 자기 것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인데 자기 것을 만드느냐 이걸 자기 것을 만들지 못하고 뺏겨 버리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현실에서만 자기 것을 만들어 놓으면 누가 가지고 갔든지 뭐 없앴든지 어디 가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자기 것이오. 왜? 그것을 하나님의 법이 찾아 줍니다. 하나님이 찾아 주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무도 해하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만 할일인데, 이것이 지금 우리 할일인데, 이거 외에 딴 것을 마귀라는 놈이 자꾸, ‘너 이 시간에는 뭐 돈이 중요하다. 이 시간에는 의식주가 중요하다. 이 시간에는 지금 병이 중요하다.’자꾸 어만 걸 가지고 지금 갖다 대니까 그만 우리가 혼미해 가지고, 이 현실에서 참 죽이느냐 사느냐 이 두 가지 문제가 큰 문제인데 이 문제를 내가 다루지 못하고 엉뚱하게 어만 문제를 가지고 현실을 사용하기 쉽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 죽고 사는 이 문제만이 우리가 전공을 해야 되겠고 전력을 해야 되겠고, 전무를 해야 되겠는데, 죽이고 살리는, 이 두 가지를 죽이고 살리는 데에는 그 죽이는 법이 뭐이냐 하면 죄와 죄의 뒤에 붙은 세 가지, 이 네 가지가 죽이는 것이고,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대속, 십자가의 대속과 그 뒤에 이제 하나님의 안보법, 하나님 이래 가지고 있어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 가지 살리는 일이 우리에게 할일이고, 두 가지 살리는 데에는 이 네 가지를 멸해야 되겠고, 또 이 세 가지의 보호를 받아야 되는데 이게 동시에 돼야 되겠다 말이오. 동시에 되어야 되는데, 동시에 돼야 되는 데에도 그 동시에 해당된 요소를 자기가 해야 되겠는데, 그 시간에 해당된 요소에 그 모든 네 가지 세력에게 죽을 수 있는 그것을 살려야 되겠고, 세 가지 보호를 받아서 살아날 수 있는 그것을 살려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현실에서 개별적, 개별적 구원이요 개별적 사망이기 때문에, 개별체, 개별 요소, 개별 요소 이것이 죽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개별체 그것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체이니까 그 요소를 많이, 많이 죽음에서 해방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말이오. 많이 해방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또 많이 구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만 하고 어떤 사람은 열 가지 하고 어떤 사람은 백 가지 하고 이렇게 그 한 시간에 구원하는 것이 그것이 차이가 있으니, 죽은 것을 이 죽일려고 하는 데에서 살리는 것이 급선무로, 제일 앞잡이로 할일이 뭐이냐 하면 죄의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이니까 그 현실에, 어떤 사람은 ‘아, 내가 이 죄를 지었다.’ 어떤 죄라도 좋습니다. ‘내가 이 죄를 지었다.’ 그러면 현실에서는 다 해결이 됩니다. ‘요 죄를 지었다. 아, 이 죄로 나는 마귀의 것이 됐다. 이 죄로 사망이 나를 해하도록 와 가지고 지금 해할려고 하고 있다. 또 하나님의 심판법이,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 가지고 심판법으로 나를 해하려고 하고 있다.’ 하는 요것을 깨닫고, 이 죄와 그 배후의 세 가지가 들어서 나를 망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시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것은 이것 때문에, 내가 아무리 과거에 잘못된 걸 아무리 후회를 아무리 해 봤자 그 죄값을 뉘가 대신 받아 줄 이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이 그 죄값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받은 것을 자기가 인정하고 깨닫고, ‘예수님의 대속이 이것 때문에 대속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에다가 이것을 고해 가지고 사유함을 받아야 되겠다.’ 하고 예수님의 대속에다가 그 죄를 고하고 예수님이 대속해 주신 것을 믿을 때에 즉시 사함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에 보면 ‘네 죄를 고하면 그는 미쁘사 사하여 주신다’ 했습니다.
고하면 사해집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고하면 사해집니다. 요한일서 1장에 말씀해 놨습니다. 고하면 즉시 사해집니다.
사해지면 그 다음에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보법으로 역사하는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아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안보법을 어서 입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안보법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안보법이 뭐이냐? 그러고 난 다음에 그 현실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하는 그것이 안보법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는 고대로만 해 버리면 그 면에 대해서는 다른 것이 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아침에 말하려고 하는 것은 개별체로 구원이 된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고, 또 하나는 뭐이냐? 그렇게 고한, 고한 죄를, 고한 죄를 인하여서, 고한 죄를 인해서,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예수님의 대속에 고할 때에 어떻게 그 죄가 사함 받느냐?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나는 받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대신 받았기 때문에 이 형벌은 내게는 오지 아니하고 이 면에 대해서는 나를 해할 자가 없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피로 나를 대속했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의 것이 됐다. 예수님의 것이 됐다. 이래서 자신이 예수님의 피에 팔린 것인 것을 자기가 깨닫고, 자기는 주의 피로 값주고 산 주의 것이오. 또 피로 값주고 산 주의 종이오.
이러기 때문에, 주의 종이요 주의 것인데,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만 내게 대해서는, 나에게 대해서는 자유할 수가 있고 나는 자유하지 못한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또 주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에게만 복종하지 달리는 살 수가 없다.
자기에게, 완전히 자기 주도권을 이것을 깨달아서, 주님에게 팔린 것을 깨달아서 이것을 버려 버리고, 주도권을 버리고, 자기 독단으로 행하는 이 독단권을 버리고, 독립성을 버리고, 이것이 합해서 자기를 버려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산 것인 것을 인정하고 그 시에, 아직까지 닥치지 않은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있지만 그 시에 자기가 주의 피에 구속함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때에는 자기가 이제까지 깨닫지 못하는 그 모든 죄까지도 다 도매로 되어지는데, 이러고 난 다음에 도매로 되지는 것은 믿고 자기가 무슨 죄를 하는 것을 깨달아서 고하지 않아도 그 모든 죄를 다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을 믿고, 믿을 때에 되어지고, 믿고 자기가 전부가 주의 것이라는 것 요것만 돼 버리면 생명법에 완전히 안보가 되는, 안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부인해라 하는 그 말이 그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해라. 자기만 주의 피에 값주고 산 주의 것만 돼 버렸으면 그다음에는 자기를 죽여도 살려도 해하지 못하는데, 주의 것이 된 것을 인정하고 주의 것으로 살면 되는데 주의 것이 되었다가 다시 찾아 가지고 자기 것이 되어질 때에는 그것은 그 시간에 해당된 것은 됐지만 해당되지 않은 요소는 구속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죄에 빠져서 얽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인간이 지은 죄를 어떻게 벗을래야 벗을 수가 없는 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을 인해서 어떤 죄라도 벗기는 당장에 벗는데, 당장에 벗는데 다시, 그 죄를 다시 새로 자기가 하나님에게 나와 가지고 그 죄에게 자기가 다시, 다시 두번째 속해지면 그거는 안 되는 것이지만 벗는 것은 즉시 벗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이 없는 사람은 선악과 한 개를 따 먹은 그 값도 대대 손손이 다 받아도 그것을 면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회개를 한다 할지라도 과거에 지은 죄값으로 영원한 사망을 받는 것이지 고친다고 해 가지고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비유하기를 어떤 이에게 빚을 졌는데 그 진 빚을 후회를 해서 ‘이제 다시는 내가 빚지지 않겠다.’ 빚지지 않겠다고 해서 과거에 진 빚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과거에 진 빚이 없어지는 것 아니고 과거에 진 빚은, ‘오늘부터 내가 남의 돈을 쓰지 아니하고 어쨌든지 내가 빚지지 않으련다.’ 아무리 이 빚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앞으로는 자기가 빚을 안 질지라도 이미 진 빚 그 값은, 그 진 빚은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갚아야 됩니다. 그 값이 뭐이냐? 이미 범죄한 그 죄값은 받아야 되기 때문에 영원한 사망을 하니까, 사망이 되어 있으니까 그 앞으로 뭐 죄 안 지으려 해 봐야 소용없어. 이제 영원한 사망을 받은 것이고 마귀 것이 됐기 때문에 마귀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니까, 마귀의 종이니까 제가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고, 왕권을 가지고 마귀가 그를 처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이 없는 사람은 원죄와 본죄에 대한 문제를 영원히 해결짓지 못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이 시간도 해결을 받으려면 즉시 해결을 받을 수 있다 말이오. 즉시 해결을 받고 주의 것만 돼 버리면 그만 안보법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라. 주의 것이 되면 그 다음에 주님이 요렇게 해라 하는 그런 명령을,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순종하는 것, 주의 것으로 살면 해결이 다 돼 버린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현실에서는 이 중대한 것을 해결받는 이 현실이라는 것을 자기가 생각하고 살아야 되는데, 그러면 현실에 우리 할일은 뭐이냐? 죄 발견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씩 둘씩 발견만 하면 해결되고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이 죄를, 이 죄를 내가 사함받아야 되겠는데 이 죄를 사함받으려 하면 그 면에 내가 주의 것이 돼야 됩니다.
이러니까 죄가, 죄가 점점 발견 많이 돼서 더 많은 죄인이 되어진 사람은 많은 의인이 되어집니다. 마귀와 사망의 것이 많이 되어졌다는 그것을 많이 발견하면 주의 것이 많이 된 것인 것을 발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할 터이니까 잘 받아서, 자기가 집에 가서 자꾸 새김질 해서 깨달아야 되지 깨닫지 않으면 이 시간에 듣는 것이 실지로 실감이 없게 됩니다.
자기가 그대로 행하려고 해 보면 이제 실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운 것도 이 시간에 잠깐 기도할 때에 그것을 한번 되새겨서 자기에게 확고히 요 진리를 잡고 가야 되지 요 진리를 잡지 아니하고 들어 버리는 것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받을 때에 자기가 실행하는 것, 실행한다는 이것도 자기에게 은혜가 되고, 자기가 실행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되겠다 하는 이것도 또 반쯤 은혜는 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실행하려고 할 때에 자기에게 영감이 와 가지고 은혜가 되어지고, 그것을 또 ‘나만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된다.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이걸 또 똑똑히 기억해야 되겠다.’ 그럴 때에 또 은혜가 되고, 요 두 가지로서 은혜가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다 같은 자리에서 들어도 설교할 사람이 듣는 것과 또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증거해서 구원하려고 하는 그런, 다른 사람의 구원을 책임지고 듣는 것과 자기 단독이만 듣는 것과 또 자기도 실행할 그런 생각도 없이 듣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실행을 생각지 아니하고 듣는 것은 다 떠내려가 지나가 버리고 말고, 실행할 각오를 가지고 듣는 것은 그만큼 자기에게 영감이 강해지고, 자기만 실행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또 이것을 가르쳐야 되겠다 하는 그 책임을 지고 들을 때에 비로소 자기에게 영감은 바로 오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