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의 감화감동에 나가는 순서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23일 금야 

 

본문 : 베드로후서 3장 6절∼14절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 서부 교회는 숨어 있던 모든 폐단과 흠점들이 이제 차차 차차 드러 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서부 교회로서는 고칠 기회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이 고치게 하실 때에 고치면 고치기가 수월하고. 또 용서를 하실 때에  회개를 하면 회개하기가 수월합니다.

 모든 평신도들은 집사 권찰 장로님들을 닮고, 또 장로 권찰 집사들은 목사님을  닮는 것인데 제가 외식하고 실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제가 성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표시를 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도 고치기로 있는 힘을 다  기울이겠습니다. 장로님들도 조사님들도 권사님들도 고치도록 같이 있는 힘을 다  기울이도록 하시고, 모 집사님들과 권찰님들 반사 선생님들 또 부장들  평신도들도 다 고치도록 힘을 씁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고치게 하시는 기회요.

또 고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인 것을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부 교회 교인들은, 다른 교회는 어찌 되는지 내가 잘 모르나, 예수님을 믿는  이치는 다 바로 배워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예수 믿는 이치를 바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바로 알고 있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만 재독을 듣고 또 설교를 한 설교를 몇 번이나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말씀을 증거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말씀 증거했어? 아니오? 아 씨  뿌리는 거 했오? 그러나 이 재림에 대한 것을 벌써 여러 시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뿐만 아니고 모든 말씀을 우리 서부 교회 교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 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하면 제가 교만한 사람이  되겠고 자긍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런 말은 두려워서 하지를 아니합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야 어쩌든지 서부 교회 여러분들은 핑계는 못 할 겁니다. 뒤에  어떤 심판 받아도 고요히 받지 몰라서 그랬다는 그런 핑계는 못 할 것입니다.

너무 잘 알도록 자주 세밀하게 가르쳤습니다. 성경 한 사건을 여러 수십  군데다가 기록을 해 놨지만 그렇게 여러 군데를 들어서 말할라고 하면 여러분들  이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같은 것이면 그저 한 두  군데만 보고 가르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성경 본문도 잘 알고 익숙하게 그렇게  기억하도록 가르친다고 가르치는 대로는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 서부 교회 교인들은 아는 것으로 다 된 줄 아는 이런 큰 외식의 시  험에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보배로운 일이지만 아는 것은 깨닫는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다릅니다 아는 그 지식에  자기가 자기로서 거게. 대한 것을 깨달아서 각오가 생겨지는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아는 지식에는 각오가 없습니다. 자기가 알고 난 다음에 깨닫고  '내가 요대로 하겠다' 하는 그 결심이 생겨지는 그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아현교회에 있는 김현봉 목사님이 그 깨달음의  보배라는 그 깨달음에 대해서 일생 동안 많이 강조를 했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하는 말을 자주 말했고 많이 강조를 했습니다. 주석가들의 주석을  보시면서 '이 사람은 죽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왜 죽은  지식을 가졌다고 합니까?' 할 때에 답이 '이 지식에 대해서 자기의 깨달음이  없으니 그는 하나의 책이지 생명이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는 사람 중에 깨달은 사람들은 심히 수가 적지만 깊은 깨달음에서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아는 데에서 머물지 말고 깨닫는 데로 자라가도록 우리가 힘을  씁시다. 자기가 그 말씀을 보고 깨달은 것은 깨달은 것은 자기 혼자 깨달은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자기는 '아 이 말씀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하겠다'하는 그깨달음이 자기 속에 생겨져서 자기에게 그 각오와 결심이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일곱 가지에 대해서 자기는 어떤 각오를 가졌는가 그 각오를 가져야 한다  말입니다. 각오라 말은 깨달을 각(覺)자 깨달을 오(悟)자입니다. 이제 자기는  거게서 어떤 각오를 가지는가? 일곱 가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나는 여게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나 그것도 자기의 깨달음입니다. 이 일곱  가지에 대해서 나는 그러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자기가 찾아서 아는 그것도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 일곱 가지에 대해서 안심을 하든지 두려움을  가지든지 뭐인가 이 일곱 가지에 대해서 자기는 충격을 받는 그게 있는 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을 가지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고만 지나가는 그런 참 위험천만인 그런 자리에서 머물고 있지  말고 거게서 각각 자기가 깨달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다 같은 말씀에라도  사람마다 깨달음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에 대해서 두려워 떠는 사람도  있을 거고, 깨달음으로 두려워 떠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낙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거게 대해서 그 모든 준비의 시발을 하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고, 거게 대해서 아무런, 자기는 특별히 자기에게 해당된 그  깨달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이요, 이 구원에는  현재까지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음을 가질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 말씀에 대한 자기의 깨달음의 각오. 깨달음 '아.

나는 이렇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지고 그 깨달은 대로의 자기는 사람이 되는,  깨달음대로의 사람이 되고, 깨달음대로의 행동이 되고, 깨달은 대로의 모든  마음과 정신이 되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강단에서 설교한  그대로 외우는 것도 좋지만 외우는 그것은 거기에서 자기 개적으로, 자기로서  깨달음이 있을라고 그래 그것을 알고 기억하는 것이지 기억하고 아는 것뿐이라면  자기는 그 말씀으로 정죄받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희들을 정죄할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 이 말이 너희들을 심판하고  정죄한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새김질한다는 것은 이 말씀을 자기가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또  성경을 본 대로 알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거게서 깨달음을 가질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가질라고 한 시간도 애쓰고 두 시간도 애쓰고 자기 마음이  강퍅해서 이 말씀에 대한 아무런 자극이 없는 그럴 때에는 자극을 받을라고,  거게 대해서 나는 무슨 각오를 할까, 이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각오 없이 그냥  그 말씀만 그저 기억하고 외우고 있는 그런 죽은 자가 되지 안하고 여게 내가 할  일은 뭐인가, 자기가 깨달을 거는 뭐인가, 자기 할 일은 뭐인가, 자기와의  관련된 것은 뭐 인가 여게 대해서 내가 각오할 것은 뭐이며, 여게 대해서는 내가  결심할 거는 뭐인가 하는 그것을 찾을라고 애를 쓰는 것이 새김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  말은 자기에게 고르고 구비하고 깨끗한 깨달음, 온전한 고 깨달음을 자기가  가질라고 노력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주야로 묵상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에서 우리는 감동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감동으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각오를 가진 그 각오에 감동은 자기 양심의 감동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자기가 각오한 것을 양심으로 자기가 생각해 볼 때에 자기 각오라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다시 수정이 될 것이고, 또 자기 각오한 그 각오가  너무 허무하고 외식이고 가짜로서 너무 외식이고 너무 진실의 그 중량이 없는,  실력이 없는 것을 그 양심으로 깨달아질 것입니다. 그것이 양심의 감동입니다.

양심의 감동에서 사람들이 곤두박질을 치고 양심의 감동에서 견디지를 못하고.

양심의 감동에서 눈물이 나오고 양심의 감동에서 한숨이 나오고, 탄식이 나오고.

근심 걱정이 나오고 할 때에 이 노력 끝에 비로소 성신의 감화가 또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성신의 감화를 받아 우리의 깨달음이 강해지고 우리의 각오함이  강해지고 우리의 결심이 강해지고 각오와 결심이 허무하다는 것이 점점 이것이  수정이 돼서 차차 차차 깨끗해서 잡탱이가 없어지고 올바로 되질 때에 올바로  되질 때에 능력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지공 지성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꼭 하나님의 법칙에 맞아야  당신이 용납을 하시고, 맞아야 동행을 하시고, 맞아야 인정을 하시고 맞아야  거게 대한 약속대로 무엇을 보상해 주시고 베풀어 주시지 하나님이 아무리  당신을 사랑하는 자라도 당신은 법에 대해서 움직입니다. 요새 우리 나라에서  법칙 국가라고 말하는데 법이 다스리는 나라가 좋습니다. 참 미국 같은 나라는  말 들어 보면 그 나라는 법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아주 법칙 국가입니다. 일본  같은 나라도 말 들어 보면 그만은 못해도 법치 국가입니다. 우리 나라는 법치  국가가 돼야 될 터인데 법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더우기 법칙의  하나님이십니다. 진리로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옳고 바르지 안한 데는 당신이 가면 멸합니다. 당신의  계약에 위반된 자에게는 가시면 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의 그 계약이  진리요 뜻이요 법인데 거게 위반될 때에는 하나님이 피하신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짖고 이렇게 아무리 찾아도 내 자체에  불법이 있으면 당신은 나를 피하십니다. 불법이 있는데 나한테 당신이 오면  나는,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내가 소멸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자기에게 하나님에게 대해서 불법이나 불의나 잘못됨이  있는가 이것을 찾지 안하고 당신만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무리  호소해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게 못 옵니다. 오면 나는 소멸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사람도,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해서 기도하는  것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대화해서 내가 대화하는 모든 사정을 보고하는  것이나 간구하는 것이나 잘못된 것을 자복하는 것이나 또 문의하는 것이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 가지고 하나님에게 직접 관계를 갖고저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에 제일 중요한 것은. 주님은  우리에게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만날라고 그렇게 호소하지 안해도 만나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게 삐뚤어진 게 있으면 당신은 나와 접하지를 못하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피할수밖에 없고. 피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도 기도한다는 것이, 기도의 입문이 뭐이냐?  자기가 아는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가 아는 대로의 자기 과거 현재 미래에  무슨 욕망하는 것이라도 계획하는 것이라도 과거 현재 미래의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대조하면서 이 면이 어찌 됐냐 어찌 됐냐 그리 돼서  잘못된 것을 수정하는 그것이 기도의 입문입니다. 또 자기가 잘못된 것을 찾다가  잘못된 것이 찾아지지 안할 때에는 부득이 우리에게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할라고 책임 맡고 오신 성령님이 계시고 또 진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바로  관계를 가질라고 애를 쓸 때에 성령이 와서 우리를 도와서 회개할 줄 모르는  것을 회개케 하시고, 기도할 줄 모르는 것은 기도하게 가르쳐 주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사람이 될 줄 모르는 것을 그런 사람이 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셔서 기도한다는 것이 자기와 하나님에게 거리낀 그것을 자꾸  정리해서 수정하는 것이요, 가리워진 것을 틔우는 것이 그것이 기도입니다.

가리워진 것이 틔워져서 그분과 나와 대면을 하면 그분의 모든 것은 내게  전폭적으로 다 나에게 선물이 되고 유업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는 데에서 멈추지 말고, 아는 데에서 자기의 무 슨  깨달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면 배운 거게서 나는 어째야  되느냐 하는 그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말이오. 나는 어째야 되느냐! 나는 요와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어찌 되느냐. 나는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돼 가지고  있으며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말씀에 대해서 자기가 어떻게 되어  있는 자인지,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 하는 이 깨달음이 있어야 되지 이게  없으면 이 말씀은 자기를 심판할 율법이 되지 절대로 복음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하는 지식에서 깨달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깨달음 은. 이  말씀에 대해서 내가 어떠냐, 이 말씀과 나와의 관계를 자기가 바로 찾아 가지고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누워자야 되겠다는 것을 깨닫는다든지,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는 지금 놀래서 기절해야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든지,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 심판받을 자이다, 완전히 멸망자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든지, 나는 이 말씀에게 대해서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그것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에 대해서 자기와의 관계를 바로  찾아서 깨달음을 가져야 되겠고, 깨달음 가진 데에서 마음으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실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실지로 감동이 돼야 되겠습니다. 그  깨달음에, 내 깨달음에 대해서 내 마음과 내 몸이 기울여지는 것을 가리켜서  감동이라 그렇게, 실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실감이라 말은. 자기 마음과 몸이  그리 기울어지는 걸 가리켜서 감동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내 마음과 몸이 자기의  깨달음에 대해서 자기가 깨닫고 거게 대해서 실지로 느낌으로 인해서, 느끼는  것은 자기 모든 마음과 몸피 기능이 그 깨달음에 대해서 깨달음에 물들고  깨달음에 감염되고 깨달음에 피동되는 것을 가리켜서 실감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실감을 가졌을 때에 그 실감을 가지게 되면 차차차차 마음이  느껴지고 마음이 실감해서 마음이 거게 기울여지고, 몸의 모든 신경에 실감이  돼서 신경이 거게 기울여지고 이라게 되면 이라고 나면 양심을 만나게 됩니다.

그라고 나면 이제 양심의 감동이 있습니다.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 양심적으로  자기의 마음이 거게 기울여지고 양심과 함께 양심의 지도를 따라서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 자기의 몸의 신경이 거게 기울여지게 됩니다. 이렇게 발버둥칠  때에 그때에 성신의 감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말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자기가 지식에서 깨달음을  가져야 깨달음에서 실감이 자기에게 오고, 실감이 온 데에서 양심의 감동이 오고  양심의 감동이 온 다음에 비로소 성신의 감화가 오는 것입니다. 성신의 감화가  올 때에 감화 받아서 움직일 때에 그때에 지극히 큰 능력이 자기와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순서가 복잡한데 어떤 사람이 배울 때에, 얼음 타는 스케이트를 배울  때에 처음에는. 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네가 설 때는  요래서야 되고. 자빠질 때는 요래야 되고, 돌 때는 요래야 되고' 그 순서를 많이  자꾸 이렇게 말해서 처음에는 그대로 논리적으로 지식적으로 배워 가지고 실지로  해 볼라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많은 연습 가운데에는 사실상 그만한 순서가 다  통과돼야 돼지지 그렇지 않으면 서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은 나중에, 자기가 아주 스케이트로써는 세계에 '참 참피온 할만한 그런  능숙한 사람이라도 '요래 설 때는 어떻게 서야 됩니까?' 하면 그 사람 모릅니다.

서 보고 '아 요라니까 서지네' 실제로 그것을 논리적으로 가르쳐 달라 하면  모릅니다. 벌써 그게 숙달이 돼 가지고 그렇게 논리를 할라고 하면 몰라도  되기는 된다 그말이오. 그거는 빨리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빨리 돼도 지식 순서를 밟고, 깨달음의 순서를  밟고, 거게서, 깨달음에서 각오가 돼지고. 거게서 마음에 실감이 나오고. 감동이  나오고, 감동이 나올 때에 비로소 양심의 호소를 자기가 받아들이게 되고,  양심의 감화를 받았을 때에 그때에 성신의 감화에 나아가고, 성신의 감화 받아  가지고 움직일 때에 능력이 역사해지지 그 동안에는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의 주관 행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성신의 감화까지  나아가면, 성신의 감화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적 요소입니다. 성신의 감화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적 요소요 양심 의 감동까지 가는 그것도 다 인적 요소입니다.

인적 요소가 다 해서 절정에 도달했을 때에 비로소 신적 요소인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은 이 일을 공부합니다. 제일 처음에는 자기가 지식을  가질라고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는 깨달음을 가질라고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에게 감동, 자기에게 그 감동, 성신의 감동이 아닌 자기에게  스스로 자기 인적 요소, 주관 적인 감동이 생길라고 애를 씁니다. 감동이  생겨지도록 애를 쓰고, 감동이 생겨지고 난다음에 애를 쓰면 속에 양심의 감동이  옵니다. 양심의 감동이올 때에는 자기로서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이 '이렇다'  하는 것이 확정짓고, 자기로서는 전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양심의 감동까지가  인적 요소요 그럴 때에 비로소 성령의 감동이 객관 역사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셔서 이제는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 입에 그저 붙어져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가 아니고 실지로 그런 것입니다. 능력  주시는 건 어쨌든지 이 순서를 밟아야 합니다.

 이번에 나는, 또 들어도 그런 거 잘 잊어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거창 집회 가  가지고, 자기는 무슨 뭐 병이 있었다든가 뭐이 있었다든가 하는데. 강단에서 다  회개하고 하나님 믿으면 된다 하는데 자기는 생각하니까 도무지 될 수가 없어서  자기는 혼자 만날 한다는 것이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안  됩니다.' 자기는 안 된다고 자꾸 머리를 흔들며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절대 안 됩니다. 나는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나는 나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안 됩니다.' 안 된다고 자꾸 이렇게 하다  보니까 사람 다 가 버리고 저 혼자 있더라고. 저 혼자 있었는데. 그러다가  보니까, 아, 어찌 됐는지 그 병은 언제 나아 버렸는지 다 나아 버렸고. '나는 안  된다' 하다 보니까 나았다고. 바로 고게 고겁니다. 그게 그것이오.

 하나님과의 접선되는 것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진리를 알고 자기가 깨닫고,  깨닫는 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진리에 대해서, 자기의 깨달음이라 말은  이 진리와의 자기가 관계가 어떠하다는 거게 대해서 이 진리에 대해서 나는  이래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생겨지는 그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  깨달음이 있고 난 다음에 자기의 모든 신경과 마음 이 기울여지는 것을,  기울여지는 것을 가리켜서 감동이라 말합니다. 그것이 주관 감동이라고도 말하고  그것을 실감이라고도 말하는데 그게 주관 감동입니다. 감동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 깨끗하게 자기로서는 깨끗하게 됐기 때문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양심을  자기가 말하지 안해도 양심을 찾는 것이 되고 양심에게 자기는 부탁을 하고  양심을 찾고 양심은 와 가지고 지도를 해 줘서 양심의 감화를 받았을 때에  성신의 감화를 접하게 됩니다.

 성신의 감화라 하는 것은 내 주관 마음의 감동으로 감동되는 거, 그 감동되는  거 그것보다도 양심이 나에게 감동시키는 양심의 감동될 때에 사람이. 왜, 그  사람이 자기 사상으로서. 애민족으로, 혹은 애국심으로서 순국을 당하고. 또  이종교라도 그 교를 위해서 순교를 당하고 할 때에 기쁨으로 당하는 그것은 다  그 사람대로의 자기 양심의 감동을 받아 그런 것입니다 양심은 자타의 제재를  받지 안하고 자타에 소속한 자타의 소유가 아닙니다. 자타를 초월한 것이  양심인데, 양심의 감화를 받았을 때애, 이 마음에 수많은 존재들이 있고  기관들이 있지만 그것을 초월한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양심의 감화를 받은 자는  그는 죽음이나 뭐 그런 것이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안하고, 순국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안하고, 또 순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안하고 이렇게 모두 순교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안하는 그것은,  이종교 하는 그런 것은 다 인적 요소의 양심의 능력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자는 거게서,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말은 양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양심의 감화가 부르짖었을 때에 그때에 성신의 감화는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성신의 감화는 우리에게 올 수 있는 우리가 깨끗함을 준비를  했습니다. 깨끗함의 준비를 하고,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또 우리를 다시  깨끗하게 정하게 하고 정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면 우리에게 내  구원을 이루는 역사를 하지만 이렇기 전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오면 나를  불로 소멸시키는 소멸 역사를 하고 있지 내 구원을 이루는 역사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절대 논리적이며 실질적이며 다.

인간이 만든 이 물리 과학이 아니라 이거는 순전히 사람을 만드는 신령한  과학적인 것입니다. 과학적이라 말은 알아 듣기 쉽게 하는 말인데 신앙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지식으로 아는 것만 가지고 하고 아는 것만 가지고 하고  자기가 또 그거 가지고 설교 암만 해 봤자 소용 없습니다. 아는데 서 자기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 깨달음이 있으면 그만침 전할 때에 힘도 있고 그만침  효력이 있습니다. 깨달음 거게서 주관적인 감화가 있을 때에 그만침 실감은  전해질 것이고 효력은 있습니다. 그 주관적 감화에서 양심 감화가 왔으면 강하고  담대합니다. 양심 감화가 오면 힘이 있습니다. 양심 감화에서 성신의 감화가  오면 그는, 거게는 모든 것이 전능이요 거게는 낙망이나 절망이나 안 된다는  그런, 불가능이라는 그런 일이 자기 주관에 없는 것으로서 완전히 감동되는  사람들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자꾸 이 일을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지식을 공부했으니까 지식에서 깨달음을 우리가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깨달음을 공부한다는 말은 고 진리에 대해서 자기에게  해당된 게 뭐이냐, 나는 이 진리를 보고 나는 이래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고  자기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은 나는 이래야 되겠다 하는데 또 다른  사람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은 또 저래야 되겠다 그래 됩니다. 고럴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각오라 그렇개 말합니다. 고 각오 그것이. 그것이 또 확정이  되고 출발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의지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럴 때에 아무리 내가 각오를 가지고 하지만 내 마음도 기울여지지 안하고 내  몸도 기울여지지 안하고, 내 마음도 기울여지지 안하고. 내 몸의 신경도  기울여지지 안하고. 이것이 각오는 했지만 기울여지지 안할 때에 그때는 주관적  감화가 없어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 마음도 몸도 기울여서 마음과 몸이  이제 '나는 어떻게 죽어도 나는 해 보겠다' 하는 그것이 자기 주관적 감화인  것입니다. 주관적 감화가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때에 자기는 거게 대해서 참을  찾고 깨끗을 찾고 성결을 찾습니다. 좀 더 깨끗하게 잡것이 없이 좀 더 정확하게  그렇게 각오한 것이 완성을 이루게 할라고 하는 그것이 다 깨끗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때에 비로소 내가 양심을 만나게 되고 양심은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전에는 내가, 양심이 암만 날 만날라고 해도 양심이 나를 만나지 못합니다.

내가 피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피하기 때문에. 그렇게 깨끗해졌을 때에 비로소  자기 양심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 양심을 만나 가지고 양심의 감화를 받아서  이제는 양심도 거게 기울이고. 그러면. 자기 양심과 마음과 몸의 모든 기능이  하나가 돼 가지고 기울일 때에 그때에 성신의 감화를 영접할 수 있는 자기  주관이 됩니다. 성신의 감화를 영접해서 그대로 할라고 애를 쓸 때에 와서  일하는 것이 누군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때 와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신앙생활을 하지 안하고 이러니까 그때 와 가지고. 나는 그런  걸 잘 기억하지 못하고 고 사건만 기억하는데. 그 집회에서 다른 사람은 자꾸  되는데, '나는 안 된다, 나는 안 된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안 됩니다.' 자꾸 안 된다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자기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게 자기를 알았다는 것이오. 자기를 알았다는 것. 이러기  때문에 자꾸, 다른 사람이 다 가고 없기까지 자꾸 '나는 안 된다 안 된다.' 아마  그 사람이 여게 있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아멘이 될 것이요, 과연  자기가 자기 사실대로라 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걸, 이걸 생각하니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자기의 안 된다는 거, 은혜를 입을 수 없다는 거, 자기는  못 쓸 인간이라는 거 자꾸 그것이 발견되고 발견되고 자기는 거기에는 아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자로 자꾸 자기의 잘못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는 도달할 수 있는, 가까이 갈 수 있는, 그 양심도 찬동되고 이라기  때문에 영감이 오고 역사하니까 그에게 있는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 교인과 세리가 가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 세 리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주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죄인이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그것이 외식으로 형식으로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도리를  깨닫고 자기를 깨닫고 보니까 진정한 고백이 그것이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걸  영접해서 대우했다는 그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는 뭐 여러 지식 아니라도 좋습니다. 하나라도, 한  지식이라도 거게서 깨달음이 생기도록 우리가 힘을 씁시다. 또 거게서 주관적  감화가 일어나도록 힘을 씁시다. 내 신경이 마구 거게 기울여지고, 내 정신이  기울여지고, 내 감정이 기울여지고, 내 마음이 기울여지고, 모든 욕심이고  뭐이고 뭐 모두 산지 사방으로 천지 만엽으로 흩어졌던 것이 다 똘똘 뭉쳐  가지고 그 일에 기울여지도록 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주관의 감화라 그런  것입니다. 주관의 감화가 생겨지도록 우리가 노력을 하고 거게서 양심이 이제는  나와 한편 돼 가지고, 양심까지 나와 하나가 돼 가지고 기울여져서 나를 깨끗게  하는 그 역사가 있을 때에 비로소 성신의 감화를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말하겠습니다. 일곱 가지 중에 첫째인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노아  때와 같다 그랬는데, 그러면, 그때에 사고 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것만 들어 말했지만 전부 세상 일이라 말입니다. 세상 일에만 자기 심신이 다  기울여져서 세상 일에만 마음도 몸도 다 기울여져 가지고 있기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고 멸망되는 고 시간까지 했다 하는데 지금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간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 우리의  마음과 몸에 있는 모든 것은 노아 때에 멸망받은 사람과 같은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노아와 같은 사람인지 생각해 봤습니까? 느껴봤습니까? 거게 대해서  무슨 개적으로 깨달음이 있습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라 하는 것을 자기대로  깨달음이 있을 터인데 그러면. 오늘까지에 우리가 지금 배우고 시작하는  때이니까,  그러면 오늘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면 멸망받은 그 사람들과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노아와 같은 사람으로 돼 있다든지 할것  아닙니까? 노아 같은 사람이 아니고, 노아는 거게다가 전심 전력을 다  기울였는데. 밤낮 거게만 기울이다가, 그 표준으로 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일에 전심 전력이 다 기울여지고 살았으니까 그 시간 살았는데 우리는  이 시간에 재림하신다면 노아 편에 서겠습니까 멸망하는 그 사람 편에  서겠습니까? 자, 멸망 편에 자기는 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놓읍시다. 네. 우리가 다 그런 자리에 서서 있기 쉽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서 있기 쉽습니다. 그라면 안 됩니다. 그런 자리에 서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혹. 우리가 꼭 빈틈 없이 계속 서지 못할 지라도 마음의 중심뿐 아니라  자기 마음의 움직임은 자꾸 계속해서 거게 있어야 되지 이 세상 일에만 그래  가지고 한 시간도 그만 거게만 몰두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이 없고  하루도 생각이 없고 두 시간도 생각이 없고 이렇게 된 다면 이거는 우리가  반드시 불쌍한 사람되고 맙니다. 우리는 끊쳐지는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돼야  됩니다. 안 돼야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할라고 해도 보면, 가다 보면, 가다  보면 십분도 지나가고 이십 분도 지나가 고 삼십 분도 지나가고 있을 수 있지만  하루고 이틀이고 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거기 싹해서는 생각 없이 모든 일  거게만 몰두해 가지고 한다면 우리는 참 정신 빠진 사람들입니다. 사람하고  아무리 같이 얘기 한다 할지라도 얘기하면서 주님 생각하는 것과, 주님이  구름타고 오신다는 데 대해서 여게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얘기하면서도 생각해야  되지 이게 끊쳐져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번에 손을 들어서 우리가 스스로 간증을 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자리 이래 가지고 있으면 오늘 주님이 안 오시겠습니까? 오늘 주님은,  오늘 밤에는 주님이 안 오신다고 단정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여게 대해 좀 느껴봐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만일 주님이 오늘 저녁에라도 구름타고 오시면 우리는 어찌  됩니까? 어떻게 여게 대해서 우리가 감각이 없습니까? 여게 대해서 아무  깨달음이 없습니까? 참 탄식입니다. 이걸 봐도 저걸 봐도 떠드는 사람을 봐도  마지막에 결론은 인생이 불쌍하다 하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뭐 권세를  가지고 권세 때문에 야단지겨도 참 불쌍하다, 돈 때문에 하는 것도 불쌍하다,  인간이 불쌍하다는 것으로 동정이 안 될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은  이렇습니다. 아무리 징계를 받아서 발꿈치로부터 정수리까지 상한 데뿐이고 성한  데가 없어도 인간들은 매 가지고 회개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아무리 불에 넣고 다글다글 볶아도 그거 가지고 인간들이 회개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잡된 마음 잡마음 들어옵니다. 어만 마음 들어옵니다. 어떻게  우리 마음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 본 사람마다 하나님에게 '주여, 당신이 아니면 내 구원은  절단입니다. 당신이 성자 만들라면 성자 만들고 죄인 만들라면 죄인 만들고 당  신 한 분의 주권에 있습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게을박이가  자기가 입술에 발려 가지고 구하는 것과 자기가 이렇게 힘쓰고 애를 써 봐도 안  되는 그 결과에서 '주엌, 우리 인간으로서 안 됩니다. 당신의 은혜라야 됩니다'  하는 사람과는 그거는 하나는 살았고 하나는 죽었습니다 공연히 헛되이 위로를  받으면 안 됩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다, 불경건한 자는 심판과 멸망 때까지 보존했다가 불경건한  자들이 심판 받고 멸망 될 때에는 모든 것이 다 불탄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찌 됩니까? 불경건이라 말은 그만 쉽게, 다 해석 말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거. 더 세밀한 해석은 있지만 하나님을 위하는 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거. 불경건은 하나님을 위하지 안하고  사랑치 안하고 세상에 있는 그것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불경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매일 매일 뮐로 나오고 있습니까? 경건으로 나오고  있습니까 불경건으로 나오고 있습니까? 이것도 좀 살펴봐서 자기가 어떤 자인지  학정을 지우면 그것도 깨달음입니다. '아, 나는 이런 자이다' 하는 그 확정  그것도 깨달음입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대해서 '나는 이런 자이다'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사는 가운데에 내나 그 사람들 모양으로 의식주  또 장사 또 남녀 관계 이거 생각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없다가  멸망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불경건한 자를 심판하여 멸망시키는 그 불경건한  자가 우리일란지, 우리는 불경건한 자에게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안하면 경건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경건한 사람을 선택한 그 경건한 자에게 속해 있는지  이것도 우리가 스스로 느껴 봐야 합니다. 나는 지금은 경건한 사람에게 속했는지  불 경건한 사람에게 속했는지. 어떻습니까?  자 오늘 종일은, 오늘 종일 그라면 24시간인데 24시간 이 가운데에서 12시간은  불경건에 속해 살았다 그렇게 생각되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한 시간도 경건  생활은 하지 못했다, 경건에서는 떠나서 세상보고 살았지 한 시간도 경건은  생각지 못했다, 한 시간도 경건 생각지 못한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한  시간도 경건 생각지 못 한 사람, 다시 말하면 한 시간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는 마음을 한 시간도 계속 가지지 못한 사람 말이오. 손 들어요 다 외식하고  거짓말하지 말고. 스스로 속아요. 자꾸 자기를 비판해 봅시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하는 그것은, 그러면 우리가,  하루가. 주님의 마음이 하루가 천 년 같다고 하는 대로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주님과 진리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고 참고  견디고 봉사하고 수고하고 이럼으로써 한 시간 한 시간 생활하는 것이 주님  앞에는 심히 답답해서, 답답하고 그 고단함에 동정이 돼서. 동정이 돼서 하루가  천 년같이 그렇게 우리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럴 사람인지, 그럴  사람인지. 그렇지 안하면 천 년이 하루 같은 그런 사람일란지?  여러분들. 하루가 천 년 같은 사람은 자기의 신앙생활의 생활이 기쁨으로  생활하는 것도 좋지만 참으로 진리대로 믿음 생활할라 하는 생활은 고달픈  것입니다. 고달프요. 한 시간 한 시간 살아 나가기가 참 고달프고 심히 고달픈  그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하는 것은 수월해 기뻐하는 것  아니오. 이는 다만 주님을 생각하고 이성적인 기쁨을 가지는 것이지, 믿는  사람이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자기가 믿음을 지키는 그 생활을 하는 그것이  심히, 기뻐할라고 해도 심히 고달프고 피곤하고, 정신이 피곤하고 마음이  피곤하고 고단하고 심히 힘드는 그 사람이 되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주님도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그 본인이 거룩과 경건 생활을 하는 데에 그  한시간 하루 그 생활이 심히 고달프고 피곤하고, 심히 고달프고 피곤한 그  사람이 제가 되어 있으면 주님이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하루가 천 년 같은 그런  심정을 가지고 계시게 됩니다.

 이것도 공연히 헛되이 위로를 가지지 말고, 그러면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 네게  대해서는, 네게 대해서는 하루가 천 년 같다. 어떻게 세월이 안 가던지 하루가  천 년 같다. 하루를 지내는 데에 바당바당하이 하루 가는 것이 천 년 만침이나  긴 거 같다.' 이렇게 동정하시는 그 주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의의 걸음을 걷는 그 신앙생활이, 남한테는 웃고 좋아하고 이렇지만 진정 그  심령에는 피곤하기가 짝이 없어서, 괴곤하기가 짝이 없고 참 뭐 뭣이간에.

그러니까, 땅의 뭐 이런, 땅의 이런 욕심 저런 욕심 뭐 욕심 그런 거야 있을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욕심이 있습니까? 뭐 돈 욕심이 있겠소. 뭐 명예  욕심이 있겠소? 그거는 참 천리 밖에 멉니다.

 한 시간 자기가 구별하는 생활. 하나님을 위하는 생활,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런  생활이 없는 그런 생활을 할라고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시간이 천 년 같고  하루가 천 년만치 심히 그 시간이 고달파지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오. 고런 사람에게 주님은 동정하십니다. '아, 어쩌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한 시간 지나갔다. 어쩌다 보니까 아이구, 하루 지나갔다. 아, 어째 뭐  오늘 시간 다 지나갔네. 하루가 다 지나갔네. 벌써 어둡네' 이렇게 시간이  자기에게 쉽게 지나가는 그런 사람은 무슨 의로운 일에 재미가 있어 가지고 그런  것 같다고 그렇게 보여지지만 실은 그 진짜에 도달하지 아니한 외식입니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주님도 천 년이 하루같이 생각됩니다. 천 년이 하루같이.

 우리 생활은 하루가 천 년같이, 하루 해를 지내기가, 하루 해를 그날 지내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일 일은 내일 하라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에 족하니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그런 말은 다른  측면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이 그 날에 족하다, 네가  하루 동안도 한 시간도 이렇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 생활을 한 시간 생활도 피곤하고  고달파서 견디지 못할 만치 이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이' 하루 동안을 살라고 하니까 있는 전심 전력을 다 기울여서 더  유지되지 못할 만치 그렇게 우리에 게는 한짐되고 무겁고 피곤한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주님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다" 하루가 천년 같은 이 주님의 심정으로 대함을 받겠느냐, 내게 대해서는  주님이 하루가 천년 같은 그 심정을 가지고 날 대하실란지 천 년이 하루 같은 그  심정을 가지고 나를 대하실란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그것을 우리가  느껴 보는지? 이게 아니면 저게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 했습니다. 도적같이 온다 이거는 갑자기  오신다는 그말입니다. 갑자기 오신다는 것. 그러면, 갑자기 오신다는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깨닫고 있는지, 갑자기 오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어느 정도  우리가 깨닫고 있는지, 어느 정도 자기가 '아, 갑자기 언제 오실지 모르니 나는  이래 가지고는 멸망받을 사람이다. 언제 오실지 모르니 나는 어째야 되느냐?'  근심의 깨달음이 있는지, '아, 나는 이라니까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깨달음이 있는지, 하나의 지식으로 '아,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 갑자기  오신다' 이렇게만 알고 있으며 거게 대해서 나는 어떻게 깨달았는지, 나는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어 떤 각오가 되어 있는지, 나 할 일은 무엇인지,  거게 대해서 내 주관적 감화를 받아 봤는지, 내 신경과 내 마음이 마구 그리  기울여져서 쏟아지고 기울여지는 주관 감화를 받아 봤는지, 거게서 양심의  도움을, 양심의 도움을 호소한 일이 있는지 '양심이여, 날 도와주옵소서,  양심이여 나를 도와라, 나를 인도해라, 나를 깨우쳐라, 나는 어두워서 깜깜  어두운 먹장 같다.' 이렇게 양심의 도움을 부르짖을 때에 비로소 성신의 감화가  와도 올 수 있고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와서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요,  우리가 그렇지 안할 때에는 성신이 우리에게 오면 우리는 소멸해 죽습니다.

 헛되이 담대하지 맙시다. 헛되이 위안받고 있지 맙시다. 공연히 낙관하고,  과거에도 보면 너무 허망한데, 과거에 뭐 신사 참배니 6.25때에 하는 그런 것은,  그까짓 거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참 구원에 이르러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이 불타지 안하고, 모든 게 불탈 때 불타지 안 하고 주님을 만나게 되는 이것이  뭐이냐? 그것이 영생하는 성화된 것이라 그말이오. 우리 몸뚱이는 다 불에 타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하고. 우리 행동으로 말미암지 앉고 순전히 그거는  은혜이기 때문에 그거는 부활은 합니다만 우리의 기능이라고 하는 건 우리의  공로가 들어 있습니다. 기본구원은 우리 공로가 하나도 관계치 안하기 때문에  그것은 상관 없지만 전설구원은 우리 공로가 관계 있기 때문에 건설구원에는  참여를 못 합니다.

 갑자기 오신다는 데 대해서 얼마나 느껴서, 갑자기 오시면 어찌 될란지? 만일  이 시간에,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신다면 나는 어찌 되나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몇백 번이나 생각해 봤으며, 몇천 번이나 생각해 봤으며. 거게 대해서 어느 정도  깨달음이 있었으며, 어느 정도 거기서 '나는 이래야 되겠다' 하는 각오가  있었으며. 어느 정도 마음이 거게 기울여지고 몸의 신경이 기울여지고 모든 힘이  다 그리 기울여지는 주관적 감동이 어느 정도의 감화를 입어 봤는지? 거게서  암만 봐도 더러운 것뿐이고 암만 봐도 또 틀리고 또 틀리니까 양심에 호소해서  나에게 이것을 알게, 이걸 바로 울게 바로 알고 바로 이래 해 나가게 해 달라고  하는 호소하는 그것이 곧 양심에게 호소 안 하나 그것이 자기 속에 있는 빛에게  호소하는 것이요, 그것이 양심을 찾는 것이요. 양심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니  그럴 때에 그런 가운데서 성신을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실 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우리는 느껴봤는지,  어느 정도 놀래 봤는지, 어느 정도 두려워 봤는지, 어느 정도 낭파 되는 양을  한번 생각해 봤는지, 뭣이 어떻게 된다고, 구름 타고 오시면 어떻게 된다 그것을  실질적으로 한번 계산을 해 봤는지, 느껴 봤는지? 우리는 그런 것을 자꾸  계산하는 것이 믿음 없는 자 되지 안하고 믿는 자 될라고 하는, 노력하는  것입니다. 거게 대한 자기의 주관 깨달음이 그 각오가 없고 주관적 감화가 없고  양심에 호소가 없는 그런 데에서 뭐이 믿음이 됩니까? 그거는 다 잡탱이  믿음이요 다 불탈 믿음이오. 거게서 성신의 감화가 와 가지고 생겨지는 그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전능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를  자꾸 예수님의 피로 씻고 깎고 삣고 깎고 씻고 닦고 이렇게 하는 데에서 우리만  깨끗해지면 당신은 오라 소리 안 해도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래서, '하늘은 불에 타서 풀어지고 모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모든  일들이 드러나리로다' 그때에 이제 불에 태우니까 불타는 것과 타지 안하는 것과  둘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깨끗하면 불타지 안할란지, 나는 불타지 안할  자신이 있는지. '땅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하는 일이 불탈 것과 불타지 안할 것과 드러납니다. 불탈 거는 불타 버리고  불타지 안할 것은 불타지 안했기 때문에 드러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의는 남아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준비는 거룩과 경건으로 준비한다고 말씀했으니까 우리가 얼마나  거룩을 자꾸 생각하며 경건을 얼마나 생각하고 자꾸 연습해야 되겠습니까?  이래서, 거룩도 연습으로 됩니다. 경건도 연습으로 됩니다. 성경에 연습으로  된다고 했어. 자꾸 주님을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하루 백 번 하고 천 번 하면  자꾸 그 마음이 돼지고 그만침 변화됩니다. 또 뭣을 구별하고 자꾸 구별해 보면  눈이 밝아집니다. '저거는 틀렸다 틀렸다.'이 제 눈이 밝아지면 자기에게 대한  모든 것이 탄식이 되고 고쳐질라 하면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말할 여유가  없어. 세상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지 안해도, 안 한다 해도 멸망은  멸망입니다. 전부 멸망으로 다 이래 가 지고 이제 딱 붙으면 그만입니다. 이럴  수 있도록 죄악은 관영돼 있습니다. 뭣을 보아서 남길 게 있습니까? 대인들의  행동 보면 남아 있겠습니까? 아니오. 대국들이 하면 그거는 좀 뭐이 든든합니까?  아니오. 칠 팔월 수수잎입니다. 일초에도 이렇게 흔들리고 있오. 뱀 꼬리같이  흔들리고 있오. 뭣이 고정이 되고 뭣이 든든하고 뭣이 견고한 게 있고 뭣이  중량이 있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리석지 말고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다가 마음을 붙들어 맵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마음을 붙들어 매라' 어디다가? 주의 재림의 날에 붙들어  매라, 네 마음을 거기 붙들어 매서 항상 네 마음이 거게 있게 해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하게 된다. 방탕하게 된다. 이 예수님의 재림에 마음을 붙들어 매지  안하면 방탕하게 된다. 방탕이라 하는 것은 이거 보니까 좋으니까 여게 피동되고  저거 보니까 좋으니까 저게 피동되고 이거 저거 여게 저게 피동되는 그게  방탕입니다. 여게 피동되고 저게 피동되고, 여게 속하고 저게 속하고, 이거 욕심  내고 저거 욕심내는 그런 것이 다 이제 방탕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 한 분에게. 그날에다 마음을 붙들어 매지 안한 거는 전부  방탕이오. 뭐 명예에 끌린 거나 지위에 끌린 거나 육의 생명의 애착심에 끌린  거나 다 방탕이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세상주의에게 자연히 도취하게 됩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생활의 염려가. 생활의 염려가 됩니다. 생활의 염려되면 마음은 벌써  썩었소. 마음을 벌써 둔하여 집니다. 그러면 '뜻밖에 주의 날이 덫과 같이  너희들에게 임하리라 이는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일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너희 앞에 이런 일이 닥치지 아니하도록. 주의 날이 덫과 같이  너희들에 게 임하지 아니하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깹시다. 너무 우리가 행동이 없습니다. 저는 허공을 쳤습니다.

너무 교인들이 따라오고 뭘 실행하는 줄 알고 자꾸 진리만, 곧은 진리만 바른  진리만 어쩌든지 예수 믿기에 이상적으로 쉬운 도리만 말할라고, 어찌됐든지  간에 곧고 바른 길만 말할라고 했는데 이거는 전부 지식의 지식의 욕구를 채워서  지식주의만 만들고 말았지 행동이 하나도 없어.

 요번에 거창 집회에 가 가지고 누가 재독할 때에 재독하는 것을 시끄럽다고  뭐라 하니까 싸움이 일어나 가지고,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이 무슨  말한다고 머리털을 들어서 머리털이 쑥 빠지고 머리가 쑥 빠지고 이 불쾌한 일이  있었다고. 그런 소리를 듣고 나한테 말해 주지 안한 그런 이간들도 다 귀신이라.

왜? 썩었어. 어쩌든지 무사주의야. 일 없는 게 좋아. 무사주의라 그만,  무사주의. 이래 가지고 거기 왔던 다른 교회 사람 들은 아이고, 거기 말씀은  좋지만 여게 자식들 보냈다간 자식들 버리겠다. 사람들이 어떵게 악하고 독한지  겁이 난다' 그런 것이 하나 들어 가지고 이 복음을 막으니까 그게 저주 안 받고  되겠소? 회개해! 회개 안 하면 저주 받아! 저주 받아 가지고 병신 돼! 병신이  돼야 돼! 회개 안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복음을 막는 자를 그냥 두지 안해.

복수하셔.

 어쩌든지 서부 교회는 싸움쟁이뿐이라, 사찰들도 여기서 뭐 들어오면 막 그저  나는 잘 듣지를 못했는데 오면 보면 여기 싸움이래요. 그래 사찰만 들어오면  깡패가 돼 버리요. 이제는 소제를 못 해도. 먼저 장로님들이 가 가지고 한번  말했는데 요다음에는 싸울 일이 있거들랑은 그것을 신고함에 써넣든지 그렇지  않으면 와서. 아무리 제가 시간 바빠도 제가 대해 줄 터이니까 저한테 전화로  하든지 말해 가지고 처리하도록 하고 고함 지르지마. 고함 지르는 사람은 뭐 그  사람 아니면 이 교회가 썩어 자빠져도 다 그 날부터 다 사면입니다. 다 쫓아  보냅니다. 사면입니다. 필요 없어. 목사도 필요 없고 전도사도 필요 없고 장로도  필요 없고 필요 없어. 그런 사람 다 뉘든지. 뭐 사찰이든지 경비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부덕스럽게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뭐 쫓겨나도 처리하겠습니다.

이래야 이 교회가 뭐 되든지 복음이 돼지지. 이래 놓으니까 이 교회가 그만  주먹이 제일이라. 우리 총공회는 주먹이 제일이야. 얼마 전부터 주먹 센 사람이  제일이라. 깡패가 그러니까 이 총공회는 제일 대가리가 됐어. 깡패가. 주먹 센  게. 젊고 힘만 세면 막 이래 가지고 날뛴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진리를 말하는 원로 목사들은 꼼짝을 못 해. 안 되면 막 주턱  가지고 달라들긱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쳐 서 주먹도 언간히 오그라  들어갔습니다 오그랑망탱이가 돼서 회개 안하면 제까짓, 제까짓 것들이  오그라져서 어떻게 될 거라! 하나님이 어디 죽은 줄아요? 하나님 살아 계십니다.

다 정신 차립시다. 이제는 주님 오실 때도 가까왔고 회개해요. 부량 빼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요새 지금 우리 교회는 재판이 걸렸습니다. 재판이 걸렸는데 주일날 오전에  저게 차가 두 대 있었다, 없었다 있었다, 없었다 있었다. 아직까지 판단이  없습니다. 오늘은 보면 없었다 하는 사람이 좀 유력하고 또 내일 보면 또 있었다  하는 사람이 유력하고 이렇게 사람들이 진실치 못해. 알지 못하고 벌로 입을  놀리지, 또 모르고 말을 하고 있지, 모든 거 벌로 보고 돌아다니지, 이러니까.

뭐 사람들이 완전히 정신을 잃어 버린 이거는 허수아비 사람들이라.

 서부 교회는 행함이 없는 교회라 하는 그 간판을 지고 회개를 해야 됩니다.

따라합시다. 서부 교회는! 행함 없는 교인이다! 왜 소리가 적어요? 회개 안  하면! 멸망받을 교인이다! 회개 안 하면? 멸망받을 교인이다! 행함 없는  교인이다! 회개해요. 회개. 회개 안 하면 죽자껏 해야 고생만 해. 안 믿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하고 꾀 쓰고 절약하고 절용하고 애쓰고 수단 부리면 잘  삽니다. 기독자는 안 돼 기독자는 아무리 그 사람이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하고  아껴 하고 어떻게 한다 해도 안 돼. 꼭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아서만 사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축복받을 수 없이 하면 저는 골만 빠졌지 헛일이라 그저 하나님께  축복받기 위해서 언행심사를 조심하면서 벌벌 떠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축복해서 그 사람들을 약하나 강하게 만드시고, 작은 자나 큰 자 만들고 이렇게  하십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우리 회개합시다.

 십분 동안 바짝 회개하고 기도하고 지난 주 오전 오후 설교 재독이 있겠습니다.

 어쩌든지 회개합시다. 이제는 떠들고 사나웁게 날뛰면 그거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고 개 같은 인간으로 여겨요. 사람으로 대우하지 말아요. 성도로 여기지  말아요. 돈 가지고 백지 여게 저게 그저 이자 많이 준다 하니까 놓아 가지고  나중에 돈 못 받아 가지고 원수 삼고 그리 하지 말고, 이자 비싸게 받아  먹을라고 돈 줘 가지고 돈 떼이는 그것도 도둑놈, 못 갚을 돈 가지고 써 거석해  가지고 못 갚는 그것도 도둑놈 다 도둑놈 아닙니까? 도둑놈이 무슨 하늘나라  갑니까. 가기를? 회개를 해야 가지. 그런 거 다 고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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