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00:46
성령의 방언 역사
1986. 3. 15. 토요일새벽
본문:사도행전 8장 14절∼23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예수님 믿는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아닙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마차를 타고 갔습니다.
성령님이 빌립에게 감동되기를 지금 네가 저 마차 타고 가는 사람에게로 달려가라. 그래서 빌립이 마차 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보니까 그때 어떤 사람이 마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성경을 읽고 있는데 그래 그 빌립이 말하기를 ‘네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의 뜻을 깨닫느냐? 이라니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그저 성경은 좋은 줄만 알고 읽고 있다.’ 빌립이 예수님이 대속주 되심을 그에게 전할 때에 그가 깨닫고 믿고 기뻐서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 이래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에디오피아 내시는 그 기쁘고 훈훈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서 신앙 생활을 잘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했습니다. 그 사람은 꼭 한 마디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도가 임해서 참 도인이 됐었습니다.
언제 제가 말했지마는서도 우리 총공회 진영에서 제일 믿음이 좋은 부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제가 보는 대로 그와 같은 신앙을 가진 여반들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분이 신앙 생활한 것을 보면 자기 남편은 왜정 때부터 중 고등학교 교장입니다. 그때 한국 사람으로는 제일 높은 직을 가졌습니다. 그는 뭐 친일파라 그런 게 아니고 지식을 탁월하게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이용할라고 그렇게 시켜서 유력했었습니다. 그랬는데 또 그 가정은 아주 세상 세력도 있고 양반의 가정입니다. 그때 6.25 피난해 부산에 와 가지고, 제가 그때 어느 집회던가 모르겠습니다. 예? 하단에는 자기 동생이 은혜 받지 안했던가 모르겠어. 하단에 있었던가? 녜, 하단에 있었는 갑습니다. 녜, 하단에 가서 집회를 했는데 거기에 늦게사 참석해서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인가 참석을 했습니다. 참석을 하고, 그분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참석을 하고, 고다음에, 또 어데인가 그때는 내가 뭐 ○○ 신학교 다닐 때인데 언제든지 금요일날 공부 끝나면 금요일날 밤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월요일날 아침까지 계속하는 집회를 한 번도 안 뺐습니다. 한 번도 안 빼고 양 사방 하도 청해 쌓아서 계속해서 증거를 하고, 또 신학교 다닐 때도 그 교회에 어려운 문제만 있으면 신학교 운영 위원들, 모두 이사진과 교수진이 저를 불러 가지고서 천상 여기 좀 가서 집회 인도를 좀 가서 하고 와야 되겠다고서 이렇게 말하면 할 수 없어 갑니다. 가니까, ‘내가 뭐 공부도 하지도 안하고 이런데’ `공부는 그거는 뭐 하나 안 하나 다 우리가 인정하면 되는 거 아니요?’ 이래서 늘 그리 다녔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데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 뒤에 그분이 다섯 시간인가 참석을 해서, 그라면 금요일날 밤, 토요일날 세 시간, 또 주일날 세 시간, 일곱 시간. 또 월 요일날, 여덟 시간. 그 후에 또 여덟 시간 또 참석했습니다. 합해서 한 여남은 시간 이래 집회 참석하고 난 다음에 그때에 환도가 돼서 도로 자기 본토 제천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고 난 다음에 그때 그분이 감리 교회밖에 없어서 감리교로 나가 가지고서 감리교에서 신앙 생활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던지 온 감리 교인들이 보고서 ‘참 예수 믿는 것이 저렇게 저게 예수 믿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처음으로 그들이 봤습니다. 털끝만치도 양심에 가책되는 일이나 말씀에 어기는 일이나 하지 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덕을 끼치기 위해서 참 전적 희생하고, 그 지방에서는 제일이었습니다. 제일 세상도 이런 줄 알고 자신도 이런 줄 알고, 이렇게 높이고 그러니까, 내가 그 뒤에 말 들으니까 가 알아 보니까 그 지방에서는 그 사람을 사귀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뭐 경찰서 서장 부인이라 하는 그런 사람들은 밑에 종이고 재판소 판사, 또 검사는 뭐 그렇게 그저 부인들은 사귀어서 그라고 그렇게 아주 코가 높은 사람입니다. 이랬는데도 그 후는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감화 주는 그 신앙 생활했던지 감리 교인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는데, 그분이 한번은 나는 아무래도 이 신앙 가지고는 은혜가 안 돼서 못 하겠으니까 나는 장로교로 교파를 옮겨야 되겠다 그라고, 그때 여기 장로교인데 ‘옮겨야 되겠다’ 이라고 그 사람이 거게서 선포를 하고 나왔습니다. 나오니까 그때 따라 나선 사람이, 지금 모양으로 교인이 많지를 안한 때입니다. 한 오십 명 가량 따라 나섰습니다.
오십 명 가량 따라 나서 가지고서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 와 가지고서 아무래도 전혀 힘이 없으니까 약간 좀 도와 줄 수가 없느냐 이래서 그때 한 달에 육천 원씩 도왔습니다. 그때 모두 참석한 사람들이니까 압니다. 육천 원씩 도왔는데 육천 원 도와서 여섯 달 돕고 나니까 그만 자립하겠다고서 거부를 해서 그래 여섯 달만 도왔습니다. 그것을 ○○○라 하는 사람이 그때 양복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내가 말해서 이런 자리가 있으니 네가 육천 원씩 댈래 하니까 ‘제가 대겠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거기서 마다 해서 여섯 달밖에는, 그러면 육 욱은 삼십 육, 삼만 육천 원인가 요래 댔는데 그때에 그 육천 원이면 지금으로 말하면 한 아마 한 십여만 원이나 될란지! 그랬는데, 내가 ○○○ 씨가 그 뒤에 오래 후에 하도 딴데로 이럴 때 그만 자기 고향이 딴데 있어서 그리 갔었는데 그 후에 한 번 왔습디다. 장로가 돼 가지고 와서 ‘그래, 그 전에 받은 은혜가 그리워서 잊어 버리지 안하고 항상 기도하고 늘 그때 들은 말씀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사람인지 그 사람이 참인지 그렇게 말하면서, 왔읍디다. 내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ㅡ그래 장로님이 됐습디다ㅡ‘장로님이 그때에 한 달에 얼마씩 육 개월 개척 교회 보조한 일이 있었는데 그 교회가 지금 어떤 정도로 큰 교회가 됐습니다.’ 이라며 내가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장로님이 일생 동안 돈 쓴 가운데에 여게 쓴 돈이 아마 제일 가서 보면은 가치가 있고 바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그래 말했습니다. 그가 그 전에 있을 때도 내가 그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열심히 가 가지고 신앙 생활 해서 아주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렇게 장로까지 됐습니다.
이 말 왜 하는고 하니 되나 안 되나 교인들에게 자꾸 돈만 가져 오면, 돈 봉투만 가져 오면 자꾸 집어 넣어 가지고서 자기가 이렇게 그만 써 버리면 그게 넉넉하고 좋은 줄 알아도 그거 다 뒤에 가서 계산하는 날이 있습니다. 요새 부도 나는 사람들, 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서 구속당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 앞으로 계산할 때가 있다는 그것을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또 믿는 사람으로서는 더군다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서 모든 것이 다 계산 대야 됩니다. 경제 계산도 다 대고, 이라기 때문에, 사람이 살면서 그 사람이 나를 뭘 도와서 이래 할라면은, 대접을 하면은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안 받을 수는 없으면 받아야 그 사람에게 믿음이 생겨지고 좋아할 터이고, 또 믿음이 유익이 될 것이니까 받기는 받습니다. 받으나 말 없는 가운데에 무언 중에 계산은 있어야 됩니다. 무언 중에 계산은 있어서, 그 사람에게 받았으면 말 없이 뭘로 대신 갚아도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가져오니 그것을 도로 그 물건을 도로 보내 줄라고 해도 그거는 안 되고 그라면 뒤에 그 사람에게 뭣이 필요한 그런 것을 돈을 보내 가지고는 안 되겠고, 뭣을 사서 할라면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물물 교환으로 이렇게 갚을라고 하니 괴롭습니다. 또 그렇게 안 하면 그 사람에게 뒤에 가서 가 봐서 그 대접해 주는 데 대해서 값을 냈어야 되지 공 것은 없는 것이니까 그러면 거게 대해서 기도를 하든지 뭣인가 그 댓가를 해서 나중에 가서 댓가를 좀 더 치렀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갚아 줄 것이고 댓가를 덜 치렀으면 내가 갚아야 됩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 지저분한 그런 것들을 전지 전능자가 심판자가 돼 가지고 모든 그런 것을 계산하는 그런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분이 가 가지고서 여섯 달 동안에 자립하는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 세울 때에 자기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시부모인가 남편인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때가 좀 오래 돼 놔서. 세상을 떠나서 장례를 하는데 그 장례를 하니까 그 지방에서는 제일 높다고 할 사람입니다. 왜? 그분이 학교에 교장으로 지내면서, 그때 교장이라면 뭐 왜정 때에 참 생활이 넉넉합니다. 그 사람들은 굉장히 넉넉하고 보통 서민들이 사는 뭐 몇십 배 생활비를 가지고 살 만치 그만치 아주 대우가 좋았습니다. 이랬는데 그 돈을 가지고 전부 학생들을 길렀습니다.
학생들을 길러서 다 대학까지도 시키고 이래 많은 학생들을 길러서 전국에 그렇게 많은 학생들을 길렀기 때문에 부하들이 많습니다.
그 부하 중에 한 분은 지금 우리 교회에 지금 나오고 있습니다. 그분은 ○○ 법대 대학원 원장으로 내치 거기서 있다가 정년이 되어서 퇴직 해 가지고서 인제 여기 ○○ 대학은 사립이기 때문에 와서 법대 학장으로 와서 좀 수고를 해 달라고 해 쌓아서, 사립은 정년이 없기 때문에 거기 와서 있다가 이번에는 또 말 들어 보니까 아무래도 총장을 해야 된다고서 ○○대학 총장이 됐다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여기 나옵니다. 그분도 그분이 공부를 시켰습니다.
이러니까, 얼마나 사람이 뭐 참 초상이 났으니까 그때는 조문객이 굉장히 많을 것이고, 또 조문객이 오는 데는 그 부조금도 굉장히 많았을 것이고, 이랬는데 그분이 꼭 들어서, 그때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살아 있을 때고 다른 그 부모의 아마 장례인가 뭐인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 뒤에 내가 그 남편을 많이 접촉을 했기 때문에 압니다.
이랬는데, 그때에 주일도 걸리고 또 뭐 술 쓰는 일도 있었는데 술 안 썼습니다.
술을 안 쓰고 부의금 들어오는 거 안 받고, 술 안 쓰고, 이러니까 남편의 큰 수치가 되고 이랬지. 술도 안 쓰지 부의금도 안 하지 꼭 믿는 법으로 딱 이래 할라 하니까 그 남편하고 얼마나 그 대립이 됐지마는서도 생명 내놓고 기어코라도 술 안 쓰고 그 모든 불법하는 부조니 그런 거 받지 안하고 이래 가지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지방이 좀 뒤집어졌습니다. 이래도 꼭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 뒤에, 그 남편 세상 뜨고 나 가지고서 아주 경제가 어려웠습니다. 어려우니까 뭐 다 모두 이렇게 해 가지고서 교회 세운다고 다 돈 다 들여 버렸고, 또 자기 과거에 뭐 이런 저런 어려운 돈 그런 거 부정한 돈 다 청산 다 해 버리고 이라니까 없다 그말이오. 없고 이랬는데, 이러니까 그분이 꼭 계속해서 매일 그때 내가 듣기를 하루 뭐 한 끼인가 뭐 두 끼인가 어떻게 이래 단식을 하고 고것을 돈을 저축을 해 가지고, 지금 말하면 웃습니다. 웃지마는 그때는 우리나라가 참 가난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입니다. 이러니까,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도 연보 할라면은 그저 양식이나 좀 밥이나 좀 적게 먹어 가지고서 돈을 만들지 딴데는 돈을 만들어 낼래야 없습니다. 요새야 뭐 회사가 공장이 많고 이래서 있지만 요새 사람은 그때 사람들 모릅니다.
그때는 어떤 때가 지나간 때냐 하면은, 얘기에, 어떤 사람이 보니까 물을 보니까 물이 한 양푼이 있는데 그 양푼 밑에 밥티기가 하나 있기 때문에 그 밥티기 그걸 먹을라고서 지금 마음에 욕심이 나서, 그 소리는 못 하고 그놈만 건져 먹을 수는 없고 그 물을 한 양재기를 다 둘려 마시고 보니까 나중에 밥풀은 아니고 자기 눈에 백내장이 있어서 명시가 박혀서 그게 밑에 반사돼 가지고서 그랬다는 그런 말을 하는 그게 실제입니다.
시동생이 밥푸는데 가니까 그 형수가 밉상이라서 주걱으로 가지고 때려 주니까 그만 밥풀이 여기 붙었다 말이오. 붙었으니까 그게 어떻게 좋은지 밥풀 이걸 몇 내끼를 떼어 먹고 또 밉상지기면 또 밉상지겨 가지고서 이쪽에 한 번 떠 때려 달라 하니까 이놈 그 밥티기가 붙어 갔구나 싶어서 그래 안 때렸다고. 그때는 밥 먹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요새 사람들은 그거 몰라요.
그렇게 살아 가지고서 그라면서 달리는 길이 없고 이라니까 자기 집은 넓어서 방은 많고 하니까 여인숙을 했습니다. 여인숙을 했는데 여인숙을 해 가지고서 인제 생계를 유지하면서, 주일날 되면은 매매 안 한다고 거게 온 손님들은 누구든지 주일날은 밥값 안 받습니다. 그때 뭐 정직하게 할라 하니까 별 유익도 없는 데다가 주일날을 밥값 안 받아. 주일날 밥값 안 받으니까 그것도 또 큰 소문이 났습니다. 그만 언제든지 누구든지 의례히 주일날 밥값 안 받으니까 거게 제천이라 하는 곳이 교통적으로 도시가 되어 가지고 있는 곳이요 참 상업 도시입니다. 이러니까 전부 물건 사러 오고 거기 전부 자연산이 많기 때문에 그거 사러 오고 이래 가지고서 그곳은 다른 도시와 아주 좀 다른 그런 성질을 띤 도시인데, 많은 상인들이 와 가지고는 소문이 나니까 전부 그 집으로 모아 듭니다.
모아 드는데 방이 없으면 어짤 수 없고 방이 될 수 있는 대로 올라 한 사람은 버리지 안하고 이거 다 영접을 해 가지고서 이래 좀 ‘손님이 방이 비좁은데 이래도 좋습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소문 들었거든. 밥값 안 받는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소문 들었기 때문에 다 밀려 들어.
어쨌든지 이분은 또 욕심이 딴 욕심이라 주님에게 영광 돌리는 그게 욕심이라.
이러니까 얼마든지 오면은 받아 들여 가지고서 주일날은 밥값 안 받고 이라니까, 또 여인숙을 해 봤자 나중에 다 벌어도 주일날 공밥 먹이는 그 돈밖에는 또 안 됩니다. 그러나 소문이 났어. 거게는 예수 믿는다 하면은 그런 사람 있다, 또 그렇게 많은 부조가 들어오지마는서도 그것받지 안하고 또 반대해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있다, 또 그 사람은 그날 술 안 쓸려고 가정에서 그런 큰 분쟁이 나고 이래도 기어코라도 술 안 쓰고 그렇게 했다, 또 그 사람은 교회 세우기 위해 가지고서 자기가 어떻게 금식해 가지고서 연보를 했다, 또 그 사람은 믿기로 시작하고 거기 가고 난 다음부터 하룻밤도 집에서 자지는 안하고서, 믿는 사람 몇 사람을 데리고 산에, 그래 높은 산은 아니고 낮은 산인데 그 산에 가 가지고서 밤마다 가서 기도하고 이래 한다. 이 모든 걸 덜렁덜렁 둘러 맞춰 보니까 이제 그거 예수 참 믿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육 개월 만에 그 교회가 자립했습니다.
했는데 거게 가서 믿는 사람들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랬는데, 거게도 진리에 대적하는 적들이 많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서 그 교회를 세웠는데 지금 ○○교회라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사람은 그러니까 통 열 한 시간인가 설교 말씀 듣고 가 가지고서 거게서 여기가 머니까 올 수 있습니까? 못 옵니다. 못 오는데, 지금은 뭐 교통이 좋지만 그때는 차는 있었지마는 타고 올라 하면은 꼭 열 두 시간인가 뭐 그때 열 다섯 시간인가 걸렸습니다. 시간이 그렇츰 걸렸습니다. 요새는 달라요. 요새 말하면 모두 거짓말 같애. 서울도 그전에는 여덟 시간 걸렸는데, 여덟시간이 여섯 시간 되고, 여섯 시간이 뭐 몇 시간되고 요새는 뭐 네 시간 돼? 다섯 시간 돼? 다섯 시간 걸리요. 거창도 여기 올라 하면은 꼭 사흘 걸렸습니다. 차타고 올라 하면 사흘 걸렸는데 요새는 세 시간이면 가. 그렇게 지금 고속 시대가 됐습니다. 그래 그때 말하면 모두 거짓말같이 들어.
이러니까 거기서 오지도 못해. 오지도 못하고 그저 사모만 하고 그때 진리 들은 것만 생각을 하고서 늘 고대로 꼭 실행합니다. 열 한 시간 들은 고 말씀대로 실행하니까 그만 된다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 참 영광을 많이 돌렸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지금 자손이 어찌 됐느냐 하면은 큰 아들은 지금 사업을 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저한테 찾아와 가지고서 말하기를 ‘그저 어째 됐든간에 여게 양성원을 짓든지 또 어데 뭐 하든지 목사님이 어데 돈 대라 하면은 돈 얼마 대겠습니다.’ 그때 언제 집회 할 때에, 너는 사업을 해 가지고서 돈 대라 할 때에 돈 대라 하는 그 말씀을 대구 집회 때에 한 번 말한 것을 기억하고 그래 지금 사업가로 나섰는데 ‘돈을 대겠습니다. 뭐 어데든지 말만 하이소.’ 이래서 내가 ‘돈 필요 없다. 돈 아직 쓸 일이 없다. 뒤에 대라 하거든 대라.’ 그라고 ‘저게 ○○○교회 거기에는 지금 내가 돈을 천만 원을 빌려 주고 또 오백만 원이 이제 또 빚지고 이랬으니까 천 오백만 원이 빚이 져 가지고 있으니까 우선 그것만 갚아라.’ ‘녜, 갚겠습니다.' 갚겠다 했는데, ‘네가 그러면 하면은 얼마나 할 수 있느냐?’ `녜, 지금 제가 목사님 명령하시면 뭐 좀 다소라도 할 수 있습니다. ‘몇억도 할 수 있느냐?’ `녜, 몇억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직 기다려라 아직 돈 쓸 일 없다.' 내가 이라고 보냈습니다. 그랬지, 또 인제 둘째 사위는 목사가 됐지, 또 셋째 사위도 목사가 됐지, 또 아들도 둘뿐인데 또 아들 하나는 지금 조사니까 목사가 되겠지 이렇게 모두 그 후손이 그래 되고 있습니다.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딱 한 마디 듣고 가 가지고서 그 사람이 빛의 생활을 해서 그 지방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고, 또 이런 사람은 한 여남은 시간 말씀 듣고 가 가지고서 그렇게 충만해서 그렇게 역사를 했는데, 평생 동안 예수 믿어도 참 하나님의 적인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거 지난 밤에 거튼거튼 이렇게 말했지만 요거 가서 집에 가서 자세히 훑어서 여러분들이 보고 많은 깨닫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대대 손손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또 그들이 구약 성경을 보고서 성경에 뭐 걸릴 것이 없이 그렇게 지켰고, 그 사람들은 주일을 어떻게 지켰느냐 하면은 주일날은 닭 모이를 주지 않습니다. 닭 모이를 주면은 혹 모이 이래 뿌려 줬다가서 그게 혹 닭이 다 주워 먹지 못하고 흙에 파묻혀 있으면 그 움이 트면은 그 날 종자 뿌린 날이 된다 이래 가지고서 그걸 안 했습니다. 또 안식일날은 밥을 해 먹지 안하고서 불 때면 일 된다고서 안 해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도를 엄격하게 지켰고, 또, 주일을 범하는 사람이면 죽여 버렸습니다. 주일을 누구든지 주일날 일하는 사람이면 그만 죽여 버렸다 말이오. 그렇게 엄격하게 지키고 이랬지마는서도 예수님이 삼십 팔 년 된 앉은뱅이를 낫우니까 주일날 지금 자리 들고 가는 것을 보고서 주일날 자리 들고 가는 이런 일 하게 한다고 해 가지고서 예수님을 대적해 그때부터 죽일라고 지금 도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지, 사울로 말하면 얼마나 열심이 있었습니까? 사울로 말하면 열심이 있었습니다. 율법으로서는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칭찬했고, 그렇게 열심히 믿고 잘 믿는 사람인데 왜 스데반을 죽였습니까? 스데반은 성령에 충만함으로, 성령에 충만함을 가지고서 예수 믿는 사람이고 아주 덕이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데반과 대립이 됐습니다. 이 바리새 교인 제사장 서기관들은 잘 믿는 사람들인데 그분들은 예수님과 대립이 됐습니다. 예수님과 대립이 돼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또 이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죽일라고서 집집마다 들어가 가지고서 남녀를 다 끌어내 왔습니다. 그러면 요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요거 우리가 예사로 지나갈 게 아니라.
그들이 성경대로 열심히 믿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했던지 그들은 그때는 뭐 출판소가 없어 가지고서 전부 성경을 썼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는데 성경을 기록하는 그 직책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서 서기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써 나가다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든지 하나님의 성호가 나올 때는 그들이 그 붓을, 쓰던 붓 가지고 쓰지 안하고 다시 새 붓으로 쓰든지, 자꾸 새 붓으로 쓸라 하니까 많이 나오니까 새 붓을 댈 수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쓸 때에는 반드시 붓을 먹이 하나도 없도록 깨끗이 씻어 가지고서, 그 전에 먹이 하나도 없이 깨끗이 씻어 가지고서 하나님을 이렇게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서 기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분들이 얼마나 경외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여러분들이 읽어 보면 알 것입니다.
이렇게 경외한 사람들인데 왜 그들이 대대로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대대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메시야와 적이 됐느냐? 왜 메시야와 적이 돼 가지고 죽였느냐? 또 사울도 그렇게 열심히 믿는 사람인데 왜 성령의 충만한 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그때에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 뭐 집사들 다 죽일라 하니까 집사님들은 다 도망을 다 쳐 버렸고, 사도들은 죽일라고 하는데 사도들은 그들은, 집사 이 사람들은 도망을 쳤지만 사도들은 도망하지 안했습니다. 사도들 외에는 아무도 있지 안하고 다 도망 갔습니다.
사도들 외에는 다 도망 갔는데 그 사도들 외에도 남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까? 경건한 사람들은 남아 있었어. 경건한 사람들이란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성경 말씀 지키는 사람들은 남아 있었다 말이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니까 하나님 좋도록 할라 하니까 아무리 그렇게 박해가 심해서 잡아 죽일라고 하지마는서도 죽일라는 그 죽임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도를 두고서 딴데로 도망치는 것이 가하지 안 하기 때문에 사도들은 안 갔고 사도들이 안 가니까 이 경건한 사람들도 가지 안하고 스데반을 장사지냈다 말이오. 요게서 우리가깊이 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사울이 그렇게까지 박해를 했으니 뭐와 뭐와 대적하는가? 육체의 이스라엘이 밤낮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메시야를 기다리기를 그들이 메시야가 오면은 이제 자기들이 하나님을 바로 만날 것을 알고 밤낮으로 고대했습니다. 그분이 오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해 가지고서 다 로마에 식민노릇 하는 것을 다 면할 수 있다고 해 가지고 뭐 영육의 소망을 메시야에게 소망 뒀습니다. 메시야에게 소망을 뒀는데 메시야가 오니까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으니 이 신앙이 무슨 신앙이냐? 우리가 두려워 떨면서 요게서 상고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이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사두개 교인은 하늘나라 소망 가지지 안했지마는서도 바리새 교인들은 하늘나라에 소망만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에 소망만 가졌지, 메시야에 소망만 가졌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지, 그렇게 충성됐지, 계명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메시야를 왜 죽였느냐? 왜 메시야와 대립이 됐느냐? 예수님께서 삼십 팔 년된 환자를 주일날 병 고쳐 가지고서 이랬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립이 됐었다 말이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을 대립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뭐 때문에 죽였더냐? 성경대로 안 하기 때문에 이거는 분명히 이거는 귀신 들린 사람이라 해 가지고 예수님을 그렇게 오인하고 오식해 가지고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한다고 해 가지고서 죽였어.
이러니까, 성경대로 그렇게 살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서 열심히 자기를 조절하고 절제하고 이렇게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왜 메시야와 대립이 돼서 메시야를 죽였느냐? 요걸 우리가 깨달아야 된다 말이오! 요걸 깨달아! 또 그렇게 사울로 말하면은 참 열심 있는 사람으로서 뭐 하나님이라면 생명도 내 대고 생명을 아끼지 안하고 그렇게 열심히 믿는 사람인데 왜 성령의 충만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그때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을 다 죽일라고 달라들었느냐? 이랬는데, 사도들은 죽일라고 했지마는 죽일라고 감옥에 가둬 놓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놓고 가두니까 내놓고 또 잡아 가둘라 하니까 하나님의 권능이 와 가지고서 두렵게 하니까 가두지를 못하고 이래 가지고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은 나면서 눈먼 소경이 있었는데 그 소경이 눈을 떴는데, 눈을 뜬 날이 주일날이라. 주일날 눈을 떴는데 이제 그 눈 띄우게 했다고, 눈 띄우게 했다고서 그 소경을 잡아다 놓고서 심문을 하고 이렇게 했다 말이오.
이렇게 했는데, 왜 그들이 그렇게 자꾸 대립이 됐는가? 대립이 된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열심히 믿기는 믿지마는서도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대적하지를 안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나다나엘이 가니까 주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이는 참 이스라엘이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 그래 말하기를 ‘날 어찌 압니까?’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것을 내가 봤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때도, 성령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신성과 성령님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한 분입니까 두 분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라면은 예수님의 신성과 다릅니까 내나 예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의 영이고 하나입니까 다릅니까? 하나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다 알기는 잘 압니다. 하나입니다.
이랬는데,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믿으면서 성령의 사람과 적이 됐고, 성령의 사람과 적이 됐고 예수님과 적이 됐어. 성령과도 적이 됐고 예수님과도 적이 됐습니다. 적이 됐는데 또 열심히 믿기는 그렇게 열심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심을 기울여서 믿었습니다. 이랬는데 왜 그러냐?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성령 받지 못해서. 성령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지 못한 이유가 뭐이라고서 말했습니까, 지난밤에 말했는데? 악, 악이 속에 있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이 뭐인데? 악이 뭐입니까? 자기 중심이오. 독은 뭣입니까? 모든 사람을 내 중심으로 살아라 해 가지고 제 사람 만들라 하는 것이라 말이오. 요 죄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그 서기관들과 목사 장로들이 많이 범해. 교역자들이 많이 범합니다. 왜? 저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저도 제 중심으로 살면서 온 교인을 제 중심으로 살도록 제 중심의 사람을 만들려고 제 사람 만들려고 한다 그말이오.
그것은 독이요 자기가 중심하는 것은 악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게 있으니까 성령을 받지를 못하고, 또 이 빌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인데, 모두 다 6장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을 전했는데 왜 빌립이 전하는 데는 예수 믿는 사람들만 됐고, 기적만 나타났고 성령은 받지를 못했습니까? 그러면, 설교 말씀 들으면 성령 안 받습니까? 받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이 말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을 할 때에 그말입니다. 「이 말 할 때에」 43절부터 좀 알면 좋으려구만.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내나 다른 말 하지 안하고 예수님이 구주되는 것을 증거하니까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증거가 뭐이냐?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또 그들이 하나님 높임이 드러났다.
그러면, 이래 가지고 이것도 또 성경을 자꾸 꺼꾸로 깨달으니까, 성령 받은 것은 뭐이냐? 방언하는 것이 성령 받는 것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이오. 성령 받은 증거가 뭐이냐 하면은 방언을 말한다 하는 그 방언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배우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직접 배워서 아는 그것을 가졌더라. 방언이라는 것은, 방언은 내가 이 말을 할 때에 이 말하는 것을 그때 방언은 그거라. 내가 말하는 그것을 한국말로 하는데 외국인들이 와 가지고서 한국 말로 하는 소리를 외국인 말로 들은 그것이 첫째 방언입니다. 알겠습니까? 사도행전 2장으로 3장에 있는 그 방언은 그때 그 사람들은 외국 나라 말을 모르는데 자기 나라 말로 설교를 하는데 그때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아 들었는데 각국 사람들 다 저거 나라 말로 다 하기 때문에 다 알아 들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방언 역사라 말이오.
그러면, 오늘도 성령의 방언의 역사는 어떤 게 성령의 방언 역사냐 하면은 말을 같이 설교를 하는데,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하는 그 설교가 꼭 같은 설교를 녹음을 해도 다름이 없이 그렇게 같은 설교하는데 그 설교하는 것을 듣는 사람에게 대한 그 결과가 그 영향이, 그 결과가 다르다. 그러면 설교하는데예를 들면은 그 사람이 한 십분지 일쯤 듣는 사람이 들었다, 십분의 팔을 들었다, 십분의 십을 들었다. 그것이 증거하는 사람의 방언의 능력, 증거하는 사람을 통해서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조금 간 사람은 조금 들었고 많이 간 사람은 많이 들었고, 충만한 사람은 더 많이 듣고 그것이 방언 역사라 말이오.
이랬는데, 보니까, 방언 역사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대대대대대대 요새 거짓부리 방언 그게 아니고. 방언 역사가 있는 것은, 베드로가 말하니까 그것을 다 듣고 베드로가 말한 것을 한 마디 말하면 열 마디나 듣고 거게 대해 쫙 하나님의 도리를 들어 깨닫는 그 능력의 역사가 있더라. 그것이 방언 역사입니다.
이러니까, 오늘에는 방언 역사가 뭐이냐? 성령이 임하면 방언 역사가 나타나는데, 성령이 임하면 방언 역사가 나타나니 방언 역사는 뭐인가? 그 설교하는 그 설교를 들어 깨달음이 충만해지고 또 거게 대해서 깨달음이 있으니까 그대로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그 간절한 마음이 뜨거워지고, 깨달아 지고 간절한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래서 주님의 도리를 들어 깨닫는 것과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하늘에 소망을 두는 그 능력 있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성령의 나타난 증거요 방언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또 말하기를 하나님을 높인다. 이라고 보니까 거기 성령 받은 사람들은 다 뭐이냐 하면은 그만 하나님을 제일 높은 이로서 참 하나님 중심이 됐다 말이오. 하나님 높임을 보고서 그들이 당장에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확 바꿔졌다 말이오. 이제 죽어도 살아도 그분 중심으로 살아야 되고 그분 위해 살아야 된다는 하나님 높임이 드러났다 그말이오.
베드로는 이렇게 설교를 하는데 뭐 거기 무슨 안수하고 막 손으로 내 흔들어 가지고서 막 이래 떠들지 안해도 이적도 나타났지 또 그렇게 성령을 받았습니다.
여게 보니까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그라니까 「성령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물로 세례를 줬습니다. 거게는 보니까 뭐 이적은 나타났다는 것을 기록하지 안하고서 성령 나타났다는 것만 기록해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8장에는 보면은 빌립이 사마리아에 설교할 때에 전부 사람들이 듣고 기뻐했고, 또 이적과 기사들이 많이 나타났고, 귀신들이 쫓겨 달아났고 다 그런 일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빌립은 이렇게 설교할 때에 이렇게 큰 부흥이 일어났다 말이오. 병이 낫지, 또 모든 사람들이 예수 믿는, 열심히 예수 믿을라고 하고 또 열심을 냈지, 또 설교하는 사람을 좇았지 이랬는데 성령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랬어.
거게 15절에 보니까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모두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베드로가 보니 성령 안 받았다 말이오. 성령 안 받아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절에,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요거 여러분들이 자꾸 예사로 여길 게 아니라 그들이 빌립의 설교를 듣고 깨닫기도 했고 열심히 믿기도 했고 그때에 이적도 나타났고 귀신들도 떠나고 병도 낫고 이랬지마는서도 성령 받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말이오. 성령의 은혜는 하나도, 한 사람도, 여게 한 사람이라고 왜 성경에 이래, 다 기록할라 하면 온 세상에 둬도 둘 수 없는 이 내용이 많은데 요게 한 사람이라는 요 하나라 하는 요걸 기록했느냐? 요거는 천지보다 중량이 크다 하는 걸 알아야 된다 말이오. 왜 한 사람이라고 요렇게 기록했는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설교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는데 이렇게 성령은 받지 안했는가?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 철두철미하게 지키기는 지켰는데 성령의 사람들과 왜 대립이 됐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과 성령 대립과 열심 있는 것과 성령 대립과 열심도 성령과 대립이 되었고 하나님 말씀 들어서 깨닫는 것도 성령과 대립이 되었고, 기적과 모든 이적들이 나타난 것도 대립이 됐다 그들이 일차적으로 밤낮 고대하고 있는 메시야와 대립이 됐고 이차적으로는 성령의 충만한 스데반과 대립이 돼 가지고서 이와같이 됐다. 이게 왜 그럴까? 설교는 왜 그리 됐으며 이리 됐을까? 고다음에 해석 있기를 그렇게 해석이 있습니다.
23절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 이 악독이라는 이것을 오늘까지 악독의 정의가 바로 안 나와 있다 말이오. 악독을 공자 유교적 악독을 말하고 세상적 악독을 말하고 불교적 악독을 말하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악독, 「악한 자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이 악이라는 것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게 악이지 다른 사람에게 무슨 뭐 좀 해를 끼치고 했다고서 악이 아니라 그말이오.
악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 그게 악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 해석이 전부 껍데기가 돼 버리고 말았다 그거요.
뭐 때문에 성령을 받지 못하고,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1절에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바르지 못하니까 의롭지 못하다는 말 아닙니까?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상관도 없고」 이렇츰 열심 있는 시몬인데 이 도에는 상관 없답니다. 상관없대요. 상관이 없다. 상관 없는 자에게 성령이 갑니까? 또 바르지 못한 자에게 성령이 갑니까?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없지.
성령이 오면은 뭣 죽입니까? 성령이 오면 무슨 일 합니까? 성령이 오면 무슨 일 하지요? 성령이 오면은 일차적으로 무슨 일을 합니까? 악을 죽이는 일 합니다.
성령이 오면 자기 중심을 죽이는 일 합니다. 자기 중심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인데 자기 중심이 들어서 설교하고 자기 중심이 들어서 목회하고 자기 중심이 들어서 야단을 지기는데 어떻게 성령이 가겠습니까? 이러니까, ‘분깃도 없도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네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마음에 품은 것은 뭐입니까? ‘마음에 품은 것을 용서해 주시리라’ 마음에 품은 것은 뭐이지요?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 그말이오.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중심으로 목회하는 자에게, 자기 중심으로 설교하는 자에게 이적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 빌립이 설교하는 데는 이적도, 기적도, 귀신도 나가고 다 이렇게 했는데 성령은 한 사람도 받지 못했느냐? 요것을 구별하라 그말이오.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하니까, 성령은 가지 안했으니 그 사람은 성령으로 하지 안했으니까 그 설교하고 목회하는데 자기 구원이 됐겠소 안 됐겠소? 자기 구원이 됐겠소 안 됐겠소? 똑똑히 말해. 자기 구원이 됐겠소 안 됐겠소, 양성원 학생들? 자기 구원은 안 되고 자기 왕만 됐어. 자기 자꾸 왕만 돼.
이러기 때문에, 교회에 목회로 보내 가지고서, 이거 죽자껏 가르쳐 가지고 이렇게 보내 가지고, 교회 가서 왜 이동을 해요? 이동할 필요가 있어. 이동할라 하면은 그 뒤에 따른 여건들이 얼마나 고통이 되는 줄 압니까? 여건들이 이래 되니까, 공부하는 이거 다 전부 전학도 못 하는데 이것도 못 할 일이지, 또 이제 더 약한 교회로 가면 학비도 없으니 이것도 고통이지, 이거 뭐 잔인해 그런 게 아니라 기가 찰 일이라. 이거 이라면 또 그 다음에 시비로 올라와. 얼마나 시비를 걸어 가지고 나 왜 이런 데로 보내 주느냐고 이래 가지고서 고만 내가 크게 병 날 때는 그만 목사들 이동 시키고 나면 병을 합니다.
내가 가만히 역사를 훑어 보면 이동시키고 나면 다 병했어.
왜? 이동시키면 그게 가 놓으니까 그 교회와 맞지 안하니 교인들 마다 하지 또 저도 또 마다 하지 이러니까 이놈을 조화를 다 시킬라 하면 죽을 지경이라.
이렇게 해서 가 가지고서 이제 한 일 년이고 이태고 되면은 ‘이거는 여게다 둘 수 있는가 보다. 이게 이만하면 여기 좀 오래 둬야 되겠다.’ 하면! 나중에 가서 그 교인들이 막 들이 해 가지고 지금도 뭐 교인들이 와 가지고서 나를 총공회장이라고 총공회장 이름으로 온 편지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
이라면서, 설교하는 거는 그거라요. 기름 부음 받은 목사 대적하면은 화받고 저주받는다 이 말로 그래 저주받는 게 아니라 제가 악으로 목회하는 자,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목회하는 자를 이와같이 대적하면은 하나님이 저주하겠소 축복하겠소? 저주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들어 봐.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서 목회하는 자를 교인이 대적하고 하면은 축복하겠다고서 여기는 사람 손들어 봐.
나도 축복하겠습니다. 왜 여러분들 손 안 들어? 축복을 해, 축복. ‘내가 온 것은 죄와 마귀와 사망을 멸하기 위해서 왔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따라오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나를 좇으라 말은 믿으라 말이오. 좇으라 말은 믿으라 말입니다. 좇으라 말은 믿으라 말이오. 믿는 것은 그분을 따라가는 게 믿는 거 아닙니까? 좇는 것이오. 내나 그게 같은 말입니다. 인제, 자꾸 같은 말인데 믿음이라고 말하고 좇으라 말을 쓰지 안하고 이거 해석을 하자면 좇으라 말 하고서 믿음이라 말 쓸라 하는 것은 같은 뜻이면은 새 말을 해 가지고서 사람들을 복잡하게 하지 안 할라고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뭐 이상한 말 한다고. 그러면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이 말은 안 해 가지고 됩니까? 오늘까지 몰라서 안 하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말하지 안하면 구원 도리를 바로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옛사람은 옛사람이지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게 옛사람이라 하는 이것을 말해 주지 안하면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말해. 안 하면 안 될 말이면 어짤 수 없어 하지마는서도 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뭣 때문에 새 말 만들어 낼 건가? 그 전 뜻만 못 하면서 왜 새 말 만들어 낼 건가? 이래서, 우리가 찬송을 지금 따라가지 안하고 지금 이걸 만들라고 지금 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하는 사람이 없어. 다 말뿐이지. ○ 목사님이 큰 역사를 하고 왔어. 이렇지, 다른 사람도 이걸 좀 해야 되겠는데 안 한다 그말이오.
찬송가를 전부 뒤비트려 놨습니다. 가사를 다 고쳐 놨어. 고쳤는데 그전만 못 해.
그전만 뜻이 못 하면서도 저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꾸 이래 뭘 고쳐야 되지 뭐 새 거로 고쳐야 되지. 무슨 출판 문제도 있지마는서도 그것은 다 위에서 그 사람들이 다 얼마든지 이 출판해 가지고 자꾸 이거 좀 좋은 것으로 그대로 하라고 허락을 하지 안 하는 게 아니라 말이오. 전부 저 나타내기 위해서.
이 새찬송에 미운 거, 새찬송. 그때 다시 그걸 번역하는 사람들이 세 위원이 났는데 세 위원 가운데에 한 사람은 ○○○이고 또 한 사람은 그때 누고, 또 한 사람은 청년 그 사람은 우리 교회 있던 사람인데 고 사람이 번역한 것은 전부 딴말로 뒤비트려 놨는데 저 나타나기 위해서 했다 말이오. 그러면 그 번역한 것이 뭘로 한 사람이지요? 뭘로 한 사람이지요? 악으로 한 사람이라 그말이오. 악으로 한 사람. 이러기 때문에 거기 안 따라갈라고 지금 이것을 가리고 있다 그거요.
알겠소? 뭐 때문인지.
이러니까, 왜 이렇게 알고 이적과 기사는 나타났지마는서도 성령은 동참하지 안했습니까?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불의가 있는 거게 동참할 수가 없어.
사람도 말이요, 사람도 좀 점잔하고 사람된 사람은 그 사람이 뭘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를 하는데 벌써 거짓말이 들었습니다. 참 말이 들었으면 이것은 참 말이다 찬성하지만 거짓말이 한 말이라도 들었으면은 ‘아이구 내가 여기에는 내가 도장을 찍지 못하겠다.’ 왜? ‘요 말은 거짓말인데 내가 여기에 도장을 찍을 수가 없다’ 거짓말이 섞인 데에는 도장을 찍어 주지 않습니다. 거짓부리가 들어 있으면 거게 참가를 안 하고서 나옵니다. 그 회의에서 거짓부리를 자꾸 이라면은 거기서 아니라고 말하다가 안 들으면 살며시 퇴장을 해 버리지 거짓부리 거게 앉아 가지고서 이거 거짓부리를 결의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총공회에서 통치하는 것은 뭐이냐? 종다수 가결이 아니요.
숫자 많은 데를 따라서 가결하지 안하고, 우리가 종다수 가결입니까 종다수 가결 아닙니까? 우리 가결은 뭐이요? 우리 가결은 종다수 가결이요 다수 가결이요 뭐이요? 뭐이야? 말해 봐. ○○○ 목사 말해 봐. 우리는 무슨 가결이지? 옳은 참 주저주저 할 게 뭐이야? 진리 가결이라 하면 되지 성경대로의 가결이지. 혼자 말해도 성경대로면 그 사람이 승리지, 여러 만 명이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게 우리 총공회 정신이요 이 결의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 총공회 붙은 것을 부끄러워해서 여게서 총공회는 이거는 뭐이요? 이거는 백파 아니가? 아이구 백파라 하니까 이거 이 교회 안 되겠다, 이 백파는 싫다 하니까 ‘어라 교회 뜯어 가지고 옮겨 가자.’ 거기 가니까 또 백파라 하니 또 가고 또 가고 어데까지 쫓겨다닐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총공회, ‘총공회는 백 목사님 계통인데 서부교회를 모릅니까’ 자랑스럽게 말하니까 그 사람들이 그만, 헐라고 왔다가 와 보니까 너무 딴딴하니까 그만 꺾었다 말이오.
‘아이고, 그렇습니까? 예, 압니다. 예, 아주 대단히 은혜로운 교회인 줄 알고 또 존경을 합니다.’ 저 모르는 사람 별로 없어요. 내가 못 만나 나는 몰라도 자기네는 다 알고 있다 그말이오.
이런데, 이렇게 총공회를 수치스럽게 여기니까 이제 그 사람들이, 이 옆에 교회가 와 섰으니까 교회서는 교회 가운데에 총공회 교회가 서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 총공회의 교파의 계통이 서면은 복음이 좀 거석하기 때문에 되는데 이 목사들이 그래 놓으니까 가 가지고 이 말씀만 이래 들어다가, 어제 어떤 데는 왔는데, 그 교인들이 그래 말해. 그래도 노트를 설교록을 읽어 줄라면 더듬지나 안하고 읽어 주면 좋을 건데 떠듬떠듬하면서 못 읽어서 세 번 네 번을 거듭해서, 한 세 번만 읽고 나와도 그렇지 안했을 터인데 이렇게 떠듬떠듬 이라니까 그 애가 터지고 이러니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런 목사는 쫓아내야 돼. 이래도 이것을 쫓아낼 수가 없고 이라니까 자꾸 할 수 없어 인제 그런 교회로 자꾸 낮은 교회로 자꾸 이래 보낼 수밖에 없다 그거요.
이 목사들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이 총공회의 이 진영을 가지고, 이 복음을 가지고 왜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느냐? 전부 게을하기가 짝이 없어. 전부 딱 들어가 가지고 이제 보니까 교인들이 제말 잘 듣고 이래 뭐 순종하고 이라니까, 한 석 달이면 순종 다 해. 순종하고 이라니까 그만 이게 왕이 되어 가지고서 이제 자기 교회를 자기 구멍 가게를 만듭니다. 자기 상점을 만들어요. 자기 이용물로 만들고 자기 구멍 가게를 만들고 자기 보금자리를 만들어 버려. 이래 가지고서 뭐 하나 둘이 월권이 아니라 막 월권으로 월권으로 막 하고 있다 말이오.
요번에는 재판국을 열어 가지고서 그런 걸 다 조사해서 낱낱이 심사해, 판단해 재판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모시고 있기 때문에 뭐 하나님이 같이 하시니까 안 되면 하나님이 때릴 거라 말이오. 참고 참고 모세가 참고 있었지마는서도 나중에 고라와 둘이 있을 때 모세가 이 고라 당파 저주하십시요 그랬습니까? 모세가 그래 기도하지 안했어. 하나님이여 내가 잘못됐으면 나를 때리고 이가 잘못됐으면 이를 때리고 하나님이여 판단하십시요 이라니까 하나님께서 고라 당파를 산 매장으로 그만 시켜 버렸다 그말이오.
백파라고 욕할라고 왔는데 그만 이래 버리니까 욕도 못 하고 달아나 버리고 달아나 버리고, 백파라고 욕을 하고 이라니까, 욕을 하니까 좋다 그거야. 이 서부교회가 갑자기 이래 커진 거는 뭐 때문에 커진 줄 아닙니까? 자꾸 자꾸 자꾸 전도를 해서 싸워 그런 줄 아요? 다른 사람이 그거 이단이다, 이단이다, 자꾸 이단이라 하니까 ‘이단이라 해? 그거 말 들으니까 그거 괜찮다 하는데 이단이라 해? 뭐 이단인고 한번 가 들어 보자.’ 한번 들어 보러 온 사람들은 됐다 말이오.
또 그라고 난 다음에 이단이라고 그곳에 거기 가지 마라 가면 안 된다 이랬는데 그 교인이 숨어서 살며시 와 가지고 뒤에 숨어 가지고 이래 보니까 목사가 저쪽에 와 가지고 있거든. 교인들은 못 가게 이단이라고 못 가게 하고 저는 온다 그말이오. 그래 가지고 그 교회가 몽땅 다 돌아온 그런 교회가 몇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복장 가지고, 어쨌든지 이 교인이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잘 이루어야지, 주님의 이 피의 공로가 허사가 되지 안하고 구원을 잘 이루어야 될 터인데 구원이야 이루어지든지 말든지 이 교인이 내 교인만 되면 되겠다. 이러니까, 자기 중심이요 자기 중심 아니요? 그러면 목회자가, 절도요 강도는 예수님의 양을 도적질할라는 것이니까 그것이 뭐이겠습니까? 그게 뭐요? 절도요 강도는 무슨 말이요? 무슨 목자라 말이요? 절도요 강도라는 건 무슨 목자라 말이요? ○ 조사, 삯군 목자는 뭐이라 말인데? 거짓 목자는 뭐인데? 그래, 그게 나와야 돼!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 그러니까 양떼를 제 양떼를 만드니까 도둑이요 강도지. 뉘 도적이라? 주님의 양을 제 양을 만들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도적이요 강도지.
이렇게 아무리 청산 유수의 설교를 한다고 해도 성령을 그들에게 전해 주지 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기에, 지난밤에 말 했는데, 빌립은 성령 충만히 받은 사람입니다. 받은 사람인데 설교할 때에 그때 왜 그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느냐? 빌립에게 흠점이 있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흠점이 있었어. 흠점이 있었어. 흠점이 있었고, 베드로는 설교할 때 흠점이 없었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말이오. 무슨 흠점이 있는가? 빌립이 설교할 때 이적도 나타났지 귀신도 나갔지 모든 사람들이 듣고 좋아서 기뻐서 자꾸 따르고 아이구 빌립을 줄줄 따라 다니지 이랬는데 왜 그에게는 성령 받은 것은 한 사람도 성령 받은 사람은 없었다. 한 사람 이라고 말했다 말이오.
왜 그럴까? 고 죄악을 찾아야 됩니다. 고 죄악을. 고 죄악이 뭐이겠습니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또 내 제자가 될려면, 예수님의 제자가 돼야 성령을 전하지. 내 제자가 될려면은 어찌 해야 예수님의 제자된다고 했습니까? 누가복음 14장에 뭐라고 말했어? 있는 것을 다 버리기 전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말이오. 다 버리면 뭐 버려야 되겠소? 뭐 소유도 내것 소유 아니고 생명도 내 생명 아니고 나도 나 아니다. 이것 주님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것이 하나도 없이 완전히 주님의 것이 된 요것이라야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설교를 하는데 그거 암만 그래도 듣는 사람들이야 그 복음 듣고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지마는서도 성령은 나타나지를 안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은 대부흥사노릇을 하지마는서도 그 사람은 예수님의 지체입니까 예수님의 몸입니까 예수님의 쓰는 연장입니까? 뭐이겠소? ○○○ 조사님 지금 한번 대답해 봐. 연장, 연장. 자기 지체는, 일하지마는서도 자기 손으로 이래 해서 이거 흔드는 자기 지체와 달라요. 주님의 지체가 된 것은 주님 가는데 언제든지 따라갑니다. 지체는 따라갈 것 아닙니까? 주님과 언제든지 동거 동행 하지마는서도 연장은 농사 짓는 데는 쟁기가 제일 큰일 합니다. 쟁기.
요새는 경운기 그게 제일 큰일 해요. 이렇지마는서도 경운기로서는 농사 짓는데 일을 잘 많이 하지마는서도 농부의 지체가 아니기 때문에 농사 다 짓고 난 다음에는 경운기는 저 창고에 비가 맞거나 참고에 들여 넣어 놓고 그 자기 손은 다 같이 농사 짓지마는 이 손은 자기가 데리고 가지고 방 안에 가서 요 위에 같이 눕고 이제 같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의 지체가 되느냐 예수님의 도구로 일하느냐 이것을 깨달아야 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제가 집사로 부흥사가 돼 가지고서 다닐 때에 그때에 가면은 모두 말하기를, 그때 그래 기도를 해요. 배운 것이 다 그래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을 주님의 기계로 쓰셔 가지고서 어짜든지 은혜를 주십시요 이렇게 기도하는데 내가 한번도 내가 아멘 소리 한 일 없습니다. 내가 믿은 지 한 이 년 지난 후에 그때 집사로 부흥사로 사경회 돌아다녔고 이랬는데 한 번도 아멘 소리 안 했어.
그 속으로 말하기를 ‘주님이여 나를 기계로 쓰시지 마시고 도구로 쓰시지 마시고 주님의 지체로 쓰시옵소서. 주님의 지체를 삼아 주옵소서.’ 그라고 기도하고 내 혼자 기도하고서 아멘 이랬지 주님의 도구노릇 연장노릇을 안 할라고 그때부터 거게 대해서 구별해서 그래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도 아멘 한 일은 없습니다. 내가 언제든지 고 기도를 내가 내 속으로 새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내가 아멘 하지.
어떤 때는 그뭐 자꾸 도구로 써달라 하는 소리를 많이 해. 그라면 그때, 막 속으로 강단에서 막 그래 쌓압니다. ‘주여 도구로 쓰지 마시옵소서. 도구로 쓰지 마시옵소서 나는 도구되기 싫으니까 도구로 쓰지 마시옵소서. 불쌍히 여겨서 주님의 십자가의 보배 피가 있으니까 나는 더럽고 죄인이지마는서도 피공로로 인해서 주님의 지체가 되지지 않습니까? 피공로로 지체 삼으시옵소서.’ 자꾸 이것을 속으로 기도를 뭐 분개해서 기도합니다. 만일 도구될까 싶어서.
이러니까 여러분들, 예수 믿는 데에는 자기 중심 이라는 자기 위주라는 이놈이 제일 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적이라는 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는 뭐입니까? 십자가 지는 것은 주님 믿기 위해서 고생되는 게 십자가입니까? 아니요, 잘못 알았소.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 준비는, 십자가 준비는 자기 부인이 십자가 준비요, 십자가는 위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생당하는 것이 그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하되 당신 준비고 마지막에 십자가 진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지고 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졌지 당신 위해서, 당신 준비되지 안해서, 당신은 완전히, 깨끗하지 안하면 십자가 대속이 안 돼. 깨끗지 안 하면 대속의 제물이 안 됩니다. 깨끗해야 대속의 제물이 되지.
이러니까, 십자가 지고 가라 말은 자기가 깨끗해야 지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지라 말은 그 십자가 지면 뭐부터 하고 십자가를 져야 됩니까? 십자가 지라 말은 자기를 깨끗이, 십자가라는 그말이오. 십자가라고 하는 건 자기를 깨끗케 하고, 다른 사람이 대속물이 될 수 있도록 자기를 깨끗게 하고 깨끗게 한 것 가지고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지 더러운 것이 희생해 봤자 그거는 안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 말씀을 똑똑히 새기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부인하라 말은 자기 중심을 버리라 말이요, 십자가라 말은 자기 중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 위해서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대속하는 그 일을 계속해 하라 이말입니다. 그러기에 있는 걸 다 버리지 안하고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말은 자기 중심 버리지 안하면은 주님의 제자 되지 못한다. 주님 제자가 아니면 누구 제자입니까? 주님의 제자 아니면 누구 제자요? 주님 제자 아니면 마귀 제자라. 마귀 제자.
이러니까, 요것을 구별해서, 오늘 아침에는 제일 결론이 뭐이냐 하면은 성령과 악은 싸운다. 성령과 악은 싸운다. 성령은 악의 적이다. 악은 성령의 적이다. 왜 사울이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왜 스데반을 대적했을까? 사울은 암만 잘 믿어도 악으로 잘 믿었다. 악으로 잘 믿었다. 자기 중심으로 잘 믿었다.
이러니까 바리새 교인은 전부 자기 중심이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주인을 바꾸지 안했습니다. 주인을 바꾸지 안하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인 그거 가지고 믿기 때문에, 이종교는 뭘로 믿습니까? 이종교는 뭘로써 이제 그 종교를 믿습니까? 불교는 뭘로 믿습니까? 악으로 믿습니다. 악으로. 자기 중심 자기가 믿습니다. 그래, 자기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자는 자기가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고 당신이 와 가지고 나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순전히 객관의 역사요. 자기 부인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참 생명의 좋은 날이나 승리의 날은 보지 못할 줄을 아십시오.
악을 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그 목회도 성공하지 못하고 악을 버리기 전에는 아무리 목회해도 자기는 마지막에 진가가 구별될 때에는 다 꺾어지고 맙니다.
연단을 받을 때에는 다 불에 타 버리고 맙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 뭐입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 뭐입니까?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뭐입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그것이 자기 중심 위주로 목회하는 것이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자기 중심이나 자기 위주나 돈 중심이나 돈 위주나 민족 중심이나 민족 위주나 국가 중심이나 국가 위주나 뭐 문화 중심이나 문화 위주나 모든 땅에 있는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그런 것들을 중심이지, 중심이 하나님 한 분이 아닌 그것이 다 그것이 모래 위요 반석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뭘로 가지고 승리했어? 예수님도 승리한 거 다른 거 없습니다.
그분이 자기 중심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는 그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를 비었다 말은 자기를 부인했다 말이요.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 중심으로 아버지가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하고, 이러기 때문에 살았다 그거요.
이걸 알아야 되지 어짜든지 왜 이 총공회가 왜 이렇게 이 교회들이 시들어지고 있느냐? 왜 부흥이 못 되고 있느냐? 네가 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할지라도 너는 도구로만 쓰여지지 설교할 때는 만날 제 인기 끌라고서 제 중심으로 하는 것 뿐이기 때문에 아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리석지 맙시다. 원수는 내입니다. 내가 원수입니다. 나 나 하면은 결국 자살 행위입니다, 그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