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00:11
성령 세례
1986. 6. 18. 수새벽
본문:사도행전 1장 4절∼8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징조 중에 하나는 죄악이 점점 관영해지는 것입니다.
노아 때는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찼었지마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 때는 죄악이 하늘까지 관영한다 했습니다. 하늘까지 관영하는 것은 곧 교회까지도 완전히 죄악화된다 하는 말입니다.
세상이 점점 죄악화되는 것은 악령화된다는 말이요, 또 인간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화된다는 말이요, 사람들이 이 두 가지로 인해서 삐뚤어진 행위를 한 그 행위의 구습이 세력을 얻어 가지고 점점 구습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런 죄악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 죄악은 뭐 종류가 많습니다.
일계명으로부터 십계명에까지에 범하는 죄악이라 그렇게 보면 간추려서 다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일계명, 이계명, 삼계명, 사계명, 오계명, 육계명, 칠계명, 팔계명, 구계명, 십계명 요 십계명은 인간의 죄악을 간추려서 고렇게 죄악의 강령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고보다도 더 간추려 놓은 것은 옛사람을 죽이라 하는 것이 더 간추려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자기 개인과 또 자기 가족과 자기 믿음의 가족, 자기 구역 식구, 또 자기 교회, 또 자기 진영, 또 한국 교회, 또 세계 교회를 위해서 기도의 순서를 그렇게 해서 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기도도 하고 아주 조심도 해야 되지 조심 안 하면 그만 세상에 빠져 가지고 다 바른 정신을 잃게 되기 때문에 사는 줄 아나 그게 점점 죽는 일만 자꾸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재독 들을 때에 지난 대구 집회 때에 마지막 금요일날 아침 재독을 하는데 거게 들어 보니까 하나님의 제일 큰 축복이 무엇이며 제일 큰 저주가 뭐이냐 하는 것을 거게서 물을 때에 가르쳐 놓고 물었을 터인데 대답하는 사람들이 별로이 없는데 거게 답을 하는 걸 보니까 바로 알고 바로 행하는 것이 제일 큰 축복이라 또 잘못 알고 잘못 행하는 것이 제일 큰 저주라 하는 그런 말을 녹음에서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큰 말씀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복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알기는 쉽지마는서도 정말 그것이 그와같은 큰 축복과 저주라는, 그 외에는 없어. 그것만이 축복이요 그것만이 저주입니다.
그러나, 그걸 실지로 그 실상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이 된 것만치 느껴지지 자기라는 사람이 바로 되어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하나도 못 느낍니다.
사람이 된 것만치 느낍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이 제일 강하게 느꼈을 것이고 또 모든 선지 사도들이 강하게 느끼고 성자와 성녀들이 다 믿음의 사람들이 강하게 느끼지 세상은 그런 말은 제가 돈 말하는 것보다도 그렇게 아주 가치 없고 경하게 생각하지 그렇게 중하게 여기지를 못합니다.
어짜든지, 우리가 하루 삼십 분 기도한다는 이 기도에 대해서 쉬지 않고 계속 해야 됩니다.
이 세상을 보면 대단히 선을 많이 말합니다. 또 사랑을 말하고 자비를 말하고 동정을 말하고 봉사를 말하나 그것이 전부 악령 악성 악습의 세력이 인간을 붙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악령 덩어리요 악성 덩어리요 악습 덩어리입니다. 산 것은 하나도 섞여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완전히 다 착각되어 있는데 불택자들은 의례히 그렇지마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 하고 있으니까 택자들도 그만 다수를 따라서 그것이 옳지 해 가지고서 그렇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뭐 기독교의 총회라고 하는, 예를 들면 기독교 총회이면 기독교가 제일 머리가 모인 곳이 총회인데 머리 모인 총회도 그 회의 진행하고 모든 가결하기를 다수를 따라서 가결합니다. 숫자 많은 것을 따라서 가결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깨달은 숫자가 많을 수 없고 잘못 깨닫는 숫자가 많고 바로 깨달은 숫자는 본래 적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바로 깨달은 것은 다 짓밟아 버리고 잘못 깨달은 대로 따라간다 하는 그것이지마는 거게서 거기인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의 그 심령이 어두운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삼십 분 기도하라는 이것을 예사로 여기지마는서도 이 기도를 안 하면 우리가 큰 실패를 할 것입니다.
벌써 눈을 열어 보면 온 세상은, 요한계시 18장에 죄악이 하늘까지 관영했다고 말씀한 그대로 벌써 죄는 하늘까지 관영했습니다. 뭐 교회나 세상이나 봐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교회 하는 일 세상이 다 하고 세상이 하는 일 교회가 다 하고, 교회라는 이름 따로 있고 불교라는 이름 따로 있어서 이름만 다르지 그 내면에 들어가서 본질과 본성과 그 행동은 보면은 꼭 같습니다.
이래도 사람들은 차차차차 감염되고 또 면역성이 생겨져서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를 차차차차 잊어 버려지니까 처음에는 버렸을 때에 깜짝 놀랬지마는서도 차차차차 이래 버려지면, 버리고, 이것을 버리고 악령 악령 악습으로 사는 이 일이 차차차차 돼지니까 버린 데 대해서 아파하는 면역성이 생겨서 뭐 예수님의 공로나 진리나 이런 걸 버려도 고만 예사롭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여게, 어제 아침에도 말하고 지금 말하는데 이것을 그냥 듣고 버릴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꼭 실제로 해 봐서 실상에서 여기서 배운 것을 깨달아야 되지,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은 그것은 실상을 잡기 위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지 말로만 듣고 안다는 그거는 껍데기요 아무 구원에 소용은 없습니다. 실제 아무 소용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그대로 해 보면 경험의 지식을 가지게 되고 체험의 지식을 가지게 될 때에 그것이 필요하지 그게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기억하기 쉬우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거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는 이것은 고난을 피하지 말고 고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네가 수입해라. 그것을 취득해라. 고난 속에서 네게 수입되는 게 있으니 고난 속에서 수입되는 그 수입이 네 수입이니까 고난 속에서 되는 그 수입을 네가 가지라.
그런데, 가질 때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는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약속을 어기지 안하시는 하나님이시요 이러기 때문에 아버지가 약속 했으니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는 가감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버지가 약속하셨다는 하는 이 약속의 소망을 확고히 가져야 됩니다. 이걸 안 가지면 참고 견디지를 못 합니다. 그라면 성령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약속하신 성령 세례의 이 소망을 잡고라야 이 예루살렘의 어려움을 견디지 그렇지 안하면 그 어려움을 도피해서 어려움 없는 곳으로 피해서 어려움을 벗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 어려움을 벗어 버리면 아버지의 그 약속하신 그 소망을 벗어 버리는 것이요 곧 성령 세례를 벗어 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히브리서 12장에 보면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예수님도 그 앞에 있는 그 소망을 인해서 현재 당한 어려움을 이겼지 그 소망이 아니면은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 똑똑히 말하기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신 예수를 바라보라 저는 그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이 소망 때문에, 미래에 있는 그 소망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도 참았고 견뎠고 또 부끄러움도 그것을 버리지 안하고 부끄러움을 견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땅 위에 어떤 그 소망보다도 우리의 소망은 성령 세례 받는 것이 우리의 제일 된 소망이 돼야 됩니다. 우리가 돈 소망, 세상 지식, 명예, 권세, 지위, 사업, 어떤 행락, 가정, 자기의 모든 취미, 자기의 욕심, 자기의 주장 그런 것이 힘이 강합니다. 그런 것이 큽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강하고 큰 이 성령 세례에 소망을 가지지 안한 사람은 다 떨어져 버리고 헛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 세례의 이 소망과 이 소욕이 땅 위에 있는 어떤 소망과 어떤 소욕보다도 커야 됩니다. 강해야 됩니다.
그런데, 뭣보다도 강해야 되는가? 자기 육의 생명이 살고자 하는 생의 애착욕, 살고자 하는 욕심 생의 애착욕, 또 몸이 건강하고 몸이 평안하고자 하는 몸의 안일욕, 또 자기의 모든 형편이 형통해지는 자기의 진로의 형통욕, 이제 그다음에는 모든 소유욕이 되겠습니다. 소유의 욕심이 되겠습니다. 이런 것보다 성령으로 세례받는 이 소욕이 강해야 됩니다.
만일 그 사람이 돈보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게 강하다 이래서 아주 그 사람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신앙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을 자기의 생의 애착욕만치 가지지는 못했으면은 그 사람은 ‘네가 네 육의 생명이 사느냐 이 성령 세례를 받느냐’ 이 두 가지가 당도해서 비중이 될 때에, 비교가 될 때에 그때에 그 사람은 이제까지 보수해 가지고 나오던 신앙 다 팔아서 성령 세례를 다 버리고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되겠고 또, 아는 것을 그냥 아는 것으로 둬 두지 안하고 또 새김질합니다. 새김질한다 말은 이 사실을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과연 이 성령 세례는 내 육의 생명보다 귀중한가? 성경에 그렇게 해 놨는가? 이 사실이 그런가 안 그런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자꾸 이렇게 상고해 가지고서 이 성령 세례가 무엇보다도 자기에게는 가치있는 귀중한 이 사실을 성경을 자꾸 상고함으로 거게서 깨달아지는 이 마음이 점점 견고해져야 되겠고, 또 이제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이 모든 자연 계시를 가지고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 하나님의 섭리 인간들의 이 모든 마음의 구조들 이런 것을 자꾸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아멘’ `아멘'이 돼야 됩니다. 과연 그렇다, 과연 모든 것보다 성령 세례가 가치가 크다. 이게 없으면 헛일이다. 육의 생명 그것은 이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이거 버리고 육의 생명 가질 가치는 아무것도 없다.
이거 버리면 육의 생명은 다 그는 절단나 버리고 말고 이것을 가지면은 육의 생명은 죽으나 다시 산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육의 생명은 죽으나 또 육의 생명이 살아난다 하는 그런 것을 자기가 자연 계시를 통해 가지고 자꾸 깨달아져야 되고, 또, 자기가 눈 감고 명상합니다. 눈 감고 자꾸 이래 생각을 합니다. 생각을 하면서 이 성령 세례를 자꾸 생각을 하고 성령 세례와 다른 것과 그 가치를 비교해 보고 중량을 비교해 보는 이 일을 자꾸 비교하고 자꾸 비판하고 자꾸 이렇게 해 봅니다. 자꾸 이렇게 해 보면 점점 강해집니다. 그렇게 되면은 그렇게 하는 자에게 성령의 감화가 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하는 것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리켜서 예언의 말씀이라 했습니다.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너희 안에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사모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 사실을 자꾸 생각하니까 자기 속에 성신의 감화가 온다 그말이오.
성신의 감화가 오면 깨닫는 것이 자기가 깨닫는 게 아니고 자기가 이제까지 자기로서 깨닫는 그 이상의 깨달음이 자기에게 확 옵니다. 자기 이상의 깨달음이 오지, 또 자기가 과거에 믿던 자기에게 없던 그 이상 자기를 탁월한 깨달음이 오지, 자기를 탁월한 믿음이 생겨지지, 또 자기 것이 아니라 말이오. 자기의 그 주관을 탁월한 소망이 견고하게 생겨지지, 또 그라고 나니까 고대로 실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담력이 자기에게 생겨집니다.
기도 가운데서 그 기도로 말미암아 자기가 깨달아지는 거, 소망해지는 거, 또 거게서 욕심이 생기는 소욕이 생겨지는 거, 그대로 실행하고 싶은 그 담력이 자기에게 생겨지는 거, 기도 가운데에 기도하기 전보다 기도하니까 차차차차 그것이 더 강해지는, 이제 말한 대로 이 종류의 것들이 점점 강해지는 그런 것을 느껴 본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런 느낌을 가져 본 사람들, 기도 가운데 그런 느낌을 가져 본 사람들 손을 한번 뻐뜩 들어 봐요. 녜. 아마 이거는 다 느꼈을 것입니다. 다 느꼈소.
다 느끼는데, 그 느낌이 자기에게 있는 이성, 감정, 또 모든 감각, 총명 이런 것들의 활동으로 이렇게 깨달아지는 한계가 있고 또 소망하는 한계가 있고 또 소욕되는 한계가 있고 믿어지는 한계가 있고 그대로 실행할 담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 주관이니 그것을 해서 하는 정도까지 해서 그게 바로 돼지면 그다음에는 자기 주관이 아닌, 자기 이성이 아닌, 자기 이성은 요만밖에는, 요만침밖에는 못 가더랬는데 자기 이성이 아닌 이 객관 역사로서 그 이상을, 이성 이상, 자기 감각 이상, 자기 총명 이상, 자기 지혜 이상, 자기에게 모든 배워 가지고 가진 이 상식 지식, 이 지식 이상의 깨달음과 소망과 믿어짐과 소욕과 그 실행의 담력이 생겨지는 그것이 그때부터 이제, 주관 역사를 다하니 주관 역사를 다하는 거게다가 객관 역사가 와 가지고서 주관 역사와 객관 역사가 연결됩니다.
연결되는 그것이 이제 그때부터 성령의 영감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만 톰박, 요 오른손 왼손이 요래 가지고 딱 들어붙는 요렇지 안하고 이것이 감화되어 가지고서 되는 것이고 감염되는 것이고 또 성화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딱 맺어지는 것이 딱 요래 왼손하고 오른손하고 딱 들어붙는 거 그렇지 안하고 서서히 이래 가지고 자꾸 되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명철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마음을 가지니까 자기 마음이 그러하다, 자기 마음이 점점 밝아져서 그리 된다.’ 순전히 주관 행위로 그렇게만 생각하는 사람들 있고, 좀 명철한 사람은 요것은 주관 행위가 아니고 요거는 분명히 객관 역사지 주관 역사가 아니라 하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차차차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는 것은 자기가 과거 현재에 속한 것이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은 과거 현재에 속한 것이고, 과거 현재라니?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가 입었기 때문에 과거 현재에 속한 역사요, 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는 그것은 현재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속한 것이오.
약속하신 계시에, 이 계약서에, 신구약 계약서에 아버지가 계약했기 때문에 이 계약을 믿는 고 현재에 속했고, 또 앞으로 그분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줄 것을 바라는 미래에 속했고, 현재와 미래에 속했고, 성령 세례인 이 소망은 현재와 미래에 속했습니까 과거에 속했습니까 어데 속했습니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 세례는 과거에 속했소 현재에 속했소 미래에 속했소? 아니야. 성령 세례는 미래에 속했어. 과거 현재에 속한 거 하나도 없어. 미래에 속했어. 앞으로 지금 될 거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그게 현재에 뭐 온 거 아니라 말이오. 안 왔어요. 알겠습니까? 그분들이 예루살렘 떠나지 말고 그때에 그 어려움 가운데서 견뎌 배긴 것을 여게 사도행전은 ‘몇 날이 못 되어’ 그렇게 기록했는데 `몇 날이 못 되어' 기록했는데 실상으로 그때에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박해 가운데서 견디면서 기도하고 기다렸던 것은 그 기간은 얼마 됐느냐? 열흘 동안입니다. 열흘 동안 견뎌 가지고서 성령 세례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요 과거 현재에 속한 부분도 알아아 되겠고, 현재와 미래까지 연결돼 가지고 있는 부분도 알아야 되겠고, 미래에만 속하여 있는 그것도 알아야 돼.
미래에만 속했으니까 이거는 참아 기다려야 됩니다. 다른 수가 없어. 참아 기다려야 돼.
벌써 시간이 다 됐는데 요거 여러분들이 자꾸 자꾸 생각해 가지고서 알면, 요것을 지금 요것만 여러분들에게 알려 주니까 자꾸 가서 생각해 보라 말이요.
예루살렘 고난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공로 때문에 대속 받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대속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요, 예수님의 대속 때문에 당하는 이 고난은 막바로 옛사람을 죽이는 치료 역사요 새사람이 소생되는 치료 역사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이는 되는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아편 중독된 사람을 아편 중독을 뽑아 버릴라 하니까 거게서 고통이 있지마는서도 안 뽑아 버리면 완전히 그 사람은 전신이 다 망해 버리고 맙니다.
이 중독을 뽑아 버릴라 하니까 고통이 됩니다.
조그마한 것도, 어떤 사람이 담배에 중독된 사람, 술에 중독된 사람, 또 자기가 춤추는데 중독된 사람, 또 여인이 자기가 잘못된 걸음인 그 음행에 중독된 사람, 음란에 중독된 사람, 또 자기는 자기 구원에 절단나는 모든 성악이나 기악에 중독된 사람 어찌 됐든지 자기 구원, 자기 구원에 손해가는 이거는 다 중독인데 그것을 뽑아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안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남편이 담배 끊고자 해도 담배를 못 끊으니까 담배 끊도록 하기 위해서 뭐 은단이니 다른 거 그런 거 자꾸 사다 줘 가면서 그 끊도록까지 요래 만들고 술중독을 면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대신해서 그걸 면해지도록 그래 가지고서 병을 고친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런 것도 그런데, 우리가 악령 악성 악습이 내가 돼 가지고 있는데, 완전히 내가 돼 가지고 있는데 나를 죽인다는 것이 이거 얼마나 돼? 실은 그게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놈을 죽여야 참 내가 사는데 그놈 죽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놈 죽이는 고생이 무슨 고생이냐? 예루살렘 고생이라, 그놈 죽이는 고생이.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내가 뺏기지 안하고 보수할라고 하는 고통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악령을 죽이는 것이요 악성을 죽이는 것이요 악습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저인 줄 알고, 자기인 줄 알고 있으니까 자기를 죽이는 일이니까 그렇게 쉽지를 않다 그말이오.
요것을 깨달아서 확고한 지식을 가져야 요거 어려움을 견디는 것인데, 요 확고한 지식을 가져야 어려움을 견디는 것인데 요 지식을 남의 말만 듣고 그렇다 하는 그 지식 가지고는 예루살렘 어려움을 절대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려움 오면은 사람들이 다 어려움의 것이 돼 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자꾸 와서 들어야 되는데, 이제 이것을 여러분들이 깨닫도록까지 내가, 지금, 건강하면 좀 계속 하겠는데 내가 어제는 오늘 아침에 못 나오리라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요게, 요거 매듭을 지워서 요걸 깨달아야 지금 성령 세례를 받겠고 어려움을 견디겠다 해 가지고 그렇게 제가 나왔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요것을 새김질해서 깨달아요. 그 새김질해 깨닫는데 깨닫는 방편이 첫째가 뭐이요? 첫째가 뭐이요? 성경을, 성경에서 자꾸, 성경을, ‘그런가 안 그런가?’ 그런가 안 그런가 상고하는 사람들이 신앙이 자라갑니다.
성경을 상고하고, 고다음에는 이 자연계를 보고서 또 상고해서 깨닫고, 그다음에는 눈 감고 생각해서 명상해 보면서 깨닫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 자기가 실제로 그런 어려움을 견뎌 보면서 깨달으면 그게 제일 잘 깨달아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몰라도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려운 환난을 겪은 사람은 벌써 다 깨달았습니다.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이 있기 때문에 남에게 배운 바 들은 바의 지식보다도 자기 경험 지식 체험 지식은 더 확고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꾸 이 말씀을 듣고 말씀과 나와 같이 있으면 내 속에, 여러분들의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이 자꾸 녹아집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읽는 데에도 외울 욕심으로, 또 몇 장 본다는 장수 욕심으로 이렇게 해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받아 가질라고 고것이 첫째로 중요하고, 고다음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내게 고칠 게 뭐인가? 삐뚤어진 게 고칠 게 뭐인가? 내가 행할 것이 뭐인가? 내가 잘못된 게 뭐인가? 요렇게, 보기 위해서, 성경 보다 보면은 나중에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은 골케골케할 뿐 아니라 자꾸 빛이 오니까 이놈이 숨어서 도망 쳤습니다. 그때는 뭐 아무, 악령 악성 악습의 이 역사가 없습니다. 없다가 어떤 기회가 딱 되면 요놈이 쏙 나와 가지고 저같이 나와 가지고서 요놈이 나와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놈을 죽인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저 지난밤에 그렇게, 비가 그렇게 왔지마는서도 양산동 기도산에서는 산에서 지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산에서 가 가지고서 그 비가 와도 내려오지 안하고 산에서 기도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다 재미를 봤을 것이고 이제 세상이 모르는 그런 아주 축복과 권능을 받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