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00:11
성령 받은 사람을 열심쟁이가 죽인 것
1986. 4. 8. 화새벽
본문:사도행전 8장 1절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우리가 신구약 이 성경에 기록된 어느 말씀이라도 이 말씀은 이 세상에 가득 차고도 남음이 있는 그 모든 말씀 중에서 간추린 말씀입니다. 그 모든 말씀보다 더 우리에게 귀중하고 요긴하기 때문에 기록해 주신 말씀입니다.
무슨 이 세상 지식이나 말이나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그 일 중에도, 그 일을 다 기록할라면 온 세상에도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하는 그런 많은 양 중에서 간추려서 이렇게 이 신구약 성경에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한 성구라도 이렇게 많은 것을 다 두고 그보다 더 초월하고 중요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이 말씀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지 안하면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성구도 허투리 생각할 것이 아니고 이렇게 많은 주님의 하신 일 중에도 간추려서, 천하에 둬도 다 둘 곳이 없을 만치 그렇게, 기록한 것을 천하에 둬도 다 둘 만한 곳이 없을 만치 많은 그 분량 중에서 간추려서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중요하고 참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말씀으로 기록해 주신 것인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저 할 말이 없어서 해 놓은 말같이 여기기도, 쉽고 또 주님이 하신 말씀은 말씀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말씀은 말씀이지마는 이렇게 많은 양을 다 능가하고 이 많은 양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이 사실을 우리가 실지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는 이 말씀의 중요성과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요성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이 말씀을 증거를 했습니다. 1절에,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겼다. 그러면 누가 죽임당한 걸 마땅히 여겼는가?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스데반을 돌조산을 모아서 죽이는 데에 그 일에 책임자, 제일 선두에서 선봉장으로 죽이는 일에 일한 사람이 곧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분이 회개하고 난 다음에 사도 바울인데, 바울로 이름을 했는데 내나 그 사람입니다. 바울 서신을 기록한 사람이오. 그 뒤에 사도가 됐습니다.
우리가 여게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셨는데, 그때에 이 사울은 어떤 위치에 있었던 사람인가? 구약 성경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사람입니다. 또 구약 성경 선생 중에도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선생이 제일 유명한 선생이요, 성경을 잘 아는 선생이요, 또 모든 그 행함이 이스라엘에 큰 빛을 나타낸 아주 유력하고 유명한 그런 선생님 밑에서 배우는 아주 수제자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말하기를, 그때는 신약 성경은 아직까지 기록이 안 됐고 구약 성경만 기록한 것을 보고 모두 하나님 백성들이 믿을 때인데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한 성구도 양심에 가책이 없이 다 실행한 사람이라고, 다 실행을 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을 했습니다. 율법으로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렇게 자신할 만치 아주 철두철미한 사람이요 하나님에게 대해서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이랬는데, 이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 성령이 충만함으로 그 사람을 택해 가지고 집사로 세운 사람입니다. 7장에 보면은 스데반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고 또 그 사람이 돌에 맞아 죽을 때도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죄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들을 위해서 구원을 기도했고, 또 하늘 문이 열렸는데 하늘에서 주님이 자기를 지금 맞이할라고 서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증거를 했습니다. 이 스데반은 참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어떻게, 하나님 잘 믿는 이 열심있는 사람이요, 성경대로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사람이요, 또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있는 사람인데 왜 이 스데반을 죽였을까? 이것을 왜 이렇게 사도행전 8장 1절에다가 이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고 그 죽임당하는 게 마땅하다 이렇게 자신이 만만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우리가 여게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야 될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여게서, 성경대로 지켜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건설구원을 이룰 사람은 아닙니다. 기본구원은 얻은 사람으로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기본구원을 얻지 안했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건데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위하고 높였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중생시킨 성령은 그에게 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행동을 간섭하고 주관하는 그 역사적인 성령은 이 사람이 받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뭐 세월이라 그 역사가 아니고 역군, 일할 역자, 일할 사자, 일하는 그런 성령은 받지를 못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가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과 정반대되는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지켜 행한다고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언행 심사가 성경대로 됐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도 아주 이렇게 완전 가짜가 있을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에 가득, 다 기록할라면 세상에 둘라 해도 둘 곳이 없을 만한 그런 모든 많은 양을 다 제해 놓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셨다 그 말이오.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거요. 그러면 뭐 때문에 기록했는가? 이것도 우리에게 큰 문제를 줍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대로,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한 절도 범하지 안하고 고대로 철두 철미하게 행했고 양심에 가책되는 일 하나도 안 했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열심이 있었고 이랬는데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고 예수님도 그 당시 죽일 때에 이 사울도 같이 동참해 가지고서 같이 죽였는지 모릅니다. 여게는 기록돼 안 있지마는. 바로 뭐 그때가 그때니까.
그러면, 이것이 왜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율법으로서는 흠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에게 대해서 열심으로 말하면 이거 뭐 자기네들 깨달은 대로의 하나님 믿는 데에 위반되다고 해 가지고서 전부 위반된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렇게 열심 있는, 하나님에 대해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이걸 잘못 가르치고 잘못 믿는다고 해 가지고서 그것을 고치라고 하다가, 고치라 하다가 고치지 안하니까 다 죽여 버렸다 말이오. 이만치 적극성 있는 사람이요 아주 열심 있는 사람, 하나님에게 대해서 열심 있는 사람. 그래, 열심으로 말하면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 자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는데 이분이, 예수 믿는 성령에 충만한 사람을 죽이고, 죽이는 그 선봉장으로 됐고, 또 그 뒤에 보면은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남김이 없이 싹 다 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서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조사해 가지고 전부 잡아다가서 다 옥에 갖다가 지금 재판해서 넘겨 가지고 다 뭐 죽여 버릴라고, 이스라엘의 종교법에서는 그뭐, 옥에 가둔 거는 사회 옥인지 이스라엘 종교에도 옥이 있었는지 그건 나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지 옥에 갖다 가뒀습니다.
이랬으니까, 이걸 보고 우리가 뭘 가지고 안심을 할 수가 있겠느냐? 우리 믿음의 믿는 것을, 내가 무슨 성경 말씀대로 행했다고 안심할 수가 있겠나, 내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열심이 있다고 안심할 수가 있겠나, 목회에 대해서 열심 있다고 안심할 수가 있겠나, 내가 설교를 잘 한다고 안심할 수가 있겠나, 또 이 목회에 교인들이 많이 모여든다고 안심할 수가 있느냐 도무지 그런 거 가지고는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분이 나중에 회개하고 난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은 자기의 양심에 가책될 것이 하나도 없지마는 과거에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믿었는데 그것이 완전히 그게 마귀 역사라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 자기 딴에사 양심에 가책할 것이 없이 이렇게 누구보다도 참 이 진리대로 믿을라고 이렇게 애를 쓰고 열심히 믿지마는 내가 이것으로서 안심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 나를 심판할 터인데 그분에게 무슨 면이 걸리고 어떻게 잘못된지 모르겠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무거운 짐진 거와같이 고통 중에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뒤에 말한 것을 보면 자기가 설교하되 다른 사람이 뭐 감동 받는 것이나 또 자기 인기가 끌리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자기 말에 설복을 당해서 잘 설득을 시킨 그 성공을 한 것이나 그런 데에 자기는 목표를 두지 안했습니다.
거게다가 자기가 도를 전하는 기준을 두지 안했습니다.
거게 두지 안하고 그는 늘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안하고 성령의 감동에 있기를 내가 원한다, 또 지혜의 말에 있지 안하고 능력에 있기를 원한다, 또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이래서 그분이 어쨌든지 이 객관적인 능력, 자기에게 있는 주관의 열심이나 힘이나 그게 아니고 객관의 능력, 순전히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의 이 능력 이것만이 구원을 이루어 줄 수가 있지 이게 아니고는 안 된다 하는 것을 그것을 깨달아서 여게 대해서 항상 걱정했습니다.
내가 전하는 것이 지혜의 말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의 감화 감동에 있기를 원한다, 또 너희들에게 전한 것이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를 원한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안하고 능력에 있다. 이분은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 다른 사도에다 비해서 다른 사도들이 말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면을 마음 아피 깊이 느낀 것은 자기가 그렇게 열심 있는 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특심 있는 그런 신앙 생활을 했지마는 나중에 보니까 완전히 하나님의 원수의 행위요, 그거는 순전히 마귀의 행위라 하는 것을 자기가 깊이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게 대해서 뭐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안심하고 있는가? 우리가 목회하는 데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이거 뭐 사람들이 좀 감동을 받아서 이렇게 인기나 끌어지고, 교인이나 주 모아들고, 또 자기 주관으로서 자신이나 있고 이렇게 하면 자기는 원만한 하나님의 일군으로 이렇게 보고 우리가 오인을 하고 있지 않는가? 요게 대해서 요것을 얼마나, 요거는 뭐 아무 말도 없고 요거는 자기가 스스로 살펴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데, 그분이 뒤에 말한 것 보면은 성령의 능력 아니면 소용 없다 하는 것을 총 그분의 교훈을 간추려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은 이것은 내가 깨달은 말이다, 또 이거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하는 말이다, 또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나에게 명령해서 주의 명령을 내가 받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성령의 감동 받아 가지고서 하는 말, 또 자기가 믿는 마음을 가지고서 지금 하는 말, 직접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은 말 이렇게 구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큰 숙제가 되고, ‘그가 그랬는데 그는 하나님의 적이 되었으니 이거 어찌 되나?’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나는 어떤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니까 이 스데반을 죽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전부 집집마다 들어가서 끌어다가서 다 옥에 가두고 이렇게 하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다 도망쳤다 말이오. 다 도망쳤는데 사도들은 도망치지 안했습니다. 이 사도들은 도망치지 안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쳤는데 이 도망친 사람들과 사도와의 다른 게 뭐이냐? 그때에 그렇게 다 죽임을 당하는 그런 그 큰 핍박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사도들은 하나도 도망치지 안하고 그 자리에서 있었던가? 그러면 그때, 물론 흩어져 가지고서 일한 것도 하나님의 뜻은 뜻이지마는서도 우리는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때 흩어진 것은 하나님의 일할라고 흩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할라고는 흩어진 것 아니고 그들이 흩어지기 싫었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은혜를 받고 이렇게 예루살렘에 같이 뭉쳐서 신앙 생활하고 싶었는데 흩어진 거는 죽기를 두려워해서 다 흩어졌던 것입니다. 핍박이 두려워서 흩어졌던 것입니다.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다 흩어졌지 뭐 여게 일하니까 또 딴데 가서 복음을 전하자 해 가지고 흩어진 것 아니고 흩어져 가 가지고 보니까 또 복음 안 전할 수 없어서 복음 전했지 흩어진 것은 두려워서 흩어졌던 것입니다. 핍박이 두려워서 흩어졌어.
그런데, 사도들은 흩어지지 안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서 흩어졌는데 사도들은 거게서 흩어지지 안하고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신앙을 평안히 담대한 마음 가지고서 지키고 있었으니 그 사도들과 흩어진 사람들과 그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다른 게 뭐이냐? 우리가 요것도 또 지금, 무슨 문제든지 해결을 지우고 가야 되지, 그러면, 사도들은 왜 그렇게 교회를 핍박하고 잡아다 옥에 가두고 뭐 이 사도들도 갇힌 일도 많았고 핍박당한 일이 다른 사람들 요량하면 사도들은 몇 배나 더 당했습니다. 거게 2장으로부터 내리 주욱 보면은 사도들에게는 참 기적도 나타났지마는 핍박도 많이 당했습니다. 당해도 그들은, 그들이 교회를 핍박한다고 해 가지고서 두려워서 딴데로 도망치고 피난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과 그들의 신앙이 다른 게 뭐인가? 그러면 오늘 나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우리가 낙관하고서, 그때 그래 퍼져 가지고서 복음이 더 전파되고 널리 퍼지지 안했느냐? 그것은 자기의 신앙은 아닙니다. 자기의 신앙은 아니고 도망 갔는데 하나님이 도망간 놈을 붙들고 또 하나님이 쓰셨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신앙으로서는 도망간 신앙밖에는 안 됐다 그 말이오.
이것을 그렇게 오해하지 말고, 사도들은 도망 가지 안하고 거게서 다 그대로 저희들이 하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니까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저희들이 암만 해도 우리 하나님이 더 강하시다 이걸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평안하게 염려 없이 그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서 바로 홍해에 접했을 때에 뒤에서는 애굽 병정이 추격하고 있는 그 어려움 당했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살아 있지마는서도 기절한 만치 다, 아마 그때 봤으면 사람들이 다 새파라이 산 송장으로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랬는데 모세나 여호수아나 갈렙 그런 사람들은 평안하고 즐거워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하시는 솜씨를 보자.’ 또 그렇게 말하고, ‘이렇게 이 극단으로 이런 역경이 온 것 보니까 아무래도 여게서 이 애굽 사람들의 문제를 하나님이 처리할 것 같다’ 이렇게 상상도 못 할 일을 깨달았고 그들은 기쁘고 즐거움을 가졌습니다.
이랬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때 놀랠 것은 왜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은 저런데 왜 우리는 이러냐 이것을 비교하고 놀래서 다른 이 점을 생각하고 가슴을 치고 울고 걱정을 했으면 그들도 여호수아와 모세와 갈렙 같은 그런 사람들이 됐을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지 안했습니다. 알지도 못했고, 구하지 안했고 오히려 원망 불평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올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볼 때에 왜정 말년에도 피해서 도망 간 사람, 도망 가 가지고 그때 신사 참배 문제를 망명해 가지고 된 그런 사람들이 만일 ‘왜 다른 종들은 왜정의 그 치하에서 정치 아래에 있으면서 그들은 그대로 신앙을 지키고 요동치 안하고 도망 가지 안하고 그대로 신앙을 지키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오히려 자유하면서 자꾸, 신앙을 지키면서 그들의 하는 것을 반대를 하고 그래 지켰으니까 이 신앙의 차이가 있으니, 신앙의 차이가 있으니, ‘나는 도망을 갔었는데’ 도망 간 사람은 도망 가지 안한 사람과 도망간 사람과 또 도망을 가지 안하고 또 감옥에서 갇힌 사람과 또 자유한 사람과 이 차이를 봐 가지고서 자기와 신앙이 차이가 있으니 이게 무슨 문제냐 이것을 찾아 가지고서 보다 나은 옳은 그 신앙에 입각할라고 들어설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게 도망쳤다 말은 안 하고 흩어지니라 이랬는데 실은 도망쳤습니다. 도망쳤소. 도망친 것 아닙니까? 도망쳤는데 도망쳤다고는 하지 안하고 흩어졌다 이랬으니까 도망친 것보다는 좀 낫지요. 믿으면서 좀 피해서 이렇게 간 것이니까. 그러나, 사도들의 신앙이 달랐습니다.
또, 2절에 보니까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경건한 사람 또 이 사람들은, 사도들은 사도들이라 그런데 또 보니까 사도 아닌 이 평신도 가운데서도 경건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은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쫓겨서 흩어져 가지 안하고 거기 있으면서 스데반이 죽은 것을 참여하고 죽은 스데반의 시체를 장례를 하고 크게 울고 하는, 장례에 참석을 했다 그거요.
그때 평양서 주 기철 목사님이 순교해서 그 장례식에 참여할 때에 그때 장례식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선지자를 선지자로 대접한 사람은, 의인을 의인으로 대접한 사람은 의인의 상급을, 선지자의 상급을 받는다고 말한 것처럼 그때에 장례에, 주 기철 목사님의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사람들이 순교의 상급을 같이 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어떤 때냐? 주 기철 목사님 장사한다 하니까 장례하는데 참여하는 놈들은 모조리 잡아 죽이고 모조리 잡아 가둔다 하는 그걸 일본 그 총독 정치에서 그렇게 위협을 하고 하니까, 뭐 그러니까 어데 뭐를 할 수도 없고 이랬는데 다 거게 장례 참여하는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주 기철 목사님 순교당했으니까 우리도 같이 순교당하자. 죽으면 죽지.’ 다 생명 내 놓고 참여했고, 그때 또 그 장례비도 누가 뭐 어데 가서 장례비가 한 푼 있습니까? 없는데 자꾸 돈이, 여기 이 사람이 저 사람이 모르게 자꾸 돈을 넣어서 그 돈 가지고 장례에 썼는데 말을 들으면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에 장례 쳐 놓고는 왕이 죽는 장례도 있고 이랬는데 국상이고 뭐이고 제일 그 장례에 사람이 많이 모였고, 장례비가 제일 많이 쓰여졌고, 돈은 어데서 온지는 모르나 돈은 뭐 얼마든지 부족함이 없이 쓰고 남음이 있었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제, 거게 보면 경건한 사람들은 그 장례를 하고 크게 울었다. 그러면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고, 사도들이 있었고, 또 양사방으로 그만 쫓겨서 흩어져 간 사람이 있었고, 또 열심쟁이 사울이 있었고, 또 그때 집집마다 들어가서 잡아다가서 옥에 가둬서 옥에 갇힌 사람들이 있었고, 이러니까 그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나는 어떠한 사람이겠느냐? 그러면 그럴 때 내가 숨어서 고만 예수 안 믿는다 하고 그때 가서 자복을 하고 항복을 할 건가? 제가 그때 고제 있었는데 고제에서 사람들을 잡아다가서 주재소 갖다 놓고 이 신사 참배에 대해서 항복하라고 이라니까 신사 참배는 다 한다고 했고, 다 한다고 했고, 예수를 안 믿겠다고서, 안 믿겠다고서 그렇게 그만 예수 안 믿겠다고서 항복한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너 예수 믿으면 널 죽여 버릴 거고 네가 지금 안 믿는다 하면 살려 두겠다 이렇게 말하면은 우리 서부교회 교인은 어떤 사람이 될 건가, 교역자들은 어떤 사람이 된 건가? 이것도 남의 일로 생각지 말고 자꾸 이 성경에 이렇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록해 줬으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좀 미루어 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거게서 또 흩어진 사람들이 양사방 흩어졌는데 사마리아는 빌립이라는 사람이 가 가지고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전해 줬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의 설교를 듣고, 여게 보면 6절에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좇더라」 그러면, 뭐 가지고 전도했습니까? 전도할 때에 몇 가지 가지고 전도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 몇 가지 가지고 전도했소? 두 가지로 전도했습니다. 두 가지로 전도하지 안했소? 말씀을 전하고, 또 하나는? 거게 보니까 표적, 이 표적이 일어났다 말이오.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따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도 지금 교회가 될라고 하면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이런 표적 저런 표적 예수 믿는 사람이 전부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자기 속에 자기가 아는 대로의 표적을 다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 계시는구나.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 이거는 분명히 하나님이 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그런가 저런가 자기가 그대로 행해 보니까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는 것을 자기가 체험하고 경험해야 신앙이 생겨지지 체험도 경험도 안 하고 신앙이 생겨지는 일이 있기는 있지마는서도 일반은 다 말씀 듣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데서 신앙이 생겨집니다.
물론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성신의 감동으로 되지마는서도 이것도 성령이, 이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 성령의 행전이라 이렇게 말해.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전이라. 성령이 행한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래 놨는데, 우리가 그저 말씀만 전하면 된다 이래 가지고 한 때는 이 표적을 아주 무시했습니다. 표적을 무시하고, 표적을 무시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표적을 무시한 사람들이 학자들이 표적을 무시했습니다. 학자들은 입만 까 가지고 쫄쫄쫄쫄 하면서 얼마든지 그거는 이 사람 말도 듣고 저 사람 말도 듣고 많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입으로는 졸졸 놀립니다. 놀리지마는 서도 이 사울 모양으로 이런 사람으로서 이렇게 했지 하나님의 성령을 영접할 만치 자기를 부인하는 데까지 노력해 들어가지를 안했기 때문에 인간의 말만 주 모아 가지고서 구변쟁이만 됐지 이 성령 받지 안했으니까 이 표적을 인정하다 보면은 이 아무것도 아닌 평신도는 표적이 나타나는데, 아, 기도하니까 병도 낫고 기도하니까 귀신도 쫓겨나가고 이 표적이 나타났는데 이거 박사라 하면서 이거 신학자라 하면서 그래 봤자 아무 귀신 근방에, 귀신이 조롱하고 있지 아무 그런 표적이 안 나타난다 말이오.
이러니까, 아하, 이 표적을 인정하다가는 우리 권위가 떨어지겠다, 표적을 다 무시해 버리고 말만 이걸 위주를 해야 우리 권위가 나타나겠다 이래 가지고 해서 자기네들을 하나님의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색을 보호책을 입고 보호책의 그 구변을, 궤변을 꾸몄던 게 아닌가 생각도 된다 그거야.
우리가 경험한 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그 병 낫는 것이 큰 게 아니라 병이 나을 때에 자기의 심령이 어떠했으며, 어떻게 마음이 됐으며, 또 하나님을 향해서 어떻게 바라봤으며, 어떻게 믿었으며, 무엇을 소원했던가? 어짜든지 세상 것 아무것도 소원하지 안하고 예수 믿는 걸 자꾸 말하니까 예수님만 바라보고 소망하고, 고 순간적이라도 예수님만 바라고 예수님만 소원하고 딴 이 세상에 복잡한 욕심은 다 간 곳이 없고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소망했을 때에 표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적이 나.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만 믿고 그분만 좋아 그분에게 뭐 그분에게 좋은 거나 뭐이거나 그분에게 얻을라고 하는, 그분만을 믿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소원하는 고 순간이 찰나라도 고게 있을 때에 하나님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교회가 아무리 이렇게 많이 모인다고 할지라도 말뿐이고 표적이 없으면은, 이 사울 같은 열심쟁이들이 모였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 사울 같은 열심쟁이들이 모였으면 어떻게 됐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 교인 같은 열심쟁이들이 모였으면 어떻게 됐겠으며 서기관과 제사장들 무리들이 모였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고만 세상에 제일 이런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적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여기 우리가 놀래지 안할 수가 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 뭐를 표준으로 삼을 것이며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이래서, 성경에 있는 것이니까,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빌립이 말한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얻는다, 예수님이 구주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라 말이오.
그거 증거했는데, 사도행전 10장에도 보면은, 10장에 44절에 보면은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이 말 무슨 말? 내나 예수님이 지금 정죄 받아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선지자의 예언한 대로 응해졌다 하는 고것을 말합니다. 고거 말했는데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라’ 뭐? 성령 부어 준 게 무슨 표인데? 46절에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보니까 하나님을 제일 높입니다, 하나님을. 그만,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거 없고 하나님을 제일 높이고 제일 두려워하고 제일 바라보고 하나님을 제일 이래 높이는 그 모든 행동이 보이지 않습니까? 보니까, 보면, 그 사람을 마음을 봐도 알고 피부, 우리가 마음 모릅니까? 그 사람 마음 보입니다. 그 사람 마음에 왜 안 보입니까? 마음이 피부에 다 나타납니다.
마음이 피부에도 나오고 눈에도 나오고 눈초리에도 나오고 뭐 그 사람의 신경에도 나오고 다 나온다 그 말이오.
하나님을 높이지, 또 방언을 한다, 방언한다고 요새는 이 조짜배기 방언 때때때때때 자꾸 이래 하는데 그거 방언 아니오. 그게 방언 아닙니다. 방언은 다 통역할 수 있는 방언이고 다른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같은 수준의 영감받은 사람이 들으면 다 들을 수 있는 그게 방언이지 저 혼자 하는 것은 그거는 방언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래서 그거는 오히려 오랑캐가 된다 했어. 적이 된다 했어.
이 방언은 뭐이냐? 방언은 보니까, 그 사람들이, 방언의 은혜는 이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니까 그거 뭐 세상에 말이 꽉 찼는 게 말인데 그 한 말씀 한 말말씀에 그만 기절을 하고 그 말씀을 확실히 믿고 인정하고 모두 좋을 것은 좋아 못 견디고 두려울 것은 두려워 못 견디고 그 말씀을 들어서 깨닫는 그 능력이 거기 갔더라 그 말이오. 방언은 그게 방언입니다.
방언의 시초는 어데가 방언의 시초인고 하니 사도행전 2장에 거게가 방언의 시초인데 그때 방언은 무슨 방언이냐? 한 나라 말로 하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알아 들어. 유태인의 말로 가지고 하는데 로마 사람도, 헬라 사람도 뭐 양사방 세계에 각국에 있는 사람들이 왔는데 저거 말로 하지 안했는데 다 알아 들어.
그게 방언이오.
또, 전하는 자도 자기가 전하는 데에 전하는 능력이 있어, 전하는 능력이 말을 뭐 크게 해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전하는데 그 전하는 말씀이 듣는 자에게 깨달아지고, 또 믿어지고 하는 것이 더 강도가 높아지지, 또 듣는데 더 깨달아지고 느끼고 믿어지고 소망하는 것이 강해지지 그것이 방언 역사합니다.
이렇게,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좇더라면 믿더라 말이오. 좇더라 말은 따르더라 그 말이오. 더라, 믿더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어짜든지 이분들과 같이, 베드로도 그렇고, 사도도 그렇고, 빌립도 보니까 말씀 전하는 데에 말씀도 전해지고 표적도 있었습니다. 귀신도 나가지 안했습니다. 우리가 그거 지금 우리가 모자라니까 그게 안 그런 거라.
우리가 모자라니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 사람을 예수 믿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데 이 모자라니까 우리가 뭐이 부족한 점이 있어서 그 능력이 덜 나타나는 것이지 그 능력 나타나는 게 성경적이 아니라서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자라 안 나타난다 말이오.
이 표적이 안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이 모자라는 부족점으로 그런 것이지 그게 성경적이 아니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알아야 될 터인데 우리가 제가 부족해 그런 걸랑 생각지 안하고 ‘이거는 성경적이 아니다’ 이렇게 정죄부터 해 버리는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 이거 다 학자들이 없앴던 겁니다. 다 이거 고쳐야 돼요, 이거.
네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면 너는 부족점이 있다. 표적이 없으면 너는 하나님의 능력의 신이 너와 같이 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이렇게만 알고 고만 우리가 단속을 해야 될 터인데 이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문제가 지금 내가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고 이거 참 엉터리라 하는 것을 지금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우리 교회에 둘이 있습니다 지금.
둘이 있는데 하나는 뭐이냐? 귀신 들린 사람인데 그 귀신 들린 사람을 내가 암만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해도 그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그 귀신이 나가지 안해요. 나가지 안하고 항상 귀신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이냐? 이게 내게 시금석이라. 언제 ○○○ 목사가 설교하면서, 내가 들으니까 곰이 겨울을 지낼라 할 때에 이놈이 꿀밤을 따먹고 난 다음에 이제 겨울에 굴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먹고 입 딱 봉하고 지금 겨우내 지내는데 겨울에 들어가서 겨울을 지낼 만치 기름이 채였나 안 채였나 싶어서 시험할라고 저 높은 나무에 가서 툭 떨어져 가지고서 아프지 안하면 이제 됐다 하고 굴에 들어간답니다. 또 아프면 아이고 아직 멀었다, 또 막 열심히 꿀밤을 따먹고 살을 찌워요. 이거 모양으로 내가 저 귀신이 나가야 내게 양이 찰 게 찼고 앞으로 환난을 맞이할 때 이거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거 환난 준비가 이러 틀렸다, 모자란다 내가 그거를 보고 있고, 또, 하나 문제 있는 거는 뭐이냐 하면 또 하나는 자꾸 나를 하나님이라 합니다.
그래 하고 돌아다니오. ‘백 목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재림하실 하나님이시다, 잠시 후면 나타난다.’ 이래 하며 자꾸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니기를 한 군데만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온 전국에 돌아다녀. 서울로 돌아다니고 온 전국에 돌아다녀. 돌아다니면서, 그 아들이 데려다가 그거 그리 하지 말라 해도 안 되고, 또 그 아들이 이걸 정신 병원에 입원시켜 가지고서 치료를 해도 안 되고 자꾸 그라고 다닙니다.
그 사람이 너를 하나님이라 하는데 네가 하나님돼 가지고 있는 그게 있다, 하나님돼 가지고 있는 게 있기 때문에 교만을 뽑아라, 이건데 저거 암만 기도해야 안 되는데, 이거 기도해서 저 사람이 그거 회개를 하면은 이제 내 속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서 증거를 하면서 내것처럼 해 가지고 내가 하나님처럼 이래 하나님의 것을 내것처럼 하면 내가 하나님이라 말이오.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은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이라 한다고, 하나님이라 하는 게 아니라 고만 우리가 하나님의 대행을 하면서 대행하고 대언하고 이렇게 하면서 내가 그만 잘못하면 지내쳐 가지고서 내가 하나님 대우받고 하나님처럼 이렇게 되는 것 하나님의 그 지위와 권위를, 영광을 내가 가로 뺏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된 그 요수가 내게 있기 때문에 이놈을 회개를 하면, 완전히 회개하면 저게 인제 병이 고칠 거다.
그거 둘이 내게 시금석이라. 지금 둘이 암만 기도해야 안 돼요. 그래 지금 그걸 인제 깨닫기는 깨달아. 이거는 내게 교만이 있어서 지금 나를 하나님이라고 자꾸 전파하고 다닌다. 또 하나는 내 속에 저런 귀신, 동류의 귀신이 내게 있기 때문에 지금 저 귀신을 내가 암만 쫓아낼라 해도 나가지 안하고 있다 이래서 아직 그게 내게 지금 하나의 시금석, 나를 저울로 다는 저울이라 그렇게 보고 지금 인제 노력하고 있는데 곰 모양으로 인제 그것이 완전히 되어지면 또 안심을 하겠습니다. 안심을 하는데 그라면 또 하나님께서 뭘 또 내게 또 주실란지 모르겠어.
우리는,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이러니까 내가 목회하는 데에는, 목회하는 데는 그 말씀의 권능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는 거, 내가 귀신 나가라면 귀신이 쫓겨 나가고, 모두 다 그랬습니다. 쫓겨 나가고, 또 병 나으라면 병 낫고, 뭐 다는 낫는 것 아닙니다. 다는 낫는 것 아니라. 예수님도 다 낫지는 안했습니다, 낫는 것 낫고. 다 낫지는 안했어요. 그거는 본인에게 믿음이 있어야 되고, 바울이 전도할 때 보니까, 그때 그거 보니까 말씀을 듣는데 그 사람에게 병이 나을 만한 믿음 있는 것을 바울이 보고 병 나으라 하니까 병이 나았다 말이오. 보고, 그러면 그게 없으면 또 안 된다 그거야.
그렇지마는 우리가 전부 다는 아니지마는 그래도 내가 목회하는 데에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표적이 나타나고 또 기적이 나타나고 또 내가 정말로 또 목회를 하는 데에, 고라가 모세를 반대했다 말이오. 고라가 모세를 반대해서 이랬는데 고라를, ‘하나님이여 판단하시옵소서. 이 고라가 옳습니까 내가 옳습니까? 어데든지 옳고 그른 걸 하나님이 판단하옵소서.’ 하니까 땅이 벌어져 가지고 그만 고라의 소속이 산 매장이 됐다 말이오.
그런 일은 안 할지라도 내가 목회하는 데에 내가 악을 악으로 대항할 것이 아니고 원수를 내가 갚을 것이 아니라 내가 목회하는 데에 원수 갚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 원수를 갚아 주시는가 내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게 있는가, 원수 갚아 주기를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그거 그래도, 내가 원하는 게 아니지마는서도 목회를 하는 데 ‘하나님이 저거 나와, 나와 반대했는데 하나님이 저걸 쳐 가지고서 저걸 꺾는다.’ 그러면 그 꺾는 것을 좋아서 그런 건 아니지마는서도 그를 꺾으면 나와 정, 갑이라 을이라 이랬는데 그를 꺾는 것 보면은 내가 옳은 것 하는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긍정하는 증거가 된다 말이오.
이런 것도 다 기적이요 표적이요, 또 귀신 나가는 것도, 병낫는 것도, 또 무슨 일을 하는데 그 교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대로 살아라 했는데 그대로 사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오는 것이 또 나타나야 될 거라 그 말이지. 이게 나타나지 안하면 우리가 모자라고 이거 미달된 것이니까 어짜든지 이 역사가 나타나도록을 목표하고서 애를 써야 될 터인데 아예 그거는 제가 못 하는 거는 전부 없다 합니다. 제가 못 하는 거는 이거는 진리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 가지고서 스스로 속는 이런 일들을 우리가 많이 하고 있지 않느냐?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이랬는데 그때 하나님이나 지금 하나님이나 같은데 우리에게 이렇게 뭐 소리를 지르든지 어쨌든지 그 사람이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들린 사람은 꼭 귀신노릇 하는 그 사람만 아니고 귀신 들린 사람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지 않는 사람은 전부이 다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귀신들린 사람. 그러면 그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귀신 나가는 증거라 말이오.
나가는 증거인데, 그것이 있어야 되겠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이런 것도 낫는 그런 기적과 표적이 우리를 따라야 이 교회가 부흥이 되지 그게 아니면 안 될 것이라 그 말이오.
하나님께서 고거 보이는 것은 네가 요런 표적이 나타날 때에 나를 향하고 나를 사모하고 네가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안하면 어짜나 하는 고 심정을 가진 요 심정 가지고 살라고 한 건데 고거 하면 ‘나도 됐다’ 하고서 그 다음에 무너지면 죄 짓고 더러운 일 하고 교회 안 된다 그 말이오! 교회 안 돼! 왜 교회가 안 되느냐, 안 되기를?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표적을 주장하는 건 표적 그게 뭐 큰 게 아닌데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그게 아니지마는 그것은 내나 증거라 말이오. 자기에게 자꾸 믿음을, 믿음을 만들어 주는 증거라. 경험이 있고 체험이 있으니까 자꾸 믿음이 생겨지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이 표적과 기적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되지마는서도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실라고 할 때에, 기적과 표적을 나를 통해서 역사할라고 하실 때에 내가 모자라 가지고서, 하나님이 해 주고 싶지마는서도 내가 어떤 면이든지 모자라 가지고 이루어지지 안하지는 않도록 요 모자란 점이 없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 요거는 있어야 될 거라 말이오. 이것이 틀립니까, 이게 틀리요, 이거? 이게 잘못된 말이요? 이거는 있어야 될 거라 말이오.
있어야 될 것인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때의 우리의 신앙과 심정과, 거게 대해서 무관심할 때의 신앙과 심정이 같던가? 다른 사람은 같던가 몰라도 저는 같지 않습디다. 저는 다릅디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고기덩어리의 표적이, 기록하니까 칠백 삼십 명인데 벌써 천 명이 넘을 거라 말이오. 이번에도 보니까 저 양산동 가 가지고 간 대로 다 나았소. 병 주머니라. 이만치 병이 나았으니까 이 서부교회 교인들은 병원에 돈 안 갖다 줄 것 같은데 또 그래도 병이 든 게 있는가? 병이 나았다가 또 도집니다. ‘에이구, 병이 나았다가 도지니까 그거는 하나님의 권능이 낫운 게 아니라 그거는 일시 감정으로 그렇다.’ 이 마귀야 감정으로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이 낫아 주신 병은 도지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다시 도지지 않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또 도지기만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아니오. 도지는 것도 성경적이요 도지지 않는 것도 성경적입니다. 왜? 그 병 나을 때와 같은 고 신앙 가지고서, 고 신앙 고 중심 고와 같은 하나님과 연결을 가지면은 고 병은 절대 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연결로 말미암아 된 것인데 그 연결 없어지면 도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작용하시고 전능자가 작용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약이 작용했지. 약이 한 것이야 그거는 아무 그렇지만 이거는 하나님이 낫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삐꾸면 안 되고 하나님이 안 좋아하면 안 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틀리면 안 되고 자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기 때문에 이 일은 예민하기가 하나님처럼 예민하게 다시 도지고 낫고 하는 것이 된다 그거요. 그러나 그게 변동 안 되면은 그 병이 다시 도지는 일은 없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어짜든지 여게서 주욱 읽어가며, 그 밑에 먼저 많이 말했는데 뭐 시간 많이 갔으니까. 어짜든지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은 이렇게 다 장점들이 많았는데 이거 어떻게 이렇게 참 놀랠 만한 이 과오를, 죄를 범하게 됐는가? 또 그들의 신앙이 같은 신앙인데 왜 사도들과 또 경건한 사람들과 흩어진 사람들과 또 옥에 갇힌 사람들과 그 모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까 나와의 관련은 무엇인가 이런 걸 자꾸 생각하면서, 우리가 이 성경을 거울로 줬기 때문에, 이 성경을 보아서 나를 알라고 줬기 때문에 성경 보아 자기를 깨달아야 되지 성경보고 자기 깨닫지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만 자꾸 전해서 남에게는 전해 주면서 자기에게는 전하지 못하면 이것이 외식입니다. 성경 가지고 다른 사람은 가르쳐 주면서 자기는 가르치지 못하면 외식이라.
어제 내가 엊저녁에 그런 말 들었어. 주일학생이 있다가 말하기를 ‘야, 우리 선생님은 말이지. 우리한테는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자기는 그래 하더라.’ 이 주일학생이. 엊저녁에 내가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 말 들었다 말이오. 저녁 먹는데, 그 웃으면서 주일학생 그놈이 떡 말하기를 ‘우리 선생님은 자기는 하면서 우리한테는 하지 말라 하고, 우리한테는 하지 말라고 가르쳐 놓고서 자기는 그래 하더라.’ 그 말 내가 어제 들었어. 어제 나한테 그 말 한 사람 누구야? 손들어 봐. ○○○ 권찰이. 그래 하더래요.
내가 그 말에 말하기를 내가 그렇게 말했어. 그거, 내가 할 말은 그 말뿐이라.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다. 실은 다른 사람한테는 이래 하라고 가르쳐 놓고도 나는 실행 안 하거든. 다른 사람은 그래 가르쳐 놓고서 나는 실행 안 해. 그게 다 헛일이야. 내가 다른 사람 가르쳐 놓고는 내가 실행하고 내가 실행을 가르치고 이래야 돼지지.
그러면, 실행을 하자 하는 건 할 수 있지마는서도 자기가 실행하지 안할 걸 실행한 척 하면 고거 하나님이 거기 같이 계실 수가 없고, 또 실행할라고 원하면서 ‘실행하자’ 이라면 하나님이 같이 하실 수 있고, 원치도 않으면서 ‘실행해라’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같이 하지 않는다 그 말이오.
그래, 나는 대답을 뭐라고 했겠소? 나는 할 말이 없어. 기가 찬다 말이오. 할 말이 없어 그라기를 그래 있다 그 말 했어. ‘그 학생이 복이 적다’ 이래. ‘그 학생이 복이 적다.’ 왜 복이 적노? 저거 반사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은 나한테 가르치고 보니까 꼭 가르친 대로 고대로 실행하더라’ 실행하는 것 고것만 봤으면 제가 실행하는 사람될 텐데 하필 실행 안 하는 것 고것만 봤으니까 그 학생이 복이 적다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거는 내 신앙 경험에서 그래요.
신앙 경험에서, 요럴 때는 다른 사람이 안 봤으면 좋겠는데 딱 보면 어떤 사람이 딱 보고 앉았습니다. 요럴 때는 내가 요 말할 때 요 행동할 때는 다른 사람 안 봤으면 좋겠는데 딱 보고 앉았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 사람은 복이 적은 사람이라. 그거 내가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은 하필 꼭 좋은 것만 장점만 보고 이래 놓으면 자꾸 좋은 점만 보고 자꾸, 그러니까 다 같은 목사라도 그 목사 못쓸 목사라고 그렇게 보는 사람 있고, 좋은 목사라고 보는 사람 있으니 사람 좋은 목사라고 보는 그 사람이 복이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 목사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겠소? 이거 뭐 이때 보나 저때 보나 모든 사람이 이제 보고, 감동을 받고 옳다 이렇게 할 만치 흠 없이 살아야 이거 모든 관련된 사람들을 살릴 터인데 그만 이 사람은 이래 죽이고 저 사람은 저래 죽이고 하니까 이거 참 중대한 문제다. 그거 다른 말 할 말이 없고 ‘그 학생이 복이 적구먼’ 그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어. 그라고 내속으로는 인제 뭐이 되겠어? 이거 이러니 이거 가르치는 대로 꼭 내가 실행을 해야 그 효력이 있지 실행 안 하면 아무 효력이 없겠다 하는 그거 장 말하지만 또 그걸 또 한번 더 다지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이래 가지고 여러 가지 신앙의 종류가 있었는데 그걸 여러분들이 문제로 삼아 가지고서 ‘왜 그랬을까?’ 이것은 한 말로 말해서, 고 밑에 보면은 성령받은 사람을 열심쟁이가 죽인 것은 그 사람에게 이 스데반 속에 있는 역사하시는 그 성령이 없는 사람이라. 성령 없는 사람. 요 한 말로 말하면 온갖 열심이 있어도 그 성령, 역사 성령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또 중생 성령이 그 안에 계시지 안하면은 중생은 못 합니다. 또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영감의, 깨닫게 하는 그 영감이 없으면, 자기 마음을 환하게 밝게 해 주는 영감이 없으면 자기 마음이 밝아질 수 없고 깨닫게 해 주시는 영감이 없으면 깨닫지 못하고 실행하게 하는 영감이 없으면 실행을 못 하고, 이러니까, 전부가 다 하나님이 다 은혜로 주시니까 공짜배기인데, 하나님이 공짜배기로 주시는데, 공짜배기인데 이 공짜배기를 다 공짜로 받아라 했습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사라, 사라, 값 없어도 사라 했어. 사라는 말은 내게 있는 거 내놔야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노력을 해 가지고서 구원 이루는 거는 아니지마는서도 어쨌든지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내게 역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하우 하박이 아니고 누구에게는 후하고 누구에게는 박한 게 아닌데 하나님이 내게 와 역사하실 수 있도록, 택한 자에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 할 일은 내가 해야 되지 그거 안 하면 안 되니까. 이거 안 오는 그것은 나 할 일 내가 안 해서 그런 거 그걸랑 생각지 안하고 자꾸 엉뚱하게 위안제를 마시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안해야 되겠습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