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5 14:51
성도의 현실 상대법
1980. 3. 16. 주후
본문: 빌 1 :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또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과 물질들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창조주시며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 짧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영원 무궁한 세계를 홀로 주장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시고 모든 것들에게 필요한 것을 홀로 영원히 주시는 이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 가운데에 끼어 살고 있습니다.
세상도 실은 이분 한 분으로 인해서 생겨진 것이 이분 한 분으로 인해서 모두 살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분이 신령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이분의 역사는 보이지 아니하고 이분이 역사 해놓으신 것들만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해서 살고 있지마는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것만 보이게 되기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이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상호관계를 가지는 이것을 더 크게 보고 이것만 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부인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 또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 순전히 이것만을 힘입고 이 은택으로 살고 있지마는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안 하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것 덕택으로 사는 줄 알고 그것이 해 주는 줄 알고, 또 그것이 큰 줄 알고 그것이면 다인 줄 알아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현저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립하고도 존속하고 살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점점 부인하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이 짓지 아니하신 것이 없고 하나님이 기르지 아니하신 것이 없고, 하나님이 섭리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장에서 고기 한 마리의 대금을 주고 샀으면 '값을 내고 샀다'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그것은 하나님이 길러놓은 고기를 갔다가 준 그 운반비지 고기 값은 아닙니다. 우리가 쌀 한 낱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그것을 하나님의 것 먹고 하나님의 것 마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인지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의 일꾼들이 이렇게 저렇게 약간의 인공을 가하고, 전부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 쌀값을 내는 것은 그 쌀 한 낱에 사람이 그 사람의 수고가 든 것 천 분의 일이라고 할는지 만 분의 일이라고 할는지 혹은 몇 백 분의 일이라고 할는지 사람이 거기 노력을 가한 그 대가는 낱낱이 품을 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 품을 주는 것이고 또 품을 받는 그 농부도 역연 생명이나 호흡이나 자기의 활동이나 자기의 의식주 그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을 먹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그러기에 실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것을 다 가지고 살지마는 하나님의 것을 공으로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도 그러하지마는 사람들이 몰라서 제힘으로 한 듯이 제것 된 듯이 값을 이렇게 받는 것도 그 값을 받는 건 줄 알고 제가 인생에게 품 받는 건 줄 모르고 값 받는 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오, 기르신 이가 하나님이시오, 쌀 한 낱이라도 햇빛이 중요한데 햇빛의 값을 냈습니까? 또 땅이 중요한데 땅의 값을 냈습니까? 또 공기가 중요한데 공기의 값을 냈습니까? 모든 수분들이 중요한데 그 수분들의 값을 냈습니까? 이 값을 아무리 헐하게 쳐도 그 값을 낼라하면 농사지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또 농사짓는 그 농부가 하나님이 만들지 아니한 농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먹이고 입혀서 지금 생존하게 하신 사람이 아닌 사람이 어디 하나나 있습니까? 순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렇지마는 사람들이 어두워서 내 힘으로 사는데, 누구의 힘으로 사는데, 누구의 덕택인데, 이렇게 하고 있지 하나님의 것 아닌 게 하나도 없고 하나님으로서 살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에게 얻어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구속할 자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대하고, 그 법칙을 거슬리고,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제가 했다고, 불한당, 수고 안하고 남 해놓은 것을 제가 가로채는 그런 도적을 가르쳐 불한당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많지마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하나님을 없다고 부인하는 무신론자도 밥 먹이고 하나님의 것을 순전히 제가 받아 가지고서 저 자리에서 요기까지 가져와 놓고 요거 내 거다 하면서 땅땅 탱궈서 비싸가 받아먹는 그 사람도 그만 그대로 둬 두고 이런 것들이 섞여 있으니까,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없어도 살 것 같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도 살 것 같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필요가 중요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마는 일단 사람이 죽었다가 심판 받아 무궁세계로 갈라져 갑니다.
지옥으로 갈라져 가고 천국으로 갈라져 가고 이렇게 갈라져 갑니다. 갈라져 가면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은 하나님이 거기 영원히 참가 안 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참가 안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또 하나님의 만드신 그 사람들만 있지 하나님이 만드신 그 사람 본인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만드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빛도 없고, 공기도 없고, 땅도 없고, 식물도 없고, 의복도 없고, 움직임도 없고,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유황불 구렁텅이입니다. 하나님도 안 계시고 하나님의 것이 하나도 없는 세계, 이러니까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기 전 그 보다는 훨끈 그 좋은 대기소가 되어있는 음부에서도 물 한 방울 요청했지만 없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필요 없다고 하나님을 거친다고 하나님 없기를 하나님 없다고 하나님을 반대해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이 인생들과 인생들이 사용하는 그 모든 만물들 죽는 날까지, 하나님 계시니까 하나님을 영접해라 하나님이 모든 것보다 필요하니까 하나님 좀 네가 필요한 것으로 좀 상대하고 가지라 '아, 하나님 필요 없다. 죽는 날까지 하나님 필요 없다고 거부하고 내 거지 하나님은 필요 없어 내 것 산다 하나님께 필요 없다' 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죽는 날까지 내가 아니면 네가 죽는다 내 것 가지고 사니까 내 것 사는 줄 알고 내 것 가지고 살도록 네가 작정을 해라.
내 것 가지고 살도록 나한테 이것 달라고 해라. 나 없으면 너는 멸망한다 나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나 없으면 멸망이니까 나를 인정하고 나를 영접해라 죽는 날까지 말해도 안 듣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은 필요 없다. 하나님의 간섭도 하나님의 법칙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하나님과 무궁세계 하나님의 것 없는 세계 나 내 것 가지고 내가 살겠다 하는 이것으로 끝까지 고집하고 나가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이 거칠어졌고 너와 내 것만이 필요 있지 이제 귀찮스럽게 여겼던 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이 없는 너와 네 것만 가지고 살도록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이 없는 곳으로 가거라 하는 곳이 유황불 구렁텅이입니다.
하늘나라는 세상과 달리 큰 자나 작은 자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만 그곳에 있습니다. 저를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것으로 주의 피로 구속받아 성화 시킨 주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만 거기 갑니다.
하나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건 다 못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 안 하는 것은 다 깎아버리고 빗어 버리고 심판해서 떼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것만 갑니다. 가 가지고 하나님의 것이 너에게 얼마나 필요하냐? 자기에게 이 세상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의 소망으로 구하는 그 분량 만치 그 분량만치는 하늘나라에서 줍니다. 그 종류만치만 줍니다.
이러니까 다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마는 하늘나라 가서 보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를 구해서 하나만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천만을 구해서 천만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구해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적은 것을 구해서 적은 것을 가지고 있는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은 절대자이신 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대략 짐작할 터이니까 말을 할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평생해도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다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이분은 우리에게 무한히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분은 우리에게 무한히 영원 무궁토록 모든 면에 무한히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십니다. 이분과 이분이 지으신 인간과 이분이 지으신 모든 만물과 이 섭리하시는 모든 움직임 운동 이것들 사이에 우리가 끼어 있습니다.
끼어 있으면서 네가 어느 것을 더 필요로 하며 어느 것을 더 가치로 하며, 어느 것을 네가 구하며, 어느 것으로 네가 연결을 가지며, 어느 것을 가졌고 부요하려느냐? 자유의 길로 걸어라 너희는 말에나 행실이나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인 줄 알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해라 생각도 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존재 가운데에 끼어 있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자는 무궁세계에 그에게 사람이 필요할 것이고, 물질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자는 무궁세계에 물질이 그에게 필요가 될 것이고, 모든 움직임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는 자는 운동과의 관계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여긴 자는 하나님이 필요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이 세상과 다른 것은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살지마는 내세는 세상에서 날 때부터 줄을 때까지 자기에게 필요 있는 인간도 내세에는 그 인간이 그 인간이 필요 되게 못합니다.
필요 되게 해 주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이 허락지 안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으로 필요하게 여긴, 사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 은택을 입어서 사람으로 인하여 살려고 하는 자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쓸모 있어 뒀으니까 이리 저리 이거 하라 하는 자가 이거하고 시장 보라 하니까 제 줄 받아 술값으로 쓰는 것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것저것 하라 했지마는 그것이 남용하고 오용해서 인간 저거끼리 어떻게 했지마는 내세는 그게 금물입니다.
하나님 허락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사람을 제일 자기에게 보배라고 여긴 자는 그 사람이 그 일을 영원히 해 주지 못합니다. 내세에는 털끝만치도 못해 주기 때문에 사람을 자기의 필요의 상대로 여기고 산 자의 일은 세상으로 끝나 버립니다. 요것 똑똑히 아십시오! 세상으로 끝납니다. 자기에게 필요라고 여겨서 산 자는 세상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죽은 다음에 부활 후에는 그게 안됩니다. 모든 이 세상의 이런 운동 저런 운동 운동을 거미가 거미줄 치고 다니듯이 운동을 타고 다녀 이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는 자도 죽였다가 부활하고 난 다음에는 이런 운동이 일체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 세 가지를 상대한 것은 많이 했든지 적게 했든지 이것은 완전히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음 내세에는 이 세상에서 상대했던 이 하나님은 그때도 하나님입니다. 이분을 필요해서 이분을 상대한 것은 이것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유한한 세계에서 상대한 이것이 무한한 세계에 무한토록 상대가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적은 것으로 네가 충성했으니 큰 것으로 맡기겠다 일시에 네가 책임성을 가졌기 때문에 이행했기 때문에 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호 관계점에 살고있는 우리인데 이 네 가지 속에 끼어있는 낸데 이 네 가지 속에 심기어져 있는 낸데 어디다 뿌리를 박고 어느 것으로 자랄 거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인간에게 뿌리박고 인간으로 인간에서 네가 살아나겠느냐 물질이냐? 세상 운동들이냐 하나님이냐? 어디다가 네가 뿌리박고 네가 자라겠느냐? 하는 이것이 금생 문제입니다.
둘째로 이렇게 이분이 금생에는 볼 수 없게 역사 하시고 이루어 놓은 보이는 이것들만 움직이고 있는 이 세상이니까 이것만 보고 사는 사람은 살고 보이지 않는 것만을 상대해서 보이는 것을 이용하면서 사는 사람 있고,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을 보고 사는 사람,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서 상대해서 사는 사람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을 가르쳐서 하나는 신령한 것으로 살고 하나는 이 물질로 산다 그렇게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 가지를 상대해서 사는 것을 벌써 초월했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절대자이신 주재를 상대해서 살면서 보이는 이 세 가지 것들은 보이지 않는 이분을 인하여 이분을 위하여 이분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관계를 가지고 사는 것들이 기독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의 할 일은 어짜든지 일을 가지고도, 물건을 가지고도, 사람을 가지고도, 내 자신을 가지고도, 절대자이신 주재이신 이분을 좋게, 이분을 기쁘게 이분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지혜 있는 일입니다.
이분을 기쁘게 이분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지혜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분으로 더불어 똑똑한 이 관계를 맺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왜? 무궁세계에 나는 그분 한 분에게서 받아 가지고 살고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살고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만 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그 나라에 가서 우리가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여러 수십 면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일면이라도 필요한 것은 괄시를 못합니다. 일면이라도 필요한 것과 자기와 삐끌어지면 자기는 고통입니다. 일면이라도 필요한 것이 자기 속에 이루어졌을 때에 그 날은 기쁩니다. 이걸 우리가 잘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고통이 무엇이냐? 자기에게 필요한 면이 절단이 났을 때에 필요한 면이 마련이 안 됐을 때에 고통입니다. 땅위에 있은 평강과 쾌락이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구비되어질 때에 필요한 것이 점점 견고해질 때에 사람들은 평강과 쾌락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궁세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에게 요긴한 것들이 이분 한 분뿐이십니다. 열 면으로 백 면으로 천 면으로 만 면으로 억만 면이라면 억만 면 전부가 이분 한 분으로 인해서 됩니다. 이분 한 분으로 인해서 끊어지고 잇겨지고 있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가지고 살 이분을 우리가 무궁세계의 관계를 세상에서 맺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은 이거 외에 더 큰일이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건을 상대할 때에 그 사건에서 무궁세계의 이분과 관계점을 지금 맺을라 하는 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을 상대할 때에 모든 물질에서 무궁세계의 이분이 나에게 필요한데 필요한 이분과의 무궁세계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 물질 속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사는 이 상대에서도 무궁세계에 이분과 나와의 관계점에 이 해결 관계점의 결성 이것을 인간 관계에서 찾아서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입니다. 이거 외에 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데에서 어떻게 하면 이분을 기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이분을 존귀케 할까? 왜? 이것이 무궁세계에 이분을 그분을 기쁘기 하는 그것이 무궁세계에 그분이 나를 기쁘게 하는 원인이 되고 내 그분을 존귀케 하는 그것이 무궁세계에 그분이 나를 존귀케 하는 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외 딴 것이 구할 것이 없다 그 말이요.
그러므로 이런 소망을 가진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밤낮 연구하고 또 일할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상관없다 그 말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좋다 그 말이요., 뭐 그거는 안일적이 아니니 그런 생명적이 아니니 뭐 뭐래도 좋다 그 말입니다. 부끄럽지 아니하고 아무래도 좋다 말이요.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어제도 그래 살았고 아래도 그래 살았고 작년에도 그래 살았고 그 일년 전에도 그래 살았고 전과 같이 이전에도 늘 이와 같이 살았지마는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온전히 담대하여 담대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이리되나 저리되나 상관없어 이리 되도 저리 되도 상관없는 담대, 살아도 죽어도 가난해도 병들어도 매장이 되도 매를 맞아도 뭐 어떤 형벌을 받아도 상관 없이 이래도 담대 가지고 세상이 어떻게 하든지 거기서 떨 필요가 없어 내 소망이 딱 이것 때문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사는 것이든지 죽는 것이든지 다만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예수님만이 높이고 주님만이 기쁘시게 하는 것이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고 이것이 성도들의 표준적 세상 방편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둘째로 이런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는 요것을 우리가 단정지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돈을 물질을 만났을 때에 물질 때문에 내가 그거 만나서 물질 속에 사는 게 아니라 물질을 만났을 때에 물질과의 그 관계에서 주와 나와의 관계 그것을 지금 나는 원인해서 물질을 상대하는 것이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그와 나와의 관계를 이래서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고 모든 사건들을 상대하는 것도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인해서 사건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지 그분과 관계가 없다면 살아도 필요 없고 죽어도 필요 없고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것을 확정지어야 합니다.
왜 내가 물질을 접하느냐? 나의 소망이 있다. 왜 내가 인간을 접하느냐? 나의 소망이 있다. 네가 왜 이런 일 저런 움직임을, 움직임을 하고 있느냐? 나의 소망이 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물질을 상대하고 움직이니까 저와 같이 물질 때문에 움직이는 줄 알고 인간을 상대하니까 인간 욕망에서 움직이는 줄 아나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는 땅에 속해서 주님 오실 때에 버림당할 자들이요 거기서 주님과의 관계인 요것만 노려서 요것만을 소망해서 요것 얻을려고 마치 꺼끌꺼끌한 깨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욕망은 깨 속에 기름 뽑을려고 가져가는 것처럼 이 인간 물질 모든 사건 이런 것을 접하는 것이 그 속에서 예수님과 나와 하나님과 나와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나와의 무궁세계의 관계점 요점을 지금 찾아서 이것 수입 볼려고 하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단정지어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고 존귀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존귀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요것을 확정지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존귀케 하는 것 그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뭐이냐? 주님이 이것 때문에 하늘의 부요도 아낌없이 다 내놨고 어떤 천한 데라도 꺼지지 아니하고 다 내 놓으셨고 또 이것 때문에 몸과 생명 아끼지 아니하고 다 버리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만드는 이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이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참사람 만드는 이것입니다.
사람을 참사람 만드는 이것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을 만드는 요것, 요것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고 하나님의 소원이 이것입니다. 살인강도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만드는 이것으로서 하나님은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이거 외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없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구원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성화 시키는 구원시키는 이 일 하나뿐이나 이 일 하나 뿐이니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서만 우리의 가진 것은 다 써야 바로 쓰는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지능이나 우리의 소유나 우리의 가진 것을 어디다가 쓸 것이냐? 우리의 가진 것을 어디다가 쓸 것이냐? 네 많은 권세와 물질을 어디다가 쓸 것이냐? 네 명철한 지혜 화 총명을 어디다가 쓸 것이냐? 네 독특한 언재를 어디다가 쓸 것이냐? 네 모든 총명과 민첩과 민활 이 모든 것을 어디다가 쓸 것이냐? 내가 몇 십 년을 며칠을 살는지 모르지마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시간을 어디다 쓸 것이냐? 우리가 확정지어야겠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제 무궁세계에 필요한 그분 그분이 소원하시는 것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 그분이 필요로 여기시는 것 그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 이것을 내가 세상에서 하므로 무궁세계에 그분이 나를 기쁘게 하는 원인이 되고 그를 그가 나를 존귀케 하는 원인이 되고 그가 나를 부요케 하는 원인이 되고 그가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원인이 되는 이것이기 때문에 이일에 자기는 있는 소유를 다 기울이는 이것이 지혜 있는 일입니다.
이 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정말로 할 일이 없습니다. 암만 해 봤자 어두운 세상에서는 오판하는 세상이니까 천한 것은 귀하다 귀한 것은 천하다. 죽는 거는 산다. 사는 거는 죽는다 하는 세상에서야 인정받지마는 제가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간부터 헛일입니다. 헛일이요 아무리 똑똑하고 천하를 움직여도 헛일입니다.
천지는 변해도 획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어디다가 쓸 것인가 확정지어야 하겠고 또 하나 더 확정지을 것은 그러면 내가 이렇게 귀중히 쓸 것을 마련하는 일과 쓸 일과 둘을 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나는 있는 것을 이렇게 바로 쓰는 것만이 나 할 일이요 있는 것을 바로 쓸 때에 씀으로 없어지는 것이나 써서 없어졌는데 쓸 것을 더 많이 주는 것이나 쓸 것을 대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확정지읍시다. 쓸 것을 대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쓸 것을 마련하는 데는 머리 쓸 필요 없습니다. 구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씨와 양식을 준다고 했소. 쓸 것은 우리가 염려할 것도 없고 구할 것도 없고 우리 할 일이 아닙니다.
쓸 수 있는 것이 있는 이것을 잘 쓰는 것만이 우리 할 일입니다. 쓸 수 있는 것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일이냐? 이미 마련 되어있는 것을 쓰는 것이 우리 일이냐? 마련하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마련되는 것을 쓰는 것만 우리 일이요.
둘째, 땅위에서 물질 사건 인간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데 어느 것을 어느 것을 소망으로 삼아서 어디다가 쓸 것이냐 어디다가 쓸 것이냐 무엇을 위해서 쓸 것이냐 어디다가 투자할 것이냐? 영원한 주재자이신 만 왕의 왕이신 이분과의 관계만을 위해서 투자할 것으로 단정을 두 번째 지어야 합니다.
셋째로는 네 가지 속에 뿌리박고 있는 우리들인데 어느 뿌리를 자르고 어느 뿌리를 성장해서 어디 속해서 어디 뿌리박아 어느 거와 관계를 갖느냐 하는 것을 단정지읍시다.
우리의 할 일은 이 일을 인해서 쓰는 것입니다. 있는 건강을 쓰는 것이요 있는 생명을 없애서 죽는 것이요, 높은 것을 낮아지는 것이요 있는 물질을 투자하는 것이요 우리는 쓰는 주장입니다. 쓸 때에 주님이 필요하면 더 많게도 그것으로 끝나게 하십니다.
이러므로 쓰는 데에 전문이 되지 안 하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쓰는 것이 우리의 전문이요 우리의 전공이요 쓰는 것이 우리의 전공이요 모으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쓰는 것이 전공이요 제가 아무리 건강하기를 원해도 건강 안 옵니다. 아무리 부자 될라해도 부자 안됩니다. 역사에 부자 된 자는 어찌된 줄 모르는 자가 부자 됐습니다. 건강의 필요성을 하나도 느끼지 안하고 존귀성을 느끼지 안 한자가 건강 가졌습니다. 건강의 필요성을 느껴서 애쓰는 자가 건강 가지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쓰는 일을 단정짓고 여기에 능숙해야 되겠고 쓰는 데는 이리저리 남용하지 말고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위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요 한군데만 전용, 인간을 구원하는 그 목적이 무엇인데 내가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편이나 인간 구원을 욕망 하여 진리대로 내가 살고 인간 구원은 어떤데 영원한 주재와 나와의 관계점이 이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치 안한 것이 나에게 행치 안한 것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단정짓고 이 넷 속에 살면서 어느 뿌리를 잘라서 어느 뿌리를 견고케 해서 세상을 떠나 거기에 떠났지마는 무궁세계의 하나님과의 딴딴한 뿌리줄기가 맺혀있고 뻗쳐있고 장성했기 때문에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것같이 송장 구덩이와 같은 그 해골 굴에서 목욕 쓱 하고 신선한 공기 세계로 옮겨가는 것처럼 세상을 두고 옮겨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독교는 논리의 도면서 실천의 도입니다. 논리를 달고 실천을 안한 자는 모릅니다. 실천을 해 봤을 때에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