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5 01:06
성도의 목적과 소망
1989. 1. 28. 토새.
본문: 요일 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난 뒤에 새김질하고 또 연구하면서 다른 새길로 가려고 하지 말고 연구해서 깨달아서 가르친 그대로 그 자꾸 그 길로만 자꾸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 무슨 말인고 하니, 산을 올라가는 사람이 어느 정도에 올라가 가지고 그 옆으로 돌아가면서 가면 그는 뭐 얼마든지 돌아가면 있습니다. 그 높이에서, 천 미터 높이에서는 천 미터 높이의 산을 뺑뺑뺑 암만 돌아가도 돌아가면 천 일 미터는 올라가지 못하고 천 미터에서 보는 것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수많은 것을 말을 하지마는 내나 그거라.
그러니까, 올라가는 천 미터에서 위로 또 십 미터를 더 올라가면 또 새것이 발견됩니다. 또 천 미터를 더 올라가면 새 것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해서 발견되면 나중에 그 위에 밑에 있는 그런 것은 보면 다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때에는 그런 것을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이것도 말하고 저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보이는 것보다도 이제 깨닫지 못하던 진리를 한 진리씩 발견해서 나가는 것은 마치 산을 꿰뚫어서 올라가는 거와 같은 그런 격입니다.
그것만 배워 놓으면 자꾸 거게서 옆으로 퍼치면 뭐 한 깨달음에서 설교는 열도 백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자꾸 이렇게 깨달음을 그것을 자기가 잡고 그 깨달음에서, 그와 같은 수준에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알게 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의 나가는 그 나감에서 자꾸 그렇게 절정을 향해서 깨달아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무슨 말인지 뭐 못 알아듣는 분은 못 알아들을 것입니다.
여게 '보라 보라'. 이제 그 밑의 것을 지금 소개하면서 말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아버지께서' 말은 나를 내신 그분께서 그말입니다. 아버지라 말은 내가 그에게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겨졌는데, 우리가 나왔는데 우리가 언제 생겨졌느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됐느냐? 제가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전에 벌써 앞에 됐는데 앞에 된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이제 오래 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이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그런 이름이 나오게 됐습니다. 그것은, 이름이 나오게 된 것도 하나님이 계시하신 이 성경 말씀에서 우리에게 이런 이런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실상으로 나오기는 우리가 이제 중생됐을 때 이제 우리 주관으로서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창조하신, 창조된,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출생되는,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는 그때가 창조되는 때입니다. 그러면 창조되는 그때부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니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기 전 창조 전 하나님의 예정에서 예정적 자녀가 우리가 된 것입니다. 예정적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예정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예정 전에, 예정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적 자녀가 됐습니다. 이거 다 우리가 있기 전이오. 선택적 자녀가 됐습니다. 선택적 자녀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목적적 자녀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적 자녀가 되기 전에 그리스도적으로 우리가 자녀가 됐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긴 지 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이런 역사 저런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생기기 전에, 모든 존재가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의 예정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리스도는 영원 전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 자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 자존하신 하나님이신데 자존하신 이 하나님이 자존하신 그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자존하여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리스도로 자존하실 때에 사랑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영원 전 하나님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존재하기 시작은 그리스도가 존재한 그후부터가 우리가 존재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존재한 것인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차차 역사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의 목적 정하신 것이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목적을 정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택이라 하는 것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또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모든 존재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정이라 하는 것은 크고 작고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설계라 말이요 하나님의 계획이라 말이오. 하나님의 계획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러고 난 다음에 계획하신 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저 창조하신 그때 우리의 존재라 하는 것은 그때에 비로소 존재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보라 아버지께서' 나를, 내가 그에게서 나왔는데 내가 나온 그에게서, 내가 생겨진 그에게서, 사람도 부정모혈(夫精母血)로 이렇게 나오지마는 어머니는 잘 양육한 역할을 했고 우리가 나온 종자는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게 아버지라고 그렇게 칭한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이런 일 저런 일 해 주셨다 말 아니오. 사랑으로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해 주지고 우리에게 좋고 필요한 것 그런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말이 아니고 사랑 자체를 우리에게 줬다 말입니다.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어떠한 사랑으로라는 말과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하나님의 사랑 자체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자랑 자체가 뭐인가?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뭐인가?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바로 하나님 자체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준 것은 언제부터 시발됐는가?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때부터 시발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 하셨고 선택한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창조하셨고 이랬습니다.
불교니 이런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셔 가지고 창조하시는 그 창조된 그후부터 비로소 모든 피조물은 생겼습니다. 영계 것도 생겼고 물질계의 것도 생겼고 그후부터 생겼습니다. 우리는 모든 존재가 생기기 전 자존하신 완전하신 하나님,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생겨졌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 이랬는데 그거는 그 후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된 것은 있은 지 후 된 게 아니라 있은 지 전에, 하나님이 당신이 의지 속에서 이렇게 예정하시기 전 하나님 당신의 존재하신 거게서부터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그러면 이 사랑에 대해서 에베소 3장 17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이 사랑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초윌한 사랑이라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이 사랑을 암만 연구해 봤자 다 모른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사랑도 알려 해도 우리 지식이 도달하지 못하는 우리 지식을 무한히 초월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에 지금 우리가 뿌리가 박혀 가지고 거게서 자라 나오고 있으니까 이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한 것을 날마다 우리가 점점 연구하고 알아가면서 우리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 이것이 신구약 성경을 읽음으로 또 알아지고 자기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아는 것으로만 자라지는 게 아니라 알고 믿으면 왈칼왈칵 자라집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자기가 그대로 실행을 해 보면 굉장하게 이 사랑을 알아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을 알아가면 이 사람들은 우주가 크고 넓다고 말하지마는 우주 이까짓 거는 조그만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주는 자기 한 손에 거머쥐고 뒤적거리면서 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 안에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을 우리 구하는 구함과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으로 우리에게 충만케 하신다 그렇게 말씀했어. 하나님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충만이라면 충만이라는 것은 가득 찬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도 가득 찼고, 사랑도 가득 찼고, 지혜도 가득 찼고, 권위도 가득 찼고, 지식도 가득 찼고, 하나님의 충만은 말할 수 없는 그만 모든 면을 한 말로 말하면 완전인데, 사랑도 완전이요, 지혜도 능력도 완전이요 계획도 완전이요, 역사도 완전인데 그 완전으로 우리를 채워서 완전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해져라, 이래서 하나님의 온전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질 수 있다는 이 말을 지금으로부터 한 삼십여 년 전에는 말을 못 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 참람되다 해 가지고 세계에 조직신학에서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된다는 그런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것을 말을 했다가 혼이 났습니다.
그말은 우리가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고 다만 어떤 교만한 자라도 네가 하나님처럼 온전하냐 하는 데서 인간을 하나님의 권위와 존귀함에 복종을 시키는 말이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가 있느냐 이래 가지고 그 말 한 마디 했다가 혼이 났습니다. 말 발표 못 해요.
제가 OO교파에 있다가 거게서 제명되어 나은 것이 그것이 나는 하나님의 뜻이요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왜? 내가 거게 있을 때에는 깨달음을 말하려 하면 그만 우 달려들어 가지고 이것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때문에 말을 못 했어. 못 했는데 거게서 나오고 난 다음에는 이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깨달은 걸 말을 할 수 있으나 말을 하는데 당장에 그만 위에서 들이 덮쳐서 꼼짝 못하고 숨막혀서 죽을 만한 그런 것은 말하지 않고 차차 말하고, 뭐 이단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렇게 억눌리지는 아니할 수 있는 그런 것만 하나씩 둘씩 차차 차차 이렇게 말을 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게 있었으면 내가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을 이것을 말 못 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은전한 자가 된다. 하나님과 꼭 같은 자가 된다 하는 이런 말을 제가 말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한 이십 년 됐을까. 아제 우리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꼭 같은 온전한 자가 된다는 그런 말을 인제 보통 예사로 알고 다 그래 씁니다. 다른 교계에 가 가치고, 다른 데 가 가지고, 다른 세계 어떤 데 가 가지고 그런 말 하면 대이단자라고 범성죄라고 크게 정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서는 이것을 하도 내가 많이 말을 해 놨기 때문에 이런 말을 예사로 하는 것이, 대외에 어떤 마찰과 어떤 정죄와 어떤 이단이라는 평가가 나을 것을 아직까지 만나 보지도 못하고 했는데 내가 죽으면, 그것이 모든 후배들에게 마찰이 될 것입니다. 되는데 저희들이 그 마찰되는 것을 다 능가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능가하게 해 주시지마는 능가하려면 지금부터 조심해서, 온 세계의 지식을 발 아래 밟아야 그 지식에게 미혹을 당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자기 위에 있는 어떤 지식이 있으면 반드시 그 지식에게는 굴복을 당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래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이 사랑을 줬는데 이 사랑은 깊이가 아주 무한하고, 무한한데, 길이가 무한하다 말은 앞으로 미래로 영원한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영원한 것을 길이로 말하는 것이고, 넓이라 말하는 것은 이것은 모든 존재에게까지 충만히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깊이가 무한합니다. 그 깊이가 무한한데 그 깊이가 얼마나 깊습니까? 그 깊이를 지난밤에 제가 말했는데 그 깊이가 얼마나 깊습니까? OOO조사님? 그 깊이가 얼마나 깊습니까? 천 길이나 됩니까 만 길이나 됩니까? 무한한데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그리스도로 주신 것이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이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이 라는 뜻인데, 그리스도라는 것은 아무데도 해석을 해놓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인 그 신정 국가를 하나님이 통치할 때에 비로소 기름 부음을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고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고 왕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그 기름 부은 그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이라 하는 것을 신정 국가에서 우리들이 알게 됐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줬다는 것은 제사장직을 우리에게 줬다는 말이요 선지직을 줬다 말이요 왕직을 줬다 말인데, 그 많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고 하나님의 왕이 되기까지 우리를 길러서 온전케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어떠한 사랑' 하는 것은, '어떠한 사랑' 하는 것은 그 사랑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사랑인데 그 사람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높이는 어데까지? 높이는 하나님에게 도달해. 하나님께 도달해. 깊이는 아데까지? 영원 전, 영원 전 자존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어. 그리스도를 주셨다 말은 우리가 제사장되고 선지되고 왕된 그 복을 줘서 우리가 제사장 선지 왕된다 말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은 어떤게 제사장되는 것이냐? 창조주 자존자와 영계와 물질계 모든 피조물과 자존자의 그 관계를 조화를 붙이는 그 중매쟁이가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차 제사장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시요 우리의 제사장이십니다.
이래서, 우리가 심판받을 때에 어떤 심판을 받느냐? 우리가 심판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는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9절에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이 뭐인가? 그거는 제사장 선지 왕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그 사이에 화친을 일으키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화평을 일으키는, 화친을 일으키는 그 실력이 네가 얼마나 되느냐? 그러면 그 실력을 우리가 세상에서 지금 육성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은 전부 하나님의 뜻으로 나오는데, 하나님의 충만은 하나님의 뜻을 내놓을 때에 그 뜻을 누구든지 차지한 사람은 하나님의 충만을 차지한 사람이요, 그 뜻을 차지한다는 것은 믿음인데,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실행함으로써,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충만이 내게 옵니다. 그러면 열 순종에서 열 충만이 오고 백 순종에서 백 충만이 오고 천 순종에서 천 충만이 오기 때문에 그 순종이라 하는 것은 같은 자리서 순종하는 거는 항상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른 각각 현실을 주셔 가지고 요 현실 순종 저 현실 수종 이래 가지고 우리를 '모든 것이 구비하고 온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지난밤에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현실을 주시는 것이 우리를 이렇게 완전자를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경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 현실 주는 것은 여러 실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현실을 즉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편식하면 병신되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골고루 먹어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현실을 주시는 것은 여러가지 현실에서 여러가지 뭘 먹게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현실 주십니까? 여러가지 현실에서 뭣을 먹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현실을 주십니까? OOO선생? 여러가지 진리, 영감, 예수님의 피, 영생 이 여러가지를 먹도록, 이 현실에 먹을 수 있도록,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자라는 것은 뭘로 자라느냐? 진리로 자라서 진리로 충만합니다. 우리는 진리로 자라서 진리로 충만하고, 영감으로 자라서 영감으로 충만하고, 무죄로 자라서, 죄를 이기는 무죄로 자라서 충만하고, 의로 자라 충만하고,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동행으로 자 라서 충만하고, 하나님을 향한 영생으로 자라서 충만합니다.
이거는 세상이 모릅니다. 뭐 불교인들이 불경을 가지고 말하는데 그들은 피조물이 된 후에사 됐기 때문에 이 도리를 알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내가 제천 남천교회 가니까 남천교회 최기주 집사님의 오빠가 그 사람들이 평양에 제일 갑부인데, 평양에 제일 갑부가 그 사람들인데 맏아들이 자기가 그 모든 많은 재산을 다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고 불교에 바쳐 버리고 불교인이 됐는데, 그분이 전국에 참선으로서는 제일 으뜸이 가는 참선자입니다.
으뜸 가는 참선자인데, 그러니까, 참선이라는 것은 그 불교에도 껍데기가 아니고 자기네들이 말하는 불(佛)로 더불어 직접 밀졉한 친교를 가지는 것이 그것이 참선자인데, 그 참선자하고 내가 두 번인가 만났습니다. 거기 갔다가. 내가 간다 하니까 거게 와 가지고 그래 내가 불교를 슬슬 말합니다. 말하면 자기가 불교를 실컷 최고의 불교를 말합니다. 최고의 불교를 말하면 나는 그 사람을 애껴서 마지막으로 내가 '이 면을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하면 자기는 벌써 포위돼 싸였습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은 내가 말하는 그 속에 한 구석에 지내지 못하니까 또 그래 내가 또 말하면 그만 폭 쌓여 버리고 이라니까 그만 그 뒤에는 말 안 해. '좀 말 좀 하이소' 말 안 할라 해.
이래도 그 속에 그분이 진실하기 때문에 박혔습니다. 이러니까 한국에 제일되는 그 참선가지마는, 참선가면 기독교라 말하면 신령한 사람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원청 전국에서 유명하니까 당장에 개종은 하려 하면 그 밑에 무리들이 굉장히 데모가 일어날 것이고 이러니까 그짓을 못 하고 속으로 믿었습니다.
믿으면서 마지막에 죽을 때에 자기 생질이, 자기 이질이 여기 우리 교회 있었는데 OOO조사님입니다. 있었는데 그 집에 와 가지고 있으면서 '나 여기 왔다 말을 아무도 말하지 말고, 묻거든 말하지 말아라.' 그래 예수님을 독실하게 믿으면서 '내가 죽거든 나를 여기 우리 김해 묘지에 장사 해 주면서 내가 죽었을 때에 아무데도 연락을 하지 말아라. 연락을 하면 나를 기독교 장례로서 성도들 묻히는 묘지에 가지 못하게 할 터이니까 아무데도 기별하지 말아라.' 기별을 못 하게 해서 안 했었어. 이러니까 평안히 장례했지 만일 그래 기별했었으면 불교인이 전부 뭉쳐 와 가지고 두터메고 갈 모양이니까 뭐 몇십 명이 달려들어도 되지 않아요. 그 불교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교의 대가리인데? 그래서 장례해서 못 하게 해서 그랬다 이러니까 그분들이 뒤에 와 가지고 이거는 완전히 불교에 배신자다 이래 가지고, 그래 배신자라 해 가지고 마음에 분함을 품어 가지고 그 사이를 끊어서 그분이 우리 김해 묘지에 와서 묻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근원이 얼마나 깊으며 또 소망이 얼마나 길며,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은 넓이도 무한하고 깊이도 무한하고 높이도 무한하고 길이도 무한한 것을 점점 자기가 알아가는 가운데서 우리가 자라가야 되는데, 아는 것은 당신이 선포해 놓으신 이 약속의 말씀을 지켜보면 알아요. 실행해 보면 알아요.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한 번 두 번 자꾸 실행해 보는 사람은 실행해 보니까 사실이거든. 실행해 보면 사실이고 사실이니까 이제 몇 번 실행해 봐서 실행을 시작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그런 것에게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왜? 참이, 진짜가 거기 있기 때문에.
이래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첫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데서 나왔고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있다는 요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러면 보이지 않는 그것이 세계니까 그저 한 상상입니까? 허무한 것입니까? 그게 진실하고 진실하고 참이고 실존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또 실존이라고 말하면 자기네들이 눈에 보이는 그보다도 더 속에 알맹이 있는 그 실존을 가 리켜서 철학이라, 그러면 이제 뭐 한 말로 철학이라, 나는 무슨 박사 학위를 발는데 그 박사 학위에 무슨 이는 철학 박사 신학 박사 이런 줄로 이렇게 알았는데 나는 그렇계 알았는데 OOO목사가 있다가 '요새는 모두 다 훌륭한 박사들은 철학 박사로 이름이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 그래 내가 있다 '그러면, 이름이 같으면 이 사람은 무슨 과로 철학 박사 됐다는 그런 과가 있느냐? 과도 없이 그만 철학 박사냐?' 그래 내가 이상해서 파고 들어가니까 그 과는 있대요.
이는 신학과의 철학 박사라, 이는 또 문학과의 철학 박사라, 이는 의학과의 철학 박사라, 이런데 이제 철학이라 말은 눈에 보이는 그 속에 보이지 않는 그 이면의 진실함을 말해서 철학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신학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일반적으로 돼 가지고 있는 일반이 아닌 그 속에 깊숙한 데에 그 뿌럭지를 말해서 철학이라 이러니까 그만 높이는 말로 철학 박사라 다 이렇게 말한답니다. 따라오기는 잘 따라 오고 따기는 잘 땁니다.
이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사,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어떠한 사랑을 주사' 요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을 주사' 하는 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런 일 저런 일 했다 말 아니오. 사랑하는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다 말 아니오.
사랑 자체를 줬다 말입니다.
사랑 자체를 줬다는 말인데 이 사랑 자체는 무엇입니까? 사랑 자체는 곧 하나님이시요, 성부시요, 성자시요, 성령이시요, 그리스도시요, 말씀이시오. 사랑을 줬다 말은 하나님 자체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거 이것은 그렇게 알기 쉬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이라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 말만 한다는 그말이 아니고 이래 가지고 저 깊숙이 예정 전, 예택 전, 하나님의 목적 전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자존하신 분이 자존함에부터 우리를 사랑하셔서 역사하신 거게서부터 생겨진 것이 이제는 예택에 나타났고, 예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녀가 이제 예정에 나타났고, 예정에 나타난 자녀가 창조에 나타났고 창조에 나타난 자녀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자녀로 나타났고, 대속의 자녀로 나타났다 말은 법적으로 나타났다 말이오. 대속의 자녀로 나타난 것이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하기까지 나타났고, 중생하고 난 다음에도 하나님의 자녀라 말이 없어요. 중생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이 말이 나타난 것은 그러면 몇 계단이나, 몇 단계나 거쳐 와 가지고 나타났습니까? 몇 단계나? 여러 단계 그거는 세어 보면 알겠습니다. 영원 자존함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거게서, 자존하신 그리스도, 자존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목적에서, 또 예택에서, 예정에서, 창조에서, 또 사활의 대속에서, 또 이 네 가지로 중생해서 예수 믿는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서 나왔다 그거요.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우리가 그러하도다' 우리가 그러하다 말은 곧 이렇게 무한한, 시간으로 말하면 영원 전이오. 우리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됐습니다. 영원 전이오. 창조 후가 아니라. 거게서 하나님의 자녀인데, 이제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 하기까지, 예수 믿어서, 예수 믿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우리 주관이 알기까지 이렇게 돼 나오는 데는 무한한 순서를 거쳐 가지고 나왔는데 그 무한한 순서가 다 뭐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말이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그러면 사랑은, 하나님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사랑을 주셨는데 사랑이 우리에게 무슨 이런 작용 저런 작용, 이런 활동 저런 활동, 이런 공작 저런 공작을 했다는 게 아니고 사랑 자체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사랑 자체는 뭐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입니까? 사랑 자체는 뭣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요? OOO목사님?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라.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셨어. 알겠습니까? 이것을 뭐, 여러분들이 다른 길을 뚫으면 안 돼. 이제 배운 여게서 자꾸 요대로만 자꾸 파고 들어가면 무한해.
하나님에게 딱 도달을 해요. 이러니까 조금 알고 난 다음에는 더 자꾸 산만당으로 기어올라 가려고 하지 않고 옆으로 이것만 알아. 그거는, OOO목사님이 말하기를, OO신학교 이사장이요 교장이요 그런데, 부산에 있던, OO신학교가 이제 OOO목사님에게로 가 버렸어요. 이런데, 그분이 말하기를 '나는 백 목사님 설교 하나 들으면 설교 서른도 더 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만치 발견시켜서 끌어다 올려 놓으면 거게서 옆으로 가 보면 서른이 아니라 마흔도 더 하고 쉰도 더하지요. 그만한 수준에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걸 하면서 나중에 잘못하면 내가, 이렇게 하니까 나도 지금, 자꾸 이렇게 내가 하니 이거 물론 자기가 좋지마는 '이래 하니까 이것이 내가 장기고 이것은 내가 발견하기 때문에, 발견한 것이니' 해 가지고 그만 자기가 교만해져 가지고 배울 것 없이, 네가 배우지 않고 나가는 것은 옆으로 산모퉁이로 빗장 질러서 나가니까 네가 평생 말해도 남지마는 거게서 한 층 위로 올라가는 거, 발견되지 아니한 것을 한 층, 한 문을 더 들어가는 그게 문제다. 그게 더 문제라.
그러기 때문에 그문으로 자꾸 들어가서 위로 올라가도록 노력을 해라 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도다'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그러므로가 뭐입니까? 이제 뭐 이걸 말하려면 한정 없지마는 뿌럭지가 그렇게 깊어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 된 것이, 제가 예수 믿는 사람되는 것이 사람들이 권면하니까 예수 믿기 시작하는 줄 압니까? 아니오. 예수 믿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이 됐습니까? 어데서부터 시작이 됐어, 예수 믿는 거는 어데서부터 시작이 됐어? 예? 어데? 영원 전. 선택에서부터 시작 됐습니까? 아니오. 선택 전.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 목적에서부터 시작했습니까? 그리스도의 그 존재 후로부터 우리가 생겨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 이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이렇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모릅니다. 제가 예수 믿게 된 것은 뭐 고거 강퍅하고 예수를 안 믿으니까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가지고 권면하다가 안 되면 이런 어려움의 고비에서 인제 그 사람을 또 마음에 강퍅을 없애 버리다가, 또 그래도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믿지 않으면 세상에 절망이 되도록 생명을 딱 끊게 되면 이제는 죽을 지경이니까, 죽으니까, '나는 세상에 살 희망이 없다' 살 소망이 없기까지 만드니까 이제 세상 걸 다 내놓으니까 예수 믿게 만든다 그말이오. 그래도 또 안 믿습니다. 이래 가지고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뭐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셔서 환경 주위를 이래 가지고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인데 강퍅한 자는 늙어서 다 죽어갈 때 예수 믿어.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예수 믿는 그게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이래서,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이런 뿌럭지에서부터 예수 믿는 사람이 돼지는 것이니까 세상이 알 리가 없어. 믿는 사람도 제가 내가 믿고 싶으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말고, 또 내가 도를 들어 가지고 내가 믿기로 작정해 믿는 줄로 알지마는 택한 자는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고 택하지 아니한 자는 암만 믿어도 마지막에 죽을 때에 배반하고 죽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우주가 하나님의 자녀 위해서 창조되었고 모든 예정이 하나님의 자녀 위해서 예정됐는데, 이렇게 비싸고 뿌럭지 큰 이 하나님의 자녀가 껍데기 제 주관으로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고 싶으면 안 믿는 거게 달린 게 아니라 그거요. 그것은 하나님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전도도 하고 또 이런 사건 저런 사건도 해 가지고 그렇게 차차차 믿구로 하는 것이지요. 이러니까 이 사실을 세상이 알 리가 없어.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우리도 알지 못하고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하나님도 알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우주를 창조했지마는 엿새 동안에 창조한 거, 미국은 크다 뭐 동양은 크다 서양은 어떻다, 지구 땅덩어리가 크다. 또 화성이니 토성이니. 항성이니 그런 것이 크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지은 그거는 큰 줄 알지마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심은 모른다 그말이오.
그래서, 모세는 시편 90편 11절 이하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할 자가 있겠느냐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두려움이 나타나면 어찌 됩니까? 뇌성벽력만 해도, 그저 뇌성벽력만 한 아마 십 분만 계속해도 사람들 가슴이 간이 딱 오그라지는 것이 거게 무슨 명령이라도 하면 복종 안 할 자 없을 것입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조그만한 일이오.
이제 하나님께서, 좀 있으면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이 우주가 전부 불로 화해질 것이고 우리가 보이는 저 하늘이 저거 다 떠나가고 없어져 버리고 지금 있는 우주 이 형체가 다 없어지고 불에 타서 녹아질 터이니까 그때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때 얼마나, 세상에 그까짓 거 뭐 전쟁이 나니 뭐 지진이 나는 그까짓 거야 뭐이요? 이렇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들이 그 어려움에 그 불심판의 해를 하나도 받지 않고 하려고 하면 우리가 오늘 뭘로 준비해야 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준비해야 됩니다. 거룩한 행실이라 말은 신구약 성경을 놓고 또박또박 하나씩 한 진리 한 진리 요렇게 딱 대조하면서 요 말씀과 나는 틀렸다 요거 고치고, 조 말씀과 틀렸다 요거 고치고, 현실 만날 때마다 요 현실에는 요래야 되느냐 조래야 되느냐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렇게 또박또박 하나씩, 그 현실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내가 행해서 내가 자라가는 것이라. 그게 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지금 자라가는 것이라, 자녀가 자라가면, 하나님의 자녀가 자라가면 하나님의 자녀는 몇 가지로 자라갑니까? 손가락으로? 네 가지로 자라가는데 하나님의 자녀는 몇 가지 뭉텅이로, 몇 가지 덩어리로, 몇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손가락으로? 여기 모른다. 네 가지로 되어 있는 게 하나님의 자녀라. 네 가지로 되어 있는 게 하나님의 자녀. 자녀인데 진리를 태울 불이 있습니까? 영감을 태울 불이 있소? 그러면 죄를 완전히 이기는 의를 태울 불이 있습니까? 없어. 하나님과 또 동거 동행하고 상호 내주하는데 뭐이 태워? 하나님이 지으신 것인데.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한 행실로 지금 준비해야 됩니다. 요 생활로.
그러기 때문에, 사람 보면 '저거 등신 같은 거. 그럴 때는 주먹을 내밀면 되는데 주먹을 내밀지도 못하지. 또 이제 저거는 예배당을 다 송트리, 저거 이름으로 있는 것도 했기고 말도 하지 못한다.' 그것도, 그것도 말 못 해. 왜? 우리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뭣 문제입니까?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제일 가치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 O조사? 더듬어 가지고 언제 그 일 하겠노? O조사? 네 자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라.
우리가 전가치를 하나님의 뜻에다 둔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내가 죽어도 하나님의 뜻에 죽어야 되면 죽고 살아야 되면 살고, 죽고 사는 그런 거는 피동적이요 내 목적의 근본은 하나님의 뜻이라.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참으라면 참아야 되고 가라면 가야 되고 견디라면 견뎌야 돼고 주라면 줘야 되고 또 아무리 죽인다 해도 아무리 죽음 앞에서라도 해야 될 말은 해야 되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요것이 우리의 목적이라 그말이오.
그래서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약속으로 자녀가 됐고, 또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이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하나님은 저거 아버지라 하고 저거들은 하나님의 자녀라 한다 이렇게 또 하고 있다 말이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나타나지 않았으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계약으로 돼 있고 또 말로 이와 같이, 이름으로 이와같이 입으로 하고 이래 있지마는 '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이제 주님이 나타내심이 되면, 그날과 그시는 알지 못하는데 아버지께서 이제 구름 타고 오시도록 이렇게 하시면,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그때가 뭐이냐 하면 나타내시는 때라. 아버지가 나타내시는 때라. 나타날 때.
'나타내시면 우리가 그와 갈을 줄을 아나니' 그와 같을 줄 알다니? 그와 같을 줄 안다 말은 누구와 같을 줄이라 말이오. 거기? OOO 목사님? 예수와 갚을 줄 예수님이 누구와 같은데? 예수님은 누구와 같은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꼭 같애.
하나님이라. 하나님이요 사람이시라. 이랬는데, 그와 갈을 줄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데 하나님이신, 신성과 사람인 인성과 신인양성이 일위가 되기까지 딱 들어붙어서 하나가 됐어.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인 내와 일위가 되기까지는 하나가 안 되지마는 뭣까지는 하나가 돼 가지고 있어요? OOO? 일행. 하나님과 나와의 생각이나 뜻이나 마음이나 계획이나 평가나 소원이나 모든 성격이나 취미나 이런 것이 하나님과 나와 꼭 동행하기까지는 된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가 하면 나도 가 하고 하나님이 나 하면 나도 나 하고 이렇게 그와 같을 줄을 알기 때문에, 같을 줄을 아나니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그의 참 모양이 이제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이제 이 계약으로 되어 있는 것이 주님이 지금 계약으로 나타나신 이분이 실상으로 나타나셔서 역사함 같이 우리도 계약으로 된 하나님의 자녀가 실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그말이오. 구름 타고 오시면 그때 실상으로 나타나요.
'아나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이제 주님과 같은 자가 돼야 주님과 같은 그 직위에서 그 직책을 감당하지 우리가 실력 없는 지위는 가지면 그것이 자기에 큰 감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오늘에 우리가 목적이 뭐이냐?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가 온전해지는 이것이 지금 우리의 할 일이요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온전이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뭘로 하나님의 온전이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온전이 우리에게 몇 가지로 나타났습니까? 또 모르네. 네 가지로 나타났어, 네 가지. 네 가지인데 또 세밀하게 말하면 여섯 가지라.
이렇게 나타나셨으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오? 하나님이 말하기를 나는 진리라. 하나님은 영감이시오. 하나님은 의이 시오.
이런데, 우리를 이마개 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우리가 주의 깨끗하심같이 이래 깨끗해져야 되는데 깨끗해진 건 뭐 때를 씻어도 물론 때도 없어야 되겠지마는 그게 아니고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되고, 또 긱식적으로, 지식적으로 깨끗한 거는 잘못된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 온전한 지식이 깨끗한 지식이오. 온전한 지혜가 깨끗한 지혜요. 온전한 사랑이 깨끗한 사랑이오. 온전한 소망이 깨끗한 소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쁨도 세상 기쁨은 다 온전치 못한 기쁨이라. 그까짓 놈의 기쁨은 조금만 변해지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뭐 죽고 살고 부부간의 사랑 그것도 좋은 건 줄 이래 알지마는 그거는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사랑마다 마지막에는 뭘로 변해지고 마요? 뭘로 변해지지요? 집사님 뭘로 변해져? 부부 사랑이 뭘로 변해져? 눈물로 변해져, 눈물로. 눈물로 변해지기 전에 아예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꿔 가져요, 얼른. 바꿔 가져야 영원히 가도 없어지지 않지.
그리스도 사랑으로 바꿔 가지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
이러기 때문에,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를 깨끗게 한다. 그러면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은 뭣만 깨끗하요? 진리 외에는 깨끗한 게 하나도 없어. 세상에 있는 것은 깨끗한 게 있습니까? 세상에 도덕에 깨끗한 게? 도덕에도 깨끗한 게 없고 사상도 깨끗한 게 없고 주의도 깨끗한 게 하나도 없어. 우습지. 모두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뭐 형사가 묶어 가지고 가고 또 검사가 조사를 받고 수사를 하고 또 청문회에서 모르고 하는데 그거 다 깨끗지 못하다, 이거 더럽다 이래 하는데 이제 이 깨끗을 보고 보면 다 조금 우스운 일이고 그거는 참 그저 인간들이 하는 일이지 참 깨끗에는 도달을 못해요, 이러니까 이 깨끗이 되는 것은 우리가 진리로만 깨끗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로 깨끗하게 되는 데는 진리 하나 가지면 그만치 깨끗하고. 백을 가지면 그만치 깨끗하는데, 하나 예를 들어서 진리로 깨끗해지려고 하면 진리가 하나씩 둘씩 해서 진리가 많은 사람 많이 깨끗한 사람이고 진리가 없는 사람은 깨끗함이 하나도 없는데, 진리로 깨끗해지려고 하면 언제 깨끗해집니까? 현실에서 깨끗해져. 현실에서 어떻게 진리로, 깨끗해지는가? 현실에는, 자기 현실에는 하나님의 뜻인 진리도 있고 마귀 생각도 있고 돈 욕심 생각도 있고 이 현실에는 뭐 천 가지 만 가지가 우리에게 우겨 들어옵니다. 우겨 들어와 가지고 하나인 하나님의 뜻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때에 그럴 때에 어떤 사람은 그 현실에서 돈을 가치로 삼아 가지고 돈 표준으로 모든 걸 비판하고 평가하고 행합니다.
어떤 자는 내가 이 정권을 잡나 안 잡나! 말이야 이 말이 되든지 말든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지 말든지,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에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에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업에만 이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현실에서 뭘 하고 있어야? 뭘 하나를 지금 가치로 삼아 가지고 노력을 합니까? 뭐 하나를 가치로 삼아 노력하고 있어요? OOO장로님? 하나님의 뜻 요것만 가치로 삼아서 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니까 그 물질 표준의 수지에는 맞지 않고 권세 지위 모든 감정 표준에 맞지 않고, 그런 걸 다 초월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가, 물질이 손해가도 유익되도, 자기 권세가 올라가도 내려가도, 남한테 천대받아도 대우받아도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 뜻대로 행할 때에 나는 그 진리로 하나 자라갔고 그만치 충만해졌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래도 이거 여러분들에게 거튼거튼해서 말하는 것이니까 돌아가 가지고 자꾸 외우고 읽고 하면 여게서 무한한 생명이 나옵니다. 이러는데 그저 더충 '이게 뭐인고?' 모를 것은 말을 했어. 했으니까 이걸 가지고 간추려 가지면 여게서 뭐 설교 백도 하고 천도 할 수가 있어.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요렇게 직선으로 종점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억하고 자꾸 거게서 실행을 하면 이제 깨달음이 자꾸 나옵니다. 실행 안 하면 안 돼요.
우리는 일생 동안 살면서 밥먹고 사는 거는 사는 게 아니고 죽는 것이오. 밥을 많이 먹었으면 많이 죽었어. 살아 남은 게 얼마 안 있어. 이 세상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거는 하루 사는 게 아니라 하루 죽는 것이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이제 죽음이 삶이 몇 시간이나 남았나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 얼마나 남았는가? 그러면 자꾸 사는 줄 알지만 그게 죽어가는 것인 줄 사람들이 어두워서 모르고 있어요. 그런 죽어가는 것이오. 우리가 진리로 한 진리로 두 진리로 이래 하는 것은 이거 죽어가는 게 아니라 점점 살아가는 것이요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거 죽음이 을 수가 없어요, 이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광고합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꼭 공과를 외우고 자기가 실천해야 돼요.
실천 안 하면 아무 소용 없어요. 실천하면 거게서 경험이 생기고 체험이 생깁니다. 또, 경험이 생긴다 말은 자기가 실행해 보면 이 실행한 사건에서 '하나님 말씀이 맞고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안 되면 징계도 주시고 축복도 해 주시는구나.' 알 수가 있어. 자기 몸으로 또 체험할 수가 있어요, 몸에서 깨달음이 와요.
하루 삼십 분 기도 잊지 맙시다.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을런지 우리가 오릅니다. 인간으로 감당 못 해요. 그러기 때문에 매일 삼십 분 기도를 꼭 계속해서 자기와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이 환난에서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는 꼭 잊어버리지 말고 하루 삼십 분 기도를 계속해야 됩니다.
그러고 부장 선생님들과 반사 선생님들은 자기에게 하나님이 붙여 주신 자녀는 자기 마음에 품어 가지고 길러야 돼요 어제는 주일학생으로서 성경 공부하러 온 학생이 이백십팔 명이라. 이빽십팔 명이 와서 공부를 해서 끝을 마쳤습니다.
이번에 공부 한 날이 며칠 했지요? 며칠 했어? 십팔 일? 십팔 일을 하루 이백여 명씩 모여 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이거 공부하는 것은 세세에 제일 일류 대학보다도 낫습니다. 이거는 후회가 없이 자꾸 나아. 이거는 안 하고 뭐 여매 서울대학 간다고, 서울대학 보내 보지? 그게 들어가면 벌써 교만하요. 나오면 교만해. 나중에 가서 언제 그게 쭈그러지는가? 나중에 죽을 때사 푹 쭈그러져.
어리석어요.